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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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되블링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북서부에 위치한 구역으로, 도나우 강, 도나우 운하, 비엔나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면적의 상당 부분이 녹지이며, 포도원과 숲이 특징이다. 역사적으로 포도 재배가 경제의 중심이었으며, 현재는 카투스와 슐룸베르거와 같은 스파클링 와인 생산지로 유명하다. 되블링은 11개 지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린칭, 하일리겐슈타트, 누스도르프 등이 포함된다. 이 지역은 19세기부터 부유한 중산층과 상류층의 주거 지역으로 발전했으며, 베토벤, 엘리아스 카네티 등 저명한 인물들이 거주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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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블링 - 하일리겐슈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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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블링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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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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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이름 | Döbling |
별칭 | 19. Bezirk (19구) |
위치 | 오스트리아 빈 |
행정 | |
국가 | 오스트리아 |
도시 | 빈 |
행정 구역 종류 | 빈의 19번째 구 |
구청장 | 다니엘 레슈(ÖVP) |
제1 부구청장 | 로베르트 부츨(ÖVP) |
제2 부구청장 | 토마스 마더(SPÖ) |
구 의회 의석수 | 48 |
구 의회 정당별 의석수 | ÖVP 19, SPÖ 14, Grüne 8, NEOS 5, FPÖ 2 |
지리 | |
면적 | 24.90km² |
인구 | |
인구 (2016년 1월 1일) | 71,596명 |
인구 (2021년 1월 1일) | 73,861명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기타 정보 | |
우편 번호 | A-1190 |
지역 번호 | 19 |
주소 (구청) | Grinzinger Allee 6, A-1190 Wien |
웹사이트 | www.wien.gv.at/bezirke/doebling 되블링 공식 웹사이트 |
2. 지리
되블링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비엔나 숲의 동쪽 경사면에서 도나우 강과 도나우 운하에 이르는 지역을 아우른다. 이 지역은 비엔나 내에서도 녹지가 풍부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그린칭, 누스도르프, 지버링 등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포도원은 되블링의 대표적인 지리적 특징 중 하나이다. 구역 면적의 상당 부분이 비엔나 숲에 속하는 숲으로 덮여 있어 자연 친화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2. 1. 지형
되블링은 비엔나 북서부에 위치하며, 비엔나 숲에서 동쪽의 도나우 강과 도나우 운하까지 뻗어 있다. 도나우 강은 되블링과 플로리드스도르프 구역의 경계를 이루고, 도나우 운하는 브리기에나우 구역과의 경계를 형성한다. 남쪽으로는 귈텔 도로를 따라 알제르그룬트 구역과, 서쪽으로는 뷜링어 공원–하제나우어슈트라세–페터-요르단-슈트라세–슈타르크프리트가세–솜머하이덴베크 선을 따라 뵈링 구역과 접하며, 헤르날스 구역과도 짧은 경계를 이룬다. 북서쪽으로는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시와 경계를 이룬다.되블링 구역 면적의 약 32.6%가 도시 지역이며, 이 중 85.2%는 주거용으로 사용된다. 사업체 부지는 2.2%로 비엔나 다른 구역에 비해 낮은 편이다. 녹지 비율은 51.8%로 비엔나에서 다섯 번째로 높으며, 이는 비엔나 전체 평균(48.3%)보다 높다. 이 녹지의 상당 부분은 농업용 토지(14.9%)이며, 특히 그린칭, 누스도르프, 지버링, 노이슈티프트 암 발데, 잘만스도르프 주변의 포도원이 유명하여 와인 생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구역의 25.4%는 숲이며, 그 외 초원(5.3%), 작은 정원(2.7%), 공원(2.5%), 스포츠 및 레크리에이션 구역(0.9%) 등으로 구성된다. 나머지 면적 중 11.0%는 교통 시설, 4.6%는 수역이다.

비엔나 숲이 되블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여, 구역 내에는 숲이 우거진 언덕들이 많다. 이 언덕들은 대부분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와의 경계에 위치한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발 고도 542m의 헤르만스코겔이지만, 되블링의 상징적인 언덕은 전망대와 라디오 송신탑이 있는 칼렌베르크(484m)와 인근의 레오폴드베르크(427m)이다. 이 외에도 라이젠베르크, 라티스베르크, 포겔장베르크, 드라이마르크슈타인, 누스베르크 등의 언덕이 있다. 또한 빈 하일리겐슈타트의 호헤 바르테, 그린칭의 훙거베르크, 지베링의 하켄베르크 등 부분적으로 개발된 지역에도 언덕이 존재하여 빈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 많다.
2. 2. 수계
되블링 구역에는 수많은 시내가 발원하지만, 현재는 대부분 수로화되거나 파이프를 통해 지하로 유도되었다.원래 이 시내들은 비엔나 숲의 사암 지대에 유역 면적을 둔 발트바흐(Waldbach, 숲 시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도나우 운하로 흘러 들어갔다. 이 때문에 시내는 평소 수량의 몇 배로 불어나기도 했으며, 특히 크로텐바흐(Krottenbach)를 따라 파괴적인 홍수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크로텐바흐는 되블링에서 가장 중요한 시내였으며, 현재는 거의 완전히 파이프로 유도되었다. 빌로트슈트라세 연방 중등학교 뒤쪽 지역에서는 지버링(Sievering)을 통과하는 아르베스바흐(Arbesbach 또는 Erbsenbach) 시내가 합류하는데, 이 시내는 오버지버링까지 상류 구간이 여전히 개방되어 흐른다.
네셀바흐(Nesselbach)는 크라프펜발들(Krapfenwaldl) 지역에서 개방되어 흐르다가, 그린칭(Grinzing)에서 라이젠베르크바흐(Reisenbergbach) 시내와 지하에서 합류한다. 라이젠베르크바흐 시내는 그린칭 중심가 바로 전까지 개방되어 흐른다. 슈라이버바흐(Schreiberbach) 시내는 누스도르프(Nußdorf)까지, 발트바흐 시내는 칼렌베르거도르프(Kahlenbergerdorf)에서 거의 완전히 개방되어 흐른다.
원래 '코티지(Cottage)' 지역에서 발원하여 슈피텔라우(Spittelau)에서 도나우 운하로 흘러 들어갔던 되블링거 바흐(Döblinger Bach) 시내는 물길이 변경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2. 3. 구성 지역
되블링은 이전에 독립적인 자치구였던 지역들이 합쳐져 형성되었다. 현재 되블링은 11개의 지구(Bezirksteilede)로 나뉜다.지구명 (한국어) | 지구명 (독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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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칭 | Grinzing |
하이리겐슈타트 | Heiligenstadt |
요제프스도르프 | Josefsdorf |
칼렌베르거도르프 | Kahlenbergerdorf |
노이슈티프트 암 발데 | Neustift am Walde |
누스도르프 | Nußdorf |
오버되블링 | Oberdöbling |
잘만스도르프 | Salmannsdorf |
운터되블링 | Unterdöbling |
오버지페링 | Obersievering |
운터지페링 | Untersievering |
되블링은 1114년 문헌에 'de Teopilic'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 이름은 슬라브어로 '늪지 물' 또는 '늪지대'를 의미하는 '*topl'ika'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4] 다른 해석으로는 고대 슬라브어로 '따뜻한 시내'를 뜻하는 'Toplica'에서 왔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후 'Toblich', 'Töbling', 'Tepling' 등 다양한 표기로 기록되다가, 1890년에서 1892년 사이 구역이 형성될 때 당시 가장 큰 자치체였던 오버되블링의 이름을 따 '되블링'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3. 역사
이 지역은 약 5,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누스도르프-하일리겐슈타트 지역과 더불어 빈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 중 하나로 여겨진다. 레오폴츠베르크 언덕에는 요새화된 마을이 있어 주변 주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주민들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이 아닌 '도나우란디셰'(다뉴브 지역) 문화의 일원으로 추정되며, 약 천 년 후 일리리아인과 켈트족 등 인도유럽계 민족이 이주해 오면서 기존 주민들과 섞여 살게 되었다.
기원전 1세기 말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되블링 지역은 판노니아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 시대의 유적으로는 하일리겐슈타트의 ''리메스'' 요새 타워, 지페링의 미트라교 사원과 채석장 등이 발견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포도 재배는 로마인들이 오기 전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농업과 함께 주민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었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중세 시대를 거치며 운터되블링, 오버되블링, 하일리겐슈타트 등 오늘날 되블링을 구성하는 여러 마을이 형성되었다. 근대에는 여러 차례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흑사병과 같은 질병의 확산을 겪었으나, 18세기 후반부터는 귀족과 부유한 시민들의 별장 및 휴양지로 주목받으며 꾸준히 성장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의 수도원 해산 정책 등도 지역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에는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을 받았으나, 빈 회의 이후 여름 휴양지로서 인기가 높아지며 인구가 급증하고 기반 시설이 확충되었으며, 1892년에는 주변 마을들과 함께 빈에 편입되어 19번째 구가 되었다. 20세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오스트리아 내전, 나치 독일의 합병과 유대인 박해 등 격동의 시기를 거쳤다. 특히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주도로 카를 마르크스 호프와 같은 대규모 공공 주택이 건설되기도 했다. 전후에는 대규모 주택 건설과 함께 현대적인 도시 구역으로 발전해왔다.
3. 1. 고대
되블링 지역에는 약 5,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누스도르프-하일리겐슈타트와 더불어 빈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 중 하나로 추정된다. 레오폴츠베르크 언덕에는 요새화된 탑을 갖춘 마을이 있어, 주변 주민들이 위험할 때 피난처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주민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학계에서는 이들을 인도유럽어족이 아닌 "도나우란디셰"(다뉴브 지역) 문화의 일원으로 본다. 약 천 년 후, 일리리아인과 켈트족 등 인도유럽계 민족이 빈 지역으로 이주해 오면서 기존 주민들과 섞여 살게 되었다.
기원전 1세기 말, 빈 지역은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서기 9년부터는 판노니아 속주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의 되블링 지역에서는 여러 로마 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는 ''리메스''(국경 방벽)의 일부인 요새 타워가 발견되었고, 지페링에서는 미트라교 사원이 확인되었다. 또한 하일리겐슈타트 교회 발굴 과정에서 로마 시대 묘지가 드러났으며, 지페링에는 로마 시대의 큰 채석장과 함께 대규모 노동자 정착지가 존재했다.
당시 주민들의 주요 생계 수단은 포도 재배였으며, 이는 로마인들이 오기 전부터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 외에도 자급자족을 위한 농업이 이루어졌다.
3. 2. 중세
로마인들이 떠난 후, 되블링 지역의 마을들이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 지역 마을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2세기에 나타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날 되블링 지구를 이루는 Unterdöbling|운터되블링de, Oberdöbling|오버되블링de, Heiligenstadt, Nussdorf, Sievering|지페링de, Kahlenbergerdorf|칼렌베르거도르프de, Josefsdorf|요제프스도르프de, Salmannsdorf|잘만스도르프de, Neustift am Walde|노이슈티프트암발데de 등의 마을들이 점차 형성되었다.
이 외에도 과거에는 다른 정착지들이 존재했다. 13세기에는 하켄베르크(Hackenbergde) 남서쪽 경사면에 '클라이징(Chlaitzingde)' 또는 글란칭(Glanzingde)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으나, 1330년 기록에는 포도원만 언급되고 집은 언급되지 않았다. 하코퍼가세(Hackhofergassede)를 따라서는 '알테스 우르파르(Altes Urfarde)'라는 작은 한 줄짜리 마을이 있었다. 또한, 1200년경 헤르만스코겔(Hermannskogel)에는 '코겔브룬(Kogelbrunnde)'이라는 정착지가 있었으며, 1417년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되블링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점령과 약탈을 겪기도 했다. 특히 1683년에 일어난 제2차 빈 포위는 이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세 시대 되블링 지역은 언덕이 많고 숲이 우거져 귀족들의 사냥터로 이용되었으며, 시내와 마을 사이에 넓게 퍼져 있었다. 이러한 지형 조건은 많은 와인 생산자들을 끌어들여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귀족들이 만든 마을과 사냥 오두막, 그리고 빈의 상류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던 호이리게 와인 가든 등이 번성했다.
3. 3. 근대
되블링(Döbling)의 마을들은 근대 시기에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 1482년 헝가리의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군대가 비엔나를 포위 공격하면서 그의 군인들은 주변 마을들을 약탈했다. 1529년에는 오스만 제국 군대가 제1차 비엔나 포위 공격 중에 되블링의 마을들을 습격하여 많은 주민을 살해하고 노예로 끌고 갔다. 교회들은 약탈당했지만, 대부분의 마을은 파괴를 면했다. 30년 전쟁(1618년-1648년) 또한 와인 수출 감소와 세금 인상을 초래하여 주민들의 심각한 빈곤으로 이어졌다.
1679년에는 대규모 흑사병이 유행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1683년 여름에 시작된 제2차 비엔나 포위 공격 역시 큰 피해를 남겼다. 1683년 7월 13일, 오스만 제국의 선봉대였던 타타르족이 되블링 마을들을 습격하고 약탈했다. 비엔나의 해방은 같은 해 9월 12일, 폴란드의 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구원군이 비엔나 숲의 고지대인 칼렌베르크를 넘어 오스만 포위군의 후방을 공격한 칼렌베르크 전투에서 결정되었다.
1713년, 흑사병이 다시 비엔나를 덮쳤고, 되블링 지역에서는 특히 지버링(Sievering)과 그린칭(Grinzing) 마을의 피해가 컸다. 이러한 전쟁과 질병으로 인한 반복적인 파괴와 인명 손실은 오랫동안 지역 발전을 저해했지만, 18세기 후반부터는 꾸준한 성장이 시작되었다. 되블링의 언덕 지형과 넓은 숲은 귀족들의 사냥터로 인기가 있었고, 동시에 와인 재배자들을 끌어들였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부유한 비엔나 시민들이 이곳에 별장과 사냥 오두막을 지었고, 많은 사람들이 ''호이리게''(Heurige)라고 불리는 와인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교외 지역의 번영을 이끌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기존 마을들은 확장되었으며, 특히 오버되블링(Oberdöbling)은 귀족과 부유한 비엔나 시민들에게 매력적인 주거지가 되어 많은 이들이 이곳에 두 번째 집을 마련했다. 이는 쇤브룬궁과의 근접성 덕분에 발전했던 히칭(Hietzing)과 유사한 교외 발전의 양상이었다. 1765년부터 1786년 사이 오버되블링에는 5개의 새로운 거리가 생겨났고, 현재 구역 내에 4개의 사냥 오두막이 건설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의 수도원 해산 정책은 되블링 지역의 토지 소유권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칼렌베르크(Kahlenberg)의 카말돌리회, 오버되블링의 툴른(Tulln) 수녀원, 운터지버링(Untersievering)의 게이밍 수도원 등이 해산되면서 몰수된 자산은 누스도르프(Nußdorf)와 그린칭 교구를 설립하고 되블링 묘지를 조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요제프스도르프(Josephsdorf) 마을은 칼렌베르크의 카말돌리회 수도원이 해산된 자리에 세워졌다. 요제프 2세의 교구 개혁을 통해 오버되블링, 누스도르프, 노이슈티프트 암 발데(Neustift am Walde) 교구는 기존에 속해 있던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 교구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3. 4.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은 되블링 지역에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1805년 울름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은 빈으로 진격하며 되블링 마을을 약탈했다. 1809년에는 바이에른을 상대로 한 작전이 실패한 후 프랑스군이 다시 빈으로 진격했고, 이 과정에서 되블링 지역 사회는 또다시 약탈당했으며 주민들은 프랑스 군인들에게 식량을 제공해야만 했다.
빈 회의 이후, 되블링 지역에서는 1817년부터 1819년까지 정기적인 측량이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지적 공동체의 도입과 지역 간 경계를 확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안정화는 농촌 마을의 무역과 산업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되블링의 마을들은 빈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나들이 장소로 부상했는데, 특히 '호이리겐'이라 불리는 선술집과 누스도르프의 양조장은 빈과 그 주변 지역에서 많은 방문객을 끌어모았다.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 혁명 당시 되블링은 주요 사건의 중심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1848년 10월 20일, 이 지역은 제국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제국군은 누스도르프에서 도나우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하고 강 건너편을 포격하기도 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여름 휴양지로서 되블링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마을은 급격한 성장기를 맞았다. 늘어나는 주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많은 주거 건물이 건설되었고, 그 결과 불과 40년 만에 마을 인구가 거의 세 배로 증가했다. 이러한 성장은 인프라의 현대화로 이어져, 19세기 중반에는 되블링에 최초의 가스 램프가 설치되었으며, 1856년에는 되블링 가스 공장이 건설되어 지역에 가스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전 과정을 거쳐 되블링은 1892년 빈에 통합되었고,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서의 되블링이 설립되었다.
3. 5. 20세기 이후
1892년 1월 1일, 운터되블링, 오버되블링, 그린칭, 하일리겐슈타트, 누스도르프, 지베링, 칼렌베르거도르프, 요제프스도르프 등 주변 마을들이 통합되어 빈의 19번째 구인 되블링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당시 오버되블링의 인구가 다른 지역을 합친 것과 비슷했지만, 새로운 구의 이름은 되블링으로 정해졌다. 통합 이전인 1872년부터 되블링과 붸링 사이 지역에는 부유한 중산층과 상류층을 위한 우아한 주거 지역인 이른바 "비엔나 코티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반면, 하일리겐슈태터 슈트라세와 다뉴브 운하 사이 지역은 산업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기반 시설도 확충되었다. 1895년에는 되블링 지역 개울들을 정비하는 운하 공사가 완료되어, 개울 물은 더 이상 다뉴브 운하로 직접 흐르지 않고 지하의 주요 하수 집수관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로써 개울은 대부분 지표면에서 사라지고 하수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다. 1910년 제2차 비엔나 샘물 파이프라인이 완공되면서 대부분의 주택에 상수도가 연결되었고, 이전까지 우물이나 식수 트럭에 의존하던 식수 공급 방식이 개선되었다. 가스 공급은 1856년 영국의 ICGA 가스 공장을 통해 시작되었으나, 1911년 빈 시가 공급을 인수하면서 오버되블링의 가스 공장은 철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저렴하고 살기 좋은 주택 공급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당시 시정을 이끌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되블링을 포함한 빈 전역에 대규모 공공 임대주택(Gemeindebau|게마인데바우de) 건설을 추진했다. 1923년 쉐가르가세에 60가구 규모의 첫 시립 주거 건물이 들어섰고, 1930년까지 총 2,801가구의 시립 아파트가 건설되었다. 이 중 가장 크고 유명한 것은 하일리겐슈태터 슈트라세와 프란츠 요제프 철도 사이에 1.1km 길이에 걸쳐 건설된 카를 마르크스 호프였다. 사회민주당은 주택 건설 외에도 다양한 사회 복지 정책을 통해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1934년 오스트리아 내전 당시 되블링은 격렬한 전투의 현장이 되었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 호프는 정부군 포병의 집중 포격을 받았고, 다른 시립 건물들도 군대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내전이 사회민주당의 패배로 끝난 후, 사회민주당은 불법화되었고 사회민주당 소속의 되블링 구청장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한편,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연방 정부는 1934년부터 코벤츨에서 칼렌베르크를 거쳐 클로스터노이부르크로 이어지는 Wiener Höhenstraße|비너 회엔슈트라세de 건설을 시작했다.
1938년 3월, 나치 독일이 안슐루스를 통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빈의 행정 구역이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이슈티프트 암 발데(글란칭, 잘만스도르프 포함)가 붸링에서 되블링으로 편입되었다. 나치 통치는 되블링에 거주하던 약 4,000명의 유대인(당시 구 인구의 약 7%)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1938년 11월 10일 수정의 밤에는 돌러가세 3번지에 있던 되블링 유대교 회당이 파괴되었다. 1939년 5월 기준으로 되블링에 남아 있던 2,030명의 유대인들은 점차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되블링에서는 약 5,000명이 군대에 징집되었고, 그중 절반 정도만이 전쟁 후 돌아올 수 있었다.
전쟁 말기인 1944년 7월 8일, 되블링 지역은 처음으로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다. 전체 주택(20,960채)의 약 12%가 파괴되거나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으며, 특히 하일리겐슈타트와 호에 바르테 기차역 주변 지역의 피해가 컸다. 1945년 4월 8일, 클로스터노이부르크 방면에서 진격해 온 소련군이 하일리겐슈테터 슈트라세를 통해 되블링에 진입했고, 다음 날인 4월 9일까지 구 전체를 점령했다. 이후 카를 마르크(Karl Mark)가 제2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초대 구청장으로 임명되었다.
전쟁 이후 되블링은 점차 주거 기능과 산업 기능이 혼재하던 특성을 잃어갔다. 많은 회사가 지역을 떠났고, 주택 수는 전쟁 직후 약 20,000채에서 2001년 39,608채로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지역 주민의 약 3분의 2가 빈의 다른 지역이나 외곽으로 출퇴근하게 되었다. 빈 시는 전후에도 시영 아파트 건설을 지속하여 1985년까지 약 7,000채를 추가로 공급했다. 이 시기 가장 큰 시영 건물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옛 되블링 양조장 부지에 건설된 436가구 규모의 Kopenhagen Hof|코펜하겐 호프de이다. 오버되블링의 일부인 Krim|크림de 지역은 과거 평판이 좋지 않은 지역이었으나, 전후 개발을 통해 자체 교구를 갖춘 고급 주거 지역으로 탈바꿈했다. 1963년에는 무트가세에 크로넨 차이퉁 신문사 본사인 Pressehaus|프레세하우스de(언론 건물)가 완공되었다. 현재 가장 중요한 건설 프로젝트는 호에 바르테 경기장 주변 부지에 대한 건설 공사이다.
1990년대에는 두 차례의 행정 구역 경계 조정이 있었다. 1995년에는 헤르날스 및 베링 구역과의 경계가 변경되었고, 1996년에는 브리깃테나우 구역과의 경계 변경을 통해 되블링 구역이 확장되어 다뉴브 운하에 직접 접하게 되었다.
4. 인구
1832년 되블링 지역에는 6,438명이 거주했다. 19세기 들어 교외 지역이 성장하면서 인구는 20년 만에 두 배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세 배까지 증가했다. 주민 수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계속 급증했으며, 전쟁 이후에는 시립 주택 건설로 인해 더욱 증가했다. 주거 지역 건설은 1980년대까지 되블링의 인구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후 주택 수요가 늘어나면서 2001년까지는 인구가 약간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2001년 이후에는 빈 전체의 인구 증가 추세에 따라 다시 조금씩 늘어나, 2015년 초에는 69,924명의 주민이 거주하게 되었다.
되블링의 인구는 빈 평균보다 상당히 고령화되어 있다. 60세 이상 인구 비율은 29.9%로 매우 높으며, 이는 도시 전체 평균인 22.2%보다 훨씬 높다. 되블링 인구의 고령화 이유 중 하나는 되블링에 많은 요양원이 있기 때문이다. 인구 중 여성의 비율도 55.1%로 평균 이상이다 (빈은 52.4%이다).
2003년 외국 국적을 가진 되블링 거주자의 비율은 13.1%로, 빈 평균보다 약 4%p 낮았다. 주요 외국 국적별 인구 비율은 다음과 같다.
2001년 조사에 따르면, 되블링 거주자의 약 20%는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 이로 인해 되블링 거주자의 82.8%만이 독일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한다고 답했다. 그 외 주로 사용되는 언어 비율은 다음과 같다.
5. 종교
2001년 기준, 되블링(19구)의 종교 분포는 빈 전체 평균과 비교했을 때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주민의 55.7%가 로마 가톨릭 신자로 나타났는데, 이는 빈 전체 평균인 49.2%보다 높으며, 빈의 모든 구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비율이다. 되블링 내 로마 가톨릭 교구는 총 11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교구들은 함께 19구 시 주임 신부 구역(City Deanery 19)을 이룬다.
개신교 신자의 비율은 6.5%로, 빈의 모든 구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그 외 이슬람교 신자는 4.0%, 동방 정교회 신자는 3.2%를 차지했으며, 특정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은 약 23.8%였다.
6. 정치
이름 | 정당 | 재임 기간 |
---|---|---|
카를 마르크 | SPÖ | 1945년 4월–1945년 10월 |
카를 슈벤드너 | SPÖ | 1945년 10월–1960년 |
프란츠 오퍼만 | SPÖ | 1960년–1965년 |
프란츠 베버 | SPÖ | 1965년–1975년 |
리하르트 슈토킹거 | SPÖ | 1975년–1978년 |
아돌프 틸러 | ÖVP | 1978년–2018년 |
다니엘 레쉬 | ÖVP | 2018년–현재 |
2020년 구의회 선거(Bezirksvertretungswahlde)에서 ÖVP는 36.9%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2위는 SPÖ로 26.9%를 얻었다. 녹색당은 16.0%, NEOS는 9.8%, FPÖ는 5.1%를 얻었다. 구의회 의석 48석 중 ÖVP는 19석, SPÖ는 14석, 녹색당은 8석, NEOS는 5석, FPÖ는 2석을 차지했다. 기타 정당은 각각 2% 미만을 득표하여 의회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5]
현재 구역 국장은 ÖVP 소속 다니엘 레쉬이다.
7. 경제 및 기반 시설
되블링은 비엔나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도나우 강과 도나우 운하가 각각 플로리드스도르프 및 브리기에나우 구역과의 경계를 이룬다. 남쪽으로는 귈텔 도로를 따라 알제르그룬트 구역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뵈링 및 헤르날스 구역과 경계를 이루며, 북서쪽으로는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시와 맞닿아 있다.
되블링 구역의 면적 중 약 32.6%가 도시 지역이며, 이 중 85.2%는 주거용으로 사용된다. 사업체 부지는 구역 면적의 2.2%에 불과하여 다른 구역에 비해 매우 낮은 비율을 보인다. 반면, 구역의 51.8%가 녹지로 이루어져 있어 비엔나에서 다섯 번째로 녹지가 많은 구역이다. 이 녹지 중 상당 부분은 농업용 토지(14.9%)로, 특히 그린칭, 누스도르프, 지버링, 노이슈티프트 암 발데, 잘만스도르프 주변의 포도원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구역 면적의 25.4%는 숲이며, 그 외 초원(5.3%), 작은 정원(2.7%), 공원(2.5%), 스포츠 및 레크리에이션 구역(0.9%) 등으로 구성된다. 교통 시설은 11.0%, 수역은 4.6%를 차지한다.
되블링에는 다음과 같은 사립 병원이 있다.
병원 이름 | 위치 |
---|---|
루돌피너하우스 | 빌로트 거리 |
프라이베이트클리닉 되블링 | 하일리겐슈테터 거리 |
7. 1. 경제
수 세기 동안 되블링 지역 경제는 포도 재배에 의해 형성되었다. 19세기 후반까지 주민들의 생계는 주로 와인 재배와 판매에 의존했다. 또한 우유, 달걀, 고기, 과일, 채소 등을 빈으로 공급했다. 지역 내에는 작은 제분소와 언덕에 풍차가 있었으며, 빈 시 당국 관할 하에 있던 지버링 채석장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18세기 중반부터는 누스도르프, 하일리겐슈타트, 오버되블링을 중심으로 최초의 대규모 상업 및 산업 기업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800년대부터는 섬유, 가죽, 화학 산업 분야의 여러 기업들이 등장했다. 19세기 전반에는 그린칭, 누스도르프, 오버되블링에 양조장이 설립되었는데, 특히 누스도르프의 양조장이 크게 번성했다. 낙농업은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중요한 산업이었으나,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대신 호이리겐 여관의 중요성이 커졌는데, 이는 되블링의 가파른 지형이 건설에 덜 적합하여 호이리겐이 존속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는 지버링의 그레프 & 슈티프트 자동차 공장이 주요 산업 생산 기업 중 하나로 부상했다. 운터되블링에서는 자켈 살충제 공장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는 하인리히 기계 공장이 중요한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지역 경제의 특징이 변화하면서, 클로스터노이부르크로 이전한 인퓌르 제과를 포함한 많은 제조 회사들이 이 지역을 떠났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잘 알려진 회사로는 Kattus|카투스deu와 Schlumberger|슐룸베르거deu 스파클링 와인 생산자가 있다.
되블링에는 Nussdorfer Markt|누스도르퍼 마르크트deu와 Sonnbergmarkt|존베르크마르크트deu라는 두 개의 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또한 하일리겐슈타트 기차역과 지하철역 근처에는 Q19 Einkaufsquartier Döbling|Q19 되블링 쇼핑센터deu가 위치해 있다.
7. 2. 교통
되블링의 대중교통 역사는 1811년, 프라웅과 하일리겐슈타트 온천 사이에 Stellwagen|슈텔바겐de이라는 트롤리 노선이 개통되면서 시작되었다. 슈텔바겐은 약 12개의 좌석을 갖춘 말 마차였다. 이후 오버되블링, 그린칭, 지페링으로 향하는 다른 노선들이 추가되었다. 1869년에는 오버되블링이 빈 마차 전차(Wiener Pferdetramway)의 다섯 번째 노선으로 빈 시내와 연결되었고, 점차 더 많은 노선이 생겨났다. 이 마차 전차 노선들은 20세기 초에 전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도록 개조되었다. 1885년부터 1903년까지는 되블링거 귈텔에서 누스도르프까지 운행하는 증기 전차도 있었다. 또한, 1874년에는 누스도르프에서 칼렌베르크 산으로 올라가는 래크식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1898년에는 당시 증기 기관으로 운행되던 빈 시립 철도(Wiener Stadtbahn)가 개통되어 오버되블링, 운터되블링, 하일리겐슈타트에 역이 설치되었다.현재 되블링 지역의 주요 대중교통은 비너 리니엔(Wiener Linien)이 운영하는 전차 37번(호헤 바르테 방면), 38번(그린칭 방면), D번(누스도르프 방면) 노선과 버스 35A번(잘만스도르프 방면), 38A번(칼렌베르크 방면), 39A번(지페링 방면), 40A번(되블링거 프리드호프 방면) 노선이다. 1976년부터는 빈 지하철 U4 노선이 하일리겐슈타트까지 연장 운행되면서, 하일리겐슈타트 철도역과 지하철역은 클로스터노이부르크 방향으로 가는 중요한 철도 및 버스 환승 지점이 되었다. 또한, 되블링은 빈 S-반 S45 노선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하일리겐슈타트, 오버되블링, 크로텐바흐슈트라세에 S-반 역이 있다.
도로 교통의 경우, 19세기 말부터 이 지역의 도로 포장이 대규모로 시작되었고, 구역이 설립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나무와 가로수가 도로 건설을 위해 제거되기도 했다. 되블링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는 칼렌베르크와 레오폴드베르크로 이어지는 Höhenstrasse|회헨슈트라세de이다. 그 외 중요한 연결 도로 및 간선 도로로는 Krottenbachstrasse|크로텐바흐슈트라세de, Billrothstrasse|빌로트슈트라세de, Döblinger Hauptstrasse|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세de, Heiligenstädter Strasse|하일리겐슈테터 슈트라세de, Grinzinger Strasse|그린징거 슈트라세de, Sieveringer Strasse|지버링거 슈트라세de 등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도나우 운하를 따라 미 육군 비행장이 있었으나, 1955년에 폐쇄되었다.
7. 3. 교육
되블링에는 다양한 공립 및 사립 초등학교와 중학교(하우프트슐레 및 중학교)가 있다. 또한 사립 유치원 교육 훈련원 ''(Bildungsanstalt für Kindergartenpädagogik)'' "마리아 레지나"가 있다.1890년에는 김나지움 거리에 있는 ''Communal-Gymnasium''만이 존재했다. 1914년 크로텐바흐 거리에 있는 ''Staats-Realschule''가 개교했고, 이후 빌로트 거리에 2개의 김나지움이 추가로 문을 열었다.
3개의 학교(폴크슐레 그린징거 슈트라세, 하우프트슐레 인 데어 크림, 레알김나지움 크로텐바흐슈트라세)에서 비엔나 이중언어 학교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잘만스도르프에는 American International School Vienna가 있으며,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외국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제공하는 사립 학교이다.
비엔나 시립 음악 학교의 분교가 도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세에서 운영되고 있다.
19세기 말에 이 지역에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1896년, 후에 빈 천연자원 및 생명 과학 대학교가 될 학교가 린네 광장에 문을 열었다. 1898년에 설립된 k.k. 수출 아카데미는 1916년 프란츠-클라인-가세로 이전되었다. 1919년 세계 무역 대학교로 승격되었고, 1975년 빈 경제경영 대학교로 개칭되었으며, 1982년 9구역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경제경영 대학교가 이전한 후에도 일부 시설은 건물에 남아 있었다. 현재는 주로 빈 대학교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선사 및 초기 역사 연구소와 고전 고고학 연구소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 빈 대학교 번역 연구 센터는 김나지움슈트라세에 접해 있는 건물 부분에 위치해 있다. 2007년에는 비엔나 상공회의소의 사립 대학교인 모듈 대학교 빈이 칼렌베르크에 개교했으며, 영어로 수업을 진행한다.
호프자일에 위치한 로더 경영대학원은 영어로 수업하는 경영대학원으로, 오스트리아 교육 시스템에서 "응용과학 대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비너 폴크스호흐슐렌''(빈 폴크스호흐슐레)은 오버되블링(가터부르크가세)과 하일리겐슈타트(하일리겐슈테터 슈트라세)에 행사 센터를 두고 있다.[6] 빈 공립 도서관도 인근에 분관을 운영하고 있다.[7]
8. 문화
(내용 없음)
8. 1. 명소
- 그린칭
- 카를 마르크스-호프
9. 저명한 출신 인물
- 루트비히 판 베토벤 (1770–1827): 작곡가. 그린칭거 슈트라세 64, 파르플라츠 2, 프로부스가세 6(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작성지),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세 92(영웅 교향곡 작곡지) 등 여러 곳에 거주하며 활동했다.
- 암브로스 리더 (1771–1855):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 되블링 출신이다.
- 프란츠 그릴파르처 (1791–1872): 시인, 극작가. 그린칭거 슈트라세 64에 거주했다.
- 이슈트반 세체니 (1791-1860): 헝가리의 정치인. 오버되블링 정신병원과 관련이 있다.
- 요제프 라너 (1801–1843): 작곡가. 김나지움슈트라세 87에 거주했으나, 이 건물은 19세기 후반에 철거되었다.
- 니콜라우스 레나우 (1802–1850): 작가.
- 요한 슈트라우스 1세 (1804–1849): 작곡가, 지휘자. 드라이마르크슈타인가세 13에 거주했다.
- 요한 슈트라우스 2세 (1825–1899): 작곡가, 지휘자,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와 같은 드라이마르크슈타인가세 13에 거주했다.
- 후고 볼프 (1860–1903): 작곡가, 음악 평론가.
- 콜로만 모저 (1868–1918): 디자이너, 빈 분리파 운동의 창립 멤버.
- 레프 트로츠키 (1879–1940):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볼셰비키 혁명가. 로들러가세 25에 거주했다.
- 프란츠 베르펠 (1890–1945): 소설가, 극작가, 시인. 아내 알마 말러-베르펠과 함께 거주했다.
- 엘리아스 카네티 (1905–1994): 작가. 198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힘멜슈트라세 30에 거주했다.
- 쿠르트 괴델 (1906–1978):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힘멜슈트라세 43에 거주했다.
- 시몬 비젠탈 (1908–2005): 나치 사냥꾼.
- 브루노 크라이스키 (1911–1990): 사회민주당 소속의 전 오스트리아 총리. 암브루스터가세 15에 거주했다.
- 헤디 라마르 (1914–2000): 배우, 발명가. 본명은 헤트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Hedwig Eva Maria Kiesler)이며, 페터-요르단 슈트라세에 거주했다.
- 헬무트 퀄팅거 (1928–1986): 배우.
- 후세인 빈 탈랄 (1935–1999): 요르단의 국왕.
- 프란츠 브라니츠키 (1937년 출생): 사회민주당 소속의 전 오스트리아 총리.
- 로미 슈나이더 (1938–1982): 배우.
-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1942년 출생): 전 국제 원자력 기구 (IAEA) 사무총장, 노벨 평화상 수상자.
- 요 가르트너 (1954–1986): 포뮬러 1 레이서.
참조
[1]
웹사이트
Bezirksvertretungswahlen 2020
https://www.wien.gv.[...]
wien.gv.at
2021-12-04
[2]
웹사이트
STATISTIK AUSTRIA - Bevölkerung zu Jahres-/Quartalsanfang
http://www.statistik[...]
Statistik Austria
2008-12-25
[3]
웹페이지
Wien.gv.at webpage
[4]
웹페이지
Slawische und slowenische (alpenslawische) Ortsnamen in Österreich
http://www.uni-klu.a[...]
Heinz D. Pohl
[5]
웹사이트
19., Döbling - Bezirksvertretungswahlen 2020, Ergebnisse der Wiener Wahlbehörden
https://www.wien.gv.[...]
2023-03-16
[6]
웹사이트
Veranstaltungszentren {{!}} Die Wiener Volkshochschulen
https://www.vhs.at/d[...]
2023-03-23
[7]
웹사이트
Stadt Wien Büchereien > Büchereien Wien > Standorte & Öffnungszeiten > Zweigstellen
https://buechereien.[...]
202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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