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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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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일본은 초기 중립을 선언했으나, 영국과 동맹 관계에 따라 참전하여 독일의 식민지를 점령하고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일본은 칭다오를 점령하고 남양 군도를 차지했으며, 인도양과 지중해에서 연합국을 지원했다. 이러한 참전을 통해 일본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열강의 지위를 얻고 국제 연맹 상임 이사국이 되었지만,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은 경제 호황을 누렸으나, 종전 후 인플레이션과 불경기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군국주의의 부상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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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 - 칭다오 전투
    칭다오 전투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이 영일동맹을 명분으로 독일 제국의 조차지 칭다오를 점령한 전투로,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중국에게는 국가적 수치로 인식되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일본
일본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중 인도양에서 활동 중인 일본 순양함 아카시
제1차 세계 대전 중 인도양에서 활동 중인 일본 순양함 아카시
개요
시기1914년 8월 23일 ~ 1918년 11월 11일
참전 명분영일 동맹
주요 전장칭다오 공방전
남양 군도
지중해
결과연합국의 승리
교전국
연합국일본 제국
영국 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1917년까지)
미국 (1917년부터)
동맹국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휘관
일본 제국오쿠마 시게노부
가토 도모사부로
독일 제국에리히 폰 팔켄하인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전력
일본 제국육군: 약 80만 명
해군: 다수의 군함 및 지원 함선
독일 제국칭다오 수비대: 약 4,000명
해군: 소수의 군함 및 잠수함
피해 규모
일본 제국사망자: 약 1,500명
부상자: 약 3,000명
독일 제국사망자: 약 200명 (칭다오 수비대)
포로: 약 4,000명 (칭다오 수비대)
주요 전투 및 사건
칭다오 공방전일본군이 칭다오를 점령
남양 군도 점령일본군이 독일령 남양 군도를 점령
지중해 파견일본 해군이 지중해에 구축함을 파견하여 연합군 수송선단을 호위
시베리아 출병러시아 혁명 이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출병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향
국제적 위상 강화일본이 베르사유 조약 체결에 참여하고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 됨
경제 성장전쟁 특수로 일본 경제가 성장
군사력 강화일본 군사력이 강화되고 대일본주의가 대두
식민지 확대남양 군도를 위임통치령으로 획득

2. 중립 선언과 참전 배경 (1914)

사라예보 사건 이후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 동맹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중립을 선언했다. 영일 동맹은 자동 참전 조항이 없었고, 적용 범위가 인도를 서쪽 끝으로 하는 아시아 지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1914년 8월 1일 영국의 에드워드 그레이 외상은 주영 대사 이노우에 가쓰노스케에게 영일 동맹이 적용되지 않음을 통보했고, 8월 3일 해당 각서를 수령한 일본 정부는 8월 4일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 정부는 교주만 조차지를 거점으로 한 독일 동양 함대의 통상 파괴 작전 위험 때문에 8월 7일 일본에 참전을 요청했지만, 이후 참전 연기와 요청 철회를 반복하며 일관되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이는 일본의 참전으로 중국 대륙에서의 권익이 확대되고 남태평양의 독일 영토를 점령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중립국인 중국과 미국도 일본 참전에 반대했다.

일본 내에서는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입헌정우회), 오자키 유키오 (중정회),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로) 등이 참전에 반대했지만, 가토 다카아키 외상은 영국과의 정의 및 국익을 내세워 참전을 강력히 주장했다. 8월 8일 각의에서 "참전 범위를 한정하지 않는 조건"으로 참전이 결정되었다. 지멘스 사건으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전 수상과 사이토 마코토 전 해상이 사직한 해군은 소극적이었다.

오쿠마 시게노부 수상은 8월 8일 다이쇼 천황에게 상주했다. 영국이 참전 연기를 요청했지만, 오쿠마는 이미 천황에게 상주하여 취소가 불가능하다고 윌리엄 커닝햄 그린 주일 대사에게 전했다. 영국은 전역 한정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거부했다. "교주만 조차지를 중국에 반환할 목적으로 일본에 교부" 조건을 최후 통첩에 넣고, 오쿠마가 "영토적 야심은 없다"고 밝혀 영일 간 양해가 이루어졌다.

다이쇼 천황


참전을 강력하게 주장한 가토 다카아키 외상(후에 귀족원 의원, 수상)

2. 1. 영일 동맹과 일본의 입장

영일 동맹은 자동 참전 조항을 포함하지 않았고, 적용 범위도 인도를 서쪽 끝으로 하는 아시아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1914년 8월 1일, 영국의 에드워드 그레이 외상은 주영 대사인 이노우에 가쓰노스케에게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데 있어서) 영일 동맹은 적용되지 않는다"라고 전했고, 8월 3일에 이 취지의 각서가 수령되었다. 이를 받아들여 일본 정부는 4일에 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의 참전을 둘러싼 영국 정부의 대응은 일관되지 않았다. 교주만 조차지를 본거지로 하고 있던 독일 동양 함대에 의한 통상 파괴 작전의 위험성 때문에, 8월 7일 영국은 일본에 참전을 요청했지만, 이후 참전 연기 및 요청 철회를 반복했다. 이는 일본의 참전으로 일본의 중국 대륙에서의 권익이 확대되는 것과 남태평양에서의 독일 영토를 일본이 점령하는 것을 영국 정부가 우려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중립국인 중국과 미국도 일본의 참전에 반대했다.

일본 국내에서는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입헌정우회), 오자키 유키오 (중정회),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로) 등이 참전에 반대했지만, 가토 다카아키 외상은 영국과의 정의 및 국익의 관점에서 참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참전 범위를 한정하지 않는 조건"으로 참전하는 것이 8월 8일 각의에서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지멘스 사건으로 4개월 전에 야마모토 곤노효에수상, 사이토 마코토 전 해상이 사직했던 해군은 이 정치적 결정에 관여하지 않았고 소극적이었다.

오쿠마 시게노부 수상은 8월 8일 나스 어용저에서 다이쇼 천황에게 상주를 했다. 영국으로부터의 참전 연기 요청에 대해 오쿠마는 천황에게 상주를 하고 있어, 이것을 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윌리엄 커닝햄 그린 주일 대사에게 전했다. 영국은 전역 한정을 계속 요구했지만 일본은 거부했다. "교주만 조차지를 중국에 반환할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일본에 교부하라"라는 조건을 독일에 대한 최후 통첩에 기재하고, 더욱이 오쿠마 수상이 "이번 참전은 영토적 야심은 없다"라고 말한 것으로 영일 간은 양해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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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Ōkuma Shigenobu.jpg

| 2=이하, 기간 중에 재임한 수상
오쿠마 시게노부 (제2차 오쿠마 내각)

| 3=Masatake Terauchi 2.jpg

| 4=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내각)

| 5=Takashi Hara posing cropped.jpg

| 6=하라 다카시
(하라 내각,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 내각)

}}

2. 2. 영국 정부의 입장 변화

2. 3. 일본 내 참전 논의

3. 참전과 군사 작전 (1914-1917)

15일 일본은 독일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일본의 국익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이유로 참전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았기에 답신을 보내기 위한 일주일 기간을 설정했다. 독일은 답신을 보내지 않았고 일본은 23일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4]

당시 일본은 내란이 일어난 멕시코에 체류중인 일본인을 보호하기 위해 순양함 이즈모를 파견했었는데 영국 왕립 해군은 이즈모에 캐나다 서해안에서 상선 보호를 요청했다. 그리고 싱가포르에 함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영국 해군은 일본 해군이 아시아에서 필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은 일본에게 참전 구역을 한정하라고 요구해선 안 된다며 그런 요구는 일본 정부를 적대시하는 태도이며 이미 일본이 참전을 했으니 참전 구역을 한정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한편 일본이 참전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오쿠마는 어전회의를 소집하지도 않았고 제국의회의 승인도 구하지 않았으며 군 통수부와 합의도 하지 않았다. 긴급 각의를 열어 참전을 결정했을 뿐이었는데 오쿠마가 전례를 무시하고 군부를 경시한 태도를 보이면서 이후 내각과 군부의 관계는 삐걱이게 되었다.

=== 칭다오 전투 (1914) ===

1914년 10월 31일, 일본군과 영국군은 연합하여 독일 동양함대의 본거지인 산둥성 자우저우만 조차지를 공격하여 칭다오 전투를 일으켰고, 11월 7일에 점령에 성공했다.[17] 일본군은 1914년 9월 2일 중국 산둥성에 상륙하여 칭다오의 독일 거류지를 포위했고, 수상기 모함 ''와카미야''에서 발진한 수상기가 ''카이저린 엘리자베스''와 독일 포격함 ''재규어''를 폭탄으로 공격했으나 실패했다.[7] 칭다오 포위전은 1914년 11월 7일 독일 식민지 군대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일본군이 칭다오 근처에 상륙


=== 남양 군도 점령 (1914) ===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영국과의 동맹을 바탕으로 독일의 태평양 영토 점령을 목표로 참전했다.[4] 1914년 8월, 영국 정부의 공식 요청에 따라 일본은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5][6] 칭다오 전투를 통해 독일의 주요 거점인 산둥성 칭다오를 점령했다.[17]

당시 일본 내에서는 남양 군도 점령에 대해 영국과 미국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독일 순양함들의 활약으로 영국과 미국의 여론이 변화하면서, 일본은 남양 군도 점령을 결정했다.[17] 1914년 10월, 일본 해군은 일본 제국 해군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적도 이북의 남양 군도를 저항없이 순차적으로 점령했다.[17] 이 과정에서 수상기 모함 ''와카미야''는 세계 최초의 해상 발진 공습을 실시하기도 했다.[7]

일본의 급속한 점령 지역 확장에 영국은 작전 구역 제한을 제안했고, 결국 적도 이북은 일본, 적도 이남은 영국의 작전 구역으로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군사 작전은 미크로네시아에서 제한되었다.[17]

=== 오스트레일리아 병력 호위 (1914) ===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유럽에 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호위를 영국 해군의 요청으로 일본 순양전함 이부키가 맡게 되었다.[9] 이부키는 프리맨틀을 거쳐 웰링턴에 기항한 뒤 뉴질랜드 병력 수송선 10척을 이끌고 출발했다.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28척을 추가한 뒤 영국·오스트레일리아 순양함과 함께 아덴을 향했다.[9] 이때 독일 순양함 SMS 엠덴이 코코스 제도를 포격하자 전투 태세에 돌입해 오스트레일리아 순양함 HMAS 시드니가 엠덴을 격침했다.[9] ''이부키''도 "엠덴" 추격을 요청했으나, 결국 무훈을 시드니에게 양보했다.

=== 인도양 및 지중해 파견 (1917) ===

영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 해군은 인도양에서도 군사 작전을 펼쳤다. 독일 순양함 SMS 엠덴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은 순양전함 이부키를 선단 호위에 투입했다.[18] ANZAC 군단의 유럽 파병을 호위하게 된 이부키는 프리맨틀을 경유하여 웰링턴에 기항, 뉴질랜드 병력 수송선 10척을 이끌고 출발했으며, 호주에서 28척이 더 합류하여 영국 순양함 "미노토어", 호주 순양함 "시드니", "멜버른"과 함께 아덴으로 향했다. 항해 도중 "엠덴"에 의한 코코스 제도 포격 소식이 전해졌고, 근처를 항해하던 함대에서 "시드니"가 분리되어 "엠덴"을 격침시켰다.

1917년, 독일 해군의 상선 공격이 격화되자 연합국은 일본에 호위 작전 참가를 요청했다. 일본은 산둥반도와 적도 이북 독일령 뉴기니의 이권을 넘겨받는 조건으로[12], 1917년 1월부터 3월까지 영국·프랑스·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유럽 전선 참전을 조건으로 이를 승인하는 비밀 조약을 맺었다. 일본 해군은 인도양에 제1특무함대를 파견하여 영국·프랑스의 아시아 식민지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는 병력 수송선 호위 임무를 담당했다. 2월에는 순양함 아카시와 가바급 구축함 8척으로 구성된 제2특무함대를 인도양을 거쳐 지중해에 파견했다.[19] 이후 모모급 구축함 등을 증파하여 총 18척이 지중해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제2특무함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세유로 병력을 수송하는 작전의 호위 임무를 성공하고, 독일 해군 유보트의 공격을 받은 연합국 선박에서 7,000명 이상을 구조하는 등 활약했다.[19]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연합국이 피해를 입자, 일본 해군은 연합국측 수송선 호위·구조 활동에도 나서 350회에 걸쳐 787척을 도왔다.

한편, 구축함 사카키가 오스트리아 해군 잠수함 U27의 공격을 받아 59명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기도 했다.[19][20]

=== 미국 서해안 파견 (1914) ===

독일 동양함대가 미국 서부 해안 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점쳐지자 영국은 일본 해군에 초계 활동을 요청했다.[9] 이에 일본은 1914년 10월 1일 전함 히젠과 순

3. 1. 칭다오 전투 (1914)

1914년 10월 31일, 일본군과 영국군은 연합하여 독일 동양함대의 본거지인 산둥성 자우저우만 조차지를 공격하여 칭다오 전투를 일으켰고, 11월 7일에 점령에 성공했다.[17] 일본군은 1914년 9월 2일 중국 산둥성에 상륙하여 칭다오의 독일 거류지를 포위했고, 수상기 모함 ''와카미야''에서 발진한 수상기가 ''카이저린 엘리자베스''와 독일 포격함 ''재규어''를 폭탄으로 공격했으나 실패했다.[7] 칭다오 포위전은 1914년 11월 7일 독일 식민지 군대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3. 2. 남양 군도 점령 (1914)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영국과의 동맹을 바탕으로 독일의 태평양 영토 점령을 목표로 참전했다.[4] 1914년 8월, 영국 정부의 공식 요청에 따라 일본은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5][6] 칭다오 전투를 통해 독일의 주요 거점인 산둥성 칭다오를 점령했다.[17]

당시 일본 내에서는 남양 군도 점령에 대해 영국과 미국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독일 순양함들의 활약으로 영국과 미국의 여론이 변화하면서, 일본은 남양 군도 점령을 결정했다.[17] 1914년 10월, 일본 해군은 일본 제국 해군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적도 이북의 남양 군도를 저항없이 순차적으로 점령했다.[17] 이 과정에서 수상기 모함 ''와카미야''는 세계 최초의 해상 발진 공습을 실시하기도 했다.[7]

일본의 급속한 점령 지역 확장에 영국은 작전 구역 제한을 제안했고, 결국 적도 이북은 일본, 적도 이남은 영국의 작전 구역으로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군사 작전은 미크로네시아에서 제한되었다.[17]

3. 3. 오스트레일리아 병력 호위 (1914)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유럽에 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호위를 영국 해군의 요청으로 일본 순양전함 이부키가 맡게 되었다.[9] 이부키는 프리맨틀을 거쳐 웰링턴에 기항한 뒤 뉴질랜드 병력 수송선 10척을 이끌고 출발했다.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28척을 추가한 뒤 영국·오스트레일리아 순양함과 함께 아덴을 향했다.[9] 이때 독일 순양함 SMS 엠덴이 코코스 제도를 포격하자 전투 태세에 돌입해 오스트레일리아 순양함 HMAS 시드니가 엠덴을 격침했다.[9] ''이부키''도 "엠덴" 추격을 요청했으나, 결국 무훈을 시드니에게 양보했다. 이 에피소드는 "이부키의 무사도적 행위"로 칭찬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반면, 이부키 함장 가토 칸지는 엠덴 발견 소식이 이부키에게만 전달되지 않고 시드니에 의해 먼저 발견되었다고 항의했다. 이후 태평양인도양을 건너 아덴에 당도할 때까지의 호위 임무는 대체로 일본 해군이 수행했다.

1917년 11월 30일, 호주 서해안 프리맨틀에 입항하는 야하기를 향해 육상 포대에서 연안포 1발이 발사되어 야하기의 굴뚝을 스쳐 우현 300m 해상에 낙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호주 국방군 부대 책임자는 야하기에 탑승한 선도 항해사가 적절한 신호를 보내지 않아 "주의 환기를 위해" 실탄을 발사했다고 해명했지만, 결국 사건은 호주의 총독 로널드 먼로-퍼거슨과 호주 해군 사령관 윌리엄 루크 크레스웰의 사과로 일단락되었다.

3. 4. 인도양 및 지중해 파견 (1917)

영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 해군은 인도양에서도 군사 작전을 펼쳤다. 독일 순양함 SMS 엠덴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은 순양전함 이부키를 선단 호위에 투입했다.[18] ANZAC 군단의 유럽 파병을 호위하게 된 이부키는 프리맨틀을 경유하여 웰링턴에 기항, 뉴질랜드 병력 수송선 10척을 이끌고 출발했으며, 호주에서 28척이 더 합류하여 영국 순양함 "미노토어", 호주 순양함 "시드니", "멜버른"과 함께 아덴으로 향했다. 항해 도중 "엠덴"에 의한 코코스 제도 포격 소식이 전해졌고, 근처를 항해하던 함대에서 "시드니"가 분리되어 "엠덴"을 격침시켰다.

1914년 9월, 영국은 모든 물자를 자국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일본에 순양전함 부대를 지중해를 비롯한 다른 해역에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했다.[18] 10월에는 발트해 파견을, 11월에는 다르다넬스 해협 봉쇄 작전 참가를 요청받았지만, 일본은 이 역시 거부했다.[18]

1917년, 독일 해군의 상선 공격이 격화되자 연합국은 일본에 호위 작전 참가를 요청했다. 일본은 산둥반도와 적도 이북 독일령 뉴기니의 이권을 넘겨받는 조건으로[12], 1917년 1월부터 3월까지 영국·프랑스·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유럽 전선 참전을 조건으로 이를 승인하는 비밀 조약을 맺었다. 일본 해군은 인도양에 제1특무함대를 파견하여 영국·프랑스의 아시아 식민지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는 병력 수송선 호위 임무를 담당했다. 2월에는 순양함 아카시와 가바급 구축함 8척으로 구성된 제2특무함대를 인도양을 거쳐 지중해에 파견했다.[19] 이후 모모급 구축함 등을 증파하여 총 18척이 지중해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제2특무함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세유로 병력을 수송하는 작전의 호위 임무를 성공하고, 독일 해군 유보트의 공격을 받은 연합국 선박에서 7,000명 이상을 구조하는 등 활약했다.[19]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연합국이 피해를 입자, 일본 해군은 연합국측 수송선 호위·구조 활동에도 나서 350회에 걸쳐 787척을 도왔으며, 사령관 이하 27명은 영국 국왕 조지 5세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한편, 구축함 사카키가 오스트리아 해군 잠수함 U27의 공격을 받아 59명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기도 했다.[19][20] 이 외에도 지중해에서 수행한 전투 결과 총 78명의 일본군 장병이 전사했으며, 전후 이들을 기리고자 몰타의 영국 해군 기지에 묘비가 세워졌다.[20]

3. 5. 미국 서해안 파견 (1914)

독일 동양함대가 미국 서부 해안 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점쳐지자 영국은 일본 해군에 초계 활동을 요청했다.[9] 이에 일본은 1914년 10월 1일 전함 히젠과 순양함 아사마, 이즈모를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멕시코에 파견했다.[9]

미국 서해안에서 일본 해군은 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 해군과 합동 작전을 펼쳤으며, 일부는 독일 해군을 추격하여 갈라파고스 제도까지 진출했다.[9] 순양함 이즈모는 이후 제2특무함대 증원 부대로 지중해몰타섬에 파견되었다.[9]

4. 21개조 요구와 중국의 반발 (1915)

1914년 칭다오 점령 이후 1915년 1월 18일 일본은 중화민국위안스카이에게 14가지 요구와 7가지 희망조항을 제시했다.[10] 주요 내용은 △독일산둥성에서 가지고 있던 이권을 일본에 양도할 것 △관동주의 조차 기간을 연장할 것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권익 기간을 연장할 것 △연안부를 외국이 할양하지 말 것 등이었다.[10]

이 사실이 알려지자 중화민국에선 거센 반발 운동이 일었지만, 일본은 5월 7일 최종 통고를 했고 위안스카이는 5월 9일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10] 이는 중국에서 반일 감정에 불을 지폈고 거국적인 규모로 5·4 운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만약 21개 요구가 달성되었다면, 중국은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을 것이며, 이는 이미 중국 내 각 세력권에서 유럽 열강이 누리고 있던 수많은 특권을 희생하는 것이었다. 중화민국 정부와의 지지부진한 협상, 널리 퍼지고 격화되는 반일 감정, 그리고 국제적 비난(특히 미국)에 직면하여, 일본은 최종 요구안을 철회했고, 1915년 5월 25일 중국은 조약을 체결했다.[10]

5. 시베리아 출병 (1918-1922)



1917년 11월 7일, 연합국의 한 국가인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러시아 혁명"이 발발했다. 이미 영국과 프랑스는 서부 전선에 전력을 다하고 있어 러시아에 파병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연합국은 대전에 육군 주력을 파견하지 않은 일본과 미국에 시베리아 파병을 타진했다.[13] 1919년에 일본은 미국과 공동 보조를 취해 시베리아 출병을 실시했다. 또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도 파병했지만, 그 규모는 일본에 비해 작았다.

10월 혁명 이후, 일본과 미국은 1918년 시베리아에 병력을 파견하여 백군 지도자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의 군대를 볼셰비키 적군에 맞서 지원했다.[13] 일본 제국 육군은 처음에는 7만 명 이상의 병력을 파견하여 바이칼 호 서쪽까지 시베리아를 점령할 계획이었으나, 미국의 반대로 대폭 축소되었다.[13]

하지만, 그 후 다른 국가들이 병력을 철수하는 중에도 시베리아 출병을 지속하면서 각국의 의심을 사 일본의 국제적 입장이 어려워졌다.[13] 또한, 시베리아 출병의 지속으로 일본이 러시아나 중국에서 미국의 이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6. 독일군 포로 대우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국제법을 준수하며 칭다오에서 포획한 약 4,700명의 독일군 포로를 정중하게 대우했다. 포로들은 도쿠시마현의 반도 포로 수용소, 지바현의 나라시노 포로 수용소, 히로시마현의 니노시마 검역소 포로 수용소 등 각지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특히 반도 수용소에서는 독일군과 지역 주민과의 교류가 허용되었고, 인근 주민들은 독일군을 "독일 씨"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

이때 독일 요리맥주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일 문화가 일본에 전해졌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제9)이 독일군 포로들에 의해 연주되어 처음으로 일본에 전해졌으며, 시키시마 제빵의 창업자 모리타 젠페이는 독일군 포로에게 제조법을 배워 빵 제조 사업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독일로 귀환한 전 포로들은 당시의 대우에 감사하며 "반도회"를 결성했다.

니노시마 검역소로 이송된 545명 중 제과 장인 카를 유하임은 일본 최초로 바움쿠헨을 굽거나, 히로시마현 산업 장려관(현재의 원자 폭탄 돔)에서 시연 판매를 하기도 했다. 포로 축구팀이 지역 사범학교 팀과 시합을 통해 기술을 가르치는 일도 있었으며, 이 선수 중 한 명은 독일로 귀국 후 축구 클럽 "SV 반바일"을 창설하여, 나중에 기드 부흐발트를 배출하는 기초를 닦았다.

7. 영향

연합국의 승리에 공헌한 일본은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와 함께 파리 강화 회의를 주도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이 가지고 있던 중국 산둥성의 권익과 팔라우, 마셜 제도 등 적도 이북의 남양 군도위임통치령으로 삼게 되었다. 1920년 국제연맹이 창립되자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었다.

공업도 크게 발전하였는데 전쟁터가 된 유럽에서 많은 공장이 파괴된 것에 비해 일본은 국토가 직접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많은 군수품을 연합국에 팔았으며 이는 경기 활황을 이끌었다. 공업의 성장은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는 현상도 낳았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극심하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하는 등의 문제도 발생했다. 전후에는 활황이 끝나고 공황이 찾아와 불경기로 접어들었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의 관계가 삐걱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을 거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무렵 일본은 이미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는데 필리핀과 하와이 사이에 위치한 팔라우나 마셜 제도를 일본이 차지한 점, 시베리아 출병을 이어간 점,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배타적인 경제 블록을 구축한 점, 미국의 중국 대륙 진출을 방해한 점 등으로 인해 미국은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태평양 지역의 영토와 권익의 상호 존중을 내세우며 4개국 조약을 체결한 뒤 영일 동맹의 발전적 해소를 요구했다. 또한 일본이 국제 연맹 규약에 인종 차별 철폐 제안을 했지만 미국과 영국 등이 반대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등에서는 인종 차별에 기반한 황화론 등 일본을 위험시하는 분위기가 확산했고 아시아인의 이민을 금지한 1924년 이민법이 제정되었다.

미국의 일방적인 대일 적대적 태도는 일본 내에서도 반미 감정을 부추겼고 미일 관계는 악화되어 갔다. 그리고 이는 1930년대 일본 군부가 폭주하면서 만주국을 수립하자 국제연맹에서 추방당한 뒤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과 손을 잡는 것으로 이어진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의 경공업이 세계 시장 점유율을 확보했지만, 일본은 전쟁이 끝난 직후 다시 채무국 지위로 돌아갔다. 일본의 손쉬운 승리, 1926년 쇼와 불황의 부정적인 영향, 그리고 내부 정치적 불안정은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에 걸쳐 일본 군국주의의 부상에 기여했다.

7. 1. 국제적 지위 상승

연합국의 승리에 공헌한 일본은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와 함께 파리 강화 회의를 주도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이 가지고 있던 중국 산둥성의 권익과 팔라우, 마셜 제도 등 적도 이북의 남양 군도위임통치령으로 삼게 되었다. 1920년 국제연맹이 창립되자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었다.

일본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5대 열강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1919년 일본 대표 사이온지 긴모치는 "빅 4" (로이드 조지, 윌슨, 클레망소, 오를란도) 지도자들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다. 도쿄는 국제 연맹 이사회에 영구적인 자리를 얻었고, 파리 강화 회의는 독일이 산둥반도에서 갖는 권리를 일본으로 이전하는 것을 확인했다. 독일의 더 북쪽에 있는 태평양 섬들도 일본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이는 남양 군도 위임통치라고 불렸다.

국제 연맹 규약에 인종 차별 철폐 제안을 했지만 미국과 영국 등이 반대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등에서는 인종 차별에 기반한 황화론 등 일본을 위험시하는 분위기가 확산했고 아시아인의 이민을 금지한 1924년 이민법이 제정되었다. 미국의 일방적인 대일 적대적 태도는 일본 내에서도 반미 감정을 부추겼고 미일 관계는 악화되어 갔다.

7. 2. 미국과의 관계 악화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승리로 "열강의 일원"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이 소유했던 산둥성의 권익과 필리핀과 하와이 사이에 위치한 팔라우마셜 제도의 통치권을 획득한 것, 시베리아 출병을 지속한 것 등은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배타적인 경제 블록을 구축하여 미국의 중국 진출을 저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계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미국은 영일 동맹을 폐기하도록 영국에 압력을 가했으며, 1921년에는 4개국 조약을 체결하여 영일 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소시켰다. 일본이 국제 연맹에서 인종적 차별 철폐 제안을 했지만 미국과 영국 등이 반대했다. 캘리포니아주 등에서는 황화론을 주장하며 일본을 위협적으로 보는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배일 이민법이 제정되어 일본인의 이민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대일 적대적 태도는 일본 내 반미 감정을 부추겼고, 미일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는 1930년대 일본 군부가 폭주하는 계기가 되었고, 만주국 수립 후 국제연맹에서 추방당한 뒤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과 손을 잡는 결과로 이어져,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양국의 충돌을 야기했다.

7. 3. 경제적 영향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연합국에 군수품을 판매하며 경제 호황을 누렸다. 국토가 전쟁 피해를 입지 않은 덕분에 공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도시로의 인구 집중 현상을 야기했다. 일본우선이 매우 바빠지고 억만장자가 출현하는 등 대공황에 휩싸였다.

하지만, 전쟁 특수는 오래가지 못했다.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빈부 격차가 커졌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전후 공황이라 불리는 불경기에 시달렸다. 경공업이 세계 시장 점유율을 확보했지만, 전쟁 직후 일본은 다시 채무국 지위로 돌아갔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내부 정치적 불안정은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에 걸쳐 일본 군국주의 부상에 기여했다.

7. 4. 사회적 영향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일본은 국토가 직접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공업이 크게 발전했다. 전쟁터가 된 유럽에서 많은 공장이 파괴된 것에 비해 일본은 연합국에 군수품을 판매하며 경기 활황을 맞았다. 이러한 공업 성장은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는 현상을 낳았다.

하지만,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빈부 격차가 커지는 문제도 발생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전후 공황이라 불리는 불경기에 시달렸다. 공업 생산력은 증대되고 도시에 인구가 집중되는 등 사람들의 생활은 크게 바뀌었지만, 경제적 불평등 심화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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