나가스에 에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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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스에 에이이치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이다. 1918년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근무했다. 이후 해군에 입대하여 레이테만 해전에 참전했으며, 마야, 무사시 등의 격침으로 생존했다. 종전 후에는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교토시의회 의원, 교토부의회 의원을 거쳐 1959년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민주사회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중의원 의원을 3선 했고 교토시 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79년 민사당 국회대책위원장을 거쳐 1989년 당 위원장이 되었으나, 선거 참패로 사임했다. 1994년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정3위가 서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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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스에 에이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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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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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 永末 英一 |
로마자 표기 | Nagasue Eiichi |
출생일 | 1918년 1월 2일 |
출생지 | 후쿠오카현 |
사망일 | 1994년 7월 10일 |
사망지 | 교토부 교토시 |
출신 학교 | 구제 도쿄제국대학 (현 도쿄 대학) |
칭호/훈장 | 정3위 훈1등 욱일대수장 |
정치 경력 | |
전직 | 교토부의회 의원 |
소속 정당 | 일본사회당 사회당 우파 일본사회당 민사당 |
국회의원 (중의원) | 선거구: 구 교토 1구 당선 횟수: 10회 임기: 1963년 11월 21일 - 1971년 2월 7일, 1972년 12월 10일 - 1993년 6월 18일 |
국회의원 (참의원) | 선거구: 교토부 지방구 당선 횟수: 1회 임기: 1959년 6월 3일 - 1963년 11월 2일 |
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 | 직책: 제6대 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 임기: 1989년 2월 25일 - 1990년 4월 26일 |
2. 생애
1918년 1월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났다.[1] 구제 제3고등학교 문과 갑류를 거쳐, 1941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2][3] 졸업 후 남만주철도에 근무하다가 해군 단기 현역 주계과 사관으로 임관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레이테만 전투 등 치열한 전투에서 여러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겼으며,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의 대함거포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이어졌다.
전후에는 정치인의 길을 걸어 교토시의회 의원, 교토부의회 의원을 거쳐 1959년 일본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사회당 소속이었으나, 1960년 민주사회당(민사당) 창당에 참여하여 이후 민사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1963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유학하기도 했다.[3]
1963년부터 일본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당선되었고, 민사당 내에서 국회대책위원장, 부위원장 등을 거쳐 1989년에는 당 위원장에 올랐다. 그는 사공민 노선 (사회당-공명당-민사당 연립 노선)을 지지하며 당내 노선 갈등을 겪기도 했다. 1990년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위원장에서 물러났으며, 1993년 정계를 은퇴했다.
1994년 7월 10일 심부전으로 교토시의 한 병원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정3위에 서훈되었다.
2. 1. 군 복무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에 근무한 후, 해군 단기 현역 주계과 사관(제8기)으로 임관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경순양함 이스즈의 서무 주임, 라바울 항공대 부속, 구축함 하루사메의 주계장을 거쳐 중순양함 마야의 주계장으로서 레이테만 전투에 참가했다.1944년 10월 23일, 레이테만 전투 중 마야가 팔라완 해협에서 미국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격침되었다. 나가스에 등 생존자 약 700명은 구축함 아키시모에 구조되어 전함 무사시로 옮겨탔다.[4] 그러나 다음 날인 10월 24일, 시부얀 해상에서 무사시 역시 미국 항공모함 함재기의 공습으로 침몰했다. 나가스에 등 마야 생존자들은 다시 구축함 시마카제에 구조되었고, 다음 날 사마르 해전에 참가했다.[5]
레이테만 전투 후에는 제2함대 부관으로 임명되어 전함 야마토에 승선했으며, 1944년 12월 초 일본으로 귀환했다.[6] 귀환 도중 야마토와 함께 항해하던 전함 곤고와 구축함 우라카제가 미국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격침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가스에는 전함의 거포에 의존하는 대함거포주의에 대해 "거포를 대함(大艦)이 싣고 있는 것이니 '거포대함주의(巨砲大艦主義)'라고 나는 말한다"라며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후 제2사가미노 항공대, 마이즈루 해병단 등에서 근무했으며, 해군 주계대위로 복무 중 종전을 맞이했다.
2. 2. 정치 활동
전후 정치인이 되어 교토시의회 의원과 교토부의회 의원을 지냈다. 1959년 6월 제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일본사회당 공천으로 교토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처음 당선되었다. 이후 사회당을 탈당하여 1960년 1월 민주사회당(민사당) 창당에 참여했다. 1963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유학하기도 했다.[3]같은 해 11월, 사망한 미즈타니 조자부로의 후계자로서 참의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교토 1구에서 출마하여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다. 이후 연속 3회 당선되었다. 1971년에 중의원 의원을 사직하고, 같은 해 2월의 교토 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자유민주당, 민사당 추천)했지만 낙선했다. 이듬해인 1972년 12월의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복귀했으며, 이후 1990년까지 연속 7회 당선했다.
1979년 5월, 민사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
1985년 4월, 사사키 료사쿠 당 위원장이 사임한 후 열린 당 대회에서는, 위원장 퇴임 후에도 당내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가스가 잇코 당 상임고문의 영향력을 장로정치라며 공공연히 비판했다. 이로 인해 가스가의 분노를 샀지만, 신임 위원장 쓰카모토 사부로에 의해 부위원장으로 승격되었다. 1988년 리크루트 사건에서의 쓰카모토 사부로 당 위원장의 오염 의혹과 관련하여, 다음 해인 1989년 2월, 쓰카모토 위원장이 사임하고 사사키 당 상임고문의 지명으로 위원장으로 승격했다.
당시 민사당 내에서는 자공민 노선을 지향하는 가스가, 쓰카모토, 후임 위원장이 되는 오우치 게이고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반면 나가스에는 사사키와 함께 사공민 노선 (사회당-공명당-민사당 연립 노선)을 지향하고 있어 당내에서는 항상 노선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1989년 7월의 제1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는, 사회당이 약진했지만, 민사당은 비개선 의원을 합쳐도 10석을 밑돌게 되는 참패를 했다. 나가스에가 추진한 사회당이나 공명당과의 선거 협력이나 사공민 연합 정권 협의로 인해 득표를 줄였다는 비판을 쓰카모토 등으로부터 받았다. 더욱이, 1990년 2월의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사회당이 20석 미만의 의석을 획득하는 대패한 책임을 지고 위원장을 사임했다. 1993년 6월, 정계에서 은퇴했다.
3. 사상 및 정치 노선
1960년 1월 민주사회당 결성에 참여했다.[3] 그는 당내에서 사사키 료사쿠 등과 함께 일본사회당, 공명당, 민사당이 협력하는 사공민 노선을 지향했다. 이는 당시 당내 주류였던 카스가 이치코, 츠카모토 사부로, 오오우치 케이고 등이 추구하던 자민당, 공명당, 민사당 중심의 자공민 노선과 대립하는 입장이었으며, 이로 인해 당내에서는 노선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1985년 4월 당 대회에서는 위원장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던 카스가 이치코 당 상임 고문의 이른바 "장로 지배"를 공공연히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카스가의 분노를 샀지만, 나가스에는 부위원장으로 승격했다.
1988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츠카모토 사부로 위원장이 사임하자, 1989년 2월 사사키 상임 고문의 지명으로 위원장에 올랐다. 위원장으로서 그는 사회당이나 공명당과의 선거 협력 및 사공민 연합 정권 구성을 추진했다. 그러나 1989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민사당 의석이 개선 전보다 줄어 10석을 밑돌게 되자, 츠카모토 등으로부터 그의 노선이 득표 감소의 원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1990년 2월 중의원 선거에서 민사당이 20석 미만으로 크게 패배하자 그 책임을 지고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한편, 해군 복무 시절 레이테 만 해전 등에서 여러 군함의 침몰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일본 해군의 대함거포주의에 대해 "거포를 대함이 싣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포대함주의'라고 나는 말한다"고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4. 평가
나가스에 에이이치는 태평양 전쟁 당시 해군 주계 장교로서 레이테 만 해전 등 여러 해전에 참전하며 중순양함 "마야", 전함 "무사시"의 침몰을 직접 겪는 등 참혹한 전쟁 경험을 했다[4][5][6].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당시 일본 해군의 주력이었던 대함거포주의에 대해 "거포를 대함이 싣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포대함주의'라고 나는 말한다"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계 입문 후 민주사회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당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85년 당 부위원장으로 선출될 당시, 당내 원로였던 카스가 이치코 상임고문의 영향력을 "장로 지배"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소신을 보이기도 했다[3]. 이는 카스가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나가스에는 당내 개혁을 추구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나가스에는 당시 민주사회당 내 주류였던 자민당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자공민 노선과는 달리, 일본사회당, 공명당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사공민 노선을 지향했다. 이는 사사키 료사쿠 전 위원장과 뜻을 같이하는 것이었으나, 츠카모토 사부로, 오오우치 케이고 등 자공민 노선을 주장하는 세력과의 당내 노선 대립은 끊이지 않았다.
1989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츠카모토 사부로 위원장이 사임하자, 나가스에는 후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사회당, 공명당과의 선거 협력 및 연립 정권 구상(사공민 연합 정권 협의)을 추진했으나, 같은 해 7월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사회당은 의석수가 크게 줄어드는 부진을 겪었다. 이에 대해 당내에서는 나가스에가 추진한 야당 간 선거 협력이 오히려 득표 감소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결국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사회당이 참패하자, 나가스에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993년 정계를 은퇴했다.
5.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종류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결과 |
---|---|---|---|---|---|---|---|
1959년 | 통상선거 | 참의원 의원 | 교토부 | 일본사회당 | 127,128 (22.16%) | 2위 | 당선 |
1963년 |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1구 | 민사당 | 58,079 (15%) | 3위 | 당선 |
1967년 |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1구 | 민사당 | 55,941 (12.9%) | 5위 | 당선 |
1969년 |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1구 | 민사당 | 69,122 (16.9%) | 2위 | 당선 |
1971년 | 시장 선거 | 교토시장 | 교토부 교토시 | 무소속 | 288,481 (47.96%) | 2위 | 낙선 |
1972년 |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1구 | 민사당 | 66,078 (15.2%) | 2위 | 당선 |
1976년 |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1구 | 민사당 | 50,396 (12.3%) | 5위 | 당선 |
1979년 |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1구 | 민사당 | 48,433 (13.2%) | 3위 | 당선 |
1980년 |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1구 | 민사당 | 56,261 (13.9%) | 3위 | 당선 |
1983년 |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1구 | 민사당 | 54,913 (15.9%) | 3위 | 당선 |
1986년 |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1구 | 민사당 | 46,160 (12.8%) | 5위 | 당선 |
1990년 | 총선거 | 중의원 의원 | 교토부 제1구 | 민사당 | 65,348 (15.7%) | 2위 | 당선 |
6. 수상
참조
[1]
서적
旧制高等学校物語 第3
財界評論社
1965
[2]
서적
東大人名録,第1部
1992
[3]
간행물
中央公論
1989-04
[4]
문서
終わりなき海軍
[5]
문서
終わりなき海軍
[6]
문서
終わりなき海軍
[7]
뉴스
秋の叙勲 勲三等以上および在外邦人、帰化邦人、在日外国人、外国人の受章者
読売新聞
199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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