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중공 폭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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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쓰비시중공 폭파사건은 1974년 8월 30일,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이라는 극좌 단체가 일본 도쿄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건물에 설치한 시한폭탄이 터진 사건이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미쓰비시를 제국주의를 지원하는 기업으로 규정하여 테러 대상으로 삼았다. 폭발로 8명이 사망하고 376명이 부상당했으며, 일본 전후 최악의 폭탄 테러로 기록되었다. 사건 이후, 범행 그룹의 멤버들이 체포되었고, 재판을 통해 사형이 확정된 리더 2명 중 1명은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범죄 피해자 보상 제도 확립에 대한 요구를 높였고, 언론 보도와 문화 콘텐츠를 통해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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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중공 폭파사건 | |
---|---|
개요 | |
명칭 | 1974년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 |
일본어 명칭 | ja |
다른 이름 | 미쓰비시 중공업 빌딩 폭파 사건 |
발생 위치 |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마루노우치 2초메 5번 1호 미쓰비시 중공업 도쿄 본사 빌딩 (현 마루노우치 2초메 빌딩) |
발생 날짜 | 1974년 8월 30일 |
발생 시간 | 오후 12시 45분경 |
시간대 | 일본 표준시 |
공격 유형 | 폭탄 테러 |
사용 무기 | 시한폭탄 |
목표 | 민간인 |
동기 | "미쓰비시를 보스로 하는 일제 침략 기업, 식민자에 대한 공격" (#범행 성명에서 발췌) |
피해 | |
사망자 | 8명 |
부상자 | 376명 이상 |
범인 | |
단체 |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 "늑대" |
관련 인물 | 다이도지 마사시 다이도지 아야코 사사키 노리오 가타오카 도시야키 |
사법 처리 | |
관할 | 경시청, 도쿄 지방 검찰청 |
2. 배경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1972년에 창설된 일본의 신좌파 극좌 조직으로, 공산주의적인 반일주의 이념과 아나키즘 성향을 보였다. 이들은 일본 제국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태평양 전쟁을 침략 전쟁으로 규탄했다.
2. 1.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사상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일본 제국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태평양 전쟁을 침략 전쟁으로 규탄하는 등 강한 반일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과 전쟁 중에 일본의 중공업을 지원하고, 전후에도 군수산업을 주도하며 세계로 진출한 미쓰비시 중공업을 "제국주의를 지원하는 기업"으로 지목했다.[34]이 단체는 공산주의적인 반일주의 이념을 표방했으며, 아나키즘 성향도 보였다. 1974년 8월 14일에는 쇼와 천황을 암살하려는 무지개 작전을 계획했으나 실패했다.[35] 그러나 다음 날인 8월 15일, 재일 한국인이자 조총련계 출신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육영수 저격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은 문세광의 사건에 호응하고자 새로운 작전을 계획하게 되었다.
당초 작전 결행일은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9월 1일로 정해졌으나, 그 해 9월 1일은 일요일이었고, 그 전날인 8월 31일도 토요일로 대부분의 기업이 휴무였기 때문에 8월 30일 금요일로 변경되었다.[36][34] 또한, 이들이 일으킨 풍설의 군상·북방문화연구시설 폭파사건에서는 샤쿠샤인 전쟁을 일으킨 아이누의 수장 샤쿠샤인이 살해당한 10월 23일을 결행일로 선택했다.
2. 2. 미쓰비시 중공업을 표적으로 삼은 이유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일본 제국을 '완전한 악'으로 규정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간주하며 강한 증오심을 가졌다.[34]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전쟁 이전과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중공업을 지원하고, 전쟁 이후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중공업체로서 군수산업을 주도하며 아시아, 유럽, 북아메리카 등 전 세계로 진출하고 있던 미쓰비시 중공업을 '제국주의를 지원하는 기업'으로 지목했다.[34]특히, 미쓰비시 중공업은 1970년대 초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북베트남을 상대로 사용한 군사 무기를 제조하는 등 제국주의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아시아를 침략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1] 이러한 이유로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미쓰비시 중공업을 폭탄 테러의 목표로 삼았다.[34]
2. 3. 무지개 작전과 문세광 사건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1974년 8월 14일 쇼와 천황을 암살하려던 무지개 작전을 계획했으나 실행 직전 조직원이 발각되어 실패했다.[35][4] 바로 다음 날인 8월 15일, 조총련계 출신의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육영수 저격 사건이 발생했다.[35]문세광이 박정희를 살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이미 불안정했던 한일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4]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문세광의 사건에 호응하고자 새로운 작전을 계획하게 되었다.[35]
2. 4. 테러 결행일 결정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당초 작전 결행일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9월 1일로 정했다.[36][34] 그러나 그해 9월 1일은 일요일이었고, 그 전날인 8월 31일도 토요일로 마루노우치에 있는 대부분의 기업이 주 5일제 휴무로 쉬는 날이었기 때문에, 8월 30일 금요일로 결행일을 앞당겼다.[36][34]3. 전개
1974년 8월 30일,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늑대' 실행범들은 미쓰비시 중공업 도쿄 본사 건물 등을 폭파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의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 폭탄 설치 및 경고 전화: 실행범들은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건물 등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폭파 직전 경고 전화를 걸었으나, 장난 전화로 오인되어 대피가 지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폭탄 설치 및 경고 전화' 참조)
- 폭발 및 피해 상황: 시한폭탄이 폭발하여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건물과 주변 건물, 차량, 가로수 등이 파괴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폭발 및 피해 상황' 참조)
- 폭발 원인 분석: 폭발물의 질량, 폭풍의 확산 방식, 건물 내부로의 충격파 유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큰 피해를 야기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폭발 원인 분석' 참조)
3. 1. 폭탄 설치 및 경고 전화
1974년 8월 30일 오후 12시 25분경, '늑대' 실행범 4명이 미쓰비시 중공업 도쿄 본사 건물(현 마루노우치 니초메 빌딩) 1층 출입구 화분 옆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37] 이들은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건물과 건너편 미쓰비시 전기 본사 건물(현 마루노우치 나카도리 빌딩) 양쪽 모두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38]오후 12시 42분경, 미쓰비시 중공업 건물 전화 교환원에게 "미쓰비시 중공 앞 도로에 시한폭탄 2개를 설치했으니 인근에 있다면 즉시 피난하도록 하라. 이건 농담이 아니다"라는 경고 전화가 걸려왔다.[39] 그러나 전화 교환원은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장난 전화로 여겼다.[46]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무과장에게 전화로 보고한 후, 8층 서무과장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폭탄이 폭발했다고 한다.[46]
폭발 8분 전에 폭파 예고 전화가 있었으나, 처음에는 장난 전화로 취급되어 끊겼고,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도 바로 끊겼다. 전화 교환원이 폭파 예고를 전부 들은 것은 폭발 4분 전이었지만, 대피 조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45]
3. 2. 폭발 및 피해 상황
1974년 8월 30일 오후 12시 45분경, 미쓰비시 중공업 도쿄 본사 건물 1층 출입구에 설치된 시한폭탄이 폭발했다.[40][41] 이 폭발로 건물 1층이 파괴되고 로비는 완전히 부서졌으며, 건물 안에 있던 직원들과 길을 지나던 행인들 다수가 죽거나 다쳤다.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건물은 9층까지 유리창이 모두 깨졌고, 길 건너편의 미쓰비시 전기 건물과 마루노우치 빌딩도 유리창이 깨지는 피해를 입었다. 근처 도로에 정차되어 있던 차량과 가로수도 파괴되었다.[43]폭발로 인해 5명이 즉사하고 병원으로 옮겨진 부상자 중 3명이 추가로 사망하여 총 8명이 사망했다.[34] 부상자는 376명에 달해, 옴진리교가 일으킨 마쓰모토 사린 사건(1994년)과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1995년) 이전까지 일본 전후 사상 최악의 폭탄 테러로 기록되었다. 폭발음은 신주쿠에서도 들릴 정도였다.[42]
폭발의 위력은 컸으며, 육상자위대는 폭탄의 성능이 "적군 침공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20파운드 도로파괴용 폭탄보다 더 강력"하다고 발표했다.[44] 폭심지에는 직경 30cm, 깊이 10cm의 구멍이 생겼다.[43]
큰 피해가 발생한 이유는 폭발물의 질량이 컸던 점 외에도, 폭풍이 빌딩들에 막혀 건물 표면을 타고 올라가며 충격파를 발생시켜 유리창을 깨뜨렸고, 깨진 유리 조각들이 도로에 쏟아져 흉기처럼 작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건물 안으로 들어간 충격파가 계단을 타고 올라가 창문 밖으로 분출하면서 건물 내부도 파괴되었다.
폭발 8분 전,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폭파 예고 전화를 걸었지만, 처음에는 장난전화로 여겨져 끊겼고, 다시 걸었을 때도 바로 끊겼다. 폭발 4분 전에 전화교환원이 폭파 예고를 전부 들었으나, 대피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45]
3. 3. 폭발 원인 분석
1974년 8월 30일 미쓰비시 중공업 도쿄 본사 건물 폭발로 큰 피해가 발생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폭발물의 질량: 폭발물의 질량이 컸던 점이 피해 규모를 키운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 폭풍의 특이한 확산: 통상 방사형으로 확산되는 폭풍이 빌딩들에 가로막혀 건물 표면을 타고 올라가는 충격파를 발생시켰다. 이 충격파는 건물 유리창을 깨뜨리고, 깨진 유리 조각들이 도로에 쏟아져 흉기처럼 작용했다.
- 건물 내부로의 충격파 유입: 건물 내부로 들어간 충격파는 계단 등을 타고 올라가 창문 밖으로 분출하면서 건물 내부도 파괴했다.
- 폭탄의 위력: 육상자위대는 폭탄의 성능을 "적군 침공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20파운드 도로파괴용 폭탄보다 더 강력"하다고 발표했다.[44] 폭심지에는 직경 30cm, 깊이 10cm의 구멍이 생겼다.[43]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열차 폭파용 폭탄을 전용했고, 테러 경고 전화를 장난으로 무시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줬다고 한다. 이들은 폭발 8분 전 폭파 예고 전화를 걸었으나 처음에는 장난전화로 끊겼고, 다시 건 이후에도 바로 끊겼다. 전화교환수가 폭파 예고를 전부 들은 것은 폭발 4분 전이었지만 대피 조치는 없었다.[45]
4. 동기 및 선언
1974년 9월 23일,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미쓰비시 중공업 폭탄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히며 범행 성명서를 발표했다.[1]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미쓰비시를 일본 제국주의의 핵심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공격을 '식민자'에 대한 정당한 투쟁으로 묘사했다. 또한, '신 대동아 공영권'을 언급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을 경계하고, 일본 기업들에게 해외 활동 중단을 요구했다.
1971年8月30日のミツビシ爆破=ダイアモンド作戦を決行したのは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狼”だ。ミツビシは旧植民地主義時代から現在に至るまで一貫して日帝の中枢として機能し、商売の仮面をかむりその陰で死体を食らってきた日帝の大黒柱だ。今次ダイアモンド作戦は、ミツビシを頂点とする日帝侵略企業・植民者どもへの攻撃である。“狼”の爆弾によって爆死し、あるいは負傷した人間どもは、「同じ労働者」でも「無関係の一般市民」でもない。彼らは日帝中枢に寄生し植民地主義に参画して植民地人民の血で肥え太った植民者だ。“狼”は、日帝中枢地区を不断の戦場たらしめる。戦死をおそれぬ日帝の寄生虫でなければすみやかに同地区から撤退せよ。“狼”は、日帝本国領内および世界の反日帝闘争に起ちあがった人民に依拠して日帝の政治・経済の中枢部を徐々に浸蝕し破壊する。また「新大東亜共栄圏」へむけて再び策動する帝国主義者=植민지주의자を処刑する。最後に、ミツビシを頂点とする日帝侵略企業・植민자どもに警告する。海外での活動を全面停止せよ。海外資産を整理し、「開発途上国」での資産はすべて放棄せよ。この警告にしたがうことだけがこれ以上の戦死者をださない唯一の道だ。|9월 23일,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늑대" 정보부일본어
위 성명서는 1974년 8월 30일에 일어난 '미쓰비시 폭파 = 다이아몬드 작전'에 대한 내용이다. (1971년은 오기)
4. 1. 범행 성명서 분석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1974년 9월 23일,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히며 범행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 기업들을 '식민자'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1]성명서에서 이들은 미쓰비시가 과거 식민지 시대부터 현재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중추적 역할을 해왔으며, '장사의 가면' 뒤에서 식민지 인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이익을 추구해 왔다고 주장했다. 또한, 폭탄 테러로 인해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은 '같은 노동자'나 '무고한 시민'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기생하며 식민지 인민의 피를 빨아먹는 '식민자'라고 주장했다.[1]
이들은 '신대동아 공영권'을 언급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을 경계하고, 일본 본토와 전 세계에서 반일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 경제적 중추를 파괴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에게 해외 활동 중단, 해외 자산 정리, 개발도상국 자산 포기 등을 요구하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추가적인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1]
5. 피해자
폭탄 테러로 인한 사망자는 총 8명이다.
신원 | 당시 직책 및 나이 | 사망 당시 상황 |
---|---|---|
불명 | 미쓰비시신탁은행 과장, 37세 | 즉사 |
불명 | 선박 엔지니어, 28세 | 즉사 |
불명 | 광업회사 사원, 49세 | 즉사 |
불명 | 미쓰비시중공업 사원, 50세 | 즉사 |
불명 | 미쓰비시마커 대리, 38세 | 즉사 |
불명 | 메이커 소장 대리, 38세 | 시즈오카현에서 상의를 위해 방문, 지하 식당에서 나온 직후에 휘말려 즉사 |
불명 | 회계사무소 사무원, 23세 | 뇌 손상과 전신 타박상으로 병원 수용 후 사망 |
불명 | 디자인 회사 임원, 41세 | 과다출혈(탈혈) 쇼크로 병원 수용 후 사망 |
불명 | 미쓰비시중공업 주임, 51세 | 병원 수용 후 다음 날 사망 |
6. 체포와 재판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조직원들은 1975년 5월 19일 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사건 혐의로 체포되었고, 같은 해 6월 28일 도쿄지방검찰청에 의해 기소되었다.[34] 재판 과정에서 사사키 노리오와 다이도지 아야코는 일본적군의 쿠알라룸푸르 사건과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으로 석방되어 도주하였지만, 리더격인 다이도지 마사시와 가타오카 도시아키의 재판은 계속 진행되었다.[47]
피고인들은 폭탄의 폭발력을 예상하지 못했고 예고 전화를 했기 때문에 살의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검찰 측은 수사 과정에서 피고인들이 사상자가 발생해도 어쩔 수 없다고 진술했으며, 대낮의 인적이 많은 곳에 폭탄을 설치했고 폭탄 종류와 장소를 명시하지 않은 예고 전화는 효과가 없었다고 반박했다.[48] 1987년 3월 24일, 일본 대법원은 다이도지 마사시와 가타오카 도시아키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이는 전후 일본 신좌파 최초의 사형 확정 판결이자, 1949년 미타카 사건 이후 공안사건 최초의 사형 판결이었다.
다이도지 마사시는 2017년 5월 24일 도쿄구치소에서 병사했고,[49] 가타오카 도시아키는 현재 도쿄구치소에 수감 중이다.[50] 한편, 사사키 노리오와 다이도지 아야코는 재판이 중지된 채 현재까지 국제 지명 수배 중이다.
6. 1. 체포
1975년 5월 19일,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조직원들이 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사건 혐의로 일제히 체포되었다.[34]6. 2. 재판 과정
1975년 6월 28일 도쿄지방검찰청이 기소하였다.[34]재판에서 사사키 노리오와 다이도지 아야코는 일본적군의 쿠알라룸푸르 사건과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으로 모두 석방되며 도주하였으나,[47] 리더격의 남성 2명인 다이도지 마사시와 가타오카 도시아키의 재판은 속행되었다.
재판에서 피고인들은 폭탄의 폭발력을 예상하지 못했으며 예고전화를 걸었고 살의가 없었다며 살인죄 무죄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검찰 측은 수사 과정에서 피고인이 사상자가 발생해도 어쩔 수 없다고 진술하였으며 대낮의 인적이 많은 곳에 폭탄을 설치하였으며 예고전화에서 폭탄의 종류와 장소를 명시하지 않아 짧은 시간 내에 건물 안이나 거리의 사람들을 대피시키거나 폭탄을 해체할 수는 없다며 미필적 고의가 있는 것이 분명해 살인죄가 성립한다고 주장하였다.[48]
재판부는 살의가 적용되며 폭파 수 분 전의 전화는 예고라고 볼 수 없고, 폭파 의사에 변함이 없었다는 점 등을 말하며 1987년 3월 24일 일본 대법원에서 다이도지 마사시와 가타오카 도시아키 2명의 사형 판결을 확정내렸다. 전후 일본의 신좌파에 있어서 최초의 사형 확정 판결 사건이었으며 1949년 미타카 사건 이후 공안사건으로도 최초의 사형 판결이었다.
다이도지는 2017년 5월 24일 오전 도쿄구치소에서 병사하였으며,[49] 가타오카는 확정사형수로 도쿄구치소에 구금되어 있다.[50]
사사키 노리오 및 다이도지 아야코의 재판은 공판중지되어 현재도 국제 지명 수배 중이다.
6. 3. 사사키 노리오와 다이도지 아야코
일본적군의 쿠알라룸푸르 사건과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으로 사사키 노리오와 다이도지 아야코는 석방되어 도주했고, 재판은 공판 중지되었다.[47] 이들은 2024년 5월 현재도 국제 지명 수배 중이다.6. 4. 다이도지 마사시의 사망
2017년 5월 24일 오전, 다이도지 마사시는 도쿄구치소에서 병사하였다.[49]6. 5. 키리시마 사토시의 사망
2024년 1월, 키리시마 사토시는 자신이 키리시마 사토시임을 밝히고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의 병원에서 사망했다.[25][26][27] 그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지명 수배 중이었다.[28]7. 기타
이 사건의 수사 관계자들은 일제 체포일에 맞춰 '5・19회'라는 모임을 결성하여 현재도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33] 일련의 기업 폭파 사건 이후, 많은 오피스 빌딩의 입구에 경비원이 상주하게 되었다.[32]
아이누 혁명론 등 일련의 연속 폭파라는 '무장 투쟁'을 유발한 오타 료는 1980년대 이후 생태학자를 거쳐 내셔널리스트로 전향했다. 그는 유대인 음모론, 국수주의, 전통주의, 가축 제도의 전폐를 주장했으며, 야스쿠니 신사에도 참배했다.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 명의의 테러 실행범으로 알려진 오모리 가쓰히사 사형수도 극좌에서 반공주의로 전향하여,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일본의 핵무장을 지지하고 러시아와 중국을 '전체주의 국가'라고 주장했다. 또한 보수 논객 니시무라 고스케가 편집한 무크지에 기고[31]한 적이 있다.
7. 1. 언론 보도 및 사회적 반응
폭탄 테러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켜 언론의 분노를 샀다. 한 편집자는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대한 가장 끔찍한 도전이다. 사회 자체가 표적이자 희생자였다"고 말했다. 재팬 타임스(The Japan Times)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보여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우익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와 좌익 정당 지도자들은 이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3]이 사건은 당시 마루노우치 폭탄 사건이라고도 불렸다.[25] 당시 소란과 테러가 반복되어 많은 사상자를 낸 북아일랜드 분쟁을 겪고 있던 영국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26]
사건 당일은 우정성(현재의 일본우편)의 특수우표 자연 보호 시리즈 「아마미노쿠로우사기」우표 발행 첫날이었다. 그래서 도쿄중앙우체국에 많은 우표 수집가들이 첫날 커버 제작을 위해 몰려들었지만, 폭발의 순간 진동이 건물을 덮쳐 4층 식당의 창문이 깨졌다고 한다. 또한, 당시 우표 붐이었기 때문에 미쓰비시 사원 중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우표를 사러 온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27]
산케이신문 사회부는 일련의 연속 기업 폭파 사건의 범행 그룹 체포를 특종 보도한 공로로 일본 신문 협회상과 제23회 기쿠치 칸상을 수상했다.[28]
슈퍼 점프 1989년 10월호에 게재된 히라마쓰 신지의 극화 「머더 라이선스 가이」 14화에서, 해당 사건을 모델로 한 에피소드가 사용된 적이 있다. 극악무도한 사형수라는 묘사나 사형 폐지 그룹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를 그렸고, 사형 존폐 문제와 관련하여 사형 존속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주장을 했기 때문에, 후쿠오카시에 있는 사형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 단체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이 때문에, 12월호에서 발행원인 슈에이샤가 사과문을 게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30]
7. 2. 범죄 피해자 보상 제도
이 사건을 계기로 범죄 피해자 보상 제도 확립 요구가 높아졌으나, 제공된 자료에는 해당 제도와 관련된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아 이 섹션에 관련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7. 3. 모방 범죄 및 유사 사건
1970년대 극좌 과격파 중에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과 유사하게 폭발물을 사용한 테러를 실행한 경우가 많았다.[29] 1975년 7월 23일 오키나와현에서 발생한 에스메랄다호 화염병 투척 사건의 실행범들은 당시 군사 정권 하에 있던 칠레 해군의 연습함 '에스메랄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과 마찬가지로 미쓰비시 그룹을 '죽음의 상인'이라 칭하며 오키나와 국제 해양 박람회의 미쓰비시 해양 미래관 폭파도 목표로 했다.[29]1975년 9월 4일 심야에는 요코스카시의 아파트에서 소화기 폭탄 제조 중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중핵파 멤버 남녀 3명을 포함한 주민 2명 등 총 5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는 요코스카 녹장 오폭 사건이 발생했다.[29] 한편, 사상성이 없는 폭탄 마니아에 의한 모방 범죄도 많이 나타났으며, 체포된 사람 중에는 장난으로 코인 로커를 폭파한 중학생도 있었다.
범행 그룹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예정되어 있던 1982년 10월 29일, 당시 긴자에 있던 도쿄 남부 소포 집중국(1990년 폐지, 현재의 신도쿄우체국의 전신 중 하나)의 집배소에서 소포에 숨겨져 있던 시한식 소화기 폭탄이 폭발했다. 이로 인해 우편차 운전사는 왼팔 팔꿈치부터 앞부분이 절단되었고, 운전 보조원도 내장 파열 및 전신 타박상의 중상을 입었다.[29] 경찰은 유류물에서 '반일 무장'이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 조각을 발견하고, 피고인들에게 동조하는 극좌 과격파의 범행으로 수사했다. 그러나 소포가 간다 미나미진보초 우체국에서 발송되었고, 폭탄이 마이니치 신문 지바 지역 면의 신문지로 포장되어 있었던 것이 밝혀졌지만, 범인을 특정하지 못하고 미궁에 빠졌다.
7. 4. 문화적 영향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문화적으로도 여러 영향을 미쳤다.- 문학:
- 히라마쓰 신지의 극화 '머더 라이선스 가이' 14화에서는 이 사건을 모델로 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기업 폭파 사건을 일으킨 테러리스트들의 사형 집행과 그들을 탈환하려는 잔당들의 인질극, 그리고 주인공 닌자의 활약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극악무도한 사형수 묘사와 사형 존폐 문제와 관련하여 사형 존속을 옹호하는 듯한 묘사로 인해 후쿠오카시의 시민 단체로부터 항의를 받았고, 슈에이샤는 사과문을 게재해야 했다.[30] 이 에피소드는 단행본에 수록되지 않았으나, 이후 단편집 '지상 최강의 남자'에 수록되었다.
- 슈에이샤의 학습 만화 '일본의 역사' 20권 (1998년판)에서는 이 사건으로 부상당한 여성 '노리코'와 그녀를 구한 주인공 '스즈키 켄이치'의 만남과 결혼을 다루고 있다.
- 산케이신문 사회부는 일련의 연속 기업 폭파 사건 범인 체포를 특종 보도하여 일본 신문 협회상과 기쿠치 칸상을 수상했다.[28] 당시 산케이신문사 기자 후쿠이 아쓰시의 저서 『늑대・전갈・대지의 어금니 연속 기업 폭파 35년째의 진실』(분게이슌주 간행)에 자세한 내용이 담겨있다.
- 기타:
- 사건 당일 도쿄중앙우체국에 아마미노쿠로우사기 우표 발행 첫날을 맞아 많은 우표 수집가들이 몰려들어 폭발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일화가 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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