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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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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조는 조선의 제23대 왕으로, 1790년에 태어나 1800년 정조의 뒤를 이어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순조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시기에 왕위에 올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홍경래의 난, 삼정의 문란 등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어려움을 겪었다. 재위 기간 동안 1819년 풍양 조씨를 등용하고,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등 세도 정치를 견제하려 노력했으나, 1834년 44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처음에는 장릉에 묻혔으나 헌릉으로 이장되었으며, 1857년 묘호가 순조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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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4년 부산 용두산 화재로 크게 손상된 순조의 초상화
이름순조
한국어 이름순조
한자 이름純祖
이공 (李玜)
로마자 표기Sunjo
즉위1800년 8월
퇴위1834년 12월 13일
재위 유형재위
전임자정조
섭정효명세자 (1827–1830)
후임자헌종
배우자순원왕후 (1802년 결혼)
배우자 유형배우자
자녀효명세자
철종 (양자)
가문전주 이씨
가문 유형씨족
아버지정조
어머니수빈 박씨
출생일1790년 7월 29일
출생지창경궁 집복헌, 한성부, 조선
사망일1834년 12월 13일
사망지경희궁 회상전, 한성부, 조선
매장지헌인릉, 인릉, 서울, 대한민국
서명
종교한국 유교 (성리학)
시호 (조선)문안무정영경성효대왕 (文安武靖英敬成孝大王)
시호 (대한제국)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 (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묘호순종 (純宗) → 순조 (純祖)
공보 (公宝)
순재 (純斎)
청나라 시호선각왕 (宣恪王)
연호
연호없음
가족
자녀1남 4녀 (2남 4녀)
아들효명세자
명온공주
영온옹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왕세자
작위조선국 왕세자
재위1800년 1월 1일 ~ 1800년 7월 4일 (음력)
전임자문효세자
후임자효명세자

2. 생애

1790년 왕세손으로 태어난 이공(李玈)은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열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802년에는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순원왕후)과 혼인하였다.[2]

순조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조는 정치 개혁을 추진했으나, 과거 시험 문란과 관료 인사의 부패 등으로 인해 1811년부터 1812년까지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여러 봉기가 발생했다.[3] 이 시기에는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4]

1811년 조선 통신사의 배


1811년, 조선은 마지막으로 일본에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순조는 35년간 재위하였으며, 1834년 4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처음에는 장릉(파주)에 묻혔으나, 풍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헌인릉으로 이장되었다.[5]

2. 1. 탄생과 즉위

정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의 딸 수빈 박씨이다. 1790년(정조 14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사랑하는 첫아들 문효세자를 잃은 뒤 후사가 없어 근심하던 정조는 아들이 태어나자 크게 기뻐하였다.[10]

1800년(정조 24년) 1월 1일 세자에 책봉되었으며,[11] 같은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12]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즉위와 함께 왕의 법적 증조모이자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김씨(정순왕후)가 3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13]

2. 2. 수렴청정기 (1800년 ~ 1803년)

정조의 승하 후, 1800년 음력 7월 4일 열 살의 순조가 즉위했다. 순조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 폐위에 찬성했던 벽파와 뜻을 같이하여, 수렴청정 기간 동안 벽파가 정권을 잡았다. 이들은 정조 때 집권 세력이었던 시파를 숙청하고, 1802년(순조 2년) 장용영을 혁파했다.

정순왕후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순조 재위 기간 동안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지위가 쟁점이 되기도 했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정조의 어머니로서 존경받았으나, 순조 즉위 후 지위가 낮춰졌다. 순조가 이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2]

1801년(순조 1년), 대왕대비 김씨(정순왕후)는 공노비 6만 6천여 명을 양민으로 삼도록 하고, 승정원에 명하여 노비안(奴婢案)을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게 하였다.[15]

이 시기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4]

2. 2. 1. 신유박해

정순왕후벽파천주교를 주자학 이외의 거짓 학문인 사학(邪學)으로 간주하여 강경책을 펼쳤다. 정순왕후1801년(순조 1년) 천주교 엄금에 관한 하교를 내렸다.[14]

정순왕후는 하교에서 천주교를 어버이도 임금도 없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으로 규정하고, 정조 시대부터 엄금했으나 근절되지 않고 오히려 기호(경기, 충청)까지 확산되었다고 언급했다. 이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과 청나라 출신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고, 남인시파 주요 인물들도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등이 처형되고, 정약용 등은 유배되었다. 은언군은 아내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세례를 받은 사실 때문에 사사되었다. 이로 인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14]

정순왕후는 사교금압(邪敎禁壓)을 통해 천주교도들을 교화하고, 그래도 따르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밝혔다. 오가작통법은 천주교도를 색출하는 데 이용되었다.[4]

같은 해 황사영은 황사영 백서 사건을 일으켜 청나라 북경의 주교에게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 상황을 알리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14]

2. 2. 2. 공노비 해방

1801년(순조 1년), 대왕대비 김씨는 윤음을 내려 공노비 중 내노비 36,974구와 시노비 29,093구 등 6만 6천여 명을 모두 양민으로 삼도록 하고, 승정원으로 하여금 노비안(奴婢案)을 거두어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게 하였다.[15]

2. 3. 세도 정치기 (1803년 ~ 1827년)



순원왕후의 아버지이자 순조의 장인이다. 김조순을 주축으로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정조가 승하한 후, 순조는 1800년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2] 1802년, 순조는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그녀가 훗날 순원왕후가 되었다.

순조는 즉위 초기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정순왕후의 섭정 기간 동안,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지위 문제가 쟁점이 되기도 했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정조의 어머니로서 존경을 받았으나, 순조 즉위 후 지위가 낮춰졌고, 순조가 이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2]

순조는 정치 개혁을 추진했으나, 기본적인 통치 원리는 악화되었다.[3] 과거 시험은 문란해지고, 관료 인사에 부패가 만연하여 사회 혼란이 초래되었다. 1811년부터 1812년까지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여러 봉기가 발생했다.[3] 이 시기에 다섯 집을 한 단위로 묶는 호적 제도인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4]

1811년, 조선은 마지막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여정의 기록을 바탕으로 국립해양박물관에 조선시대 외교선박이 복원되었다.

2. 3. 1. 세도 정치의 시작

탕평책이 실패하고 붕당 정치가 약화되면서, 특정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어 국정이 운영되는 세도정치가 등장하였다. 이로 인해 순조 시기부터 헌종과 철종에 걸쳐 3대 60여 년간 왕의 외가와 처가 일족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었다. 또한 순조 이전부터 국정을 주도하던 비변사가 세도정치 시기의 권력 핵심 기구로 부상하면서 육조의정부가 무력화되었다.[16]

1803년(순조 3년), 대왕대비 김씨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과 그 일파에 의해 실각하면서 수렴청정을 거두었다.[16] 이후 순조는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이 장악했다.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이들은 비변사의 요직을 독점하였고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세도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순조의 장인 김조순과, 순조의 외숙부인 박종경 등으로, 순조 중기에는 안동 김씨 주도하에 반남 박씨가 공존하는 양상을 띠었다. 이들은 정계 요직을 장악하였다. 순조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줄이고자, 자신의 외가인 반남 박씨와 세자빈의 가문인 풍양 조씨 등을 기용하며 권력을 분산시켰다.

순조의 재위 후반기에는 김조순이 죽고 그의 아들인 김좌근이 군국 사무를 관장하였으며 일가 친척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의 세도가문들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고 하층민을 착취하였으며, 뇌물수수와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다.

2. 3. 2. 삼정의 문란

순조 재위 기간에는 탕평책 실패와 붕당 정치 약화로 세도정치가 나타났다. 이로 인해 순조부터 헌종, 철종에 이르기까지 3대 60여 년간 왕의 외척 세력이 정치를 좌우했다. 비변사는 세도정치의 핵심 기구로 부상했고, 육조의정부는 무력화되었다.

세도정치 시기에는 과거제가 문란해져 안동 김씨 일족에게 줄을 대는 것이 관직 진출의 지름길이 되었다. 양반 관료 체제는 안정을 잃었고, 중간 수탈의 가중으로 국가 조세 체계도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와 토호의 수탈은 주로 농민층에게 집중되어 지주전호제의 압박을 받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전정, 군정, 환곡은 본래 기능을 상실하고 백성을 착취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며, 이러한 '삼정의 문란'이 사회 전반에 만연했다.

2. 4. 사회 혼란

순조 재위 기간 동안 과거 시험이 문란해지고 관료 인사에 부패가 만연하면서 사회 혼란이 심화되었다. 1811년부터 1812년까지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여러 봉기가 발생했다.[3] 이 시기에는 다섯 집을 한 단위로 묶는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4]

2. 4. 1. 홍경래의 난

1811년(순조 11년) 12월부터 1812년(순조 12년) 5월까지 5개월에 걸쳐 발생한 홍경래의 난은 순조 시대에 평안도 일대에서 발생한 대규모 농민 반란이었다. 홍경래 등은 부농과 사상(私商)을 규합하였고, 여기에 삼정의 문란 속에서 서북 지역에 대한 차별과 봉건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까지 가세하였다.

반란이 일어나자 순조는 관서의 도신(道臣), 수신(帥臣), 수령, 문무 사민(文武士民), 이서(吏胥), 군교(軍校)에게 유시를 내렸다.

반란군은 가산, 박천, 곽산, 선천, 정주성을 점령하고 세를 확장하여 한때 청천강 이북을 점령하였으나 관군과의 항전 끝에 모두 진압되었다. 홍경래는 전란 중에 사망하여 이후 참수되었고, 우군칙 등 반란의 관계자들 역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또한 정주성에서 생포된 백성 2,983명 중, 여자 842명과 10세 이하의 남자아이 224명을 제외한 1,917명 모두 처형된 후 효수되었다.[17]

2. 4. 2. 자연재해와 기근

순조 연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수십 차례에 걸쳐 기우제를 행하였다. 19세기 초반의 이상저온현상으로 봄 날씨가 매우 건조하고, 가뭄이 잦아 곡식과 작물의 재배가 힘들어졌고, 농민들은 유리걸식 하였다.[18]

1803년(순조 3년), 평안도함경도에 재해가 발생하고 강화에는 기근이 들었다. 1804년(순조 4년), 평양성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5,000호가 연소하자 위휼하였다.

1809년(순조 9년), 전라도충청도에 큰 흉년이 들어 세를 감면하였다. 1814년(순조 14년)에는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에 기근이 들었다. 1832년(순조 32년)에도 경기, 충청, 황해도에 대기근이 발생하였다.

순조는 매년 기우제를 지냈으나 가뭄이 가장 극심했던 1809년(순조 9년)부터 1811년(순조 11년) 까지는 무려 33회에 걸쳐 기우제를 지냈다. 가뭄이 발생하지 않는 해에는 홍수역병이 돌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다.

1814년(순조 14년), 함경도 갑산삼수, 경상도에 대대적인 홍수가 발생하였고, 1815년에도 홍수가 발생하였다.[19] 1818년에는 황해도 신천에서, 1819년에는 충청도 공주에서 홍수가 발생하였다. 1821년(순조 21년)에는 역병이 돌아 많은 백성들이 사망하였다.

2. 4. 3. 이양선의 출현

1816년(순조 16년) 7월 19일, 충청 수사 이재홍의 장계에 따르면, 충청도 마량진 갈곶 밑에서 영길리국(영국)의 이양선이 나타났다.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은 이양선에 있던 사람들과 언문이나 한자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장계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들의 배에 들어가보니 내부는 무척 컸고,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배는 무척 빠른 속도로 바다를 빠져 나갔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들이 영국인임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준 한 폭의 서전에서 영길리국이라는 국명이 나왔기 때문이었다.[20]

1832년(순조 32년) 7월 21일에는 '로드 애머스트(The Lord Amherst)' 호(號)가 공충도 홍주의 고대도(古代島)[21] 해안에 나타났다. 이 배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간첩 휴 해밀턴 린지가 타고 있었다. 그는 카를 귀츨라프와 함께 광둥 이북에서의 무역 확장을 타진하기 위해 청나라 여러 해안의 항구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측량 및 제도하고, 정치·경제·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22][23] 이 배의 선원들과 홍주 목사 이민회(李敏會)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는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었다. 이들은 영길리국의 배이며, 청나라와 국력이 대등하여 조공을 바치지도 않는다고 했다. 영길리국의 정보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조선에게 교역을 하고 싶다는 청을 여러번 했으나, 조선 측에서는 강력히 거부하며, 이들이 원하는 물품들을 제공하고 이들을 되돌려 보냈다.[24]

조선 조정은 이양선이 해안가에 나타나면 최대한 빨리 바다로 내보내고, 이들에 대한 기록을 청나라 조정에게 보고하는 것을 기본 대처 방안으로 삼았다. 《순조실록》에 기록된 이양선은 모두 영국의 배였다.

2. 4. 4. 한양의 쌀 폭동

영조, 정조 시대부터 사상(私商)이 성장하고 부농이 늘어나면서 이들은 지주들과 결탁하여 시장의 쌀값과 물가를 조종하였다. 은 주식이며 농민들에게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으므로 쌀값의 상승은 이미 이전부터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1833년(순조 33년), 경강상인들은 쌀을 모아놓고 높은 가격을 책정하여 시장 경제를 교란시켰는데, 원하는 만큼 쌀값이 형성되지 않으면 쌀을 시중에 풀지 않는 일이 잦았다. 이에 한양의 쌀값이 치솟자, 이를 견디지 못한 난민들이 가게를 부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였다.[25] 난동을 부린 주모자들은 붙잡혀 처형되었으며 상인 2명도 처형되었다.[26]

이후 조정에서는 난민들을 선동한 주모자는 강하게 처벌하고, 난민들과 상인들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상인들의 곡식 무역을 죄로 삼지 않는다는 점과, 시장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을 경계하고 를 속이고 물을 섞어 곡식을 판매하는 행위를 강하게 처벌하는 등의 자구책을 마련하였다.[27]

2. 5. 재위 후반

1802년, 순조는 열세 살의 나이로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순원왕후)과 혼인하였다. 순조는 정치 개혁을 추진했으나, 과거 시험 문란과 관료 인사의 부패 등으로 인해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여러 봉기가 발생했다.[3] 이 시기에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4]

1811년, 조선은 마지막으로 일본에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순조는 35년간 재위하였으며, 1834년 4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처음에는 파주 장릉에 묻혔으나, 풍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헌인릉으로 이장되었다.[5]

2. 5. 1. 대리청정

순조는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대리청정 3년 만에 세자가 요절하면서 막을 내렸다.[2]

2. 5. 2. 궁궐 화재

1803년(순조 3년), 임진왜란 이후 법궁인 창덕궁 인정전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1829년(순조 29년) 10월, 경희궁 융복전과 회상전, 집경당 등이, 1830년(순조 30년)에는 창경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과 통명전 등 400여 칸의 전각이 전소되었다.

1833년(순조 33년), 창덕궁에서 발생한 화재로 대조전희정당, 징광루, 옥화당, 양심합 등 400여칸이 전소되었다.[28]

3. 최후

순조는 35년간 재위하였고, 4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처음에는 인조와 인렬왕후의 능인 장릉(파주)에 묻혔으나, 봉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후에 서울의 인릉으로 이장되었다.[5]

3. 1. 최후 및 능묘

말년의 순조는 자녀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크게 상심하여 웃음을 잃었다.[29]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소화불능 등의 병을 앓다가 1834년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30] 순조의 능은 인릉(仁陵)이며 순원왕후와 합장되어 있다.

순조는 35년간 재위하였고, 4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처음에는 인조와 인렬왕후의 능인 장릉(파주)에 묻혔으나, 봉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후에 서울의 인릉으로 이장되었다.[5]

순조와 순원왕후가 묻힌 인릉


인릉의 정자각과 비각

3. 2. 묘호 및 시호

처음 묘호는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년) 지돈녕 이학수, 영중추부사 정원용 등의 건의에 따라 '이단을 배척하여 천주교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홍경래의 난을 평정한 공'을 기려 묘호를 종(宗)에서 조(祖)로 바꾸어 '''순조'''(純祖)로 개칭되었다.[31]

대한제국 고종 때 황제로 추존되면서 '''숙황제'''(肅皇帝)의 시호가 추가되었다.

4. 가족 관계

배우자자녀비고
순원왕후 김씨철종은 흥선대원군용성부대부인의 친생자이나, 순원왕후의 양자로 입적됨.
숙의 박씨영온옹주


  • 부친: 정조
  • 조부: 장조
  • 조모: 헌경왕후 홍씨
  • 모친: 수빈 박씨
  • * 외조부: 박준원
  • * 외조모: 원주 원씨


순조는 아들 둘과 딸 넷을 두었으나, 효명세자는 헌종을 남기고 요절하였다. 헌종의 딸(순조의 증손녀) 또한 요절하였다. 순조의 딸들 역시 자녀가 요절하거나 미혼으로 사망하여 자손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순조의 자손은 현재까지 이어지지 않고 있다. 헌종의 사망으로 정조의 남자 계통 자손 또한 단절되었다.

5. 순조가 등장하는 작품

다음은 순조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5. 1. 드라마

5. 2. 영화

참조

[1] 일반
[2] 논문 The changes of Hyegyonggung`s status at the time of King Yeongjo`s reign to King Sunjo`s one https://kiss.kstudy.[...] 2015-09
[3] 논문 A Study on the Progress for the Jungju Castle Battle occurred in 1812 and the Comparison of the Capabilities of the Government Forces with the Rebel Armies http://journal.kci.g[...] 2024-01-13
[4] 웹사이트 Cultural Heritage, the source for Koreans' Strength and Dream http://jikimi.cha.go[...] 2013-09-02
[5] 웹사이트 Heonilleung Royal Tomb Seoul, Korea http://www.exploring[...] 2013-09-02
[6] 웹사이트 소장품 안내 https://www.gogung.g[...] 2024-11-14
[7] 뉴스 조선 후기 왕들,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철저히 숨겼다 https://www.chosun.c[...] 2007-09-11
[8] 뉴스 清の諡号を隠した朝鮮後期の国王たち http://www.chosunonl[...] 2007-09-16
[9] 서적 만기요람
[10] 서적 정조실록 1790-06-18
[11] 서적 정조실록 1800-01-01
[12] 서적 정조실록 1800-06-28
[13] 서적 순조실록 1800-07-04
[14] 일반
[15] 서적 순조실록 1801-01-28
[16] 서적 순조실록 1803-12-28
[17] 서적 순조실록 1812-04-27
[18] 서적 순조실록 1834-01-01
[19] 서적 순조실록 1814-07-11
[20] 서적 순조실록 1816-07-19
[21] 일반
[22] 서적 조선 순조 1954
[23] 서적 中国近代史 中華書局 1977-07
[24] 서적 순조실록 1832-07-21
[25] 서적 순조실록 1833-03-08
[26] 서적 순조실록 1833-03-12
[27] 서적 순조실록 1833-03-17
[28] 서적 순조실록 1833-10-17
[29] 서적 순조 대왕 묘지문
[30] 서적 순조실록 1834-11-13
[31] 서적 철종실록 1857-08-10
[32] 일반 https://blog.daum.ne[...]
[33] 서적 승정원일기 1854-06-30
[34] 서적 순조실록 1820-05-26
[35]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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