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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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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민부는 1925년 북만주 지역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이다. 자유시 참변 이후 분열된 항일 무장 단체를 통합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할을 보완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신민부는 북만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만주 한국인 민족 연합회(KPAM)를 결성하는 등 아나키즘의 원칙을 따르며 활동했다. 하지만 군정파와 민정파의 갈등,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립, 그리고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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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부
개요
공식 명칭재만한족총연합회
한자 표기在滿韓族總聯合會
로마자 표기Jaeman Hanjok Chongyeonhaphoe
다른 명칭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한자 (다른 명칭)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로마자 표기 (다른 명칭)Jaeman Joseon Mujeongbujuuija Yeonmaeng
또 다른 명칭신민부
한자 (또 다른 명칭)新民府
로마자 표기 (또 다른 명칭)Sinminbu
1928년 한국무정부주의연맹 창립 멤버
1928년 KPAM 창립 멤버
상세 정보
시대전간기
존속 상태역사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자치주
지위자치 무정부 연합
정부 형태자치 자율 통치 협동 조직
역사
시작1929년 8월
해체해체됨, 1931년 9월
이전중화민국중화민국
이후만주국만주국
이후 2국민부
위치
무단장 시의 위치
무단장 시 지도
수도하이라인 (사실상)
인구
1930년2,000,000명
언어 및 민족
공용어한국어
민족한국인
정치
의장김좌진 (1929-1930)
기타
통화해당 없음
국기한국의 기 목록
김좌진 휘하의 한국 독립군이 사용한 깃발
김좌진 휘하의 한국 독립군이 사용한 깃발

2. 배경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이후 분열된 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하여 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1923년 1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불신을 받는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대립으로 5월에 회의가 결렬되었다. 이후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만이라도 통합을 이루고자 양기탁, 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1924년 7월 길림에서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全滿洲統會議壽備會)가 열렸고, 그 결과 1924년 10월 남만주 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로서 정의부가 결성되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발발한 후, 일본 제국조선에 개입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한반도를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한편, 만주 침공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러시아 역시 만주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후 러일 전쟁에서 일본 제국은 만주에서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막대한 이권을 확보하고 남만주 철도를 장악하여 다수의 남만주 철도 부설지구를 건설했으며, 궁극적으로는 군사력을 관동군으로 통합했다. 조선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따라 일본 제국에 공식적으로 병합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한국의 반체제 인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학술 단체와 군사 학교를 설립하여 대한 독립 운동을 준비했다. 3·1 운동이 탄압된 후, 더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로 도망쳐 망명지에서 한국 아나키즘 운동이 발전하게 되었다.

중화제국의 붕괴는 군벌 시대로 이어졌고, 만주는 장쭤린의 통제하에 놓였다. 일본 제국은 장쭤린이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제2차 직봉 전쟁이 발발한 1924년부터 그의 반공주의 때문에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장쭤린은 만주에서 한국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데 협력했다. 1927년 6월, 장쭤린의 봉천 군벌은 북양 정부를 장악하고 군사 독재 수립을 선포했다. 장쭤린이 국민혁명군과의 교전에 휘말리자, 일본 정부는 그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만주를 장악하려 했다. 1928년 6월, 북벌로 인해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도망쳐 기차를 타고 만주로 후퇴했다. 선양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그의 기차는 일본 제국 요원들에 의해 황고둔 사건으로 폭파되었고, 그와 다른 16명의 승객이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이 만주의 군벌이 되었으며, 그는 단호한 반일 감정을 보이며 국민 정부와 연대했다.

2. 1.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필요성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이후 분열된 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하여 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이 커졌다. 1923년 1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대립으로 5월에 결렬되었다. 이후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려는 노력으로, 1924년 7월 길림에서 양기탁, 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가 열렸고, 1924년 10월에는 남만주 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로서 정의부가 결성되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이후, 일본 제국조선에 개입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한반도를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만주 침공으로 러시아 제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러시아 역시 만주를 점령하고 있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 제국은 만주에서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막대한 이권을 확보하고 남만주 철도를 장악하여 남만주 철도 부설지구를 건설했으며, 군사력을 관동군으로 통합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조선이 일본 제국에 병합되자, 많은 한국의 반체제 인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학술 단체와 군사 학교를 설립하여 대한 독립 운동을 준비했다. 3·1 운동 탄압 이후 더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한국 아나키즘 운동이 발전하게 되었다.

중화제국 붕괴 이후 만주는 군벌 시대를 맞아 장쭤린의 통제하에 놓였다. 일본 제국은 처음에는 장쭤린을 암살하려 했으나, 1924년 제2차 직봉 전쟁 발발 이후 그의 반공주의 때문에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장쭤린은 만주에서 한국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데 협력했다. 1927년 6월, 장쭤린의 봉천 군벌은 북양 정부를 장악하고 군사 독재 수립을 선포했다. 장쭤린이 국민혁명군과의 교전에 휘말리자, 일본 정부는 그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만주를 장악하려 했다. 1928년 6월, 북벌로 인해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만주로 후퇴하던 중 황고둔 사건으로 폭사했다. 그의 뒤를 이어 반일 감정을 가진 장쉐량이 만주의 군벌이 되었으며, 그는 국민 정부와 연대했다.

2. 2. 국내외 정세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이후 분열된 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하여 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1923년 1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불신을 받는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대립으로 5월에 회의가 결렬되었다. 이후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만이라도 통합을 이루고자 양기탁, 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1924년 7월 길림에서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全滿洲統會議壽備會)가 열렸고, 그 결과 1924년 10월 남만주 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로서 정의부가 결성되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발발한 후, 일본 제국조선에 개입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한반도를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한편, 만주 침공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러시아 역시 만주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후 러일 전쟁에서 일본 제국은 만주에서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막대한 이권을 확보하고 남만주 철도를 장악하여 다수의 남만주 철도 부설지구를 건설했으며, 궁극적으로는 군사력을 관동군으로 통합했다. 조선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따라 일본 제국에 공식적으로 병합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한국의 반체제 인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학술 단체와 군사 학교를 설립하여 대한 독립 운동을 준비했다. 3·1 운동이 탄압된 후, 더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로 도망쳐 망명지에서 한국 아나키즘 운동이 발전하게 되었다.

중화제국의 붕괴는 군벌 시대로 이어졌고, 만주는 장쭤린의 통제하에 놓였다. 일본 제국은 장쭤린이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제2차 직봉 전쟁이 발발한 1924년부터 그의 반공주의 때문에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장쭤린은 만주에서 한국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데 협력했다. 1927년 6월, 장쭤린의 봉천 군벌은 북양 정부를 장악하고 군사 독재 수립을 선포했다. 장쭤린이 국민혁명군과의 교전에 휘말리자, 일본 정부는 그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만주를 장악하려 했다. 1928년 6월, 북벌로 인해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도망쳐 기차를 타고 만주로 후퇴했다. 선양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그의 기차는 일본 제국 요원들에 의해 황고둔 사건으로 폭파되었고, 그와 다른 16명의 승객이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이 만주의 군벌이 되었으며, 그는 단호한 반일 감정을 보이며 국민 정부와 연대했다.

3. 결성 과정

1925년 1월, 북만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북간도 목릉현(穆陵縣)에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였다.[1] 회의 결과, 같은 해 3월 10일 영안현(寧安縣) 영안성(寧安城)에서 신민부(新民府)가 조직되었다.[1] 신민부에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김좌진(金佐鎭), 남성극(南星極), 최호(崔灝), 박두희(朴斗熙), 유현(劉賢)과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의 김혁(金赫), 조성환(曹成煥), 정신(鄭信), 그리고 중동선교육회 회장 윤우현(尹瑀鉉) 등 북만 16개 지역 민선대표(民選代表) 및 10개의 국내 단체 대표들이 참여하였다.[1]

신민부 조직에서는 대한독립군단, 그 중에서도 김좌진 계열의 북로군정서 출신들이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1] 대한독립군정서 역시 북로군정서원들이 중심이었으며, 조성환·김혁·정신 등이 이에 해당한다.[1] 결국 신민부는 북로군정서 출신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1]

3. 1.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

만주에서 새 행정부의 반일 감정은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안전해지면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공간을 열었다. 1929년 7월 21일 하일린에서 '''만주 한국 아나키스트 연맹'''(KAFM)이 설립되었다. KAFM은 자유사회적 평등에 기반한 무정부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만주에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상호 원조를 제공하는 데 주력했으며, 자원은 "능력에 따라, 필요에 따라" 분배될 예정이었다.

이 무렵, 만주에는 참모본부, 정의부, 김좌진이 이끄는 흑룡강성 북부 만주의 '''신민부'''의 세 개의 자치 한국 기관이 설립되었다. 한국 민족주의에 의해 초기에 추진되었지만, 신민부는 이 지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점차 아나키즘의 원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1929년 8월, 신민부와 KAFM이 '''만주 한국인 민족 연합회'''(KPAM)로 통합되었으며,김좌진의장으로 선출되었다.

KPAM의 계획은 만주에서 협동 농업, 무상 교육 및 군사 교육 및 훈련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 주요 목표는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중국 지주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모두에 의한 착취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정착하고 토지를 경작하도록 돕기 위해 KPAM은 집단 농업을 도입하여 농산물의 생산 및 판매를 집단화했다.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KPAM에 협력했지만, 독립에 대한 민족주의적 목표는 한국 아나키스트의 상호 원조 원칙에 기반한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생존에 종속되었다. 독립적이고/거나 아나키스트 한국을 위한 선동적인 활동은 경제 프로그램을 유지하기 위해 연기되었다.

만주 한국 자치 구역은 결국 남쪽의 일본 제국군과 북쪽의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비밀 요원들이 저명한 한국 아나키스트들을 표적으로 삼기 위해 영토로 파견되었다. KPAM은 많은 주요 인물들을 잃으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1930년 1월 20일, 김좌진은 정미소를 수리하던 중 한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1930년 9월, 이을규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으며, 1931년 7월, 김종진이 암살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은 만주에서 한국 아나키스트의 실험을 결정적으로 종식시켰으며, 그 자리에 괴뢰 국가인 만주국이 세워졌다. 한국 아나키스트 조직의 잔당은 중국 남부로 후퇴하여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제2차 중일 전쟁에 자원하여 참전했다.

3. 2. 부여족통일회의와 신민부 결성

1925년 1월, 북만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북간도 목릉현(穆陵縣)에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였다.[1] 회의 결과, 같은 해 3월 10일 영안현(寧安縣) 영안성(寧安城)에서 신민부(新民府)가 조직되었다.[1] 신민부에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김좌진(金佐鎭), 남성극(南星極), 최호(崔灝), 박두희(朴斗熙), 유현(劉賢)과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의 김혁(金赫), 조성환(曹成煥), 정신(鄭信), 그리고 중동선교육회 회장 윤우현(尹瑀鉉) 등 북만 16개 지역 민선대표(民選代表) 및 10개의 국내 단체 대표들이 참여하였다.[1]

신민부 조직에서는 대한독립군단, 그 중에서도 김좌진 계열의 북로군정서 출신들이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1] 대한독립군정서 역시 북로군정서원들이 중심이었으며, 조성환·김혁·정신 등이 이에 해당한다.[1] 결국 신민부는 북로군정서 출신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1]

만주에서 새 행정부의 반일 감정은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안전해지면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공간을 열었다. 1929년 7월 21일 하일린에서 '''만주 한국 아나키스트 연맹'''(KAFM)이 설립되었다. KAFM은 자유사회적 평등에 기반한 무정부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만주에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상호 원조를 제공하는 데 주력했다.

이 무렵, 만주에는 세 개의 자치 한국 기관이 설립되었는데, 압록강 만주 쪽의 참모본부, 길림성과 요녕성의 정의부, 그리고 흑룡강성 북부 만주의 '''신민부'''였다. 초기에는 한국 민족주의에 의해 추진되었지만, 신민부는 점차 아나키즘의 원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1929년 8월, 신민부와 KAFM은 '''만주 한국인 민족 연합회'''(KPAM)로 통합되었으며, 김좌진의장으로 선출되었다.

KPAM은 만주에서 협동 농업, 무상 교육 및 군사 교육 및 훈련 시스템을 개발하고자 하였다. 주요 목표는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중국 지주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모두에 의한 착취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KPAM은 집단 농업을 도입하여 농산물의 생산 및 판매를 집단화했다.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KPAM에 협력했지만, 독립에 대한 민족주의적 목표는 한국 아나키스트의 상호 원조 원칙에 기반한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생존에 종속되었다.

만주 한국 자치 구역은 남쪽의 일본 제국군과 북쪽의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비밀 요원들이 저명한 한국 아나키스트들을 표적으로 삼기 위해 영토로 파견되었다. 1930년 1월 20일, 김좌진은 정미소를 수리하던 중 한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1930년 9월, 이을규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으며, 1931년 7월, 김종진이 암살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으로 만주에서 한국 아나키스트의 실험은 종식되었고, 괴뢰 국가인 만주국이 세워졌다. 한국 아나키스트 조직의 잔당은 중국 남부로 후퇴하여 제2차 중일 전쟁에 자원하여 참전했다.

4. 조직 및 구성


  • 참의원 의장 이범윤, 참의원 이장녕, 참의원 황공삼(목릉), 참의원 윤복영
  •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중앙집행위원 유현, 중앙집행위원 이영백(소추풍)
  •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 김좌진, 보안사령관 박두희, 총사령부 제1로(路) 제1지대장(支隊長) 최우(오길밀)
  • 참모부위원장 나중소, 민사부위원장 최호, 외교부위원장 조성환, 연락부위원장 정신
  • 검사원장 현천묵, 검사원 위원 나중소, 외교부 길림성 역(吉林省驛) 전임 외교원 윤복영
  • 제2지방 총판부(總辨部) 제1구장(區長) 김유성(해림), 제4구장 이근(목단강).

만주 한국인민회 회장이자 한국독립군 사령관인 김좌진


한국인민회(KPAM)는 스스로를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협동조합"으로 정의했다. KPAM의 대표 관료제와 행정 기구는 무정부주의 원칙인 자치에 따라 "강제적인 정부가 없는 정부"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결정은 주로 민회에서 이루어졌으며, 마을, 구역, 지역 수준의 분산된 평의회 연합이 더 큰 문제를 처리했다.

KPAM은 자유지상 사회주의의 경제 이론에 크게 의존하여 그들의 영토에 상호 은행, 노동자 협동조합 및 종합적인 학교 시스템을 설립했다. 지역 평의회도 창설되었다. 한편, 그들은 상위 수준의 직원을 위에서 아래로 임명했으며 (평균 임금만 받음), 하위 수준의 관리는 지역적으로 선택되었다. 조직 및 선전팀은 대중을 선동하여 농민의 지지를 얻고 독립적인 마을 회의와 위원회를 만들도록 했다. 겉보기에, 이 팀은 가는 곳마다 환영받았으며, 주요 사건은 기록되지 않았다.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은 신민부의 군대를 형성했다. 사실상 농민 민병대인 이 군대는 신민부의 군사 학교에서 훈련받은 게릴라들에 의해 보충되었으며, 이 학교와 군대는 게릴라전을 일본 제국과 소련 모두에 대항하여 수행했다. 또한 한국인을 지역 강도와 관동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치안대와 대일 게릴라 부대를 각각 창설했다.

4. 1. 중앙 조직

한국인민회(KPAM)는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협동조합"으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KPAM의 대표 관료제와 행정 기구는 무정부주의 원칙인 자치에 따라 "강제적인 정부가 없는 정부"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결정은 주로 민회에서 이루어졌으며, 마을, 구역, 지역 수준의 분산된 평의회 연합이 더 큰 문제를 처리했다.

KPAM은 자유지상 사회주의의 경제 이론에 크게 의존하여 그들의 영토에 상호 은행, 노동자 협동조합 및 종합적인 학교 시스템을 설립했다. 지역 평의회도 창설되었다. 한편, 상위 수준의 직원은 위에서 아래로 임명했으며 (평균 임금만 받음), 하위 수준의 관리는 지역적으로 선택되었다. 조직 및 선전팀은 대중을 선동하여 농민의 지지를 얻고 독립적인 마을 회의와 위원회를 만들도록 했다. 겉보기에, 이 팀은 가는 곳마다 환영받았으며, 주요 사건은 기록되지 않았다.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은 신민부의 군대를 형성했다. 사실상 농민 민병대인 이 군대는 신민부의 군사 학교에서 훈련받은 게릴라들에 의해 보충되었으며, 이 학교와 군대는 게릴라전을 일본 제국과 소련 모두에 대항하여 수행했다. 또한 한국인을 지역 강도와 관동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치안대와 대일 게릴라 부대를 각각 창설했다.

4. 2. 주요 인물


  • 참의원 의장 이범윤, 참의원 이장녕, 참의원 황공삼(목릉), 참의원 윤복영
  •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중앙집행위원 유현, 중앙집행위원 이영백(소추풍)
  •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 김좌진, 보안사령관 박두희, 총사령부 제1로(路) 제1지대장(支隊長) 최우(오길밀)
  • 참모부위원장 나중소, 민사부위원장 최호, 외교부위원장 조성환, 연락부위원장 정신
  • 검사원장 현천묵, 검사원 위원 나중소, 외교부 길림성 역(吉林省驛) 전임 외교원 윤복영
  • 제2지방 총판부(總辨部) 제1구장(區長) 김유성(해림), 제4구장 이근(목단강)


4. 3. 관할 지역

신민부는 흑룡강성 일대의 16개 지역을 관할하였다. 동빈현, 주하현 오길밀, 임강현 위사하, 왕청현 석두하, 구강포, 해림현, 무단강, 관남현 신안진, 오상현 사하자, 사사도, 마도석, 길림현 구참, 목릉현 소추풍, 동녕현, 왕청현 양수천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5. 주요 활동

5. 1. 민족 교육

신민부는 청년들에게 민족주의사상에 입각한 항일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북만지역 동포들이 가장 갈망하는 교육에 적극적이었다. 1925년 3월 10일 창립총회에서 100호 이상의 마을에 1개의 소학교를 설치하고, 통일된 교육을 위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며, 기관에서 학교 관리 방법을 제정하여 교수의 자격을 정하고 노동 및 통속 강습(通俗講習)에 힘쓸 것을 천명하였다.[2] 30 호 이상의 지방에도 사립소학교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1927년 8월 1일에는 북간도 해림에서 북만한인교육대회(北滿韓人敎育大會)를 개최하여 소학생들에게 독립혁명사상을 주입하도록 의결하였다. 그 실천방안으로 주하(珠河), 목릉, 밀산, 요하(饒河), 돈화(敦化) 등 15개 지역에 50여 개의 소학교를 설치하였다.[2] 신민부는 수신(修身)·지리 및 역사 교과서 등을 국문으로 편찬하여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고, 학교가 설립된 지역에는 교원을 파견하였다.

재만동포의 8할 이상이 문맹이라 그 퇴치에 주력하였는데, 교육부원이 강사가 되어 부락마다 노동강습소를 설치하려 했지만, 교원 자격을 갖춘 젊은 엘리트들이 부족하였다. 1934년 6월 말 주하현(1,189호), 목릉현(682호), 밀산현(932호), 돈화(708호) 등에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다.

신민부는 재북만동포들에게 대종교적 민족주의와 공화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해 선전 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신민부 주변에는 적기단과 북만청년총동맹 등 공산주의 단체와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및 권농회(勸農會)등이 신민부에 대한 파괴 공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관지인『신민보(新民報)』를 순간(旬刊)으로, 선전문을 부정기적으로 간행하고, 필요에 따라 순회강연도 실시하고자 하였다.『신민보』는 1925년 4월 1일에 창간호가 발행되었는데, 그해 8월 29일에 제12호가 나와 관할지역인 중동선 일대는 물론 북간도에까지 배부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삼성(東三省)은 물론 중국 전 지역에 걸쳐 공산주의자에 대한 단속이 삼엄한 시기라 1926년 4월에 김일성(金一星, 金奉煥), 강경애(姜敬愛) 등의 투고가 적색(赤色)의 경향을 띠었다고 하얼빈(哈爾濱) 주재 일본 영사관이 트집을 잡아 신민부의 선전부위원장인 허성묵과 이광진(李光鎭)이 체포됨으로써 활동이 중단되었다.

5. 2. 홍보 활동

신민부는 독립운동 및 민족주의 진영에 대한 적극적인 호응을 얻고 청년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에 입각한 항일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북만지역 동포들이 가장 갈망하는 교육에 적극적이었다.[2] 1925년 3월 10일 창립총회에서 100호 이상의 마을에 1개의 소학교를 설치할 것, 통일된 교육을 위하여 교과서를 편찬할 것, 기관에서 학교 관리 방법을 제정하여 교수의 자격을 정하고 노동 및 통속 강습(通俗講習)에 진력할 것 등에 대해 천명하였다.[2] 뿐만 아니라 30 호 이상의 지방에도 사립소학교를 설치하고자 하였다.[2]

1927년 8월 1일에는 북간도 해림에서 북만한인교육대회(北滿韓人敎育大會)를 개최하여 제2의 국민인 소학생들에게 독립혁명사상을 주입하도록 의결하였다.[2] 그에 대한 실천방안으로, 주하(珠河), 목릉, 밀산, 요하(饒河), 돈화(敦化) 등 15개 지역에 50여 개의 소학교를 설치하였다.[2] 신민부에서는 수신(修身)·지리 및 역사 교과서 등을 국문으로 편찬하여 항일민족의식의 고취에 노력하였다.[2] 학교가 설립된 지역에는 교원을 파견하였다.[2]

재만동포의 8할 이상이 문맹이라 그 퇴치에 주력하였는데, 교육부원이 강사가 되어 부락마다 노동강습소를 설치하려 했지만, 교원 자격을 갖춘 젊은 엘리트들이 부족하였다.[2] 1934년 6월 말 주하현(1,189호), 목릉현(682호), 밀산현(932호), 돈화(708호) 등에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다.[2]

신민부는 재북만동포들에게 대종교적 민족주의와 공화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해 선전 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2] 신민부의 주변에는 적기단과 북만청년총동맹 등 공산주의 단체와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및 권농회(勸農會)등이 신민부에 대한 파괴 공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기관지인『신민보(新民報)』를 순간(旬刊)으로, 선전문을 부정기적으로 간행하고자 하였다.[2] 필요에 따라 순회강연도 실시하고자 하였다.[2]『신민보』는 1925년 4월 1일에 창간호가 발행되었는데, 그해 8월 29일에 제12호가 나와 관할지역인 중동선 일대는 물론 북간도에까지 배부되었다.[2] 그러나 당시 동삼성(東三省)은 물론 중국 전 지역에 걸쳐 공산주의자에 대한 취췌(取締)가 삼엄한 시기라 1926년 4월에 김일성(金一星, 金奉煥), 강경애(姜敬愛) 등의 투고가 적색(赤色)의 경향을 띠었다고 하얼빈(哈爾濱) 주재 일본 영사관이 트집을 잡아 신민부의 선전부위원장인 허성묵과 이광진(李光鎭)이 체포됨으로써 활동이 중단되었다.[2]

5. 3. 경제 자립 노력

신민부는 활동 재원이 재북만동포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산업 발전에 관심을 두었다. 1925년 3월 10일 창립총회에서 토지의 매매와 조압(租押)은 기관의 지도 하에 할 것이며, 각 인은 노동역작(勞動力作)을 부지런히 할 것, 공농제를 실시하여 공동농지를 경영할 것, 식산조합을 둘 것, 부업을 장려할 것, 필요한 지방에 소비조합을 설치할 것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신민부는 실업부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이일세를 임명하였다. 공판제(共販制)를 실시하여 중간상의 악덕 행위를 방지하고자 했다. 또한 1926년 11월 총회에서는 실업의 확장과 개선을 결의하여 11월 28일 북만지역 동빈현에서 손문/孫文중국어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모방, 민생회(民生會)를 조직하여 재북만동포의 생활개선을 추구하였다.

5. 4. 무장 투쟁

신민부는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 무장 투쟁 전개를 위해 군자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군자금은 대부분 신민부 관할구역에 거주하는 재북만동포의 의무금에 의존하였다. 창립총회에서는 논, 밭, 상인들에게 소유 재산의 일정 비율을 징수하도록 하였고, 1925년 10월 총회에서는 매호당 6원의 의무금을 징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만동포 대부분은 소작농으로 경제 사정이 좋지 못했고, 북만청년총동맹 등 공산주의 단체의 조직적인 반대 공작도 있었다. 1928년 11월 18일에는 빈주사건(賓洲事件)이 발생하여 신민부가 해체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빈주현은 신민부 관할 구역으로, 의무금을 납부하던 곳이었으나, 재만농민동맹과 주중청년동맹(住中靑年同盟) 등이 주민들을 설득하여 신민부를 탈퇴하도록 하였다. 이를 저지하려던 신민부원 이백호(李白虎) 등이 권총을 발사해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신민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신민부는 모연대(募捐隊)를 조직하여 만주 및 국내에서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1926년 12월, 모연대장 황일초(黃一樵)와 대원들이 하얼빈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기도 하였다. 훈춘(琿春)에서는 군자금 모집이 어려워지자 재만동포를 살해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1927년 군사 체제로 강화된 후, 군정파 지도자 김좌진은 이병묵(李丙默), 신현규(申鉉圭) 등을 국내 경상도 지역에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신민부는 항일 무장 투쟁을 위한 군 간부 양성을 위해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였다. 성동사관학교에서는 연 2기의 속성 교육을 실시하여 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신민부 군대의 근간이 되었다.

신민부는 군구제(軍區制)를 실시하여 관할 구역 내 만 17세 이상 만 40세 이하 남자를 군적(軍籍)에 등재하고, 농한기에 훈련을 시켜 유사시 정규군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신민부는 성동사관학교 출신과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 및 민병(民兵) 출신 일부를 흡수하여 약 530명 규모의 정규군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영안현 산림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군의 자급자족을 위해 둔전제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밀산을 둔전지로 선택했으나, 이 지역이 소련과의 접경 지역이라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고, 일부 기독교 교역자들이 독립운동을 배척하는 경향을 보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두 번째로 안도현(安圖縣)을 둔전지로 결정하였으나, 중국인 마적들의 습격이 우려되어 포기하고 1928년 5월 별동대 전원이 중앙으로 귀환하였다.

신민부 무장 활동의 기본 목표는 국내 진입 작전을 통해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1927년 8월, 군사부위원장 김좌진은 이중삼 등 특수공작대를 국내에 파견하여 작전 지도를 작성하고 일본 주재소 위치 등을 파악하는 등 국내 진입을 위한 예비 공작을 추진하였다.

1925년 3월, 김좌진은 신민부원에게 폭탄과 권총을 제공하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암살을 지령하였다. 또한 하얼빈 일본 영사관이 해림 지역 조선인민회 초대 회장으로 파견한 배두산(裵斗山)을 암살하였다.[3]

군정파는 1928년 5월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 국민당(國民黨)과의 연합을 시도하였다.[4] 김좌진은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 제13군 총사령관 양우일(揚宇一)과 협의하고 한중연합전선을 구축할 것을 약속하였다.[5]

5. 5. 중국과의 관계

6. 갈등과 해체

1928년 12월 군정파는 해체되어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민정파는 1929년 3월 해체되어 국민부(國民府)에 참여하게 되었다. 만주에서 새 행정부의 반일 감정은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안전해지면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공간을 열었다. 이 과정은 1929년 7월 21일 하일린에서 '''만주 한국 아나키스트 연맹'''(KAFM)의 설립으로 정점에 달했다. KAFM은 만주에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상호 원조를 제공하는 데 주력했으며, 자원은 "능력에 따라, 필요에 따라" 분배될 예정이었다.

이 무렵, 만주에는 세 개의 자치 한국 기관이 설립되었는데, 압록강 만주 쪽의 참모본부, 길림성과 요녕성의 정의부, 그리고 김좌진이 이끄는 흑룡강성 북부 만주의 '''신민부'''였다. 한국 민족주의에 의해 초기에 추진되었지만, 신민부는 이 지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점차 아나키즘의 원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는 1929년 8월, 신민부와 KAFM이 '''만주 한국인 민족 연합회'''(KPAM)로 통합되면서 정점에 달했으며, 김좌진의장으로 선출되었다.

KPAM의 계획은 만주에서 협동 농업, 무상 교육 및 군사 교육 및 훈련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 주요 목표는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중국 지주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모두에 의한 착취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정착하고 토지를 경작하도록 돕기 위해 KPAM은 집단 농업을 도입하여 농산물의 생산 및 판매를 집단화했다.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KPAM에 협력했지만, 독립에 대한 민족주의적 목표는 한국 아나키스트의 상호 원조 원칙에 기반한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생존에 종속되었다. 독립적이고/거나 아나키스트 한국을 위한 선동적인 활동은 경제 프로그램을 유지하기 위해 연기되었다.

만주 한국 자치 구역은 결국 남쪽의 일본 제국군과 북쪽의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비밀 요원들이 저명한 한국 아나키스트들을 표적으로 삼기 위해 영토로 파견되었다. KPAM은 많은 주요 인물들을 잃으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1930년 1월 20일, 김좌진은 정미소를 수리하던 중 한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1930년 9월, 이을규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으며, 1931년 7월, 김종진이 암살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은 만주에서 한국 아나키스트의 실험을 결정적으로 종식시켰으며, 그 자리에 괴뢰 국가인 만주국이 세워졌다. 한국 아나키스트 조직의 잔당은 중국 남부로 후퇴하여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제2차 중일 전쟁에 자원하여 참전했다.

6. 1. 군정파와 민정파의 대립

1928년 12월 군정파는 해체되어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1929년 3월 민정파는 해체되어 국민부(國民府)에 참여하게 되었다. 만주에서 새 행정부의 반일 감정은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안전해지면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공간을 열었다. 이 과정은 1929년 7월 21일 하일린에서 '''만주 한국 아나키스트 연맹'''(KAFM)의 설립으로 정점에 달했다. KAFM은 만주에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상호 원조를 제공하는 데 주력했으며, 자원은 "능력에 따라, 필요에 따라" 분배될 예정이었다.

만주에는 세 개의 자치 한국 기관이 설립되었는데, 압록강 만주 쪽의 참모본부, 길림성과 요녕성의 정의부, 그리고 김좌진이 이끄는 흑룡강성 북부 만주의 '''신민부'''였다. 신민부는 한국 민족주의에 의해 초기에 추진되었지만, 이 지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점차 아나키즘의 원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1929년 8월, 신민부와 KAFM은 '''만주 한국인 민족 연합회'''(KPAM)로 통합되었으며, 김좌진의장으로 선출되었다.

KPAM의 계획은 만주에서 협동 농업, 무상 교육 및 군사 교육 및 훈련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 주요 목표는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중국 지주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모두에 의한 착취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KPAM은 집단 농업을 도입하여 농산물의 생산 및 판매를 집단화했다.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KPAM에 협력했지만, 독립에 대한 민족주의적 목표는 한국 아나키스트의 상호 원조 원칙에 기반한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생존에 종속되었다.

만주 한국 자치 구역은 남쪽의 일본 제국군과 북쪽의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비밀 요원들이 저명한 한국 아나키스트들을 표적으로 삼기 위해 영토로 파견되었다. 1930년 1월 20일, 김좌진한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1930년 9월, 이을규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으며, 1931년 7월, 김종진이 암살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으로 만주에서 한국 아나키스트의 실험은 종식되었으며, 괴뢰 국가인 만주국이 세워졌다. 한국 아나키스트 조직의 잔당은 중국 남부로 후퇴하여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제2차 중일 전쟁에 자원하여 참전했다.

6. 2. 공산주의 세력과의 갈등

1928년 12월 군정파는 해체되어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중심 세력이 되었고, 민정파는 1929년 3월 해체되어 국민부(國民府)에 참여하게 되었다. 만주에서 새 행정부의 반일 감정은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안전해지면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공간을 열었다. 이 과정은 1929년 7월 21일 하일린에서 '''만주 한국 아나키스트 연맹'''(KAFM)의 설립으로 정점에 달했다. KAFM은 궁극적으로 자유사회적 평등에 기반한 무정부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만주에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상호 원조를 제공하는 데 주력했으며, 자원은 "능력에 따라, 필요에 따라" 분배될 예정이었다.

이 무렵, 만주에는 세 개의 자치 한국 기관이 설립되었는데, 압록강 만주 쪽의 참모본부, 길림성과 요녕성의 정의부, 그리고 김좌진이 이끄는 흑룡강성 북부 만주의 '''신민부'''였다. 한국 민족주의에 의해 초기에 추진되었지만, 신민부는 이 지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점차 아나키즘의 원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는 1929년 8월, 신민부와 KAFM이 '''만주 한국인 민족 연합회'''(KPAM)로 통합되면서 정점에 달했으며, 김좌진의장으로 선출되었다.

KPAM의 계획은 만주에서 협동 농업, 무상 교육 및 군사 교육 및 훈련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 주요 목표는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중국 지주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모두에 의한 착취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정착하고 토지를 경작하도록 돕기 위해 KPAM은 집단 농업을 도입하여 농산물의 생산 및 판매를 집단화했다.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KPAM에 협력했지만, 독립에 대한 민족주의적 목표는 한국 아나키스트의 상호 원조 원칙에 기반한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생존에 종속되었다. 독립적이고/거나 아나키스트 한국을 위한 선동적인 활동은 경제 프로그램을 유지하기 위해 연기되었다.

만주 한국 자치 구역은 결국 남쪽의 일본 제국군과 북쪽의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비밀 요원들이 저명한 한국 아나키스트들을 표적으로 삼기 위해 영토로 파견되었다. KPAM은 많은 주요 인물들을 잃으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1930년 1월 20일, 김좌진은 정미소를 수리하던 중 한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1930년 9월, 이을규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으며, 1931년 7월, 김종진이 암살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은 만주에서 한국 아나키스트의 실험을 결정적으로 종식시켰으며, 그 자리에 괴뢰 국가인 만주국이 세워졌다. 한국 아나키스트 조직의 잔당은 중국 남부로 후퇴하여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제2차 중일 전쟁에 자원하여 참전했다.

6. 3. 일제의 탄압

1928년 12월, 군정파는 해체되어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중심 세력이 되었고, 1929년 3월, 민정파는 해체되어 국민부(國民府)에 참여하게 되면서, 신민부는 군정파와 민정파의 대립과 내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만주에서 반일 감정은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안전해지면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공간을 열었다. 이 과정은 1929년 7월 21일 하일린에서 '''만주 한국 아나키스트 연맹'''(KAFM)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만주에는 참모본부, 정의부, 김좌진이 이끄는 흑룡강성 북부 만주의 '''신민부'''와 같은 세 개의 자치 한국 기관이 설립되었다. 신민부는 한국 민족주의에 의해 초기에 추진되었지만, 점차 아나키즘의 원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1929년 8월, 신민부와 만주 한국 아나키스트 연맹(KAFM)은 '''만주 한국인 민족 연합회'''(KPAM)로 통합되었고, 김좌진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만주 한국 자치 구역은 남쪽의 일본 제국군과 북쪽의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비밀 요원들이 한국 아나키스트들을 표적으로 삼기 위해 파견되었다. 1930년 1월 20일, 김좌진은 정미소를 수리하던 중 한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1930년 9월, 이을규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으며, 1931년 7월, 김종진이 암살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으로 만주에서 한국 아나키스트의 실험은 종식되었고, 괴뢰 국가인 만주국이 세워졌다.

7. 역사적 의의와 평가

7. 1. 긍정적 평가

7. 2. 부정적 평가

7. 3. 종합적 평가

참조

[1] 문서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는 않았다.
[2] 문서 해림참 서두가(海林站 西頭街)에 신창학교(新彰學校), 목릉현에 원동학교(遠東學校), 아성현 아성(阿城縣 阿城)에 개신학교(開新學校), 영안현 영고탑에 동명학교(東明學校), 아성현에 이충전자학교(二層甸子學校), 모아산(帽兒山)에 신창학교(新昌學校), 아성현 취원창(聚源昶)에 동원학교(同源學校), 위사하현 석두하자에 영신학교(永信學校), 아성현 탄자황산(坦子黃山)에 부달학교(扶達學校), 채가하둔(蔡家河屯)에 삼가자학교(三家子學校), 안도현(安圖縣)에 삼인방학교(三人坊學校) 등
[3] 문서 해림은 신민부의 연락기관이 있는 곳으로 중동선의 중심지역이었다. 일본은 장춘(長春), 대련(大連), 국자가(局子街), 용정, 하얼빈, 훈춘, 두도구(頭道溝) 등지에 영사관 및 그 분관(分館)을 설치해 독립운동단체들의 정보를 탐지하고자 했고, 기타 지역에서는 보민회, 조선인민회, 권농회, 시천교(侍天敎), 청림교(靑林敎) 및 제우교(齊愚敎) 등의 친일단체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이는 남만주철도(대련~장춘) 연변의 지역 및 북간도에 국한된 것으로 해림이 정보수집의 거점으로 해림을 지정했던 것이다.
[4] 문서 당시 동삼성 군벌 총책으로 북경 정권을 장악한 [[장작림]](張作霖)은 [[1925년]] 6월 11일의 소위 [[미쓰야 협정]](三矢協定) 이래 일본 영사관의 경찰과 합세하여 독립군을 괴롭히고 있었고, 국민당의 [[장개석]](蔣介石)은 이에 맞서 북벌을 진행하고 있었으므로 신민부는 국민당과 연합하고자 했다.
[5] 문서 그러나 장작림은 이 정보를 알고 국민당의 만주지역 책임자인 [[공패성]](貢沛誠) 및 [[사가헌]](史可軒)을 체포하여 연합전선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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