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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린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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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린샤는 1933년생 브라질의 축구 선수로,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휜 다리를 가졌지만 '드리블의 황제'로 불리며 1958년과 1962년 FIFA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보타포구를 중심으로 클럽 경력을 보냈고, 국가대표팀에서 50경기에 출전했다. 뛰어난 드리블 실력과 엔터테인먼트 능력으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으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간경변으로 1983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1962년 월드컵에서 골든 볼과 골든 부트를 수상했으며, FIFA 월드컵 올스타 팀에 두 번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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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린샤
기본 정보
가린샤, 1962년 FIFA 월드컵에서 브라질 선수로 뛰고 있다.
본명마누엘 프란시스코 도스 산토스
출생일1933년 10월 28일
출생지마제,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
사망일1983년 1월 20일
사망지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
신장1.69m
포지션오른쪽 윙어
애칭가린샤, 마네, 다리가 굽은 천사
클럽 경력
유소년 클럽EC 파우 그란데 (1947–1952)
Cruzeiro do Sul FC (1949–1950)
프로 클럽세라노 (1951)
보타포구 (1953–1965), 238경기 84골
코린치안스 (1966), 4경기 0골
아틀레티코 주니어 (1968), 1경기 0골
플라멩구 (1968–1969), 5경기 0골
올라리아 (1972), 6경기 0골
총 출장 및 득점254+경기 84+골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팀브라질 (1955–1966), 50경기 12골
수상 내역
FIFA 월드컵우승: 1958년 스웨덴
우승: 1962년 칠레
남미 선수권 대회준우승: 1957년 페루
준우승: 1959년 아르헨티나

2. 생애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가 휘어지고 다리 길이도 달랐던 가린샤는, 이 때문에 수비수들이 막기 힘든 특이한 드리블을 구사하여 '드리블의 황제'로 불렸다. 그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1958년1962년 월드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며, 프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타포구에서 보냈다. 아이큐가 낮아 축구는 매우 잘했지만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몰랐고, 갑작스러운 유명세로 인해 번 돈을 술을 마시는 데 탕진했다. 그 결과 은퇴 후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간경변으로 1983년 1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55년부터 1966년까지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50경기에 출전했으며, 1958년, 1962년, 1966년 월드컵에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브라질은 그가 출전한 경기에서 단 한 경기만 졌는데, 이는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헝가리에게 패한 경기였다. 이 경기는 가린샤가 국가대표팀에서 마지막으로 출전한 경기였다. 펠레는 헝가리전을 뛰지 않았고, 가린샤와 펠레가 함께 출전했을 때 브라질은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첫 번째 출전은 1955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칠레를 상대로 한 경기였다. 코파 아메리카 1957년 대회와 1959년 대회에 출전해 브라질은 두 대회 모두 준우승을 차지했다.

마라카낭에 있는 가린샤의 흉상


축구장에서의 성공과 달리, 가린샤의 사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성인 시절 내내 술을 많이 마셨고, 여러 차례 심각한 교통사고를 겪었다. 특히 1969년 4월 트럭과의 충돌로 장모가 사망했다.[37] 1952년 파우 그란데 출신의 공장 노동자 나이르 마르케스와 결혼하여 8명의 딸을 두었고(1965년에 별거), 1966년 3월에는 삼바 가수 엘자 소아레스와 비공식적으로 결혼했다. 소아레스 역시 이전에 결혼한 적이 있었고, 이 결혼으로 가린샤는 한때 그를 칭송했던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13] 1977년, 소아레스가 그와의 말다툼 중 그에게 맞은 후 그를 떠나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다. 가린샤는 쇼걸 안젤리타 마르티네스와의 관계를 포함하여 다른 중요한 관계를 맺었으며, 최소 14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13]

재정적, 결혼 문제 이후 가린샤는 1983년 1월 20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알코올성 혼수상태로 간경화로 사망했다.[32] 전년도에 8번이나 입원했으며, 사망 당시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폐인이 되었다. 그의 말년은 불행하고 초라했다. 잊혀진 영웅이 된 듯했지만, 그의 장례 행렬은 마라카낭에서 파우 그란데까지 수백만 명의 팬, 친구, 전직 선수들을 끌어모아 그를 추모했다.[9] 그의 묘비명에는 "여기에 인민의 기쁨이었던 자 - 마네 가린샤가 평화롭게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3] 사람들은 벽에 "''Obrigado, Garrincha, por você ter vivido'' (가린샤, 당신이 살아줘서 고마워요)"라고 적었다.[39]

브라질리아에 있는 다목적 경기장인 에스타디우 나시오날 마네 가린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의 경력은 1962년 영화 ''가린샤, 알레그리아 도 포보''에, 2003년에는 루이 카스트루의 책을 바탕으로 한 또 다른 영화 ''가린샤 – 에스트렐라 솔리타리아''(외로운 별)에서 그의 삶을 보여주었다.

에스타디우 나시오날 마네 가린샤 in 브라질리아

2. 1. 어린 시절

가린샤는 1933년 히우 지 자네이루 주 마제 구역인 파우 그란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인디오였고, 어머니는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출신 혼혈아였다.[78] 그는 오른쪽 다리가 왼쪽보다 6cm 짧았고, 왼쪽 다리는 밖으로, 오른쪽 다리는 안으로 굽어, 한 의사는 그를 어린 시절에 불구로 판정했다.[11][12] 6세 때 소아마비를 앓았는데, 가난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무명의 젊은 의사에게 무료 수술을 받았다.[79] 그 결과 척추가 S자로 굽고 양쪽 다리가 같은 방향으로 꼬이는 등, 지적 장애와 함께 소아마비의 영향으로 다리 길이도 달라지는(오른쪽 다리가 6cm 더 김) 핸디캡을 안게 되었다.[76][81]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카샤사를 많이 마셨고, 가린샤도 이 문제를 물려받았다.[13] 그는 태평한 태도를 가진 소년이었고, 또래 아이들보다 작았는데, 그의 누나 로사가 그가 작은 새만하다고 말하며, 작은 갈색 새인 굴뚝새의 북동부 이름인 "가린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14] 이 이름은 굳어져서 4살 무렵부터 가족과 친구들에게 가린샤로 알려졌다. 가린샤는 친구들 사이에서 '''마네''' (''마누엘''의 줄임말)로도 알려졌다.[15] "마네 가린샤"라는 이름은 브라질 팬들 사이에서 흔히 쓰인다.

"가린샤"라는 별명은 누나가 "미소사자이처럼 작다"고 평한 데서 유래되었다[80][76]는 설과, 고무 새총으로 미소사자이를 잡는 놀이를 잘해서[81]라는 설이 있다.

가린샤는 파우 그란데의 자연환경 속에서 자유롭게 자라며 사냥과 낚시에 재능을 보였고, 축구에서도 특이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핸디캡을 가진 휜 다리가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을 만들어내[80][82], 어느새 거리에서 최고의 드리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83] 공부를 싫어했던 가린샤는 초등학교를 2년 만에 중퇴했고,[84] 14세 때 파우그란데의 제직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직무 태만을 이유로 한 번 해고되었다.[83] 나중에 사장이 공장의 축구 클럽 "에스포르치 클루비 파우 그란데"에서 플레이하게 하기 위해 복직시키기도 했다.[83]

한편 자신은 축구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고,[85] 1950년 FIFA 월드컵 결승 리그 최종전인 우루과이전에서 브라질이 패하여 우승을 놓쳤을 때 (마라카낭의 비극)도 세상의 소란을 뒤로하고 낚시를 하러 갔으며, 이 경기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85] 또한, 가린샤의 플레이를 본 사람들이 그 실력을 인정하여 자신의 클럽에서 플레이하도록 권유하거나, 리우데자네이루를 연고지로 하는 빅 클럽의 입단 테스트를 받도록 권했지만, 본인은 내키지 않아, 어떤 때는 스파이크를 잊어 테스트를 거절당하거나, "돌아가는 열차 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라고 중간에 귀가해 버리기도 했다.[85]

2. 2. 클럽 경력

가린샤는 어릴 때 앓은 소아마비로 다리가 휘어지고 길이도 달랐지만, 이 때문에 수비수들이 막기 힘든 특이한 드리블을 구사하며 '드리블의 황제'로 불렸다. 그는 프로 축구 선수 생활 대부분을 브라질 클럽 보타포구에서 보냈다.

가린샤는 보타포구에서 12년 동안 뛰면서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 3번 우승했고, 581경기에서 232골을 기록하며 구단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1966년 선수 경력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자 코린치앙스로 이적했다. 2년 후 콜롬비아 팀 아틀레티코 주니어와 계약했고, 같은 해 브라질로 돌아와 플라멩구에 합류하여 1969년까지 활동했다. 1972년 올라리아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지만, 1982년까지 가끔 친선 경기에 출전했다.

가린샤는 1954년 그를 영입하려 했던 이탈리아 토리노의 유벤투스를 비롯한 여러 부유한 유럽 클럽들의 이적 제안 대상이었다. 1959년에는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가 유럽 투어에서 그의 놀라운 활약을 본 후 영입을 시도했다. 1963년에는 이탈리아의 인테르나치오날레, AC 밀란, 유벤투스가 공동으로 그를 영입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각 팀에서 한 시즌씩 보내는 방식).

2. 2. 1. 보타포구 FR

가린샤는 1953년 보타포구와 계약했을 때 이미 결혼하여 아이가 있었다. 구단 관계자들은 그가 18세 이상이고 프로 선수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17] 19세 때인 1953년 6월 10일[86], 보타포구 FR에 소속된 수비수 아라시 페드루 비아나의 설득으로 보타포구 입단 테스트를 겸한 연습에 참가했다. 이미 19세라는 나이에 도달했기 때문에 하부 조직 연습이 아닌, 1군 팀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때 당시 브라질 대표팀 수비수 니우통 산투스가 연습 상대가 되었지만, 이를 트릭 드리블(알까기)로 여러 번 농락했다.[85] 니우통 산투스는 "그와 즉시 계약해 주세요. 그를 마크하는 것은 사절입니다."라고 보타포구 임원에게 직접 이야기했고, 클럽 간부도 가린샤의 재능을 두려워하여, 그날 안에 계약에 이르렀다.[86] 첫 훈련에서 그는 16번의 A매치를 치른 브라질 국가대표 수비수이자 수비형 미드필더인 닐톤 산토스의 다리 사이로 공을 드리블하는 훌륭한 기술을 선보였다. 산토스는 젊은 가린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보타포구가 그를 영입하도록 요청했다.[17]

가린샤가 1964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친선 토너먼트인 코파 이베로아메리카나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2–0으로 승리하는 경기에서 보타포구 소속으로 뛰고 있다.


보타포구에서 데뷔전은 같은 해 7월 19일 리우데자네이루 주 선수권의 본세소 FC전이었다.[86] 이 경기에서 오른쪽 윙으로 선발 출전한 가린샤는 1-2로 열세였지만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6-3 역전승에 기여[86]했고,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보타포구의 2군 경기에서 5–0 승리를 거둔 후, 1953년 7월 19일 봉수세소를 상대로 한 1군 데뷔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가린샤는 계속해서 훌륭한 활약을 펼쳤지만, 브라질에는 그의 포지션에 줄리뇨를 비롯한 다른 재능 있는 선수들이 있었다. 1957년 리우데자네이루 주 선수권에서는 우승이 걸린 플루미넨세 FC와의 일전에서 4어시스트의 활약을 펼쳤다. 6-2 스코어로 플루미넨세를 꺾고 우승에 기여하여 클럽에 9년 만의 타이틀 획득을 이끌었다. 그는 보타포구가 1957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 26경기에서 20골을 기록하며 득점 순위 2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1962년 월드컵 이후 가린샤는 리우로 돌아와 1962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결승전에서 플라멩구를 상대로 보타포구를 승리로 이끌었다.[17]

가린샤는 프로 데뷔 전과 마찬가지로 오른쪽 측면에 위치하며 드리블로 상대를 농락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고수하며, 상대를 교묘한 드리블로 조롱하는 것을 즐겼다. 왼쪽으로 가는 척하면서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단순한 페인트에 수비수들은 농락당했다.[75][87][88] 공에 전혀 닿지 않고, 몸만 움직여 상대를 무너뜨렸다. 상대팀은 이중, 삼중 마크로 가린샤의 드리블을 막으려 시도했지만,[75][87] 전성기 가린샤를 막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75][87][88] 가린샤가 이 페인트를 시작하면 팬들은 기뻐하며 "올레!"를 외쳤다.[87]상대 선수를 제치고 드리블하는 기술로 유명한 엔터테이너인 가린샤는 축구 경기장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올레 응원을 고무시켰다. 1958년 보타포구에서 열린 클럽 경기에서 그는 리버 플레이트 수비수 바이로에게 축구 수업을 가르치며, 끊임없이 조롱하고, 헛다리 짚기를 하고, 그를 지나쳐가자 관중석에서는 올레 응원이 터져 나왔고, 그가 공을 "잊어버리고" 바이로가 그를 쫓아가는 가운데 질주하자 올레 응원은 웃음으로 바뀌었다.[10]

1961년, 1962년에는 리우데자네이루 주 선수권 2연패에 기여,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월드컵 2연패에 기여(후술)하는 등 절정기에 있었지만, 이 무렵부터 무릎에 문제를 안게 되었다.[88] 그의 특징이었던 휜 다리는 무릎에 부담을 주었고, 무릎 연골은 격렬한 플레이마다 닳아 없어졌지만,[89] 가린샤는 "무릎 수술은 선수로서 끝나는 것과 같다"며 수술을 완강히 거부했다.[75][89]

1963년에는 무릎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매 경기 출전이 어려워졌지만,[75] 그럼에도 수술을 거부하고 미루기를 원했다. 클럽 측도 안정적인 입장료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인기 스타인 가린샤가 필요했다. 1964년에 수술을 받게 되었지만, 복귀 후에도 예전의 플레이를 되찾을 수는 없었다.[75][90] 가린샤는 프로 경력의 대부분을 보타포구에서 12년 동안 뛰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 3번 우승했고, 581경기에서 232골을 기록했으며, 구단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2. 2. 2. 보타포구 이후

가린샤는 보타포구에서 12년 동안 선수 생활 대부분을 보냈다. 보타포구에서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3회 우승을 달성했고, 581경기에서 232골을 기록하며 구단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1966년 선수 경력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자 코린치앙스로 이적했다. 2년 후 콜롬비아 팀 아틀레티코 주니어와 계약했고, 같은 해 브라질로 돌아와 플라멩구에 합류하여 1969년까지 활동했다. 1971년 38세의 가린샤가 프랑스 클럽 레드 스타에 합류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계약은 성사되지 않고 브라질에 남았다.[18]

상대 선수를 제치는 드리블 기술로 유명했던 가린샤는 축구 경기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올레 응원을 고무시킨 인물이다. 1958년 보타포구 경기에서 리버 플레이트 수비수 바이로를 상대로 끊임없이 조롱하고 헛다리 짚기를 하며 그를 지나쳐가자 관중석에서 올레 응원이 터져 나왔다. 가린샤가 공을 "잊어버리고" 바이로가 그를 쫓아가는 상황이 연출되자 올레 응원은 웃음으로 바뀌었다.[10] 가린샤는 1972년 올라리아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지만, 1982년까지 가끔 친선 경기에 출전했다.[19]

가린샤는 1954년 그를 영입하려 했던 이탈리아 토리노의 유벤투스를 비롯한 여러 부유한 유럽 클럽들의 이적 제안 대상이었다. 1959년에는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가 유럽 투어에서 그의 놀라운 활약을 본 후 영입을 시도했다. 1963년에는 이탈리아의 인테르나치오날레, AC 밀란, 유벤투스가 공동으로 그를 영입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각 팀에서 한 시즌씩 보내는 방식). 이는 축구 역사상 유례없는 계약이 될 뻔했다.

1966년 보타포구를 떠나 코린치안스, 포르투게자 다 일랴를 거쳤으며, 1968년에는 콜롬비아의 아틀레티코 주니오르에 잠시 몸담았다가 브라질로 돌아와 플라멩구로 이적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한때 수비하기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그의 드리블 실력이 사라지고, 느리고 뚱뚱한 선수로 전락했다.[75][91] 1969년 플라멩구를 떠난 후에는 소속팀이 없었지만, 1972년 오라리아 AC에서 한 시즌 동안 선수로 활동하며 은퇴했다.

2. 3. 국가대표 경력

가린샤는 1955년부터 1966년까지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50경기에 출전하여 12골을 기록했다. 1958년, 1962년, 1966년 월드컵에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브라질은 가린샤가 출전한 경기에서 단 한 번 졌는데,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헝가리에게 패한 경기였다. 이 경기는 가린샤의 국가대표팀 마지막 경기였다. 펠레와 가린샤가 함께 출전했을 때 브라질은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가린샤는 1955년 칠레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76] 1957년 남미 선수권 대회에도 출전했다.

1958년 월드컵과 1962년 월드컵에서 가린샤는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1962년 대회에서는 펠레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활약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MVP로 선정되었다. 칠레 언론 엘 메르쿠리오는 "그는 도대체, 어느 행성에서 온 것일까."[76]라고 평하기도 했다. 1966년 월드컵에서는 부상으로 인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브라질은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2. 3. 1. 1958년 FIFA 월드컵

가린샤는 1958년 월드컵 결승전이 시작되기 열흘 전인 5월 29일, 이탈리아에서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놀라운 골을 기록했다. 그는 수비수 4명과 골키퍼를 제치고 골라인 앞에서 멈춰 섰다가, 빈 골대에 공을 차는 대신 돌아오는 엔초 로보티를 제치고 득점을 올렸다.[20][21] 그러나 그의 놀라운 활약에도 불구하고 코치들은 그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여 불만을 품었고, 가린샤는 브라질의 첫 두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22]

하지만 그는 소련과의 세 번째 경기에 선발 출전했는데, 이 경기는 가린샤와 펠레의 데뷔전이었다. 소련은 우승 후보 중 하나였고, 브라질 선수들은 긴장했다.[15] 감독 비센테 페올라는 킥오프부터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가린샤는 오른쪽 윙에서 공을 받아 상대 선수 3명을 제치고 슛을 날렸지만 골대를 맞혔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펠레에게 기회를 만들어줬지만, 펠레의 슛은 크로스바를 맞혔다.[15] 브라질은 초반부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이 경기의 시작은 "역대 최고의 3분"이라고 불린다.[23] 브라질은 이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했다.

8강전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1-0으로 승리했는데, 멜 홉킨스는 가린샤를 "순수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현상이다. 그의 다리 때문에, 그리고 왼발과 오른발을 똑같이 잘 써서 안쪽으로 파고들거나 측면으로 돌파할 수 있어서, 그가 어디로 갈지 알기 어려웠고, 슛도 매우 강력했다."라고 묘사했다.[13]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 브라질은 초반에 0-1로 뒤졌지만, 가린샤가 오른쪽 윙에서 바바에게 크로스를 올려 동점을 만들면서 빠르게 따라 잡았다. 전반 종료 전에 가린샤는 비슷한 플레이를 펼쳐 다시 바바의 득점을 도우며 2-1로 만들었다. 브라질은 이 경기에서 승리하여 첫 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으며, 가린샤는 토너먼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대회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렸다.

가린샤는 경기의 '세부 사항'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월드컵 우승을 축하할 때, 그는 이 대회가 리그와 비슷해서 브라질이 다른 모든 팀과 두 번씩 경기를 치를 것이라고 생각했다.[24]

한편, 과거 두 차례의 월드컵 경험을 바탕으로 초빙된 심리학자는 가린샤에게 공격성 결여, 낮은 지능을 이유로 기용을 망설이게 했다는 보고가 있었다.[79] 그러나 니우통 산투스 등의 진언으로[92][79] 감독이 양보하여 소련과의 3차전에서 기용되었다. 가린샤는 펠레와의 조합으로 경기 시작부터 맹공을 퍼부었고,[93] 레프 야신을 보유한 견고한 수비진을 밀어붙여 3분에 바바의 선제골을 만들어냈다.[93]

결승전 스웨덴과의 경기에서는 시작하자마자 선제골을 내줬지만, 브라질은 가린샤에게 공을 집중시켰고,[94] 9분과 32분에 오른쪽 측면 돌파 후 골문 앞으로 크로스를 올려 바바의 2득점을 어시스트하여 브라질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타임지는 이 경기에서의 가린샤의 플레이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저, 그것뿐이다"라고 평했다.[95]

2. 3. 2. 1962년 FIFA 월드컵

1962년 FIFA 월드컵에서 가린샤는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였다. 펠레가 두 번째 경기 이후 부상으로 남은 경기 동안 출전하지 못하게 되자, 가린샤는 브라질 우승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칠레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두 경기에서 4골을 기록했다.[32]

1승 1무를 기록한 브라질은 펠레 없이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과 맞붙었다. 후반전에 브라질이 0-1로 뒤지고 있을 때, 펠레를 대신하여 출전한 아마릴두가 동점골을 넣었다. 경기 종료 5분 전, 가린샤는 오른쪽 측면에서 공을 잡아 수비수를 제치고 크로스를 올려 아마릴두의 결승골을 도왔다.[29]

8강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가린샤는 코너킥에서 헤더로 선제골을 넣었다. 후반전에는 바바가 가린샤의 슛이 튕겨 나온 것을 득점으로 연결하여 브라질의 두 번째 골을 기록했다. 몇 분 후, 가린샤는 페널티 구역 밖에서 "바나나 슛"으로 알려진 휘어진 슛을 골대 하단에 꽂아 브라질이 3-1로 승리하고 준결승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준결승에서 개최국 칠레를 상대로 가린샤는 두 골을 더 넣었고, 브라질은 4-2로 승리했다. 그의 첫 골은 왼발 슛이었고, 두 번째 골은 헤더였다.[31] 칠레 신문 ''엘 메르쿠리오''는 "가린샤는 어느 별에서 왔는가?"라는 헤드라인을 싣기도 했다.[32] 가린샤는 이 경기에서 퇴장당했지만, 다음 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지는 않았다.

결승전에서 브라질은 체코슬로바키아 축구 국가대표팀과 맞붙었다. 가린샤는 고열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출전했고,[33] 브라질은 3-1로 승리하며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가린샤는 이 대회에서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다.[32]

2. 3. 3. 1966년 FIFA 월드컵

가린샤는 1966년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회에 브라질 국가대표팀 선수로 소집되었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은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선수들의 고령화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여전히 우승 후보로 여겨졌다.[98] 그러나 가린샤는 무릎 수술 후 상태가 좋지 않았고, 의사로부터 이전 대회들에서 보여준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98]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대표팀 선발 위원들은 가린샤를 소집했다.[98]

조별 리그 첫 경기인 불가리아전에서 가린샤는 프리킥으로 득점을 기록했지만,[99] 이어진 헝가리전에서는 브라질이 1-3으로 패했다. 헝가리전 패배 이후 가린샤를 포함해 선발 멤버 7명이 교체되었기 때문에[100] 최종전인 포르투갈전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에 패해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고, 가린샤는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낮은 무게 중심을 가진 폭발적이고, 민첩하며, 작고 왜소한 오른 측면 공격수였던[41][42][43][44] 가린샤는 창의성, 속도, 실행 속도뿐만 아니라, 놀라운 볼 컨트롤, 기술, 재능, 상상력, 드리블 기술과 윙에서의 페인트로 유명했다.[9][10][44][45][46] 그는 이를 통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기회를 창출할 수 있었다.[9][10][44][45][46] 골을 넣는 것과 팀 동료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모두 가능했던 그는 양발 모두 강력한 슛을 가지고 있었으며, 크로스와 발 바깥쪽으로 차는 세트 피스 스페셜리스트로, 휘어지는 프리킥과 코너킥으로 유명했다.[9][47][48] 그러나 그가 가장 유명했던 것은 그의 드리블 기술이었으며, 선수 생활 내내 이 기술을 유지했다.[9][47][48]

가린샤의 드리블 능력에 관해, 축구 작가 스콧 머레이는 2010년 ''더 가디언''에 "결론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가린샤는 역대 최고의 드리블러였습니다."라고 썼다.[49][50][51]

상대 선수를 바보로 만드는 그의 순수함, 태평한 태도,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능력 때문에 브라질 대중에게 숭배받았던 가린샤는 "국민의 기쁨"이라고 불렸다.[13] 그의 브라질 팀 동료인 잘마 산투스는 "그는 어린애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린샤는 축구판 찰리 채플린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52]

그는 최고 속도로 몸을 돌려 특이한 각도로 লোককে 수 있었으며, 이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그가 개인적인 플레이를 통해 만들어낸 수많은 공격과 골 기회는 종종 득점할 위치에 있는 팀 동료에게 정확한 패스로 이어졌다. 그는 또한 비교적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공중볼에도 뛰어났다. 그는 코너킥에서 직접 득점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한 명이며, 선수 경력 동안 4번이나 이 업적을 달성했다.

프로 데뷔 전과 마찬가지로 오른쪽 측면에 위치하며 드리블로 상대를 농락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고수하며, 상대를 교묘한 드리블로 조롱하는 것을 즐겼다. 왼쪽으로 가는 척하면서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단순한 페인트에 수비수들은 농락당했다.[75][87][88] 공에 전혀 닿지 않고, 몸만 움직여 상대를 무너뜨렸다. 상대팀은 이중, 삼중 마크로 가린샤의 드리블을 막으려 시도[75][87]했지만, 전성기 가린샤를 막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75][87][88] 가린샤가 이 페인트를 시작하면 팬들은 기뻐하며 "올레!"를 외쳤다.[87]

4. 사생활과 죽음

가린샤는 성인 시절 내내 술을 많이 마셨고, 여러 차례 심각한 교통사고를 겪었다. 특히 1969년 4월에는 트럭과 충돌하여 장모가 사망하기도 했다.[37] 그는 1952년 파우 그란데 출신의 공장 노동자 나이르 마르케스와 결혼하여 8명의 딸을 두었으나 1965년에 별거했다. 1966년 3월에는 삼바 가수 엘자 소아레스와 비공식적으로 결혼했으나, 이로 인해 언론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13] 1977년, 소아레스는 가린샤와 다투던 중 그에게 맞은 후 그를 떠났다. 가린샤는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최소 14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13]

이러한 재정적, 결혼 문제 이후, 가린샤는 1983년 1월 20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알코올성 혼수상태로 인한 간경화로 사망했다.[32] 그는 사망 전 해에만 8번이나 입원했을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마라카낭에서 파우 그란데까지 수백만 명의 팬, 친구, 전직 선수들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9] 그의 묘비명에는 "여기에 인민의 기쁨이었던 자 - 마네 가린샤가 평화롭게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3]

5. 평가 및 유산

FIFA는 가린샤를 펠레 이전 가장 뛰어난 브라질 선수로 평가했으며, 1999년 IFFHS는 그를 20세기 브라질에서 두 번째로 뛰어난 선수로 선정했다. 많은 브라질 축구 역사가들은 그를 '최소한 펠레'로 평가한다. 그는 드리블의 황제로 명성을 떨쳤지만, 크로스와 프리킥에도 능했다.[9]

세계적으로는 펠레가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로 인식되지만,[106] 브라질 국내에서는 "누가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105][106] 펠레는 축구의 왕으로서 존경받는 반면, 가린샤는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105] 펠레는 모범적인 선수이자 프로페셔널이었던 반면, 가린샤는 순수하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플레이했다.[105] 브라질 국민들은 가린샤에게 심정적으로 공감하며, 세대를 초월하여 브라질 최고의 선수로 가린샤를 꼽는 경우가 많다.[105][108] 또한, 드리블 기술에서는 가린샤가 더 뛰어나다는 의견도 있다.[109]

브라질 언론인 아르만두 노게이라는 "펠레는 운동선수였고, 가린샤는 예술가였다. 두 사람이 함께하면 완벽했고, 그 조합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106] 실제로 브라질 대표팀에서 두 사람이 함께 출전한 경기는 패배한 적이 없다.[107] 펠레는 "가린샤가 없었다면, 나는 월드컵에서 세 번 우승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77]

6. 주요 경력

가린샤는 선수 시절 다음과 같은 주요 경력을 쌓았다.

'''클럽'''


  • '''보타포구'''[1]
  • 국제 4자 토너먼트: 1954
  • 주 챔피언십: 1957, 1961, 1962
  • 인터클럽 토너먼트 멕시코 펜타고날: 1958
  • 콜롬비아 국제 토너먼트: 1960
  • 코스타리카 국제 토너먼트: 1961
  • 토너먼트 홈: 1961, 1962, 1963
  • 멕시코 국제 클럽 펜타고날: 1962
  • 주간 클럽 챔피언십: 1962
  • 히우-상파울루 토너먼트: 1962, 1964
  • 세계 클럽 챔피언 (파리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 1963
  • 라파스 축구 협회 창립 50주년 토너먼트: 1964
  • 이베로 아메리카 토너먼트: 1964
  • 파나마리보 컵: 1964
  • '''코린치앙스'''[2]
  • 히우-상파울루 토너먼트: 1966


'''국가대표팀'''

'''개인'''

  • FIFA 월드컵 골든볼: 1962[64]
  • FIFA 월드컵 골든부트: 1962[64]
  • FIFA 월드컵 올스타 팀: 1958, 1962
  • 브라질 선수권 최고의 선수: 1962
  • 히우-상파울루 토너먼트 최고의 선수: 1962
  • 주간 클럽 챔피언스컵 최고의 선수: 1962
  • 카리오카 챔피언십 최고의 선수: 1957, 1961, 1962
  • 월드 사커 월드 XI: 1962[65]
  • [https://web.archive.org/web/20081206125950/http://www.museudofutebol.org.br/historia/index.php?option=com_content&view=article&id=168%3Aconheca-os-anjos&catid=56%3Aanjos-barrocos&Itemid=393&lang=pt 브라질 축구 박물관 명예의 전당]
  • 20세기 월드 팀[64]
  • FIFA 월드컵 역대 팀 선수
  • 월드 사커 20세기 최고의 선수 (1999): #20
  • 레키프 역사상 남아메리카 축구 선수 50인: #4[66]
  • IFFHS 20세기 브라질 선수 (2위)[67]
  • IFFHS 20세기 남아메리카 선수 (4위)[67]
  • IFFHS 20세기 세계 선수 (8위)[67]
  • 최고의 선수 - 세기의 선수: 톱 50[68]
  • 발롱도르: 1962 - 르 누보 팔마레 (새로운 수상자)[69][70]
  • IFFHS 레전드[71]
  • 발롱도르 드림 팀 (실버): 2020[72]

6. 1. 클럽

가린샤는 보타포구 FC에서 1953년부터 1965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보타포구에서 그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 238경기에 출전해 84골을 기록했다.[1] 1962년에는 타사 브라질 5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보타포구 소속으로 출전한 대회와 골 기록은 다음과 같다.

클럽별 출장 및 골 기록
시즌디비전출장컵 대회출장대륙 대회출장기타 대회출장합계출장
1953캄페오나투 카리오카2620002620
1954캄페오나투 카리오카27198369
1955캄페오나투 카리오카19392285
1956캄페오나투 카리오카20500205
1957캄페오나투 카리오카21692308
1958캄페오나투 카리오카269913510
1959캄페오나투 카리오카249532912
1960캄페오나투 카리오카219913010
1961캄페오나투 카리오카216112328
1962캄페오나투 카리오카 / 타사 브라질20 / 58 / 0723210
1963캄페오나투 카리오카31201071
1964캄페오나투 카리오카4073113
1965캄페오나투 카리오카107080
합계23884208317323101



이후 SC 코린치안스 파울리스타로 이적하여 1966년에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4경기에 출전했다.[2] 1968년에는 아틀레티코 주니오르에서 카테고리아 프리메라 A 1경기에 출전했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는 CR 플라멩구에서 뛰며 토르네이오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1경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4경기에 출전했다. 1972년에는 올라리아 AC 소속으로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6경기에 출전했다.

6. 2. 국가대표

가린샤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1955년부터 1966년까지 총 50경기에 출전하여 12골을 기록했다.[53] 브라질 대표팀은 가린샤가 출전한 경기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국가대표팀별 출장 및 골 (연도별)[53]
국가대표팀연도출장
브라질195510
195600
195760
195850
195940
196052
196141
1962126
196300
196400
196560
196673
합계5012



가린샤는 1958년 FIFA 월드컵1962년 FIFA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62년 대회에서는 골든볼과 골든 부트를 동시에 수상하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64]

가린샤의 국제 경기 득점 목록
No.날짜경기장상대팀스코어결과대회
1나세르 스타디움, 카이로, 이집트5–0친선 경기[54]
2나세르 스타디움, 카이로, 이집트3–0친선 경기[55]
3에스타디오 나시오날, 산티아고, 칠레2–11961년 코파 베르나르도 오히긴스[56]
4에스타디우 무니시팔,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6–01962년 타사 오스왈도 크루즈[57]
5에스타디우 무니시팔,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3–1친선 경기[58]
6rowspan="2" |에스타디오 사우살리토, 비냐델마르, 칠레rowspan="2" |1–03–11962년 FIFA 월드컵[59]
73–1
8rowspan="2" |에스타디오 사우살리토, 비냐델마르, 칠레rowspan="2" |1–04–21962년 FIFA 월드컵[60]
92–0
10마라카낭 경기장,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3–1친선 경기[61]
11마라카낭 경기장,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2–02–1친선 경기[62]
12구디슨 파크, 리버풀, 잉글랜드2–02–01966년 FIFA 월드컵[63]


6. 3. 개인

Garrinchapt는 다음과 같은 개인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년도
발롱도르 드림팀 실버[113]2020
FIFA 월드컵 골든볼[64]1962
FIFA 월드컵 골든 부트[64]1962
FIFA 월드컵 올스타 팀1958, 1962
브라질 선수권 최고의 선수1962
히우-상파울루 토너먼트 최고의 선수1962
주간 클럽 챔피언스컵 최고의 선수1962
카리오카 챔피언십 최고의 선수1957, 1961, 1962
월드 사커 월드 XI[65]1962
브라질 축구 박물관 명예의 전당
20세기 월드 팀[64]
FIFA 월드컵 역대 팀 선수
월드 사커 20세기 최고의 선수 (1999)#20
레키프 역사상 남아메리카 축구 선수 50인#4[66]
IFFHS 20세기 브라질 선수#2[67]
IFFHS 20세기 남아메리카 선수#4[67]
IFFHS 20세기 세계 선수#8[67]
최고의 선수 - 세기의 선수톱 50[68]
발롱도르1962 - 르 누보 팔마레 (새로운 수상자)[69][70]
IFFHS 레전드[71]
발롱도르 드림 팀 (실버)2020[72]


참조

[1] 서적 Campeonato carioca: 96 anos de história, 1902-1997 Irradiação Cultural
[2] 서적 Almanaque do Timão Ed. Abril
[3] 웹사이트 Bad boy Garrincha remembered http://www.rediff.co[...] 2005-10-28
[4] 웹사이트 International Football Hall of Fame – Garrincha http://www.ifhof.com[...] Ifhof.com 2010-01-20
[5] 웹사이트 Top 10 Football Players of All Time - Garrincha https://www.sportske[...] sportskeeda 2019-04-17
[6] 뉴스 Remembering the genius of Garrincha http://news.bbc.co.u[...] 2013-12-08
[7] 웹사이트 FIFA Player of the Century http://en03.touri.co[...] 2010-11-30
[8] 문서 World All-Time Teams https://www.rsssf.or[...] 2014-05-09
[9] 웹사이트 Garrincha, the never forgotten genius of Brazilian football http://www.worldsocc[...]
[10] 서적 Garrincha: The Triumph and Tragedy of Brazil's Forgotten Footballing Hero Random House
[11] 웹사이트 Foul Play: Seven Deadly Sins of Football - Garrincha has a ball https://www.theguard[...] 2019-10-07
[12] 웹사이트 The disabled footballing icon who won two World Cups https://blog.scope.o[...] 2019-10-07
[13] 뉴스 Remembering the genius of Garrincha http://news.bbc.co.u[...] BBC 2008-01-21
[14] 문서
[15] 서적 My Life and The Beautiful Game: The Autobiography of Pelé Doubleday & Company, Inc.
[16] 서적 Futebol: The Brazilian Way of Life https://archive.org/[...] Bloomsbury
[17] 웹사이트 Botafogo de Futebol e Regatas official web site – Garrincha bio http://www.botafogon[...] Botafogonocoracao.com.br 2010-01-20
[18] 문서 Garrincha to Red Star! http://www.allezreds[...]
[19] 웹사이트 Playing notes http://usr.solar.com[...] 2006-05-10
[20] 웹사이트 Os 50 anos do dia em que Garrincha entrou com bola e tudo https://extra.globo.[...] 2008-05-29
[21] 웹사이트 A Tribute To... Garrincha https://bleacherrepo[...] 2008-08-20
[22] 웹사이트 1958 FIFA World Cup Sweden ™ - Matches - Brazil-Soviet Union https://www.fifa.com[...] FIFA 2018-07-30
[23] 웹사이트 The Cachaça Supernova – In Defense of Football's Prophet of Absurdism, Mané Garrincha http://www.footballp[...] 2017-01-18
[24] 서적 World Cup 2006 Guide 2006-06-05
[25] 문서 O craque que calou o maracanã https://web.archive.[...] 2002-06-13
[26] 웹사이트 Filho sueco de Garrincha visita o Brasil pela primeira vez – 07/11/2005 – EFE – Esporte http://esporte.uol.c[...] Esporte.uol.com.br 2010-01-20
[27] 뉴스 On a glorious bender | Football | The Guardian http://football.guar[...] Football.guardian.co.uk 2010-01-20
[28] 웹사이트 VEJA on-line http://veja.abril.co[...] Veja.abril.com.br 2010-01-20
[29] 문서 Mané Garrincha, Alegria do Povo https://web.archive.[...]
[30] 뉴스 1962 World Cup quarter finals – Dog Incident http://observer.guar[...] 2006-09-09
[31] 웹사이트 "Icons of the World Cup" – ''The Sportstar'', Vol. 25, No. 17; April 27 – May 3, 2002 http://tssonnet.com/[...] Tssonnet.com 2010-01-20
[32] 웹사이트 Classic Football – Garrincha https://www.fifa.com[...] Fifa.com 2010-01-20
[33] 문서 Futebol
[34] 서적 Garrincha: The triumph and tragedy of Brazil's forgotten footballing hero Yellow Jersey Press, London
[35] 웹사이트 FIFA XI Matches https://www.rsssf.or[...] 2010-01-20
[36] 웹사이트 "Imortal como um Drible" http://us.geocities.[...] 2007-01-24
[37] 문서 Futebol
[38] 문서 Garrincha – Estrela Solitária ("Lonely Star"), movie based on Ruy Castro's book about Garricha's life on and off the field. https://www.imdb.com[...]
[39] 서적 De Goddelijke Kanarie ([[The Divine Canary]]), (Thomas Rap) Amsterdam 1993 picture p.108
[40] 웹사이트 Garrincha – I was there https://web.archive.[...] FIFA.com 2013-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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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웹사이트 Soccer's 18 Best Wingers of All Time https://bleacherrepo[...] Bleacher Report 2021-08-15
[43] 웹사이트 30 anni fa moriva 'l'angelo dalle gambe storte': la parabola di Garrincha, l'uomo che diede gioia ad un popolo e morì in povertà https://www.goal.com[...] www.goal.com 2021-08-15
[44] 웹사이트 Ricordando Garrincha, trent'anni dopo ecco i suoi eredi fotogallery https://sport.sky.it[...] sport.sky.it 2021-08-15
[45] 웹사이트 Garrincha nell'Enciclopedia Treccani https://www.treccani[...] www.treccani.it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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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웹사이트 All-time Top 20: No. 9 Garrincha https://www.espn.com[...]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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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웹사이트 Brazil v Wales, 14 May 1966 https://www.11v11.co[...] 2024-10-25
[62] 웹사이트 Brazil v Poland, 08 June 1966 https://www.11v11.co[...] 2024-10-25
[63] 웹사이트 Brazil vs. Bulgaria https://www.national[...] 202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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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웹사이트 IFFHS' Century Elections https://www.rsss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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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웹사이트 Pelé devait être le recordman http://www.francefoo[...] 2018-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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