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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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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자전법은 아군 함대가 적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아 T자 형태를 만들어, 적 함대의 선두에 화력을 집중하는 해상 전술이다. 16세기 전열함 시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용되었으며, 특히 영국 해군과 일본 해군이 주요하게 사용했다. 정자전법은 적보다 빠른 속력, 강력한 방어력, 함대 통제 및 사격 통제 능력이 요구되어 실행이 어려웠다. 트라팔가 해전, 쓰시마 해전, 유틀란트 해전 등에서 사용되었으며, 미사일 기술 발달로 함대 간의 결전이 사라지면서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쓰시마 해전에서의 정자전법 적용 여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며, 일본 해군의 전술적 승리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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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전법
전술 개요
명칭정자(丁字) 전법
영문 명칭Crossing the T
정의해전에서 적 함대의 진행 방향을 가로질러 T자 형태를 이루어 적에게 집중 포화를 가하는 전술
전술적 이점
공격 측적 함대의 측면 전체를 사격할 수 있음
자신의 모든 함포를 적 함대의 일부에 집중하여 화력 우위를 확보
방어 측제한된 함포만으로 응사 가능
적의 집중 포화에 취약
전술적 조건
속도 우위T자를 형성하기 위한 기동성 확보
우수한 사격 통제 능력정확한 조준 및 사격 능력
충분한 공간T자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넓은 해역 필요
역사적 배경
기원범선 시대의 해전 전술에서 유래
발전증기선과 강철 전함의 등장으로 더욱 발전
주요 해전러일 전쟁 쓰시마 해전
제1차 세계 대전 유틀란트 해전
현대적 적용
전술의 변화함대함 미사일의 등장으로 T자 전법의 중요성 감소
현대 해전에서는 다양한 전술적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
유사 개념함대 결전
해상 봉쇄
기타
참고T자 전법은 해전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유사한 전략적 개념으로 활용됨
예를 들어, 축구에서 측면 공격을 통해 상대 수비를 무너뜨리는 전술 등

2. 전술의 발전과 원리

16세기 돛으로 항행하는 군함에 다수의 대포를 탑재한 전열함이 건조되면서 해전의 진형은 근접 전투를 의식한 횡진(가로)에서 종진(세로)으로 변화했다. 특히 사거리가 긴 전열함을 다수 보유하고 있던 영국 해군은 스페인 해군 등에 앞서서 화력이 커진 측면을 최대한 활용하는 단종진을 채용했다.[1]

함선들은 전투에 돌입할 때 "열 종대"라고 불리는 전투 대형을 취했는데, 이는 한 척의 함선이 하나 이상의 평행선으로 다른 함선을 따르는 형태였다. 이것은 각 함선이 아군 함선 위로 일제사격 포탄을 날리지 않고 넓은 범위로 사격할 수 있게 해준다.[1]

일본 해군에서는 러일 전쟁 이후 주력함이 동항전을 실시하면서 보조함이 정자전법을 취하는 전술 사상을 채택, 제1함대(전함)와 제2함대(순양전함 등)가 주력 결전용으로 편성되었다. 이 두 함대는 결전 시에 통일 운용되기 때문에 이들을 통합하는 연합 함대가 상설되었다.[1]

20세기 중반 이후 미사일 기술이 발달하고, 포의 사정거리 밖에서 선박을 공격할 수 있게 되면서, 함대끼리 해양에서 발생하는 결전을 치룰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정자전법은 현재는 볼 수 없게 되었다.[1]

2. 1. 전술의 원리

정자전법은 아군 함대가 적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아 T자 형태를 만들어, 적 함대의 선두에 화력을 집중하는 방식이다. T자 형태를 이룬 아군 함대는 전방 및 후방 포탑을 모두 사용하여 일제 사격을 가할 수 있어 명중률을 극대화할 수 있다. 반면, 적 함대는 전방 포탑만 사용할 수 있어 화력이 제한되며, 사거리 오차에 더 취약해진다. 군사 용어로 이것은 "측면 사격"으로 알려져 있다.[1]

사격 통제 시스템 및 포 제조 기술의 발전으로 교전 거리가 점차 길어졌다.[1] 흑색 화약보다 덜 빠르게 연소하는 갈색 화약의 도입으로 더 긴 포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정확도 향상으로 이어졌다.[1] 또한 흑색 화약보다 덜 급격하게 팽창하므로 포신의 내부에 가해지는 압력이 적어 포의 수명이 길어지고, 더 엄격한 허용 오차로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1] 레이다의 추가로 제2차 세계 대전 시대의 함선은 더 멀리, 더 정확하게, 그리고 야간에도 사격할 수 있었다.[1]

2. 2. 전술의 어려움

19세기 후반, 산업 기술 발달로 등장한 전함은 5,000m가 넘는 사거리와 장갑판을 갖췄지만, 함대 운동과 의사 전달의 유리함 때문에 종진이 계속 지지받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더 유리한 전법으로 연구된 것이 정자전법이다. 하지만 정자전법은 적 함대보다 빠른 속력, 적 선도함을 제압할 수 있는 화력, 그리고 아군 선도함의 충분한 방어력이 필요했다. 또한 정자 완성 후에도 함대 통제와 사격 통제가 잘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착상은 쉽지만 실행은 어려운 전법이었다.[1]

3. 정자전법이 사용된 주요 해전

정자전법은 근대 해전에서 여러 차례 사용되었으며, 각 해전마다 다른 결과와 영향을 미쳤다. 주요 해전으로는 트라팔가 해전, 쓰시마 해전, 황해 해전, 대한해협 해전 등이 있다.


  • 트라팔가 해전 (1805): 영국 함선이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상대로 이 전술을 사용했다.
  • 쓰시마 해전 (1905):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무선 통신과 적절한 정찰 배치를 통해 러시아 함대를 전투에 끌어들였다.[2] 그는 러시아 함대의 이동 경로를 예측하고, 함대를 배치하여 러시아 함대에 "측면 사격"을 가했다.[3]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퇴각하거나 항복하는 대신 정규 해전을 선택했고, 결국 일본 함대에 의해 격파되었다.[4][5]
  • 황해 해전: 연합 함대 사령 장관 도고 헤이하치로와 연합 함대 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러시아 함대를 상대로 두 번 정자 전법을 시도했지만, 두 번째 공격은 실패했다. 이들은 쓰시마 해전에서 이 실패를 교훈 삼아 전술을 개선했다.
  • 대한해협 해전: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도고 턴이라 불리는 전술을 사용하여 발트 함대의 선두를 압박했다. 속도에서 앞선 연합 함대는 발트 함대를 압박하며 유리한 위치를 점했고, 최종적으로 정자 형태로 종사(縱射)를 가했다. 그러나 이 전술이 정자전법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정자전법 인정 여부에 대한 논란은 다음과 같다.

  • 정자전법으로 인정하는 입장: 적의 선두를 압박하여 집중 공격하는 것이 핵심이며, 대한해협 해전에서 일본 함대가 이러한 전술적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정자전법으로 볼 수 있다.
  • 정자전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 대한해협 해전에서는 명확한 정자 형태가 나타나지 않았고, "ハ"자나 "リ"자에 가까운 형태였으므로 정자전법으로 볼 수 없다.[6] 또한, 당시 일본군 자료에서도 대한해협 해전에서 정자전법을 사용했다는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7]


반도 가즈토시는 해전 직후 군령부에서 "대한해협 해전은 정자 전법으로 이길 수 있었다"라는 허위 발표를 했고, 이것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었다고 주장했지만,[8] 실제 발표는 6월 29일에 이루어졌고,[9] 6월 30일 아사히 신문에 게재되었다.[10]

3. 1. 리싸 해전 (1866년)

리싸 해전에서 오스트리아 해군의 테게토프 소장이탈리아 함대의 단종진 측면에서 횡진 공격을 감행하여,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측이 정자(T자) 전법을 취한 상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는 오스트리아 함대(장갑함 7척 기반)가 우세한 이탈리아 함대(장갑함 12척 기반)에 대항하기 위해 포격전이 아닌 충각에 의한 몸통 박치기 공격을 의도했기 때문이다.[2] 오스트리아 함대의 작전은 성공하여 이탈리아 장갑함 2척을 격침시키고 승리했으며, 이탈리아 함대는 정자 전법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2] 이 해전의 결과로, 장갑함 전투에서는 횡진에 의한 충각 공격이 더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일시적으로 확산되었다.[2]

3. 2. 엘리 해전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동안 오스만 제국 해군이 반격을 위해 출격하자, 그리스 해군이 이를 맞이하여 엘리 해전이 벌어졌다. 이 해전에서 그리스의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 소장은 20노트 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는 함선에게만 오스만 함대 주력에 대한 공격 참가를 명령했다. 그리스 함대는 정자전법을 이용하여 오스만 함대 기함 '바르바로스 하이레딘'을 포격하여 크게 파손시켰고, 결국 오스만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퇴각했다. 이 해전에서 그리스 함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2]

3. 3. 유틀란트 해전 (1916년)

존 젤리코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유틀란트 해전에서 독일 해군의 대양함대를 상대로 두 차례 정자전법(T자 전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독일 함대는 두 번 모두 회피 기동에 성공하여 트라팔가 해전과 같은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2]

3. 4. 에스페란스 곶 해전 (1942년)

미국 해군의 노먼 스콧 소장이 이끄는 순양함 부대는 레이다 탐색으로 일본 제국 해군 연합함대의 호위 부대(순양함 3척, 구축함 2척)를 탐지하고 정자전법을 펼쳐 요격에 성공, 일본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2]

결과적으로 일본 함대는 중순양함 1척 침몰, 1척 대파, 구축함 1척이 침몰되는 손해를 입고 퇴각했다.[3] 하지만 미국 함대도 구축함 2척 ‘파렌 홀트’와 ‘던컨’이 야간이었기 때문에 대열을 잃고 아군 함선의 포격으로 대파되어 침몰하는 피해를 입었다.[4]

3. 5. 레이테만 전투 - 수리가오 해협 해전 (1944년)

레이테만 전투에서 니시무라 쇼지가 지휘하는 함대(전함 야마시로, 후소, 중순양함 모가미와 구축함 4척을 포함한 총 7척)가 수리가오 해협을 거쳐 레이테 만으로 야간에 진입하려 했다. 이때, 제시 B. 올덴도프 소장이 이끄는 미국 해군 전함 부대(전함 6척, 순양함 8척, 구축함 26척, 어뢰정 39척, 총 79척)가 정자(丁字) 전법으로 대기하고 있다가, 어뢰 및 레이다 사격을 이용한 파상 공격을 가하여 일본 해군 구축함 시구레를 제외한 모든 함정을 격침시켰다.[2][3]

미군 측 피해는 어뢰정 10척이 손상된 정도에 불과했다.[4] 니시무라 함대의 괴멸적인 최후는 해전 역사상 가장 비참한 섬멸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5] 이 해전은 전함 간의 포격전이 벌어진 마지막 해전이기도 하다.

4. 쓰시마 해전과 정자전법 논란

쓰시마 해전은 정자전법의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전술 적용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러일 전쟁 개전 전, 일본 해군은 '연합함대 전술'을 정하고 정자전법(丁字戰法)과 을자전법(乙字戰法)을 채택했다. 극비 문서인 '메이지 37, 38년 해전사'에 따르면, 황해 해전과 쓰시마 해전 등에서 이 전술을 따르지 않은 경우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연합함대 전술'은 전 함대 결전 시 제1전대의 전법을 "정(丁)자를 그리며 가능한 한 적의 선두를 압박하고, 임기응변으로 일제 회두를 실시하여 적에 대해 정자형(丁字形)을 유지하도록 노력한다"라고 규정했다. 적이 상응하는 운동을 하여 병항 또는 반항이 될 경우, 전투 거리를 유지하거나 16점 일제 회두(전 함대가 반 회전)를 실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최초의 '연합함대 전술'에는 정자전법(丁字戰法)이라는 명칭은 없었다.

각 전대별 전술에서는 '연합함대 전술'에 있는 제1전대의 전법을 정자전법(丁字戰法)이라고 부르며 채용했지만, 적의 열단(선두 또는 일단)을 공격하는 내용이 추가되었고, 세부적인 차이도 있었다.

'연합함대 전술'은 쓰시마 해전 직전에 개정되어 "단대에서의 전투는 정자전법(丁字戰法), 2개 대에서의 협동 전투는 을자전법(乙字戰法)에 준거한다"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전 함대 결전 시 제1전대는 "적의 제2순에 있는 부대의 선두를 비스듬히 압박하는 듯이 적이 향하는 방향으로 꺾여 힘써 병항전을 개시하고 이후 전투를 지속한다"라고 정해졌다. 도다카 가즈시게는 이것이 모순된다고 보았으며, 쓰시마 해전에서 정자전법(丁字戰法)이 사용되지 않은 증거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2전대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을자(乙字)를 그린다"라고 규정되어 있어, 2개 대에서의 협동 전투가 기본으로 여겨진다고 해석하면 모순되지 않는다.

황해 해전에서 연합함대는 두 번 정(丁)자 전법을 형성했지만, 두 번째에 후미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회두가 늦어져 뒤쪽에서 쫓아가는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연합 함대 사령 장관 도고 헤이하치로와 연합 함대 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이 실패가 이후 쓰시마 해전에서 활용되었다고 말했다.

4. 1. 도고 턴과 정자전법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도고 헤이하치로 연합 함대 사령관은 전함 4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이끌고 러시아 발틱 함대의 주력(전함 8척, 장갑순양함 1척, 해방전함 3척)을 상대했다. 일본 측은 적의 앞에서 왼쪽으로 165° 순차 회두를 실시했는데, 이를 정자전법이라고 설명한다.[11]

대한해협 해전에서 일본 함대는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가 좌회전하여 적의 선두를 비스듬히 압박했다. 이를 "도고 턴"이라 부른다. 이후 발틱 함대가 우회전하여 병행했지만, 속도가 빠른 연합 함대는 앞으로 나아가 점차 우회전하며 적의 전방을 압박했다. 발틱 함대도 우회전을 했지만, 결국 연합 함대는 적의 앞에 나아가 종사(縱射)를 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발틱 함대가 변침하자 나란히 달리는 형태로 전환되어, '적 함대의 진로를 차단'하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통상적인 동항전(同航戰)에서 볼 수 있는 '八'자 형태에 가까웠고, 완전한 정자(丁字)는 실현되지 않았다.[11] 전투 상세 보고와 각종 1차 자료에서도 "쓰시마 해전에서 적전 회두 후 정자전법을 했다"는 설명은 없었다. 따라서 당사자들은 회두 후 '丁'자 또는 'イ'자 형태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12]

정자전법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전법의 주안점은 적의 선두를 압박하여 그 선두에 집중 공격하는 것이며, 적 기함 2척을 조기에 탈락시켜 정자 전법이 성립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반면, 애초에 이 작전 자체가 T자 전법을 의식하고 실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의견이나, 분명히 정자가 된 장면이 없으므로 정자 전법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정자 전법이라고 보는 측에서는 정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적의 선두를 압박하는 대표적인 형태가 정자이며, 이 형태로도 유리한 태세라고 본다. 또한 당사자들은 모두 정자 전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도 가즈토시는 해전 직후인 5월 29일, 상세한 보고도 없이 군사령부에서 언론에 "쓰시마 해전은 정자전법으로 승리했다"고 허위 발표를 했고, 다음날 신문에 그것이 게재되어 그대로 세상에 침투해 버렸다는 설을 제기했다.[13] 그러나 실제로 발표된 것은 6월 29일이고[14], 신문에 게재된 것은 6월 30일 아사히신문이었다.[15]

4. 2. 정자전법 성립 여부에 대한 논쟁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도고 헤이하치로 연합 함대 사령관이 이끄는 일본 함대는 러시아 발틱 함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적의 전면에서 왼쪽으로 165° 순차 회두를 실시하여 적 함대의 진로를 차단하는 형태, 즉 정자전법(丁字戰法)을 취했다고 설명하고 있다.[11]

그러나 실제로는 발틱 함대가 변침하자 나란히 달리는 전형으로 전환되어, 통상적인 동항전(同航戰)에서 볼 수 있는 '八'자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고, 완전한 정자(丁字) 형태는 실현되지 않았다.[11] 또한, 전투 상세 보고와 각종 1차 자료에는 쓰시마 해전에서 정자전법을 실행했다는 명확한 언급이 없어, 당시 참전자들이 정자 형태가 되었다고 인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12]

일본의 작가 한도 가즈토시는 해전 직후인 5월 29일 군령부가 언론에 "쓰시마 해전은 정자전법으로 승리했다"는 허위 발표를 했고, 이것이 그대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13] 그러나 실제 발표는 6월 29일이었고,[14] 6월 30일 아사히신문에 게재되었다.[15]

대한해협 해전의 전사는 일본 측과 러시아 제국 측의 기록이 다르지만, 일본 측 기록에서는 "도고 턴"이라고 불리는 전술을 사용하여 적의 선두를 비스듬히 압박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 후 발트 함대가 우회전하여 병행하게 되었지만, 연합 함대는 점차 우회전하여 적의 전방을 압박했다. 최종적으로 연합 함대는 완전히 적의 앞에 나아가 종사(縱射)를 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정자전법으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전법의 주안점은 적의 선두를 압박하여 집중 공격하는 것이며, 적 기함 2척을 조기에 탈락시켜 정자전법이 성립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반면, 애초에 이 작전 자체가 T자 전법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의견이나, 정자 형태가 된 장면이 없으므로 정자전법이 아니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5. 현대 해전에서의 변화

미사일 기술이 발달하고, 함포의 사정거리 밖에서 선박을 공격할 수 있게 되면서, 함대끼리 해양에서 발생하는 결전을 치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정자전법은 현재는 볼 수 없게 되었다.

6. 한국의 관점: 쓰시마 해전과 정자전법의 의미

쓰시마 해전은 러일전쟁의 주요 해전 중 하나로, 일본 제국 해군이 정자전법을 활용하여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파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정자전법이 실제로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그 효과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본 제국 해군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무선 통신과 정찰 배치를 통해 러시아 함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여 전투를 벌였다.[2] 그는 러시아 함대에게 더 긴 이동 거리를 강요하고, 선택적인 위치 지정을 통해 러시아 함포 사격을 무력화했다.[3]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후퇴나 항복 대신 정규 해전을 선택했지만, 결국 현대 전함 간의 유일한 결정적 해전에서 패배했다.[5]

하지만 실제 전투 상황은 일본 측의 주장과는 달랐다. 일본 함대는 러시아 함대 앞에서 165° 순차 회두를 실시했지만, 이는 완전한 '丁'자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八'자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11] 또한, 당시 전투 상세 보고나 1차 자료에는 정자전법을 사용했다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12]

일본 작가 한도 가즈토시는 군사령부가 해전 직후 "쓰시마 해전은 정자전법으로 승리했다"고 허위 발표를 했다는 설을 제기했지만,[13] 실제 발표는 이보다 늦은 6월 29일이었고, 6월 30일 아사히신문에 게재되었다.[14][15]

결론적으로, 쓰시마 해전에서 정자전법이 사용되었다는 주장은 과장되었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6. 1. 쓰시마 해전의 영향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도고 헤이하치로 연합 함대 사령관은 전함 4척, 장갑순양함 8척을 이끌고 러시아 발틱 함대의 주력(전함 8척, 장갑순양함 1척, 해방전함 3척)을 맞아 싸웠다.[11]

14시 07분, 러시아 함대와 마주 달리며 전투 태세(반항전)를 취한 일본군은 적의 앞에서 왼쪽으로 165° 순차 회두를 실시했다. 일본 측은 이를 정자전법(丁字戰法)이라고 설명했다.[11]

30분 정도의 주력함 간 포격전 끝에 러시아 함대는 큰 피해를 입고 통제력을 잃었다. 반면 일본 함대는 주력함을 하나도 잃지 않았다. 러시아 함대는 침몰 21척, 나포 6척, 중립국 억류 6척이라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블라디보스토크 군항에 도착한 군함은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뿐이었다.[11]

하지만 실제로는 발틱 함대가 방향을 바꾸자 나란히 달리는 형태로 전환되어 '적 함대의 진로를 차단'한 것이었고, 통상적인 동항전(同航戰)에서 볼 수 있는 '八'자에 가까운 형태가 되어 완전한 丁자는 실현되지 않았다.[11] 당시 전투 상세 보고와 각종 1차 자료에는 "쓰시마 해전에서 적전 회두 후 정자전법을 했다"는 설명이 없었다. 따라서 당사자들은 회두 후 '丁'자 또는 'イ'자 형태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2] 그러나 전투 책략의 정자전법은 '적의 선두를 압박하는 운동'이라는 기술이 있고, 전투 상세 보고에 '적의 선두를 압박'이라는 기술은 존재한다.

일본 작가 한도 가즈토시는 해전 직후인 5월 29일, 군사령부가 "쓰시마 해전은 정자전법으로 승리했다"고 허위 발표했고, 다음날 신문에 게재되어 그대로 알려졌다는 설을 제기했다.[13] 그러나 실제 발표는 6월 29일이었고,[14] 신문에 게재된 것은 6월 30일 아사히신문이었다.[15]

도고 제독은 무선 통신과 적절한 정찰 배치를 통해 러시아 함대를 전투에 끌어들일 수 있도록 함대를 배치했다.[2] 그는 자신의 움직임에 대한 내부 라인을 유지하면서 러시아 제독에게 더 긴 이동 라인을 강요했고, 선택적인 위치 지정을 통해 "러시아의 함포 사격을 점점 더 무력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3]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후퇴나 항복 외에는 "도고의 전열을 돌격"하거나 "공식적인 정규 해전을 수용"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5] 그는 후자를 선택했고, 결국 순수한 현대 전함 간의 유일한 결정적 해전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전투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으며, 전함 7척이 침몰하고 1척은 일본군에게 나포되었다.[4]

6. 2. 정자전법에 대한 비판적 시각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도고 헤이하치로 연합 함대 사령관은 전함 4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이끌고 러시아 발틱 함대의 주력(전함 8척, 장갑순양함 1척, 해방전함 3척)을 상대했다. 당시 일본 측은 적 전면에서 왼쪽으로 165° 순차 회두를 실시했는데, 이를 일본 측은 정자전법이라고 설명했다.[11]

하지만 실제로는 발틱 함대가 변침하자 나란히 달리는 전형으로 바로 전환하여 ‘적 함대의 진로를 차단’했으며, 통상적인 동항전(同航戰)에서 볼 수 있는 ‘八’자에 가까운 형태가 되어 완전한 정자는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전투 상세 보고와 각종 1차 자료에는 “쓰시마 해전에서 적전 회두 후 정자전법을 했다”는 설명이 없었다. 따라서 당사자들은 자신이 회두 후 ‘丁자’ 또는 ‘イ자’ 전형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2]

일본 작가 한도 가즈토시는 해전 직후 군사령부가 언론에 “쓰시마 해전은 정자전법으로 승리했다”고 허위 발표를 했다는 설을 제기했다.[13] 그러나 실제 발표는 6월 29일이었고,[14] 신문 게재는 6월 30일 아사히신문이었다.[15]

6. 3. 진보 진영의 관점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도고 헤이하치로 연합 함대 사령관은 전함 4척, 장갑순양함 8척을 이끌고 러시아 발틱 함대의 주력(전함 8척, 장갑순양함 1척, 해방전함 3척)을 맞아 전투를 벌였다.[11]

당시 일본 측은 적의 전면에서 왼쪽으로 165° 순차 회두를 실시했는데, 이를 일본 측은 정자전법이라고 설명했다.[11] 그러나 실제로는 발틱 함대가 변침하자 나란히 달리는 전형으로 바로 전환해서 ‘적 함대의 진로를 차단한 것’이며, 통상적인 동항전(同航戰)에서 볼 수 있는 ‘八’자에 가까운 형태로 완전한 정자는 실현되지 않았다.[11]

전투 상세 보고와 각종 1차 자료에는 “쓰시마 해전에서 적전 회두 후 정자전법을 했다”는 설명은 없었다. 따라서 당사자들은 자신이 회두 후 ‘丁자’ 또는 ‘イ자’ 전형이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추측된다.[12]

일본 작가 한도 가즈토시는 해전 직후인 5월 29일, 상세한 보고도 없이 군사령부에서 언론에 “쓰시마 해전은 정자전법으로 승리했다”고 허위 발표를 했고, 다음날 신문에 게재되어 그대로 세상에 알려졌다는 설을 제기했다.[13] 그러나 실제 발표는 6월 29일이었고,[14] 신문 게재는 6월 30일 아사히신문이었다.[15]

6. 4. 역사 교육의 중요성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도고 헤이하치로 연합 함대 사령관은 전함 4척, 장갑순양함 8척을 이끌고 러시아 발틱 함대의 주력(전함 8척, 장갑순양함 1척, 해방전함 3척)을 맞아 전투를 벌였다.[11]

일본 측은 적의 전면에서 왼쪽으로 165° 순차 회두를 실시했는데, 이를 일본 측은 정자전법이라고 설명했다.[11] 그러나 실제로는 발틱 함대가 변침하자 나란히 달리는 전형으로 바로 전환해 '적 함대의 진로를 차단'했으며, 통상적인 동항전(同航戰)에서 볼 수 있는 '八'자에 가까운 형태로 완전한 정자는 실현되지 않았다.[11] 당시 전투 상세 보고와 각종 1차 자료에서도 "쓰시마 해전에서 적전 회두 후 정자전법을 했다"는 설명은 없었다.[12]

일본의 유명 작가 한도 가즈토시는 해전 직후인 5월 29일, 군사령부가 언론에 "쓰시마 해전은 정자전법으로 승리했다"고 허위 발표를 했고, 다음날 신문에 게재되어 그대로 세상에 알려졌다는 설을 제기했다.[13] 그러나 실제 발표는 6월 29일이었고,[14] 신문에 게재된 것은 6월 30일 아사히신문이었다.[15]

참조

[1] 서적 Fleet tactics and coastal combat Naval Institute Press
[2] 문서 Mahan
[3] 문서 Mahan
[4] 문서 Mahan
[5] 문서 Mahan
[6] 간행물 ゲームジャーナル編「坂の上の雲5つの疑問」
[7] 서적 PHP文庫「日本海海戦かく勝てり」
[8] 서적 半藤一利著「日露戦争史3」
[9] 서적 角川oneテーマ21文庫、戸髙一成著「海戦からみた日露戦争」
[10] 기타 インターネットアーカイブ「聞蔵」で確認可能
[11] 간행물 게임저널 엮음 「坂の上の雲 5つの疑問」
[12] 서적 PHP文庫「日本海海戦かく勝てり」
[13] 서적 半藤一利著「日露戦争史3」
[14] 서적 角川oneテーマ21文庫、戸髙一成著 「海戦からみた日露戦争」
[15] 기타 인터넷아카이브 "聞蔵"에서 확인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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