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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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우치 씨는 한국에서 기원했다는 전설을 가진 일본의 씨족으로, 야마구치 현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다. 백제의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며, 국제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우고 문화를 발전시켰다. 특히 명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예술과 문화를 장려하여 '오우치 문화'를 꽃피웠다. 1551년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의 죽음 이후 쇠퇴하여 1557년 멸망했다. 현대에는 도요타 자동차 창업자 가문이 오우치 씨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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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씨 | |
---|---|
개요 | |
![]() | |
성씨 | 오우치 (Ōuchi, 大内) |
본성 | 다타라씨 (Tatara-shi, 多々良氏) |
출신 | 스오국 (Suō-koku, 周防国) |
근거지 | 부여 |
창시자 | 오우치 모리후사 (Ōuchi Morifusa, 大内盛房) |
마지막 통치자 | 오우치 요시나가 (Ōuchi Yoshinaga, 大内義長) |
창건 연도 | 12세기 |
해체 | 1557년, 오우치 요시나가 자결 |
주요 인물 | 오우치 요시히로 (Ōuchi Yoshihiro, 大内義弘) 오우치 마사히로 (Ōuchi Masahiro, 大内政弘) 오우치 요시오키 (Ōuchi Yoshioki, 大内義興) 오우치 요시타카 (Ōuchi Yoshitaka, 大内義隆) |
지류 | 야마구치씨 (Yamaguchi-shi, 山口氏) 와시즈씨 (Washizu-shi, 鷲津氏) |
영어 이름 | Ōuchi clan |
역사적 배경 | |
가문 기원 (전승) | 백제 왕족 |
가문 | 다타라씨 |
주요 활동 시기 | 무로마치 시대의 유력 다이묘 |
주요 활동 지역 | |
주요 영지 | 스오국을 중심으로 한 서일본 지역 |
2. 역사
오우치 씨는 야마구치시 지역 전설에 따르면 백제 왕자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곤도 키요시가 저술한 ''오우치 씨 실록''은 이러한 전설을 담고 있는 책 중 하나이다.[1]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견을 제시하며, 전승들 간에도 모순이 존재한다.[2] 오늘날 오우치 씨 후손들은 이견 없이 백제와의 강한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3] ''오우치 타타라시 후추''와 ''오우치 씨 실록''에 따르면, 임성태자가 오우치 씨의 첫 번째 조상이다.
오우치 씨는 혼슈 서쪽 끝 스오 국을 근거지로 하여 국제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우고 정치력을 행사했다. 특히 명나라와의 무역과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4] 오닌의 난 이후 호소카와 가문과 강력한 경쟁 관계를 형성했으며, 1523년 닝보 사건에서 충돌하여 중국은 일본 상인들에게 닝보를 폐쇄하기도 했다. 이후 오우치 씨의 배는 1540년과 1549년에만 중국에서 무역이 허용되었다. 또한, 오우치 씨는 1551년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잠시 머물게 하기도 했다.
오우치 씨는 부와 무역 관계를 바탕으로 예술과 문화 분야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수많은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지닌 물품들을 소유했다. 특히 1486년 오우치 마사히로가 화가 세슈를 야마구치로 초대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551년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는 고나라 천황과 그의 궁정을 교토에서 야마구치로 옮기려 했으나, 가신들의 반대로 인해 타이네이 사 사건이 발생하여 요시타카는 자결하게 되었다.[5] 반란의 지도자 스에 하루카타는 오우치 요시나가를 꼭두각시 가문 수장으로 임명했지만, 요시나가는 오우치 씨의 오랜 라이벌 오토모 소린의 동생이었다.
1555년 모리 모토나리는 미야지마 전투에서 스에 하루카타를 격파했고, 2년 후 요시나가는 자결하여 오우치 씨는 완전히 멸망했다.[6]
2. 1. 가문 유래
일본인들은 소위 '''겐페이토키쓰'''(源平藤橘, 일본 4대 대성인 겐지, 헤이시, 후지와라씨, 다치바나씨 후손의 총칭) 또는 그 외의 중앙 귀족의 후손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우치 씨는 백제 성명왕 혹은 위덕왕[18]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를 시조로 주장한다.[19]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으로 건너간 임성태자가 스오국의 다타라하마(多々良浜) 바닷가에 도착하였으므로 스스로의 성을 '''타타라'''(多多良)라 하였다가 훗날 오우치(大內) 마을에 거주하게 되면서 '''오우치씨'''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찬성씨록에서는 금관가야의 왕 니리쿠모(爾利久牟)가 타타라성씨를 사용하며 스쿠네가 되었다고 하여 타타라성씨가 한반도계인 것을 알 수 있다. 陶氏(스에우지)와 같이 가야(加羅)계 또는 백제(百済)계 성씨이다.
현대 야마구치시의 지역 전설에 따르면 오우치 씨는 한국에서 기원했으며, 특히 백제의 왕자의 후손이라고 한다. 곤도 키요시 (近藤清石, 1833–1916)의 저서인 ''오우치 씨 실록''(大内氏実録)은 이 전설을 채택한 책 중 하나이다.[1]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 이견을 보이며, 심지어 전통들도 서로 모순된다.[2] 오늘날 오우치 씨의 후손들은 이견이 없다고 생각하며, 백제와 강하게 동일시한다.[3] ''오우치 타타라시 후추''와 ''오우치 씨 실록''에 따르면, 임성태자가 그들의 첫 번째 조상이다.
본성은 다타라 씨이다. 성(카바네)은 처음 스쿠네였고, 후에 아손을 칭했다. 백제의 성왕(성명왕)의 제3왕자의 후예를 칭한다. 스이코 천황 시대에 백제의 성명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이주하여 쇼토쿠 태자로부터 타타라 성을 하사받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지방 호족으로서 스오 국 오우치에 거주하며 오우치 씨라고 칭했다고 한다. 한편, 『신찬성씨록』에 가야 (금관가야)계의 도래인으로서 "타타라 공(씨)"이 게재되어 있으며, 이 일족과의 관련성도 생각할 수 있다.[7]
2. 2. 헤이안 시대에서 가마쿠라 시대까지
헤이안 시대 후기인 닌페이 2년(1152년)에 발급된 재청하문에 다타라씨 성을 가진 세 사람의 서명이 적혀 있다. 이것이 다타라씨가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데, 이 무렵에 접어들어 재청 관인으로서 큰 세력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헤이안 말기 오우치씨의 당주이자 스오의 호족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다타라 모리후사는 스오노곤노스케에 임명된 이후 '''오우치노스케'''(大內介)라는 이름을 쓰며 자신의 후손인 역대 당주들에게 이 이름을 물려주었다. 오오치 히로모리부터는 주에이 연간(1182년~83년) 무렵부터 "스오 곤노스케"를 칭했다. 가마쿠라 시대에 오우치 일족은 스오의 국아(國衙-지방관아)를 완전히 장악하여 실질적인 스오의 지배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막부의 고케닌으로서 로쿠하라 단다이[20]의 효조슈에 임명되기도 했다.2. 3. 난보쿠초 시대
남북조 시대에 오우치 씨의 당주였던 오우치 히로유키(大内弘幸)와 그의 숙부 와시즈 나가히로(鷲頭長弘) 사이에 가독(家督) 자리를 둘러싼 싸움이 일어났다. 히로유키의 아들 히로요(弘世)가 와시즈씨 집안을 종속시키고 나가토국(長門国)의 슈고 고토씨(厚東氏) 집안과 항쟁, 쇼헤이 13년/엔분 3년(1358년)에 시모후리성(霜降城)을 공략하여 고토씨를 규슈로 내쫓았다. 이로써 오우치 씨의 세력은 스오와 나가토, 2개 구니로 확대되었다. 히로요는 본거지를 야마구치(山口)로 옮기고 쇼헤이 18년/조지 2년(1363년) 무로마치 막부에 신복했다.[20]히로요의 뒤를 이은 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는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의 규슈 제압에 종군하고, 남조(南朝)와의 통합 교섭도 맡았다. 겐추 8년/메이토쿠 2년(1391년) 야마나씨(山名氏)가 일으킨 메이토쿠의 난에서도 활약하여 이즈미, 기이, 스오, 나가토, 부젠, 이와미의 6개 구니를 다스리는 슈고 다이묘(守護大名)가 되었다. 조선과도 독자적인 무역을 행하는 등(《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통교 기사만 150년간에 걸쳐 200회가 넘을 정도) 오우치 씨 집안의 최전성기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요시히로의 세력을 두려워한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의 도발로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 아시카가 미쓰카네(足利満兼)와 공모해 오에이 6년(1399년)에 사카이(堺)에서 거병했다가 패하고 전사한다(오에이의 난).[20]
요시히로 사후 영지 대부분은 요시미쓰에게 넘어갔고, 스오·나가토 2개 구니의 슈고는 요시히로의 남동생 오우치 히로시게(大内弘茂)에게 주어져 오우치 집안의 세력은 일시 쇠퇴했다. 그러나 오에이의 난에서 영지에 남아 있던 요시히로의 또 다른 동생 오우치 모리미(大內盛見)가 이에 반항하여 다시 가독 자리를 둘러싼 항쟁이 일어났고, 히로시게는 모리미에게 살해당했다. 막부의 명을 받고 있던 주변의 고쿠진(國人)들도 모리미에게 항복하면서 막부는 모리미의 가독 계승을 인정해야만 했다.[20]
2. 4. 무로마치 시대에서 센고쿠 시대까지
오우치 모리미는 요시히로 시대의 영화를 되찾기 위해 기타큐슈 방면으로 진출했다. 료슌의 후임이 된 큐슈 단다이 시부카와 씨를 대신하여 기타큐슈를 담당, 막부의 신임을 얻어 부젠 국 수호에도 임명되었지만, 쇼니 미쓰사다 · 오토모 모치나오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에이쿄 3년 (1431년)에 사망했다.[20] 그러나 뒤를 이은 조카 오우치 모치요 (요시히로의 유아)는 모리미에 필적하는 인물이었으며,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신임을 받아 지쿠젠 수호에 임명되어 쇼니 씨 · 오토모 씨를 정벌하는 등, 오우치 씨의 기타큐슈에서의 우위를 확립했다. 또한, 이 무렵 야마구치 씨의 계통이 일어났다.오우치 모치요는 가키쓰 원년 (1441년)의 가키쓰의 난에 휘말려 비명횡사했지만, 사촌이자 양자인 오우치 노리히로 (모리미의 아들)가 세력을 계승했다.
오우치 마사히로는 오닌의 난 원년(1467년)부터 시작된 오닌의 난에서 서군의 야마나 소젠에 속하여 용명을 떨쳤으며, 소젠 사후 야마나 씨가 전선을 이탈하자 서군의 사실상 총대장이 되었다. 난 종결 후에는 규슈에서의 복권을 꾀하며 거병한 쇼니 씨(少弐氏) · 오토모 씨(大友氏)를 다시 굴복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에도 영향력을 미치는 슈고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또한 분국법인 "오우치 가문 벽서"를 제정하여 슈고다이 등 중신의 대두를 억제하려 했다.
전국 시대, 마사히로의 뒤를 이은 오우치 요시오키는 쇼니 씨를 일시 멸망시키는 등 기타큐슈 · 주고쿠 지방의 패권을 확립하여 그 세력 기반을 확고히 했다. 그리고 교토에서 쫓겨난 방랑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보호했다. 에이쇼 5년(1508년)에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협력하여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옹립하고 주고쿠 · 규슈 세력을 이끌고 상락을 달성했다. 상락 후에는 간레이 다이로서 무로마치 막정(幕政)을 집행하여 표면상으로는 거대한 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재경은 오우치 씨에게도, 그 산하의 구니진과 고족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고, 먼저 귀국한 아키 다케다 씨의 다케다 모토시게와 이즈모의 아마고 쓰네히사 등이 오우치 영토를 침략하여 발밑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대응에 고심한 요시오키는 교토를 떠나 귀국하여 아마고 씨와 아키 다케다 씨와 싸웠다.
쿄로쿠 원년(1528년)에 요시오키가 사망하자 적자 오우치 요시타카가 가독을 이었다. 이 시대에는 스오를 비롯해 나가토 · 이와미 · 아키 · 빈고 · 부젠 · 지쿠젠을 영유하는 등 명실상부한 사이코쿠 제일의 전국 다이묘가 되어, 오우치 가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더 나아가 호소카와 씨와도 다투어 명과의 교역을 독점했으며, 요시타카가 학문 · 예술에 열심이어서 기독교 포교를 허락하고 구게와 선교사를 적극적으로 보호했기 때문에 오우치 영내에는 독특한 야마구치 문화 (오우치 문화)가 생겨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맞이했다.
2. 5. 쇠퇴와 멸망
덴분 20년(1551년), 스에 다카후사(陶隆房)의 모반으로 요시타카가 자결하면서(다이네이지의 변) 오우치 씨는 급속히 쇠퇴한다.[21] 요시타카 사후, 스에 다카후사는 요시타카의 조카이자 양자인 오토모 하루히데(大友晴英)를 당주로 옹립하고, 그에게서 이름 한 자를 받아 하루카타(晴賢)로 개명했다. 하루히데는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로 개명하고, 실권은 스에 하루카타가 장악했다. 하루카타는 강압적으로 가문을 다스렸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적지 않았다. 요시미 다다요리(吉見正頼)가 이와미 산본마쓰(三本松)에서 반기를 들었고,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종속 관계를 벗어나 독립했다. 고지 원년(1555년),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하루카타가 모토나리에게 패배하여 자결했다. 그의 죽음으로 오우치 가문은 통제력을 잃었고, 고지 2년(1556년) 모리 모토나리의 침공을 받았다. 가문 내부에서도 스기씨(杉氏), 스에씨(陶氏), 나이토씨(内藤氏) 등이 내분을 일으켰다. 요시미씨(吉見氏)도 모리에게 항복하면서, 오우치 요시나가는 가쓰야마성(且山城)으로 도망쳤다가 이듬해 자결하여 오우치 씨는 멸망했다.2. 6. 분고 오우치 씨
에이로쿠 2년(1559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오토모 요시시게(후의 소린)에게 규슈 단다이 직과 함께 오우치 씨의 가독을 인정하는 고나이쇼를 발급했다.[20][22][23] 이는 오우치 요시나가의 친형이라는 인연을 고려한 조치였다.에이로쿠 12년(1569년)에는 오우치 씨의 일문인 오우치 테루히로가 오토모 소린의 후원을 받아 스오 야마구치를 침공하는 사건(오우치 테루히로의 난)이 발생했다. 스오의 오우치 씨 옛 신하들이 합류하여 일시적으로 야마구치를 점령했지만, 모리 군의 역습으로 결국 전멸했다.[24]
2. 7. 에도 시대
에도 시대 우시쿠 번(牛久藩)의 영주였던 야마구치 씨는 오우치 요시히로의 차남 오우치 모리모리 계통으로, 오다 가문을 섬겼던 야마구치 시게마사가 초대 번주였다.[1] 이 가문은 메이지 유신까지 후다이 다이묘로 존속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화족의 자작 가문에 속했다.[1]3. 문화
오우치 씨는 역사적으로 국제 무역을 기반으로 경제력을 쌓고 정치력을 행사하기 위해 일본 정체성과 더불어 한국 유산을 강조했다.[4] 혼슈 서쪽 끝에 있는 스오 국을 근거지로 삼아, 외국 무역과 외교, 특히 명나라와 관련된 주요 가문 중 하나로 성장했다. 오닌의 난 (1467–1477) 이후,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호소카와 가문과 오우치 씨 사이에 강력한 경쟁 관계가 형성되었다. 두 가문은 1523년 닝보 사건에서 충돌했고, 그 결과 중국은 일본 상인들에게 닝보를 폐쇄했다. 이후 오우치 씨의 배는 1540년과 1549년에만 중국에서 무역이 허용되었다. 오우치 씨는 또한 1551년에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잠시 머물게 했다.
이러한 부와 무역 관계를 바탕으로 오우치 씨는 예술과 문화 분야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그들은 일본과 중국, 그리고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수많은 문화적, 예술적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지닌 물품들을 소유했다. 특히 1486년 오우치 마사히로가 유명한 화가 세슈를 야마구치로 초대한 일은 유명하다.
4. 주요 인물
- 오우치 노스케 - 오우치 성씨를 최초로 사용한 인물. 임성태자의 25대 자손[18]이자, 오우치 요시히로의 고조부.
- 오우치 히로요 (1325년 ~ 1380년)
- 오우치 요시히로 (1356년 ~ 1400년) - 무로마치 막부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반기를 들었다(오에이의 난).
- 오우치 모리아키라 (1377년 ~ 1431년)
- 오우치 모치요 (1394년 ~ 1441년)
- 오우치 노리히로 (1420년 ~ 1465년)
- 오우치 마사히로 (1446년 ~ 1495년) - 오닌의 난 때 야마나 소젠이 이끄는 서군에 가담하여 큰 무공을 올렸다.
- 오우치 요시오키 (1477년 ~ 1528년) - 1508년에 쫓겨났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복위시키고 패자로 군림하는 등 오우치 가문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 오우치 요시타카 (1507년 ~ 1551년) - 부친 요시오키의 뒤를 이어 서일본 제일의 다이묘로 명성을 떨쳤으며 6개국을 실효 지배하였다. 가신 스에 다카후사의 모반으로 자결하였다(다이네이지의 변). 이후 오우치 가문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 오우치 요시나가 (1537년? ~ 1557년) - 오우치 가문 최후의 당주. 오토모 소린의 동생이자 오우치 요시오키의 외손으로, 요시타카 사후 소린과 스에 다카후사에 의해 오우치 가문의 이름뿐인 당주가 되었으나, 결국 모리 모토나리에게 패배하여 할복하고 오우치 가문은 멸망하였다.
- 오우치 히로나리 (? ~ 1244년)
- 오우치 히로사다 (? ~ 1286년)
- 오우치 히로이에 (1274년? ~ 1300년)
- 오우치 시게히로 (? ~ 1320년)
- 오우치 히로유키 (? ~ 1352년)
5. 가신 그룹 (센고쿠 시대)
가문 | 주요 인물 | 비고 |
---|---|---|
우다 씨 | 우다 히로아키(宇多弘詮), 우다 타카토시(宇多孝俊), 우다 타카쓰구(宇多孝次) | |
스기 씨 | 스기 시게타카(杉重隆), 스기 히로타카(杉弘隆), 스기 오키시게(杉興重), 스기 오키나가(杉興長), 스기 오키운(杉興運), 스기 마사시게(杉正重) | |
진다이 씨 | 진다이 사다쓰나(神代貞綱), 진다이 미치무네(神代通宗), 진다이 타다카네(神代忠兼), 진다이 나가키요(神代長清) | 지쿠젠 국, 야마시로 국 슈고다이 등 |
니호 씨 | 니호 호고(仁保護郷), 니호 오키무네(仁保興棟), 니호 오키사다(仁保興貞), 니호 오키타카(仁保興奉), 니호 다카아리(仁保隆在), 니호 다카야스(仁保隆慰) | 부젠 슈고다이 등 |
레이젠 씨 | 오우치 오키토요, 레이젠 타카토요 | |
노다 씨 | 노다 오키카타(野田興方), 노다 타카카타(野田隆方), 노다 타카노리(野田隆則) | |
구로카와 씨 | 구로카와 타카나오 | |
다카이시 씨 | 다카이시 모토카츠(高石元勝) | |
에키 씨 | ||
우노 씨 | 우노 오키유키(宇野興行) | |
카키나미 씨 | 카키나미 히로요시(柿並弘慶), 카키나미 타카유키(柿並隆幸), 카키나미 타카마사(柿並隆正) | |
와시즈 씨 | 와시즈 히로스에(鷲頭弘忠), 와시즈 모리토요(鷲頭盛豊) | |
아오카게 씨 | 아오카게 타카토모(青景隆தும்), 아오카게 타카나리(青景隆成) | |
아가와 씨 | 아가와 타카야스(阿川隆安) | |
이사 씨 | 이사 모토츠나(伊佐元序) | |
이와마사 씨 | 이와마사 오키무네(岩政興棟) | |
오카베 씨 | 오카베 타카카게(岡部隆景) | |
스기모리 씨 | 스기모리 타카야스(杉森隆康) | |
다케나카 씨 | 다케나카 히로쿠니(竹中弘国), 다케나카 오키쿠니(竹中興国), 다케나카 타카미츠(竹中隆光), 다케나카 키요쿠니(竹中清国), 다케나카 반코쿠(竹中万国), 다케나카 나오쿠니(竹中直国), 다케나카 타카쿠니(竹中隆国) | 나가토 이노미야 이카리 신사 다이구지 가문 |
반다 씨 | 반다 히로오키(飯田弘興), 반다 이와사이(飯田岩才), 반다 다이조스케(飯田大蔵丞), 반다 타케키요(飯田武清) | |
미이 씨 | 미이 나가사다(三井長定) | |
야스토미 씨 | 야스토미 오키세이(安富興成), 야스토미 오키무네(安富興宗) | |
야마다 씨 | 야마다 타카사다(山田隆定), 야마다 모리자네(山田盛実), 야마다 모리토오(山田盛遠) | 나가토 이치노미야 스미요시 신사 다이구지 가문 |
야기이 씨 | 야기이 쿠니히사(八木井国久), 야기이 타케모리(八木井武盛) | |
요시다 씨 | 요시다 오키타네(吉田興種) | |
오노 씨 | 오노 키요스케(小野清輔), 오노 노리히사 | |
후쿠야 씨 | 후쿠야 타카카네(福屋隆兼), 후쿠야 타카토(福屋隆தும்) | |
데와 씨 | 데와 스케모리(出羽祐盛), 데와 모토스케(出羽元祐) | |
스후 씨 | 스후 타케카네(周布武兼), 스후 모토카네(周布元兼) | |
우치다 씨 | 우치다 요리하루(内田頼春) | |
츠노 씨 | 츠노 타카야스(角隆康) | |
시지도 씨 | 시지도 다카요시(宍道隆慶) | |
아마노 씨 | 아마노 오키사다(天野興定), 아마노 다카쓰나(天野隆綱), 아마노 다카시게(天野隆重), 아마노 다카요시(天野隆吉), 아마노 치카시게(天野親重) | |
오바타 씨 | 오바타 요시자네(小幡義實) | |
오와 씨 | 오와 무네치카(大輪宗近) | |
하니 씨 | 하니 아리시게(波根有重), 하니 후지나오(波根藤直) | |
오바 씨 | 오바 카네카네(大庭賢兼) | |
누키 씨 | 누키 타케스케(貫武祐), 누키 하루스케(貫晴祐), 누키 코스케(貫小祐), 누키 타카스케(貫隆祐) | |
모지 씨 | ||
무나카타 씨 | 무나카타 마사우지(구로카와 류쇼), 무나카타 우지오(구로카와 류조), 무나카타 우지사다 | |
아소 씨 | ||
아키즈키 씨 | 아키즈키 후미타네(타네카타) | |
센쥬 씨 | ||
카라스다 씨 | 카라스다 카게미치(烏田景道), 카라스다 타케미치(烏田武通) | |
사카라 씨 | 사카라 마사쓰구(坂羅正次), 사카라 히로쓰네(坂羅広常), 사카라 마사토(坂羅正தும்), 사카라 마사젠(坂羅正善), 사카라 타케토(坂羅武தும்), 사카라 타케마스(坂羅武益) | |
아베 씨 | 아베 나가시게(阿部永重) | |
오오쿠니 씨 | 오오쿠니 나가토시(大国長தும்) | |
오노 씨 | 오노 이쿠하쿠(小野郁白) | |
오하라 씨 | 오하라 타카노리(小原隆則) | |
가와세 씨 | 가와세 야스마츠(河瀬康松) | |
사이카 씨 | 사이카 타카토모(雑賀隆தும்), 사이카 타카토시(雑賀隆俊) | |
사이토 씨 | 사이토 타카토시(斎藤隆利) | |
타카하시 씨 | 타카하시 키요카게(高橋清景) | |
타하라 씨 | 타하라 요리미쓰(田原寄光) | |
토다 씨 | 토다 카츠사다(戸田勝定) | |
토요다 씨 | 토요다 타카유키(豊田隆幸) | |
누마 씨 | 누마 오키무네(沼興宗), 누마 오키카츠(沼興勝), 누마 오키시게(沼興重) | |
누마마 씨 | 누마마 아츠사다(沼間訁貞) | |
마치 씨 | 마치 타카스케(町隆資) | |
마치노 씨 | 마치노 타카카제(町野隆風), 마치노 타카치카(町野隆近), 마치노 타카하루(町野隆春) | |
야스다 씨 | 야스다 오키세이(安田興清) | |
야마구치 씨 | 야마구치 히데요시(山口秀善) | |
야마다 씨 | 야마다 오키모리(山田興盛) | |
류자키 씨 | 류자키 미치스케(龍崎通資) | |
에노모토 씨 | 에노모토 켄츄(榎本賢忠) |
5. 1. 스오・나가토 지방 가신단
가문 | 주요 인물 |
---|---|
스에씨(陶氏) | 스에 히로후사(陶弘房), 스에 히로모리(陶弘護), 스에 다케모리(陶武護), 스에 오키후사(陶興房), 미기타 히로아키(右田弘詮), 스에 하루카타(陶晴賢), 스에 나가후사(陶長房) |
나이토씨(内藤氏) | 나이토 히로노리(内藤弘矩), 나이토 오키모리(内藤興盛), 나이토 다카토키(内藤隆時), 나이토 다카하루(内藤隆春), 나이토 다카요(内藤隆世) |
스기씨(杉氏) | 스기 오키쓰라(杉興連), 스기 시게노리(杉重矩), 스기 시게스케(杉重輔), 스기 모토아이(杉元相) |
히로나카씨(弘中氏) | 히로나카 다케나가(弘中武長), 히로나카 오키카네(弘中興兼), 히로나카 다카카네(弘中隆包/隆兼), 히로나카 다카스케(弘中隆助) |
에라씨(江良氏) | 에라 후사히데(江良房栄) |
이이다씨(飯田氏) | 이이다 오키히데(飯田興秀), 이이다 나가히데(飯田長秀) |
스에타케씨(末武氏) |
5. 2. 이와미 지방 가신단
- 요시미 씨
- * 요시미 노부요리
- * 요시미 요리오키
- * 요시미 마사요리
- * 요시미 히로요리
- 마스다 씨
- * 마스다 히로아키
- * 마스다 후지카네
- 톤다 씨
- * 톤다 히로타네 (도이다 히로타네)
- * 톤다 오키유키 (도이다 오키유키)
- * 톤다 다카모리 (도이다 다카모리)
- 히로나카 씨
- * 히로나카 다카카네
- 이이다 오키히데
5. 3. 그 외 지방 주요 가신들
이름 | 비고 |
---|---|
레이제이 다카토요(冷泉隆豊) | |
사가라 다케토(相良武任) | |
아마노 다카요시(天野隆良) | |
오카야 다카히데(岡屋隆秀) | |
오타 다카미치(大田隆通) | |
오니와 가타카네(大庭賢兼) | |
오바타 요시자네(小幡義實) | |
오카베 다카카게(岡部隆景) | |
구로카와 다카카타(黒川隆像) | |
사나미 다카쓰라(佐波降連) | |
네기 미기노베(禰宜右延) | |
히라가 다카모리(平賀隆保) | |
스에 하루카타 | |
스에 나가후사 | |
히로나카 타카카네 | |
이이다 오키히데 |
이 외에도 다양한 가문들이 오우치 가문을 섬겼다.
6. 현대의 오우치 씨
- 오우치 가문은 오우치 요시나가를 마지막으로 멸망했으나, 다타라 성씨는 지속되어 대일본제국 시기 귀족 가문인 화족(華族)으로 세력을 떨쳤고, 스오 오우치 가문의 혈통 또한 이어졌다.[1] 제31대 당주(종손)인 오우치 요시타카의 아들 중 하나는 도요타씨(豊田氏)를 창성하여 가계를 이었다. 도요타 자동차의 창업자 집안이 도요타 가문의 일족이다.
- 남북조 시대에 아시카가 막부에 반기를 들었던 오우치 요시히로의 일생을 소재로 한 소설 '''화염의 탑'''(炎の塔)이 있다.[1] 나오키 상 수상 작가 후루카와 카오루(古川薰)가 집필했고, 조정민이 번역하여 도서출판 산지니에서 출간되었다.
- 2009년 6월 8일 KBS 역사 스페셜에서 오우치 이야기(1~5) 편이 방영되었다.[1] 오우치 가문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뿌리인 임성태자의 흔적을 찾아 충남 공주, 부여, 익산을 탐방하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매년 백제 왕릉에서 제사를 올리며 자신들을 백제 성왕의 45대 손이라고 주장한다. 프로그램에는 야마구치현에 임성태자 공양탑과 그의 칼이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으며, 일제 시대 전까지 한반도와 관련성을 나타내는 집안 자료들이 많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 오우치씨는 임성태자의 후손과 가야왕 타타라 성(姓) 계통으로, 미나모토 성이 조상인 동성이본 혈통이 존재하나 두 집안 사이는 전혀 관련이 없다.[1]
- 현대 야마구치시의 지역 전설에 따르면 오우치 씨는 한국에서 기원했으며, 특히 백제의 왕자의 후손이라고 한다.[1] 곤도 키요시 (近藤清石)의 저서 ''오우치 씨 실록''(大内氏実録)은 이 전설을 채택한 책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 이견을 보이며, 전통들조차 서로 모순된다고 지적한다.[2] 오늘날 오우치 씨의 후손들은 이견이 없다고 생각하며, 백제와 강하게 동일시한다.[3]
7. 평가
오우치 씨는 현대 야마구치시 지역 전설에 따르면 한국, 특히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곤도 키요시의 저서 ''오우치 씨 실록''은 이 전설을 채택한 책 중 하나이다.[1]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 이견을 보이며,[2] 심지어 전통들도 서로 모순된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오우치 씨의 후손들은 이견이 없다고 생각하며, 백제와 강하게 동일시한다.[3]
역사적으로 오우치 씨는 국제 무역을 기반으로 경제력을 구축하고 정치력을 행사하기 위해 일본 정체성과 더불어 한국 유산을 강조했다.[4] 혼슈 서쪽 끝 스오 국을 근거지로 한 오우치 씨는 외국 무역과 외교, 특히 명나라와 관련된 주요 가문 중 하나였다. 오닌의 난 (1467–1477) 이후,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호소카와 가문과 오우치 씨 사이에 강력한 경쟁 관계가 형성되었다. 두 가문은 1523년 닝보 사건에서 충돌했고, 그 결과 중국은 일본 상인들에게 닝보를 폐쇄했다. 이후 오우치 씨의 배는 1540년과 1549년에만 중국에서 무역이 허용되었다. 오우치 씨는 1551년에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잠시 머물게 하기도 했다.
오우치 씨는 부와 무역 관계의 결과로 예술과 문화 세계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그들은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온 수많은 문화적, 예술적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지닌 물품들을 소유했다. 특히 1486년 오우치 마사히로가 유명한 화가 세슈를 야마구치로 초대한 것은 유명하다.
1551년,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는 고나라 천황과 그의 궁정을 전쟁으로 황폐해진 교토에서 야마구치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오우치 씨의 주요 군사 가신들은 황실 궁정이 자신들을 몰아낼 것을 우려하여 이 계획에 반대했다. 이로 인해 타이네이 사 사건이 발생하여 요시타카는 자결을 강요받았다.[5] 반란의 지도자 스에 하루카타는 오우치 요시나가를 꼭두각시 가문 수장으로 임명했지만, 요시나가는 오랜 오우치 씨의 라이벌 오토모 소린의 동생이었다. 이로써 오우치 씨는 멸망했다.
1555년, 요시타카의 또 다른 전 가신인 모리 모토나리는 미야지마 전투에서 스에 하루카타를 격파했다. 2년 후, 요시나가는 자결하여 오우치 씨는 완전히 멸망했다.[6]
참조
[1]
서적
大内氏実録 (''Ōuchi-shi Jitsruroku'' )
https://dl.ndl.go.jp[...]
[2]
서적
下松市史 通史編
https://trc-adeac.tr[...]
Kudamatsu
[3]
웹사이트
KBS 역사추적 – 1,400년 만의 귀향, 오우치가의 비밀 / KBS 2009.6.8 방송
https://www.youtube.[...]
2023-01-11
[4]
서적
Kings in All but Name: The Lost History of Ouchi Rule in Japan, 1350-1569
Oxford University Press
[5]
간행물
The Failed Attempt to Move the Emperor to Yamaguchi and the Fall of the Ōuchi
https://zenodo.org/r[...]
2016-03-06
[6]
웹사이트
大内義長(読み)おおうち よしなが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大内義長」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1
[7]
웹사이트
《日本の苗字7000傑 姓氏類別大観 金官王家(金 氏)》
https://web.archive.[...]
[8]
문서
義輝の政治活動とその原因
吉川弘文館
[9]
문서
近藤清石
[10]
문서
右田盛長]]の養子
[11]
문서
鷲頭禅恵尼の養子
[12]
문서
歴名土代
[13]
문서
歴名土代
[14]
문서
歴名土代
[15]
웹사이트
千葉一族【お】1 - 千葉氏の一族
http://chibasi.net/i[...]
[16]
웹사이트
大内熊耳
kotobank
2020-07-11
[17]
문서
고니키시(王, コニキシ): 백제어로 왕을 뜻하는 건길지의 일본어적 변형
[18]
웹사이트
도요타 씨(豊田家) 족보(系譜) 중
http://www.nichiren.[...]
2013-07-10
[19]
문서
한국에는 관련 기록이 전혀 없는 상태이고 오우치씨의 종손 쪽은 백제 성왕을, 오우치의 일족인 [[도요타씨]]는 백제 위덕왕을 임성태자의 아버지로 주장하였다.
[20]
문서
단다이(探題): 막부가 임명하는 지방관 최고직의 하나. [[규슈]], [[시코쿠]], [[오우 지방]] 등 수도에서 가장 먼 지역에서 군사와 조세권을 가졌다. 막부가 권위를 잃자 유명 무실화된다.
[21]
문서
다이네이지(大寧寺)의 변을 오우치 씨의 실질적인 '멸문'으로 보는 견해도 유력하다.
[22]
서적
중세일본사무라이관위의 연구(『中世武家官位の研究』)
요시카와 코분칸(吉川弘文館)
[23]
문서
오이타현](大分縣) 사료 제 26번 424호「오토모케 문서(大友家文書)」에서 확인되고 있다.
[24]
문서
일명 오우치 테루히로(大內輝弘)의 난(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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