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실천원양성소
1. 개요
건국실천원양성소는 1947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이념과 김구의 인재 양성 구상에 따라 설립되었다. 명예소장 이승만, 소장 김구, 이사장 장형으로 시작하여, 전국 각지의 애국 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 운동의 핵심 인력으로 양성하고자 했다. 교육은 독립운동사,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를 포함했으며, 조소앙, 신익희 등 각계 전문가들이 강사진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김구 암살 이후 1949년 8월 23일 해체되었고, 건물은 홍익대학교에 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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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
경성고등학교
1967년 경성학원에 의해 설립 인가된 경성고등학교는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로, 2021년 기준 총 졸업생 수는 28,510명이다. -
홍익대학교 -
홍대 (지역)
홍대(지역)는 홍익대학교를 중심으로 상수동, 서교동 일대에서 시작하여 상권 확장에 따라 동교동, 합정동 등으로 넓어졌으며, 인디 음악, 예술, 다양한 문화 행사, 드라마 촬영 등으로 유명하다. -
이승만 -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 강력한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를 중시하며, 경제 개입주의를 옹호하는 경향과 소득 재분배에 대한 제한적인 입장을 취하고, LGBT 권리와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으며, 역사적으로 권위주의적 통치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을 받아왔으나 1987년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강조하며 변화를 거듭해왔다. -
이승만 -
6.25 전쟁
6.25 전쟁은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휴전 협정으로 종결되었으며, 한반도의 분단과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한 한국 전쟁을 의미한다. -
1947년 설립 -
인도 자치령
인도 자치령은 1947년 영국령 인도 분할로 수립되어 자와할랄 네루 총리와 조지 6세 국왕 체제 하에 존속하다 1950년 인도 공화국으로 전환되는 동안 종교 갈등, 난민 문제, 번왕국 통합, 카슈미르 전쟁, 헌법 제정 등 격동적인 시기를 겪었다. -
1947년 설립 -
단국대학교
단국대학교는 1947년 설립된 대한민국의 사립 종합대학교로, 죽전캠퍼스와 천안캠퍼스를 운영하며, 생명과학, 정보통신, 문화콘텐츠 등 다양한 분야의 학과를 운영하며 연구 활동과 국제 교류를 진행한다.
2. 설립 배경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의 인재들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에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1947년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다.
2.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이념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칙,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하여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2.2. 김구의 인재 양성 구상
194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귀국 후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칙,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으로 구성되었고,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하여 복국, 건국, 치국,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2.3. 해방 후 정국과 인재 양성의 필요성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1947년 김구는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이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해 나라를 되찾고(복국, 復國), 나라를 세우고(건국, 建國), 나라를 다스리며(치국, 治國), 나아가 세상을 구하는(구세, 救世)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3. 활동
임정 주석이었던 김구는 독립운동 과정 중 광복군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1947년 3월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였다. 김구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양성소는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 장형으로 출발하였다. 장형은 김구의 통일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며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에 재정적 지원을 하고, 김구와 함께 운영까지 하였다.
교육 기간은 제1기가 2개월, 제2기부터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고, 매 기수마다 100명 내외의 교육생을 선발했다. 교육 내용은 독립운동사, 정치, 경제, 법률, 헌법, 역사, 선전, 민족문화, 국민운동, 철학, 약소민족문제, 농촌문제, 협동조합, 사회학, 공산주의 비판, 여성 문제 등과 특별 강의였다.
1946년 초 신익희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할 것을 한국독립당 중앙당에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6월 23일 신익희는 한국독립당 서울시 지구당 위원장 직을 사퇴하고 탈당, 1947년 7월 이후에는 임시정부와 노선을 달리하며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독립촉성국민회 부총재가 되었다.
신익희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 측과 연합하자, 장형은 이를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고, 신익희와는 더 이상 임시정부의 정신을 함께 이을 수 있는 동지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3.1.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
1947년 3월, 독립운동 과정 중 광복군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건국실천원양성소가 설립되었다. 임정 주석이었던 김구가 귀국 후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하였다.
김구는 청년들이 국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 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는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 장형으로 출발하였다. 당시 교육계에 투신하고 있었던 장형은 김구와 각별한 관계였으며, 김구의 통일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며 재정적 지원과 운영을 함께 하였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 원효사(1947년 3월 9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해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3.2. 교육 과정
1947년 3월 건국실천원양성소가 설립될 때, 교육 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 인원은 매 기수마다 100명 내외였다.
교육 내용은 독립운동사, 정치, 경제, 법률, 헌법, 역사, 선전, 민족문화, 국민운동, 철학, 약소민족문제, 농촌문제, 협동조합, 사회학, 공산주의 비판, 여성문제 등과 특별 강의였다.
강사진은 조소앙, 조완구, 신익희, 지청천, 나재하, 김성주, 김경수, 최호진, 김정실, 양주동, 민영규, 엄상섭, 엄항섭, 김학규, 설의식, 김기석, 이상조, 주석균, 홍병선, 김하선, 김석길, 안재홍, 정인보, 황기성, 이인, 김활란, 김법린, 박순천, 이은상 등 각계 인사들이었다.
3.3. 강사진
조소앙, 조완구, 신익희, 지청천, 나재하, 김성주, 김경수, 최호진, 김정실, 양주동, 민영규, 엄상섭, 엄항섭, 김학규, 설의식, 김기석, 이상조, 주석균, 홍병선, 김하선, 김석길, 안재홍, 정인보, 황기성, 이인, 김활란, 김법린, 박순천, 이은상 등 각계 인사들이 강사로 참여하였다.
4. 구성원 갈등과 노선 변화
건국실천원양성소는 김구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 기초하여 1947년 설립한 단체였다. 건국강령은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추구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암살 이후, 건국실천원양성소는 1949년 8월 23일 해체되었고, 원효사는 홍익대학교에 인수되었다.
4.1. 신익희와의 갈등
1946년 초 신익희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할 것을 한국독립당 중앙당에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6월 23일 신익희는 한국독립당 서울시 지구당 위원장 직을 사퇴하고 탈당하였다. 1947년 7월 이후에는 임시정부 측과 노선을 달리하였으며, 임시정부를 이탈,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독립촉성국민회로 갔다. 그리고 1947년 7월 신익희는 독립촉성국민회 부총재가 되었다.
신익희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측과 연합하자, 이를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던 장형은 신익희와는 더 이상 임시정부의 정신을 함께 이을 수 있는 동지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