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는 대한민국 최상위 프로 축구 리그로, 1983년 출범하여 한국 축구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리그는 K리그1과 K리그2로 구성되며, 각 리그는 승강제를 통해 연결된다. K리그는 1994년 타이틀 스폰서 제도를 도입하여 재정적 기반을 다졌으며, 현재는 12개의 K리그1 구단과 14개의 K리그2 구단이 참여하고 있다.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은 김병지의 708경기이며, 최다 득점은 이동국의 228골이다. K리그는 J리그 모방, 연고지 정책, 심판 매수 대처 등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한국 축구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2. 역사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 축구는 실업 축구 리그와 대학 축구 리그를 운영했지만, 이들은 선수들이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프로 리그가 아니었다. 1979년 대한축구협회(KFA) 회장 최순영은 프로 축구 리그 창설을 계획했고,[4] 이듬해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축구단인 할렐루야 FC를 창단했다.[5] 1982년 한국 프로야구 리그인 KBO 리그가 출범하자, KFA는 축구 인기 저하를 우려했다.[6]
1983년, KFA는 프로 구단 2개(할렐루야 FC, 유공 코끼리)와 준프로 구단 3개(포스코 돌핀스, 대우 로얄즈, 국민은행)를 포함한 '한국 슈퍼리그'를 출범시켰다. 이후 기존 구단들이 프로로 전환하고 새로운 프로 구단들이 리그에 참가하면서 슈퍼리그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초기에는 준프로 리그 우승팀에게 승격 자격을 부여하는 승강제도 시행되었다. (1984년 한일은행, 1985년 상무 FC)
KFA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중 수는 꾸준히 감소했고, 1987년 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한국 프로 축구 리그'로 이름을 바꾼 프로 리그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을 도입했다.[7] 1994년 7월 30일, KFA 산하 프로리그 위원회는 협회로부터 독립하여 "한국 프로축구연맹"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와 축구협회는 2002년 FIFA 월드컵을 대비하여 전국적인 축구 인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분산 정책을 도입했다. 수도 서울에 위치한 여러 구단들이 다른 도시로 이전했지만, 이 정책은 3년 만에 폐지되었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를 포기했기 때문에 실패한 정책으로 여겨진다. 1998년 리그는 현재의 'K리그'로 다시 이름이 변경되었다.[8]
2011 시즌 이후 K리그 챔피언십과 대한민국 축구 리그컵을 폐지하고 2013년에 2부 리그로 분리되면서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1부 리그는 'K리그 클래식', 2부 리그는 'K리그 챌린지'로 명명되었는데, 1, 2부 리그의 명칭이 매우 유사하여 상당한 혼란과 논란을 야기했다.[9] 2018 시즌부터 1부 리그는 'K리그1', 2부 리그는 'K리그2'로 각각 이름이 변경되었다.
2021년 2월, 해외 시장을 위한 OTT 서비스인 K리그 TV가 공식 출시되었다.[10]
2. 1. 창설
1980년대 초, 대한민국 축구는 실업축구와 대학 리그가 중심이었고, 프로 축구 리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1979년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신동아그룹 회장 최순영은 프로 축구 리그 창설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1980년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축구단 할렐루야를 창단했다.
전두환 정부는 스포츠를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수단(3S 정책)으로 활용하려 했고, 축구와 야구 중 한 종목을 프로화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축구는 프로화 준비가 부족했고, 방송 중계 등의 어려움으로 인해 야구가 먼저 프로 리그를 출범시켰다.[17] 1982년, 프로 야구 출범으로 인해 축구는 관중과 관심을 빼앗기며 위기를 맞았다.[17]
이에 축구계는 2개의 프로 구단(할렐루야, 유공)과 3개의 실업 구단(포항제철, 대우, 국민은행)을 묶어 '수퍼리그'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17]대한축구협회 장영근 부회장은 프로 야구에 밀려 축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 최순영 회장에게 건의하여 수퍼리그 출범을 추진했다.[17]
당초 각 구단에 연고지를 배분하고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리그를 운영하려 했으나,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에 프로 선수 출전 여부가 불확실하여 체육부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혼합 운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8] 또한 지역 감정을 우려한 정부의 반대로 지역 연고제를 시행하지 못하고, '전국 도시별 순회 개최 방식'으로 리그를 운영해야 했다.[18] 반면, 1982년 출범한 프로 야구는 지역 연고제를 실시하여 흥행에 성공했다.[19]
1983년 2월 28일, 대한축구협회는 수퍼리그 창설에 합의했고,[21] 3월 3일 '수퍼리그 위원회'를 발족하여 본격적인 창설 준비에 돌입했다.[22] 5월 8일, 동대문운동장에서 할렐루야와 유공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수퍼리그가 공식 출범했다.[23]
1984년에는 체육부의 외래어 사용 금지 조치에 따라 리그 명칭이 '축구대제전 수퍼리그'로 변경되었다.[24] 현대 호랑이와 럭키금성 황소가 리그에 합류하여 총 6개의 프로 구단이 참가하게 되었다.
2. 2. 위기
1980년대 중후반, K리그는 관중 감소, 실업 구단의 프로 전환 지연, 국가대표팀 차출 문제 등으로 인해 리그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1985년에는 평균 관중이 5,393명으로 급감했고, 1986년에는 경기당 3,500명만이 입장하여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다.[25] 이러한 위기는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축구단 할렐루야가 아마추어로 전환을 선언할 정도로 심각했다.
프로 구단과 실업 구단이 함께 리그를 운영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도 제기되어,[25] 1986년에는 프로 구단만 참가하는 프로축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지만, 이 대회 역시 흥행에 실패했다.
1987년, K리그는 5개의 프로축구단만으로 운영되는 진정한 프로 리그로 재탄생했다. 프로축구위원회가 발족되어 독립적인 리그 운영을 시작했고, 광역지역연고제를 바탕으로 한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이 도입되었다. 홈팀은 흰색, 원정팀은 유색 유니폼을 입었고, 주말 2연전이 새롭게 도입되었다.[27][28]
그러나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인해 서울과 부산 등 주요 도시의 경기장 사용이 금지되면서 리그는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한, 주말 2연전은 선수 부상 등의 문제로 1년 만에 폐지되었고,[29] 홈팀과 원정팀의 유니폼 색상 규정이 변경되었다.[30]
2. 3. 확립
1994년대한축구협회 산하 프로리그위원회가 독립하여 한국프로축구연맹으로 새롭게 출범하였으며, 초대 회장은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겸직하였다.[31]전북 버팔로가 호남 지방을 연고로 리그에 참가하였으나 재정난으로 한 시즌 만에 해체되었다. 이후 현대자동차 주도로 전북 다이노스가 창단되어 1995 시즌부터 리그에 참가하였고, 전남 드래곤즈도 전라남도를 연고로 리그에 합류하였다. 이 시즌에는 최초로 타이틀 스폰서가 도입되었다.[32]
1996년에는 구단 완전 지역 연고제가 전격 시행되어 구단 이름에 지역명을 우선 사용하고, 미디어에도 기업명 대신 연고지명을 우선 사용하도록 하였다. 한국프로축구연맹과 대한민국 정부는[33][34]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 전국적인 프로축구 열기 확산과 서울의 축구전용구장 건설을 목표로[35]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1995년 말까지 서울 전용구장 건립 계획을 수립하는 구단만 서울 잔류를 허용한다는 정책에 따라 서울특별시를 연고로 하던 일화 천마(현 성남 FC), LG 치타스(현 FC 서울), 유공 코끼리(현 제주 유나이티드)는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였고, 서울 연고지는 공동화(空洞化) 되었다.[36]
1998년에는 고종수, 이동국, 안정환 등 스타 선수들의 등장으로 총 관중 2,117,448명을 기록하며 최초로 200만 관중을 돌파하는 등 프로축구 중흥기를 맞았다.
2. 4. 확대기
2000년, 천안 일화 천마가 구단 완전 지역 연고제 시행 4년 만에 연고지를 이전하여 성남 일화 천마가 되었다. 2003년에는 2002년 FIFA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최초의 시민구단인 대구 FC가 리그에 참가하였다.[37] 2004년에는 인천 유나이티드가 두 번째 시민구단으로 리그에 참가했다. 안양 LG 치타스가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FC 서울로,[38] 2006년에는 부천 SK가 제주도로 연고지를 이전하여 제주 유나이티드 FC로 구단 명칭을 변경하였다.[39] 도민구단 경남 FC도 새롭게 참가하였다.[40] 또한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이루어 출범한 대전 시티즌이 2005년부터 시민주 공모를 실시하고 2006년부터는 시민구단으로 전환하였다.[41]
2008년 말에는 강원도를 광역연고로 삼는 강원이 출범하여 2009년부터 참가하였다. 강원의 리그 참여로 K리그는 수도권, 경상권, 전라권, 충청권, 강원권, 제주권에 최소 1개 이상의 구단을 보유하며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로 전국화를 달성하였다. 2009년에는 서울특별시를 연고로 한 서울 시민구단의 창단이 추진되었으나 무산되었고,[42]광주광역시의 신생팀 창단 역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기업구단 창단 제안 거절과 현대미포조선의 스폰서 참여를 통한 시민구단 창단 실패로 무산되었다.[43]
2010년에는 '5MM 프로젝트'가 시행되었다.[44] 경기 지연 행위 대응 강화, 경고 누적 결장 규정 완화 등 실제 경기 시간을 늘리기 위한 제도와 언론 인터뷰 시간 및 장소 확대, 골 세레머니 규제 완화 등 팬과 소통하기 위한 제도가 마련되었다. 선수 연봉 공개를 점진적으로 시행하기로 합의하여 전체 선수단 연봉부터 공개하기로 하였으며, 교체 대기 선수 인원을 6명에서 7명으로 늘렸다. 변병주 감독 사태로 불거진 에이전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이전트 등록제도도 시행하였다.
2010년 5월 5일, 서울과 성남의 경기에 60,747명의 관중이 몰려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45]2010 시즌 후 광주광역시가 시민구단 창단 공약을 지켜 2011 시즌부터 광주 FC가 참가하였고,[46]상무는 경상북도상주시로 연고지를 옮겨 16개 구단 체제가 되었다.[47]
2011년 5월 25일, K리그 승부조작 사건이 밝혀졌다. 3달간의 수사 끝에 혐의가 밝혀진 선수 50명은 영구제명 처분을 받았다.
2. 5. 승강제 시행
2012 시즌을 앞두고 승강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프로축구연맹은 2013 시즌부터 본격적인 승강제를 실시하는 것을 목표로 태스크포스팀을 신설하고 외부 컨설팅 업체에 '한국형 승강제' 모델 수립을 의뢰하였다.[48] 오랜 논의 끝에 K리그 팀 개수를 12개 팀으로 축소하는 동시에 4개의 팀을 가칭 프로 2부리그로 강등시켜 승강제를 진행하는 안이 급부상하였다. 결국 2012 시즌 K리그에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리그 진행 방식을 본뜬 스플릿 시스템을 도입하여 강등 팀 4팀을 결정하는 것으로 확정되는 듯 하였으나 시민구단들의 반발로 가칭 프로 2부리그로 강등되는 K리그 팀의 숫자가 4팀에서 2팀으로 축소되었다. 강등팀은 리그 최하위팀과 1부리그 구성 요건을 갖추지 못한 상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상주와 국군체육부대가 이에 반발, 스플릿 이후 잔여 경기를 보이콧하면서 스플릿 14경기 모두 기권패 처리되었다. 추후 논란 끝에 상주는 2013년 2부리그 참가가 결정되었고 추후에 아시아 축구 연맹이 요구한 구단 라이센스 조건을 충족하면 K리그 클래식에도 승격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2012 시즌 15위를 기록한 광주 FC가 강등되어 2013 시즌 2부리그에서 뛰게 되었다.
2018 시즌부터는 K리그 클래식이 K리그1으로, K리그 챌린지는 K리그2로 각각 명칭이 바뀌었다.
3. 구단
2012 시즌을 앞두고 승강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여, 2013 시즌부터 K리그1과 K리그2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다. K리그1은 1부 리그, K리그2는 2부 리그 역할을 하며, 매 시즌 종료 후 승강 플레이오프를 포함한 승강제를 통해 리그 간 팀 이동이 이루어진다.[48] 2018 시즌부터는 K리그 클래식이 K리그1으로, K리그 챌린지는 K리그2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다.
K리그1의 하위 리그인 K리그2는 2013년에 창설되었다. 1983년부터 2012년까지는 K리그에 2부 리그가 없었으며, 2013년에 K리그2가 창설되면서 K리그는 승강제를 갖춘 1, 2부 리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K리그2의 역대 우승팀과 준우승팀, 구단별 우승 횟수 등은 별도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K리그 승강제는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K리그1(1부 리그)과 K리그2(2부 리그) 사이에 팀들이 승격되거나 강등되는 시스템이다.
2012년 시즌에는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방식을 본뜬 스플릿 시스템을 도입하여 강등 팀을 결정했다. 당초 4팀을 2부 리그로 강등시킬 예정이었으나, 시민구단들의 반발로 2팀으로 축소되었다. 리그 최하위 팀과 1부 리그 구성 요건을 갖추지 못한 상주가 강등 대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상주와 국군체육부대는 이에 반발하여 잔여 경기를 보이콧했고, 결국 2013년 2부 리그 참가가 결정되었다. 또한, 2012 시즌 15위를 기록한 광주 FC도 강등되었다.
K리그 엠블럼은 1994년 처음 도입된 이래 총 다섯 차례 변경되었으며, 2021년부터 현재 엠블럼을 사용하고 있다.
8. 스폰서십
K리그는 출범 원년인 1983년부터 1993년까지 타이틀 스폰서 없이 운영되었다. 1994년, 국내 프로 스포츠 리그 중 최초로 타이틀 스폰서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하이트맥주(당시 조선맥주)가 최초의 스폰서로 참여하여 '하이트배 코리안리그'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후 2020년까지 총 9개의 기업이 K리그의 타이틀 스폰서로 참여했다. K리그2는 2013년 출범부터 타이틀 스폰서 제도를 도입하였다.
K리그 원년인 1983 시즌 '낫소 SSC-5 88'을 공식 경기구로 사용한 것이 시초이다.
K리그 공식 경기구의 역사는 크게 ▲낫소, 스타 등 국산 브랜드(1983년~1996년) 시대 ▲아디다스(1997년) 시대 ▲나이키(1998년~2011년) 시대 ▲아디다스(2012년~현재) 시대로 나눌 수 있으며[52] 1998년부터 독점 공식 경기구 시대가 시작되었다.[53]
10. 유니폼과 배번 제도
1998년 당시 10개 구단 중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제외한 9개 구단이 아디다스와 킷스폰서 계약을 한 적이 있지만,[54] 그 외에는 공식적으로 독점 킷스폰서를 두지 않고 있으며 각 구단별로 자율적으로 킷스폰서 계약을 하고 있다.
1994 시즌에는 선수 포지션을 쉽게 식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수 고유 배번 제도가 아닌, 선발 선수는 1번부터 11번, 교체 선수는 12번에서 16번을 사용하는 포지션별 배번 제도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2번을 서포터즈 배려 차원에서 사용하지 않는 구단도 있다.
11. 슬로건 및 캐치 프레이즈
시즌
슬로건 및 캐치프레이즈
2012
열정 놀이터 352
2016
너와 나 우리의 K리그
2021
역동과 감동, K리그
12. 연고지 제도
K리그는 1983년 출범 당시부터 지역 연고지 개념을 도입하여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리그를 운영하려 했으나,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에 프로 선수들의 출전 가능 여부가 불확실했고, 지역감정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정부의 우려 때문에 시행되지 못했다.[18] 당시 IOC는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여 프로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제한했기 때문에, 완전한 프로리그 운영 시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두 대회에 선수 선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결국 K리그는 '전국 도시별 순회 개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18]
1983년 K리그 원년에는 할렐루야, 유공, 포항제철, 대우, 국민은행 5개 구단이 참가했으며, 각 구단에 연고지가 배분되었다.
1984년에는 현대 호랑이와 럭키금성 황소가 리그에 참여하면서 연고지가 조정되었다. 할렐루야는 강원, 럭키금성은 충남, 충북, 유공은 서울, 현대는 인천, 경기를 맡게 되었다.[55][56]
1987년부터 K리그는 광역지역연고제를 도입하여 모든 구단들이 연고지 내에서 홈경기를 개최하고 중립 도시 경기를 줄였다. 그러나 이미 프로야구가 주요 대도시를 선점한 상황이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인해 부산구덕운동장, 대구시민운동장, 대전한밭운동장 사용이 제한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부터는 단일 도시로 연고지를 한정하는 도시지역연고제가 시행되었다.[58][59][60]
1996년에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시행되어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 이렇게 3개 서울 연고 구단들이 강제적으로 지방으로 이전하였고 구단명에 지역명을 의무적으로 포함시키는 규정이 생겨났다.[58][59][60]
13. 비판
K리그 운영과 관련하여 여러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명칭: 스포츠 신문 기자들이 일본 J리그를 따라 K리그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998 시즌부터 한국프로축구연맹도 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K리그라는 이름이 정착되었으나, J리그를 모방했다는 비판이 있다.[61]
연고지 정책: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과 완전 지역 연고제 시행 이후, K리그는 중소도시 위주로 운영되었다. 1998년 공청회에서 김종환 박사는 대도시 연고지 구조의 프로야구와 경쟁하고 축구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평가했으나,[63]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대도시 위주 연고지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64][65][66] 최근 언론에서는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과 그 후유증, 그리고 대도시 연고지를 활성화시키지 못하는 점을 비판하고 있으며,[67][68][69][70][71][72]허정무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도 서울 연고 구단이 지방으로 이전하는 현상을 만들어낸 정부 지침을 비판했다.[73]
개막전 리그 우승팀 예우: 2012년 한국프로축구연맹은 FA컵 우승팀이 리그 우승팀에게 박수를 쳐주는 예우를 결정했지만, 형평성에 맞지 않고 FA컵 우승의 권위를 깎아내린다는 비판이 있었다.[74]
심판매수 대처:2016년 발생한 전북 현대 모터스 심판매수 사건에 대한 징계가 승점 9점 삭감과 제재금 1억원에 그치면서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있었다.[75]
불리한 기사 재배치 청탁:한국프로축구연맹 홍보팀장이 네이버 스포츠 담당 이사에게 연맹 비판 기사를 재배치해 달라고 청탁한 사실이 드러났다. 실제로 네이버는 전북 현대 모터스 심판매수 사건 관련 비판 기사를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겼다.[76] 이로 인해 한국프로축구연맹과 네이버는 많은 비판을 받았고, 네이버는 대표 명의 사과문을 발표했다.[76]
13. 1. J리그 모방
스포츠 신문 기자들이 일본의 J리그에 빗대어 사용하기 시작한 K리그라는 명칭을 1998 시즌부터 한국프로축구연맹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K리그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는데, J리그를 모방해서 만들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존재한다.[61]
13. 2. 연고지 정책
1996년에 시행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과 완전 지역 연고제 이후 K리그는 안양, 부천, 천안, 수원 등과 같은 중소도시 연고지 위주로 운영되었다. 1998년에 열린 한국프로축구연맹 주최 공청회에서 김종환 스포츠마케팅 박사(2017년 기준으로 대한축구협회 집행부 일반이사[62])는 프로축구 마케팅을 위한 틈새 아이디어로 대도시 연고지 구조의 프로야구와의 경쟁력 강화와 축구 저변 확대를 위한 바람직한 전략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63]
그러나 당시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K리그 저변 확대와 활성화를 위해서 중소도시 위주 연고지 정책에 대해 당시 비어있던 서울, 대구, 광주를 포함한 대도시 위주 연고지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64][65][66] 최근 언론에서는 과거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강제 시행과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서울이라는 국내 프로스포츠 최대 빅마켓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과[67][68][69]프로야구와 달리 대도시 연고지를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존재한다.[70][71][72]
허정무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조차도 2018년 11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은 서울 연고 구단이 지방으로 이전하는 이상한 현상을 만들어냈는데 정부 지침이긴 하지만 프로축구 발전을 위해 당시에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던 정책이라고 비판하였다.[73]
13. 3. 개막전 리그 우승팀 예우
한국프로축구연맹은 2012년 10월 이사회에서 2013년 K리그 클래식 개막전부터 FA컵 우승팀이 리그 우승팀의 선수 입장 때 박수를 쳐주며 예우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FA컵 우승팀도 프로와 아마추어를 통틀어 챔피언인 만큼 형평성에 맞지 않고 FA컵 우승에 대한 권위를 깎아내리는 행동이라는 비판이 있었다.[74]
13. 4. 심판매수 대처
2016년 발생한 전북 현대 모터스 심판매수 사건에 대하여 그해 10월 내려진 승점 9점 삭감과 제재금 1억원이라는 연맹의 징계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있었다.[75]
13. 5. 불리한 기사 재배치 청탁
한국프로축구연맹 홍보팀장이 네이버 스포츠 담당 A 이사에게 '연맹 비판 기사를 잘 보이지 않게 재배치해 달라'고 수시로 청탁했다. 실제로 네이버는 2016년 10월 전북 현대 모터스 심판매수 사건 관련,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솜방망이 처벌 비판 기사를 A 이사의 청탁성 문자를 받고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겼다.[76] 이에 한국프로축구연맹과 네이버는 많은 비판을 받았고, 네이버는 2017년 10월 20일 대표 명의 사과문으로 책임자 징계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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