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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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 사건은 1978년 3월 26일, 나리타 공항 개항에 반대하는 과격파 시위대가 관제탑을 점거하고 기물을 파괴한 사건이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으며, 신좌파 및 과격파 단체가 개입하여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사건으로 인해 공항 개항이 무기한 연기되었고, 일본 정부의 체면이 훼손되었으며, 168명이 체포되었다. 사건 이후, 관련자들은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피해자들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은 일본의 민주화 운동과 비교되기도 하며, 정치·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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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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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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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 사건 |
다른 명칭 | 관제탑 점거 투쟁 (나리타 공항 반대파) 3.26 투쟁 (나리타 공항 반대파) 나리타 공항 관제탑 난입 사건 (경찰 측) |
발생 위치 | 일본 지바현 나리타시 후루고메 |
발생 날짜 | 1978년 3월 26일 |
시작 시각 | 1978년 3월 25일 밤 |
종료 시각 | 1978년 3월 26일 저녁 |
사건 개요 | 신도쿄 국제공항의 관제탑을 점거하고, 관제 기기를 쇠지렛대로 파괴함. |
공격 수단 | 공항 지하 배수구를 이용하여 공항 관리동으로 이동 후 관제탑으로 돌입 및 점거 |
사용 무기 | 쇠지렛대 |
사용 병기 | 화염병 |
공격 인원 | 22명 (양동 및 별동대 제외) |
표적 | 신도쿄 국제공항 관제탑 |
사망자 | 1명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제4인터내셔널 일본지부) 활동가) |
부상자 | 다수 |
실종자 | 0명 |
피해자 | 신도쿄 국제공항 공단 |
손해 | 신도쿄 국제공항의 관제 기능이 마비되어 1978년 3월 30일 개항이 불가능해짐. 신도쿄 국제공항의 개항이 1978년 5월 20일로 지연됨. |
범인 | 15명 |
용의자 | 와타다 구메오, 마에다 미치히코, 사토 이치로, 하라 이사오 등 |
동기 | 신도쿄 국제공항의 개설을 저지하기 위함. |
관련 단체 |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제4인터내셔널 일본지부) 공산주의자 동맹 (전기파) 공산주의 노동자당 |
대응 | 활동가 168명 체포 신도쿄 국제공항의 안전 확보에 관한 긴급 처치법 제정 |
사과 | 일부 활동가로부터 관제관에게 코멘트 |
배상 | 4384만 엔 (이자를 포함하여 총 1억 300만 엔)을 배상금으로 법무성에 지불함. |
관할 | 신도쿄 국제공항 공단 |
방어 | 경찰청 경시청 (미이 오사무 경비국 참사관) 지바현 경찰 후쿠오카현 경찰 등 |
2. 사건의 배경
1976년, 후쿠다 다케오 내각은 "나리타 공항 개항을 내정의 최대 중요 과제로 삼겠다"고 표명했다. 이에 따라 1978년 3월 30일을 개항 예정일로 결정했다. 그러나 신좌파 극렬파들의 개항 저지 방해로 개항이 무기한 연기될 위기에 처했으며,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서방 세계의 신망까지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36]
과격파의 나리타 공항 개항 저지 시도는 일본 기동경찰대와 48시간 넘는 혈투로 이어졌지만, 결국 불법 철탑 제거 작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37]
당시 일본은 북한과 수교하지 않은 상태였고, 소련,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수교했지만 타이완과는 1972년 중일 수교 이후 외교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다.
비슷한 시기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이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이후였으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유사한 사회적 분위기를 보였다.
2. 1. 나리타 공항 문제와 산리즈카 투쟁
1962년, 일본 정부는 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의 수용 능력 포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국제공항 건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1] 이 과정에서 지바현 나리타시 산리즈카 지역이 신공항 부지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지역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2]산리즈카 투쟁은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투쟁이었다.[3] 초기에는 토지 수용에 대한 반대가 주된 쟁점이었으나, 점차 공항 건설 자체에 대한 반대로 확대되었다.[4] 이 과정에서 신좌파 및 과격파 단체들이 투쟁에 참여하면서 폭력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5]
1966년 사토 에이사쿠 내각은 나리타 신공항 건설을 공식 발표했고, 이는 산리즈카 투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6] 10·20 나리타 현지투쟁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학생운동 세력과 과격파 단체들의 개입은 투쟁의 폭력성을 심화시켰다.[7]
산리즈카 투쟁은 단순한 지역 주민들의 반대 운동을 넘어, 당시 일본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8] 이 투쟁은 러다이트 운동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급격한 산업화와 개발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9]
2. 2. 신좌파와 과격파의 개입
신좌파는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에 반대하며, 보다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다양한 정치 운동을 통칭한다. 이들은 기성 좌파의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시민 운동, 학생 운동, 반전 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1]일본에서 신좌파는 1960년대 안보 투쟁과 대학 분쟁을 거치면서 성장했다. 이들은 베트남 전쟁 반대, 미일안전보장조약 반대, 대학 민주화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운동에도 신좌파 세력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공항 건설을 국가 권력의 폭력적인 개발 독재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농민들과 연대하여 투쟁을 전개했다.[2]
과격파는 신좌파 중에서도 더욱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분파를 의미한다. 이들은 무장 투쟁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리타 공항 반대 운동에서 과격파는 화염병, 돌멩이, 죽창 등을 사용하여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으며, 관제탑 점거와 같은 과격한 행동을 주도했다.[3]
신좌파와 과격파의 개입은 산리즈카 투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이들은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반체제 투쟁으로 확대시키고, 국가 권력에 대한 정면 도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의 과격한 투쟁 방식은 일반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고, 공안 당국의 탄압을 강화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4]
3. 사건의 경위
1976년 후쿠다 다케오 내각이 성립되면서 나리타 공항 개항을 주요 과제로 내세웠고, 1978년 3월 30일을 개항 예정일로 정했다. 이에 반대하는 신좌익 과격파들은 개항 저지를 목표로 격렬한 시위를 계획했다. 특히 제4 인터는 "공항 포위·돌입·점거"를 통해 개항을 막고 "후쿠다 정부 타도"를 외치며, 다른 과격파들과 연대하여 투쟁을 강화했다.[36][37]
1977년 5월, 이와야마 대철탑 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과격파와 기동대가 충돌하여 시위자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8 투쟁)[36][37] 이듬해 2월에는 시바야마 정요코보리 지구에 건설된 "요코보리 요새"에서 과격파들이 농성을 벌였다.[36][37]
공항은 과격파의 침입을 막기 위해 3미터 높이의 펜스와 9개의 게이트로 엄중히 경비되었고, 1만 4천 명의 기동대와 신도쿄 국제공항 공단(공항 공단)의 경비원이 배치되었다.[36][37]
제4 인터는 기동대의 주력을 공항 밖으로 분산시키고, 지하 배수구를 통해 공항 부지에 잠입하여 관제탑을 점거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 작전에는 공산주의자 동맹 전깃파(아라파)와 공산주의 노동자당도 참여했다. 이들은 헬멧 색깔 때문에 "적헬 삼파"라고 불렸다.
3월 25일 밤, "적헬 삼파"에서 선발된 22명의 행동대가 맨홀을 통해 공항 내 배수구로 침입을 시도했으나, 기동대에 발각되어 7명이 들어가지 못하고 체포되거나 도주했다. 나머지 15명은 지하에서 잠복을 계속했다.[2][3]
3월 26일 아침, 행동대장 마에다는 동료들에게 "작전 결행"을 알렸다. 같은 날 오전 9시 30분, 구 시바야마 정립 히시다 초등학교에서 '개항 저지 결전·공항 포위 대행동 총궐기 집회'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3개 집단으로 나뉘어 행진했다.
오후 1시 5분경, 지하에 잠복해 있던 행동대가 게이세이 나리타 공항역(현 히가시 나리타역) 근처 배수구에서 나와 관제탑을 향해 달려갔다. 경찰관들이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행동대는 관리동 부지 내로 들어가 문을 닫고 화염병을 던져 저지했다.
같은 시각, 관리동 현관 앞은 제9게이트 부대의 트럭 화재와 소화 작업으로 혼란스러웠다. 행동대는 이 틈을 타 관리동으로 침입, 엘리베이터를 타고 관제실로 향했다. 10명이 관제실로 향하는 동안, 5명은 1층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시간을 벌었으나 제압당했다.
관제탑 1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는 잠긴 문이 있었고, 항공 교통 관제사 5명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었다. 행동대는 화염병과 페인트 양동이를 던지며 저항했고, 관제사들은 옥상으로 탈출했다.
오후 1시 20분, 행동대는 14층 마이크로 통신실의 기기를 파괴하고, 베란다를 점거하여 적기를 내걸었다. 6명은 파라볼라 안테나 철골을 타고 올라가 16층 테라스에 도착했다.
오후 1시 22분, 16층에 도착한 행동대는 관제실 창문을 빠루로 깨고 침입, 관제실 내 모든 기기를 파괴했다. 이로 인해 항공 교통 관제 및 비행 계획 전달 무선 설비 등이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행동대는 파괴 행위를 멈추라는 공항 관계자의 전화를 조롱하고, 서류를 창밖으로 뿌리며, 보도 헬리콥터에 V 사인을 보였다. 또한 관제탑 창문에 낫과 망치 마크나 당명, 슬로건을 그렸다.
그 사이 관제사들은 헬리콥터로 옥상에서 탈출했고, 행동대는 인질을 잡지 말라는 지시에 따라 이들을 놓아주었다.
오후 1시 40분경, 제8 게이트 부대도 공항에 돌입, 화염병이 던져지고 경찰이 권총을 겨누는 등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3. 1. 사건 당일까지의 움직임
1976년 후쿠다 다케오 내각이 성립되면서 "내정의 최중요 과제로서 나리타 공항 개항에 임하겠다"고 표명했고, 1977년 11월에는 개항 예정일이 1978년 3월 30일로 결정되었다.[36]이에 반대 동맹과 지원 그룹은 "개항 절대 저지"를 내걸고 정부에 대한 대결 자세를 보였다. 지원 그룹 중 신좌익 당파인 제4 인터내셔널은 "공항 포위·돌입·점거"를 통한 개항 저지 계획을 확립하고 "후쿠다 정부 타도"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들은 "산리즈카를 투쟁하는 청년 학생 공투"를 결성하고, 공산주의 노동자당의 집단(프로청동)은 "산리즈카를 투쟁하는 청년 선봉대", 공산주의자 동맹 전기파(아라파)는 "노동공투(전국 노동자 공투 회의)"를 투입하여 "1978년 3월 30일 개항 저지"를 목표로 활동을 강화했다.
1977년 5월 6일 "이와야마 대철탑 발췌 철거"에 대한 항의로 공항 구 제5 게이트 주변에서 공항 반대파와 기동대가 대규모로 충돌한 5월 8일 "5.8 투쟁"과 다음 해 2월 시바야마 정요코보리 지구의 B 활주로 남단 접근 구역 예정지에 항공 방해를 목적으로 당시 금액 1억 엔을 들여 건설한 "요코보리 요새"에서의 농성전이 있었다.
공항에서는 과격파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이 3미터의 넷 펜스와 9곳의 게이트로 엄중하게 경비하고 있었으며, 전국에서 동원된 1만 4천 명의 기동대 및 신도쿄 국제공항 공단이 배치한 경비원이 경비를 담당했다.
제4 인터의 산리즈카 현지 투쟁단 지도 간부 중 한 명이었던 와타다 쿠메오는 기동대의 주력을 공항 부지 밖의 "요새전" 등에 분산시키고, 공항 각처에서의 게릴라 및 대중적인 공항 포위·돌입 투쟁과 연동하여 지하 배수구를 통해 공항 부지에 잠입, 관리동에 부속된 관제탑을 점거하는 작전을 입안했다.
1968년 제1차 나리타 데모 사건 당시, 반대 동맹 농민 2명이 공항 설계도를 훔쳐 배수구의 위치를 파악한 경험을 바탕으로 "관제탑 점거" 아이디어가 나왔다.[1]
제4 인터가 입안한 이 작전에 공산주의자 동맹 전깃파(아라파)와 공산주의 노동자당이 호응하여, 삼파 공동 행동으로 공항 돌입이 준비되었다. 이 삼파는 헬멧이 모두 빨간색이었기 때문에 "적헬 삼파"라고도 불렸다.
3월 25일 밤, "적헬 삼파"에서 선발된 마에다 미치히코를 행동대장으로 하는 22명 편성의 행동대가 출발했다. 이들은 헬리콥터, 감시탑의 서치라이트, 기동대의 순찰 및 검문을 피해 2기 공사 지구의 맨홀에서 공항 내부 배수구로 침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동대에 발각되어 7명이 들어가지 못하고, 지하 잠복에 성공한 행동대에게 "예정대로 속행"이라는 무선 지시가 내려졌지만, 경비 진영은 이를 도청하고도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행동대는 트랜시버를 파괴했기 때문에 이 지시를 받지 못했다. 배수구 침입에 성공한 15명은 공항 지하에서 잠복을 계속했다.[2][3]
같은 날, 요코보리 요새에서는 애드벌룬 부양, 철탑 구축 등의 도발이 이루어졌다.
3월 26일 아침, 행동대장 마에다는 동료들에게 "작전 결행"을 알렸다. 같은 날 오전 9시 30분, 구 시바야마 정립 히시다 초등학교에서 '붉은 헬멧 삼파'나 노란 헬멧을 쓴 부락해방동맹 청년 부대 약 1,000명 등을 중심으로 '개항 저지 결전·공항 포위 대행동 총궐기 집회'가 개최되었다(참가자 4,000명).
같은 날 정오부터 반대 동맹 주최 집회가 산리츠카 제1공원에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신좌익 당파 등으로부터 '분열 집회'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반대 동맹 간부나 부락해방동맹 중앙 통제 위원장 등은 비판을 무시하고 '공항 돌입 총궐기 집회'에 참가했다. 이때 대표 토무라는 '산리즈카의 싸움은 이제 투쟁이 아니라 전투이다'라고 연설했다.[5]
이와는 별개로, 전날부터 다시 '요코보리 요새'에 틀어박혀 기동대와의 공방을 시작하는 부대도 있었다.
3. 2. 사건 당일의 전개
1976년 후쿠다 다케오 내각이 성립되면서 나리타 공항 개항을 주요 과제로 내세웠고, 1978년 3월 30일을 개항 예정일로 정했다. 이에 반대하는 신좌익 과격파들은 개항 저지를 목표로 격렬한 시위를 계획했다. 특히 제4 인터는 "공항 포위·돌입·점거"를 통해 개항을 막고 "후쿠다 정부 타도"를 외치며, 다른 과격파들과 연대하여 투쟁을 강화했다.[36][37]1977년 5월, 이와야마 대철탑 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과격파와 기동대가 충돌하여 시위자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8 투쟁)[36][37] 이듬해 2월에는 시바야마 정요코보리 지구에 건설된 "요코보리 요새"에서 과격파들이 농성을 벌였다.[36][37]
공항은 과격파의 침입을 막기 위해 3미터 높이의 펜스와 9개의 게이트로 엄중히 경비되었고, 1만 4천 명의 기동대와 신도쿄 국제공항 공단(공항 공단)의 경비원이 배치되었다.[36][37]
제4 인터는 기동대의 주력을 공항 밖으로 분산시키고, 지하 배수구를 통해 공항 부지에 잠입하여 관제탑을 점거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 작전에는 공산주의자 동맹 전깃파(아라파)와 공산주의 노동자당도 참여했다. 이들은 헬멧 색깔 때문에 "적헬 삼파"라고 불렸다.
3월 25일 밤, "적헬 삼파"에서 선발된 22명의 행동대가 맨홀을 통해 공항 내 배수구로 침입을 시도했으나, 기동대에 발각되어 7명이 들어가지 못하고 체포되거나 도주했다. 나머지 15명은 지하에서 잠복을 계속했다.[2][3]
3월 26일 아침, 행동대장 마에다는 동료들에게 "작전 결행"을 알렸다. 같은 날 오전 9시 30분, 구 시바야마 정립 히시다 초등학교에서 '개항 저지 결전·공항 포위 대행동 총궐기 집회'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3개 집단으로 나뉘어 행진했다.
오후 1시 5분경, 지하에 잠복해 있던 행동대가 게이세이 나리타 공항역(현 히가시 나리타역) 근처 배수구에서 나와 관제탑을 향해 달려갔다. 경찰관들이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행동대는 관리동 부지 내로 들어가 문을 닫고 화염병을 던져 저지했다.
같은 시각, 관리동 현관 앞은 제9게이트 부대의 트럭 화재와 소화 작업으로 혼란스러웠다. 행동대는 이 틈을 타 관리동으로 침입, 엘리베이터를 타고 관제실로 향했다. 10명이 관제실로 향하는 동안, 5명은 1층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시간을 벌었으나 제압당했다.
관제탑 1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는 잠긴 문이 있었고, 항공 교통 관제사 5명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었다. 행동대는 화염병과 페인트 양동이를 던지며 저항했고, 관제사들은 옥상으로 탈출했다.
오후 1시 20분, 행동대는 14층 마이크로 통신실의 기기를 파괴하고, 베란다를 점거하여 적기를 내걸었다. 6명은 파라볼라 안테나 철골을 타고 올라가 16층 테라스에 도착했다.
오후 1시 22분, 16층에 도착한 행동대는 관제실 창문을 빠루로 깨고 침입, 관제실 내 모든 기기를 파괴했다. 이로 인해 항공 교통 관제 및 비행 계획 전달 무선 설비 등이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행동대는 파괴 행위를 멈추라는 공항 관계자의 전화를 조롱하고, 서류를 창밖으로 뿌리며, 보도 헬리콥터에 V 사인을 보였다. 또한 관제탑 창문에 낫과 망치 마크나 당명, 슬로건을 그렸다.
그 사이 관제사들은 헬리콥터로 옥상에서 탈출했고, 행동대는 인질을 잡지 말라는 지시에 따라 이들을 놓아주었다.
오후 1시 40분경, 제8 게이트 부대도 공항에 돌입, 화염병이 던져지고 경찰이 권총을 겨누는 등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3. 3. 사건의 결과
후쿠다 다케오 내각이 "내정의 최대 중요 과제로서 나리타 공항 개항에 임하겠다."라고 표명하면서, 1978년 3월 30일로 예정되었던 개항일은 극렬파들의 방해로 무기한 연기될 위기에 처했다.[36] 이로 인해 일본은 국제적인 신망을 잃을 수도 있었다. 만약 개항이 취소되었다면 1980년 이후로 미루어졌을지도 모른다.[36] 과격파의 개항 저지 시도로 인해 일본 기동경찰대와 과격파 간의 혈투가 48시간 넘게 지속되었지만, 불법 철탑 제거 작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37]이 사건으로 일본 당국과 나리타 공항 개항 준비단은 차질 없이 개항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하네다 공항은 중화항공을 제외한 모든 외항사들이 나리타로 이전되었고, 나리타 개항 당시 최초로 착륙한 항공기는 대한항공이었다.
이 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태와도 직결되어 있으며, 당시 일본은 북한과 수교하지 않은 상태였다.
최종적으로 체포자는 총 168명에 달했다. 체포된 이들은 관제탑 돌입 부대, 공항 돌입 대부대, "요코보리 요새" 농성 부대, 공항 주변 각지의 게릴라 부대 등이었다.
제9게이트 부대의 트럭에 타고 있던 야마가타 대학생 신야마 유키오는 화상을 입고 체포되었으나, 1978년 6월 13일에 사망했다.[36]
정오부터 미사토카 제1공원에서 열린 반대 동맹 주최 결의 집회에는 12,000명이 모였다.[36] 오후 2시 이후 집회는 중단되었고, 참가자들은 데모 행진을 시작했다. 일부는 관제탑 점거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향해 기동대와 충돌하기도 했다.[36]
4. 사건의 영향
1976년 후쿠다 다케오 내각은 "내정의 최대 중요 과제로서 나리타 공항 개항에 임하겠다"라고 표명했고, 1977년 11월 발표에 따라 개항 예정일은 1978년 3월 30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극렬파들의 개항 저지 방해로 개항이 무기한 연기될 수도 있었고,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미국, 호주, 홍콩 등 서방 세계의 신망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36] 만약 개항이 취소되었다면 1980년 이후로 미루어졌을 수도 있다.
이 사건은 과격파가 나리타 공항 개항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일으켰으며, 일본 기동경찰대와 과격파 간의 혈투가 48시간 넘게 지속되었다. 결국 불법으로 설치된 철탑은 모두 제거되었다.[37]
이 사건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태가 지속되는 등, 당시 일본은 북한과 수교하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 소련,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수교했고, 타이완과는 1972년 중일 수교로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비슷한 시기 대한민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이전, 육영수 여사 저격 이후였으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일본판을 연상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4. 1. 정치·사회적 영향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정부와 사회 운동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공항 보안을 대폭 강화했다. 높이 3미터의 펜스를 설치하고, 9개의 게이트를 통해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으며, 전국에서 1만 4천 명의 기동대와 공항 공단 경비원을 배치했다.[4] 또한, "신도쿄 국제공항의 안전 확보에 관한 긴급 조치법"(현 나리타 국제공항의 안전 확보에 관한 긴급 조치법)을 제정하여 공항 안전 확보에 대한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15][16][17]
당시 후쿠다 다케오 내각은 이 사건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철저한 검거, 단속을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5][16][17] 가토 다케노리 국가공안위원장은 "유감스러운 한마디"라고 표현했고,[15] 가와카미 기이치 지바현 지사는 "정치 생명을 걸었는데..."라며 비통한 심정을 드러냈다.[15]
일본 사회 각계에서도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일본 사회당은 정부의 강경 대응을 비판하며 주민과의 대화를 촉구했고,[15] 일본 공산당은 과격파의 행동을 규탄하며 정부의 미온적 대처를 비판했다.[15]
이 사건은 신좌익 운동의 쇠퇴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건을 주도한 '적헬 삼파'는 제4 인터 등이 참여한 연합 세력이었지만,[6] 이후 신좌익 운동은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 사건은 일본 사회 운동 전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폭력 투쟁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고, 이후 일본 사회 운동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였다.
4. 2.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이 사건은 일본의 국제적 신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개항 지연으로 인해 한국, 미국, 호주, 홍콩 등 서방 세계에서의 신뢰를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36]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관련하여, 이 사건은 일본 정부의 대응을 지연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당시 일본은 북한과 수교하지 않았고, 소련,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수교했지만 타이완과는 1972년 중일 수교 이후 외교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다.
사건 당시 중화항공은 도쿄 국제공항(하네다)에 취항하는 유일한 국제선 항공사였다. 타이완은 중일 수교 이후 나리타 국제공항(나리타 공항) 이전 대상 항공사에 포함되기를 요청했으나, 중국 정부의 압력으로 제외되어 하네다에 잔류했다. 그러나 중화항공은 2002년 나리타 공항으로 이전했다.[36]
나리타 공항 개항 이전, 마지막 제3국 국적 외항사는 플라잉 타이거 라인이었고, 나리타 공항 첫 착륙 항공기는 대한항공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 피살 이전이었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유사한 상황이 일본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36]
4. 3. 한국과의 비교 및 연관성
이 사건은 비슷한 시기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과 여러 면에서 비교해 볼 수 있다. 특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일본판 5.18로 비유되기도 한다.[36]구분 |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 사건 |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 |
---|---|---|
유사점 | colspan="2" | | |
차이점 | 민주주의 체제 수립 | |
규모와 영향 |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 민주주의 체제 수립에 결정적인 영향 |
- 한국의 학생 운동:
- 강경대 사건 등 한국의 학생 운동은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 일본의 학생 운동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학생 운동은 더욱 격렬하고 조직적이었으며, 민주화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 사건과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은 각기 다른 목표와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과 사회 운동의 성격 등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5. 관련 논란과 비판
이 사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논란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제4 인터 등이 주도한 과격 시위 방식은 공항 건설 반대의 절박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당성 논란을 야기했다. 시위대는 개항 저지를 위해 관제탑 점거를 시도하고 지하 배수구를 통해 잠입하는 등 치밀한 작전을 계획했지만,[2][3] 공공 기물 파괴와 폭력 사용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기동대와 충돌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5.8 투쟁은 시위대의 폭력성 논란을 증폭시켰다.[4][5] 반면, 시위대 옹호 측은 국가의 일방적인 공항 건설 강행을 "국가 폭력"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저항은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6]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법 질서 파괴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에 나섰지만,[15][16][17] 이는 나리타 공항 건설 과정에서 지역 주민과의 소통 부족 및 일방적인 추진 방식에 대한 비판을 더욱 심화시켰다. 일본 사회당은 주민의 납득 없이 개항을 강행하려는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15] 일본 공산당은 과격파 행동을 규탄하면서도 정부의 관대한 태도를 비판하며 철저한 단속을 요구했다.[15]
신좌파 및 과격파의 투쟁 방식, 특히 1978년 3월 26일 발생한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사건은 주요 비판 대상이었다. 이들은 후쿠다 다케오 내각의 나리타 공항 개항 방침에 반대하며 "개항 절대 저지"를 내걸고 과격 투쟁을 전개했다. 관제탑 점거 당시 관제관들은 옥상으로 대피해 구조를 기다려야 했으며, 큰 공포를 느꼈다.[8] 이 사건으로 주모자와 행동대원들은 실형을 선고받았고, 수감자 중 한 명은 구금 반응으로 인한 노이로제 발작으로 자살했다.[20]
5. 1. 과격 시위의 정당성 논란
제4 인터 등이 주도한 과격한 시위 방식은,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이들의 절박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정당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시위대는 1978년 3월 30일로 예정된 개항을 저지하기 위해, "공항 포위·돌입·점거" 계획을 세우고 "후쿠다 다케오 정부 타도"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1] 이들은 관제탑 점거를 통해 개항을 막으려 했으며, 이를 위해 지하 배수구를 통해 공항 부지에 잠입하는 치밀한 작전을 계획했다.[2][3]
그러나 이러한 과격 시위 방식은, 공공 기물 파괴와 폭력 사용이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특히 기동대와의 충돌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5.8 투쟁은, 시위대의 폭력성에 대한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다.[4][5]
반면, 시위대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국가의 일방적인 공항 건설 강행을 "국가 폭력"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저항은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나리타 공항 건설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의사가 무시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된 점을 강조하며, 시위대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특히, 종군 경험자가 많은 반대 동맹이 작전의 전체 그림을 그렸다는 주장은, 시위대의 행동이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시사한다.[6]
5. 2. 일본 정부의 대응 비판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단순한 농민 반대 운동이 아닌, 법 질서 파괴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신도쿄 국제공항의 개항과 안전 확보 대책 요강"을 제정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섰다.[15][16][17] 국회에서도 여야 만장일치로 과격파의 행동을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했다.[15][16][17]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대응은, 나리타 공항 건설 과정에서 지역 주민과의 소통 부족과 일방적인 추진 방식에 대한 비판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 사회당은 "주민의 납득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항을 강행하려는 정부 측에 책임이 있다"라고 비판했다.[15]
일본 공산당은 과격파의 행동을 규탄하면서도, 정부가 이들에게 관대한 태도를 취해왔다고 비판하며, "단결 오두막" 철거와 "가짜 '좌익' 폭력 집단"의 철저한 단속을 요구했다.[15]
사건 이후, 정부는 "신도쿄 국제공항의 안전 확보에 관한 긴급 처치법"(현 나리타 국제공항의 안전 확보에 관한 긴급 조치법)을 제정하여 공안 강화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가 국내 과격파 대책에 주력하면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대처가 뒷전으로 밀렸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33][34]
5. 3. 신좌파, 과격파에 대한 비판
신좌파 및 과격파의 투쟁 방식은 여러 비판을 받았다. 특히 1978년 3월 26일 발생한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사건은 이러한 비판의 주요 사례로 거론된다.이 사건은 제4 인터를 비롯한 신좌익 단체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후쿠다 다케오 내각의 나리타 공항 개항 방침에 반대하며 "개항 절대 저지"를 내걸고 과격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공항 포위, 돌입, 점거를 계획하고, "요코보리 요새"를 건설하여 농성하는 등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과격 투쟁은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관제탑 점거 당시, 관제관들은 옥상으로 대피하여 구조를 기다려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큰 공포를 느꼈다.[8] 한 관제관은 이 사건을 "내 자식이 처참하게 맞고 있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했다.[8] 다른 관제관은 사건 이후에도 악몽에 시달렸으며, 그의 어머니는 사건의 충격으로 심근 경색을 겪고 사망했다.[19]
이 사건으로 인해 주모자와 행동대원들은 항공의 위험을 발생시키는 행위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수감자 중 한 명은 구금 반응으로 인한 노이로제 발작으로 자살하기도 했다.[20]
계획 입안자였던 와타다 쿠메오는 "농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라고 회고했지만,[21]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우리가 밖에서 뭔가 말할 것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21] 행동대장이었던 마에다 미치히코는 관제관들에게 "대단히 죄송하다"라고 사과하면서도, "나쁜 기억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23]
이러한 신좌파 및 과격파의 폭력적인 투쟁 방식은 목적 달성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반감을 일으키고, 관련된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6. 사건 관련자들의 이후 행보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사건 관련자들의 이후 행보는 크게 시위 참여자들과 피해자(관제사 등)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시위 참여자들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사건으로 체포된 시위 참가자들은 대부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주모자 와타다 쿠메오는 도쿄 대학 분쟁 당시 집행유예 기간을 합쳐 총 15년 형,[21] 행동대장 마에다 미치히코는 항공 위험죄 등으로 10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았다.[23] 다른 참가자들도 실형을 선고받았고, 이 중 하라 이사오는 석방 직후 구금 반응에 따른 노이로제 발작으로 자살했다.[20]
1990년 전원 출소 후, 나리타 국제공항 공단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를 받았다. 1995년 확정 판결로 4384만엔이 부과되었으나,[25] 시효 직전인 2005년 강제 집행이 시작되자 모금 운동을 통해 1.03억엔을 모아 완납했다.[26] 이는 일본 최초의 대규모 "크라우드 펀딩" 성공 사례로 꼽힌다.[24]
와타다 쿠메오는 아사히 신문 인터뷰에서 "농가를 지키고 싶었다"면서도 "이제 우리가 밖에서 뭔가 말할 것은 아니다"라고 회고했다.[21] 그는 2024년 5월 위암으로 사망했다.[22] 마에다 미치히코는 출판사 대표 이사를 역임하며 TBS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관제관들에게 사과하면서도 "나쁜 기억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23] 나카가와 켄이치도 아사히 신문 인터뷰에서 관제관들에게 사과했다.[21]
피해자들 (관제사 등)관제관들은 얇은 옷차림으로 옥상에 탈출, 낙하 방지책도 없는 삭풍 속에서 구조를 요청했으나 언론 헬리콥터는 취재를 우선시했다. 일부 관제관들은 고소공포증을 겪으며 체력 한계에 직면, 행동대와의 협상까지 고려했다. 오후 2시 40분경 언론 헬리콥터(벨 206)가 통신통을 투하, 구조를 제안했다. 피뢰침을 피해 호버링 접근, 자원한 관제관 1명이 탑승, 경찰에 보고했다. 30분 후 경시청 항공대 헬리콥터가 도착, 나머지 관제관들을 구조했다.[8]
사건 당일 비번이었던 관제관은 TV 중계를 보며 "내 자식이 처참하게 맞고 있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했다.[8]
습격 후에도 신도쿄 국제공항에서 근무한 관제관은 악몽을 꾸면서도 "사고를 일으키면 반대 운동이 재연된다"는 생각으로 직무에 임했다. 그는 정년 퇴직 후 마이니치 신문 인터뷰에서 "제대로 사과하는 노력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19]
다른 관제관의 어머니는 사건 2일 후 심근 경색으로 쓰러져 4년 후 사망했다. 그는 범인들에 대한 분노를 느꼈지만, 30년 후 "그들에게 분노를 계속 가져도 의미가 없다"라며 "보상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라고 회상했다.
6. 1. 시위 참여자들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사건으로 체포된 시위 참가자들은 대부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주모자 와타다 쿠메오는 도쿄 대학 분쟁 당시 집행유예 기간까지 합쳐져 총 15년 형을 선고받았다.[21] 행동대장 마에다 미치히코는 항공 위험죄 등으로 10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았다.[23] 다른 참가자들도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수형자 중 한 명인 하라 이사오는 석방 직후 구금 반응으로 인한 노이로제 발작으로 자살했다.[20]1990년까지 전원이 출소해 사회로 복귀했으나, 나리타 국제공항 공단으로부터 파괴된 기기 등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받았다. 1995년 확정 판결로 4,384만 엔이 부과되었으나 배상을 무시했다.[25] 시효 직전인 2005년, 급여 압류 등 강제 집행이 시작되자, 전 수형자들은 다시 모여 모금 운동을 시작,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 연인원 2천 명으로부터 1억 300만 엔을 모아 배상금을 완납했다.[26] 이는 일본 최초의 대규모 "크라우드 펀딩" 성공 사례로 꼽힌다.[24]
출소 후 와타다 쿠메오는 아사히 신문 인터뷰에서 "농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며 당시 심경을 회고했다. 그러나 나리타 공항에서 일하는 농가 자녀들을 보며 "이제 우리가 밖에서 뭔가 말할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21] 그는 2024년 5월 28일 위암으로 사망했다.[22] 마에다 미치히코는 출판사에서 근무하며 대표 이사까지 역임했다. 그는 TBS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관제관들에게 사과하면서도, "관제탑 (습격)을 한 결과, 정부는 이제 밀어붙일 수 없다고" 판단했고, "나쁜 기억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23] 행동대 최고령 활동가였던 나카가와 켄이치도 사건 40년 후, 아사히 신문 인터뷰에서 관제관들에게 사과했다.[21]
6. 2. 피해자들 (관제사 등)
습격을 받아 관제관들이 얇은 옷차림으로 탈출한 옥상은 낙하 방지책도 마련되지 않은 삭풍이 몰아치는 상태였다. 관제관들은 상공을 오가는 헬리콥터에게 소리치거나 "우리는 관제관이다"라고 적힌 운항표를 흔드는 등 구조를 요청했지만, 언론 헬리콥터는 구조보다 취재를 우선시하여 장시간 방치되었다. 체력의 한계가 다가오던 관제관들(일부는 고소공포증이 있었다)은 탑 내에 갇힌 행동대와의 협상도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오후 2시 40분경에 언론 헬리콥터 1기 (벨 206)가 통신통을 떨어뜨려 구조를 제안해 왔다. 해당 기체는 피뢰침을 피해 호버링으로 관제탑에 접근하여, 자원한 관제관 1명이 결사적인 각오로 뛰어 올라탔다. 이 충격으로 균형을 잃은 기체의 로터가 관제탑에 부딪힐 뻔했지만, 조종사의 솜씨로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고, 탑승한 관제관은 경찰 본부에 보고하고 구조 요청을 하러 갔다. 30분 후, 경시청 항공대의 대형 헬리콥터가 관제탑 상공에 도착하여, 나머지 관제관들도 안전 벨트로 끌어 올려 탈출했다[8]。사건 당일 비번이었던 관제관은, 관제탑이 습격받는 모습을 텔레비전 중계로 보았을 때의 심정을 "내 자식이 처참하게 맞고 있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했다[8]。
행동대의 습격을 받은 후에도 신도쿄 국제공항에서 근무한 항공 관제관 중 한 명은, 관제탑 옥상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여러 번 꿨지만, "사고를 일으키면 반대 운동이 재연된다"라며, 사건에서의 파괴 행위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생각을 가슴에 새기고 직무에 임했다. 정년 퇴직 후 2018년에 진행된 마이니치 신문의 취재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는 노력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라며 관제탑을 점거한 활동가들에 대한 심정을 이야기했다[19]。
다른 관제관의 어머니는, 사건 2일 후 심근 경색으로 쓰러져 4년 후에 사망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사건의 충격으로 생각한 해당 항공 관제관은, 범인들에 대한 분노를 느꼈지만, 30년의 세월을 거쳐 "그들에게 분노를 계속 가져도 의미가 없다"라며 마음을 정리했고, "그때 근무해 왔던 인간에게 책임의 일부가 있다" "보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일을 해왔다. 모티베이션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건 덕분일지도 모른다"라고 회상했다.
7. 결론 및 평가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교훈과 시사점을 남겼다.
내각총리대신 후쿠다 다케오는 이 사건에 대해 "매우 유감"이라고 표현했고, 개항 연기가 결정되면서 일본 정부의 체면은 실추되었다.[14] 가토 다케노리 국가공안위원장, 가와카미 기이치 지바현 지사 등도 비통한 심정을 드러냈다.
이 사건으로 공항 건설 관련 부채를 안고 있던 공항공단뿐 아니라, 항공 관련 사업자와 호텔 등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14] 일본국 정부는 이 사건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신도쿄 국제공항의 개항과 안전 확보 대책 요강"을 제정했다. 국회는 "신도쿄 국제공항의 안전 확보에 관한 긴급 처치법"을 의원입법으로 성립시켰다.[15][16][17]
일본 사회당은 이 사건의 책임을 주민의 동의를 얻지 않고 개항을 강행한 정부에 돌렸다. 일본 공산당은 과격파의 행동을 규탄하며, 단결 오두막 철거와 "트로츠키주의 폭력 집단"의 단속을 요구했다. 혁마르파는 이 사건을 "후쿠다를 몰락시키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했다. 중핵파는 처음에는 칭찬했지만, 이후에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의 『르 피가로』는 "공항 반대의 "전쟁""이라고 보도했고, 영국의 『가디언』는 일본의 상황을 조롱했다. 소련 국영 방송도 이 사건을 보도하며 "일본의 모든 진보 세력은 나리타 공항 건설에 반대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5월 20일 개항일에도 공항 반대파와 기동대 간의 충돌이 있었지만, 나리타 공항은 결국 개항했다. 이후에도 반대 운동은 계속되었고, 나리타 공항 문제 심포지엄・원탁 회의가 개최되기도 했다.
반대 동맹 아쓰타파 사무국장 이시게 히로미치는 이 사건이 국가의 힘에 제동을 거는 계기가 되었지만, 과도한 자신감으로 인해 역효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18]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다양한 심정을 드러냈다. 관제관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8] 일부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19] 다른 관제관의 어머니는 사건의 충격으로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건 가담자들은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출소 후에는 다양한 삶을 살았다. 계획 입안자 와타다 쿠메오는 농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고 회상하며, 반대파였던 농가 자녀가 나리타 공항에서 일하는 현실을 감안해 더 이상 외부에서 말할 것은 없다고 밝혔다.[21] 행동대장 마에다 미치히코는 관제관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면서도, 이 사건이 정부의 강경 정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23]
이 사건은 사회 운동의 폭력성과 한계, 그리고 대화와 타협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또한, 국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주민의 의견 수렴과 민주적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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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田空港365日
崙書房
2000
[29]
웹사이트
「ランプセントラルタワー」を2020年9月10日に供用開始します
https://www.naa.jp/j[...]
成田国際空港株式会社
2020-08-27
[30]
뉴스
成田空港の旧管制塔撤去へ 開港直前の1978年 過激派占拠事件があった
https://web.archive.[...]
産経新聞社
2016-04-28
[31]
웹사이트
成田空港、開港から空の安全を見守ってきた旧管制塔の内部を公開。2021年2月から撤去工事
https://travel.watch[...]
株式会社インプレス
2020-09-12
[32]
뉴스
成田闘争で過激派占拠、「経緯忘れない」…旧管制塔の解体始まる : 経済 : ニュース
https://www.yomiuri.[...]
2021-03-19
[33]
뉴스
【挿絵で振り返る『アキとカズ』】(38)「拉致」を吹っ飛ばした、成田空港「管制塔占拠事件」
https://www.sankei.c[...]
2014-12-22
[34]
웹사이트
拉致問題解決は国際協調で安倍首相の「心残り」(上)「ポスト安倍 何処へ行く日本」
https://japan-indept[...]
2020-09-08
[35]
웹사이트
1978.03.26 「大義の春(とき)」 三里塚(成田)空港への突入・占拠の瞬間
https://bund.jp/2268[...]
2012-03-10
[36]
뉴스
후꾸다 신망(信望) 잃어 공항(空港)개항연기(延期)관련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78-03-29
[37]
뉴스
공항철탑(空港鐵塔)의「전투(戰鬪)48시간」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78-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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