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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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프 톨스토이는 1828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소설가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과 같은 작품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사회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이후 기독교적 신념에 기반한 비폭력주의와 기독교 아나키즘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사유 재산과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헨리 조지의 조지즘 경제 이론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채식주의와 동물권에 대한 옹호도 펼쳤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자신의 저작권료를 포기하고 가출을 감행했으며, 1910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에서도 그의 작품과 사상이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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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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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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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레프 톨스토이 |
로마자 표기 | Leu Nikolayevich Tolstoy |
출생일 | 1828년 9월 9일 |
출생지 | 야스나야 폴랴나, 러시아 제국 |
사망일 | 1910년 11월 20일 |
사망지 | 아스타포보, 러시아 제국 |
안장 장소 | 야스나야 폴랴나, 러시아 |
직업 | 작가 종교 사상가 |
국적 | 러시아 |
활동 기간 | 1847년–1910년 |
사조 | 사실주의 |
장르 | 소설 중편 소설 단편 소설 스케치 희곡 아동 문학 노래 논쟁 에세이 논문 편지 문학 평론 및 미술 평론 교과서 자서전 일기 번역 서신 |
주제 | 기독교 무정부주의 평화주의 |
주요 작품 | 목록 |
수상 | 그리보예도프 상 (1892년) |
배우자 | 소피야 베르스 (1862년 9월 23일 결혼) |
자녀 | 14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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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 |
일본어 표기 | レフ・トルストイ |
일본어 출생 이름 | 레フ・니콜라에비치・톨스토이 |
라틴어 표기 | Lev Nikolayevich Tolstoy |
문화어 표기 | 레브 똘스또이 |
학력 | |
대학교 | 카잔 제국 대학교 (중퇴) |
관련 인물 | |
영향을 준 인물 | 루소 쇼펜하우어 |
2. 생애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다.[174] 그는 1828년 9월 9일, 러시아 제국 남부 툴라 근처의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 손에 자랐으며, 카잔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기존 교육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중퇴했다.[174] 젊은 시절에는 이상주의자이자 쾌락주의자로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내며 도박으로 큰 빚을 지기도 했으나, 이 시기 장자크 루소 등을 탐독하며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1851년 코카서스 전쟁에 참전하고 이후 크림 전쟁에도 장교로 복무하며 세바스토폴 공방전 등 격전을 경험했다. 전쟁의 참상은 그의 삶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초기작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 등에 반영되었고 이후 비폭력주의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군 복무 후 문단에 등단하여 주목받았고,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가져 1857년과 1860년 두 차례 유럽을 여행하며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빅토르 위고 등과 교류하고 서구 교육 시스템을 시찰했다. 귀국 후 1859년 야스나야 폴랴나에 농민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자유주의 교육을 실천했으나 당국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다.[126][129]
1862년 소피아 베르스와 결혼하여 야스나야 폴랴나에 정착한 후, 문학적 황금기를 맞이하여 《전쟁과 평화》(1864-69)와 《안나 카레니나》(1873-77) 등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사실주의 기법을 바탕으로 당대 러시아 사회와 인간 내면을 깊이 있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1870년대 후반부터 극심한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삶의 의미에 대해 고뇌했고,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그는 기독교, 특히 산상수훈에 기초한 원시 기독교적인 독자적 사상을 확립하고 작가보다는 사상가이자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톨스토이 운동). 그는 국가와 사유 재산, 러시아 정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비폭력주의와 사랑을 설파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고 농민들과 함께 노동했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참회록》,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 《크로이처 소나타》(1889),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1893), 《부활》(1899) 등의 후기 작품과 사회 활동에 반영되었다. 특히 《부활》의 인세로 박해받던 두호보르파 교도들의 캐나다 이주를 지원했으며, 이 일로 1901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143]
말년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마하트마 간디 등 여러 사상가들과 교류했으나, 자신의 이상과 귀족적인 현실 생활 사이의 괴리, 아내 소피아와의 불화 등으로 고통받았다.[147] 결국 1910년 10월 말, 모든 것을 버리고 가출을 감행했으나, 여행 중 폐렴에 걸려 11월 20일(구력 11월 7일) 랴잔주의 작은 간이역인 아스타포보 역(현재 레프 톨스토이 역) 역장 관사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48]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야스나야 폴랴나 숲 속에 안장되었다.[143]
2. 1. 가문 기원
톨스토이 가문은 오래된 러시아 귀족 가문으로, 그 족보는 인드리스라는 신화 속 귀족[16]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표트르 톨스토이의 기록에 따르면, 인드리스는 1353년 그의 두 아들 리트비노스(또는 리트보니스)와 지몬텐(또는 지그몬트) 그리고 3000명의 친위대와 함께 "네메츠(독일), 카이사르의 땅"에서 체르니히우로 왔다고 한다.[17][18] 인드리스는 레온티라는 이름으로 동방 정교회로 개종하였고, 그의 아들들은 콘스탄틴과 표도르로 이름을 바꾸었다. 콘스탄틴의 손자 안드레이 하리토노비치는 체르니히우에서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 바실리 2세에 의해 톨스티이(뚱뚱한)라는 별명을 얻었다.[17][17]이교도 이름과 당시 체르니히우가 드미트리 1세 스타르시에 의해 통치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그들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온 리투아니아인이라고 결론지었다.[17][19][20] 동시에,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문서에서 인드리스에 대한 언급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표트르 톨스토이가 참고자료로 사용한 체르니히우 연대기는 분실되었다.[17] 최초로 기록된 톨스토이 가문 구성원들은 17세기에 살았기 때문에, 표트르 톨스토이 자신이 표트르 대제에 의해 백작 작위를 받은 귀족 가문의 창시자로 일반적으로 여겨진다.[21][22]
2. 2. 유년 시절과 교육

레프 톨스토이는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 툴라 근처의 가족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4] 아버지는 1812년 조국전쟁 참전 용사인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1794년–1837년)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야 톨스타야(볼콘스카야 가문 출신) 공주(1790년–1830년)였다. 양가 모두 대대로 황제를 섬긴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다섯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톨스토이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었다. 1830년 그가 두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118] 1837년 아홉 살 때는 아버지마저 여의었다.[23] 이후 톨스토이와 그의 형제들은 친척들(할머니, 고모 등)의 손에 맡겨져 자랐다.[4] 1837년 모스크바로 이주했다가 1841년에는 카잔에 사는 고모에게 맡겨져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119]
1844년, 톨스토이는 카잔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과 동양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23] 그러나 학업보다는 사교계 활동과 유흥에 더 몰두하여 성적이 좋지 않았고, 교수들은 그를 "배우는 능력도 의지도 없는" 학생으로 평가하기도 했다.[23][120] 1845년 법학부로 전과했지만 여전히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한다고 느낀 당시 대학 교육 방식에 실망하여 1847년 결국 대학을 중퇴했다.[174][23] 이 시기 장자크 루소의 저작을 탐독했으며, 루소의 사상은 그의 평생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학 중퇴 후 1847년,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와 농지 경영에 나서고 농민들의 생활 개선을 시도했으나, 경험 부족 등으로 인해 곧 실패했다.[121] 이후 한동안 모스크바, 툴라,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를 오가며 다소 방탕한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4] 이 무렵인 1850년에 처음으로 소설 집필을 시작했으며,[122] 1852년 자신의 젊은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한 첫 소설 《유년 시절》(Childhood)을 발표하며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4]
2. 3. 방황과 군 복무
1844년 카잔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과 동양어를 공부했으나, 교수들은 그를 "배우는 능력도 의지도 없는" 사람으로 묘사했다.[23] 톨스토이는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대학 교육 방식에 실망하여[174] 1847년 대학을 중퇴했다.[23][120] 이 무렵 장자크 루소를 탐독했으며, 그 영향은 평생 지속되었다.
대학 중퇴 후, 부모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와 농지 경영에 나서고 농민 생활 개선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121] 이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가며 방탕하고 한가로운 생활에 빠져들었다.[4] 특히 도박으로 큰 빚을 졌고, 1855년에는 야스나야 폴랴나의 저택을 매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글쓰기를 시작하여,[23][122] 자신의 젊은 시절을 허구적으로 그린 첫 소설 『유년 시대』(Детство|데츠트보ru)를 1852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4]
1851년, 막대한 도박 빚을 진 후 형을 따라 코카서스로 가서 러시아 제국 육군 포병 여단에 자원 입대했다.[4][122] 그는 코카서스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때의 경험은 후일 『코사크』(Казаки|카자키ru), 『하지 무라트』(Хаджи-Мурат|하지무라트ru) 등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1853년 발발한 크림 전쟁에도 장교로 참전하여 세바스토폴 공방전 (1854년-1855년)과 체르나야 전투 등 격전지를 경험했다.[24] 전쟁 중 용맹함을 인정받아 중위로 진급하기도 했으나,[24] 전쟁에서 목격한 수많은 죽음과 참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23] 결국 크림 전쟁이 끝난 후 군대를 떠났다.[4] 그의 군 복무 경험은 이후 그의 사상과 문학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세바스토폴 이야기』(Севастопольские рассказы|세바스토폴스키예 라스카지ru, 1855년)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경험은 톨스토이가 이후 비폭력주의 사상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4. 유럽 여행과 사상적 변화
크림 전쟁에서의 군 복무 경험과 이후 두 차례의 유럽 여행은 젊은 시절 방탕한 귀족 작가였던 톨스토이를 비폭력적이고 영적인 무정부주의자(anarchist)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전쟁에서 목격한 참상에 큰 충격을 받았고, 결국 군대를 떠났다.[4][23] 이러한 사상적 경로는 알렉산더 헤르첸, 미하일 바쿠닌,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같은 다른 러시아 사상가들과 유사점을 보인다.1857년 첫 유럽 여행 중, 톨스토이는 파리에서 공개 처형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경험은 그의 남은 생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친구 바실리 보트킨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실은 국가가 시민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타락시키도록 고안된 음모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어떤 정부도 섬기지 않겠습니다."라고 쓰며 국가 권력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25][124] 또한 이 시기 독일어로 번역된 티루쿠랄을 읽으며 비폭력(non-violence) 또는 아힘사(ahimsa) 사상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26][27] 훗날 톨스토이는 젊은 마하트마 간디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힌두교도에게 보내는 편지(A Letter to a Hindu)"를 통해 이러한 비폭력 사상을 전파하기도 했다.[27][28][29] 귀국 후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톨스토이는 1859년 자신의 영지인 야스나야 폴리아나에 학교를 세워 농민 자녀 교육에 힘썼다. 그는 강제를 배제하고 아동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지향했다.[126]
1860년부터 1861년까지 이어진 두 번째 유럽 여행은 그의 정치 및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브뤼셀에서 망명 중이던 프랑스의 무정부주의 사상가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을 만나 교육 문제 등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톨스토이는 프루동이 교육과 인쇄술의 중요성을 이해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했으며, 프루동의 저서 『전쟁과 평화(La Guerre et la Paix)』에서 영감을 받아 훗날 자신의 대작 제목을 『전쟁과 평화』로 정했다. 또한, 빅토르 위고를 만나 그의 신작 『레 미제라블』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이는 『전쟁과 평화』의 전투 장면 묘사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러시아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1861년 농노 해방을 맞이한 농민들의 자녀들을 위해 야스나야 폴리아나에 13개의 학교를 추가로 설립했다. 그는 1862년 에세이 "야스나야 폴리아나의 학교(The School at Yasnaya Polyana)"를 통해 강압 없는 자유로운 교육 원칙을 설명했다.[30] 하지만 그의 진보적인 교육 실험은 차르 정부의 의심을 사 비밀경찰의 탄압을 받았고, 결국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31][129] 비록 짧게 끝났지만, 야스나야 폴리아나 학교는 A. S. 닐의 서머힐 스쿨과 같은 자유 교육의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받으며, 민주적 교육 이론의 초기 모델 중 하나로 여겨진다.[31]
2. 5. 결혼과 가정생활
1860년 형 니콜라이의 죽음은 톨스토이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결혼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23] 1862년 9월 23일, 톨스토이는 자신보다 16살 어린 법의관의 딸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어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소피아의 러시아식 애칭인 소냐라고 불렸다.[32] 그들은 13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중 8명이 성인이 되었다.[33]
- 세르게이 레오비치 톨스토이 백작 (1863–1947), 작곡가이자 민족음악학자
- 타티아나 레오브나 톨스타야 백작부인 (1864–1950),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수호틴의 아내
- 일리아 레오비치 톨스토이 백작 (1866–1933), 작가
- 레프 레오비치 톨스토이 백작 (1869–1945), 작가이자 조각가
- 마리아 레오브나 톨스타야 백작부인 (1871–1906), 니콜라이 레오니도비치 오볼렌스키의 아내
- 표트르 레오비치 톨스토이 백작 (1872–1873), 유아 사망
- 니콜라이 레오비치 톨스토이 백작 (1874–1875), 유아 사망
- 바르바라 레오브나 톨스타야 백작부인 (1875–1875), 유아 사망
- 안드레이 레오비치 톨스토이 백작 (1877–1916), 러일 전쟁 참전
- 미하일 레오비치 톨스토이 백작 (1879–1944)
- 알렉세이 레오비치 톨스토이 백작 (1881–1886)
- 알렉산드라 레오브나 톨스타야 백작부인 (1884–1979)
- 이반 레오비치 톨스토이 백작 (1888–1895)
결혼은 시작부터 톨스토이가 결혼 전날 자신의 광범위한 과거 성생활과 그의 영지의 농노 중 한 명이 그의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상세히 적은 일기를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성적 열정과 감정적 무감각으로 특징지어졌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초창기 결혼 생활은 행복했고 톨스토이에게 많은 자유와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작곡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며, 소냐는 그의 비서, 편집자 및 재정 관리자 역할을 했다. 소냐는 그의 서사시 작품을 여러 번 베껴 쓰고 손으로 필사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계속 편집했고 출판사에 전달할 깨끗한 최종 원고가 필요했다.[32][34]
그러나 그들의 후반기 결혼 생활은 A.N. 윌슨에 의해 문학 역사상 가장 불행한 결혼 생활 중 하나로 묘사되었다. 톨스토이의 신념이 점점 더 급진적으로 변하면서 그의 아내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는 이전 작품에 대한 저작권 포기를 포함하여 상속받은 재산과 획득한 재산을 버리려고 했다.
그가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부분을 완성할 무렵, 톨스토이는 고뇌에 찬 심정이었고 자살할까 봐 총과 밧줄을 치워놓기 시작했다.[35]
톨스토이 가족의 일부는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또는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연방 수립 이후 러시아를 떠났고, 레오 톨스토이의 많은 친척과 후손들은 오늘날 스웨덴,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에 살고 있다. 톨스토이의 아들인 레프 레오비치 톨스토이 백작은 스웨덴에 정착하여 스웨덴 여성과 결혼했고, 톨스토이, 파우스 및 세더를 포함한 성을 가진 그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스웨덴에 살고 있다. 파우스 가문은 헨리크 입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36] 레오 톨스토이의 마지막으로 생존한 손녀인 타티아나 톨스토이-파우스 백작부인은 2007년 톨스토이의 후손들이 소유한 스웨덴 헤레스타 영지에서 사망했다.[37] 스웨덴 작가 다리아 파우스와 재즈 가수 빅토리아 톨스토이는 레오 톨스토이의 스웨덴계 후손들 중 일부이다.[38]
그의 증손자 중 한 명인 블라디미르 톨스토이(1962년생)는 1994년부터 야스나야 폴리아나 박물관 관장을 역임했고 2012년부터 러시아 대통령의 문화 담당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39][40] 일리아 톨스토이의 증손자 표트르 톨스토이는 유명한 러시아 언론인이자 TV 진행자이며 2016년부터 국회 의원이기도 하다. 그의 사촌 표클라 톨스타야(1971년 안나 톨스타야로 출생)는 저명한 소비에트 슬라브어학자 니키타 톨스토이(1923–1996)의 딸이기도 하며 러시아 언론인이자 TV 및 라디오 진행자이다.[41]
아내 소피아 톨스타야는 악처로 알려져 있으며,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와 함께 “세계 3대 악처”로 꼽는 시각도 있다.[149] 데일 카네기는 저서 「인간관계론」에서 톨스토이가 임종 직전 아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죽음의 침상에서 소피아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자신의 잘못이다”라고 자책하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을 들은 자녀들은 아무도 반론하지 않았다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두 사람의 갈등은 톨스토이가 종교와 사회 활동에 몰두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반면(말년의 톨스토이는 인세와 지대의 수령을 거부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저작권 등의 유산을 “러시아 국민에게 양도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하려 했다), 소피아는 10명이 넘는 자녀들을 양육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에서는 톨스토이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와 대립하는 소피아의 맺어지지 않은 사랑이 그려져 있다.
둘째 딸 타티아나 톨스타야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이탈리아 로마에서 사망했다. 망명 후 아버지의 회상록[150]을 저술했다.
셋째 아들 일리아 톨스토이는 1914년에 발표한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 "Tolstoy, My Father; Reminiscences"[151]로 작가로서 주목받았다. 1917년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넷째 딸 알렉산드라 톨스타야는 1929년에 일본으로 출국하여 18개월간 머문 후[152] 1931년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저서 『동화의 나라-일본-바다 건너간 톨스토이의 딸』[153]에서 일본에서의 2년간의 체류기를 기록하고 있다. 회상록 『아버지와 나의 생활』[154]이 있다.
2. 6. 사회 개혁 활동과 종교적 헌신
톨스토이는 백작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음에도, 《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작품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의 과도한 재산 소유가 다수 민중의 가난을 야기한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귀족들의 압력을 받아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는 출판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 형태로 그의 책을 몰래 읽었으며, 유럽, 미국, 아시아 등지의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외국에서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민중에게 무관심한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여 교회의 미움을 샀고, 1901년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감독기관인 종무원으로부터 파문을 당할 정도로 교회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면모를 보였다.[143]톨스토이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지식인이었기에, 1860년 고향 툴라 근처 영지 야스나야 폴리아나에 농민 학교를 설립하여 농민 자녀 교육에 힘썼다.[126] 당시 아동 노동이 당연시되던 농민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놀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했다. 처음에는 노동력 손실을 우려해 자녀의 등교를 반대하던 부모들도 톨스토이의 진심을 알고는 기꺼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농민 학교는 강제를 배제하고 자주성을 중시하는 자유로운 교육 방침을 가졌는데,[126] 이는 톨스토이가 자유로운 교육을 통해 진정한 배움이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862년 그의 활동을 위험하게 여긴 당국의 방해로 학교는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128][129]
1871년에는 직접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교과서는 농민과 귀족이 평등하게 교육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을 멸시하던 귀족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하지만 자신들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 농민들에게는 높이 평가받았다. 이 "초등 교과서"는 1872년에 완성되었으나 가격과 내용 면에서 잘 팔리지 않았다.[132] 1874년 국민학교 도서로 인가를 받았지만[133] 평판은 여전했다. 이에 톨스토이는 1874년부터 개정을 시작하여 1875년에 "신 초등 교과서"를 발행했다. 가격을 낮춘 이 개정판은 큰 성공을 거두어 러시아 혁명 때까지 교과서로 사용되었고, 혁명 후에도 상당 부분이 새로운 교과서에 채택되었다.[134]
톨스토이는 1861년 농노 해방령(Крестьянская реформа)에 앞서 독자적으로 농노 해방을 시도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125] 농노 해방령 이후 설치된 농사 조정관으로 임명되어 농민과 지주 사이의 분쟁 조정에 힘썼으나, 지주들의 반발로 1862년 사직했다.[127]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음에도 1870년대부터 정신적 위기를 겪기 시작했고, 《안나 카레니나》 집필 후인 1878년경부터는[135] 삶의 무의미함에 고통받으며 자살까지 생각했다. 깊은 정신적 방황 끝에 그는 종교와 민중의 소박한 삶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자기 완성을 목표로 하는 원시 기독교적인 독자적 교리를 만들어냈고,[136] 이후 작가로서의 활동보다는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는 사상가이자 설교자로서 활동을 이어갔다(톨스토이 운동). 이 과정에서 그는 민중을 억압하는 정부를 비판하고 국가와 사유 재산, 착취를 부정했지만, 폭력적인 저항은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큰 권위를 지녔던 러시아 정교회 역시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고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생활을 간소화하고 농업에 직접 종사했으며, 인세와 지대 수입을 거부하려 하면서 가족과 갈등을 겪었다. 1884년에는 첫 가출을 시도하기도 했다.[137] 이 정신적 위기는 1885년경 마무리되었다.[135]
"회심" 이후에는 《이반의 어리석음》(1885)과 같이 민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민화풍의 작품을 집필했다. 희곡 《어둠의 힘》(1886)은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압력으로 1902년까지 공식 상연이 금지되었으나, 비공식적으로는 여러 차례 상연되었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도 《인생론》(1887) 등 도덕에 관한 논문을 다수 집필했고, 소설 역시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 《크로이처 소나타》(1889) 등 교훈적인 경향을 띠었다.
1891년부터 1892년까지 이어진 러시아 기근 당시에는 구제 운동을 전개해 세계 각지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냈지만,[139] 정부는 톨스토이를 여전히 위험 인물로 여겼다.[140] 1890년대 들어 정부와 교회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141] 이 시기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1893) 등 종교 관련 논문을 많이 발표했고,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포함한 기존 예술 대다수가 상류 계급만을 위한 것이라며 그 의미를 부인했다.
말년의 대표작 《부활》(1899)은 정부로부터 박해받던 두호보르파 교도들의 해외 이주를 지원하기 위해 발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타락한 정부, 사회,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고, 작품의 저작권료 수입으로 두호보르 교도들은 캐나다로 성공적으로 이주했다.[142] 그러나 작품 출판은 정부와 교회의 검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며, 해외에서 출판된 판본을 러시아로 몰래 들여오기도 했다. 《부활》이 러시아 정교회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1901년 파문 선고를 받았지만,[143] 이는 오히려 톨스토이에 대한 지지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대중의 두터운 지지를 받던 톨스토이에 대한 교회의 조치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 파문은 현재까지도 취소되지 않고 있다.[144]
1904년 러일 전쟁과 1905년 러시아 제1혁명 당시 폭력 행위에 대해서는 비폭력주의 입장에서 비판했고, 특히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 시도에 대해 "일본 정치가들은 조선을 병합하려고 필사적이며, 근거 없는 일을 하는 미치광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야스나야 폴리아나 일기》). 1909년과 1910년에는 마하트마 간디와 서신을 교환하면서[146] 비폭력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2. 7. 말년과 죽음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1870년대부터 점차 정신적인 위기를 겪기 시작했다. 특히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한 후인 1878년경부터는[135] 삶의 무의미함에 깊이 고뇌하며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이러한 정신적 방황 끝에 그는 기독교와 민중의 소박한 삶에서 답을 찾고자 했으며,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자기 완성을 목표로 하는 원시 기독교적인 독자적 사상을 확립했다.[136]이후 톨스토이는 작가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자신이 깨달은 바를 널리 알리는 사상가이자 설교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톨스토이 운동). 그는 민중을 억압하는 제정 러시아 정부를 논문 등을 통해 비판하며 국가와 사유 재산, 착취를 부정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비폭력 저항을 강조했다. 당시 큰 권위를 누리던 러시아 정교회 역시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생활을 간소화하고 직접 농사일에 참여했으며, 인세와 지대 수입을 거부하려다 가족과 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로 인해 1884년에는 첫 번째 가출을 시도하기도 했으나,[137] 이러한 내적 위기는 1885년경에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135] 한편, 1881년에는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1901년까지 여름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겨울은 모스크바에서 보내는 생활을 이어갔다.[138]


이른바 "회심" 이후, 톨스토이는 『바보 이반』(1885)과 같이 민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민화풍의 작품들을 썼다. 희곡 『어둠의 힘』(1886)은 당시 전제 정치를 강화하던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압력으로 1902년까지 공식적인 상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인생론』(1887) 등 도덕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으며, 소설 역시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 『크로이처 소나타』(1889)처럼 교훈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들을 집필했다. 특히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는 죽음을 앞둔 인간의 내면적 공포를 깊이 있게 묘사했다.
1891년부터 1892년까지 이어진 러시아 대기근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구제 운동을 펼쳐 세계 각지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냈다.[139] 하지만 정부는 톨스토이를 여전히 위험인물로 간주했고,[140] 1890년대부터 정부와 교회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141] 그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1893) 등 종교 관련 논문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더욱 확고히 했으며,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포함한 기존 예술 대다수가 상류 계급만을 위한 것이라며 그 가치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말년의 가장 중요한 활동 중 하나는 정부로부터 박해받던 두호보르파 신도들의 해외 이주를 지원한 일이다. 이를 위해 집필한 소설 『부활』(1899)은 타락한 정부, 사회, 종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저작권 수입 덕분에 두호보르파 신도들은 캐나다로 성공적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142] 그러나 『부활』의 출판은 정부와 교회의 엄격한 검열로 인해 순탄치 않았으며, 해외에서 출판된 판본을 몰래 러시아로 들여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이 작품이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1901년 톨스토이는 파문 선고를 받게 된다.[143] 하지만 이는 오히려 톨스토이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더욱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파문 조치는 현재까지도 철회되지 않았다.[144]

작가이자 사상가로서 톨스토이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야스나야 폴랴나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145] 그는 1904년 발발한 러일 전쟁과 1905년의 러시아 제1혁명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를 비폭력주의 입장에서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대한제국 침탈에 대해서는 "일본 정치가들은 조선을 병합하려고 필사적이며, 근거 없는 일을 하는 미치광이다"라고 일갈하며 날카롭게 비판했다(『야스나야 폴랴나 일기』).[146] 1909년과 1910년에는 마하트마 간디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비폭력 사상에 대한 교감을 나누기도 했다.[146]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 명성과는 달리,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는 귀족적인 생활에 대해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고,[147] 아내 소피아와의 오랜 불화로 고통받았다. 소피아는 남편의 사상과 생활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특히 말년에 톨스토이주의 추종자들에게 보이는 남편의 관심에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다. 결국 1910년 10월 말, 82세의 톨스토이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야스나야 폴랴나를 떠나 가출을 감행했다.[103][148]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 여행 중 그는 심한 오한을 느꼈고, 가출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작은 간이역인 아스타포보 역(현재 레프 톨스토이 역)에 내리게 되었다.[148] 역장의 관사에서 머물며 치료를 받았으나,[104] 폐렴 증세는 악화되었다. 그는 1910년 11월 20일(구력 11월 7일),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105]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차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사랑, 비폭력, 그리고 조르지즘(토지 공유 사상)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88]
톨스토이의 장례식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치러졌으며, 만 명이 넘는 추모객이 모였다. 당국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경찰력을 배치했지만, 장례식은 별다른 충돌 없이 진행되었다. 가족의 요청에 따라 공식적인 추도사는 없었으나,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유해는 생전 유언에 따라 야스나야 폴랴나의 숲 속에 안장되었다.[143] 사후 유고로 중편 소설 『하지 무라트』(1904년경 집필 완료 추정)와 희곡 『살아있는 시체』(1900년 집필) 등이 발표되었다.
3. 작품 세계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는 흔히 '삶을 사랑하는 예술가'와 '청교도적 설교자'라는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하며 끊임없이 갈등하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후기로 갈수록 그는 '인생의 교사'이자 '삶의 재판관'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강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성은 단순히 분열된 자아의 충돌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탐구와 도덕적 태도라는 통일된 기반 위에서 그의 창작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특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보편적인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으며, 예술가이자 사상가로서 인류에게 그 해답을 제시하려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관념과 실천을 통해 절대적 경지에 이르고자 했으며, 이는 자기 구원을 넘어 인류 전체의 구원으로 나아가려는 열망과 연결된다.
그의 문학 여정은 크림 전쟁 참전 경험을 담은 『세바스토폴 수기』와 자전적 소설 3부작(『어린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 등 초기 작품에서부터 시작된다.[42] 이후 러시아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한[43] 『코사크』, 그리고 세계 문학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들은 방대한 서사, 깊이 있는 심리 묘사, 그리고 개인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45][46]
『안나 카레니나』 이후 그의 작품 경향은 눈에 띄게 변화하여, 『이반 일리치의 죽음』, 『부활』 등에서는 기독교적 가르침과 사회 비판, 무정부 평화주의 사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47] 이러한 후기 사상은 러시아 정교회와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지만,[47] 간디의 비폭력 운동을 비롯한 전 세계적인 사상적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26][65]
톨스토이의 작품은 동시대 작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50][4] 후대의 작가와 비평가들 역시 그의 문학적 성취를 인정하며 때로는 비판적인 시각을 더하기도 했다.[51][4][52][53][14][15] 그는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 민담, 교육용 저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시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48][49] 그의 작품 세계는 인간과 사회,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독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3. 1.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
톨스토이는 ‘인간의 심리 분석’과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 분석’을 통해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을 이루었다. 그는 일상의 형식적인 면을 거부하고 인간 사회에 만연한 거짓, 허위, 가식, 기만을 파헤치고자 했다. 레닌이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고 평가했듯이, 톨스토이는 러시아 제국에서 혁명이 움트던 시기를 정확하게 묘사하며 자신의 문학과 사상을 사회 변화의 흐름 속에 녹여냈다. 그의 문학은 전 인류의 예술적 발전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톨스토이는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으로, 대표작으로는 소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가 있으며, 중편소설 『하지 무라트』와 『이반 일리치의 죽음』 등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초기 자전적 소설 3부작인 『어린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1852~1856)은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 성장하며 자신과 농민 사이의 깊은 간극을 깨닫는 과정을 담고 있다. 훗날 작가 자신은 이 작품들을 감상적이라며 비판했지만, 톨스토이의 실제 삶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보편적인 성장 이야기로서 여전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톨스토이는 크림 전쟁 당시 포병 소위로 참전했으며, 이때의 경험을 『세바스토폴 수기』에 기록했다. 전쟁 경험은 그의 평화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후기 작품에서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밑거름이 되었다.[42]
톨스토이의 소설은 그가 살았던 러시아 사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려는 일관된 노력을 보여준다.[43] 『코사크』(1863)는 코사크 여성과 사랑에 빠진 러시아 귀족의 이야기를 통해 코사크 민족의 삶과 문화를 묘사했다. 『안나 카레니나』(1877)는 사회적 관습과 위선에 갇힌 여성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와, 농민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이상적인 지주(톨스토이 자신을 투영한 인물)의 이야기를 병치시킨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의 피에르 베주호프와 안드레이 공작,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 『부활』의 네흘류도프 공작처럼 자신을 닮은 인물들을 창조했다. 톨스토이 작품의 번역가인 리처드 피비어는 그의 독특한 문체에 대해 "도발과 풍자로 가득하며, 광범위하고 정교하게 발전된 수사적 장치를 사용한다"고 평가했다.[44]
『전쟁과 평화』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로 꼽히며, 방대한 서사 규모와 통일성을 자랑한다. 58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역사적 인물과 허구적 인물이 어우러져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야기는 평범한 가정의 모습에서 나폴레옹의 지휘부로, 알렉산드르 1세의 궁정에서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보로디노 전투의 참혹한 현장으로 넘나든다. 원래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 봉기의 원인을 탐구하려 했으나, 소설에서는 마지막 장에서 안드레이 볼콘스키의 아들이 데카브리스트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정도로만 다루어진다. 소설은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드르 1세 같은 영웅적 개인보다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 자체에 주목하는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톨스토이 자신은 『전쟁과 평화』를 소설로 여기지 않았다. 이는 당대 사실주의 작가들이 소설을 사회 문제를 다루는 틀로 여겼던 경향과 관련이 있는데,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산문으로 쓰인 서사시에 가깝다고 보았다.[45] 그는 『안나 카레니나』를 자신의 첫 소설이라고 생각했다.[46]
『안나 카레니나』 이후 톨스토이는 기독교적 주제에 더욱 집중했으며,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이나 『무엇을 해야 할까?』 같은 후기 작품에서는 급진적인 무정부 평화주의적 기독교 사상을 펼쳤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결국 1901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47] 종교적 전환 이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 예술을 엘리트주의적인 '가짜 예술'로 비판하며, 인류애에 기반한 보편적 예술을 추구했다.
소설 『부활』에서는 인간이 만든 법의 부조리와 제도화된 교회의 위선을 고발하고자 했다. 또한 말년에 지지했던 조지즘 경제 철학을 탐구하고 설명하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동시대 작가들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의 소설에 감탄했으며,[50]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전쟁과 평화』 번역본을 읽고 "어떤 예술가이며 어떤 심리학자인가!"라고 극찬했다. 톨스토이의 시골 저택을 자주 방문했던 안톤 체호프는 "문학에 톨스토이가 있다는 것은 작가로서 살아가기 쉽고 즐거운 일"이라며, "그가 하는 일은 문학에 쏟아지는 모든 희망과 열망을 정당화한다"고 썼다.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슈 아놀드는 "톨스토이의 소설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삶의 한 조각"이라고 평했다.[4] 아이작 바벨은 "만약 세상이 스스로 글을 쓸 수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쓸 것"이라고 말했다.[4]
후대의 작가들 역시 톨스토이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했지만,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아서 코넌 도일은 그의 진지함과 세밀함에 감탄하면서도 "느슨한 구성과 비현실적인 신비주의"에는 거부감을 느낀다고 밝혔다.[51] 버지니아 울프는 그를 "모든 소설가 중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했으며,[4] 제임스 조이스는 "결코 지루하거나 어리석거나 지치거나 훈계하거나 연극적이지 않다"고 극찬했다. 토마스 만은 톨스토이의 예술이 "자연과 매우 흡사하게 작용한 드문 경우"라고 평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안나 카레니나』를 높이 평가했지만, 『전쟁과 평화』의 명성에는 의문을 제기하고 후기 작품인 『부활』과 『크로이처 소나타』는 비판했다. 그럼에도 나보코프는 톨스토이를 "가장 위대한 러시아 산문 소설 작가"라고 불렀다.[52]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하지 무라트』를 "산문 소설의 숭고함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시금석이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이야기"라고 극찬했다.[53] 윌리엄 포크너는 가장 위대한 소설 세 편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14] 비평가 게리 솔 모슨은 『전쟁과 평화』를 모든 소설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았다.[15]
3. 2. 대표작
톨스토이는 러시아 문학의 거장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그의 작품으로는 소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하지 무라트』 및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같은 중편소설이 유명하다.
톨스토이의 초기 작품인 자전적 소설 3부작 『어린 시절』(1852), 『소년 시절』(1854), 『청춘』(1856)은 부유한 지주 아들의 성장 이야기와 그가 자신과 농민 사이의 깊은 간극을 서서히 깨닫는 과정을 그린다. 톨스토이 자신은 후에 이 작품들을 감상적이라고 평가절하했지만, 그의 삶이 잘 드러나 있으며 성장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크림 전쟁 당시 포병 연대의 소위로 복무했으며, 이때의 경험은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56)에 기록되었다. 전쟁 경험은 그의 이후 평화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후기 작품에서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42]
톨스토이의 소설은 그가 살았던 러시아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일관된 시도를 보여준다.[43] 『코사크』(1863)는 코사크 소녀와 사랑에 빠진 러시아 귀족의 이야기를 통해 코사크 민족의 삶과 문화를 묘사한다. 대표작 중 하나인 『안나 카레니나』(1877)는 사회의 관습과 위선에 갇힌 불륜 관계의 여성과, 농민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의 삶을 개혁하려는 철학적인 지주(톨스토이 자신과 유사한 인물)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다룬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의 피에르 베주호프와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 『부활』의 네흘류도프 공작 등 자신을 투영한 인물들을 창조했다. 그의 작품을 번역한 리처드 피비어는 톨스토이의 독특한 스타일에 대해 "그의 작품들은 도발과 풍자로 가득 차 있으며, 광범위하고 정교하게 발전된 수사적 장치로 쓰여졌다"고 평가했다.[44]
『전쟁과 평화』(1864-69)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로 널리 인정받으며, 방대한 서사적 폭과 통일성을 자랑한다. 580여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며, 많은 역사적 인물과 허구적 인물들이 섞여 있다. 이야기는 가정생활에서 나폴레옹의 본부로, 알렉산드르 1세의 궁정에서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보로디노 전투의 전장으로 넘나든다. 톨스토이는 원래 데카브리스트 봉기의 원인을 탐구하려 했으나, 소설에서는 마지막 장에서만 암시적으로 다루어진다. 이 소설은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드르 1세 같은 개인의 역할은 역사에서 미미하다는 톨스토이의 독특한 역사 이론을 탐구한다. 흥미롭게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소설로 여기지 않았는데, 이는 19세기 사실주의 작가들이 소설을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틀로 보았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45]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산문 서사시로 간주했으며, 『안나 카레니나』를 자신의 첫 소설이라고 불렀다.[46]
『안나 카레니나』 이후 톨스토이는 기독교적 주제에 더욱 집중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후기 작품에서는 급진적인 무정부 평화주의 기독교 철학을 발전시켰고, 이는 결국 1901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47] 종교적 전환 이후 그는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 현대 문화를 엘리트주의적인 "가짜 예술"로 비판하며, 보편적 형제애를 추구하는 기독교 예술을 지향했다.
소설 『부활』(1899)에서는 인간이 만든 법의 부조리와 제도화된 교회의 위선을 폭로하고자 했다. 또한 이 작품에는 그가 말년에 강력히 지지했던 조르지즘 경제 철학에 대한 탐구와 설명이 담겨 있다.
톨스토이는 1850년대에 이반 투르게네프나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의 영향을 받아 극작을 시작했다. 그의 대표적인 희곡으로는 러시아 농민의 어두운 삶을 그린 자연주의 작품 『어둠의 힘』(1886), 시골 귀족의 공허한 생활을 풍자한 『교육의 열매』(1891), 기독교적 자기희생과 결혼 제도의 문제를 다룬 『살아있는 시체』(1911) 등이 있다. 『어둠의 힘』은 실화에 바탕을 두었으며, 러시아 내 상연이 금지되어 프랑스에서 초연되었다. 『산송장』은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와 『부활』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각색되어 상연되기도 했다.[175]
이 외에도 톨스토이는 군 복무 중 여러 군가를 썼고, 민요 스타일의 운문 동화 『볼가-보가티르』, 『어리석은 자』 등을 시도했다. 이 작품들은 1871년에서 1874년 사이에 어린이 교육을 위해 편찬한 『독서용 러시아 책』에 실렸다. 하지만 그는 시라는 장르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으며, "시를 쓰는 것은 쟁기질과 춤을 동시에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48][49]
연도 | 제목 | 원제 |
---|---|---|
1852 | 어린 시절 | Детство |
1854 | 소년 시절 | Отрочество |
1855-56 | 세바스토폴 이야기 | Севастопольские рассказы |
1856 | 청춘 | Юность |
1859 | 행복한 가정 | Семейное счастье |
1852-63 | 코사크 | Казаки |
1864-69 | 전쟁과 평화 | Война и мир |
1872 | 카프카스의 포로 | Кавказский пленник |
1873-77 | 안나 카레니나 | Анна Каренина |
1878-82 | 참회록 | Исповедь |
1879-80 | 교의신학 연구 | Исследование догматического богословия |
1885 | 바보 이반 | Сказка об Иване-дураке и его двух братьях |
1886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Смерть Ивана Ильича |
1886 | 어둠의 힘 | Власть тьмы |
1887 | 빛은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 Ходите в свете покА есть свет |
1889 | 인생론 | О жизни |
1889 | 크로이처 소나타 | Крейцерова соната |
1890 | 세르기우스 신부 | Отец Сергий |
1891-93 |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 | Царство божие внутри вас |
1895 | 주인과 하인 | Хозяин и работник |
1897-98 | 예술이란 무엇인가 | Что такое искусство? |
1889-99 | 부활 | Воскресение |
1900 | 살아있는 시체 | Живой труп |
1902-1904 | 위조 쿠폰 | Фальшивый купон |
1904 | 베툼 오피나테! (뉘우쳐라!) | Одумайтесь! |
1896-1904 | 하지 무라트 | Хаджи-Мурат |
1908 | 인도인에게 보내는 편지 | A Letter to a Hindu |
1903-1910 | 독서의 고리 | Круг чтения |
3. 3. 후기 작품의 사상적 경향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에는 삶을 사랑하는 예술가적 면모와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면모가 공존하며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후기로 갈수록 그는 '삶을 사랑하는 시인'에서 벗어나 '인생의 교사'이자 '삶의 재판관'이 되기를 갈망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작품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안나 카레니나』 이후 톨스토이는 기독교적 주제에 깊이 몰두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년), 『무엇을 해야 할까?』와 같은 후기 작품들에서는 급진적인 무정부 평화주의에 기반한 기독교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사상으로 1901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47] 종교적 개종을 겪은 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를 포함한 기존의 서구 문화를 엘리트주의적인 '가짜 예술'로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예술이 자신이 추구하는 보편적 형제애에 기반한 기독교적 예술과 거리가 멀다고 보았다.
후기 대표작 중 하나인 『부활』에서는 인간이 만든 법의 부조리와 제도화된 교회의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또한, 말년에 강력하게 지지했던 조르지즘 경제 철학을 탐구하고 설명하는 데 힘썼다.
톨스토이의 후기 사상은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비폭력주의는 간디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1908년 톨스토이가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아 쓴 ''힌두교도에게 보내는 편지''([64])를 읽은 간디는 톨스토이와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26]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간디가 비폭력 저항에 대한 신념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간디는 자서전에서 톨스토이를 "현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비폭력 사도"라고 칭송했다. 두 사람의 교류는 짧았지만,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세운 공동체에 '톨스토이 농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65] 또한 톨스토이는 채식주의의 신봉자였으며, 이는 그의 여러 에세이 주제이기도 했다.[66]
톨스토이는 의화단 운동을 계기로 중국 철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67] 그는 공자[68][69][70]와 노자의 저서를 읽었으며, ''중국적 지혜''와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중국 지식인 구홍명과 서신을 교환하며 중국이 일본처럼 서구화되기보다는 농업 국가로 남기를 조언했고, 강유위의 무술 변법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71] 그의 비폭력 사상은 중국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사회주의 연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72]
톨스토이는 제국주의적 침략과 전쟁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는 팔국 연합(러시아 포함)이 청나라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인 잔혹 행위를 강력히 규탄했으며,[73][74] 필리핀-미국 전쟁과 제2차 보어 전쟁에도 반대했다.[75] 특히 의화단 운동 진압 당시 연합군의 약탈, 강간, 학살 등 "기독교적 잔혹 행위"를 비난하며,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지목했다.[76][77] 그는 이러한 개입을 "그 불의와 잔혹함으로 인해 끔찍한 것"이라고 묘사했으며,[78] ''중국인들에게''라는 서한과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79][80]
또한 톨스토이는 평화주의 신념을 실천하는 두호보르파에 깊이 공감하여, 그들이 박해받을 때 국제 사회에 이를 알리고 캐나다 이주를 도왔다.[81][82] 그의 사상은 반전, 반정부 성향의 종교 집단인 메노나이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83][84]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규탄하며 일본의 불교 승려 소연 석우에게 편지를 보내 공동 평화 성명을 발표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에스페란토 운동의 주요 지지자이기도 했다.
한편, 톨스토이는 운문으로 된 민요 스타일의 동화 몇 편을 쓰기도 했지만, 장르로서의 시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시를 쓰는 것은 쟁기질과 춤을 동시에 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으며, 푸시킨을 포함한 시인들이 운율을 맞추기 위해 "거짓된" 수식어를 남용한다고 비판했다.[48][49]
4. 사상
톨스토이의 사상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큰 영향을 받으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55] 그는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금욕적인 도덕성과 완전한 자기부정의 개념에 깊이 공감했으며, 이를 통해 자발적인 가난과 같은 삶의 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56]
그의 사상 체계 중심에는 기독교 신앙, 특히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있었다. 톨스토이는 예수의 가르침, 특히 '힘으로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계명을 평화주의와 비폭력 저항의 핵심 원리로 삼았다.[57] 그는 자신의 저서 《나의 신앙》과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 등을 통해 이러한 신념을 밝혔으며, 당시 교회가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가르침을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퀘이커교도들과의 교류 역시 그의 비폭력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57] 톨스토이의 이러한 비폭력 저항 사상은 후일 마하트마 간디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인도 독립운동을 비롯한 전 세계 비폭력 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톨스토이는 귀족 계급이 가난한 민중에게 짐이 된다고 믿었으며,[58] 사유재산으로서의 토지 소유에 반대하고 순결과 성적 금욕을 강조하는 등 기존 사회 제도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국가와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양심과 이성에 따른 삶을 강조하며 기독교 아나키즘 사상을 발전시켰다.[61] 크로포트킨 등 아나키스트 사상가들의 국가 비판에는 동의했지만, 폭력적인 혁명 수단에는 반대하며 오직 개인의 내면적, 도덕적 혁명을 통한 사회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3]
생애 말년에는 헨리 조지의 경제 사상에 깊이 공감하여 조지즘을 받아들였고, 토지 사유 제도의 부당함을 역설하며 이를 『부활』과 같은 작품에 반영했다.[85][86][87][88] 또한 윤리적, 영적인 이유로 채식주의를 받아들여 실천했으며, 툴라의 도축장 방문 경험 등을 통해 동물에 대한 폭력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96][98][99]
톨스토이의 사상은 그의 문학 작품과 함께 당대는 물론 후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내에서는 가르신, 체홉, 부닌 등 많은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다.[157] 소련 시대에도 레닌이 애독자였던 점 등으로 인해 그의 문학적 위상은 인정받았으나,[157] 그의 종교 및 사상적 측면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160]
4. 1. 기독교적 무정부주의
기독교 신앙은 톨스토이 삶의 중요한 핵심이었다. 그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에 대한 관념들을 보편적 형상으로 표현하고, 인류에게 해답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관념과 실천을 통해 절대적 자각자로서 자기완성에 이르고, 자기 구원과 인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다.톨스토이는 1894년 저술한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에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며, 이는 우리 개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죽기 직전인 1910년 11월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한다..."고 썼다. 그는 기독교의 영성을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과 죄인까지 모두 사랑하며,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의 단편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마태복음서 25장 40절의 가르침에 기반하며,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는 폭력이 문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그는 기독교 평화주의와 기독교 아나키즘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또한 말년에는 지공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큰 영향을 받아 점차 금욕적 도덕론자로 변모했다. 1869년 그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깊은 감탄과 영적인 기쁨을 표현하며 그 해 여름 많은 것을 배웠다고 기록했다.[55] 《고백》 6장에서 그는 쇼펜하우어의 글을 인용하며 완전한 자기부정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상대적인 무(無)를 초래한다는 설명을 받아들였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에서 나타나는 금욕적인 자기 포기를 성스러움으로 가는 길로 묘사한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깊이 공감한 톨스토이는 귀족 신분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의지의 부정을 선택했다. 그는 쇼펜하우어가 인용한 마태복음 19:24("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를 언급하며, 석가모니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처럼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이들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불가피한 고통의 바로 그 필요성은 구세주( 마태복음 19:24)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도 표현됩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그러므로 영원한 구원에 대해 매우 진지했던 사람들은 운명이 그들에게 이것을 거부하고 그들이 부유하게 태어났을 때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부처 석가모니는 왕자로 태어났지만 자발적으로 거지의 지팡이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구걸하는 수도회의 창시자는 젊은 시절 무도회에서 모든 유명인의 딸들이 함께 앉아 있던 자리에서 "프란체스코, 이제 곧 이 아름다운 여인들 중에서 선택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훨씬 더 아름다운 선택을 했습니다!" "누구를?" "''La povertà'' (가난):" 그 후 그는 곧 모든 것을 버리고 거지로 땅을 헤매었습니다.[56]
1884년, 톨스토이는 《나의 신앙》(What I Believe)을 통해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명확히 밝혔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특히 산상수훈과 "악에 폭력으로 저항하지 말라"는 계명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평화주의와 비폭력의 핵심 교리로 받아들였다.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에서는 기존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미국의 퀘이커교도들과 교류하며 조지 폭스, 윌리엄 펜, 조나단 다이몬드 등 퀘이커 교도들의 비폭력 저술에 영향을 받았다. 이후 예수의 말씀을 중심으로 편집된 "톨스토이 성경" 여러 판본이 출판되기도 했다.[57]

톨스토이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교회나 국가의 지도가 아닌,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을 따름으로써 내적 완성을 통해 지속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철학의 또 다른 핵심은 갈등 상황에서의 저항하지 않음이다.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에 담긴 이러한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비폭력 저항 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톨스토이는 귀족 계급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짐이 된다고 믿었으며,[58] 사유재산으로서의 토지 소유와 결혼 제도에 반대했다. 그는 순결과 성적 금욕을 중시했는데(이는 《세르기우스 신부》와 《크로이처 소나타》 서문에서 논의됨), 이러한 이상은 젊은 시절 간디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톨스토이의 엄격한 도덕적 견해에서 비롯된 열정은 그의 후기 작품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59] 예를 들어 《세르기우스 신부》의 유혹 장면이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주인과 일꾼》의 주인공들이 겪는 개인적 위기는 삶의 허무함을 드러낸다. 막심 고리키는 톨스토이가 《세르기우스 신부》의 한 구절을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886년, 톨스토이는 러시아 탐험가이자 인류학자인 니콜라이 미클루호-막라이에게 편지를 보내 인종 간의 차이를 강조하는 다인종 발생설을 반박했다. 미클루호-막라이는 인류가 하나의 종임을 증명한 초기 인류학자 중 한 명이었다. 톨스토이는 편지에서 "당신은 당신의 경험을 통해 인간은 어디에나 인간이며, 즉 친절하고 사교적인 존재이며, 총과 술이 아닌 친절과 진실을 통해 소통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최초로 증명했습니다."라고 썼다.[60]
4. 2. 비폭력 저항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은 후, 톨스토이는 점차 금욕적인 도덕론에 귀의하게 되었다. 1869년 그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깊은 감탄과 영적인 기쁨을 표현하며 큰 영향을 받았음을 밝혔다.[55] 『고백』 6장에서는 쇼펜하우어의 글을 인용하며 완전한 자아 부정이 상대적인 무(無)를 초래할 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설명했다.[56] 그는 기독교, 불교, 힌두교에서 말하는 금욕적인 자기 포기를 성스러움으로 가는 길로 받아들였고, 자발적인 가난과 의지의 부정을 선택했다. 이는 왕자였으나 거지가 된 석가모니나, 부유함을 버리고 가난(''La povertà'')을 선택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삶과 같은 맥락이었다.[56]1884년, 톨스토이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담은 책 『나의 신앙』(What I Believe)을 저술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특히 산상수훈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turn the other cheek)는 계명에 깊이 공감했다. 그는 이를 "힘으로 악에 저항하지 않는 계명"으로 이해하고 평화주의와 비폭력의 핵심 교리로 삼았다.[57] 그의 저서 『신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에서는 당시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미국 퀘이커교도들로부터 편지를 받아 조지 폭스, 윌리엄 펜, 조나단 다이몬드 등 퀘이커 신앙인들의 비폭력 저술을 접하기도 했다.[57] 톨스토이는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복음서의 가르침에 따라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의 단편 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마태복음서 25장 40절의 가르침을 반영하며,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는 폭력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악화시킬 뿐임을 보여준다.
톨스토이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란 교회나 국가의 지도가 아닌,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을 따름으로써 내적인 완성을 추구하고 지속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철학에서 중요한 또 다른 특징은 갈등 상황에서의 저항하지 않음이다. 톨스토이의 『신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에 담긴 이러한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비폭력 저항 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그는 귀족 계급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짐이 된다고 믿었으며,[58] 사유 토지 소유와 결혼 제도에 반대했다. 또한 순결과 성적 금욕을 중시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그의 후기 작품인 《세르기우스 신부》와 《크로이처 소나타》 서문 등에서 잘 드러난다.[59] 톨스토이는 인종차별에도 반대하여, 1886년 러시아 탐험가이자 인류학자인 니콜라이 미클루호-막라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로 다른 인류의 인종이 별개의 종이라는 다인종 발생설을 비판하며 "인간은 어디에서나 인간이며, 총과 술이 아닌 친절과 진실을 통해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60]
톨스토이는 기독교 아나키즘 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61]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곧 평화주의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국가가 필연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에 철학적인 아나키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톨스토이주의자들은 그의 동료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를 중심으로 형성된 소규모 기독교 아나키스트 그룹으로, 톨스토이의 종교적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61] 철학자 피터 크로포트킨은 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아나키즘 항목에서 톨스토이에 대해, 비록 스스로 아나키스트라 칭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와 재산권에 대해 아나키스트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평가했다. 크로포트킨은 톨스토이가 예수의 가르침과 이성을 바탕으로 교회, 국가, 법, 특히 재산법을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국가를 잔혹한 힘에 의존하는 악당들의 지배로 묘사하고 잘 조직된 정부보다 강도들이 덜 위험하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62]
톨스토이는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수많은 에세이를 통해 국가에 대한 아나키스트적 비판을 이어갔고, 독자들에게 크로포트킨과 프루동의 저서를 추천했다. 그러나 그는 폭력적인 혁명 수단에 대해서는 아나키즘의 입장을 거부했다. 1900년에 쓴 에세이 "무정부 상태에 관하여"에서 그는 "아나키스트들은 기존 질서의 부정과 권위 부재 시 현재보다 더 나쁜 폭력은 없을 것이라는 주장에서 옳다. 다만 혁명으로 무정부 상태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틀렸다"고 지적하며, 진정한 혁명은 오직 도덕적인 혁명, 즉 내면의 인간의 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6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나키스트 폭력에 대한 우려 속에서도 러시아 아나키스트 사상가들의 금지된 출판물을 유포하는 위험을 감수했으며,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불법 출판된 크로포트킨의 "반역자의 말" 교정을 돕기도 했다.[63]
톨스토이의 비폭력주의 사상은 국경을 넘어 로맹 롤랑과 마하트마 간디 등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으며, 특히 간디는 이를 인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비폭력 저항의 원칙으로 삼아 실천했다.
4. 3. 조르지즘
톨스토이는 생애 말년에 조지즘의 경제 이론과 사회 철학에 깊이 몰두했다.[85][86][87] 그는 조지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그의 파문의 주요 원인이 된 소설 『부활』(1899)과 같은 작품에 반영되었다.[88] 톨스토이는 헨리 조지를 매우 존경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조지의 가르침에 대해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달리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89] 그는 또한 조지의 저널 『사회 문제(Social Problems)』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톨스토이와 조지는 모두 토지 소유권(톨스토이가 심하게 비판했던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을 거부했다. 그들은 또한 중앙 계획 경제도 거부했다. 조지즘은 토지 임대료(land rent)를 징수하여 사회 기반 시설에 사용하기 위한 행정부를 필요로 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러한 조지즘 옹호가 톨스토이를 그의 무정부주의적 견해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 무정부주의적 조지즘의 변형들이 제안되기도 했다.[91]
소설 『부활』에서 귀족 드미트리 네흘류도프는 토지는 본질적으로 소유될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이 토지 자원과 그 혜택에 동등하게 접근할 권리가 있음을 깨닫는데, 이는 톨스토이가 조지즘적 견해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톨스토이의 미완성 희곡 『어둠 속의 빛(The Light that Shines in the Darkness)』과 단편 소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How Much Land Does a Man Need?)"와 같은 다른 작품들은 공동 자원을 위한 집단 토지 임대료를 관리하는 지역 자치를 가진 소규모 공동체에 대한 톨스토이의 지지를 시사한다. 동시에 이 작품들은 국가 기관, 특히 사법 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
4. 4. 채식주의와 동물권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아버지에게 사냥을 배워 열정적인 사냥꾼으로 활동했다. 그는 오리, 메추라기, 삽새, 나무수리, 수달 등 다양한 동물을 사냥했으며,[93][94] 그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도 사냥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92] 1852년 3월 23일자 일기에는 "날씨가 훌륭했습니다. 사냥을 나가서 한 시까지 구릉지대를 말을 타고 돌아다녔습니다. 오리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95] 그러나 수십 년간 사냥을 즐겼던 톨스토이는 1880년대에 이르러 살생에 대한 윤리적 고민 끝에 사냥을 중단하고, 이후 사냥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가 되었다.[96] 1890년에는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가 쓴 반(反)사냥 소책자 Zlaia zabava: Mysli ob okhote|즐라이아 자바바: 미슬리 오프 아호테ru(악한 오락: 사냥에 대한 생각)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97] 사냥은 그만두었지만, 승마에 대한 애정은 평생 이어졌다.[92]톨스토이는 1882년부터 채식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그의 삶에 자리 잡았다.[96] 1885년 가을, 톨스토이를 방문했던 윌리엄 페이(Vladimir Konstantinovich Geins)는 그가 채식주의자가 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96] 초기에는 간혹 육류를 섭취하며 채식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기도 했으나,[96] 1890년부터는 엄격한 채식을 시작하여 이후 의식적으로 이를 어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96] 그의 아내 소피아는 채식이 영양 부족과 소화 장애를 일으킨다고 우려했지만, 톨스토이 자신은 채식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기는커녕 오히려 좋아졌다고 주장했다.[96] 일부 비평가들은 그가 채식을 시작한 후 문학적 재능이 쇠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96]
톨스토이가 채식을 선택한 것은 윤리적, 영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채식을 "삶에 대한 높은 도덕적 관점"과 연결 지었으며,[96] 사냥과 육식 모두 동물에게 불필요한 잔혹함을 가하는 도덕적 악으로 간주하고 과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96] 1891년, 그는 체르트코프를 통해 하워드 윌리엄스의 저서 ''The Ethics of Diet''를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의 딸들에 의해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고, 톨스토이는 1893년 출판된 번역본에 "첫걸음"이라는 제목의 서문을 썼다.[98] 이 서문에서 그는 툴라의 도축장을 방문했을 때 목격한 잔혹한 광경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이 경험이 육식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96] 그는 이 수필에서 육식은 "단순히 비도덕적이며, 도덕적 감정에 반하는 행위인 살인을 수반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99]
채식을 실천하면서 톨스토이는 매일 달걀을 먹었으나, 한 친구가 달걀 섭취 역시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네, 달걀을 먹는 것을 그만두어야 했어요. 적어도 지금부터는 그만둘 거예요"라고 답하며 달걀 섭취를 중단했다.[100] 1903년경에는 식단에서 달걀을 완전히 제외했다. 톨스토이를 방문했던 바실리 로자노프는 그의 집 식탁에서 가족과 손님들은 육류와 스크램블 에그를 먹었지만, 톨스토이 자신은 카샤와 같은 채식 메뉴를 고수했다고 기록했다.[101] 톨스토이는 네덜란드 의대생 A. D. Zutphen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건강은 나빠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유, 버터, 달걀뿐만 아니라 설탕, 차, 커피를 끊은 이후로 실제로 상당히 좋아졌습니다."라고 쓰며 채식의 긍정적인 효과를 강조했다.[97] 그의 채식 식단은 주로 오트밀 죽, 통밀 빵, 양배추나 감자 수프, 메밀, 삶거나 튀긴 감자, 사과와 자두 컴포트 등으로 구성되었다.[102]
5. 한국에 미친 영향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레프 톨스토이가 한국에 미친 영향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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