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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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두희는 1949년 육군 포병 소위로 복무하며 김구를 암살한 인물이다. 그는 1917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 신의주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후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했다. 해방 후 서북청년회에서 활동했으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김구 암살 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과 복권을 거쳤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을 받았고, 1996년 박기서에게 살해당했다. 김구 암살의 배후와 관련하여 이승만, 김창룡, 한국민주당, 미군 방첩대(CIC) 등 다양한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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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안두희 |
한자 | 安斗熙 |
로마자 표기 | An Du-hui |
출생일 | 1917년 3월 24일 |
출생지 | 일본 통치하 조선 평안북도 용천군 |
사망일 | 1996년 10월 23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
아명 | 안덕희 |
가명 | 강두희, 안영준 |
본관 | 순흥 안씨 |
부모 | 안병서(부), 안산 김씨 부인(모) |
배우자 | 박왕례 (이혼), 김명희 (재혼) |
자녀 | 안국영 (장남) |
형제자매 | 안태희(형), 안예희(누나) |
친척 | 안병규(숙부), 안상모(사촌 종형), 안세희(사촌 남동생) |
군 복무 정보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9년 5월 ~ 1953년 12월 25일 |
최종 계급 | 육군 소령 |
근무 | 육군 포병사령부 |
지휘 | 연락장교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한국 전쟁 |
기타 이력 |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암살 이후 1953년 12월 25일 육군 장교(소령) 예편, 신의기업사 사장(1958년) |
범죄 정보 | |
죄목 | 살인죄 |
유죄 판결 | 유죄 |
형벌 | 종신형 (나중에 사면) |
기타 | |
정당 | 무소속 |
2. 생애
안두희는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용천군 출신으로, 신의주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3학년 때 중퇴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1947년 탈북하여 서북청년회에 입회했다.[12] 1948년 육군사관학교 특8기로 입교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포병사령부 연락장교 소위를 맡았다.
1949년 6월 26일, 육군 포병 소위였던 안두희는 경교장에서 김구를 암살했다.[17]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이승만에 의해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다. 재판에서 단독범행임을 주장했으며, 한국 전쟁 발발 후 석방되어 육군 장교로 복귀했다. 수감 기간은 구금 기간을 포함해 1년 미만이었다. 1953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으나, 이후에도 한국군 특무기관원으로 활동했다.
1959년 니가타 적십자센터 폭파 미수 사건에서는 "강두희(姜斗熙)"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일본에 밀입국, 재일 조선인의 북한 송환 저지를 계획했다.[14]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실각하자, 김구 암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안두희는 여러 차례 가명을 바꾸며 숨어 살았으나, 여러 차례 길에서 폭행당했다. 1961년 4월 18일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혔으나, 공소시효로 석방되었다.[10] 1965년 곽태영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기도 했다.[10]
1992년 4월 13일 증언록을 출판, 김구 암살이 김창룡의 지시였다고 주장하며 이승만의 개입을 시사했다.
1996년 10월 23일 박기서에게 살해당했다.
2001년 국사편찬위원회는 1949년 미국 군사 자료에서 안두희가 미군 스파이이자 반공 테러 단체 백의사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15]
2. 1. 초기 생애
안두희는 1917년 3월 24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지주 안병서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덕희(德熙)였는데 뒤에 두희(斗熙)로 고쳤다.[12] 1934년 신의주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1939년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3학년 때 중퇴하고 귀국, 그 뒤 중국 등에서 장사를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12]1947년 북한에서 지주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월남하여 서북청년회 총무부장으로 있는 등 우익 단체 활동을 했다.[12] 1948년 육군사관학교 특8기로 입교하고 이듬해 졸업하여 포병사령부 연락장교 소위를 맡았다.
2. 2. 군 경력
1950년 7월 10일 육군 소위로 복직하고 9월 15일 육군 중위로 진급하였다.[17] 1951년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고 12월 15일 육군 대위로 진급[17], 2년 뒤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일설에는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953년 완전 복권되었으나,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을 당했다.2. 3. 김구 암살
1949년 6월 26일 정오 경, 안두희는 김창룡의 지시를 받고 경교장에 찾아가 권총으로 김구를 암살하였다.[17] 이 사건으로 안두희는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다.[17]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1950년 6월 27일)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하였으며, 1953년 2월 15일에는 완전 복권되었다.안두희를 한국독립당에 입당시키고 김구에게 소개한 사람은 김학규였다.[18]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론으로 노선을 변경하자 김학규는 이에 반대하였고,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하였다.[18] 일각에서는 안두희의 김구 암살이 이승만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19]
안두희 공판 기록에 따르면, 김학규는 홍종만을 통해 안두희를 알게 되었고, 한국독립당 입당 절차를 밟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안두희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기록은 없다. 김학규는 안두희와 만날 때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고, 김구의 증명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김학규는 김구 암살 약 1달 전부터 안두희를 만나지 않았다고 진술했으며, 한국독립당에는 비밀당원증이 없다고 밝혔다.[20]
김구 암살 당일, 김학규는 경교장에 모인 측근들에게 "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내용의 혈서를 보여주었다.[21] 김학규는 이 혈서가 안두희가 김구 앞에서 쓴 것이라며 분개하였고,[21] 사건 직후 혈서를 불태웠다.[21]
안두희는 김구를 네 발의 총탄으로 살해했으며,[3] 재판에서 단독 범행임을 주장하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에 의해 15년으로 감형되었고, 한국 전쟁 발발 후 1년 만에 석방되어 군에 복귀했다.
2001년, 국사편찬위원회는 1949년 미국 군사 자료를 통해 안두희가 미군의 스파이이자 반공 테러 단체인 백의사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15]
2. 4. 암살 이후
1950년 7월 10일 육군 소위로 복직하고 9월 15일 육군 중위로 진급하였다.[17] 1951년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고 12월 15일 육군 대위로 진급[17], 2년 뒤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일설에는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953년 완전 복권되었으나,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을 당했다.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면서 도피하였다. 강원도 양구군에서 잠깐 군납 공장을 경영하다가 1960년 4·19 혁명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하였다. 그러나 1960년과 1961년 여러 차례 길거리에서 테러를 당하였다.
1961년 4월 18일 진상 규명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났다. 1965년에는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으로부터 칼로 목을 찔리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본부인과 이혼하였고, 생계에도 곤란을 겪던 그는 약 2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신 생활을 했다. 1987년 3월 27일 그를 알아본 민족 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폭행당하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이미 도피를 포기한 상태였으나 정부에서는 그의 신변을 보호하지도 않았다. 1992년 2월 28일에는 김구 묘소에서 강제 참배하기도 하였다. 4월 13일 동아일보 지면을 통하여 백범 암살의 배후가 전 육군 소장 김창룡이었다고 증언하여 큰 화제가 되었으나, 증언의 세부 내용이 번복되거나 내용의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23]
2. 5. 최후
1965년 12월 22일 곽태영에게 중상을 입은 적이 있는[24]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경기도 부천 소신여객 소속 버스 운전 기사였던 박기서에게 몽둥이로 맞아 80세(만 79-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4][25][26][6]평소 백범 김구를 매우 존경하던 박기서는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를 응징할 기회를 노리다가 살해에 이르렀다"고 밝혔는데, 1997년 범행 동기가 정상 참작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8년 3·1절 특별사면으로 1998년 3월 13일 석방되었다.[24][25][26] 안두희를 살해하는 데 사용된 무기는 "정의봉"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나무 몽둥이였다.[6] 안두희는 화장되었고 그의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7]
3. 의혹 및 논란
안두희는 김구 암살 이후 여러 의혹과 논란에 휩싸였다. 이승만 정권과의 결탁 의혹, 암살 배후 등에 대한 진실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안두희는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사망하여 의혹은 미해결 과제로 남았다. 다만, 안두희에 대한 감형, 군 복무 중 군납업자 근무, 이승만과 김구의 대립, 미국의 배후 개입 의혹 등으로 인해 권력과 결탁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안두희가 중형을 면하고 1년여 만에 석방된 점, 석방 후 군부가 군납사업을 알선해 준 사실 등은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거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의심을 갖게 했다. 이승만 정부는 국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안두희의 범행을 은닉하거나 방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되자 안두희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했다. 그는 1960년과 1961년 여러 차례 길거리에서 테러를 당했다.[22] 1961년 4월 18일 진상 규명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났다. 1965년에는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에게 칼로 목을 찔리기도 했으나 목숨을 건졌다.
이후 안두희는 본부인과 이혼하고 생계에 어려움을 겪으며 약 20년간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은신 생활을 했다. 1987년 3월 27일 민족 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폭행당하면서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23]
1992년 2월 28일 안두희는 김구 묘소에서 강제 참배를 했다. 4월 13일 동아일보를 통해 백범 암살의 배후가 전 육군 소장 김창룡이었다고 증언했으나, 증언 내용이 번복되거나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23]
안두희는 월남 후 서북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경찰 및 군 수뇌부와 연을 맺었다. 특히 특무대(SIS)의 김창룡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는데,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정보계의 실권자였다. 안두희는 김창룡 외에도 육군 중령 김일한, 그리고 김지웅, 홍종만 등과 교류하며 정보 분야에 발을 들였다. 김지웅은 안두희에게 '애국자'라 칭하며 환심을 샀고, 정확한 정보 제공으로 안두희의 신뢰를 얻었다.
1947년 대동청년단 결성 당시, 서북청년회는 선우기성 중심의 합류파와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로 나뉘었다. 안두희는 재건파에 속해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했다.[29][30]
김구 암살과 관련하여 한국민주당이 배후라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안두희는 서북청년회 총무부장이었고 서북청년회는 한국민주당과 함께 동아일보 건물에 있었다. 서북청년회는 김구, 이승만, 한국민주당의 지원을 받았으며, 서북청년회 해산에 대하여 한국민주당 조병옥과 장택상이 꾸준히 반대하였으며 장택상은 현금 5만원을 지원한바 있다. 1992년 안두희는 TV회견을 통해 장택상, 노덕술, 최운하 등이 김구 암살을 암시했다고 밝혔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결성된 ‘백범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는 안두희를 붙잡아 김구 암살의 배후를 자백받고 검찰에 인계하였으나,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거해 형사처벌 불가의 판정을 받았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에 귀가 조치되었다.
1992년 4월 권중희와 김석용이 안두희의 입을 열게 해 “독자 범행은 아니며 자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라는 진술을 얻어내었다. 1992년 11월 진상규명위원회는 사실의 규명을 국회에 청원했으며, 국회 백범암살진상조사소위원회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1995년 12월에 작성하였다.[31]
3. 1. 암살 배후 논란
1949년 6월 26일 정오 경, 안두희는 김창룡의 지령으로 경교장에서 권총으로 김구를 암살하였다.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17]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1950년 6월 27일)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하였다. 1953년 2월 15일에는 완전 복권되었다.한편, 안두희를 한국독립당에 입당시키고 김구에게 소개한 것은 김학규였다.[18]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론으로 노선을 바꾸자 김학규는 이에 반대하였다.[18] 일설에는 안두희의 김구 암살이 이승만의 지시로 저질러졌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19]
안두희 공판기에 따르면, 김학규는 홍종만을 통해 안두희를 알게 되었고, 한독당 입당 절차를 밟았으나, 안두희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일은 없다고 한다. 김학규는 안두희와 만날 때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고, 김구의 증명서까지 얻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김학규는 김구 암살 약 1달 전부터는 홍종만을 통해 안두희를 만나지 말 것을 요구했으며, 한국독립당에는 비밀당원증이라는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20]
그런데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되던 날, 김학규는 경교장에 모인 측근에게 "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혈서가 쓰인 손수건 크기의 하얀 천을 보여주었다.[21] 그는 "안두희가 백범 선생 앞에서 쓴 것"이라며 믿었던 안두희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하였다.[21]
사건 직후 김학규는 안두희의 혈서를 불태웠다.[21] 그러나 김학규가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해서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정보가 이승만 정권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괘씸죄로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혼자 숨어다녀야 했다.
1992년 4월 13일, 동아일보는 안두희의 자백을 보도했다. 안두희는 이승만 정부 시절 국가 안보 책임자였던 김창룡의 지시로 김구 암살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5]
김구 암살은 공식적으로는 안두희의 단독범행으로 되어 있으나, 대규모 음모의 실행범 중 한 명에 불과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13] 현재에도 배후 관계의 진상은 불명이며, 음모의 존재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이승만에 의해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고 재판에서 단독범행임을 주장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한국육군 장교로 복귀했으며, 수감 기간은 구금 기간을 포함해 1년 미만이었다. 1953년, 기록상으로는 육군 중령으로 예편했으나, 이후에도 한국군 특무기관원(한국 정보기관 요원)으로 활동했다. 1959년,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에서는 “강두희(姜斗熙)”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일본에 밀입국하여 재일 조선인의 북한 송환 저지를 계획했던 사실이 밝혀졌다.[14]
1960년 4·19 혁명으로 안두희의 후원자였던 이승만이 실각하자, 김구 암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여 추적을 시작했고, 이후 안두희는 여러 차례 가명을 바꾸어 숨어 살았으나, 여러 차례 길에서 폭행을 당했다. 1961년 4월 18일, 위원회 간사였던 김용희[10]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이미 한 차례 재판을 받은 사건이라 수리되지 않고 공소시효를 이유로 석방되었다. 또한 1965년에는 백범독서회 회장이었던 곽태영[10]의 습격을 받아 목을 찔려 중상을 입었다. 이후 안영준(安英俊)이라는 가명으로 잠복 생활을 이어갔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1980년대부터는 숨는 것을 포기했으나 1987년에도 폭행을 당했다.
1992년 4월 13일, 증언록을 출판했는데, 그 안에서 “김구 암살은 이승만 정권의 국가안전보장부 장관을 지낸 김창룡의 지시였다”고 주장하며, 김구의 라이벌이었던 이승만의 개입을 시사했다.
2001년,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는 공개된 1949년 미국 군사 자료에서 안두희가 미국군의 스파이이자 반공 테러 단체인 백의사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15]
3. 2. 미군 방첩대(CIC) 연관설
안두희는 월남 후 서북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경찰 및 군 수뇌부와 연을 맺었다. 특히 특무대(SIS)의 김창룡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는데,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정보계의 실권자였다. 안두희는 김창룡 외에도 육군 중령 김일한, 그리고 김지웅, 홍종만 등과 교류하며 정보 분야에 발을 들였다. 김지웅은 안두희에게 '애국자'라 칭하며 환심을 샀고, 정확한 정보 제공으로 안두희의 신뢰를 얻었다.1947년 대동청년단 결성 당시, 서북청년회는 선우기성 중심의 합류파와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로 나뉘었다. 안두희는 재건파에 속해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했다.[29] [30]
안두희는 김구 암살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과의 결탁 의혹, 미국의 배후 개입설 등 여러 의혹에 휩싸였다. 특히 감형, 군수업자 근무, 이승만과 김구의 대립 관계 등은 권력 결탁 의혹을 뒷받침하는 정황으로 여겨진다. 안두희가 중형을 면하고 1년여 만에 석방된 점, 군부가 군납사업을 알선해 준 사실 등은 그를 비호하는 세력의 존재를 암시한다.
1992년 안두희는 TV 회견에서 장택상, 노덕술, 최운하 등이 김구 암살을 암시했다고 밝혔다. 또한, 같은 해 4월 권중희와 김석용은 안두희로부터 "독자 범행은 아니며 자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진술을 얻어냈다.[31]
2001년 한국 국사편찬위원회는 안두희가 미국 군사 자료에서 미군 스파이자 반공 테러 단체 백의사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15]
3. 3. 한국민주당 연관설
2001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와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하였음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 2001년 9월 4일 공개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김구 암살에 관한 배후정보'라는 문건으로 안두희에게 직접 백범암살을 지시한 인물이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활발한 테러활동을 벌였던 '백의사'(白衣社)라는 극우 테러단체의 단장 염응택(본명 염동진)이었음을 알아냈다고 주장하였다.[32]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 백찬옥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하며, 백범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연관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백범 김구를 연구한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이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고 반론하였다. 설령 실제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또한, 장덕수와 송진우의 배후가 백의사라는 주장 또한 사실과 다르며, 백의사가 해방 직전 신익희 주도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사무국"이 모태가 된 것으로 주장하나, 백의사는 해방되기 전인 1943년 평양에서 조직된 '대동단'을 모체로 한 극우 테러집단으로 비밀결사대의 후신이었다고 기고문에서 밝혔다.[33][34][35]
참조
[1]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s://web.archive.[...]
2007-06-10
[2]
서적
Rogue State
Common Courage Pres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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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What Happened to Kim Ku?
https://www.koreat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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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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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4
[5]
서적
Brothers at War – The Unending Conflict in Korea
Profile Books
[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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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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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암살범 안두희…범행진상 입다문채 도피의 한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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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의 비참한 末年-중풍.치매로 고통 부인편지서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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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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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北青年団”再建の波紋、極右団体の復活に知性はどう対処すべき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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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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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다큐, 6억원짜리 찬양 "합리화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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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와 관련자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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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 - 1996년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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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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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쓰레기를 청소했을 뿐입니다" - 백범 56주기 추모 인터뷰 - 김구 암살범 안두희 응징한 박기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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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박기서씨에게 피살 당해(정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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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암살범 안두희 배후-버스 운전기사 박기서 안두희 살해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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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는 美 방첩대요원...白衣社 단장이 암살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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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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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동진 백범암살 사주한 근거 없다"도진순 교수 반박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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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20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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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정신, 세계에 널리 알리려 ‘유네스코 인물’ 신청했죠”
김구 선생 암살범 살해한 박기서씨 별세
‘김구 암살’ 안두희 처단한 박기서씨 별세…향년 77
김구 암살범 안두희 ‘정의봉’ 살해한 박기서씨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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