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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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바마 번은 전국 시대 후기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존재했던 일본의 번이다. 와카사 지방을 중심으로 에치젠, 오미 지역의 일부를 영토로 삼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교고쿠 다카쓰구가 영지를 하사받아 오바마 번을 다스렸고, 이후 사카이 가문이 14대에 걸쳐 237년간 통치했다. 사카이 가문은 막부의 요직을 역임하며 번을 안정적으로 운영했으나, 막부 말기 혼란 속에서 친황실 대의에 동참,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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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바마번 - 오바마성 (후쿠이현)
오바마성은 와카사국 오바마 지역을 다스린 가문들의 거점이었으며, 강을 해자로 삼아 자연 방어에 유리한 해상성 형태를 갖추었고, 현재는 오바마 신사와 일부 해자, 성벽이 남아 후쿠이현 지정 사적으로 관리된다. - 에치젠국의 번 - 마루오카번
마루오카번은 에도 시대 에치젠국에 존재했던 번으로, 혼다 가문과 아리마 가문이 번갈아 다스렸으며 아리마 시게즈미의 번정 개혁과 문화 발전을 거쳐 메이지 시대에 폐번치현되었다. - 에치젠국의 번 - 다카모리번
다카모리번은 겐로쿠 10년부터 쇼토쿠 원년까지 에치젠국 뉴군 다카모리에 위치했던 번으로, 기슈 마쓰다이라가와 혼조 마쓰다이라가가 다스렸으나 후사 없이 폐번되어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
오바마번 | |
---|---|
개요 | |
이름 | 오바마 번 |
원어 이름 | 小浜藩 (오바마한) |
로마자 표기 | Obama-han |
위치 | 후쿠이현 |
수도 | 오바마성 |
역사 | |
성립 | 1600년 |
폐지 | 1871년 |
주요 사건 | 교고쿠 가문 (1601년) 사카이 가문 (1634년) |
정치 | |
정치 체제 | 다이묘 영지 (도쿠가와 막부) |
통계 | |
면적 | 알 수 없음 |
인구 | 알 수 없음 |
현대 | |
현재 위치 | 후쿠이현 |
2. 역사
오바마는 고대부터 일본의 수도 교토와 가까워 중요한 항구 도시로 기능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와카사 국이 여러 지방 영주의 지배를 받았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는 히데요시의 친족인 기노시타 가쓰토시가 영주로 있었다. 그러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기노시타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쓰성 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하여 교고쿠 다카쓰구에게 와카사 국 전체를 하사하며 오바마 번이 시작되었다.[3] 교고쿠 가문은 오바마를 성 아랫마을인 조카마치로 재건하고, 에도와 간사이 지방을 잇는 키타마에부네 연안 무역의 중요 거점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오바마 성 건설을 시작했으나, 1634년 교고쿠 다다카가 이즈모 국 마쓰에 번으로 이봉되면서 성은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되었다.[3]
1634년, 무사시국 가와고에번의 번주였던 사카이 타다카츠가 새로운 번주로 부임했다.[6] 타다카츠는 막부의 로주와 다이로를 역임한 중신으로, 그의 통치 아래 오바마 번은 고쿠다카가 12만 3500석에 달하는 등 안정적인 기반을 다졌다. 그는 조세 제도를 정비하고 행정 조직을 확립했다. 이후 사카이 가문은 에도 시대 말기까지 14대에 걸쳐 237년간 오바마 번을 통치했다.
2대 번주 사카이 타다나오 대에는 분가(分家)를 통해 아와 가쓰야마 번과 쓰루가번이 분립되면서 번의 고쿠다카는 10만 3500석으로 감소했다. 사카이 가문의 통치 기간 동안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보냈으나, 1735년 대홍수와 연이은 기근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재정난에 시달렸다. 영주에게 구제를 호소하던 농민들은 1770년 농민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재정 강화를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1836년 또다시 기근이 닥치면서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막부 말기에는 7대 번주 사카이 타다모치와 10대 번주 사카이 타다유키가 오사카 조다이, 교토 쇼시다이, 로주 등 막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12대 번주 사카이 타다아키는 교토 쇼시다이로서 이이 나오스케와 협력하여 막부와 조정의 결합을 꾀하는 코부 갓타이 정책을 추진하고, 미토 번의 손노 조이 세력이 일으킨 덴구토의 난 진압에 관여했다. 그는 1862년에 은퇴했으나, 1868년 보신 전쟁 중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이 패배하자 사카이 타다요시라는 이름으로 다시 실권을 장악하여 번의 노선을 메이지 정부 지지로 전환했다. 그는 판적봉환 이후 와카사 국의 지사(知事)로 임명되어 1871년 폐번치현 때까지 번을 다스렸다.
2. 1. 번의 성립 이전
오바마는 고대부터 일본의 수도와 가까워 중요한 항구였다. 센고쿠 시대에는 와카사 국이 다케다 씨의 분가를 포함한 여러 지방 영주들의 통치를 받았다. 전국 시대 후기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와카사 지방은 니와 나가시게, 이어서 아사노 나가마사가 영유했다.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에서는 히데요시의 친족인 기노시타 가쓰토시에게 영지가 주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기노시타 가쓰토시는 와카사 내 오뉴군과 미카타군에서 6만 5000석을 영유했으며, 그의 동생 기노시타 도시후사는 오이군 2만 석(다카하마 번)을 다스렸다.
게이초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기노시타 가쓰토시는 후시미 성 전투 직전에 전장을 이탈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서군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했다. 만약 그가 서군에 가담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동생 기노시타 도시후사는 서군에 가담했기 때문에 전투 후에 개역되었다.
그 후, 가쓰토시는 가인(歌人) 기노시타 초쇼시(木下長嘯子)로서 이름을 남겼다. 도시후사는 이후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고, 빗추 아시모리 번의 다이묘로 복귀할 수 있었다.
2. 2. 교고쿠 가문 시대 (1600년 ~ 1634년)
센고쿠 시대 동안 와카사 국은 다케다 씨의 분가를 포함한 여러 지방 영주들의 지배를 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에서는 그의 조카인 기노시타 가쓰토시에게 영지가 주어졌으나, 기노시타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했다.도쿠가와 막부가 수립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벌어진 오쓰성 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하여 교고쿠 다카쓰구에게 와카사 국 전체를 하사했다.[3] 다카쓰구는 오미 국 오쓰성 성주로 6만 석을 영유하고 있었는데,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서군의 다치바나 무네시게, 모리 모토야스 등이 이끄는 대군에 맞서 소수의 병력으로 오쓰성에서 농성전을 벌였다. 격렬한 공방전 끝에 성이 함락되어 다카쓰구는 고야산 곤고부지로 들어갔으나, 같은 날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동군이 승리하면서 그의 공적이 높이 평가받았다. 오쓰성 포위전은 결과적으로 서군의 대규모 병력을 묶어두어 세키가하라 전투에 합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동군의 승리에 기여한 것으로 인정받은 것이다.[4][5] 이에야스는 다카쓰구를 구니모치 다이묘로 삼고 와카사 일국(오바마 8만 5천 석)을 주어 오바마 번이 성립되었다.
다카쓰구는 이듬해 오미 다카시마 군 내 7천 석을 추가로 받아 총 9만 2천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1609년(게이초 14년) 다카쓰구가 사망하자 아들 교고쿠 다다카가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 다다카는 1607년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넷째 딸과 결혼했으며, 의붓어머니인 조코인과 함께 오사카 전투 등에서 강화 교섭에 참여하기도 했다. 오사카 전투에서의 공적 등으로 에치젠 국 쓰루가 군 전역을 추가로 받아, 와카사에서 에치젠 쓰루가 군까지 지배하는 오바마 번의 영역이 확정되었다.
교고쿠 가문 통치 하에 오바마는 성 아랫마을인 조카마치로 재건되었고, 에도와 간사이 지방을 잇는 키타마에부네 연안 무역의 중요 거점으로 발전했다. 또한 오바마 성 건설을 시작했으나, 1634년(간에이 11년) 다다카가 이즈모 국과 오키 국의 마쓰에 번으로 23만 5천 석을 받고 이봉되면서 성은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되었다.[3]
2. 3. 사카이 가문 시대 (1634년 ~ 1871년)
1634년, 무사시국 가와고에번의 번주였던 사카이 타다카츠 酒井 忠勝일본어가 와카사 국 전역과 에치젠국 쓰루가군, 오미국, 아와국 일부를 포함하여 총 11만 3500석의 영지를 받아 오바마 번으로 옮겨왔다.[6] 타다카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부터 막부를 섬겨온 후다이 다이묘 가문 출신으로, 도쿠가와 이에미쓰 쇼군 아래에서 로주와 다이로를 역임한 막부의 중신이었다. 1636년에는 시모츠케국 내 영지 1만 석이 추가되어 총 12만 3500석을 다스리게 되었으며, 이에미쓰 쇼군으로부터 와카사 일국의 구니모치 다이묘(国持大名)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는 후다이 다이묘로서는 유일한 사례로, 타다카츠에 대한 쇼군의 깊은 신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지위는 타다카츠 대에서만 유지되었다. 타다카츠는 오바마 성 건설을 완료하고, 마을 행정을 담당하는 마치부교와 지방 영지를 관리하는 다이칸을 설치했으며, 조세 제도를 확립하는 등 번 통치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1656년에 은퇴하여 1662년에 사망했다.사카이 가문은 이후 에도 시대 말기까지 14대에 걸쳐 237년간 오바마 번을 통치했다.
대 | 이름 | 원문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1대 | 사카이 타다카츠 | 酒井 忠勝일본어 | 1634년 ~ 1656년 | 로주, 다이로 역임. 구니모치 다이묘(일대 한정). 총 12만 3500석. |
2대 | 사카이 타다나오 | 酒井 忠直일본어 | 1656년 ~ 1682년 | 아와 가쓰야마 번(1만 석), 쓰루가번(1만 석), 하타모토(3천 석) 분할. 번 영지 10만 3500석으로 감소. 행정 정비, 법전 편찬, 치수 사업 등 시행. |
3대 | 사카이 타다타카 | 酒井 忠隆일본어 | 1682년 ~ 1686년 | 소샤반 역임. |
4대 | 사카이 타다소노 | 酒井 忠囿일본어 | 1686년 ~ 1706년 | 쓰야마 번의 모리 가문에서 마쓰다이라 나오아키라로의 권력 이양 감독. 후사 없이 사망. |
5대 | 사카이 타다오토 | 酒井 忠音일본어 | 1706년 ~ 1735년 | 쓰루가번에서 양자로 입적. 소샤반, 지샤부교, 오사카 조다이, 로주 역임. |
6대 | 사카이 타다아키라 | 酒井 忠存일본어 | 1735년 ~ 1740년 | 21세에 후사 없이 요절. |
7대 | 사카이 타다모치 | 酒井 忠用일본어 | 1740년 ~ 1757년 | 소샤반, 지샤부교, 오사카 조다이, 교토 쇼시다이 역임. 후사 없이 은퇴. |
8대 | 사카이 타다요시 | 酒井 忠与일본어 | 1757년 ~ 1762년 | 형의 뒤를 이어 번주가 됨. |
9대 | 사카이 타다쓰라 | 酒井 忠貫일본어 | 1762년 ~ 1806년 | 재정난 심화. 홋카이도 네무로 방비 강화 명령 받음. |
10대 | 사카이 타다유키 | 酒井 忠進일본어 | 1806년 ~ 1828년 | 쓰루가번에서 양자로 입적. 지샤부교, 교토 쇼시다이, 로주 역임. 닛코 동조궁 5층탑 재건 감독. |
11대 | 사카이 타다요리 | 酒井 忠順일본어 | 1828년 ~ 1834년 | 9대 번주 타다쓰라의 차남. 심각한 재정난 속에서 개혁 시도했으나 흉작으로 실패하고 은퇴. |
12대 | 사카이 타다아키 | 酒井 忠義일본어 | 1834년 ~ 1862년 | 10대 번주 타다유키의 5남. 교토 쇼시다이 역임. 안세이 대옥, 공무합체 추진, 덴구토의 난 진압 관여. |
13대 | 사카이 타다우지 | 酒井 忠氏일본어 | 1862년 ~ 1868년 | 하타모토 가문에서 양자로 입적. 친막부 정책 유지, 보신 전쟁 초기 막부 측 참전. |
14대 | 사카이 타다아키 | 酒井 忠義일본어 | 1868년 ~ 1871년 | 보신 전쟁 중 복귀(이름: 타다로쿠忠禄). 번을 친황실로 전환. 판적봉환 후 지번사 역임. |
초대 번주 타다카츠의 뒤를 이은 2대 번주 사카이 타다나오는 적자였던 형 사카이 타다토모가 폐적되면서 가문을 계승했다. 그는 1668년 형의 아들인 사카이 타다쿠니에게 아와 국의 영지 1만 석을 나누어 주어 아와 가쓰야마 번을 세웠고, 1682년에는 자신의 둘째 아들 사카이 타다시게에게 에치젠 쓰루가 군과 오미 다카시마 군 내 영지 1만 석을 주어 쓰루가번을, 다섯째 아들 사카이 타다네에게 3천 석을 주어 하타모토로 독립시켰다. 이로 인해 오바마 번의 영지 규모는 10만 3500석으로 줄어들었다.
사카이 가문의 통치 아래 오바마 번은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보냈으나, 1735년 대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고 연이어 기근이 발생했다. 당시 다른 많은 지역처럼 번의 재정은 어려워졌고 영민들의 생활은 궁핍해졌다. 영민들은 번주에게 구제를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770년에는 농민 봉기(잇키)가 일어나기도 했다. 번은 재정난을 타개하려 노력했지만, 1836년 다시 냉해로 인한 기근이 닥치면서 재정은 사실상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 11대 번주 사카이 타다요리는 30만 료 이상의 부채를 안고 번을 물려받아 재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1833년 흉작으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1834년 은퇴했다.
막부 말기에는 12대이자 14대 번주가 된 사카이 타다아키(초명 타다요시, 은거 후 타다토시, 복귀 후 타다아키)가 교토 쇼시다이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이이 나오스케와 협력하여 안세이 대옥을 교토에서 주도했으며, 공무합체 정책의 일환으로 가즈노미야의 쇼군가 시집을 추진했다. 또한 다케다 고운사이 등이 이끈 덴구토의 난 진압에도 관여했다. 그는 1862년에 은퇴했으나,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고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이 패배하자 사카이 타다요시(酒井 忠禄, 타다아키의 은거 후 이름)라는 이름으로 다시 번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기존의 친막부 노선을 버리고 번을 존황파로 전환시켜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오우(奥羽) 지방까지 진군했다. 한편, 1862년 타다아키의 은퇴 후 번주가 되었던 13대 사카이 타다우지는 친막부 정책을 유지하며 미토 번의 난 진압에 참여하고 보신 전쟁 초기에도 막부 측으로 참전했으나, 도바-후시미 전투 패배 후 실권을 되찾은 타다아키에 의해 "병"을 이유로 강제 은퇴당했다.
1869년 판적봉환 이후 사카이 타다아키(당시 이름 타다로쿠)는 오바마 번의 지번사로 임명되었다. 1870년 9월, 쓰루가번(당시 마루야마 번)과 오바마 번이 합병되면서 마루야마 번 지사였던 사카이 타다츠네가 새로운 오바마 번 지사가 되었다. 1871년 7월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오바마 번은 오바마 현이 되었다. 오바마 현은 같은 해 11월 쓰루가 현에 통합되었고, 1876년에는 시가현에 편입되었다가 1881년 최종적으로 후쿠이현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덧붙여, 네덜란드 학문인 난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해체신서』를 번역한 것으로 유명한 스기타 겐파쿠는 오바마 번의 번의(藩医, 번 소속 의사)였다. 그의 업적을 기려 오바마 성터 근처에는 스기타 겐파쿠 기념 공립 오바마 병원이 세워져 있다.
2. 4.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막부 말기 오바마번은 격동의 시기를 맞이했으며, 특히 12대 번주 사카이 타다아키는 막부 정치의 중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교토 쇼시다이를 두 차례 역임하며,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와 협력하여 막부와 조정의 결합을 꾀하는 코부 갓타이 운동을 추진했다. 또한 타케다 코운사이 등이 이끈 미토 번의 손노 조이 세력을 진압하는 데 관여하며 막부 체제 유지에 힘썼다.[6]1862년 타다아키가 안세이 대숙청의 여파 등으로 잠시 은퇴하자, 양자인 사카이 타다우지가 13대 번주가 되었다. 타다우지 역시 선대의 친 도쿠가와 막부 노선을 이어받아 미토 번의 난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6]
그러나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고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이 패배하자 번의 상황은 급변했다. 타다우지는 이 전투에 번의 군대를 보냈으나, 패배 후 번 내에서 입지가 약화되었다. 이에 은퇴했던 타다아키가 사카이 타다요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권력을 잡고, 번의 노선을 메이지 정부 지지로 전환했다.[6] 타다요시(타다아키)는 새로운 메이지 정부 아래에서 와카사 국의 지사로 임명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이 단행될 때까지 그 직을 유지하며 오바마번의 마지막을 관리했다.[6]
3. 역대 번주
- '''교고쿠 가문''' (도자마 다이묘)
# 교고쿠 다카쓰구
# 교고쿠 다다타카
- '''사카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
# 다다카쓰
# 다다나오
# 다다타카
# 다다소노
# 다다오토
# 다다아키라
# 다다모치
# 다다요시
# 다다쓰라
# 다다유키
# 다다요리
# 다다아키 (은거 몇 달 전 다다토시로 개명)
# 다다우지
# 다다토시 (재임)
3. 1. 교고쿠 가문
교고쿠 가문은 도자마 다이묘였다.#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
-- 교고쿠 가문 (도자마 다이묘) 1600-1634 | |||||
1 | 교고쿠 다카쓰구|京極高次일본어 | 1600–1609 | 종3위 (従三位) | 와카사노카미(若狭守), 산기(参議) | 85000석 |
2 | 교고쿠 다다타카|京極忠高일본어 | 1609–1634 | 종4위하 (従四位下) | 사코노에곤쇼쇼(左少将) | 85000석 → 92000석 |
3. 2. 사카이 가문
후다이 다이묘 가문으로, 초기 고쿠다카는 11만 3천 석이었으나 나중에 10만 3천 석으로 조정되었다.1634년, 무사시국 가와고에번의 번주였던 사카이씨 방계 출신 사카이 타다카츠(酒井忠勝)가 오바마번의 새로운 다이묘가 되었다.[6] 타다카츠는 쇼군 직속의 고위 관료로서 로주 회의에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막부 최고직인 타이로까지 역임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오바마번의 고쿠다카는 12만 3,500석에 달했다. 타다카츠는 번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조세 제도를 정비하고, 마을 행정을 담당하는 마치부교(町奉行)와 지방 영주를 임명하는 등 번의 기초를 다졌다. 사카이씨는 이후 에도 시대 말기까지 14대에 걸쳐 237년 동안 오바마번을 다스렸다.
타다카츠의 뒤를 이은 2대 번주 사카이 타다나오(酒井忠直)는 타다카츠의 넷째 아들이었다. 1668년, 타다나오는 아와국에 있던 번의 영지 일부를 조카 사카이 타다쿠니에게 떼어주어 1만 석 규모의 아와-카츠야마번을 세웠다. 또한 1682년에는 자신의 아들 사카이 타다시게를 위해 에치젠국의 영지에서 1만 석을 분할하여 쓰루가번을 만들었다. 다섯째 아들 사카이 타다네에게 추가로 3천 석이 주어지면서, 오바마번의 고쿠다카는 최종적으로 10만 3,500석으로 감소했다.
사카이 가문의 통치 아래 오바마번은 비교적 평화와 안정을 누렸으나, 어려움도 겪었다. 1735년에는 큰 홍수로 인해 번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다른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다. 농민들은 영주에게 구제를 요청했지만 오랫동안 외면당했고, 결국 1770년에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번의 재정을 강화하고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수십 년 후인 1836년에 또다시 기근이 닥치는 등 어려움이 반복되었다.
사카이 가문 번주 중에는 막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들도 있었다. 7대 번주 사카이 타다모치(酒井忠用)는 오사카 조다이와 교토 쇼시다이 등 막부의 요직을 역임했으며, 10대 번주 사카이 타다유키(酒井忠進) 또한 교토 쇼시다이와 로주를 지냈다.
12대 번주 사카이 타다아키(酒井忠義) 역시 교토 쇼시다이를 역임했다. 그는 이이 나오스케와 협력하여 막부와 조정의 협력을 도모하는 코부 갓타이 정책을 추진했으며, 다케다 코운사이 등이 주도한 미토 번의 손노조이 파의 봉기(덴구토의 난)를 진압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1862년에 은퇴했으나, 1868년 보신 전쟁의 서막을 알린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이 패배하자 사카이 타다요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권력을 되찾아 오바마번을 친황실 세력으로 이끌었다. 그는 새로운 메이지 정부 아래에서 와카사국의 지사로 임명되어 1871년 폐번치현으로 번이 폐지될 때까지 통치했다.
4. 막부 말기의 영지
대부분의 번 시스템의 영지인 후다이 다이묘와 달리, 오바마 번은 정기적인 지적도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생산량을 기반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기 위해 계산된 불연속적인 영토로 구성되었다.[7][8] 오바마 번은 와카사국 전체와 인접한 에치젠국, 오미국에 흩어져 있는 작은 영지들을 관리했다.
막부 말기의 오바마 번 영지는 다음과 같다. 이는 「가도카와 일본 지명 대사전」(18·후쿠이현, 25·시가현)의 기술에 따른 것이다.
국(国) | 군(郡) | 촌(村) 수 | 비고 |
---|---|---|---|
와카사국 | 오뉴군 | 122개 촌 | |
오이군 | 73개 촌 | ||
미카타군 | 58개 촌 | ||
에치젠국 | 난조군 | 5개 촌 | |
이마다테군 | 6개 촌 | ||
쓰루가군 | 38개 촌 | ||
오미국 | 다카시마군 | 5개 촌 | 키즈촌(木津村), 츠지자와촌(辻沢村), 카와라시촌(河原市村), 카미코가촌(上古賀村), 미나미후나키촌(南船木村) |
참조
[1]
서적
Land and Lordship in Early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1998
[2]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3]
간행물
Nobiliare du Japon
http://www.unterstei[...]
2003
[4]
서적
Sekigahara 1600: the final struggle for power
https://books.google[...]
1995
[5]
서적
Kaempfer's Japan: Tokugawa Culture Observed
https://books.google[...]
1999
[6]
문서
[7]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1987
[8]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1987
[9]
문서
若狭小浜藩酒井家江戸上屋敷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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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嘉永慶応 江戸切絵図
尾張屋清七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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