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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식 (14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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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광식은 1493년에 태어나 1563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문신이다. 1516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병조좌랑 등을 거쳐 세자익위사 사어를 지냈다. 이후 김해부사, 갑산부사, 종성부사, 여주목사, 성주목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며 변방을 방비하고 왜구를 토벌하는 등 국방에 기여했다. 명종 때 동지중추부사, 병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1555년 을묘왜변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왜구를 토벌했다. 청렴하고 근실한 성품으로 존경받았으며, 말년에는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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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식 (149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출생일1493년 11월 7일
출생지조선 강원도 강릉 (명주군)
사망일1563년 12월 15일
사망지조선 한성부
본관우계
백흠(伯欽)
직업 및 관직
직업무신, 군인, 정치인
최종 계급병조참판, 전라도병마절도사
주요 활동여진족 정벌 / 을묘왜변
기타 이력1516년 과거 급제, 사후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가족 관계
이지방
청송 심씨
자녀아들: 이계변, 이감, 이전, 이용, 딸 둘
손자이희헌, 이성헌
장인이세응
재종조부이수형
사돈임권, 임유겸
대고모부정현조
외손녀사위이중경
군사 경력
복무조선 육군
복무 기간1516년 ~ 1563년 11월
부대조선 육군
지휘평안도, 전라도병영

2. 생애

1493년(성종 23년) 11월 7일 강원도 강릉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지방청송 심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양대군의 왕권 찬탈에 저항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70년간 단종을 추모하며 은거한 이수형은 그의 재종조부였다.

고모 중 한 명은 정현조(鄭顯祖)의 재취 부인이었다. 어머니 청송 심씨는 심안신(沈安信)의 딸로, 외증조부 심선(沈璿)은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영돈령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외6대조 심징은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친정 숙부였다. 누이 중 한 명은 윤확(尹確)에게 출가했는데, 윤확은 윤번의 차남 윤사흔 (尹士昕)의 4대손이었다.

1510년 초, 정국공신평안도 관찰사 이세응의 둘째 딸 함안 이씨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무예 연마 외에도 이름이 전하지 않는 문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조정 출사 후 중앙 관직에 있을 때 경연참찬관, 경연특진관을 겸직하였다.

1553년 상진(尙震) 등이 조직한 계축갑계에 참여하였다.[25] 청렴하고 근실한 노장(老將)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가훈이 엄하였다. 몸가짐을 맑고 소박하게 처신하였으며, 40을 바라보는 셋째 아들 이전이 승지가 되었을 때에도 잘못을 하면 종아리를 치기도 했다. 아들 이감이 이량과 결탁하는 것을 항상 책망하였으나 화를 막지 못했다. 그는 화가 반드시 자신에게도 미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량을 미워하여 아들 이감에게 이량을 가까이 하지 말도록 했으나 이감은 이량의 심복이 되었다. 송순(宋純), 상진(尙震) 등과 함께 계축갑계(癸丑甲契)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만년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1563년(명종 18년) 11월 7일 경기도 수군절도사로 재직 중이던 셋째 아들 이전이 수유(受由)를 청하는 장계를 올렸다가 탄핵을 당했으나 명종이 무마시켰다.[26] 명종은 특별히 아들 이전의 휴가를 허용해주었다. 1563년 12월 15일 경기도 광주 언주면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追贈)되었다.

2. 1. 초기 활동

1493년(성종 23년) 11월 7일 강원도 강릉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지방청송 심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이징, 증조부는 이경연, 고조부는 이인숙이다.[1] 재종조부 이수형세조의 왕권 찬탈에 저항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 단종을 추모하며 은거하였다.

어머니 청송 심씨는 봉사 심안신의 딸로, 외증조부 심선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영돈령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외6대조 심징은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친정 숙부였다.

1510년 초, 정국공신평안도 관찰사 이세응의 둘째 딸 함안 이씨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무예 연마 외에도 이름이 전하지 않는 문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조정 출사 후 중앙관직에 있을 때 경연참찬관, 경연특진관을 겸직하였다.

2. 2. 관료 생활

이광식은 여진족의 기습과 약탈에 맞서 변경을 방비하는 한편,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쫓아냈다.

1536년 중종이 무신들에게 진법 시험을 할때 통과하였다.[12]

2. 2. 1. 관료 생활 초반

1516년(중종 11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권지를 거쳐 선전관이 되었다. 1522년(중종 17년) 3월 24일 선전관 재직 중 공노비를 사사로이 은닉한 이춘무(李春茂)의 가택을 수사하였다.[3]

1522년(중종 17년) 병조좌랑을 거쳐 1523년(중종 18년) 1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5품으로 갑작스러운 승진은 외람되다는 양사의 비판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4] 이후에도 대간과 헌부가 번갈아가며 그의 승진을 논핵했지만 중종이 듣지 않았다. 1528년(중종 23년) 김해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거쳐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승진했으나, 경력이 얕은데다 첨정이 된 지 30삭을 넘기지 못하고 승진했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부임했다.

1528년(중종 23년) 4월 9일 사간원으로부터 젊고 무재(武才)가 있는 인물이라 양계(兩界) 지역 임용을 추천받았다. 사간원에서는 그의 인물이 합당하기 때문에 사전에 이미 서경(署經)하였지만 신원에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5] 그해 4월 11일 김해부사에서 경질되고[6], 무재(武才)가 있다는 이유로 대간의 추천을 받아 갑산부사사(甲山府使)에 임명되었다. 11월 갑산부사 재직 중 영의정 정광필(鄭光弼)로부터 당상(堂上)이 될 만한 인물로 천거받았다.

1529년 6월 갑작스러운 승진을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당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7] 사헌부는 그가 갑자기 중요 벼슬길에 오른 것과, 자기 말에 따르지 않는 것을 분하게 여겨 동료들을 배척하고 공론을 배격한다는 이유로 논핵했다.[8] 이후 7월까지 사헌부에서 여러번 논계했지만 중종이 듣지 않았다. 1529년 만포첨사 심사손이 야인의 기습을 받고 살해되면서, 변방을 지키는 것이 급하다는 사간원의 건의에 의해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임명되었다.

2. 2. 2. 변방 근무

1530년(중종 25) 겨울 경원진(慶源鎭)에서 야인이 조선인 통사를 칼로 찔러 죽이자 진장(鎭將)이 보복으로 지기(之奇)란 야인을 타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경원진 야인들과 변장들 간의 갈등을 수습하였다. 1531년함경도관찰사 한형윤(韓亨允)의 명을 받고 야인들과 통사들을 추고하여 통사와 야인 간의 갈등을 적발하였다. 그에 의하면 '통사 김은산(金銀山)이 야인 우눌이(亏訥耳)의 처소에서 칼에 맞아 죽은 일과 부사 이완(李莞)이 우눌이를 타살한 일을 색리(色吏) 등이 이미 승복했으며, 근래 변장(邊將)들이 오랑캐를 대우하는 데 정도(正道)를 잃어 저들이 늘 경모(輕侮)하는 마음을 품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1년 동안에 통사 2인이 피살되었으며, 또 진장은 진장대로 함부로 오랑캐를 죽이고서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던 사실[9]'을 확인하였다.

1533년(중종 28) 1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사헌부로부터 가선대부로의 승진이 부당하다는 상소가 있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10] 동년 7월 사헌부가 연소하고 무재(武才)가 있으므로 내지의 수령에는 합당치 않으며 장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체직을 건의하여 체직되었다.[11]

1536년(중종 31) 4월 중종이 무신들에게 진법을 시험할 때, 조통(粗通)의 성적을 받았다.[12]

1538년(중종 33) 7월 성주목사로 있을 때, 사헌부로부터 수령으로 있을 때에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여 백성에게 폐를 끼쳤다며 탄핵당했다.[13] 그해 11월 24일에는 용렬하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논핵을 당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이후 사헌부가 거듭 계를 올려 탄핵하여 그해 11월 면직되었다.[14] 그는 지방관으로 재직 중 홍수를 대비하여 제방을 쌓게 했고, 자신도 직접 제방을 쌓는데 손수 참여했다.

1540년 성주목사를 거쳐, 1543년(중종 38) 가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15] 동시에 수군절도사와 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使)직을 겸직하였다. 이후 건주의 여진인이이며 중국인 왕창(王昌)의 아내 이어려(李於呂)가 남편을 따라 탈출하여 국경을 넘어오고, 그의 친정아비 이얼겅거[李於乙巨應巨] 등이 만포진에 와서 호소하자, 그를 잘 설득하여 되돌려보내기도 했다.[16] 또한 자신의 아버지 왕산적하(王山赤下)가 참살당한 것에 원한을 품은 여진인 왕살동가(王沙乙同可)가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려는 첩보를 입수하여 보고하였다.[17][18]

1544년(중종 39년) 9월 몽골인의 서계를 받아 조정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평안도 병마절도사인 이광식 편으로 전해온 몽고 서계(蒙古書契)를 능히 해석하는 자가 없어서 번역하더라도 믿을 길이 없다고 하였다.[19] 같은 해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재임 중, 국경지역의 야인들이 동료들이 변장들에게 죽임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쳐들어와 변장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자, 직접 야인소굴에 들어가 야인들을 만나 위무하고 돌아와 다시는 침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해 서계를 올려 도내(道內)의 녹슬고 파손되거나 비를 맞은 화포(火砲)와 병기(兵器)의 개수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45년 임기만료되어 체직되어야 하나 이아장합(李阿將哈)의 심사손 살해 사건을 상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계속 유임되었다.

2. 3. 정치 활동

1546년(명종 1년) 1월 정조방물(正朝方物)을 문정왕후에게 먼저 진상했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승정원의 변호로 무마되었다.[20] 이후 비변사 회합에 참석하였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같은 해 병조참판, 공조참판을 거쳐 공조참판으로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가 되어 그해 11월 11일 연경을 방문,[23] 이듬해 초에 귀국하였다.

1547년 동지중추부사, 상호군과 비변사당상을 거쳐 1548년(명종 3)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수군절도사, 영변대도호부사가 되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좌윤, 1549년 특진관을 역임했다.

1549년 특진관으로 있을 때, 변방의 만호나 첨사가 좋은 말을 어거지로 매수하여 변방에 좋은 말들이 없어지는 부당함을 지적하여 시정하게 하였다. 1550년초 송숙근 등과 흉년이 든 함경도에 남방의 곡식을 옮겨줄 것을 건의하였다. 1550년(명종 5) 장례원 판결사, 비변사당상, 1551년(명종 6) 병조참판[24], 행 호군을 지냈다. 1553년(명종 8) 한성부우윤, 동지중추부사, 병조참판, 1554년 동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1555년(명종 10)에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553년 범허정 상진(尙震) 등이 조직한 계축갑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25]

2. 4. 생애 후반

1555년 5월 왜적이 해안가를 침입하여 변장(邊將)들을 죽이고 10진을 함락시켜 군무가 위급했으나, 전라도로 파견되어 내분을 수습하고 내륙까지 침투한 왜적들을 토벌하여 병란이 확산되는 것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달량진에 내려온 그를 피하여 왜구는 말머리를 돌려 영암군, 진도 일대를 약탈하여, 조정에서는 다시 이준경, 이윤경 등을 보내 그를 지원하게 하였다. 1555년(명종 10) 9월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25] 9월 10일 사은숙배 후 부임하였다가 10월 11일 체직되었다.

청렴하고 근실한 노장(老將)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가훈이 엄하였고, 몸가짐을 맑고 소박하게 처신하였다. 엄격했던 그는 나이 40을 바라보는 셋째 아들 이전이 승지가 되었을 때에도 잘못을 하면 허물을 물어 종아리를 치기도 했다. 그는 아들 이감(李戡)이 훈구외척 이량과 결탁하는 것을 항상 책망하였으나 결국 화를 막지 못했다. 그는 화가 반드시 자신에게도 미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량의 사람됨됨이를 미워하여 아들 이감(李戡)에게 이량을 가까이 하지 말도록 했으나 이감은 끝내 이량의 심복이 되었다. 그밖에 송순(宋純), 상진(尙震) 등과 함께 계축갑계(癸丑甲契)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557년(명종 12)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563년(명종 18) 병조참판에 이르러 병으로 물러나고 동지(同知)로 전직되었다.

만년에 그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1563년(명종 18년) 11월 7일 경기도수군절도사로 재직 중이던 셋째 아들 이전이 수유(受由)를 청하는 장계를 올렸다가, 변방의 장수는 수유를 청할 수 없는데도 장계를 올렸다며 승정원의 탄핵을 당했으나 명종이 이를 무마시켰다.[26] 명종은 효로서 통치하는 나의 뜻을 보이겠노라며 특별히 아들 이전의 휴가를 허용해주었다. 1563년 12월 15일 경기도 광주 언주면 자택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증(贈)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3. 사후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원지리 철곡(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산 83-2번지 철곡)에 안장되었다. 묘비문은 가선대부 병조참판 이광식지묘 정부인 함안이씨 부좌(嘉善大夫兵曹參判 李光軾之墓 貞夫人咸安李氏祔左)이다. 묘소 아래에는 증손자 이복남, 이명남의 묘와 5대손 송곡 이서우의 묘가 순서대로 조성되었다. 묘소 남쪽에는 2011년 건립된 서울추모공원이 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조부이징(李徵)
조모양천 허씨(陽川許氏, ? ~ 1509년[27] 1월 29일), 사헌부장령, 의정부 사인 허적(許迪)의 딸
아버지이지방(李之芳, 1466년 10월 15일 - 1537년 12월 11일)
어머니청송 심씨(淸松沈氏, 1469년 11월 19일 ~ 1540년 10월 19일, 심안신의 딸)
부인함안 이씨(咸安李氏, 1492년 12월 1일 ~ 1536년 10월 7일, 이세응의 딸, 충렬공 이방실의 7대손)
장남이계변(李繼邊[28])
차남이감(李戡, 1516년 10월 27일 ~ 1583년)
자부풍천 임씨(豊川任氏, 1515년 4월 12일 - 1556년 2월 1일), 정헌공 임권(任權)의 딸, 소간공 임유겸(任由謙)의 손녀
장손이성헌(李成憲, 1534년 2월 22일 - 1601년 5월 8일)
장손부전주 이씨(全州李氏), 이한(李澣)의 딸
장손부전주 이씨(全州李氏, 1536년 - ?), 밀성군 이침(密城君 李琛) 4대손 광원수 증 광원군 이구수(廣原守贈廣原君 李耉壽)의 딸
손녀우계 이씨(羽溪李氏)
손녀사위윤유후(尹裕後, 1541년 1월 11일 - 1606년 8월 13일), 윤사로의 손자, 윤호의 증손
자부예천 윤씨(醴泉尹氏, 1538년 10월 28일 - 1624년 11월 11일) 또는 예산 윤씨(禮山尹氏), 윤연수(尹延壽)의 딸
손자이희헌(李希憲, 1569년 6월 15일 - 1651년 11월 28일)
손자이유헌(李有憲)
손자이의헌(李宜憲)
손녀우계 이씨(羽溪李氏)
손녀사위권봉수(안동 권씨)
삼남이전(李戩, 1517년 1월 21일 ~ ?)
자부고성 이씨(古城李氏), 이광택(李光澤)의 딸
자부하빈 이씨(부장 이윤우(李允耦(手+愚))의 딸)
손자이준헌(李遵憲), 충장공 이복남(李福男)의 아버지
손자이경헌(李敬憲, ? ~ 1592년 4월)
손자이봉헌(李奉憲)
손자이승헌(李承憲, ? ~ 1592년 4월)
손녀우계 이씨(羽溪李氏)
손녀사위한강(韓綱, 1535년 ~ 1629년 4월 26일), 가선동지 증 정헌 좌참찬 서원군(西原君)
사남이용(李庸+戈, 1533년 - 1591년 1월)
자부칠원 윤씨(漆原尹氏), 윤리(尹伊)의 딸, 윤탁연(尹卓然)의 누이
자부여산 송씨(驪山宋氏), 송맹경(宋孟璟)의 딸, 광주 이극돈의 진외증손녀
우계 이씨(羽溪李氏)
사위윤강(尹綱), 윤지임의 손자이며 윤원개의 아들
우계 이씨(羽溪李氏)
사위신경호(申景濩)
우계 이씨(羽溪李氏, 1523년 11월 8일 ~ 1568년 4월 1일)
사위이춘림(李春林, 1518년 3월 3일 ~ 1568년 11월 16일), 감찰, 진남군 이종생(鎭南君 李終生) 차남 진례군 이형(進禮君 李衡) 증손자 사서 이원경(李元卿)의 아들
양외손자이몽량(李夢良, 1544년 12월 28일 ~ 1626년 12월 18일, 첨지), 생부는 이춘림의 동생 이운림(李雲林)
외조부심안신(沈安信)
외조모고성 이씨(固城李氏), 주부 이희진(李希振)의 딸
외증조부심선(沈璿, ? ~ 1467년 9월 20일), 호는 망세정(忘世亭), 심온(沈溫)의 종손
장인이세응(李世應, 1473년 ~ 1528년 8월 26일)
장모경주 김씨(慶州金氏), 사헌부집의 김미(金楣)의 딸
처조부이계통(李季通, 1439년 ~ 1491년 10월 2일)


5. 평가와 비판

청렴하고 근실한 노장(老將)으로 이름이 높았다.[26] 집안은 엄숙하고 몸가짐은 맑고 소박했다.[29] 2품 이상의 직위를 역임하였음에도 사치하지 않았고, 지위를 이용해서 위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 엄정하였으며, 아들 이전이 승지로 있을 때 나이가 40이 넘었음에도 허물이 있으면 종아리를 치기도 하였다.[30] 청백하고 맑게 처신하여 가풍을 계승하였다.[30]

참조

[1] 실록 이인숙·노종덕·안계인이 하직하다 1433-09-03
[2] 문헌 이세응묘갈명
[3] 실록 이광식이 이춘무의 집 수색에 대해 아뢰다 1522-03-24
[4] 실록 대간이 익위 김국량·사어 이광식의 작상이 외람되니 개정하기를 청하다 1523-01-13
[5] 실록 간원이 공무역의 금지와 김해 부사 이광식·고원 군수 송겸의 체직을 건의하다 1528-04-09
[6] 실록 이광식을 경질하게 하다 1528-04-11
[7] 실록 헌부에서 어득강을 탄핵하다 1529-06-28
[8] 실록 헌부에서 어득강을 탄핵하다 1529-06-28
[9] 실록 함경도 관찰사 한형윤이 변장들이 오랑캐를 함부로 죽인 일 등을 치계하다 1531-10-15
[10] 실록 헌부가 이광식의 가자가 부당하다 아뢰니 불허하다 1533-01-19
[11] 실록 이원과 최숭조를 체직하다 1533-07-05
[12] 실록 무관들에게 진법에 대해 직접 물어보며 대답을 듣다 1536-04-29
[13] 실록 헌부가 이장길·이광식의 체임과 이경장·곤순의 일의 개정을 요구하나 윤허치 않다 1538-11-24
[14] 실록 이광식·곤순의 일을 아뢴 대로 윤허하다 1538-11-29
[15] 지리지 官師表
[16] 실록 중국인 왕창의 아내 이어려의 송환 처리를 요구하는 평안도 병사 이광식의 계본 1544-06-05
[17] 실록 평안도 병사 이광식이 올린 건주위 야인의 서계를 번역하여 올리도록 이르다 1544-09-08
[18] 실록 홍언필이 평안 병사 이광식의 서장과 호인의 서계를 무신과 상의하겠다고 아뢰다 1544-09-09
[19] 논문 성균관대학교논문집 11권 성균관대학교 1966
[20] 실록 정조 방물에 대한 격례를 어긴 평안 병사 이광식을 추고하지 않기로 하다 1546-01-01
[21] 실록 사헌부의 색승지 김익수·도승지 최연에 대한 파직과 추고를 윤허하지 않다 1546-01-03
[22] 문헌
[23] 실록 明世宗肅皇帝實錄 卷三百十七 嘉靖二十五年(1546년) 十一月 十一日 1번째기사 1546-11-11
[24] 실록 송세형·이광식·임열 등에게 새로운 관직을 제수하다 1551-02-02
[25] 문헌 癸丑甲契座目
[26] 실록 정원에서 참람하게 휴가를 청한 경기 수사 이전의 체차를 청하다 1563-11-07
[27] 실록 회령 부사 이지방이 상을 당해 심순경·최한홍을 의망한 일 등을 논하다 1509-02-21
[28] 족보
[29] 웹인용 이광식 https://web.archive.[...] 2014-02-22
[30] 웹사이트 강릉문화대전 http://gangneung.g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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