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경주 사천왕사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경주 사천왕사지는 679년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사찰 터이다. 당나라의 신라 침략을 막기 위해 명랑법사가 문두루 비법을 사용하여 호국 불교의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천왕사성전이라는 별도의 부서를 두어 관리했으며, 현재는 절터만 남아있다. 1922년 발굴 조사에서 금당, 탑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금당 북쪽 건물지 용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신라의 절 - 백담사
    백담사는 647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이름 변경과 소실 및 재건을 거쳐 1783년 현재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며, 내설악의 대표 사찰이자 만해 한용운의 저술 활동 장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은둔 생활 장소로 알려져 있고,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기본선원이자 목조아미타불좌상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 신라의 절 - 범어사
    범어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이후 중건되었고, 조선시대 불교 탄압에도 존속하며 근대 고승들의 수행을 통해 선불교 전통을 계승하고, 현재도 한국 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사찰이다.
  • 경주시의 사적 - 불국사
    불국사는 김대성이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중창을 시작하여 신라시대에 완공된 경주시 토함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석가탑과 다보탑 등 국보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복원을 거쳐 현재에 이르러 신라 불교 건축의 정수이자 한국 문화유산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경주시의 사적 - 대릉원
    신라시대 고분군인 대릉원은 경주 황남동 일대에 위치하며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 등의 고분이 있고, 특히 천마총에서는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다.
  • 한국의 없어진 건축물 - 조선극장
    조선극장은 일제강점기 경성부에 개관하여 연극, 영화 상영 등 조선인들의 문화 향유 및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폐관되었다.
  • 한국의 없어진 건축물 - 경성신사
    경성신사는 일제강점기 서울에 세워진 일본 신사로, 남산대신궁으로 시작하여 경성신사로 개칭되었고 국폐소사로 격상되었으나, 일본 패전 후 폐지되어 현재는 숭의여자대학교가 위치하며, 식민지 지배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경주 사천왕사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사천왕사 터 전경(서탑터 방면에서 촬영)
사천왕사 터 전경 (서탑터 방면에서 촬영)
이름경주 사천왕사지
로마자 표기Gyeongju Sacheonwangsa Temple Site
유형사적
지정 번호8
지정일1963년 1월 21일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35-2번지
시대통일신라
소유대한민국 문화재청
면적34,128m2

2. 역사

삼국유사에는 신라경명왕 3년에 사천왕사 오방신이 든 활의 줄이 끊어지고, 벽에 그려진 사자가 우는 등 괴이한 일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1922년 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 주도로 최초 발굴이 이루어졌다.

2. 1. 창건과 호국 불교

679년(신라 문무대왕 19년)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공격하려 하자 당시 당나라에 있던 의상은 당에 갇혀 있는 김인문, 김양도 등으로부터 사전에 이 내막을 듣고 670년(문무대왕 10년)에 귀국하여 사태의 긴급함을 문무대왕에게 알리고 명랑법사(明朗法師)로 하여금 679년에 사천왕사를 짓고 문두루(文豆婁)의 비법(秘法)을 써서 당나라 군대의 침략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말의 혼란기인 경명대왕 3년에 사천왕사 오방신이 든 활의 줄이 끊어지고, 벽에 그려진 사자가 울고 그림 속에서 개가 뛰쳐나와 뜰을 노닐다 다시 그림 속으로 돌아가는 등의 괴이담이 수록되어 있다.

2. 2. 사천왕사성전

신라는 국가 중요 사찰인 사천왕사를 관리하기 위해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이라는 부서를 따로 두었다. 사천왕사성전은 경덕왕 때 감사천왕사부로 잠시 이름이 바뀌었으며, 최고 관리인 금하신은 대아찬(5등급)에서 각간(1등급) 사이의 관등을 가진 진골 귀족만 임명되었다.

3. 발굴 조사

현재 절은 없어지고 남북 길이 105m, 동서 길이 73m의 터만 남아 있다.

3. 1. 1922년 최초 발굴

1922년 최초 조사에서 사천왕사 관련 문헌 및 기초조사를 통해 금당과 양쪽의 탑, 북쪽의 두 건물지를 실측조사하였고, 녹유 귀면와가 발견되었다. 1929년 당시 경성공전 교수이자 건축사인 후지시마 가이지로는 사천왕사터를 답사하고 실측, 현황 조사를 거쳐 추정배치도를 작성하였는데, 한국에서는 쌍탑가람제(雙塔伽藍制)에 따른 최초의 절이다.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남북은 긴 낭무(廊廡)로 둘러 있고 남쪽 낭무의 중앙에는 중문지(中文址), 북쪽 낭무의 중앙에는 강당지(講堂址)가 있다.

절터에는 초석(礎石)·사천주(四天柱)의 초석 등이 있으며, 여기에서 우수한 부조(浮彫)의 당초문(唐草文)이 있는 와당(瓦當)·부전(敷塼)·녹유(綠油)의 화릉형전(花陵形塼)·사천왕의 부조전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3. 2. 후지시마 가이지로의 조사

1929년, 당시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수이자 건축사였던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郎)는 사천왕사터를 답사하고 실측, 현황 조사를 거쳐 추정배치도를 작성하였다. 이는 한국에서 쌍탑가람제(雙塔伽藍制)에 따른 최초의 절이다.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남북은 긴 낭무(廊廡)로 둘러 있고 남쪽 낭무의 중앙에는 중문지(中文址), 북쪽 낭무의 중앙에는 강당지(講堂址)가 있다.

절터에는 현재 초석(礎石)·사천주(四天柱)의 초석 등이 있으며, 여기에서 우수한 부조(浮彫)의 당초문(唐草文)이 있는 와당(瓦當)·부전(敷塼)·녹유(綠油)의 화릉형전(花陵形塼)·사천왕의 부조전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3. 3. 출토 유물

절터에는 현재 초석(礎石)·사천주(四天柱)의 초석 등이 있으며, 여기에서 우수한 부조(浮彫)의 당초문(唐草文)이 있는 와당(瓦當)·부전(敷塼)·녹유(綠油)의 화릉형전(花陵形塼)·사천왕의 부조전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4. 금당 북쪽 건물지에 대한 논의

금당 북쪽에 있는 두 개의 건물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1922년에는 탑지로 알려졌으나, 1929년 후지시마 가이지로는 경루(經樓)로 추정했다가 이후 "정해진 설이 없다"고 하였다. 1996년과 2002년에는 장충식 박사가 문두루법을 시행하던 제단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4. 1. 탑지 vs 경루

1922년 당시에는 금당 북쪽에 있는 두 개의 건물지가 탑지로 알려졌지만, 7년 뒤인 1929년에 사천왕사를 찾은 후지시마 가이지로는 두 개의 건물지를 좌우 경루(經樓), 즉 불경을 보관하는 곳으로 추정하였는데, 이후 그러한 자신의 설을 바꾸어 "이 두 터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정해진 설이 없다"고 하였다.

1996년과 2002년에 장충식 박사에 의해 이 두 건물지는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법을 시행하던 제단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4. 2. 문두루법 제단설

1996년과 2002년에 장충식 박사는 금당 북쪽에 있는 두 개의 건물지가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법을 시행하던 제단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1922년 당시에는 탑지로 알려졌지만, 7년 뒤인 1929년에 사천왕사를 찾은 후지시마 가이지로는 두 개의 건물지를 좌우 경루(經樓), 즉 불경을 보관하는 곳으로 추정하였는데, 이후 자신의 설을 바꾸어 "이 두 터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정해진 설이 없다"고 하였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