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치야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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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치야마번은 에도 시대에 존재했던 일본의 번으로, 단바국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걸쳐 영지를 소유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단바국을 하사한 것을 시작으로, 아케치 가문의 몰락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배를 거쳐,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아리마 도요우지가 후쿠치야마에 봉해지면서 번이 성립되었다. 이후 아리마 가문, 오카베 가문, 이나바 가문, 마쓰다이라 가문을 거쳐 구쓰키 가문이 13대에 걸쳐 통치했으며, 메이지 유신으로 폐번되어 후쿠치야마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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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군은 일본 교토부에 위치한 군으로, 7세기 여사평에서 유래하여 701년 군으로 승격, 713년 단고국에 속했으며, 현재는 이네정과 요사노정 2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쿠치야마번 | |
---|---|
지도 정보 | |
![]() | |
기본 정보 | |
번 | 후쿠치야마 번 |
지방 | 탄바국 |
위치 | 교토부 후쿠치야마시 |
통칭 | 탄바 후쿠치야마 번 |
역사 | |
성립 | 1600년 |
폐지 | 1871년 |
사건 1 | 아리마 씨 |
날짜 1 | 1600년 |
사건 2 | 오카베 씨 |
날짜 2 | 1621년 |
사건 3 | 이나바 씨 |
날짜 3 | 1624년 |
사건 4 | 후코즈 마쓰다이라 씨 |
날짜 4 | 1649년 |
사건 5 | 구쓰키 씨 |
날짜 5 | 1669년 |
시대 | 에도 시대 |
다이묘 가문 | |
1600년 | 아리마 씨 |
1621년 ~ 1624년 | 오카베 씨 |
1624년 ~ 1649년 | 이나바 씨 |
1649년 ~ 1669년 | 마쓰다이라 씨 (후코즈) |
1669년 ~ 1871년 | 구쓰키 씨 |
정치 | |
정치 체제 | 다이묘 |
번주 거성 | 후쿠치야마성 |
통계 | |
현재 소속 | 교토부 |
2. 번 성립 이전
후쿠치야마 지역은 후쿠치야마번이 공식적으로 성립되기 이전, 센고쿠 시대 동안 여러 세력의 지배를 거쳤다. 1579년(덴쇼 7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가 단바국을 하사받아 일족인 아케치 히데미쓰에게 이 지역을 맡겼다. 그러나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아케치 가문은 몰락하였다.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가 단바 지역을 장악하였고, 후쿠치야마에는 그의 부하 장수들인 스기하라 이에쓰구, 오노기 시게쓰구 등이 성주로 들어왔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당시 성주였던 오노기 시게쓰구는 서군에 가담했으나 패배하여 자결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후쿠치야마 지역은 에도 막부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2. 1. 센고쿠 시대
전국 시대인 덴쇼 7년(1579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는 단바국 전체를 하사받았다. 미쓰히데는 이 지역을 자신의 일족인 아케치 히데미쓰에게 맡겨 다스리게 했다.덴쇼 10년(1582년), 미쓰히데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자, 히데미쓰는 거병에 찬성하여 아케치 군의 선봉에서 활약했다. 노부나가를 토벌한 후 아즈치성을 점령했으나, 곧이어 벌어진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패배하였다. 패배 소식을 들은 히데미쓰는 아즈치성을 포기하고 비와호를 건너는 유명한 "호수 건너기(湖水渡り)"를 감행, 오미국의 사카모토성으로 가서 미쓰히데의 미망인과 자녀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그 후 단바국은 히데요시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후쿠치야마 지역에는 그의 장수들인 스기하라 이에쓰구, 오노기 시게쓰구 등이 영주로 들어왔다. 시게쓰구는 게이초 5년(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다나베성 전투의 총대장을 맡았다. 그러나 본 전투에서 서군이 괴멸하자, 동군의 호소카와 타다오키에게 추격을 받게 되었고 결국 자결하였다.
2. 2. 혼노지의 변과 이후
센고쿠 시대인 덴쇼 7년(1579년),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단바국 전체를 하사했다. 미쓰히데는 후쿠치야마 지역을 자신의 일족이자 매형인 아케치 히데미쓰에게 맡겨 다스리게 했다.덴쇼 10년(1582년), 미쓰히데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자(혼노지의 변), 히데미쓰는 미쓰히데의 거병에 찬성하여 아케치 군의 선봉에서 활약했다. 히데미쓰는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를 토벌한 후 아즈치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곧이어 벌어진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패배하자, 히데미쓰는 아즈치성을 포기하고 비와호를 건너는 유명한 "호수 건너기(湖水渡り)"를 감행했다. 그는 오미국의 사카모토성으로 가서 미쓰히데의 처자식을 살해하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그 후 단바국 지역은 히데요시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후쿠치야마에는 히데요시의 장수들인 스기하라 이에쓰구, 오노기 시게쓰구(오노기 기미사토) 등이 성주로 들어왔다. 시게쓰구는 게이초 5년(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다나베성 전투의 총대장을 맡았다. 그러나 본 전투에서 서군이 괴멸하자, 동군의 호소카와 타다오키에게 추격을 받아 결국 자결하였다.
2. 3. 히데요시의 지배
전국 시대인 1579년(덴쇼 7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는 단바 지역을 평정한 공으로 이 땅을 하사받았다. 미츠히데는 후쿠치야마 지역을 자신의 일족이자 매형인 아케치 히데미쓰에게 맡겨 다스리게 했다.1582년(덴쇼 10년), 미츠히데가 주군인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어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을 때, 히데미쓰는 거병에 찬성하며 아케치 군의 선봉에 서서 노부나가를 공격하고 아즈치성을 점령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츠히데가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배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히데미쓰는 아즈치성을 포기하고 비와호를 건너는 유명한 "호수 건너기(湖水渡り)"를 감행하여 오미의 사카모토성으로 후퇴했다. 그곳에서 그는 미츠히데의 처자식을 살해한 뒤 자신도 자결하며 생을 마감했다.
아케치 가문이 몰락한 후, 단바 지역은 히데요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후쿠치야마 지역에 자신의 부하 장수들인 스기하라 이에츠구와 오노기 시게츠구(오노 키미사토) 등을 성주로 임명했다.
1600년(게이초 5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당시 후쿠치야마 성주였던 오노기 시게츠구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끄는 서군에 가담했다. 그는 인근 다나베성을 공격하는 다나베성 전투에서 서군의 총대장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서 서군이 동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전세는 기울었다. 결국 시게츠구는 동군 소속의 호소카와 타다오키 군대의 추격을 받게 되었고, 패배를 직감하고 자결하였다. 이로써 히데요시 시대 후쿠치야마 지역의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2. 4. 세키가하라 전투
아케치 미쓰히데 사후 하시바 히데요시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쿠치야마에는 스기하라 이에쓰구, 오노기 시게카츠 등이 성주로 들어왔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당시 후쿠치야마 성주였던 오노기 시게카츠는 서군에 가담하였다. 그는 다나베성 전투에서 서군의 총대장을 맡았으나,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서 서군이 동군에게 패배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결국 시게카츠는 동군의 호소카와 타다오키 군대의 추격을 받아 자결하였다.3. 번 성립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한 공으로 아리마 도요우지가 도토미국 요코스카번 3만 석에서 후쿠치야마 6만 석으로 영지를 옮겨 받아 후쿠치야마번이 처음 세워졌다. 1602년 아버지 아리마 노리요리의 영지 2만 석까지 상속받아 총 8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도요우지는 오사카 전투에서의 공으로 1620년 지쿠고국 구루메번 20만 석으로 옮겨갔다.
아리마 가문 이후 후쿠치야마번은 짧은 기간 동안 번주가 자주 바뀌었다. 잠시 후시미 봉행 고보리 마사카즈가 관리하다가, 1621년 단바 가메야마번에서 오카베 나가모리가 5만 석으로 들어왔으나 1624년 미노국 오가키번으로 옮겨갔다. 뒤이어 셋쓰국 나카지마번에서 이나바 노리미치가 4만 5700석으로 부임했지만, 폭정을 일삼고 이웃 번주와의 갈등 끝에 모반 혐의를 받아 1648년 개역당하고 자결하였다.
반년 간의 막부 직할령 시기를 거쳐 1649년 미카와국 가리야번에서 마쓰다이라 타다후사가 4만 5900석으로 들어왔다. 타다후사는 번 내 토지 제도의 기초가 된 검지(마쓰다이라 검지)를 실시했으며, 1669년 히젠국 시마바라번 7만 석으로 옮겨갔다.
같은 해 히타치국 쓰치우라번에서 구쓰키 다네마사가 3만 2천 석으로 들어온 이후, 구쓰키 가문이 13대에 걸쳐 메이지 유신까지 후쿠치야마번을 통치하며 번정을 안정시켰다. 구쓰키 가문 시대에는 재정난과 농민 봉기가 자주 발생하기도 했으나, 구쓰키 마사츠나와 같이 난학 연구를 장려한 문인 번주도 배출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으로 후쿠치야마번은 폐지되고 후쿠치야마현이 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도요오카현에 통합되었고, 1876년 8월 21일 최종적으로 교토부에 편입되었다.
3. 1. 아리마 가문 통치 (1600년 ~ 162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아리마 도요우지는 도토미국 요코스카번 3만 석에서 후쿠치야마 6만 석으로 가증 이봉(加增移封)되어 후쿠치야마번이 입번(立藩)하였다. 게이초 7년(1602년)에 아버지 아리마 노리요리가 사망하자, 도요우지는 아버지가 셋쓰국 산다번에서 지행(知行)하던 2만 석도 상속받아 총 8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아리마 도요우지는 후쿠치야마 성과 조카마치를 건설하고 토지 조사를 실시하는 등 번의 기초를 다졌다. 이후 오사카 전투에서도 도쿠가와 측에서 무공을 세웠기 때문에, 겐나 6년(1620년) 윤12월에 20만 석으로 가증되어 지쿠고국 구루메번으로 이봉(移封)되었다.
3. 2. 막부 직할령 (1620년 ~ 1621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운 아리마 토요우지는 겐나 6년(1620년) 윤12월, 지쿠고 구루메번 20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면서 이봉되었다. 아리마 토요우지가 떠난 후 후쿠치야마번은 잠시 막부 직할령이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에는 후시미부교였던 고보리 마사카즈가 통치를 맡았다. 이 상태는 겐나 7년(1621년) 8월까지 약 반년 정도 이어졌다.3. 3. 오카베 가문 통치 (1621년 ~ 1624년)
1620년 아리마 도요우지가 지쿠고 구루메번으로 옮겨간 후, 잠시 후시미 봉행이었던 고보리 마사카즈가 후쿠치야마 지역을 관리했다.[1]겐나 7년(1621년) 8월, 단바 가메야마번에서 오카베 나가모리가 5만 석으로 들어왔다.[1][2] 그러나 오카베 나가모리의 통치는 약 3년 만에 끝났고, 간에이 원년(1624년) 9월에 그는 미노 오가키번으로 이봉되었다.[1][2]
3. 4. 이나바 가문 통치와 개역 (1624년 ~ 1648년)
간에이 원년(1624년) 9월, 오카베 나가모리가 미노 오가키번으로 옮겨간 후, 셋쓰나카지마번에서 이나바 노리미치가 4만 5700고쿠다카 석으로 후쿠치야마번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나바 노리미치는 악정을 펼쳤으며, 인접한 단고 미야즈번의 번주 교고쿠 다카히로에 대해 편집증을 보이며 1,500명의 군사를 일으켜 침략을 계획했다. 막부는 즉시 개입하였고, 후쿠치야마성에서 궁지에 몰린 이나바 노리미치는 게이안 원년(1648년) 8월, 총으로 자결하였다. 이로 인해 이나바 가문은 개역되었다.3. 5. 막부 직할령 (1648년 ~ 1649년)
셋쓰 나카지마번 출신의 번주 이나바 노리미치는 악정과 이웃한 단고 미야즈번의 번주 교고쿠 다카히로에 대한 편집증적 의심으로 군대를 동원해 침공하려 했다. 이 계획이 막부에 알려지자 게이안 원년(1648년) 8월, 막부의 개입으로 후쿠치야마 성에서 궁지에 몰린 그는 결국 자결하였고 번은 개역되었다. 이나바 노리미치의 개역 이후 후쿠치야마번은 약 반년 동안 쇼군 직할령(막부 직할령)이 되어 막부의 직접 통치를 받았다. 이 막부 직할 통치는 게이안 2년(1649년) 2월 28일, 미카와 가리야번에서 마쓰다이라 타다후사가 4만 5900석으로 새로 부임하면서 끝났다.3. 6. 마쓰다이라 가문 통치 (1649년 ~ 1669년)
이나바 노리미치가 게이안 원년(1648년) 8월에 개역된 후, 후쿠치야마번은 약 반년 동안 막부 직할령으로 관리되었다. 이후 게이안 2년(1649년) 2월 28일, 미카와국 가리야번에서 마쓰다이라 타다후사가 4만 5900석의 고쿠다카로 후쿠치야마번에 부임하였다. 타다후사는 번 통치 기간 동안 새로운 토지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 조사는 이후 메이지 시대까지 계속 사용될 정도로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그는 간분 9년(1669년) 6월 8일, 히젠국 시마바라번으로 7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면서 옮겨가게 되었다. 타다후사가 떠난 후에는 히타치국 쓰치우라번에서 쿠츠키 타네마사가 3만 2천 석으로 후쿠치야마번에 들어와 쿠츠키씨의 통치가 시작되었다.3. 7. 구쓰키 가문 통치 (1669년 ~ 1871년)
간분 9년(1669년) 6월 8일, 번주 마쓰다이라 타다후사가 히젠 시마바라번으로 7만 석으로 가증 이봉되었다. 대신 히타치 쓰치우라번에서 구쓰키 타네마사가 3만 2천 석으로 후쿠치야마번에 들어왔다. 이후 구쓰키 가문은 13대에 걸쳐 메이지 유신까지 후쿠치야마번을 지배하며 번정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 시기 번의 재정은 불안정했고, 농민 봉기가 자주 발생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으며, 일부 번주들은 난학 연구를 장려하기도 했다.메이지 4년(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 정책에 따라 후쿠치야마번은 폐지되고 후쿠치야마현이 설치되었다. 같은 해 10월 2일에는 도요오카현에 통합되었으며, 메이지 9년(1876년) 8월 21일 최종적으로 교토부에 편입되었다.
3. 7. 1. 구쓰키 가문의 번정 개혁과 난학 장려
마쓰다이라 다다후사가 1669년 시마바라 번으로 옮겨간 후, 히타치 국 쓰치우라 번에서 온 구쓰키 다네마사가 후쿠치야마 번주가 되었다. 다네마사의 아버지 구쓰키 다네쓰나는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측근으로 오코쇼반토, 소샤반 등을 역임하여 특별히 후대받아 후다이 다이묘가 되었기에, 구쓰키 가문의 역대 번주 중 다수가 막부의 소샤반, 오코쇼반토, 지샤부교 등의 요직을 맡았다.그러나 번의 재정은 초대 번주 구쓰키 다네마사 시절부터 이미 어려움을 겪어, 겐로쿠 4년(1691년)에는 5년에 걸쳐 번사들의 봉록을 절반으로 줄이는 반지(半知)를 시행해야 했다. 5대 번주 구쓰키 토우츠나 시대에는 교호 대기근이 발생하여 식량난이 심각해졌고, 이는 결국 농민들이 봉기하는 '교호의 강소' 사건으로 이어져 번 내는 혼란에 빠졌다. 한편 토우츠나는 아케치 미츠히데를 기리는 어령법회(御霊法会)를 허가하여 미타마마츠리가 시작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역대 번주 중 제7대 구쓰키 노부츠나와 제8대 구쓰키 마사츠나는 학문에 조예가 깊은 문인 다이묘로 알려졌다. 노부츠나는 『의독어(擬独語)』를 저술하여 번의 교육기관인 번교 창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특히 마사츠나는 서양 학문인 난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오오츠키 겐타쿠와 같은 난학자 및 나가사키 데지마의 카피탄과 활발히 교류하며 난학 연구를 장려하고 지원했다. 스기타 겐파쿠의 유명한 의학 서적인 『해체신서』 간행을 재정적으로 도왔으며, 오오츠키 겐타쿠가 저술한 난학 입문서 『난학계제』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또한 직접 서양 지리에 관한 『태서여지도설』, 고대 화폐를 연구한 『고금천화감(古今泉貨鑑)』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중요한 저술을 남겨 당시 일본의 난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제9대 번주 구쓰키 토모츠나 역시 영지민의 교화를 목적으로 『바위틈의 물(岩間の水)』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처럼 구쓰키 가문 시대에 학문, 특히 개방적인 난학을 장려하는 등 긍정적인 노력도 있었지만, 후쿠치야마번의 고질적인 재정난은 해결되지 못했다. 재정 재건을 위한 번정 개혁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으나, 가혹한 정책에 반발한 농민들의 강소가 끊이지 않아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앞서 언급된 교호 연간의 봉기와 막말 만엔 원년(1860년)에 일어난 강소는 그 규모가 매우 커서 번 통치에 큰 부담을 주었다.
3. 8. 메이지 유신과 폐번치현
막말 시대의 마지막 다이묘인 쿠츠키 모리쓰나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친 도쿠가와 군대가 패배하자, 황실 군대에 항복하였다.메이지 4년(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이 시행됨에 따라 후쿠치야마번은 폐지되고 후쿠치야마현이 설치되었다. 같은 해 10월 2일, 후쿠치야마현은 토요오카현에 통합되었다. 이후 메이지 9년(1876년) 8월 21일, 토요오카현이 폐지되면서 해당 지역은 교토부에 편입되었다.
폐번치현 이후 쿠츠키 모리쓰나는 도쿄로 이주하였으며,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의 이전 가신들을 위한 구제 조치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그의 아들인 자작 쿠츠키 츠나사다는 일본 제국 육군 소장 및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며, 화약 연구자로서도 알려졌다.
4. 역대 번주
후쿠치야마번은 에도 시대 동안 여러 가문이 번주를 역임했다. 초기에는 도자마 다이묘인 아리마 가문(6만 석 → 8만 석)이 다스렸으나, 겐나 6년(1620년)에 구루메번으로 이봉하면서 잠시 막부령(천령)이 되었다. 이후 후다이 다이묘인 오카베 가문(5만 석)이 잠시 통치하다 오가키번으로 옮겨갔고, 도자마 다이묘인 이나바 가문(4만 5700석)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나바 노리미치가 게이안 원년(1648년)에 자살하면서 개역되어 다시 막부령이 되었다. 게이안 2년(1649년)에는 후다이 다이묘인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4만 5900석)이 들어왔으나, 간분 9년(1669년)에 시마바라번으로 이봉하였다. 최종적으로는 같은 해 후다이 다이묘인 구쓰키 가문(3만 2천 석)이 번주가 되어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이 이루어질 때까지 후쿠치야마번을 통치했다.
각 가문별 상세한 번주 목록과 내용은 아래 하위 문서를 참조하라.
4. 1. 아리마 가문 (도자마 다이묘, 6만 석 → 8만 석)
대 | 이름 | 관위 | 재임 기간 | 비고 |
---|---|---|---|---|
1대 | 아리마 토요우지(有馬豊氏) | 종4위하 현번두, 시종 | 게이초 5년 (1600년) 12월 3일 ~ 겐나 6년 (1620년) 12월 8일 | 이봉(移封) |
4. 2. 오카베 가문 (후다이 다이묘, 5만 석)
wikitext
4. 3. 이나바 가문 (도자마 다이묘, 4만 5700석)
이나바 가문은 도자마 다이묘로서 고쿠다카 4만 5700석을 받았다.
- '''이나바 노리미치'''(稲葉紀通|이나바 노리미치일본어) (1603년 ~ 1648년): 간에이 원년(1624년) 9월에 번주로 취임하였다. 관위는 종5위하 아와지노카미였다. 게이안 원년(1648년) 8월 20일에 자살하였고, 이로 인해 이나바 가문은 개역되었다.
4. 4. 마쓰다이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 4만 5900석)
후코즈 마쓰다이라가가 후다이 다이묘로서 4만 5900석으로 번을 다스렸다.대 | 이름 | 관위 | 석고 | 재임 기간 | 비고 |
---|---|---|---|---|---|
1대 | 마쓰다이라 다다후사(松平忠房) | 종5위하 주전두(主殿頭) | 4만 5900석 | 게이안 2년 (1649년) 2월 28일 ~ 간분 9년 (1669년) 6월 8일 | 시마바라번으로 이봉(移封) |
4. 5. 구쓰키 가문 (후다이 다이묘, 3만 2천 석)
wikitext대 | 이름 | 관위 | 재임 기간 | 비고 |
---|---|---|---|---|
1대 | 구쓰키 다네마사 | 종5위하 이요노카미 | 간분 9년 (1669년) 6월 8일 ~ 호에이 5년 (1708년) 6월 25일 | 소샤반 |
2대 | 구쓰키 다네모토 | 종5위하 민부대보 | 호에이 5년 (1708년) 6월 25일 ~ 교호 6년 (1721년) 11월 24일 | 소샤반 |
3대 | 구쓰키 다네쓰나 | 종5위하 이요노카미 | 교호 6년 (1721년) 12월 25일 ~ 교호 11년 (1726년) 5월 5일 | |
4대 | 구쓰키 다네하루 | 종5위하 토사노카미 | 교호 11년 (1726년) 5월 11일 ~ 교호 13년 (1728년) 11월 23일 | 오코쇼구미반토(御小姓組番頭) |
5대 | 구쓰키 토우츠나 | 종5위하 토사노카미 | 교호 13년 (1728년) 11월 23일 ~ 메이와 7년 (1770년) 8월 30일 | 소샤반, 지샤부교 |
6대 | 구쓰키 쓰나사다 | 종5위하 오오이노카미 | 메이와 7년 (1770년) 10월 24일 ~ 안에이 9년 (1780년) 8월 6일 | |
7대 | 구쓰키 노부쓰나 | 종5위하 이요노카미 | 안에이 9년 (1780년) 8월 22일 ~ 덴메이 7년 (1787년) 9월 19일 | |
8대 | 구쓰키 마사쓰나 | 종5위하 오미노카미 | 덴메이 7년 (1787년) 11월 22일 ~ 간세이 12년 (1800년) 4월 9일 | |
9대 | 구쓰키 도모쓰나 | 종5위하 토사노카미 | 간세이 12년 (1800년) 4월 9일 ~ 교와 2년 (1802년) 12월 20일 | 소샤반 |
10대 | 구쓰키 쓰나카타 | 종5위하 토사노카미 | 교와 3년 (1803년) 1월 12일 ~ 분세이 3년 (1820년) 6월 3일 | |
11대 | 구쓰키 쓰나에다 | 종5위하 오키노카미 | 분세이 3년 (1820년) 6월 6일 ~ 덴포 7년 (1836년) 5월 28일 | |
12대 | 구쓰키 쓰나하루 | 종5위하 오미노카미 | 덴포 7년 (1836년) 7월 29일 ~ 게이오 3년 (1867년) 2월 25일 | 소샤반 2회 역임 |
13대 | 구쓰키 모리쓰나 | 종5위하 오미노카미 | 게이오 3년 (1867년) 4월 17일 ~ 메이지 4년 (1871년) 7월 15일 | 폐번치현으로 지번사가 됨 |
5대 번주 토우츠나부터 11대 번주 츠나에다까지는 토우츠나 계통과 6대 번주 츠나사다 계통이 서로 번갈아가며 순양자(順養子)를 통해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 12대 번주 츠나하루는 혼다 가문에서 온 양자였으며, 10대 번주 츠나카타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다. 츠나하루의 아들인 13대 번주 모리츠나는 츠나카타의 조카딸을 정실로 삼았다.
5. 에도 막부 말기의 영지
대부분의 번 영지와 마찬가지로, 후쿠치야마번은 정기적인 지적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생산량을 기반으로 할당된 ''고쿠다카''에 맞춰 여러 지역에 분산된 영지로 구성되었다.[4][5] 에도 막부 말기의 구체적인 영지 구성은 다음과 같다.
참조
[1]
서적
江戸三百藩大全 全藩藩主変遷表付
Kosaido Publishing
2015
[2]
서적
藩と城下町の事典―国別
Tokyodo Printing
2004
[3]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 Dictionary of Japan
Tuttle (reprint) 1972
[4]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5]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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