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모토 다이조
1. 개요
가와모토 다이조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1914년 아이치현 세토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와세다 WMW에서 선수로 활동했으며, 1940년 천황배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군 복무 후 소련에 억류되었다가 귀국하여 오사카 SC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34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 스웨덴을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베를린의 기적'을 이끌었다. 1954년까지 국가대표로 9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으며, 40세 106일의 나이로 일본 대표팀 최고령 출전 기록을 세웠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1958년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 대표팀을 이끌었으며, 2005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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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축구 공격수 -
마누엘 사가르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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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축구 공격수 -
마크 비두카
마크 비두카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전 축구 선수로, 멜버른 나이츠에서 데뷔하여 여러 유럽 클럽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득점력을 보였고, 오스트레일리아 국가대표팀 주장으로서 월드컵 및 아시안컵에 참가했으며, 다수의 개인 수상 경력과 함께 여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1985년 사망 -
에프렘 짐발리스트
러시아 제국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자인 에프렘 짐발리스트는 레오폴트 아우어의 제자로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명성을 얻었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은퇴 후에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
1985년 사망 -
김기진
김기진은 팔봉이라는 호를 사용한 한국의 문학평론가, 소설가, 시인으로, KAPF에서 활동하며 경향파 문학 이론을 이끌었으나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에는 반공주의 문인으로 활동했다. -
와세다 대학 동문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와세다 대학 동문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2. 선수 시절
가와모토 다이조는 1914년 세토에서 태어나 오사카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축구를 시작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 두각을 나타내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으며, 졸업 후 클럽팀에서도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소련에 억류되었다가 1949년 귀국하여 선수로 복귀했다. 전후에도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1954년 FIFA 월드컵 예선과 1954년 아시안 게임 등에 참가했고, 만 40세가 넘은 나이에도 경기에 출전하는 기록을 남겼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는 선수 겸 코치 보조로 참가했다.
2.1. 클럽 경력
오사카부립 이치오카 중학교 재학 시절 축구를 시작했으며, 1930년 제12회 전국 중등 학교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4강에 진출했다. 1931년 중학교 졸업 후 와세다 고등학원을 거쳐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예과 시절부터 아식 축구부 소속으로 활동하며 1933년부터 팀의 간토 대학 리그 4연패에 기여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동맹 통신사에 입사했다. 이후 모교 선수 및 졸업생들로 구성된 와세다 WMW 클럽에 입단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고, 1940년 천황배 준우승을 이끌었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종전 후 소련에 억류되어 4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 1949년 12월, 35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귀국하여 현역으로 복귀, 오사카 SC에 입단했다. 오사카 SC 소속으로 1951년 천황배, 1952년 천황배, 1953년 천황배에서 3회 연속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자신이 창설한 오사카 축구 클럽을 이끌고 천황배 결승에 세 차례 진출했으나 모두 준우승에 머물렀다.
2.2. 국가대표팀 경력
와세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34년 일본 A대표팀에 처음 발탁되었다. 같은 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1934년 극동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5월 13일 네덜란드령 동인도와의 경기에서 국제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A매치 데뷔골을 기록했다. 이어 필리핀과의 2차전에서도 0-3으로 뒤지던 중 만회골을 넣어 팀의 4-3 역전승에 기여했다.
1936년에는 베를린 하계 올림픽에 일본 대표팀 선수로 참가했다. 대회 1라운드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0-2로 뒤지던 후반전에 만회골을 기록하며 일본의 3-2 역전승과 8강 진출에 기여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 승리를 '베를린의 기적'(ベルリンの奇跡)이라고 불렀다. 2016년, 이 당시의 일본 대표팀은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대한민국과의 195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 출전했으나, 1·2차전 합계 3-7로 패배하여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후 1954년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하여 인도와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했지만, 팀은 2전 전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이 대회 인도전 출전으로 가와모토는 40세 106일의 나이로 당시 일본 대표팀 최고령 출전 기록을 세웠다.
1954년 아시안 게임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으며, A매치 통산 9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이후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선수 겸 코치 보조로 참가했으나 경기에 출전하지는 않았다.
3.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2년이 지난 1956년, 일본 A대표팀의 수석 코치로 부임하여 다케노코시 시게마루 감독을 보좌하며 같은 해 멜버른에서 열린 1956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 대회 1라운드에서 개최국 호주에 0-2로 패배하며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1958년에는 다카하시 히데토키의 후임으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어 도쿄에서 열린 1958년 아시안 게임에서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C조 조별리그에서 필리핀과 홍콩에게 연이어 패배하며 2회 연속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고, 대회가 끝난 후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1985년 9월 20일, 위암 투병 끝에 오사카에서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20년이 지난 2005년에는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 사망
(내용 없음)
5. 통계
가와모토 다이조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총 9번의 국제 A매치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5.1. 국가대표팀 기록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4년 일본 A대표팀에 처음으로 선발되었다. 같은 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1934년 극동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5월 13일 네덜란드령 동인도와의 경기에서 국제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후반 7분 A매치 데뷔골을 기록했다. 이어 5월 15일 필리핀과의 경기에서는 0-3으로 뒤지던 전반 30분에 만회골을 넣어 팀의 4-3 역전승에 기여했다.
1936년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1936년 하계 올림픽에 일본 대표팀으로 참가했다. 8월 4일 열린 스웨덴과의 1라운드 경기에서 0-2로 뒤지던 후반 4분에 만회골을 터뜨려 팀의 3-2 역전승과 8강 진출을 이끌었다. 이 승리는 일본의 올림픽 축구 첫 승리이자 강팀을 상대로 거둔 역사적인 승리로 평가받으며, 일본 내에서는 "베를린의 기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2016년, 이 당시의 일본 대표팀은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와모토는 대한민국과의 195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 출전했으나, 1·2차전 합계 3-7로 패배했다. 약 2개월 후 열린 1954년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하여 인도와의 C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득점을 기록했지만, 팀은 2전 전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또한,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선수 겸 코치 보조로 일본 대표팀에 참가했으나 경기에 출전하지는 않았다. 1954년 아시안 게임을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으며, A매치 통산 9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1954년 5월 3일, 그는 40세 106일의 나이로 경기에 출전하여 당시 일본 대표팀 최고령 출전 기록을 세웠다.
|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 ||
|---|---|---|
| 연도 | 출장 | 골 |
| 1934 | 3 | 2 |
| 1935 | 0 | 0 |
| 1936 | 2 | 1 |
| 1937 | 0 | 0 |
| 1938 | 0 | 0 |
| 1939 | 0 | 0 |
| 1940 | 1 | 1 |
| 1941 | 0 | 0 |
| 1942 | 0 | 0 |
| 1943 | 0 | 0 |
| 1944 | 0 | 0 |
| 1945 | 0 | 0 |
| 1946 | 0 | 0 |
| 1947 | 0 | 0 |
| 1948 | 0 | 0 |
| 1949 | 0 | 0 |
| 1950 | 0 | 0 |
| 1951 | 0 | 0 |
| 1952 | 0 | 0 |
| 1953 | 0 | 0 |
| 1954 | 3 | 0 |
| |9||4 |
주요 참가 대회
* 제10회 극동 선수권 대회 (1934)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 기원 2600년 봉축 동아 경기 대회 (1940)
* 195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 1954년 아시안 게임
*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선수 겸 코치 보조)
국제 A매치 득점 기록
5.2. 국가대표팀 득점
와세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34년 일본 대표팀에 처음 발탁되었다. 같은 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1934년 극동 선수권 대회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5월 13일 네덜란드령 동인도와의 첫 경기에서 후반 7분 A매치 데뷔골을 기록했으나 팀은 1-7로 패배했다. 5월 15일 필리핀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는 0-3으로 뒤지던 전반 30분에 만회골을 넣어 팀의 4-3 역전승에 기여했다.
1936년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1936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했다. 8월 4일, 스웨덴과의 1라운드 경기에서 0-2로 뒤지던 후반 4분에 만회골을 기록하며 3-2 역전승과 8강 진출에 기여했다. 이 승리는 일본의 올림픽 축구 첫 승리이자 강팀을 상대로 거둔 승리로, 당시 일본에서는 이를 '베를린의 기적'(ベルリンの奇跡)이라고 불렀다. 2016년, 이 경기에 출전했던 대표팀은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195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 출전했으나,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1, 2차전 합계 3-7로 완패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같은 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1954년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하여 인도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득점을 기록했으나, 팀은 2전 전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가와모토는 1954년 아시안 게임을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A매치 통산 기록은 9경기 4골이다. 그는 1954년 5월 3일, 만 40세 106일의 나이로 경기에 출전하여 당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최고령 출전 기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