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주철도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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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는 1906년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남만주 지역의 철도 운영권을 기반으로 설립된 회사이다. 만철은 철도 운영 외에도 탄광 개발, 제철업, 항만, 전력 공급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며 "만철 왕국"으로 불릴 만큼 만주 지역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만철은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수립에 기여했으나, 1945년 종전과 함께 해체되었다. 만철이 남긴 인프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며, 다롄 등 연선 도시에서는 만철 관련 건축물을 현재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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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주철도주식회사 - [회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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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정보 | |
회사명 | 남만주철도주식회사 |
원어명 | 南満州鉄道株式会社 |
로마자 표기 | Minamimanshū Tetsudō kabushiki gaisha |
약칭 | 만철 (満鉄, Mǎntiě) |
종류 | 공공 주식회사 |
창립 | 1906년 11월 26일 |
해산 | 1945년 8월 (소련의 만주 침공 이후) |
본사 위치 (1931년 이후) | 신징, 만주국 |
이전 본사 위치 | 다이렌, 남만주철도 지대 |
창립자 | 일본 정부 |
소유주 | 일본 정부 (50%) |
주요 인물 | 고토 신페이 (초대 총재) |
회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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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설립 | 1906년 11월 26일 |
해체 | 1945년 9월 30일 (폐쇄), 1957년 (청산 완료) |
사업 | |
사업 내용 | 여객 철도 사업, 화물 철도 사업 외 |
재무 정보 | |
자본금 | 당 항목 "자본금" 절 참고 |
매출액 | 당 항목 "영업 실적" 절 참고 |
주요 주주 | 오쿠라 대신 50% |
자회사 | |
주요 자회사 | 화북교통 대련도시교통 만주항공 쇼와제강소 |
2. 역사
러일 전쟁 이후 1905년 일본 제국이 러시아 제국에 승리하고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중국 동청 철도 남부 지선(하얼빈-뤼순) 대부분이 일본에 넘어갔다. 일본은 메이지 천황의 인가를 받아 철도 운영과 주변 지역 개발을 위해 2억 엔 규모의 반민간 회사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약칭 ''만철'')를 설립했다.[4] 고다마 겐타로가 조직 위원회를 이끌었고, 이후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이었다. 고토 신페이가 초대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본사는 1907년 다롄으로 이전했다.[5]
만철의 초기 과제 중 하나는 철도 궤도를 표준궤로 변경하는 것이었다.[6] 1907년 일본과 러시아는 남만주철도와 러시아 극동 철도의 북쪽 노선 연결에 합의했다.[3] 1907년 말 만철은 9,000명의 일본인과 4,000명의 중국인을 고용했고, 1910년까지 각각 35,000명과 25,000명으로 증가했다.
만철은 푸순과 옌타이에 탄광을 건설하고 안둥, 잉커우, 다롄에 항만 시설을 건설하는 등 빠르게 확장했다. 각 역에 호텔과 창고를 건설하고, 일본 정착민을 위해 학교, 도서관, 병원 등을 건설했다. 대두 재배 농업 연구를 통해 경작지를 20년 만에 70% 증가시켰다.[7]
1916년부터 쇼와 제강소 등 여러 자회사를 분사했고,[8] 1917년 조선총독부 철도 관리를 이관받아 한국 철도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1925년 다시 철도국으로 반환했지만, 북선선은 1945년까지 만철이 통제했다.
1908년 1억 6,300만 엔이던 회사 자산은 1930년 10억 엔 이상으로 증가했다. 만철은 일본 최대 기업이자 가장 수익성이 높았으며, 1920년대 일본 정부 세수의 4분의 1 이상을 제공했다.[9] 만철 수입의 75% 이상은 화물 사업, 특히 대두 수출에서 발생했다.[9]
1931년 만주 사변으로 일본군은 중국 공격을 위장했고, 1932년 만주국 형성 후 만철은 철도 운송 시스템을 관리하는 정부 역할을 맡았다. 1938년까지 72개 자회사, 25개 도시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연간 17,515,000명의 승객을 수송했다.[13] 1930년과 1940년 사이 만주국 일본인 인구는 80만 명 증가했고, 만철은 현대적인 도시 계획을 갖추었다.[14]
1934년 만철은 아시아 특급을 개통하여 당시 아시아 최고 속도를 기록했다. 1936년 회사는 466대 기관차, 554대 객차, 8134대 화물 열차를 소유했다.[16]
1945년 소련의 만주 침공으로 철도 차량 등이 약탈되었고, 만철은 미국 점령 당국에 의해 해산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남만주철도 간선을 베이징-하얼빈 철도로 합병했다.
2. 1. 설립 배경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동청철도 남만주 지선(창춘-뤼순)의 철도 이권을 획득했다.[37] 이 조약에는 창춘 이남 동청철도 남지선 양도, 양국(일본, 러시아)의 만주 철도를 상공업 목적으로만 사용, 양국 간 철도 연결 업무에 대한 별도 조약 체결 등이 명시되었다.[40]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원로와 제1차 가쓰라 내각의 총리 가쓰라 다로는 전쟁으로 재정이 고갈된 일본이 막대한 비용이 드는 철도 경영을 감당할 수 있을지 우려했다.[37] 1905년 8월, 전쟁 중 외채 모집에 협력했던 미국 기업가 에드워드 헨리 해리먼이 방일하자 일본은 그를 환대했다.[37] 해리먼은 일본 정부에 1억 엔의 자금을 제공하는 대신, 대한제국과 남만주 철도를 연결하고, 철도 및 탄광 등에 대한 공동 출자와 경영 참여를 제안했다.[37][44][45] 일본은 철도를 제공하면 자금을 낼 필요가 없었고, 소유권은 미일 대등, 러일 또는 청일 간 전쟁 시 일본의 군사적 이용을 인정하는 조건이었다.[42]
일본 정부는 이 제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원로들은 승인, 가쓰라 총리는 남만주 철도 공동 경영안에 한해 찬성했다.[45][46] 9월 12일 가쓰라는 해리먼과 가쓰라-해리먼 협정 예비 협정 각서를 체결했다.[43][45] 그러나 포츠머스 회담에서 귀국한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은 해리먼 제안에 반대하며 각서 파기를 주장했다.[37][43][44][45] 남만주 철도 양도는 청나라의 동의를 전제로 하는데, 이 협정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지적했다.[37][47] 결국 10월 23일 각의에서 협정 파기가 결정되었고, 일본 정부는 미국 영사관을 통해 해리먼에게 각서 중지 메시지를 전달했다.[37][45]
10월 30일, 사평가에서 러일 양군은 철병 절차와 철도 선로 인도 순서에 관한 의정서에 조인했다. (사평가 협정)[49] 1905년 11월 6일 고무라는 포츠머스 조약 사항을 승인받기 위해 청나라로 가 11월 17일부터 베이징 회담을 가졌다.[48][50] 청나라는 포츠머스 회담에서 이루어진 러시아 이권의 일본 양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12월 22일 만주 선후 조약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다.[50]
고무라는 이 조약에서 남만주 철도에 일본인과 청나라 인 외에는 관여할 수 없도록 했다.[47] 조차 기간은 러시아의 동청 철도 조차 기간 36년에서 이미 조차한 3년을 제외한 33년으로 했다.[48] 또한 청나라는 창춘 등 16개 도시 개방을 약속했고, 밀약으로 남만주 철도 이익을 방해하는 병행선 부설을 하지 않기로 했다.[51] 일본은 철도 연선에 수비대를 배치할 권리(관동군)를 청나라에 인정받았다.[42]
1906년 3월,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만주에서 문호 개방을 실행하지 않고, 오히려 폐쇄적이라고 항의하며 주의를 촉구했다.[37][44][52] 4월 14일, 사이온지 긴모치 총리는 만주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비공식 여행을 떠났다.[54] 3주간의 여행 후, 사이온지는 만주 문제에 대해 회합을 열어 방침을 협의하기로 했다.[54]
2. 2. 만철 설립과 초기 경영 (1906년 ~ 1931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는 러일 전쟁 승리 후 1905년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일본 제국에 양도된 동청철도(중동철도) 남만주 지선(창춘-뤼순 간 철도)과 부속 사업을 경영하기 위해 1906년 11월에 설립된 반관반민의 국책 회사이다.[19] 전신은 러일 전쟁 당시 만주군의 '''야전철도관리부'''였다.[22] 만철은 푸순 탄광 및 옌타이 탄광도 경영했으며, 철도역 앞에 설정된 철도 부속지(만철 부속지)에서 도시 경영과 일반 행정(토목·교육·위생)을 담당하는 등 광범위한 사업을 전개했다.[19][22] 본사는 관동주다롄시(현 중화인민공화국랴오닝성 다롄시)에 설치되었다.[23]1906년 6월 7일, 메이지 39년 칙령 제142호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관한 건"이 공포되었다.[56][57] 이 칙령에 따라 7월 13일,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은 고다마 겐타로를 설립 위원장으로 하는 80명에 달하는 만철 설립 위원을 임명했다.[23][59]
5월 22일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만주 문제에 관한 협의회"에서 육군 참모 총장 고다마 겐타로는 적극적인 만주 경영론을 주장하며 이토 등과 대립했다.[52][64] 고다마는 만철을 단순한 철도 회사가 아니라, 만철 부속지에서의 징세권과 행정권마저 담당하는 식민 회사로 만들고자 했다.[55]
8월 1일, 외무·대장·체신 3대신 연명으로 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설립 명령서"가 하사되었다.[22][23] 제1회 주식 모집은 9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총 신청 주식 수는 1억 664만 3418주에 달했고, 신청 인원은 1만 1,467명이었다.[23] 이는 만철에 대한 당시의 큰 기대를 보여준다.
11월 1일, 만철의 설립이 체신 대신으로부터 인가되었다.[61] 11월 26일, 창립 총회가 개최되고, 초대 총재로 타이완 총독부민정 장관이었던 고토 신페이가 임명되었다.[41][47][61]
고토 신페이는 "만철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적극적인 경영을 펼쳤다.[41][64][62] 철도 궤도를 표준궤로 변경하고, 푸순 탄광 확장, 다롄 항 확장, 야마토 호텔 개업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62] 또한, 만주 일일 신문이 창간되었고, 만철 중앙 시험소와 전기 공원도 만들어졌다.[67]
만철은 단순한 철도 회사가 아니라, 교육, 위생, 학술 등 문화적 시설을 활용하여 식민지 통치를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41] 이를 위해 창업 초부터 만철 조사부가 조직되어 조사 활동을 중시했다.
초기 만철의 큰 문제는 레일 간격(궤간) 변경이었다. 원래 러시아가 부설한 궤간은 5피트(1,524 mm)의 광궤였으나, 러일 전쟁 중 3피트 6인치(1,067 mm)의 협궤로 개축되었다.[62][68] 만철은 이를 다시 4피트 8.5인치(1,435 mm)의 국제 표준 궤간으로 변경해야 했다.[62][68] 1908년 5월, 창춘-다롄 간 본선의 표준궤 전환이 완료되었다.[68][69]

안펑선(安奉線)은 1909년 8월부터 1911년 11월 1일까지 표준궤로의 개궤 공사가 완료되었다.[68]
1908년 11월, 광서제와 서태후가 잇따라 서거하고, 1909년 1월에는 위안스카이가 파면되는 등, 베이징 정계에 큰 변동이 있었다.[71] 1909년 9월 4일, 간도에 관한 일청 협약과 만주 5개 안건에 관한 일청 협약이 체결되었다.[71]
1909년 9월, 나카무라 요시코토 신임 총재는 나쓰메 소세키를 만주로 초청했다.[67] 소세키는 여행에서의 견문과 감상을 수필 「한만소감」 및 「만한곳곳」으로 기록했다.
메이지 시대에서 다이쇼 시대로 넘어가면서 번벌 정치 시대에서 정당 정치 시대로 접어들면서 만철 내부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75] 1913년 12월, 나카무라 코레키요 총재, 쿠니자와 신베에 부총재가 경질되고, 총재에는 노무라 류타로가, 부총재에는 이토 다이하치가 취임했다.[75][76]
1918년 하라 다카시 내각 성립 후, 1919년 4월, 노무라 류타로가 다시 사장으로 기용되고, 부사장에 나카니시 세이이치가 기용되었다.[77][82] 1920년, 만철 의혹 사건이 발생했다.[77][83]
1927년에는 사원회가 결성되었다.[84]
2. 3. 만주사변과 만주국 시대 (1931년 ~ 1945년)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만철은 큰 변화를 겪었다. 만주사변 당시 관동군은 만철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 소행으로 발표하며 만주 점령 작전을 개시했다.[103] 만철은 군사 작전에 협력하여 장갑 열차를 운행하는 등 군사 철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24]만주국 성립 후, 만주국 내 국유철도 운영은 만철에 위탁되었다.[19] 1933년 2월, 만주국 관할 철도는 만철이 제공하는 차관의 담보 형태로 위탁 경영이 이루어졌고, 3월부터 펑톈시(현 선양시)에 철로총국이 설치되었다.[24] 만철 본사 내에는 철도건설국이 설치되어 신규 철도 건설 권한도 부여받았다.[24]
1935년에는 북만철도 매각 협정이 성립되어, 만주국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북만철도(구 중동철도)를 접수했다.[19] 만철은 접수된 철도의 궤간을 표준궤로 변경하는 공사를 신속하게 완료하여 기술력을 과시했다.[126] 1934년에는 다롄-신징(창춘) 간 특급 '아시아'를 개통하여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정규 열차로 기록되었다.[127]
만주국 경제 개발에도 만철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37년 만주중공업개발(만업) 설립으로 만철의 중공업 부문은 만업으로 이관되었지만,[28] 만철은 만몽개척단 사업과 관련하여 이주지 확보를 위한 용지 매수 등에도 관여했다.
1936년 10월 1일, 만철은 철로총국, 철로건설국, 그리고 만철의 철도부를 모두 통합하여 봉천에 "철도총국"을 설치했다.[129] 이는 실질적인 경영 통합으로, 만주 내 철도를 통괄하는 대사업자로서 군림함을 의미했다.
1940년 만철의 자본금은 14억 엔으로 증자되었다.[131]
그러나 전시 체제 하에서 만철은 억압적인 측면도 보였다. 만철 조사부 사건을 통해 만철 조사부 관계자들이 대거 검거되는 등 사상 통제가 강화되었다.[134]
2. 4. 종전과 만철 해체 (1945년)
1945년 8월 9일, 소비에트 연방(소련)은 만주 침공을 개시하여 만주와 북한으로 진격했다.[132] 관동군은 7월 이후 "근절 동원"을 통해 70만 명의 병력을 확보했지만, 장비와 숙련도가 모두 부족했다.[132] 또한, 관동군은 개척 농민을 포함한 200만 명에 가까운 재만 일본인을 안전하게 철수시킬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고, 심지어 민간인이 탑승한 열차를 버리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32]만철은 사원 출신으로 첫 총재가 된 야마자키 모토키의 지시 아래, 군대와 민간인의 철수 수송에 전력을 다했다.[132] 이러한 노력은 8월 15일 옥음방송 이후에도 계속되었다.[132] 8월 17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는 야마자키 총재에게 "만철의 모든 것은 총재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132] 8월 20일, 야마자키 총재는 "재만 일본인과 만주의 안녕 보전에 헌신", "수송 및 생산 기능 확보"를 만철 전 사원 40만 명(일본인 약 14만 명 포함)에게 훈시했다.[132] 관동군 해체 후에도 만철은 재류 일본인에게 큰 의지가 되었다.[132]
만철은 만주에 침공한 소련군에게 접수되었다. 만철이 보유한 여러 시설은 1945년 8월 27일에 발표된 중소 우호 동맹 조약에 의해 중화민국 정부와 소비에트 연방 정부의 합작에 의한 중국 창춘 철로로 이관되었다.[135] 그러나 9월 22일의 중국 창춘 철로 이사회에는 소련 측 임원은 부임했지만, 중국 측은 부임하지 못했다.[135] 이 상황을 본 야마자키 총재는 만철이 업무 관리에서 손을 떼는 것을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43명의 만철 사원을 주석 감찰 및 보좌로 급히 각 국에 파견했다.[135] 소련 측과 만철 측은 그 전후부터 인수인계 작업을 했으며, 9월 27일, 소련군은 22일자로 만철이 소멸되었음을 통고했다.[135] 9월 28일, 야마자키는 남만주 철도 신징 본부의 표찰을 떼어냈다.[132] 중국 측 임원이 창춘에 도착한 것은 10월에 들어서고 나서였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135] 1946년1월 15일, 소련군은 만주에서 철수를 시작했다.[135] 1월 21일, 소련 정부는 중화민국 정부에 만주에서 반출한 산업 시설은 전리품이라고 통고했다고 한다.[135]
그 후, 국공 내전으로 인해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고, 1955년에는 중국 정부로의 노선 인도가 완료되었다.
일본 국내의 거점 등은 1945년 9월 30일, GHQ가 발출한 "식민지 은행, 외국 은행 및 특별 전시 기관의 폐쇄"에 관한 각서에 근거하여 즉시 폐쇄(폐쇄 기관)가 이루어졌다.[136] 단, 만철 도쿄 지사의 재산 등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회사의 청산 결료(법인격 소멸)는 1957년4월 13일까지 늦춰졌다.
만철 사원은 총재 이하, 1945년 9월 30일자로 전원 해고되었다.[135] 그러나 실제로는 현지 철도 수송 인원과 기술자가 부족하여 야마자키 총재를 비롯한 옛 만철 사원의 대부분은 소련과 중화민국의 의뢰에 의해 현지에 남겨져 철도 운행 등의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135] 이것은 '류용(留用)'이라고 칭해졌으며, 야마자키 총재의 류용이 끝난 것은 1947년 8월, 일본 땅을 밟은 것은 같은 해 10월이었다.[135] 거의 모든 사원은 1948년 6월 4일을 기점으로 류용을 마쳤다.[135] 한편, 전시 만철 총재였던 오무라 타쿠이치는 1945년 11월, 중국 공산당 군의 게릴라에게 체포되어 폭행을 받은 후 옥사했다.
그러나 일부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도 계속되어 현지에서 다른 지역의 철도 건설에 동원되었다.[137] 천수 - 난주 간의 천란선 (현재의 농해선의 일부)이 그 성과의 하나이며, 천란선 건설에 종사한 사람들은 귀국 후 1953년에 '천수회'를 조직했다.
한편, 일본 국내에서는 1946년 (쇼와 21년), 미지급 퇴직 수당의 지급, 옛 사원의 취업 알선 등을 목적으로 '만철 사우 신생회'가 발족했다.[138] 그 후, 1954년 (쇼와 29년) 7월에 '재단법인 만철회'로 개조하여,[139] 퇴직 수당 지급과 함께 만철 사원 및 만주 관계 철수자의 원호 후생, 만철 자료 보유 등을 실시했다.[139] 만철회 회원은 최성기에 약 15,000명에 달했지만,[138] 2016년 (헤이세이 28년) 3월 말에 해산했다.[139]
3. 사업 내용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정부는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만철)에 조선철도 운영을 위탁하기도 했다. 1917년 7월 31일부터 조선총독부 소유의 전 노선이 만철의 위탁 경영 체제로 운영되었으나, 1925년 4월 1일 다시 총독부 산하의 철도국으로 환원되었다.[158] 또한, 만철은 함경선 및 함북선 구간에 대해 1933년 10월 1일부터 해방 전까지 영향력을 유지했다.[158]
만철은 철도 사업 외에도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러일 전쟁 중에 고토 신페이의 영향을 받은 고다마 겐타로가 헌책한 "만주 경영 개요"에는 "'''겉으로는 철도 경영의 가면을 쓰고, 안으로는 온갖 시설을 실행하는 데 있다'''"라고 되어 있듯이,[26] "온갖 시설"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 경영을 구체화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만철은 농산물 유통, 탄광 개발 (푸순 탄광 등), 제철업 (안산 제철소), 항만, 전력 공급, 목축, 호텔업 (야마토 호텔), 항공 회사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27] 철도 부속지의 일반 행정(토목, 교육, 위생 사업)을 전개하고 징세권도 행사하는 등, 한 기업을 넘어선 권한을 손에 넣어 남만주 지역의 거대한 거점이 되었다.[27] 이러한 영향력 때문에 "만철 왕국", "만철 콘체른"으로 불렸다.[27]
1907년 설치된 만철 조사부는 당시 일본 최고의 싱크탱크 중 하나였다.[29] 총무, 운수, 광업, 지방부와 함께 중요한 부서였으며, 경제 조사, 구관 조사, 러시아 조사 등을 수행했다.[29] 만철 공소에서는 비공식적인 정보 수집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30][31]
만주국 성립 후, 만주 경영 중심은 관동군으로 이동했지만, 만철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8] 1935년 마쓰오카 요스케가 만철 총재가 된 후 조사 부문이 강화되었고, 만주 이민 장려와 북부, 동부 노선 건설에 힘을 쏟았다.[128] 1936년 산업 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본격적인 중공업 개발이 시작되었고,[28] 1938년 만철은 쇼와제강소를 비롯한 중공업 부문을 만업에 제공했다.[28] 1937년 중일 전쟁 이후에는 화북 지역으로 확장된 일본군 점령 지역과의 일체화를 위해 노선 건설이 추진되었다.[128]
만철은 푸순과 옌타이에 탄광을 건설하고 안둥, 잉커우, 다롄에 항만 시설을 건설했다. 각 역에는 호텔과 창고를 건설하고, 일본 정착민을 위한 학교, 도서관, 병원 및 공공 시설을 건설했다. 만철 연구부는 대두 재배 개발에 대한 농업 연구를 시작했고, 경작지는 20년 만에 70% 증가했다.[7]
만철은 철도 부속지에 대한 독점적인 행정권을 행사하며, 대규모 근대 도시 계획을 추진했다. 상하수도, 전력, 가스 공급, 학교, 병원, 도서관 등 인프라 정비를 통해 만주 경영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3. 1. 철도 사업



만철은 창춘에서 뤼순까지의 주요 노선(만철 본선, 이후 연경선)을 운영했다. 이 노선은 원래 러시아 제국이 청나라와의 조약에 따라 중국 동청 철도의 남부 지선으로 건설했다.[2][3] 러일 전쟁 이후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 제국이 이 노선의 대부분을 통제하게 되었다.[2][3]
일본은 철도 운영과 노선 주변 개발을 위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를 설립했다.[4] 만철은 러시아가 건설한 궤도를 일본 궤도로 궤간 변경했다가, 다시 표준 궤도로 변경했다.[6] 이는 중국의 다른 철도와의 연결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1907년에는 일본과 러시아 당국이 남만주철도와 러시아 극동 철도를 연결하는 합의에 도달했다.[3]
만철은 푸순과 옌타이에 탄광을 건설하고, 안둥, 잉커우, 다롄에 항만 시설을 건설하는 등 시스템을 확장했다.[7] 각 역에는 호텔과 창고를 건설하고, 일본 정착민을 위한 시설도 건설했다.[7]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만철은 만주국의 철도 운송 시스템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13] 1934년에는 다롄에서 만주국 수도 신징까지 고속 열차인 "아시아 특급"을 개통했다.[13] "아시아 특급"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정규 열차였다.
1936년 10월 1일, 만철은 철로총국, 철로건설국, 그리고 만철의 철도부를 모두 통합하여 봉천에 "철도총국"을 설치하여 만주 내 철도를 통괄하게 되었다.[129]
1945년 소련의 만주 침공으로 만철은 해산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남만주철도 간선(연경선)의 북반부를 다른 철도 노선과 합병하여 현재의 베이징-하얼빈 철도를 형성했다.
만철이 운영했던 주요 노선은 다음과 같다.
노선명 | 구간 | 킬로미터 | 비고 |
---|---|---|---|
연경선 | 다롄 - 신징 | 701.4 | |
다롄 부두 - 사허커우 [화물] | 6.9 | ||
다롄 - 우치 [화물] | 2.9 | ||
안포선 | 펑톈–안둥 | 260.2 | |
푸순선 | 쑤자툰–푸순 | 52.9 | 전철화 |
에이코선 | 다스차오–잉커우 | 22.4 | |
옌타이 탄광선 | 옌타이–옌타이 탄광 | 15.6 | 화물 전용 |
푸토선 | 사허커우–다롄 부두 | 6.9 | 화물 전용 |
관스이선 | 난구앙링–다롄 간징쯔 부두 | 11.9 | 화물 전용 |
진조선 | 진저우–청쯔탄 | 102.1 | |
쿤유 연락선 | 훈허–위수타이 | 4.1 | 화물 전용 |
북조선 동선 | 투먼, 만주국–나남, 조선–웅기, 조선 | 158.5 | |
북조선 서선 | 상삼봉–나남 | 36.0 | |
뉴젠선 | 사허커우–루촨 부두 | 5.8 | 화물 전용 |
라신부두선 | 나진–나진 부두 | 3.0 | 화물 전용 |
옌지선 | 다롄–신징 | 701.4 | |
뤼순선 | 저우수이쯔–뤼순 | 50.8 | |
류슈툰선 | 다팡선–류슈툰 | 5.8 | |
조평선 | 동관–성평 | 11.5 | (조선총독부 철도 소유) |
동포선 | 청성–통포 | 15.6 | (조선총독부 철도 소유) |
유라선 | 웅기–나진 | 15.2 |
만철은 주요 특급 및 급행 열차를 운행했다.
- '''특급''' "'''아시아'''" 다롄 - 신징 - 하얼빈
- 급행 "'''하토'''" 다롄 - 신징
- 급행 "'''히카리'''"[142] 부산 - 신징
- 급행 "'''노조미'''"[143] 부산 - 신징
- 급행 "'''대륙'''"[144] 부산 - 펑톈 - 베이징
- 급행 "'''흥아'''"[145] 부산 - 펑톈 - 베이징
- 급행 "'''아사히'''"[146] 나진 - 신징
1934년 다롄-신징 간에 운행을 시작한 특급 "아시아"는 표정 속도 로, 당시 일본 국철의 특급 쓰바메보다 빨랐다.[127] 전 차량 냉방 장치를 완비한 세계 최초의 열차였다.[127]
3. 2. 광공업 및 기타 사업
''만철''은 단순한 철도 회사를 넘어, 일본의 만주 식민지 경영을 구체화하는 핵심 조직이었다. "겉으로는 철도 경영의 가면을 쓰고, 안으로는 온갖 시설을 실행한다"는 전략에 따라, 만철은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26]만철은 푸순 탄광, 옌타이 탄광 등 탄광 개발과 쇼와 제강소(안산 제철소)를 중심으로 한 제철업에 진출했다.[27][28] 이 외에도 항만, 전력 공급, 야마토 호텔 등 호텔업, 만주 항공 등 항공 회사까지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27] 철도 부속지의 행정, 토목, 교육, 위생 사업을 담당하고 징세권까지 행사하며, 남만주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만철 왕국", "만철 콘체른"으로 불렸다.[27]
1907년 4월에 설치된 만철 조사부는 당시 일본 최고의 싱크탱크 중 하나로, 경제 조사, 구관 조사, 러시아 조사 등을 수행했다.[29] 만철 공소에서는 비공식적인 정보 수집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30][31]
만주국 성립 후, 만주 경영의 중심은 관동군으로 이동했지만, 만철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8] 1935년 마쓰오카 요스케가 만철 총재가 된 후 조사 부문이 강화되었고, 만주 이민 장려와 북부, 동부 노선 건설에 힘을 쏟았다.[128]
1936년 산업 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본격적인 중공업 개발이 시작되었고, 기시 노부스케의 주도로 닛산 콘체른이 만주로 이전하여 만주중공업개발 (만업)이 설립되었다.[28] 1938년 3월, 만철은 쇼와 제강소를 비롯한 중공업 부문을 만업에 제공했다.[28]
만철은 연구 및 문화 사업에도 관여하여, 만철 위생 연구소, 만철 조사부, 만주 영화 협회 등을 운영했다. 또한, 만주 일일 신문, 만주 항공, 화북 교통, 화중 철도, 다이렌 도시 교통 등 다양한 관련 회사를 두었다.
다음은 만철의 주요 출자 지분 회사 목록이다(1937년 기준).[151]
회사명 | 주요 사업 |
---|---|
다이렌 기선 | 해운 |
닛만 창고 | 창고 |
국제 운수 | 운수 |
푸창 화공 | 화학 |
다이렌 도시 교통 | 도시 교통 |
잉커우 수도 교통 | 수도, 교통 |
만주 항공 | 항공 |
시케이 철로 | 철도 |
조선 철도 | 철도 |
진푸 철로 | 철도 |
쇼와 제강소 | 제철 |
만주 화학 공업 | 화학 |
만주 경금속 제조 | 경금속 제조 |
닛만 마그네슘 | 마그네슘 |
도와 자동차 공업 | 자동차 |
푸순 시멘트 | 시멘트 |
만주 석유 | 석유 |
닛폰 정밀 왁스 | 정밀 왁스 |
만주 소다 | 소다 |
도요 질소 공업 | 질소 |
만주 방적 | 방적 |
창광 유리 | 유리 |
만주 염업 | 염업 |
만주 대두 공업 | 대두 |
다이렌 요업 | 요업 |
다이렌 유지 공업 | 유지 |
다이렌 공업 | 공업 |
만몽 모직 | 모직 |
남만주 유리 | 유리 |
만주 제분 | 제분 |
동아 담배 | 담배 |
남만주 제당 | 제당 |
다이렌 제유 | 제유 |
선철 공동 판매 | 철도 공동 판매 |
다이렌 화재 해상 보험 | 보험 |
신징 거래소 신탁 | 거래소, 신탁 |
하얼빈 거래소 | 거래소 |
만주 축산 공업 | 축산 |
신징 도살 | 도축 |
만주 시장 | 시장 |
신징 시장 | 시장 |
푸순 시장 | 시장 |
안둥 시장 | 시장 |
진저우 시장 | 시장 |
만주 화약 판매 | 화약 |
만몽 냉장 | 냉장 |
흥중 공사 | 무역 |
다이렌 농사 | 농업 |
만주 개척 | 개척 |
선만 개척 | 개척 |
일불 실업 | 무역 |
동아 흥업 | 흥업 |
동아 권업 | 권업 |
만선 갱목 | 갱목 |
찰면 공사 | 면화 |
만주 임업 | 임업 |
만주 탄광 | 탄광 |
만주 채금 | 채광 |
산둥 광업 | 광업 |
만주 광업 개발 | 광업 개발 |
만주 연광 | 연광 |
남만 광업 | 광업 |
푸저우 광업 | 광업 |
다이만 채금 | 채광 |
카이핑 광무 | 광업 |
만주 전업 | 전력 |
남만주 가스 | 가스 |
한신 축항 | 항만 |
펑톈 공업 토지 | 공업 토지 |
동아 토목 기업 | 토목 |
하얼빈 토지 건물 | 토지, 건물 |
안산 부동산 신탁 | 부동산, 신탁 |
원산 해수욕 | 해수욕장 |
만주 전신 전화 | 전신, 전화 |
만주 홍보 협회 | 홍보 |
랴오둥 호텔 | 호텔 |
탕강쯔 온천 | 온천 |
덩잉거 | 광업 |
3. 3. 만철 부속지 경영
만철은 러시아로부터 물려받은 시스템을 놀라운 규모로 빠르게 확장하여 푸순과 옌타이에 탄광을 건설하고 안둥, 잉커우, 다롄에 항만 시설을 건설했다. 각 역에서 만철은 여행객을 위한 호텔과 상품을 위한 창고를 건설했다. 일본 정착민은 학교, 도서관, 병원 및 공공 시설 건설을 통해 장려되었다. 만철 연구부는 일본의 식민지 프로그램의 핵심이었으며, 대두 재배 개발에 대한 농업 연구를 시작했다. 경작지는 20년 만에 70% 증가했다.[7]만철은 철도 부속지에 대한 독점적인 행정권을 행사하며, 대규모 근대 도시 계획을 추진했다. 만철 부속지에서의 인프라 정비(상하수도, 전력, 가스 공급, 학교, 병원, 도서관 등)를 통해 만주 경영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만철은 최첨단 도시 계획을 자랑하며, 일본 자체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발전된 현대적인 하수도 시스템, 공원, 그리고 창의적인 현대 건축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만철의 엄청난 수익성, 군대 및 전체주의 국가 지도부와의 정치적 관계를 통해 재산을 압수하고 반대 및 반대를 억압하는 정치적 권력 때문에 가능했다.[14]
4. 조직
만철은 1907년 본사를 다롄에 설립하고, 철도 운영과 노선 주변 개발을 위해 방대한 조직을 갖추었다.[5] 주요 부서는 조사부, 총무부, 운수부, 광업부, 지방부 등이었다. 의사 결정은 이사회와 사원회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특히 1927년 결성된 사원회는 전 사원이 가입하여 정당의 개입에 대항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동조합과는 달랐다.[84]
만철의 조직은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번벌 정치에서 정당 정치 시대로 변화하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75] 1913년 제2대 총재 나카무라 코레키요와 부총재 구니자와 신베에가 경질되고, 입헌정우회 계열의 노무라 류타로가 총재로, 이토 다이하치가 부총재로 취임하면서 만철 간부 자리가 정당의 이권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75][76] 이는 창립 초기부터 만철을 이끌어온 사원들과의 갈등을 야기했다.[75]
1919년 하라 다카시 내각은 구니자와 이사장을 해임하고 다시 노무라 류타로를 사장으로, 나카니시 세이이치를 부사장으로 기용했다.[77][82] 1920년 나카니시는 모리 카쿠가 경영하는 타렌 탄광과 우치다 신야 소유의 기선을 시세보다 비싸게 구입하여 만철 의혹 사건을 일으켰다.[77][82][83] 이 사건은 제국 의회에서 추궁되었고, 나카니시는 배임죄로 고소되었으나, 도쿄 고등법원 항소심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77][83]
1936년 10월 1일, 만철은 봉천에 철도총국을 설치하여 만주 내 철도를 통괄하는 대사업자로 군림했다.[129] 이는 관동군의 의향을 꺾고 만주 철도 사업에 대한 간섭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129]
5. 역대 총재
홍콩 중앙 서원
오리건 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