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 가즈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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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노 가즈마사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유격수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1969년 드래프트 6위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1970년부터 1986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1974년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1977년 베스트 나인, 1977년 일본 시리즈 감투상, 1981년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85년 실책으로 인해 슬럼프를 겪었으며, 1986년 은퇴 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지도자 및 스카우트로 활동했다. 현재는 자이언츠 베이스볼 아카데미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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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가즈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선수명 | 고노 가즈마사 |
원어명 | Kazumasa Kono |
일본어 표기 | 河埜 和正 |
로마자 표기 | Kōno Kazumasa |
가나 | こうの かずまさ |
한자 | 河埜 和正 |
출생지 | 에히메현 야와타하마시 |
생년월일 | 1951년 11월 7일 |
신장 | 180cm |
체중 | 77kg |
수비 위치 | 내야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선수 경력 | |
프로 입단 연도 | 1969년 |
드래프트 순위 | 5순위 |
첫 출장 | 1971년 9월 24일 |
마지막 경기 | 1986년 |
소속 구단 | 요미우리 자이언츠(1970 ~ 1986) |
코치 경력 | |
코치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1990 ~ 2000, 2004 ~ 2005) |
2. 선수 시절
에히메현 야와타하마시 출신인 고노 가즈마사는 중학교 시절 배구 선수로 활약했고, 에히메 현립 야와타하마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야구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69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5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 주로 유격수로 활약했다.
1974년 3타석 연속 3루타를 기록했고,[10] 히로오카 다쓰로, 구로에 유키노부의 유격수 구단 최다 출전 기록을 경신했다. 1986년 16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한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카우터와 코치를 역임했고,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 ‘자이언츠 베이스볼 아카데미’(청소년 전용 야구 교실) 교장을 맡고 있다.
자세한 선수 경력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70년 ~ 1986년)' 문단을 참조하면 된다.
2. 1. 프로 입단 전
고노 가즈마사는 스포츠 가족 출신으로, 초등학교 때는 소프트볼을 했다. 중학교에서 야구부에 들어갔지만 연대책임으로 엉덩이 배트를 맞고 즉시 퇴부, 배구부로 전향해 현 대회에서 우승했다.[3] 수직 점프에서 80cm를 기록해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4] 야구에 대한 마음은 끊을 수 없어, 야와타하마 공고 야구 부장 사케모토 지로의 제안을 받고,[4] 동고 진학 후 다시 야구부에 입부했다.[5]2학년(1968년) 가을 현 대회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야와타하마 고등학교의 후지사와 공야에게 완봉패를 당했다. 3학년(1969년) 여름에도 현 대회에서 패퇴하여 고시엔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거의 무명이었고, 드래프트에서 지명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5] 그러나 1969년 드래프트 6위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1]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70년 ~ 1986년)
1969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5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한 고노 가즈마사는 주로 유격수로 활약했다.1974년에는 3타석 연속 3루타 기록을 달성했고[10] 히로오카 다쓰로, 구로에 유키노부의 기록을 뛰어넘는 유격수로서의 구단 최다 출전 기록을 수립했다.
1986년에는 16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 1985년 4월 16일 한신 타이거스전(한신 고시엔 구장) 4회말 수비에서 사노 노리요시가 친 타구를 처리하려다 공이 글러브에 맞고 떨어져 한신은 이것을 계기로 7점의 대량 득점을 올려 역전승을 거뒀다. 고노는 이후 평소와 달리 실책을 반복하며 '낙구의 정신적 후유증'을 겪었다. 1985년 시즌 중 2군으로 내려갔으나 수비 슬럼프는 극복했지만, 타격 부진으로 1986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 우중간으로 타구를 잘 날렸으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타격 폼을 교정하면서 1977년과 1978년 2년 연속 2할 9푼대였던 타율이 급락했고, 홈런 양산을 노린 효과도 없었다.
1970년 1월 다마가와 합동 연습에서 스도 유타카 2군 수비 코치는 고노의 수비 위치(보통 유격수보다 2걸음 뒤)를 보고 강한 땅볼 노크를 했다. 고노는 깊은 위치에서 공을 잡아 1루로 빠르게 송구하여 내야 안타를 아웃으로 만들었다[4]. 좌익수 앞까지 1루에서 잡아낼 정도의 강견이었으며, 에가와 스구루와 카케후 마사유키는 "고노의 어깨는 초일류"라고 평가했다. 평범한 땅볼을 놓치기도 했지만, 어려운 타구는 극적인 자세로 처리하는 양면성을 보였다. 고교 시절부터 강견으로 유명해, 프로 스카우트는 그의 송구에 글러브가 튕겨 나갔다는 일화가 있다. 스도는 무타이 사부로 구장 관리인과 상의해 유격수 뒤 2m 정도 잔디를 깎아 수비 범위를 넓혔고[4][5], 무타이는 "이런 건 처음"이라며 놀랐다[4]。
1971년 이스턴 리그에서 타점왕을 획득했다[1]. 1974년 1군에 정착, 구로에 토시슈를 대신하는 주전 유격수가 되었다. 7월 9일 다이요전(가와사키)에서 오른쪽 팔꿈치에 공을 맞은 듯했으나, "아픈 표정을 짓지 말라"는 스도 코치의 말을 따라 표정을 숨겨 파울 판정을 받았다. 가와카미 텟신 감독이 항의하다 퇴장당하기도 했다[5][6]。7월 27일 다이요전에서는 2회말 2사 3루, 1루 상황에서 존 시핀이 친 타구를 고노가 잡아내며 위기를 넘겼다. 고노는 "이 수비로 유격수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회고했다[4]。이 해 유격 수비 능력을 인정받아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77년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고(20위, 타율 .294) 리그 2연패에 공헌하며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한큐와의 일본 시리즈 3차전(고라쿠엔)에서는 연장 12회말 야마구치 다카시에게서 끝내기 3점 홈런을 쳐 시리즈 감투상을 받았다. 야쿠르트 야스다 타케시에게 강했고, 우중간 방향으로 타구를 잘 날려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타격 폼을 교정했다. 그러나 1977년과 1978년 2년 연속 2할 9푼대였던 타율이 급락했고, 홈런 생산을 노린 효과는 없었다. 도이 쇼조는 1980년대 초반 "고노는 헛스윙이 많아 히트 앤드 런 사인을 내기 어려웠다"고 말했다[7]. 1978년 세・리그 유격수 최고 수비율을 기록했지만, 야마시타 다이스케의 연속 수비 기회 무실책 신기록에 밀려 두 번째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놓쳤다.
1981년 복귀한 마키노 시게루 헤드코치는 고노에게 "야수 리더"를 부탁했고, 고노는 런닝, 체조, 노크 등에서 솔선수범했다. 젊은 선수들이 상담을 하러 왔고, 1980년대에는 "'캡'"으로 불렸다[5]. 1981년 개막부터 1번 타자로 기용되어 마츠모토 마사시, 시노즈카 토시오와 함께 찬스 메이커로 활약했다. 1번 타자로 도루왕 경쟁을 하고, 2번 타자로 리그 최다 21희생타를 기록하며 4년 만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니혼햄과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전 경기 선발 출장, 21타수 9안타 3타점으로 활약하며 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1982년에는 마츠모토 마사시가 1번에 정착하며 자신의 최다 32희생타를 기록하는 등 공수에서 젊은 팀을 이끌었다[5]. 배구 선수 시절 단련된 순발력으로 라이너를 점프 캐치하는 등 뛰어난 수비를 보였다[5].
"수비에서 남에게 지고 싶지 않다"던 고노였지만[5], 1985년 4월 16일 한신전(고시엔) 4회말 수비에서 사노 센코의 평범한 플라이를 놓쳤다. 한신은 이 실책을 계기로 7득점, 역전승했고[4], 4월 17일 백스크린 3연발과 함께 21년 만의 우승을 차지했다.
고노는 이후 실책을 반복하며 '낙구의 정신적 후유증'을 겪었다. 4월 28일 야쿠르트전(진구)에서 야에가시 유키오의 플라이를 놓쳐 역전 타임 에러를 범했고, 부상 외에는 처음으로 2군으로 강등되었다. 5월 22일 이스턴 리그 롯데전에서 2실책, 2삼진, 2병살타로 부진했다. 고노 대신 3년 차 가와아이 마사히로가 승격되었다. 오카자키 이쿠에게 포지션을 양보하고, 계약 협상에서 20% 삭감된 2130만 엔에 계약하며 "낙구 하나로 265만 엔인가…"라고 쓴웃음을 지었다[4]. 수비 슬럼프는 극복했지만, 타격 부진으로 1986년 18경기 출장에 그치며 은퇴했다.
자이언츠에서 사카모토 하야토[8]에게 갱신될 때까지 구단 최다 유격수 출장 기록(1370경기)을 보유했다.
통산 성적에서 동생보다 홈런과 도루는 앞섰지만, 동생이 획득하지 못한 베스트 나인,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각각 1회 수상했다.
2. 2. 1. 주요 기록
- '''올스타전 출장''': 4회 (1977년 ~ 1979년, 1983년)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71년 9월 24일, 한신 타이거스 26차전 (고라쿠엔 구장), 8번·유격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 1973년 4월 25일, 한신 타이거스 2차전 (고라쿠엔 구장), 4회말에 곤도 마사토시로부터
- '''첫 홈런·첫 타점''': 1973년 7월 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12차전 (고라쿠엔 구장), 5회말에 미야모토 요지로로부터 좌월 2점 홈런
- '''통산 1000경기 출장''': 1981년 10월 5일 (227번째)
- '''100홈런''': 1984년 7월 11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13차전 (삿포로시 마루야마 구장), 8회말에 모리 고조로부터 좌월 솔로 ※역대 132번째
- '''1000안타''': 1984년 9월 5일, 주니치 드래건스 24차전 (나고야 구장), 3회초에 스즈키 다카마사로부터 좌월 솔로 ※역대 137번째
- '''3타석 연속 3루타''': 1974년 ※일본 기록[9]
- '''형제가 1000안타 이상''': 역대 2번째 (1번째 달성자는 레론·레온의 리 형제)
2. 2. 2. 수상 경력
3. 은퇴 이후
고노 가즈마사는 은퇴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으며, 야구 해설가로도 활동했다.
3. 1. 지도자 경력
연도 | 소속팀 | 직책 |
---|---|---|
1990년 ~ 1995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 2군 타격 코치 |
1996년 ~ 2000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 2군 수비 주루 코치 |
2004년 ~ 2005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 2군 수비 주루 코치 |
3. 2. 기타 활동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타격 코치(1990년 ~ 1995년)를 맡았고, 1996년부터 2000년, 2004년부터 2005년까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수비 주루 코치를 역임했다.4. '세기의 낙구' 사건
1985년 4월 16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4회말 수비 도중 사노 노리요시가 친 타구를 글러브에 맞고 떨어뜨리는 실책을 범했다.[1] 이 실책으로 한신은 4회말에 7점을 대량 득점하며 역전승을 거두었다.[1] 고노는 이후에도 실책을 반복하며 '낙구의 정신적 후유증'을 겪었고, 1985년 시즌 중 2군으로 내려갔다.[1] 수비 슬럼프는 극복했으나 타격 부진으로 인해 이듬해인 1986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1]
5. 상세 정보
고노 가즈마사는 초등학교 시절 소프트볼을 했고, 중학교에서는 배구부로 현 대회에서 우승했다.[3] 야와타하마 공고 진학 후 야구부에 입부, 고교 시절에는 거의 무명이었지만,[5] 1969년 드래프트 6위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1]
이스턴 리그에서 타점왕을 획득,[1] 1974년 1군에 정착하여 구로에 토시슈를 대신해 유격수 레귤러를 획득, 그 해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77년 처음으로 규정 타석에 도달, 리그 2연패에 공헌하며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한큐와의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는 연장 12회말에 야마구치 다카시에게서 끝내기 3점 홈런을 쳐 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다.
1981년에는 1번 타자로 기용되어 마츠모토 마사시, 시노즈카 토시오와 함께 찬스 메이커로 활약하며 4년 만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니혼햄과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 경기에 선발 출장, 21타수 9안타 3타점을 기록하며 일본 제일의 큰 원동력이 되어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82년에는 자기 최다 32희생타를 기록하는 등 공수에서 팀을 이끌었다. 유격 수비의 명수로 "수비에서는 남에게 지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던 고노였지만,[5] 1985년 한신전에서 사노 센코가 날린 플라이를 놓치는 실책을 범했다. 이 실책은 한신의 대량 득점으로 이어졌고,[4] 이후 평소에는 생각할 수 없는 실수를 범하며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1986년에는 18경기 출장에 그치며 은퇴했다. 사카모토 하야토[8]에 의해 갱신될 때까지 구단 최다 유격수 출장 기록(1370경기)을 보유하고 있었다.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타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71 | 요미우리 | 2 | 3 | 3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 | 0 | .000 | .000 | .000 | .000 |
1972 | 7 | 0 | 0 | 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 | ---- | ---- | ---- | |
1973 | 24 | 25 | 23 | 3 | 2 | 0 | 0 | 1 | 5 | 2 | 2 | 0 | 0 | 0 | 1 | 0 | 1 | 4 | 0 | .087 | .160 | .217 | .377 | |
1974 | 119 | 323 | 293 | 38 | 57 | 12 | 7 | 10 | 113 | 28 | 10 | 1 | 5 | 1 | 18 | 1 | 6 | 82 | 6 | .195 | .255 | .386 | .640 | |
1975 | 90 | 280 | 251 | 23 | 57 | 11 | 2 | 6 | 90 | 17 | 3 | 1 | 3 | 1 | 21 | 5 | 4 | 53 | 7 | .227 | .296 | .359 | .655 | |
1976 | 124 | 359 | 320 | 45 | 78 | 12 | 2 | 5 | 109 | 24 | 10 | 1 | 5 | 1 | 24 | 7 | 9 | 50 | 8 | .244 | .314 | .341 | .654 | |
1977 | 125 | 419 | 357 | 49 | 105 | 18 | 6 | 12 | 171 | 45 | 13 | 5 | 10 | 3 | 39 | 3 | 10 | 49 | 6 | .294 | .377 | .479 | .856 | |
1978 | 128 | 512 | 443 | 57 | 129 | 19 | 7 | 9 | 189 | 55 | 23 | 2 | 21 | 3 | 34 | 2 | 11 | 55 | 11 | .291 | .354 | .427 | .781 | |
1979 | 128 | 488 | 439 | 53 | 100 | 22 | 1 | 15 | 169 | 56 | 21 | 1 | 11 | 3 | 28 | 0 | 7 | 73 | 9 | .228 | .283 | .385 | .668 | |
1980 | 125 | 398 | 352 | 37 | 81 | 13 | 3 | 6 | 118 | 27 | 10 | 4 | 12 | 0 | 29 | 7 | 5 | 69 | 9 | .230 | .298 | .335 | .633 | |
1981 | 130 | 580 | 503 | 73 | 133 | 16 | 1 | 16 | 199 | 42 | 27 | 7 | 21 | 2 | 45 | 1 | 8 | 65 | 3 | .264 | .333 | .396 | .729 | |
1982 | 127 | 511 | 428 | 62 | 116 | 21 | 4 | 11 | 178 | 34 | 15 | 10 | 32 | 2 | 44 | 1 | 5 | 64 | 5 | .271 | .344 | .416 | .760 | |
1983 | 95 | 370 | 310 | 44 | 75 | 15 | 1 | 4 | 104 | 19 | 10 | 6 | 16 | 1 | 43 | 1 | 0 | 49 | 11 | .242 | .333 | .335 | .669 | |
1984 | 111 | 346 | 299 | 40 | 77 | 11 | 3 | 13 | 133 | 46 | 8 | 2 | 16 | 3 | 26 | 1 | 2 | 45 | 9 | .258 | .318 | .445 | .763 | |
1985 | 52 | 133 | 115 | 15 | 29 | 3 | 0 | 6 | 50 | 15 | 1 | 2 | 3 | 0 | 14 | 2 | 1 | 18 | 4 | .252 | .338 | .435 | .773 | |
1986 | 43 | 66 | 59 | 6 | 12 | 3 | 0 | 1 | 18 | 6 | 0 | 1 | 2 | 0 | 5 | 0 | 0 | 10 | 2 | .203 | .266 | .305 | .571 | |
통산: 16년 | 1430 | 4813 | 4195 | 546 | 1051 | 176 | 37 | 115 | 1646 | 416 | 153 | 44 | 157 | 20 | 371 | 31 | 69 | 687 | 90 | .251 | .320 | .392 | .713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은퇴 후에는 자이언츠에서 코치, 스카우트를 역임했고, 자이언츠 베이스볼 아카데미 교장을 맡았다.
고노 가즈마사의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연도 | 등번호 |
---|---|
1970년 ~ 1973년 | 61 |
1974년 ~ 1978년 | 29 |
1979년 ~ 1986년 | 5 |
1990년 ~ 1991년 | 101 |
1992년 ~ 1995년 | 96 |
1996년 ~ 2000년 | 79 |
2004년 ~ 2005년 | 80 |
5. 1. 출신 학교
에히메현립 야와타하마 공업고등학교5. 2. 선수 경력
고노 가즈마사는 초등학교 시절 소프트볼을 했고, 중학교에서는 배구부로 현 대회에서 우승했다.[3]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야와타하마 공고 진학 후 다시 야구부에 입부했다.[5] 고교 시절에는 거의 무명이었지만,[5] 1969년 드래프트 6위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1]이스턴 리그에서 타점왕을 획득했고,[1] 1974년 1군에 정착하여 구로에 토시슈를 대신해 유격수 레귤러를 획득, 그 해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77년 처음으로 규정 타석에 도달, 리그 2연패에 공헌하며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한큐와의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는 연장 12회말에 야마구치 다카시에게서 끝내기 3점 홈런을 쳐 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다.
1981년에는 1번 타자로 기용되어 마츠모토 마사시, 시노즈카 토시오와 함께 찬스 메이커로 활약하며 4년 만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니혼햄과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 경기에 선발 출장, 21타수 9안타 3타점을 기록하며 일본 제일의 큰 원동력이 되어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82년에는 자기 최다 32희생타를 기록하는 등 공수에서 팀을 이끌었다. 유격 수비의 명수로 "수비에서는 남에게 지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던 고노였지만,[5] 1985년 한신전에서 사노 센코가 날린 플라이를 놓치는 실책을 범했다. 이 실책은 한신의 대량 득점으로 이어졌고,[4] 고노는 이후 평소에는 생각할 수 없는 실수를 범하며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1986년에는 18경기 출장에 그치며 은퇴했다. 자이언츠에서는 사카모토 하야토[8]에 의해 갱신될 때까지 구단 최다 유격수 출장 기록(1370경기)을 보유하고 있었다.
통산 성적은 아래와 같다.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타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71 | 요미우리 | 2 | 3 | 3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 | 0 | .000 | .000 | .000 | .000 |
1972 | 7 | 0 | 0 | 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 | ---- | ---- | ---- | |
1973 | 24 | 25 | 23 | 3 | 2 | 0 | 0 | 1 | 5 | 2 | 2 | 0 | 0 | 0 | 1 | 0 | 1 | 4 | 0 | .087 | .160 | .217 | .377 | |
1974 | 119 | 323 | 293 | 38 | 57 | 12 | 7 | 10 | 113 | 28 | 10 | 1 | 5 | 1 | 18 | 1 | 6 | 82 | 6 | .195 | .255 | .386 | .640 | |
1975 | 90 | 280 | 251 | 23 | 57 | 11 | 2 | 6 | 90 | 17 | 3 | 1 | 3 | 1 | 21 | 5 | 4 | 53 | 7 | .227 | .296 | .359 | .655 | |
1976 | 124 | 359 | 320 | 45 | 78 | 12 | 2 | 5 | 109 | 24 | 10 | 1 | 5 | 1 | 24 | 7 | 9 | 50 | 8 | .244 | .314 | .341 | .654 | |
1977 | 125 | 419 | 357 | 49 | 105 | 18 | 6 | 12 | 171 | 45 | 13 | 5 | 10 | 3 | 39 | 3 | 10 | 49 | 6 | .294 | .377 | .479 | .856 | |
1978 | 128 | 512 | 443 | 57 | 129 | 19 | 7 | 9 | 189 | 55 | 23 | 2 | 21 | 3 | 34 | 2 | 11 | 55 | 11 | .291 | .354 | .427 | .781 | |
1979 | 128 | 488 | 439 | 53 | 100 | 22 | 1 | 15 | 169 | 56 | 21 | 1 | 11 | 3 | 28 | 0 | 7 | 73 | 9 | .228 | .283 | .385 | .668 | |
1980 | 125 | 398 | 352 | 37 | 81 | 13 | 3 | 6 | 118 | 27 | 10 | 4 | 12 | 0 | 29 | 7 | 5 | 69 | 9 | .230 | .298 | .335 | .633 | |
1981 | 130 | 580 | 503 | 73 | 133 | 16 | 1 | 16 | 199 | 42 | 27 | 7 | 21 | 2 | 45 | 1 | 8 | 65 | 3 | .264 | .333 | .396 | .729 | |
1982 | 127 | 511 | 428 | 62 | 116 | 21 | 4 | 11 | 178 | 34 | 15 | 10 | 32 | 2 | 44 | 1 | 5 | 64 | 5 | .271 | .344 | .416 | .760 | |
1983 | 95 | 370 | 310 | 44 | 75 | 15 | 1 | 4 | 104 | 19 | 10 | 6 | 16 | 1 | 43 | 1 | 0 | 49 | 11 | .242 | .333 | .335 | .669 | |
1984 | 111 | 346 | 299 | 40 | 77 | 11 | 3 | 13 | 133 | 46 | 8 | 2 | 16 | 3 | 26 | 1 | 2 | 45 | 9 | .258 | .318 | .445 | .763 | |
1985 | 52 | 133 | 115 | 15 | 29 | 3 | 0 | 6 | 50 | 15 | 1 | 2 | 3 | 0 | 14 | 2 | 1 | 18 | 4 | .252 | .338 | .435 | .773 | |
1986 | 43 | 66 | 59 | 6 | 12 | 3 | 0 | 1 | 18 | 6 | 0 | 1 | 2 | 0 | 5 | 0 | 0 | 10 | 2 | .203 | .266 | .305 | .571 | |
통산: 16년 | 1430 | 4813 | 4195 | 546 | 1051 | 176 | 37 | 115 | 1646 | 416 | 153 | 44 | 157 | 20 | 371 | 31 | 69 | 687 | 90 | .251 | .320 | .392 | .713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은퇴 후에는 자이언츠에서 코치, 스카우트를 역임했고, 자이언츠 베이스볼 아카데미 교장을 맡았다.
5. 3. 등번호
연도 | 등번호 |
---|---|
1970년 ~ 1973년 | 61 |
1974년 ~ 1978년 | 29 |
1979년 ~ 1986년 | 5 |
1990년 ~ 1991년 | 101 |
1992년 ~ 1995년 | 96 |
1996년 ~ 2000년 | 79 |
2004년 ~ 2005년 | 80 |
참조
[1]
서적
プロ野球人名事典 2003
日外アソシエーツ
2003
[2]
문서
他に外国人選手で[[レロン・リー|レロン]]・[[レオン・リー|レオン]]のリー兄弟。
[3]
문서
バレーボールは現在でも趣味である。
[4]
뉴스
河埜和正のマネできないエピソード
https://www.zakzak.c[...]
[5]
뉴스
河埜和正 激戦区の内野で唯一の“聖域”を守った“キャップ”/プロ野球1980年代の名選手
https://column.sp.ba[...]
[6]
뉴스
V9と新時代をつないだ名バイプレーヤー、死球受けてもコーチから「痛い顔するな」と言われファウル判定となり…
https://hochi.news/a[...]
スポーツ報知
2024-05-22
[7]
문서
河埜の打撃フォーム改造と同時期に現役を引退しコーチ専任化。
[8]
문서
入団当初の背番号は、河埜と同じ61。
[9]
웹사이트
GIANTSニュース
https://web.archive.[...]
読売巨人軍公式HP
2006-10-03
[10]
웹사이트
‘GIANTS 뉴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공식 홈페이지
200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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