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정몽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정몽헌은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의 아들로, 현대그룹의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하며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연세대학교 졸업 후 현대중공업, 현대건설, 현대상선 등 계열사에서 중역을 거쳤으며, 1990년대 후반 아버지 정주영의 후계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2000년, 형 정몽구와의 경영권 분쟁에서 승리하여 그룹 회장이 되었으나, 이후 대북 사업 관련 의혹과 경영 악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2003년, 대북 송금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던 중 투신 자살했으며, 그의 사망 이후 금강산 관광 사업은 변화를 겪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자살한 기업인 - 성완종
    성완종은 경남기업 회장과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정치인이었으나, 공직선거법 위반,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기소되어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비리 의혹 수사 중 자살했고, 사망 후 공개된 '성완종 리스트'가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 자살한 기업인 - 조지 이스트먼
    조지 이스트먼은 롤필름 카메라와 코닥 회사를 설립하여 사진 기술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한 미국의 사업가이자 발명가이지만, 인종차별적 태도와 우생학 운동 후원이라는 비판적인 면도 존재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현대그룹 -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엘리베이터는 1984년 설립되어 대한민국 승강기 시장 점유율 1위인 승강기 제조 및 유지보수 기업으로,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등을 생산하며, 2009년 엘리베이터 테스트 타워 '현대아산타워'를 준공했고 2022년 본사를 충주로 이전했다.
  • 현대그룹 - 현정은 (1955년)
    현정은은 현대그룹 회장으로, 남편 정몽헌 회장 사후 취임하여 경영권 분쟁을 극복하고 회사를 정상화했으며, 남북 경제 협력에 적극 참여했으나 관련 사업의 투명성 논란도 있었다.
  • 현대가 - 정몽준
    정몽준은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7선 국회의원, 대한축구협회 회장, FIFA 부회장을 역임하고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에 기여했으며,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공헌 활동을 한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축구 행정가이다.
  • 현대가 - 정주영
    정주영은 현대그룹을 창업하여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후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등을 세워 현대그룹을 한국 최대 재벌 기업으로 키웠으며, 경부고속도로 건설, 서울 올림픽 유치, 대북 사업 추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정몽헌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정몽헌
출생일1948년 9월 14일
출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사망일2003년 8월 4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현대 사무실
국적대한민국
본관하동
학력페어레이디킨슨대학교 경영대학원 DBA
직업기업인
전직현대아산 회장, 현대그룹 부회장, 공동회장, 회장
배우자현정은
자녀1남 2녀
부모아버지 정주영, 어머니 변중석
친척7남 3녀 중 4남
기본 정보
로마자 표기Jeong Mong-heon
한글정몽헌
로마자 표기 (수정)Jeong Mong-heon
일본어 가타카나チョンモンホン
로마자 표기 (일본어)Jeong Mongheon
생애 및 경력
사망 원인투신 자살

2. 생애

정몽헌은 1973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5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여 현대건설, 현대상선 등 현대그룹 계열사의 중역을 역임했다. 1995년 현대그룹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아버지 정주영의 후계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0년 아버지 정주영의 후계 자리를 두고 형 정몽구와 이른바 '왕자의 난'을 벌였다. 이 다툼에서 승리하여 현대그룹 후계자가 되었으나, 정몽구현대자동차를, 정몽준은 현대중공업을 이끌고 독립하면서 현대그룹은 규모가 축소되었다.

정몽헌은 아버지 정주영이 시작한 금강산 관광 사업 등 대북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1999년 현대아산 이사를 거쳐 2000년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을 맡았고, 2001년 아버지 사망 이후 현대그룹 내 대북 사업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김정일과 5차례 회담을 가졌으며,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당시 한국 측 대표단으로 선정되는 등 남북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3년 중반까지 북한에 5억달러가 넘는 투자를 진행했고, 남북 정상 회담 직전에는 5억달러에 달하는 비밀 지원을 북한에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객 수 증가세가 둔화되면서 현대그룹은 큰 적자를 보았고, 이는 그룹에 큰 타격을 주었다.

2003년 2월, 대북 비밀 지원 사실이 드러나 특별 검사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수사를 허가하지 않아 중단되었지만, 정몽헌에 대한 검찰 조사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2003년 8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현대아산 사무실에서 투신 자살했다. 유언에는 "유골은 금강산에 뿌려 달라"고 적혀 있었으나, 부인 현정은의 반대로 하남시에 있는 정씨 일족 묘지에 매장되었고, 금강산에는 유품 상자가 안치되었다.[12]

정몽헌 사후 2004년부터 금강산 관광은 흑자로 전환되었고, 개성 공업 지구 개발도 진척되었다. 경의선, 동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 금강산 이산 가족 면회소 건설 등 여러 사업에 현대아산이 관여하며 정몽헌이 힘썼던 대북 사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현대그룹의 대북 사업은 5억달러의 대북 비밀 지원 등 거액의 자금이 북한으로 계속 전달되어 많은 비난을 받았다. 또한, 개성 관광이나 백두산 관광 등 북한 측의 사업 확장 저항으로 인해 대북 사업은 여전히 수익성이 낮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정몽헌 회장 사후 부인 현정은 회장이 경영을 승계했지만, 해운업 불황과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면서 경영 위기가 심화되었다. 결국 2016년 현대증권을 포함한 금융 계열 회사까지 매각되면서 현대그룹은 대북 사업 시작 20년 만에 중견 기업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2. 1. 생애 초기

정몽헌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의 다섯째 아들로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보성중학교[6][7],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페어레이디킨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 11월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여 현대그룹에서 활동했다.

2. 2. 현대그룹 경영

정몽헌은 1975년 11월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여 현대그룹에서 활동했다. 1977년 2월 현대건설 이사가 되고, 1981년 2월부터 1988년 2월까지 현대상선 대표이사 사장, 1984년부터 1991년까지 현대전자산업 대표이사 사장, 1992년 1월부터 2000년 5월까지 현대전자산업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했다.[6][7] 1996년 현대전자 대표이사 회장으로 현대그룹 부회장이 되었고, 같은 해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현대상선 대표이사 회장직을 겸했다.[6][7]

1983년 현대전자(하이닉스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경영권 갈등 이후 현대그룹이 쪼개지면서 투자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2001년 채권단에 매각, 하이닉스에 흡수된다.

1998년 현대그룹 부회장에서 공동회장으로 임명됐다가, 아버지 정주영이 명예 회장이 되면서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정주영 사후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을 주관하였다.

1975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여 1981년까지 회사의 해운 부문 사장이 되었다.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아버지 정주영은 그의 경영 스타일에 깊은 인상을 받아 1982년 그를 회사의 전자 부문 책임자로 임명했다.[1]

1997년, 정주영은 정몽헌을 그룹의 공동 회장으로 임명했다. 2000년, 정주영의 장남인 정몽구가 정몽헌을 몰아내려 하자, 정주영은 정몽헌을 그룹의 단독 회장으로 만들었다. 그해 말, 정주영은 자신과 아들들이 현대 계열사의 모든 경영직에서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정몽헌은 현대아산의 회장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정몽구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회장직을 유지했다.[2]

일제강점기 북한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의 현대 사업을 담당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는 이 직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3]

1995년 현대그룹 부회장에 취임하면서부터 아버지 정주영의 후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00년, 고령의 아버지 정주영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형 정몽구와 심하게 다퉜다. '왕자의 난'이라고 불린 이 다툼에서 정몽헌은 승리하여 현대그룹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정몽구현대자동차를 이끌고 현대그룹에서 독립했으며, 동생 정몽준 또한 현대중공업을 이끌고 독립해 버려, 남겨진 현대그룹은 떠나간 현대자동차나 현대중공업보다 규모가 작은 그룹이 되어버렸다.

2. 3. 왕자의 난

2000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장남인 정몽구 당시 현대그룹 공동 회장과 4남인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공동 회장이 그룹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정몽구 회장은 정몽헌 회장이 해외 출장을 간 사이 3월 14일 밤 기습적으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시켰다. 이익치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최측근이었다.[8]

이 일을 계기로 현대그룹의 경영권 계승을 둘러싸고 정주영 회장의 장남 정몽구와 갈등, 분쟁이 발생했다. 당시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조선시대 이방원과 이방석 사이의 대립에 빗대 현대그룹 왕자의 난이라 불렀다.

2000년 3월 24일 귀국한 정몽헌 회장은 자신과 아버지의 측근인 이익치 현대증권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을 모아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정몽구 회장의 현대그룹 공동회장직을 박탈했다. 정몽구 회장은 26일 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 회장직 복귀 명령을 받아내지만 몇 시간 뒤 정몽헌 회장과 그의 측근들이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 다시 그 명령을 무효화시켰다.[9]

2000년 3월 27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하면서 왕자의 난은 정몽헌의 승리로 마무리되고,[9] 정몽구 회장은 8월 현대자동차와 기타 자동차 관련 계열사들을 가지고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를 실시해 현대자동차그룹을 만들었다.

2. 4. 대북 사업과 사망

1998년 현대그룹 부회장에서 공동회장으로 임명됐다가, 아버지 정주영이 명예 회장이 되면서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정주영 사후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을 주관하였다. 현대가의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형제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었는데, 이후 2002년 9월에 5억달러 대북 불법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2003년에 검찰 조사를 받았고, 추진하던 대북사업의 차질과 현대그룹의 경영 악재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10][11] 2003년 2월 5일, 출국금지가 일시 해제되자 직접 금강산 육로관광 답사에 참여하였다.

정몽헌은 아버지 정주영이 시작한 금강산 관광 사업 등 대북 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1999년 2월에 창설된 현대 그룹 내 대북 전문 기업 현대아산에서 이사가 되었고, 2000년 6월에는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2001년 3월 아버지 정주영이 사망한 후, 현대 그룹 내에서 대북 사업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사업을 통해 북한 측과 두터운 관계를 맺은 정몽헌은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김정일과 총 5차례 회담을 가졌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당시 한국 측 대표단으로 선정되는 등, 한국과 북한의 관계에서 폭넓은 활약을 보였다. 한편, 금강산 관광 사업에서의 설비 투자와 관광료 등, 2003년 중반까지 북한에 5억달러를 넘는 투자를 진행했다. 남북 정상 회담 직전, 현대 그룹은 은행으로부터 불투명한 거액 융자를 받았고, 총 5억달러에 달하는 비밀 지원을 북한 측에 제공하였으며, 현대 그룹은 약 5년 동안 10억달러 이상의 자금을 북한에 투입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객은 예상만큼 증가하지 않았고, 그 결과 현대 그룹은 거액의 적자를 안게 되었으며, 규모가 작아진 그룹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2003년 2월, 5억달러의 대북 비밀 지원이 드러나 특별 검사에 의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허가하지 않아 특별 검사의 수사는 중단되었지만, 비밀 송금의 당사자인 정몽헌에 대한 검찰의 조사는 계속되었고, 그러던 중 2003년 8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현대아산 사무실에서 투신 자살했다. 유언에는 "유골은 금강산에 뿌려 달라"고 적혀 있었지만, 현대 그룹을 잇게 된 부인 현정은의 반대로, 서울 근교의 하남시에 있는 정씨 일족의 묘지에 매장되었고, 금강산에는 유품 상자가 안치되었다.[12]

정몽헌 사망 후, 2004년부터 금강산 관광은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생전에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개성 공업 지구 개발도 진척되었다. 금강산과 개성에서 남한과 북한 측이 함께 일하는 장면이 늘어나고 있으며, 경의선, 동해선 철도, 도로의 남북 연결 공사도 진행되었고, 금강산에서는 이산 가족 면회소 건설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모든 사업에 현대아산은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정몽헌이 실업가로서 정성을 기울였던 대북 사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한편, 현대 그룹의 대북 사업에서는 5억달러의 대북 비밀 지원 등, 거액의 자금이 북한 측으로 계속 전달되었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또한 거액의 자금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성 관광 사업이나 백두산 관광 사업 등, 북한 측이 사업 확장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고 있어, 대북 사업은 여전히 수익성이 낮은 사업이라는 시각도 강하다.

정몽헌 회장의 사망 후, 부인 현정은 회장이 경영을 승계했지만, 해운업의 심각한 불황으로 인해 경영 위기가 심화되었다. 또한, 군사 구역에 들어간 한국인 관광객을 북한 군인이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2008년부터 금강산 관광은 한국 정부에 의해 중단되었으며, 결과적으로 2016년에는 현대증권을 포함한 금융 계열 회사까지 매각 대상이 되어, 현대 그룹은 대북 사업 시작 20년 만에 중견 기업 수준으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3. 사후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검단산에 있는 정주영 묘소 100m 지점에 안장되었다.[14] 창우동 검단산 선영에는 아버지 정주영 묘, 조부모 묘,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 어머니 변중석, 큰형 정몽구의 처 이정화 등이 안장되어 있다.

2003년 8월 4일, 서울특별시종로구에 있는 현대아산 사무실에서 투신 자살했다. 유언에는 "유골은 금강산에 뿌려 달라"고 적혀 있었지만, 현대 그룹을 이은 부인 현정은의 반대로, 서울 근교의 하남시에 있는 정씨 일족의 묘지에 매장되었고, 금강산에는 유품 상자가 안치되었다.

정몽헌의 사망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안상영 부산 시장,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박태영 전라남도 지사, 배우 이은주 등 유명 인사들의 자살이 잇따르면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정몽헌 사후, 2004년부터 금강산 관광은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개성 공업 지구 개발도 진척되었다. 경의선, 동해선 철도, 도로의 남북 연결 공사도 진행되었고, 금강산에서는 이산 가족 면회소 건설이 이루어지는 등, 정몽헌이 추진했던 대북 사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대 그룹의 대북 사업은 5억 달러의 대북 비밀 지원 등, 거액의 자금이 북한 측으로 계속 전달된 것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거액의 자금 투입에도 불구하고, 개성 관광 사업이나 백두산 관광 사업 등에서 북한 측의 저항으로 사업 확장이 어려워, 대북 사업의 수익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정몽헌 회장의 사망 후, 부인 현정은 회장이 경영을 승계했지만, 해운업 불황과 금강산 관광 중단 등으로 경영 위기가 심화되었다. 결국, 2016년에는 현대증권을 포함한 금융 계열 회사까지 매각되어, 현대 그룹은 대북 사업 시작 20년 만에 중견 기업 수준으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4. 평가

정몽헌은 아버지 정주영이 시작한 금강산 관광 사업 등 대북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99년 현대아산 이사, 2000년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에 취임했고, 2001년 아버지 사망 이후에는 대북 사업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12] 김정일과 5차례 회담을 가질 정도로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당시 한국 측 대표단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 사업 등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음에도 관광객이 예상만큼 늘지 않아 현대 그룹은 큰 적자를 보았고, 이는 그룹 전체의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2003년에는 5억 달러의 대북 비밀 지원 사실이 드러나 특별 검사의 수사를 받게 되면서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결국 2003년 8월 4일, 정몽헌은 현대아산 사무실에서 투신 자살했다. 그의 죽음 이후 안상영 부산 시장,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등 유명 인사들의 자살이 잇따르면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정몽헌 사후 금강산 관광 사업은 2004년부터 흑자로 전환되었고, 개성 공업 지구 개발도 진척되는 등 그가 추진했던 대북 사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현대 그룹의 대북 사업은 거액의 자금이 북한으로 계속 흘러 들어갔다는 비판과 함께, 북한 측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여전히 수익성이 낮다는 지적도 있었다.

정몽헌 회장 사망 후, 부인 현정은 회장이 경영을 승계했지만, 해운업 불황과 금강산 관광 중단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현대 그룹은 중견 기업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4. 1. 논란과 의혹

2002년 9월, 5억 달러 규모의 대북 불법송금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몽헌은 2003년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은 현대아산이 추진하던 대북사업에 차질을 빚게 했고, 현대그룹 전체의 경영 악화로 이어져 정몽헌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2003년 8월 4일, 서울시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12층 회장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였으나,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재계에서는 부친 정주영의 숙원 사업이었던 대북 사업을 제대로 잇지 못한 것이 자살 동기로 추측하기도 했다.[12] 그의 사망 이후, 배우자 현정은이 현대그룹 회장직을 승계했다.[13]

정몽헌은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성사를 위해 김대중 정부가 북한에 비밀 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은폐하고자 회사 장부를 조작한 혐의("대북 송금 사건")로 2003년 6월 기소되었다. 그는 법정에서 자금 이체에 대해 증언해야 했고, 최대 3년의 징역형을 받을 위기에 놓였었다.

정몽헌은 아버지 정주영이 시작한 금강산 관광 사업 등 대북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99년 현대아산 이사, 2000년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2001년 아버지 사망 이후 대북 사업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김정일과 총 5차례 회담을 가졌을 정도로 북한 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정몽헌은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당시 한국 측 대표단으로 선정되는 등, 남북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2003년 중반까지 금강산 관광 사업 설비 투자와 관광료 등으로 5억 달러가 넘는 투자를 진행했고, 남북 정상 회담 직전에는 현대 그룹이 은행으로부터 불투명한 거액 융자를 받아 총 5억 달러에 달하는 비밀 지원을 북한 측에 제공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현대 그룹은 약 5년 동안 1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북한에 투입했지만, 금강산 관광객은 예상만큼 늘지 않아 그룹은 큰 적자를 보았고, 규모가 축소되며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2003년 2월, 5억 달러의 대북 비밀 지원 사실이 밝혀지면서 특별 검사에 의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허가로 특별 검사의 수사는 중단되었지만, 정몽헌에 대한 검찰의 조사는 계속되었고, 2003년 8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현대아산 사무실에서 투신 자살했다. 유서에는 "유골은 금강산에 뿌려 달라"고 적혀 있었지만, 부인 현정은의 반대로 하남시에 있는 정씨 일족 묘지에 매장되었고, 금강산에는 유품 상자가 안치되었다.

정몽헌의 사망 이후, 안상영 부산 시장,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박태영 전라남도 지사, 배우 이은주 등 유명 인사들이 잇따라 자살하면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2004년부터 금강산 관광은 흑자로 전환되었고, 개성 공업 지구 개발도 진척되었다. 경의선, 동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 공사, 금강산 이산 가족 면회소 건설 등 정몽헌이 추진했던 대북 사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대 그룹의 대북 사업은 5억 달러의 대북 비밀 지원을 포함하여 거액의 자금이 북한으로 계속 흘러 들어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막대한 자금 투입에도 불구하고 개성 관광 사업이나 백두산 관광 사업 등에서 북한 측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대북 사업은 여전히 수익성이 낮다는 지적도 있었다.

정몽헌 회장 사망 후, 부인 현정은 회장이 경영을 승계했지만, 해운업 불황으로 경영 위기가 심화되었다. 2008년에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고, 2016년에는 현대증권을 포함한 금융 계열 회사까지 매각되면서 현대 그룹은 대북 사업 시작 20년 만에 중견 기업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4. 1. 1. 타살 논란

현대가의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형제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었고, 2002년 9월 5억 달러 대북 불법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2003년에 검찰 조사를 받았다. 추진하던 대북사업의 차질과 현대그룹의 경영 악재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2003년 8월 4일, 서울시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12층 회장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으나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다.[10][11] 유서가 5장인데 4장만 발견된 점도 의혹 중 하나이다.

정몽헌 회장의 평소와 다름없었던 모습, 대북 비밀송금 사건, 현대 비자금 사건 등은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여러 의혹을 낳았다. 특히 12층 높이에서 떨어졌는데도 시신 발견 당시 외부에 드러난 상처가 심하지 않았다는 점이 의혹의 대상이었다.[16]

당시 사건 수사를 맡았던 종로경찰서 곽영진 형사계장은 "사건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수사를 공개적으로 진행했으며, 정 회장이 타살됐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16]

4. 1. 2. 유서 실종 의혹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형제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었고, 2003년 8월 4일 서울시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12층 회장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으나 타살 의혹이 있다.[10][11] 유서는 5장인데 4장만 발견된 것에 대한 의혹도 있다.

정몽헌의 측근은 경찰이 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하기 전 정 회장 주변 인물이 정 회장 사무실에 먼저 다녀갔으며, 그 과정에서 유서 1장이 없어졌다고 밝혔다.[17] 월간조선 기자는 취재 도중 익명을 요구한 정몽헌 회장의 최측근으로부터 사라진 유서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최초 정 회장의 사무실에는 경찰이 발표한 것과 달리 유서 5장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는 내용이다.[17]

정 회장의 최측근으로 일했던 한 인사는 정 회장이 투신한 사무실 책상에는 월간조선 2월호에서 검찰 관계자가 증언한 대로 유서가 4장이 아니라 5장이 놓여 있었다며, 유서 1장은 정 회장 주변 인물이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 없앤 것으로 안다고 했다.[17] 누가 정몽헌의 유서 중 1장을 가져갔는지, 언제 어디에서 사라졌는지, 숨기고 있다면 누가 보관하고 있는지 여부는 확인된 것이 없다.

4. 1. 3. 현장 지문 부재 의혹

현장에서 두 차례에 걸쳐 현장 감식을 진행했음에도 정몽헌의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7] 키 174cm에 몸무게 70kg이 넘는 정 회장이 성인이 통과하기 어려운 반 개폐식 창문틀을 통과하면서 지문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찰은 두 차례 현장 지문 감식을 실시했으나 그의 지문을 확보하지 못했다.[17]

5. 학력

6. 경력

기간직책
1975년 11월~1977년 1월현대중공업 차장
1977년 2월~1981년현대건설 이사
1981년 2월~1988년 2월현대상선 대표이사 사장
1984년~1991년현대전자산업 대표이사 사장
1992년 1월~2000년 5월현대전자산업 대표이사회장
1996년현대그룹 부회장,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현대상선 대표이사 회장
1998년현대그룹 공동 회장
1998년~2000년현대 경영자협의회 공동 의장 (그룹 회장)
2000년 3월현대 경영자협의회 의장
2000년 6월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2002년 3월현대상선 비상임이사



정몽헌은 1975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여 1981년까지 회사의 해운 부문 사장을 역임했다.[1] 정주영은 그의 경영 스타일에 깊은 인상을 받아 1982년 그를 회사의 전자 부문 책임자로 임명했다.[1] 1983년 현대전자(하이닉스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1998년 현대그룹 부회장에서 공동 회장으로 임명됐다가, 아버지 정주영이 명예 회장이 되면서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정주영 사후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을 주관하였다.

7. 수상 경력

연도수상 내역
1986년철탑산업훈장[1]
1995년무역의 날 금탑 산업 훈장, 신산업 경영원 올해의 정보통신인상[2]
1998년한국협상학회 제3회 한국협상대상[3]
2004년제2회 통일문화대상[4]


8. 가족 관계

9. 기타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의 다섯째 아들로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1999년 1월 금강산 개발 관련 전담법인의 이름을 '아산'으로 제안했다.[18] 아산은 그의 아버지 정주영의 고향 마을 이름이자 아호였다.

정몽헌은 보성고등학교 58기 졸업생이고, 그의 삼촌 정세영보성고등학교 39기 졸업생이다.

참조

[1] 뉴스 Chung Mong Hun https://www.telegrap[...] Telegraph Media Group 2003-08-19
[2] 뉴스 Of Father and Sons http://edition.cnn.c[...] 2000-06-16
[3] 뉴스 Indicted Hyundai Executive Plunges to Death in Seoul https://www.nytimes.[...] 2003-08-04
[4] 웹사이트 Indicted Hyundai Executive Plunges to Death in Seoul https://www.nytimes.[...] 2003-08-04
[5] 뉴스 남북관계의 冷え込み鮮明に、金正恩委員長が金剛山の韓国側施設撤去求める、「観光事業実現させた現代グループ激怒」と韓国紙 https://www.recordch[...] 레코드 차이나 2019-10-27
[6] 뉴스 축하합니다! 서울市内 男女中學合格者名單 경향신문 1961-12-09
[7] 뉴스 一九六二度 男女中學 合格者 名單 조선일보 1961-12-09
[8] 뉴스인용 [재벌 경영권 골육상쟁]정몽구vs정몽헌 현대 '형제의난' 계열분리로 http://m.news.naver.[...]
[9] 뉴스인용 [정몽구 현대 회장이 물러나...정몽헌회장 체제로 https://news.naver.c[...]
[10] 뉴스인용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투신자살 https://news.naver.c[...]
[11] 뉴스 재벌총수만 두 번째…유력인사 왜 자살할까 :: 네이버 뉴스 https://news.naver.c[...]
[12] 뉴스 삼성家 아픈 역사… ‘비운의 황태자’ 만들었나? http://www.ilyoseoul[...]
[13] 뉴스 현정은 회장 외아들 정영선씨, 현대그룹 계열서 경영 수업 http://biz.chosun.co[...] 조선비즈 2017-06-28
[14] 뉴스 검단산 아버지 곁에 잠든 정몽헌 회장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3-08-05
[15] 뉴스 ‘DJ 정권 실세 금고지기’ 金榮浣의 행로:정몽헌 죽음의 진실 밝혀질까 https://monthly.chos[...] 월간조선 2012-01
[16] 뉴스 鄭夢憲 現代 회장의 죽음의 행로 - 검찰 관계자 충격 證言 http://m.monthly.cho[...]
[17] 뉴스 [정밀추적] 鄭夢憲 사망 사건의 5大 미스터리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06-03
[18] 뉴스 [현대] 금강산개발 전담 (주) 아산 이달말 설립 https://biz.chosun.c[...] 조선일보 1999-01-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