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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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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견수사는 600년부터 615년까지 일본에서 수나라와 당나라에 파견한 사절단을 의미한다. 600년에 파견된 제1회 견수사는 《일본서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수서》에는 왜왕이 "해를 동생으로 삼는다"는 독특한 통치 방식을 설명한 내용이 전해진다. 607년 오노노 이모코가 파견한 제2회 견수사에서는 일본 국서의 표현에 수 양제가 불쾌감을 느껴 외교적 마찰이 있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견수사가 파견되어 유학생들이 수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돌아와 7세기 후반 일본의 개혁에 기여했다. 견수사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와 《수서》에서 차이를 보이며, 견수사를 통해 일본은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고 외교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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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수사
견수사
견수사 그림
견수사 그림
개요
파견 시기7세기 초
파견 목적의 문물과 제도를 배워 일본의 국가 체제를 정비
주요 인물오노노 이모코
견당사
배경
국제 정세한반도의 정세 불안과 수나라의 부상
일본 내부 상황쇼토쿠 태자의 개혁 의지
견수사의 역할
정치적 역할수나라와의 외교 관계 수립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 강화
문화적 역할수나라의 선진 문물 수입 (불교, 유교, 율령 등)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
주요 파견
스이코 천황 시기600년: 제1차 견수사 파견 (오노노 이모코)
607년: 제2차 견수사 파견 (오노노 이모코)
608년: 제3차 견수사 파견 (오노노 이모코)
역사적 의의
일본 역사일본의 국가 체제 정비에 기여
일본 문화 발전에 큰 영향
동아시아 역사동아시아 문화 교류에 기여

2. 제1회 견수사 (600년)

600년(스이코 8년, 수나라 개황 20년)에 파견된 제1회 견수사는 《일본서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수서》 왜국전에 관련 내용이 전해진다. 수나라 문제(양견)는 사신에게 왜국의 풍속을 물었고, 사신은 왜왕이 "하늘을 형으로, 해를 동생으로 삼는다"는 독특한 통치 방식을 설명했다. 문제는 이러한 통치 방식이 "도리에 어긋난다"며 고치도록 훈령했다.[16] 일본 학계에서는 이 사건이 국욕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에 《일본서기》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왜왕은 '아메'(アメ)라는 성을 쓰고, '다리사북고(多利思北孤)'라는 자를 사용했으며, '아배계미(阿輩雞弥)'라고 불렸다. '아메'는 일본어로 '하늘'을 뜻하며, '다리사북고'는 '다라시히코', 즉 '아메노 다라시히코'로 '하늘에서 내리신 분'이라는 뜻이다. '아배계미'는 '오오키미'로 대왕을 의미한다.

이때 파견된 사신은 문제에게 왜왕이 "하늘을 형으로, 해를 동생으로 삼는다. 날 밝기 전에 나와 가부좌를 틀고 정사를 듣다가 해가 나오면 멈추고 동생(해)에게 맡긴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러한 통치 방식이 도리에 어긋난다고 판단하여 고치도록 훈령했다.

이후 603년 (스이코 천황 11년) 관위십이계604년 십칠조헌법 제정 등 중국풍의 정치 개혁이 이루어졌고, 같은 해 오와다노미야도 외교 사절의 환대를 의식하여 신축되었다.

3. 제2회 견수사 (607년)

607년(스이코 15년)에 파견된 제2회 견수사는 《일본서기》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오노노 이모코가 국서를 가지고 파견되었다. 《수서》 왜국전에 따르면, 일본의 국서는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라는 문구로 시작하여 수 양제의 분노를 샀다.[17] 양제가 분노한 이유는 중화사상에 따라 천자는 오직 한 명이어야 하는데, 변방 국가의 수장이 '천자'를 자칭했기 때문이다.

오노노 이모코는 귀국길에 백제에게 답서를 도난당했다고 주장했으나,[21] 실제로는 양제의 답서가 왜국을 신하 취급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파기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본서기》에는 수 양제가 보낸 답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왜왕을 '왜황'으로 칭하고 있다. 이에 대한 답서로 일본은 "동쪽의 천황이 삼가 서쪽의 황제에게 고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외교적 자세를 바꾸었다.

4. 제3회 이후 견수사 (608년 ~ 615년)

608년 오노노 이모코가 다시 파견될 때, 다카무코노 겐리, 미나부치노 쇼안, 승민, 야마토노아야 후쿠인, 에긴 등 많은 유학생이 동행했다. 이들은 수나라의 멸망과 당나라 건국을 직접 보고 귀국하여 7세기 후반 야마토국의 개혁에 공헌하였다.[1] 614년 마지막 견수사가 파견되었다.

612년부터 614년에 걸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1차 원정에서 크게 패하였다. 전쟁 비용과 병역 부담으로 인해, 이후 두 차례의 원정 도중 수나라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618년 양제가 살해되면서 수나라는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2]

5. 《일본서기》와 《수서》의 주요 차이점


  • 제1회 견수사는 《일본서기》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고 《수서》에만 있다.[16]
  • 《일본서기》는 견수사의 목적지를 '대당국'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수서》는 '수'로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 《일본서기》에서는 배세청으로 되어 있지만, 《수서》는 편찬 시기가 당 태종의 시기였기에, 태종 · 세민을 피해서 배청(裵清)으로 표기하고 있다.
  • 오노노 이모코의 답서 분실 사건은 《일본서기》에는 있지만 《수서》에는 없다(《수서》에는 오노노 이모코라는 이름 기재 자체가 없다).[22]

참조

[1] 서적 Articulating the Sinosphere: Sino-Japanese Relations in Space and Time
[2] 웹사이트 Cultures Combined in the Mists of Time: Origins of the China-Japan relationship http://japanfocus.or[...] 2006-02-03
[3] 서적 Ono no Imoko
[4] 서적 Kentōshi
[5] 서적 Takamuko no Kuromaro (No Genri)
[6] 서적 Minabuchi no Shōan
[7] 서적 Sōmin
[8] 서적 Nihon Shoki 2 Shinpen Nihon Kotenbungaku Zenshu 3 Shogakkan
[9] 서적 新唐書東夷伝日本伝「用明 亦曰目多利思比孤 直隋開皇末 始與中國通」
[10] 인용
[11] 서적 遣唐使 岩波新書
[12] 간행물 ヤマトから日本へ―古代国家の成立 東京国立博物館
[13] 논문 隋書倭国伝と日本書紀推古紀の記述をめぐって
[14] 서적 臣參還之時 唐帝以書授臣 然經過百濟國之日 百濟人探以掠取 是以不得上
[15] 논문 隋書倭国伝と日本書紀推古紀の記述をめぐって 九州大学 2004-03-10
[16] 서적 新唐書東夷伝日本伝「用明 亦曰目多利思比孤 直隋開皇末 始與中國通」
[17] 인용
[18] 서적 遣唐使 岩波新書
[19] 간행물 ヤマトから日本へ―古代国家の成立 東京国立博物館
[20] 논문 隋書倭国伝と日本書紀推古紀の記述をめぐって
[21] 서적 臣參還之時 唐帝以書授臣 然經過百濟國之日 百濟人探以掠取 是以不得上
[22] 논문 隋書倭国伝と日本書紀推古紀の記述をめぐって 九州大学 200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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