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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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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경록은 1920년 충청북도 음성군 출생으로, 일본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했다. 한국 전쟁, 4.19 혁명, 5.16 군사 정변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에 관여했으며, 육군참모총장, 교통부 장관, 주 멕시코 대사, 주 영국 대사, 주일 대사 등을 역임했다. 1980년에는 전두환의 요청으로 주일 대사를 5년간 지냈고,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2002년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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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록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최경록 장관
이름최경록
한자 표기崔慶祿
출생일1920년 9월 21일
사망일2002년 9월 2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조선 충청북도 음성군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묘소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14호
본관해주 최씨 (海州)
배우자전자순
자녀2남 2녀
친인척정지혜(차자부), 정일권(사돈)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군 복무1942년 ~ 1945년 (일본 제국 육군)
1946년 ~ 1961년 (대한민국 육군)
최종 계급준위 (일본 육군)
중장 (한국 육군)
근무육군본부
지휘육군참모총장
참전한국 전쟁
정치 경력
정당무소속
주요 경력민주공화당 당무위원
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
국민당 최고위원
신민주공화당 상임고문
자유민주연합 전임고문
공직 이력
직책제22대 교통부 장관
임기1974년 9월 18일 ~ 1977년 11월 17일
대통령박정희
국무총리김종필 국무총리
최규하 국무총리 서리
최규하 국무총리
차관이재철 교통부 차관
김완수 교통부 차관

2. 생애

1920년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후 일본군으로 복무하였다. 광복 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군 복무 중 1949년 송악산 5·4 전투 당시 제11연대 연대장이었으며, 한국 전쟁 초기에는 고랑포 전투에 참전했다. 1951년 헌병사령관으로서 거창 양민 학살 사건국민방위군 사건의 처리를 담당했다. 또한 1950년 민주국민당 소속 서민호 의원의 현역 장교 사살 사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사면 시도에 반대하여 군과 법관들의 독립성을 지키려 했다.

1960년 4·19 혁명 당시에는 계엄사령관 송요찬의 발포 명령을 만류하여 시민 희생을 막으려 했다. 혁명 이후 장면 내각에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으나, 군 숙정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측의 간섭을 거부하는 '파머 사건'을 겪기도 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17] 예편 후에는 박정희의 군정 연장에 반대하여 1963년 미국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18] 1965년에는 다른 예비역 장성들과 함께 한일 협정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등 군부의 정치 개입을 비판했다.[10][11][12]

그러나 이후 박정희의 지속적인 요청으로 공직에 복귀하여, 주 멕시코 대사[19], 주 영국 대사를 역임했으며, 1974년에는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장관 재직 중 발생한 이리역 폭발 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78년에는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제10대 국회의원이 되었고, 1980년 전두환 정부에서 주일 대사로 임명되어 5년간 활동했다.[13]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제24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2002년 9월 3일 향년 83세로 별세하였다.[20][21][22]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1920년 9월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났다.[1] 음성삼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하시 중학교에서 수학했다.[1] 1938년 일본 육군 지원병 1기로 입대하여[2] 1939년 12월 육군 병 지원자 훈련소를 수료하고 보병 제79연대에 배속되었다. 동기 중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하사관 후보생으로 선발되었으며, 육군사관학교 시험에도 합격했다.[2] 입교 대기 중 남방 전선으로 파병되어 뉴기니 전역에 참전했다.[2] 전투 중 중상을 입었으나, 과거 인연이 있던 제20사단 참모장 오노 타케오 대좌의 도움으로 마닐라 육군 병원을 거쳐 일본 고쿠라 육군 병원, 도쿄 제1 육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1944년 도요하시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준위로 임관했다.[1]

광복 후 귀국하여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를 1기[3]로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군번 10011번)했다.[3] 제1연대 창설에 참여하여 A중대(중대장: 채병덕 대위) 소대장을 맡았다.[4] 1947년 12월 1일 제2여단 인사참모로 임명되었다.[5]

1948년 6월 21일, 제11연대 연대장이 되어 제주도에 부임했다. 1949년 송악산 5·4 전투 당시 유명한 육탄10용사를 배출한 제11연대를 지휘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제11연대를 이끌고 고랑포 전투(임진강 전투)에 참전하여 분전했다. 1950년 7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1951년 1월 10일 육군본부 고급 부관을 거쳐[6] 1월 14일 육군 헌병사령관에 임명되었다.[6] 헌병사령관 재직 중 거창 양민 학살 사건국민방위군 사건의 처리를 담당했다.[1] 또한 1950년 민주국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민호가 현역 육군 대위를 사살한 사건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사형 선고 후 사면하려 하자 최경록을 비롯한 군 법무관들이 법 절차를 내세워 반대하여 무산시키기도 했다. 이 일로 최경록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다. 1951년 7월 31일에는 육군 헌병학교 교장을 겸임했다.

1952년 1월 22일 국방부 제1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7] 같은 해 봄, 이기붕 국방부 장관이 부산 정치 파동과 관련하여 계엄령 선포 명령을 받고 최경록에게 의견을 묻자, "계엄령 선포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이기붕 장관도 이에 동의하여 계엄령 선포 불가 입장을 전달했다가 함께 해임되었다.[7] 1953년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서 유학했다. 1954년 귀국하여 제8사단장에 임명되었다.[1]

1955년 제2군 부사령관을 지냈고, 1958년 국방대학원을 졸업한 뒤 1959년 국방대학원 원장이 되었다. 1960년 육군참모차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 송요찬 중장의 발포 명령에 대해 중단을 강력히 건의하여 만류했다.[2] 4.19 혁명 이후 허정 과도정부 수반이 최경록을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당시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었던 장면과의 인연 때문에 고사했다.[2] 그러나 1960년 8월 23일 장면 내각이 출범하면서 단행된 군 인사에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2] 참모총장 재임 중 군 숙정과 관련하여 미국 측의 간섭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파머 사건"을 겪기도 했다. 한국군 최초의 대규모 기동 훈련을 실시하고, 창군 이래 처음으로 병력 감축을 단행하여 군의 효율성 향상에 기여했으며,[8] 동해안 지역 경비 강화를 위해 제7기동군단을 창설했다.[8] 하지만 군 내부의 하극상 문제 등 군 기강 문란 사태에 대한 책임 문제로 1961년 2월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다.[1]

1961년 3월 제2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5월 5.16 군사 정변이 발생했을 때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9] 정변 이후인 1961년 5월 22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17] 예편 후 조지 워싱턴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63년 3월 21일, 강문봉, 전규홍, 이철승, 양일동 등과 함께 미국 백악관 앞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군정 연장 시도에 반대하며 "군대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 "박정희 군사독재 타도", "한국인은 군부정치를 원치 않는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18][2]

1965년 7월 14일에는 김홍일, 김재춘, 박병권, 박원빈, 백선진, 송요찬, 손원일, 장덕창, 이호, 조흥만 등 다른 예비역 장성들과 함께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10]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8월 27일에는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여, 국군 장병들이 집권자에 의해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목적으로 동원되는 상황을 비판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에게 총을 겨누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11] 이 일로 8월 29일 김홍일 등 4명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었고, 최경록 역시 손원일, 백선진, 조흥만 등과 함께 같은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12]

2. 2. 4.19 혁명과 군 내부 갈등

1960년 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 송요찬이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명령하자 이를 만류하며 시민들의 희생을 막으려 노력했다.

4·19 혁명 이후 과도정부 수반 허정1960년 5월 2일 최경록에게 육군참모총장직을 제의했으나, 당시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었던 장면과의 인연을 고려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이후 1960년 8월 23일, 장면 내각이 출범하면서 육군참모총장으로 정식 임명되었다.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 군 내부 숙정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측의 과도한 개입을 단호히 거부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파머 사건"을 겪기도 했다. 이는 군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평가된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인 1961년 5월 22일, 육군 제2야전군사령관 직을 마지막으로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17]

예편 후에도 군부의 정치 개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1963년 3월 21일, 강문봉, 전규홍, 이철승, 양일동 등과 함께 미국 백악관 앞에서 박정희의 군정 연장 시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군대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 "박정희 군사독재 타도", "한국인은 군부정치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군부 통치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했다.[18]

2. 3. 박정희 정부와의 관계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제2군 사령관이었던 최경록은 정변을 소극적으로 지지했다.[9] 그러나 이듬해 6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고,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63년 3월 21일, 최경록은 강문봉, 전규홍, 이철승, 양일동 및 전 주미 대사관 참사관 부인들과 함께 미국 워싱턴 D.C.의 백악관 앞에서 박정희의 군정 연장 제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1][2][18] 이들은 "군대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 "박정희 군사독재 타도", "한국인은 군부정치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군정 연장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18]

1965년 7월 14일, 김홍일, 김재춘, 박병권, 박원빈, 백선진, 송요찬, 손원일, 장덕창, 이호, 조흥만 등 다른 예비역 장성들과 함께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10] 학생과 군이 충돌하는 시위가 격화되자, 같은 해 8월 27일에는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여 국군 장병들이 신성한 국토 방위의 사명보다 집권자의 이익을 위해 동원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에게 총을 겨누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11] 이 일로 8월 29일, 손원일, 백선진, 조흥만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명예 훼손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12]

이후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에 참여해 달라"며 최경록을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최경록은 1967년 미국에서 귀국하여 그해 10월 7일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장을 받고 주 멕시코 대사로 부임했다.[13][19] 1971년에는 주 영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1974년에는 교통부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재임 중 발생한 이리역 폭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13] 당시 여당과 야당 모두 철도청장의 책임으로 사안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최경록은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책임을 졌다.[13]

1978년 12월에는 박정희 정권 하의 제3기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 지명되어 제10대 국회의원이 되었다.[1]

2. 4. 유신정우회와 전두환 정부

1974년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1] 재직 중 발생한 이리역 폭발 사고 당시, 여당과 야당 모두 철도청장의 책임 문제로 사건을 다루려 했으나 최경록은 장관직에서 사임하며 책임을 졌다.[13] 이후 1978년 12월, 제3기 유신정우회 의원으로 지명되어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1] 1980년 8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전두환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13] 주일 대사로 임명되자, 다음 날인 8월 13일 국회사무처에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주일 대사직은 5년간 역임했다.[13]

1987년 9월 17일부터 1988년 4월 28일까지 제24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89년 1월, 일본 산케이 신문에 실린 최경록 명의의 기고문이 국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14] 이에 대해 최경록은 "육군참모총장, 교통부 장관 등 공직과 주영, 주일 대사 등 20여 년간 외교관 생활을 해 온 내가 그런 분별없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라고 반박하며 기고 사실 자체를 부인하였다.[15]

2. 5. 말년

1965년 7월 14일, 김홍일, 김재춘, 박병권, 박원빈, 백선진, 송요찬, 손원일, 장덕창, 이호, 조흥만 등 예비역 장군들과 함께 한일 협정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10] 데모로 학생과 군이 충돌하는 상황 속에서, 같은 해 8월 27일에는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11] 이 호소문에서 그는 국군 장병들이 집권자에 의해 국민이나 국가 이익에 반하는 목적으로 동원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애국 국민에게 총을 겨누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11] 8월 29일, 김홍일, 김재춘, 박병권, 박원빈 4명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명예 훼손 혐의로 체포되었고, 최경록 역시 손원일, 백선진, 조흥만과 함께 같은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12]

박정희로부터 "조국 근대화에 참여해 달라"는 끈질긴 설득을 받고 1967년 미국에서 귀국했으며,[13] 같은 해 10월 7일멕시코 대사로 임명되었다.[19] 이후 1971년에는 주 영국 대사로 부임하였다.

1974년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재직 중 이리역 폭발 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여당과 야당 모두 철도청장의 책임으로 보는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13] 장관직에서 사임하며 책임을 졌다.

1978년 12월, 제3기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 지명되어 제10대 국회의원이 되었다.[1] 이후 전두환의 거듭된 요청에 의해,[13] 1980년 8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주일 대사로 임명되었고, 다음 날인 8월 13일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주일 대사직은 5년간 역임했다.[13]

1987년 9월 17일부터 1988년 4월 28일까지 제24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을 지냈다.

1989년 1월, 일본 산케이 신문에 실린 최경록 명의의 기고문이 국내에서 논란을 일으켰으나[14], 최경록 본인은 "육군참모총장, 교통부 장관 등 공직과 주영, 주일 대사 등 20여 년간 외교관 생활을 해 온 내가 그런 분별없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해당 기고문에 대해 부인했다.[15]

2002년 9월 3일 향년 83세로 별세하였다.[20][21][22] (일부 자료에서는 9월 2일 사망으로 기록하기도 했다.[8]) 배우자 전자순 여사와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20][21][22]

3. 가족 관계

배우자 전자순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4. 학력

5. 상훈


  • 을지 무공 훈장
  • 충무 무공 훈장
  • 수교훈장 광화장
  • 청조근정훈장
  • 레지옹 도뇌르 - 1961년 4월 11일

6. 역대 선거 결과

wikitext

연도선거 종류대수직책선거구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78년총선10대국회의원통일주체국민회의유신정우회지명지명당선초선


참조

[1] 웹사이트 최경록(崔慶祿) https://encykorea.ak[...] 2023-08-15
[2] 뉴스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 수 없다 http://www.jejusori.[...] 2014-03-27
[3]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4]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5] 간행물 제주4・3사건자료집5[군경자료편1] http://43archives.or[...]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6] 웹사이트 헌병소개 > 역대지휘관 (憲兵紹介 >歴代指揮官) http://www.mp.mil.kr[...] 대한민국육군헌병 2019-08-04
[7] 뉴스 (354)전시하의 정치파동(3) https://news.joins.c[...] 2019-08-04
[8] 뉴스 [전우광장]제13대 육군참모총장 최경록 장군 별세 http://kookbang.dema[...] 2018-02-20
[9] 뉴스 5·16 때 대구 2군사령부에서도 군 출동 있었다 http://news.joins.co[...] 2016-01-04
[10] 뉴스 반공 목사들이 박정희에게 정면으로 반기 든 사연 http://www.pressian.[...] 2019-08-04
[11] 뉴스 각하들도 피하지 못한 내란의 추억 http://www.hani.co.k[...] 2019-08-04
[12] 간행물 코리아평론 코리아평론사 1965-10
[13] 뉴스 [故 최경록 전 육참총장]"내 탓이오"했던 청렴한 공직자 https://news.joins.c[...] 2020-04-21
[14] 뉴스 최경록 전주일대사 일지 기고문 파문|"일본군 강화…아시아방파제"촉구 https://news.joins.c[...] 2020-04-21
[15] 뉴스 최경록씨 "회견내용 잘못 보도" 산케이 "본인 이의제기 없었다" https://news.joins.c[...] 2020-04-21
[16] 웹사이트 Choi Kyung Nok https://valor.milita[...] Military Times 2019-08-04
[17]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 인물과사상사
[18] 뉴스 백악관앞에서데모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63-03-22
[19] 뉴스 8大使에信任狀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67-10-07
[20] 뉴스 駐日大使 崔慶祿 씨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80-08-13
[21] 뉴스 駐日大使 崔慶祿 씨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0-08-13
[22] 뉴스 얼굴 崔慶祿 駐日大使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0-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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