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타 쓰토무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신생당, 태양당, 민정당, 민주당 등 여러 정당에서 활동했다. 1969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농림수산대신, 대장대신을 역임했으며, 1993년 신생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1994년에는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으나 64일 만에 사임했고, 이후 2010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정치 개혁을 추진하고 소선거구제 도입에 기여했으며, 201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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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 쓰토무 - 신생당 신생당은 1993년 하타 쓰토무를 중심으로 자유민주당에서 탈당한 의원들이 창당한 일본의 정당이며, 중의원 선거에서 55석을 얻어 호소카와 내각과 하타 내각에 참여했으나, 일본사회당의 연립 이탈과 무라야마 내각 출범 이후 야당으로 전락하여 1994년 신진당에 합류하며 해산되었다.
하타 쓰토무 - 하타 내각 하타 내각은 1994년 4월 28일부터 6월 30일까지 존속한 일본의 내각으로, 소수 여당 내각으로 운영되다가 내부 갈등과 불안정 속에 64일 만에 붕괴되어 전후 일본 역사상 가장 짧은 수명의 내각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의 부총리 - 오카다 가쓰야 오카다 가쓰야는 1953년 미에현 출생으로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관료, 하버드 유학 후 정계에 입문하여 중의원 의원, 여러 당의 대표와 간사장, 외무대신, 부총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입헌민주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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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출신으로 세이조 대학을 졸업했다. 1969년 12월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인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농림족 의원으로 활동하며 1985년 12월부터 1986년 7월까지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을 지냈고, 1991년에는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에서 대장대신을 역임했다.
1993년 6월 23일, 정치 개혁을 둘러싼 자민당 내 노선 갈등 끝에 오자와 이치로 등과 함께 자민당을 탈당하여 신생당을 결성하고 당수로 취임했다. 같은 해 8월 9일 출범한 비(非)자민 연립 정권인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맡았다.
이듬해인 1994년 4월 28일, 호소카와 총리의 사임으로 제80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여 하타 내각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연립 정권 파트너였던 일본 사회당이 이탈하면서 소수 여당 내각으로 전락했고, 결국 6월 25일 자민당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 가결이 확실시되자 내각 총사직을 선택했다. 재임 기간 64일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내각에 이어 전후 두 번째 최단명 총리 기록이다.
총리 퇴임 후인 1994년 12월 10일 신진당 결성에 참여하여 부당수를 맡았으며, 이후 태양당 당수, 민정당 대표, 민주당 간사장 및 특별 대표 등을 역임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2. 1. 초기 생애 (1935년-1968년)
하타 쓰토무는 1935년 8월 24일, 도쿄도오타구카마타에서 아버지 하타 무쓰시로와 어머니 도시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당시 아사히신문 기자였으나, 이후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어머니 도시는 나가노전철의 창립자인 신즈 토지페이의 딸이었다. 쓰토무(孜)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아베 지로가 "전심전력으로 일한다(孜孜として働く)"는 의미를 담아 지어주었다.
1937년, 아버지 무쓰시로가 제2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나가노현 선거구에 출마하여 35세의 나이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하타는 1942년 도쿄 세타가야 근처의 제2엔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도쿄에 대한 공습이 심해지자, 1944년 초등학교 3학년이 되기 직전 나가노현우에다시로 피난했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 무쓰시로는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우에다시에서 신문 사업 등을 시작했다.
하타는 1948년 우에다 제2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졸업 후, 정계 복귀를 준비하던 아버지와 함께 도쿄로 돌아와 세이조 학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54년에는 세이조 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학업 외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헝가리 혁명을 피해 일본으로 온 헝가리 유학생들을 돕는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8년 세이조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하타는 아버지처럼 신문기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함께 지원했던 삿포로맥주 입사도 실패했다. 결국 아버지의 인맥을 통해 같은 해 오다큐버스에 입사했다. 처음에는 도쿄 기치죠지 영업소에서 사무 업무를 보고 버스 안내원으로도 일했다. 입사 2년 후인 1960년에는 본사 관광부로 자리를 옮겨, 연령대나 목적에 맞는 다양한 관광 투어를 기획했으며, 수학여행이나 황족의 여행 기획에도 참여했다. 또한 오다큐버스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복지부장과 감사를 맡기도 했다.
1963년 11월, 아버지 무쓰시로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타는 1965년, 야스코(결혼 전 성 쓰시타)와 결혼했다. 야스코는 칼피스 제조 회장 및 도시샤 이사를 역임한 미시마 카이운의 손녀이자, 일본리켄고무(현 오카모토) 부사장을 지낸 쓰시타 쓰나페이의 장녀였다. 주변에서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정치 가문의 딸이나 선거구와 연관 있는 집안과의 결혼을 권유했지만, 하타 자신과 그의 부모는 정치 세습에 반대하며 이 결혼을 진행했다. 결혼 후 하타 부부는 두 아들을 두었다.
2. 2. 정치 경력 (1969년-1994년)
도쿄도 출신으로 세이조 대학을 졸업했다. 아버지 하타 쓰기로가 건강 악화로 정계를 은퇴하려 했으나 후계자가 없어 1967년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하타 본인과 아버지는 세습에 부정적이었으나, 후원회의 설득으로 하타가 후계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하타는 1968년 여름 입후보 의지를 굳히고, 같은 해 10월 다니던 오다큐 버스를 퇴사했다. 1969년 12월 총선거까지 약 2만 가구를 방문하며 선거 운동을 벌였고, 1969년 1월에는 후원회 '센곡회'가 발족했다.
1969년 12월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나가노현 제2선거구에 자유민주당 공인 후보로 출마하여 처음 당선되었다. 당선 동기로는 오자와 이치로, 오쿠다 케이와, 카지야마 시즈로, 와타나베 코조, 모리 요시로 등이 있었다. 아버지의 파벌(이시이 파) 대신, 선거 당시 도움을 받았고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소속된 사토 파(훗날의 다나카 파)에 가입했다.
정계 입문 초기에는 우편, 운수, 국회대책위원회 위원 등을 맡았고, 1975년 미키 다케오 내각에서 우정 정무차관을 지내며 우정족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자민당 농림부회에도 소속되어 농정에도 관여했으며, 1976년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농림 정무차관을 맡아 스즈키 젠코 농림대신을 보좌하며 쌀 생산 조정, 200해리 문제 등에 대처했다. 이를 계기로 농림족으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이후 자민당 농림부회장, 중의원 농림수산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논 타작물 재배 전환 추진, 생사 가격 인하, 미국과의 소고기·오렌지 자유화 협상 등 농정 현안에 깊이 관여했다.
1980년대에는 다나카/다케시타 파벌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1985년 2월에는 다케시타 노보루를 중심으로 한 다나카 파 내 파벌인 창정회 결성에 참여했다. 1985년 12월부터 1986년 7월까지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을 지냈다. 1991년에는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에서 대장대신을 역임했다.
1993년 6월 23일, 정치 개혁을 둘러싼 당내 노선 갈등 끝에 오랜 동지인 오자와 이치로와 함께 자민당을 탈당하여 신생당을 결성하고 당수에 취임했다. 같은 해 8월 9일 출범한 비자민 연립 정권인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맡았다.
이듬해인 1994년 4월 28일, 호소카와 총리의 사임으로 제80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여 하타 내각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연립 정권에 참여했던 일본사회당이 이탈하면서 소수 여당 내각으로 전락했고, 자민당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 가결이 확실시되자 6월 25일 내각 총사직을 발표했다. 재임 기간은 64일로, 전후 두 번째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6월 30일 사회당 대표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후임 총리로 취임했다.
짧은 총리 재임 기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진보적인 개혁 입법이 이루어졌다. 1994년 6월 17일 통과된 고령자 고용 안정법 개정안은 60세 이후 고령 근로자의 계속 고용을 장려하고, 60세 미만 정년 설정을 금지했으며, 공공기관을 고령 근로자 경험 활용 센터로 지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6월 22일에는 장애인 근로자와 고용주에게 상담, 직업 훈련, 정보를 제공하는 장애인 고용 지원센터 설립법이 통과되었다. 6월 29일 통과된 건강보험법 개정안은 육아휴직 중인 근로자의 건강보험료 납부 의무를 면제했다.[2]
1994년 12월 10일, 신생당 등이 합당하여 신진당이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여 부당수로 취임했다.
그러나 하타 내각은 출범과 동시에 연립 정권의 주요 파트너였던 일본 사회당이 연정에서 이탈하면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소수 여당 내각으로 시작하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다.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하타 내각은 몇 가지 사회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1994년 6월 17일에는 고령자 고용 안정을 위해 60세 미만의 강제 퇴직 연령 설정을 금지하고 계속 고용을 장려하는 내용의 '고령자 고용 안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6월 22일에는 장애인 근로자에게 직업 훈련과 정보를 제공하는 장애인 고용 지원센터 설립 근거를 마련했으며, 6월 29일에는 육아 휴직 중인 근로자의 국민건강보험료 납부 의무를 면제하는 건강보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2]
하지만 정권 기반이 취약했던 하타 내각은 제1야당인 자민당의 정치적 공세를 버텨내기 어려웠다. 결국 1994년 6월 25일, 자민당이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하자 하타 총리는 중의원 해산을 통한 정면 돌파 대신 내각 총사퇴를 선택했다. 이로써 하타 내각은 출범 64일 만에 막을 내렸고, 이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내각(54일)에 이어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두 번째로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한 내각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6월 30일, 일본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후임 총리로 취임했다.
2. 4. 총리 퇴임 이후 (1994년-2012년)
1994년 6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같은 해 12월 10일 신진당 결성에 참여하여 부당수로 취임했다. 이후 신진당 당수 자리를 놓고 오자와 이치로와 경쟁했으나 패배하였다. 이 패배 후, 하타는 12명의 다른 국회의원들과 함께 신진당을 탈당하여 태양당太陽党|다이요토일본어을 결성했다. 태양당은 1998년 1월 선진당에 합류했고, 선진당은 1998년 4월 민주당에 흡수되었다. 이후 하타는 민주당 간사장·특별 대표 등을 지냈다.
2. 5. 사망 (2017년)
하타는 82번째 생일을 맞이한 지 4일 후인 2017년 8월 28일, 도쿄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5]
3. 정책 및 정치적 입장
1992년 5월,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구마모토현 지사가 신당 사쿠라를 결성하고 같은 해 7월 제16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4석을 확보하며 정치적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어 8월에는 도쿄 사가와 급편 사건이 터지면서 당시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었던 다케시타파의 회장 가네마루 신이 의원직을 사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케시타파 내부에서는 오자와 이치로와 가지야마 시즈오 사이에 격렬한 권력 투쟁, 이른바 '일육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대장대신이었던 하타 쓰토무는 파벌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고부치 에이조가 새로운 회장으로 선출되자 오자와의 지지를 받아 43명의 의원과 함께 파벌 내 파벌인 '개혁포럼 21'을 결성했고, 이는 곧 하타파로 독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존 자민당 체제에 대한 반발로 해석되었으며, 1992년 12월 미야자와 개조 내각의 각료 인선 과정에서 하타파는 철저히 배제되는 등 냉대를 받았다.
초기에는 미야자와 총리와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던 하타였지만, 정치 개혁을 둘러싼 입장 차이는 점차 분명해졌다. 미야자와 총리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임시 국회 회기 내에 정치 개혁을 실현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자민당 집행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정치 개혁에 대한 미야자와 내각의 미온적인 태도에 실망한 야당은 회기 말을 앞두고 중의원에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하타를 포함한 개혁 성향 의원들이 자민당을 탈당하고 새로운 정치 세력을 모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1. 정치 개혁
하타 쓰토무는 정치 개혁에 강한 의지를 보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자민당에 소속되어 있을 때부터 중선거구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폐지를 주장했고, 소선거구제 도입을 통해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선거구제 아래에서는 진지한 정치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된다고 비판했다.
정치 자금 문제에 대해서도 개혁적인 입장을 보였다. 자금 마련을 위한 정치 파티 개최 방식에 비판적이었으며, 모든 정치 헌금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와 더불어 국회 의원 정수를 줄이고, 유권자 한 표의 가치 차이를 2배 미만으로 축소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개혁안도 제시했다. 이처럼 정치 개혁에 몰두하는 하타의 모습을 두고, 당시 자민당 부총재였던 가네마루 신은 "마치 열병 환자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3. 2. 외교 및 안보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국제적으로 이해받기 어려운 생각이라며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적극적으로 목표해야 한다고 보았다. 호소카와 내각의 외무대신 시절에는 해외의 일본 국민이 위험에 처했을 경우 자위대 함선을 파견할 수 있도록 자위대법 개정을 제안했으나, 당시 연립 여당이었던 사회당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입장을 가졌으며, 1997년 홍콩 반환 기념식에 초청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일본과 중국의 경제 협력 발전에 힘썼다. 하타는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조상이 중국에서 건너온 秦氏(신씨)라고 전해진다고 밝혔으며, 총리 퇴임 후에는 중산복을 즐겨 입고, 서복과 관련된 일본 서복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미국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으며, 미일 양국의 신뢰 관계 강화가 세계 평화와 안정에 중요하다고 보았다.
3. 3. 역사 인식
하타 쓰토무는 태평양 전쟁과 관련하여 일본이 전쟁 중 저지른 행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그는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으며, 모두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타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유에 대해 다시는 참혹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전쟁 희생자들을 위령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수상으로 재임하던 기간에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4. 평가 및 영향
하타 내각 총사퇴 후에는 자유민주당·사회당 연립정권인 무라야마 내각이 발족했다. 무라야마 내각 발족과 소선거구제 도입을 계기로 야당 사이에서는 새로운 신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모색되었고, 1994년 12월 신생당을 시작으로 일본신당, 민사당, 공명당 일부 등이 합류하여 신진당이 결성되었다.
하타는 신진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당수 선거에서는 자민당을 탈당하고 합류한 가이후 도시키에게 패배했다. 이 과정에서 오자와 이치로와의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었다. 1995년 당수 선거에서는 오자와와 직접 맞붙었으나 다시 패배했고, 이후 하타 지지 그룹은 '고우시카이(昂志会)'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후 하타는 오자와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1996년 10월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신진당이 패배했음에도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지 않는 오자와에 대한 불만 등으로 갈등이 다시 불거지면서 결국 신진당 탈당을 결심하게 되었다. 한때 탈당을 망설였지만 12월에는 호소카와 모리히로와의 회담에서 신당 결성을 시사했다. 신진당 집행부와 구 공명당, 민사당 출신 의원들이 하타를 만류했지만, 하타는 응하지 않았다.
4. 1. 긍정적 평가
하타 쓰토무는 파벌 정치와 금권 정치를 비판하며 선거 제도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 "미스터 정치 개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리쿠르트 사건 이후 정치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오자와 이치로의 설득으로 자민당 선거제도조사회장에 취임했으며, 이토 마사요시, 고토다 마사하루와 함께 "개혁 트리오"로 불리며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소선거구제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며 개혁의 선두에 섰다.
하타를 비롯한 일부 의원들의 자민당 탈당과 신생당 결성은 55년 체제의 종식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 정치의 대대적인 정계 개편을 촉발하는 데 기여했다.
인물됨에 있어서는 온화하고 조정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치학자 이노구치 다카시는 하타가 온화하고 조화로운 성격으로, 정치적 변동성이 크고 연립 정권 수립이 중요했던 시기에 총리로서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가네마루 신은 그를 오자와 이치로와 비교하며 "평시의 하타, 난세의 오자와"라고 평했으며, 언론인 다하라 소이치로는 하타가 정직하고 성실하며, 다케시타파 시절에도 적이 없었고 자민당 내에 '반(反) 하타'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평가는 그가 폭넓은 신뢰를 받는 조정형 정치인이었음을 보여준다.
4. 2. 부정적 평가
하타 내각은 단명으로 끝나 뚜렷한 실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는 일본 총리 중 가장 재임 기간이 짧았던 인물 중 한 명으로, 일본 정치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오자와 이치로와의 관계에서 '이중 권력'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하타가 총리로 취임했을 당시, 그를 오자와의 조종 인형처럼 묘사하는 풍자 만화가 그려지기도 했다.
2001년에는 후지 스피드웨이에서 민주당 홍보 차량을 운전하거나, 한일 국회의원 축구 경기에 참가하고, 아프가니스탄 난민 자선 연극에 출연하는 등의 활동을 보였는데, 이를 두고 쇼맨십을 중시한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 또한 2004년 정치인 연금 미납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하타 역시 연금 미가입 사실이 드러나 민주당 최고 고문직에서 사임하기도 했다.[15]
4. 3. 후세에 대한 영향
하타 쓰토무는 반소매 정장(에너지 절약 룩)을 즐겨 입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제2차 석유 파동을 계기로 당시 총리였던 오히라 마사요시가 제안한 것이었다. 하타는 1991년 미야자와 내각에서 재무대신에 취임한 이후 반소매 정장을 입기 시작했고, 총리 재임 중에도 자주 착용했다. 그는 자신이 'E-쿨 수트'라고 이름 붙인 반소매 재킷을 즐겨 입었으며,[4] 이러한 복장과 합리적인 지속 가능한 패션에 대한 관심은 시대를 앞서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4] 이 때문에 2005년 시작된 쿨비즈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하며, 쿨비즈를 고안한 고이케 유리코는 "쿨비즈로 이어지는 의미에서도 참고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그의 지역구인 나가노현 제3구는 '하타 왕국'으로 불릴 만큼 강력한 지지 기반을 자랑했다. 하타는 후원회 '센큐쿠카이(千曲会)'를 통해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센큐쿠카이 회원 수는 한때 10만 명에 달했으며, 2017년 기준으로도 5만 명 규모였다. 하타가 2012년 정계를 은퇴한 후에는 그의 비서였던 테라시마 요시유키가, 그 후에는 이데 요세이가 지역구를 이어받았다. 본래 하타의 후계자로는 장남이자 당시 국토교통대신이었던 하타 유이치로가 지명되었으나, 세습 금지를 내건 당시 민주당의 방침으로 인해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이데 요세이가 2018년 자민당으로 당적을 옮기기 전까지, 중선거구제 폐지 이후 나가노 3구에서 자민당 후보가 당선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센큐쿠카이는 회원 고령화와 지방 선거를 둘러싼 내부 갈등 등으로 인해 조직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타의 정치 활동은 아들에게도 이어졌다. 그의 아들 하타 유이치로(1967~2020)는 일본 참의원 의원을 지냈고, 2012년 6월에는 국토교통대신에 임명되었다.[3]
또한 하타는 2015년 언론계 원로 모임의 요청으로, 당시 아베 신조 내각이 추진하던 안보 관련 법안에 반대하는 의견을 발표하기도 했다.
5. 소속 정당
1969년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나가노현 제2구에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줄곧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엔리케 항해왕자 훈장 엔리케 항해왕자 훈장 그랜드 크로스 (1993년 12월 2일)[7][27]
루마니아의 별 국가훈장 루마니아의 별 국가훈장 그랜드 오피서 (2002년)[28]
정이위(正二位) (2017년, 사후 추서)[23]
참조
[1]
웹사이트
Man in the News; Cautious Leader in Japan: Tsutomu Hata
https://www.nytimes.[...]
1994-04-23
[2]
웹사이트
Results list of Browse by country – NATLEX
http://www.ilo.org/d[...] [3]
웹사이트
The Cabinet – Yuichiro Hata
http://www.kantei.go[...]
2012-08-15
[4]
웹사이트
Japanese Men Dress Down To Cut Summer's Energy Costs
https://www.wsj.com/[...] [5]
웹사이트
Former Prime Minister Tsutomu Hata dies at 82
https://www.japantim[...]
2017-08-28
[6]
웹사이트
Foreign dignitaries honored with spring decorations
http://www.japantime[...]
2013-05-10
[7]
웹사이트
ENTIDADES ESTRANGEIRAS AGRACIADAS COM ORDENS PORTUGUESAS – Página Oficial das Ordens Honoríficas Portuguesas
http://www.ordens.pr[...]
2019-08-15
[8]
뉴스
新生党あす「解党大会」 政界再編リードしたが消せなかった派閥体質
朝日新聞
1994-11-15
[9]
뉴스
羽田孜外相が14日からタイ・カンボジア訪問
朝日新聞
1993-09-11
[10]
뉴스
羽田外相とアラファト議長 調印式会場で米大統領が引き合わす
朝日新聞
1993-09-14
[11]
간행물
官報
https://search.kanpo[...]
1994-04-28
[12]
웹사이트
過去のサミット一覧表
https://www.mofa.go.[...]
外務省
2024-02-15
[13]
웹사이트
民主党:鳩山代表・羽田幹事長がプーチン・ロシア大統領と会談
http://archive.dpj.o[...]
2024-05-09
[14]
뉴스
民主党主要ポスト、若手を積極起用 新体制きょう発足
朝日新聞
2002-12-13
[15]
뉴스
「就任」前夜、また激震 小沢氏年金未加入で民主代表選辞退
朝日新聞
2004-05-18
[16]
뉴스
幹事会議長に鹿野道彦氏を起用 民主が党人事
朝日新聞
2004-09-12
[17]
간행물
新釈現代語源辞典
田勢康弘
1999-03
[18]
뉴스
分裂自民、激しい応酬 「新党結成」(93都議選・総選挙)
朝日新聞
1993-06-20
[19]
뉴스
羽田グループ解散へ 週明けにも協議し決定 新進党
朝日新聞
1996-07-20
[20]
뉴스
民主保守系が研究会
朝日新聞
2001-10-24
[21]
뉴스
民主ざわめく、夏合宿 9月代表選、出るか各派の対抗馬
朝日新聞
2008-07-03
[22]
뉴스
(ニュースがわからん!)民主党の「グループ」って、なぁに? 出身母体が元の集まり
朝日新聞
2009-05-15
[23]
웹사이트
故羽田元首相に従二位
https://www.nikkei.c[...]
日経新聞
2017-09-05
[24]
웹사이트
故・羽田孜元総理の民進党・羽田家の合同葬儀を執り行う
https://www.minshin.[...]
2017-09-08
[25]
웹사이트
上田市公葬(故 羽田孜氏) - 上田市ホームページ
https://www.city.ued[...] [26]
웹사이트
日韓議員連盟会員名簿
http://www.nikkan-gi[...] [27]
웹사이트
ENTIDADES ESTRANGEIRAS AGRACIADAS COM ORDENS PORTUGUESAS – Página Oficial das Ordens Honoríficas Portuguesas
http://www.ordens.pr[...] [28]
웹사이트
Cancelaria Ordinelor
https://canord.pre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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