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관위십이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관위십이계는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승진하는 제도로, 혈통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가바네 제도와 대비된다. 이 제도는 603년, 쇼토쿠 태자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외교 사절의 위엄을 갖추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관위는 한자 명칭, 로마자 표기, 영어 번역, 색상으로 구성되었으며, 유교의 오상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일본 특유의 배열과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 관위십이계는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주변 국가의 관위 제도와 유사하며, 중국의 관품 제도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관위의 색상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소가 씨가 관위 수여에 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이코 천황 - 쇼토쿠 태자
    쇼토쿠 태자는 일본 아스카 시대의 인물로, 불교 장려, 17조 헌법 제정, 수나라 외교 등 고대 일본 국가 형성에 기여했으며, 여러 일화와 지폐 도안으로 유명하지만, 업적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 스이코 천황 - 호류지
    호류지는 7세기 초 창건된 일본 나라현의 불교 사찰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중 일부를 보유하고 있으며, 쇼토쿠 태자 창건 설화와 학술적 논쟁, 서원과 동원의 구역, 그리고 수많은 문화재와 역사적 중요성으로 일본 불교 및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 일본의 관제 - 다이라노 기요모리
    헤이안 시대 후기 무장이자 정치가인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 승리로 권력을 획득하고 무사 최초로 다이조다이진에 올랐으나, 권력 남용과 독재로 겐페이 전쟁을 초래하여 몰락, 그의 생애는 무사 사회 발전 기여와 폭력 및 독재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 일본의 관제 - 일본 대장성
    일본 대장성은 메이지 유신 이후 재정 및 금융 정책을 총괄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금융감독청 설치 후 기능이 분리되고 재무성으로 개칭되었으며, 부정부패와 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 쇼토쿠 태자 - 호류지
    호류지는 7세기 초 창건된 일본 나라현의 불교 사찰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중 일부를 보유하고 있으며, 쇼토쿠 태자 창건 설화와 학술적 논쟁, 서원과 동원의 구역, 그리고 수많은 문화재와 역사적 중요성으로 일본 불교 및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 쇼토쿠 태자 - 시텐노지
    시텐노지는 쇼토쿠 태자가 6세기에 창건한 오사카의 불교 사찰로, 소가씨와 모노베씨 갈등 설화와 함께 재건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으며, 사천왕사식 가람 배치, 국보 및 문화재, 사가원 운영, 만등 공양 등으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관위십이계
개요
유형관위
시행 시기아스카 시대
시행 연도603년
폐지 연도647년
시행 주체쇼토쿠 태자
이전 제도습성제
다음 제도관위제
관위 등급
대덕 (大徳, 다이토쿠)색: 자색
의미: 덕
소덕 (小徳, 쇼토쿠)색: 자색
의미: 덕
대인 (大仁, 다이진)색: 청색
의미: 인
소인 (小仁, 쇼진)색: 청색
의미: 인
대례 (大禮, 다이라이)색: 황색
의미: 예
소례 (小禮, 쇼라이)색: 황색
의미: 예
대신 (大信, 다이신)색: 백색
의미: 신
소신 (小信, 쇼신)색: 백색
의미: 신
대의 (大義, 다이기)색: 흑색
의미: 의
소의 (小義, 쇼기)색: 흑색
의미: 의
대지 (大智, 다이치)색: 남색
의미: 지
소지 (小智, 쇼치)색: 남색
의미: 지

2. 제정 배경 및 목적

관위십이계는 604년(스이코 천황 11년) 12월 5일에 처음 제정되었다.[4] 쇼토쿠 태자가 제정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일본서기와 상궁성덕법왕제설에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이 제도는 가바네 제도로 대표되는 기존의 혈통 중심 신분 질서를 재편하고, 능력과 공적에 따라 개인에게 관위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는 호족 세력을 관료 체제 내로 편입시키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

관위십이계는 고구려, 신라, 백제 등 한반도 국가들의 관위 제도와 유사성을 보이며, 이들 국가와의 외교적 관계에서 일본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나라와의 외교 과정에서 제도 정비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도 관위십이계 제정의 배경 중 하나로 여겨진다.

2. 1. 정치적 배경

새로운 관위 제도와 신분 계급에 따른 인사의 구별점은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승진이 이루어지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 제도는 기존의 혈통에 따라 신분을 결정하는 가바네 제도와 대비된다. 관위 제도를 통해 승진한 가장 잘 알려진 사례 중 하나는 오노노 이모코이다. 이모코는 607년, 수나라에 사신으로 처음 파견되었을 때 정오위(正五位)였지만, 608년 수나라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의 공적, 특히 외교적 성과를 인정받아 결국 최고 관위인 대덕(大德)으로 승진했다.

2. 2. 제정 목적

관위십이계는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승진이 이루어지도록 한 새로운 관위 제도이다. 이는 혈통에 따라 신분을 결정하는 가바네 제도와 대비된다.[8]일본서기』에는 관위십이계의 제정 목적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목적이 거론된다.

  • 인재 등용: 가문에 구애받지 않고 귀족이 아니더라도 유능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제정되었다.[9] 씨족이 아닌 개인에게 관위를 부여하고 세습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출신이 미천한 자라도 능력에 따라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이는 기존의 호족 세력을 관료 체제로 편입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외교적 위엄: 고구려, 신라, 백제, 그리고 중국의 관품 제도와 유사한 관위 제도를 마련하여 외교 사절의 지위를 명확히 하고, 대외적으로 일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제정되었다.[10] 특히, 제1회 견수사 파견(600년) 당시 수나라로부터 제도 미비를 지적받은 경험이[12] 관위십이계 제정의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3]


관위는 씨성 제도와는 달리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었고, 세습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7] 씨족들은 각자 개별적으로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는데, 관위를 매개로 상하 관계를 맺기 쉽게 하여 관료적인 상하 관계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3. 내용 및 특징

604년(스이코 천황 11년) 12월 5일에 처음 제정된 관위십이계는 대덕, 소덕, 대인, 소인, 대례, 소례, 대신, 소신, 대의, 소의, 대지, 소지의 12계위로 구성되었다.[4] 각 관위는 생사(비단 직물)로 만든 관으로 표시되었으며, 정상부를 맞추고 테두리를 두른 형태였다. 정월 초하루에는 계화(머리 장식)를 추가로 착용했다.[4]

관위십이계는 씨성 제도와 달리 개인에게 부여되었고, 세습되지 않았다.[8][9] 이는 씨족이 아닌 개인의 능력과 공적을 기준으로 관료 체계를 재편하려는 시도였다.[7]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주변국의 관위 제도와 , 의 관품 제도를 참고하여 외교적 필요에 따라 제정된 측면도 있다.[10]

관위 수여 범위는 기내와 그 주변 지역으로 제한되었으며, 주로 중앙의 유력 호족과 기내 주변의 지방 호족이 대상이었다.[18] 최상위 관위인 대덕과 소덕은 신, 련, 군 등 높은 가바네를 가진 자들이 차지했고, 대인·소인에는 높은 가바네와 낮은 가바네가 혼재했다. 대례 이하는 지방 호족이나 하급 반조가 주를 이루었다.[19]

국박사 고향현리가 소덕, 불사 안작지리가 대인 등 특별한 능력으로 높은 관위를 받은 사례도 있지만, 오노노 이모코처럼 눈에 띄는 승진 사례는 드물었다.[21] 출신에 따라 관위가 정해지고 대부분 변동이 없는, 비교적 고정적인 신분 제도였다.[21]

관위십이계는 647년 칠색십삼계관 제정으로 이어졌고, 648년 폐지되었지만, 이후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율령제의 위계 제도로 발전했다.

3. 1. 관위의 구성

새로운 관위 제도와 신분 계급에 따른 인사의 구별점은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승진이 이루어지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 제도는 기존의 혈통에 따라 신분을 결정하는 가바네 제도와 대비된다. 관위 제도를 통해 승진한 가장 잘 알려진 사례 중 하나는 오노노 이모코이다. 이모코는 607년, 수나라에 사신으로 처음 파견되었을 때 정오위(正五位)였지만, 608년 수나라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의 공적, 특히 외교적 성과를 인정받아 결국 최고 관위인 대덕(大德)으로 승진했다.

각 계위에 할당된 것으로 여겨지는 다양한 계위와 색상은 다음 표와 같다.

계위한자로마자영어색상
1大徳다이토쿠(Daitoku)최고의 덕심자색
2小徳쇼토쿠(Shōtoku)작은 덕연자색
3大仁다이진(Daijin)최고의 인심청색
4小仁쇼진(Shōjin)작은 인담청색
5大礼다이레이(Dairei)최고의 예심적색
6小礼쇼레이(Shōrei)작은 예연적색
7大信다이신(Daishin)최고의 신의심황색
8小信쇼신(Shōshin)작은 신의연황색
9大義다이기(Daigi)최고의 정의심백색
10小義쇼기(Shōgi)작은 정의연백색
11大智다이치(Daichi)최고의 지혜심흑색
12小智쇼치(Shōchi)작은 지혜연흑색



관위의 명칭 중 덕을 제외한 다섯 가지는 유교의 덕목인 오상이다. 오상은 인의예지신으로 나열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관위십이계는 인예신의지라는 익숙하지 않은 순서를 취하고 있다. 이는 오행 사상의 목화토금수에 대응하는 것이다[28]。오행의 배열에는 두 종류가 있으며, 그 중 오행상생은 목은 화를 낳고, 화는 토를 낳는 관계를 목화토금수의 순서로 나타낸다. 이를 대응하는 덕으로 바꾸면 인예신의지가 얻어진다. 관위십이계는 오행상생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29]

덕에 대해서는 오행과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쇼토쿠 태자 전력』은 덕은 인 이하의 다섯 가지를 합한 것이기 때문에 최고로 삼았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통설이다[30]

오행 사상은 중국의 사상적 산물이지만, 인예신의지의 순서로 오상을 나열하여 지위의 표시로 삼고, 덕을 그 위에 둔다는 발상에 대해서는, 일본 독자적인 것으로 보는 설과, 중국의 도교의 영향으로 보는 설이 나뉜다. 전통적인 통설은 관위십이계를 입안한 일본인의 창안으로 생각했다[31]。특히 순서를 바꾸어, 신과 예를 위에 둔 점에 17조 헌법의 사상, 나아가 쇼토쿠 태자의 사상의 반영을 보는 사람도 있다[32]。일본 창안설의 논거에는 중국의 문헌에 덕인예신의지의 배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있었다[33]

그러나 1981년에 도교 연구자인 후쿠나가 코지가 5세기 성립의 도교 경전 『태소랑서』에 덕인예신의지의 배열이 그대로 있다고 지적하여 도교의 영향을 설파하면서 학설 상황이 바뀌었다[34]。별도로, 수나라의 소길 저 『오행대의』에, 인예신의지를 이 순서로 설명하고, 그것들이 합쳐져 덕을 완수한다는 취지의 글이 있는 것으로부터, 견수사가 수나라로부터 섭취했다는 설도 있다[35]

관위·관직을 12개로 나누는 제도는 고구려의 관위나 북주의 면(관의 일종)에 선례가 있다. 다만, 기준 수로서 12를 사용하는 것은 십이지, 십이궁, 십이성 등 중국에 예가 많아, 특정 제도의 계승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36]

3. 2. 관위와 관(冠)

고분 시대의 5세기부터 일본의 지배층은 관을 착용했으며, 한반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금속제(대부분 금동) 관이 고분부장품으로 발견되었다. 역시 5세기에 해당하는 『일본서기』의 안강 천황기 및 유랴쿠 천황기에 보이는 압목주만도 이 형식이라고 여겨진다.[22][23]

십이계 시행기에도 관위가 아닌 관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십이계 위에 있던 소가 대신가에는 자색 관이 있었고, 황족도 자신의 관을 착용했다. 아래쪽에서는, 역시 관위를 가지지 않은 지방 호족이 자신의 관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며, 이세국의 아라키다 씨가 대대로 적관을 착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4] 후지와라 씨의 『가전(가계도)』에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청년일 때 양가의 자녀에게 일제히 비단 관이 수여되게 되었다고 하며, 이것 또한 십이계 외의 관으로 해석된다.[25] 하지만 소가 씨의 자색 관을 포함하여 이들 사료의 신뢰성을 낮게 보고, 후세의 조작으로 간주하는 학자도 많다.[26]

관위는 복장의 규정과 연동되는 것으로, 스이코 천황 16년 8월의 당나라 사신 배세청의 접대, 그리고 천황과 신하의 약렵 때(스이코 천황 19년 5월 5일, 20년 5월 5일), 관위에 따라 복장과 머리 장식을 구분한 것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27]

십이계의 관위는 시(絁, 얇은 비단)라는 천으로 만들어졌으며,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체는 자루 모양의 모자이며, 그 주위에 수 센티미터 또는 수십 센티미터의 테두리가 있고, 장식을 부착하는 경우도 있다. 관에는 관위에 따라 다른 색이 정해져 있었지만, 『일본서기』 등의 여러 사료는 무엇이 어떤 색에 해당하는지를 나타내지 않는다.[37] 오행오색설을 가장 유력한 것으로 하여 다양한 추정설이 제기되었지만, 어느 것도 확증은 없다.[38]

관위와 색상
계위한자로마자 표기영어색상
1大徳다이토쿠(Daitoku)최고의 덕심자색
2小徳쇼토쿠(Shōtoku)작은 덕연자색
3大仁다이진(Daijin)최고의 인심청색
4小仁쇼진(Shōjin)작은 인담청색
5大礼다이레이(Dairei)최고의 예심적색
6小礼쇼레이(Shōrei)작은 예연적색
7大信다이신(Daishin)최고의 신의심황색
8小信쇼신(Shōshin)작은 신의연황색
9大義다이기(Daigi)최고의 정의심백색
10小義쇼기(Shōgi)작은 정의연백색
11大智다이치(Daichi)최고의 지혜심흑색
12小智쇼치(Shōchi)작은 지혜연흑색



덕을 제외한 관의 색은 일반적으로 오행에 대응하는 오색으로 여겨지며, 이에 따르면 인이 , 예가 , 신이 황, 의가 , 지가 이 된다.[39] 에도 시대의 국학자 타니가와 시세이는 대소를 농담으로 구분했지만, 그것은 후의 제도에서 유추한 것이다.[40]

오행설의 난점은 의의 백에 있다. 백은 고대 일본에서 존귀한 색으로 여겨졌으며, 후의 대보령 (701년)에서는 천황만의 의복 색으로 정해졌다.[41] 대보령 이전의 천황의 색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칠색십삼계관에서 관위사십팔계까지의 여러 제도에서 백이 관위의 색, 즉 황족 신하의 색으로 사용된 흔적이 없다. 대의·소의와 같은 하급의 색으로 사용되었는지 의문이 남는다.[42]

오행에 의하지 않고, 후대의 제도를 거슬러 올라가거나, 수나라의 제도를 적용하여 추정하는 설도 있다. 칠색십삼계관은 일곱 가지 색의 관을 대소로 나누는 것으로, 그 중 자, 청, 흑 3색이 관위의 이름에 나타난다.[43] 이 세 가지 색을 취하여 덕이 적, 인이 청, 예신의지가 흑으로 적용되거나, 거기에 복색의 비(적), 감, 녹을 더하여 덕이 자, 인이 적, 예가 청, 신이 감, 의가 흑, 지가 녹으로 할당하는 설이 있다. 『수서』 예의지에서 의복 색의 제도를 취하여, 덕인예가 자, 신이 비, 의가 녹, 벽이 지로 하는 설도 있다.[44]

최고위에 대해서는 오행에서 적용할 수 없다. 사이메이 천황 2년 (642년) 10월에 소가노 에미시가 사적으로 자관을 아들 이루카에게 수여하고 대신으로 의했다고 하는 것이 단서가 된다. 에미시·이루카는 최고 대덕이었다고 추정하며, 가 덕의 색일 것이라는 설이 에도 시대부터 오랫동안 행해졌다.[45] 그러나 대신이 십이계에서 초연했다고 하면, 대덕·소덕을 자관으로 하는 적극적 근거는 없어진다.[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가 5품 이상의 의복을 자색으로 한 것으로부터의 유추로 자색을 대덕·소덕에 적용하는 설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며,[47] 자색설은 상기 비오행의 여러 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굳건한 면이 있다.[48] 자색 이외의 색으로는, 후의 칠색십삼계관에서 유추하여, 비단 (무늬를 짜 넣은 고급 비단)으로 하는 설이 있다.[49]

관위의 색에 대한 여러 설
관위오행설비오행설
농박 구분농박 구분 없음덕관이 비단칠색십삼계에서수서에서
대덕진자비단
소덕박자
대인진청
소인박청
대례진적
소례박적
대신진황
소신박황
대의진백
소의박백
대지진흑
소지박흑


3. 3. 운영 방식

관위십이계는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승진이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혈통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가바네 제도와는 대조적이다. 오노노 이모코는 607년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정오위(正五位)였으나, 608년 외교적 성과를 인정받아 최고 관위인 대덕(大德)으로 승진한 대표적인 사례이다.[14]

관위 수여는 천황이 형식적으로 담당했다.[14] 과거에는 쇼토쿠 태자의 업적으로 여겨졌으나,[15] 소가노 마코의 관여 또한 크게 인정받고 있다. 학자에 따라 쇼토쿠 태자의 주도권에 대한 의견은 다르지만, 관위 수여 결정은 당시 쇼토쿠 태자와 소가노 마코의 공동 결정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14]

소가노 마코와 그의 아들 에미시, 손자 이루카는 관위를 받지 않았다. 일본서기에 소가노 에미시가 아들 이루카에게 사적으로 자관을 수여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소가 대신은 십이계의 관위를 받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16] 이들은 관위를 수여하는 입장이었고, 쇼토쿠 태자 등의 황족도 관위 대상이 아니었다.[17]

관위는 조정에 출사하는 개인만이 받았으며, 수여 범위는 기내와 그 주변으로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 및 기내 주변의 유력 호족은 관위를 받았지만, 다른 지역 호족은 받지 못했다.[18]

최상위 관위인 대덕과 소덕은 신, 련, 군과 같은 높은 가바네를 가진 자들이 차지했다. 대인·소인에는 높은 가바네와 낮은 가바네가 섞여 있었고, 대례 이하는 지방 호족이나 하급 반조가 주를 이루었다.[19]

국박사 고향현리가 소덕, 불사 안작지리가 대인 등 높지 않은 씨족 출신자가 특별한 능력으로 높은 관위를 받은 예도 있지만, 오노노 이모코와 같이 현저한 승진 사례는 드물다. 율령제 하의 위계처럼 출신에 따라 승진 속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출신에 따라 관위가 정해지고 대부분 변동이 없는 고정적인 신분 제도였다.[21]

4. 다른 제도와의 관계

관위십이계는 604년 (스이코 천황 11년)에 제정된 일본 최초의 관위 제도로, 647년 칠색십삼계관으로 개정되었다가 648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몇 차례 개정을 거쳐 율령제의 위계 제도로 이어졌으며, 그 유제는 현대까지 이어진다.

관위십이계는 이전의 씨성 제도와 달리 개인에게 관위를 부여하고 세습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졌다.[8][9] 이는 씨족이 아닌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관료를 등용하고, 관위를 통해 관료적 상하 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당시 고구려, 신라, 백제는 유사한 관위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중국에도 관품 제도가 있었다. 이러한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에서 사절의 지위와 그에 상응하는 대우는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관위는 사절의 지위를 명확히 보여주는 지표였으며,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정비된 국가임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10]

4. 1. 한국 삼국시대의 관위 제도

고구려, 신라, 백제에는 일본의 관위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위는 사람에게 수여되어 직함으로 사용되었으며, 수여 시 출생의 귀천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관위와 비슷하다.[56]

수서』에 따르면 고구려는 12등급의 관이 있었으며, 관의 차이로 등급을 나타냈다. 각 명칭은 옛 관직명이 전용된 것이지만, 일본의 관위 12계와 등급의 수, 관의 차이를 동반하는 점이 유사하다.[57] 신라는 17등급의 관이 있었고 이 또한 관의 차이를 동반하였다.[58] 『수서』는 백제의 관에 16품이 있다고 기록하는데, 백제의 16등급 관위는 일본의 관위와 유사하며, 띠의 색을 나누고 고위 관직에는 장식을 달았다.[59] 백제 16계 중 12계의 명칭은 한어를 사용하여 정연하게 설계되었으며, 이 점에서도 관위 12계와 유사하다.[60] 천으로 만든 두건을 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백제의 풍습이다.[61]

이러한 삼국시대 관위 제도의 성립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일본의 관위보다 앞선 것은 확실하며, 사신의 왕래가 있는 이웃 나라의 제도로서 알려져 있었다.

한국의 제도는 옛 중국의 제도를 본떠 만든 것이기 때문에, 관위 12계는 간접적으로 중국 제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62] 일본인이 한국 삼국의 관위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어느 쪽에 비중을 두든, 하나의 모델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여러 제도를 참고하여 독자적인 제도를 고안했을 것이다.[63]

고대 동아시아에서 관리의 복장은 지배 질서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기능을 가졌으며, 특정 국가의 제도를 그대로 채용하는 것은 그 나라의 지배 체제에 복속됨을 의미했다. 소중화 의식을 가진 당시 일본은 한국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중국에 대해서도 독자성을 가진 제도를 추구했다. 관위 12계는 중국적인 예 질서를 한국, 중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내기 위한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64]

4. 2. 중국의 관품 제도

관위십이계와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 존재했던 관품 제도는 관직의 서열을 정하는 체계였으며, 사람의 서열을 매기는 관위·위계 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51] 관위는 수나라·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관위를 작(爵)이라고도 불렀지만, 수·당의 작은 관위와도 관품과도 달랐으며, 진나라·한나라 시대의 20등작이 관위에 유사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등급이었다.[52]

관이나 옷 색깔로 관리의 등급을 나타내는 방식은 본래 중국에는 없었으며, 후한 말 위나라 무제(조조)가 천으로 두건을 만들어 그 색깔로 귀천을 나타낸 것이 시초이다.[53] 남북조 시대 북조의 북위에서 정해진 오등 공복은 오색 복색으로 등급을 나타냈고, 이것이 품(관품)에 따라 색을 나누는 북주의 제도로 이어졌다.[54] 북주에서는 등급에 따른 구분은 아니지만, 역무별로 12종의 면(관의 일종)을 정하고, 그것이 오행의 색으로 정해져 있었다.[55]

관위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일본뿐이지만, 고구려, 신라, 백제에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동시대적으로는 한국의 관위에 유사하며, 이를 주로 참고했다는 설과 주로 중국의 고전 문헌을 참고하여 고안했다는 설이 있다.[50]

고구려·백제·신라의 관위는 사람에게 수여하여 직함으로 삼는 점, 수여할 때 출생의 귀천을 중시하는 점에서 일본의 관위와 유사하다.[56]수서고구려전이 전하는 고구려의 관은 12등급이며, 관의 차이로 등급을 나타냈다. 이 12등급 각 명칭은 옛 관직명이 전용된 것이지만, 일본의 관위 12계와 위의 수와 관의 차이를 동반하는 점도 유사하다.[57] 신라의 17등급도 관의 차이를 동반하는 위였다.[58]수서백제전이 관에 16품이 있다고 기록하는 백제의 16등급 관위는 일본의 관위와 동일하며, 띠의 색을 나누고, 고위 관직에는 장식을 달았다.[59] 백제의 16계 중 12계의 명칭은 한자를 사용하여 정연하게 설계되어 있어, 그 점에서 관위 12계와 유사하다.[60] 천으로 만든 두건을 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백제의 풍습이다.[61]

조선 삼국의 관위 성립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일본의 관위보다 앞선 것은 확실하며, 사신의 왕래가 있는 이웃 나라의 제도로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조선을 중시하는 설을 취하는 경우에도, 그 조선의 제도는 옛 중국의 제도를 본떠 만든 것이기 때문에, 관위 12계는 간접적으로 중국 제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62] 어느 쪽에 비중을 두든, 하나의 모델을 단순하게 모방한 것이 아니라, 여러 제도를 참고하여 독자적인 제도를 고안했을 것이다.[63]

고대 동아시아에서 관리의 복장은 그것과 일체가 되는 의식과 함께 지배 질서를 가시화하는 기능을 가졌다. 어떤 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채용하는 것은 그 나라의 지배 체제에 대한 복속을 의미했다. 신라백제에 대해 우월적인 소중화 의식을 가졌던 당시 일본은 조선 제국의 단순한 모방은 하지 않고, 중국에 대해서도 독자성을 가진 제도를 추구했다. 관위 12계는 중국적인 예 질서를 조선 삼국 및 중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내기 위한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64]

4. 3. 율령제 하의 위계 제도

새로운 관위 제도와 신분 계급에 따른 인사의 구별점은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승진이 이루어지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 제도는 기존의 혈통에 따라 신분을 결정하는 '''가바네''' 제도와 대비된다. 관위 제도를 통해 승진한 가장 잘 알려진 사례 중 하나는 오노노 이모코이다. 이모코는 607년 수나라에 사신으로 처음 파견되었을 때 정오위(正五位)였지만, 608년 수나라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의 공적, 특히 외교적 성과를 인정받아 결국 최고 관위인 대덕(大德)으로 승진했다.

5. 역사적 의의 및 평가

관위십이계는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승진이 가능한 새로운 관위 제도였다. 이는 혈통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가바네 제도와는 대조적이다.[18] 오노노 이모코는 607년 수나라에 사신으로 처음 파견되었을 때 정오위(正五位)였으나, 608년 두 번째 방문에서의 외교적 성과를 인정받아 최고 관위인 대덕(大德)으로 승진한 대표적인 사례이다.[19]

관위는 조정에 출사하는 개인에게만 주어졌으며, 수여 범위는 기내와 그 주변으로 제한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유력 호족과 기내 주변의 지방 호족이 주로 관위를 받았고, 다른 지역 지방 호족은 받지 못했다. 이는 조정의 지배력 한계를 보여준다.[18]

최상위 관위인 대덕과 소덕은 신, 련, 군과 같은 높은 성(카바네)을 가진 자들이 차지했다. 대인·소인에는 높은 카바네와 낮은 카바네가 섞여 있었고, 대례 이하는 지방 호족이나 하급 반조가 주를 이루었으며, 높은 카바네는 소수였다.[19]

국박사인 고향현리가 소덕, 불사인 안작지리가 대인 등, 높지 않은 씨족 출신자가 특별한 능력과 공적으로 높은 관위를 받은 예가 있다. 관위십이계는 문벌을 타파하고 실적에 따른 인재 등용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20], 오노노 이모코와 같이 파격적인 승진 사례는 드물었다. 오히려 출생의 귀천에 따라 관위가 정해지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 관위에서 변동이 없는 고정적인 신분 제도였다는 평가도 있다.[21]

6. 논란 및 쟁점

관위십이계는 603년에 제정된 일본 최초의 관위 제도로, 시행 과정에서 여러 논란과 쟁점이 존재했다.

관위의 색상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등의 사료에 명확한 기록이 없어[37], 오행사상에 따른 오색설 등 다양한 추정설이 제기되었으나 확증된 것은 없다[38]。 특히 '의(義)'에 해당하는 백색은 고대 일본에서 존귀한 색으로 여겨져 천황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41], 하급 관위에 백색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42]。 최고위인 '덕(德)'의 색상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대립하는데, 에미시가 아들 이루카에게 사적으로 자관을 수여했다는 기록을 근거로[45] 자색(紫色)이라는 설이 유력했으나, 소가 대신(大臣)이 십이계와 별개였다는 해석이 나오면서[46] 다른 색상일 가능성도 제기된다[49]

관위 수여와 관련하여, 형식적인 수여자는 천황이었으나[14], 실제로는 섭정쇼토쿠 태자와 대신 소가노 우마코가 공동으로 인사권을 행사했다는 것이 중론이다[14]우마코와 그 후계자들은 관위를 받는 대상이 아니었으며[16], 쇼토쿠 태자 등의 황족도 관위 수여 대상이 아니었다[17]

6. 1. 관위 색상에 대한 논쟁

다음 표는 각 계위에 할당된 것으로 여겨지는 다양한 계위와 색상을 나열한 것이다.

관위의 색에 대한 여러 설
계위한자로마자영어색상
1大徳다이토쿠(Daitoku)최고의 덕심자색
2小徳쇼토쿠(Shōtoku)작은 덕연자색
3大仁다이진(Daijin)최고의 인심청색
4小仁쇼진(Shōjin)작은 인담청색
5大礼다이레이(Dairei)최고의 예심적색
6小礼쇼레이(Shōrei)작은 예연적색
7大信다이신(Daishin)최고의 신의심황색
8小信쇼신(Shōshin)작은 신의연황색
9大義다이기(Daigi)최고의 정의심백색
10小義쇼기(Shōgi)작은 정의연백색
11大智다이치(Daichi)최고의 지혜심흑색
12小智쇼치(Shōchi)작은 지혜연흑색



십이계의 관위는 시(絁, 얇은 비단)라는 천으로 만들어졌으며, 본체는 자루 모양의 모자이고 그 주위에 수 센티미터 또는 수십 센티미터의 테두리가 있었다. 장식을 부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관에는 관위에 따라 다른 색이 정해져 있었지만, 『일본서기』 등의 여러 사료는 무엇이 어떤 색에 해당하는지를 나타내지 않았다[37]。오행오색설을 가장 유력한 것으로 하여 다양한 추정설이 제기되었지만, 어느 것도 확증은 없었다[38]

덕을 제외한 관의 색은 일반적으로 오행에 대응하는 오색으로 여겨지며, 이에 따르면 인이 , 예가 , 신이 황, 의가 , 지가 이 된다[39]。 에도 시대의 국학자 타니가와 시세이는 대소를 농담으로 구분했지만, 그것은 후의 제도에서 유추한 것이었다[40]

오행설의 난점은 '의'의 백색에 있다. 백색은 고대 일본에서 존귀한 색으로 여겨졌으며, 후의 대보령 (701년)에서는 천황만의 의복 색으로 정해졌다[41]。 대보령 이전의 천황의 색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칠색십삼계관에서 관위사십팔계까지의 여러 제도에서 백색이 관위의 색, 즉 황족 신하의 색으로 사용된 흔적이 없다. 대의·소의와 같은 하급의 색으로 사용되었는지 의문이 남는다[42]

오행에 의하지 않고, 후대의 제도를 거슬러 올라가거나, 의 제도를 적용하여 추정하는 설도 있다. 칠색십삼계관은 일곱 가지 색의 관을 대소로 나누는 것으로, 그 중 자, 청, 흑 3색이 관위의 이름에 나타난다[43]。 이 세 가지 색을 취하여 덕이 적, 인이 청, 예신의지가 흑으로 적용되거나, 거기에 복색의 비(적), 감, 녹을 더하여 덕이 자, 인이 적, 예가 청, 신이 감, 의가 흑, 지가 녹으로 할당하는 설이 있다. 『수서』 예의지에서 의복 색의 제도를 취하여, 덕인예가 자, 신이 비, 의가 녹, 벽이 지로 하는 설도 있다[44]

최고위에 대해서는 오행에서 적용할 수 없다. 사이메이 천황 2년 (642년) 10월에 소가가 에미시가 사적으로 자관을 아들 이루카에게 수여하고 대신으로 칭했다는 것이 단서가 된다. 에미시·이루카는 최고 대덕이었다고 추정되며, 가 덕의 색일 것이라는 설이 에도 시대부터 오랫동안 행해졌다[45]。 그러나 대신이 십이계에서 초연했다고 하면, 대덕·소덕을 자관으로 하는 적극적 근거는 없어진다[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가 5품 이상의 의복을 자색으로 한 것으로부터의 유추로 자색을 대덕·소덕에 적용하는 설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며[47], 자색설은 상기 비오행의 여러 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굳건한 면이 있다[48]。 자색 이외의 색으로는, 후의 칠색십삼계관에서 유추하여, 비단 (무늬를 짜 넣은 고급 비단)으로 하는 설이 있다[49]

관위의 색에 대한 여러 설
관위오행설비오행설
농박 구분농박 구분 없음덕관이 비단칠색십삼계에서수서에서
대덕진자비단
소덕박자
대인진청
소인박청
대례진적
소례박적
대신진황
소신박황
대의진백
소의박백
대지진흑
소지박흑


6. 2. 소가씨와 관위 십이계

관위를 수여하는 형식적인 수여자는 천황이다.[14] 학설에 따르면, 과거 관위십이계는 주로 섭정·황태자인 쇼토쿠 태자(우마야도 황자)의 업적으로 여겨졌지만,[15] 후에 대신인 소가 마코의 관여가 크게 인정받게 되었다. 학자에 따라 우마야도 황자의 주도권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지에 차이가 있지만, 누구에게 관위를 수여할지를 결정하는 인사권자는 제정 당시에는 양자의 공동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14]

마코와 그의 아들로 대신을 이은 에미시, 더 나아가 그의 아들인 이루카의 관위는 전해지지 않는다. 일본서기에는 소가노 에미시가 아들 이루카에게 사적으로 자관을 수여하여 대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에는 이것이 최고의 관위인 대덕에 해당하며, 에미시·이루카는 대덕을 마음대로 주고받았다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소가 대신은 십이계의 관위를 받지 않았다고 여겨진다.[16] 마코·에미시·이루카는 관위를 수여하는 측이었고, 수여받는 측은 아니었다. 우마야도 황자 등의 황족도 같은 의미로 관위의 대상은 아니었다.[17]

참조

[1] 웹사이트 Court ranks http://wiki.samurai-[...]
[2] 서적 Kodai Ōken no Tenkai (古代王権の展開) Shūeisha 1999
[3] 웹사이트 冠位十二階(かんいじゅうにかい)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01-11
[4] 서적 日本書紀
[5] 서적 日本書紀
[6] 논문 冠位の形態から観た飛鳥文化
[7] 논문 冠位十二階とその史的意義
[8] 서적 大化改新の研究
[9] 서적 大化改新の研究
[10] 논문 推古朝政治の性格
[11] 서적 日本古代国家と律令制
[12] 논문 冠位十二階とその史的意義
[13] 논문 古代冠位制度の変遷
[14] 논문 推古朝政治の性格
[15] 서적 大化改新の研究
[16] 서적 聖徳太子とその時代
[17] 서적 聖徳太子とその時代
[18] 논문 冠位十二階考
[19] 논문 冠位十二階の再検討
[20] 서적 大化改新の研究
[21] 논문 位階制の変遷について
[22] 서적 日本書紀
[23] 서적 日本書紀
[24] 논문 冠位十二考
[25] 문서 増田美子は錦冠が大徳・小徳の冠で、良家の子が小徳を授かったと解釈する
[26] 논문 薫弘道氏『冠位十二階考』読む
[27] 논문 冠位十二階の再検討
[28] 서적 日本書紀通証 臨川書店
[29] 서적 大化改新の研究
[30] 서적 東大寺図書館蔵文明十六年書写『聖徳太子伝暦』影印と研究 臨川書店
[31] 서적 大化改新の研究
[32] 서적 聖徳太子とその時代
[33] 서적 聖徳太子とその時代
[34] 논문 聖徳太子の冠位十二階
[35] 논문 冠位制の基礎的考察
[36] 서적 大化改新の研究
[37] 논문 推古朝冠位十二階の「当色」について
[38] 논문 推古朝冠位十二階の「当色」について
[39] 서적 日本書紀通証 臨川書店
[40] 서적 日本書紀通証 臨川書店
[41] 논문 推古朝冠位十二階の「当色」について
[42] 논문 推古朝冠位十二階の「当色」について
[43] 문서 日本書紀 대화3년
[44] 서적 古代服飾の研究
[45] 서적 日本書紀通証 臨川書店
[46] 논문 冠位十二階考
[47] 서적 書紀集解 臨川書店
[48] 서적 古代王権の展開
[49] 서적 古代服飾の研究
[50] 논문 位階制度の成立
[51] 논문 日本の官位令と唐の官品令
[52] 논문 日本の官位令と唐の官品令
[53] 논문 中国の衣服制と冠位十二階
[54] 논문 中国の衣服制と冠位十二階
[55] 논문 冠位十二階考
[56] 논문 古代官位制度の変遷
[57] 서적 大化改新の研究
[58] 논문 冠位十二階とその史的意義
[59] 서적 大化改新の研究
[60] 논문 冠位十二階とその史的意義
[61] 논문 中国の衣服制と冠位十二階
[62] 논문 位階制度の成立
[63] 서적 大化改新の研究
[64] 논문 古代服制の基礎的考察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