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쿠엔 구장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라쿠엔 구장은 1937년 일본 도쿄에 개장하여 1987년 폐장한 야구장이다. 일본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건설되었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비롯한 여러 구단의 홈구장으로 사용되었다. 왕정치의 홈런 기록, 일본 시리즈 개최 등 일본 야구의 역사적인 순간들을 함께 했다. 1987년 도쿄 돔 건설로 인해 폐쇄되었고, 현재는 도쿄 돔 호텔 등이 들어서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도쿄도의 야구장 - 도쿄 돔
도쿄 돔은 도쿄도 분쿄구에 위치한 다목적 돔 구장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이며 야구 외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되고 공기 지지 구조의 돔형 지붕이 특징이다. - 도쿄도의 야구장 - 메이지 진구 야구장
메이지 진구 야구장은 1926년 완공된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야구장으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홈 구장이자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전의 주요 경기장이며, 아마추어 야구의 성지로 여겨지지만 재개발 계획으로 철거 후 재건축될 예정이나 역사적 가치와 환경 문제로 반대 의견도 있다. - 주니치 드래건스 - 나고야 구장
나고야 구장은 일본 나고야시에 위치한 야구장으로, 주니치 드래건스의 홈 구장으로 개장하여 현재는 2군 구장 및 연습장으로 사용되며, 과거 다양한 프로 야구 경기와 콘서트 등 여러 용도로 활용되었으나 소음 문제로 콘서트 개최가 제한된 바 있다. - 주니치 드래건스 - 주니치 드래건스 (2군)
주니치 드래건스 2군은 1951년부터 웨스턴 리그에 참가하고 나고야 구장을 본거지로 사용하는 주니치 드래건스의 2군 팀으로, 사회인 야구와 교류하며 웨스턴 리그 16회 우승과 팜 일본 선수권 6회 우승을 기록했고, 도카이 지역 케이블 TV를 통해 경기 중계가 이루어진다. - 도쿄도의 없어진 건축물 - 스가모 구치소
스가모 구치소는 1895년 설립된 일본 감옥으로, 시대에 따라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정치범 수용소, 종전 후에는 전범 수용소로 사용되다가 1958년 폐쇄 후 선샤인 시티가 들어섰다. - 도쿄도의 없어진 건축물 - 쓰키지 시장
쓰키지 시장은 에도 시대부터 도쿄의 식료품을 거래한 도매 시장으로, 1935년부터 2018년까지 주오구 쓰키지에 위치하며 수산물과 청과물을 취급하며 일본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시설 노후화와 공간 문제로 도요스 시장으로 이전했으나 쓰키지 장외시장은 현재도 남아있다.
고라쿠엔 구장 - [경기장/극장]에 관한 문서 | |
---|---|
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경기장 명칭 | 고라쿠엔 구장 |
원어 명칭 | 後楽園スタジアム |
로마자 표기 | Kōrakuen Kyūjō |
다른 이름 | Kôrakuen Stadium |
위치 | 도쿄도분쿄구 고라쿠 1-3-61 |
개장 | 1937년 9월 11일 |
폐장 | 1987년 11월 8일 |
철거 | 1988년 |
소유주 | 고라쿠엔 스타디움 주식회사 |
건축가 | 후루하시 류타로 |
주요 건설사 | 도비시마 건설 |
경기장 정보 | |
그라운드 | 천연 잔디 (개장 - 1965년) 천연 잔디 (1966년 - 1975년) 인공 잔디 (1976년 - 폐장) |
조명 | 배터리 간: 2000 룩스 내야: 1500 룩스 외야: 1000 룩스 |
건설 비용 | 123만 엔 (개장 시) |
그라운드 면적 | 11,493m² |
좌우 길이 (공칭) | 90m (약 295.3 ft) |
좌우 길이 (실측) | 87.8m (약 288.1 ft) |
중앙 길이 (공칭) | 120m (약 393.7 ft) |
중앙 길이 (실측) | 120.8m (약 396.3 ft) |
좌우중간 길이 (실측) | 110.1m (약 361.1 ft) |
외야 펜스 높이 | 2.1m ~ 4.7m |
수용 인원 (개장 시) | 내야석 23,000명, 외야석 15,000명, 총 38,000명 |
수용 인원 (폐장 시) | 내야석 30,078명, 외야석 12,259명, 총 42,337명 |
사용 팀 및 대회 | |
주요 사용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1938년–1987년) 도쿄 센ATORS/쓰바사/타이요/니시테쓰 (일본 야구 리그) (1936년–1943년) 고라쿠엔 이글스/구로와시/야마토 (일본 야구 리그) (1936년–1943년) 골드 스타/긴세이 스타스/다이에이 스타스/다이에이 유니온스 (1946년–1957년) 주니치 드래건스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1948년) 마이니치 오리온스 (일본 프로 야구 퍼시픽 리그) (1950년–1962년) 고쿠테쓰 스왈로스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1950년–1963년) 닛폰햄 파이터스 (일본 프로 야구 퍼시픽 리그) (1964년–1987년) |
주요 대회 | 도시 대항 야구 대회 (1938년–1987년) |
이미지 | |
![]() | |
![]() |
2. 역사
1930년대 일본에서 일본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도쿄에 프로야구 경기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메이지 진구 야구장은 도쿄 6대학 야구 연맹과의 관계 때문에 사용이 어려웠고, 스기나미구의 카미이구사 구장은 교통이 불편했으며, 후카가와구의 스즈키 구장은 침수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6년 요미우리 신문사의 쇼리키 마츠타로와 한큐 전철의 고바야시 이치조 등이 출자하여 '''주식회사 고라쿠엔 스타디움'''을 설립, 도쿄도고이시카와(현재의 분쿄구)에 있던 일본 제국 육군도쿄 포병 공장 부지에 야구장 건설을 시작했다.
1937년 고라쿠엔 구장이 개장했고, 구장 이름은 인근의 고이시카와 고라쿠엔에서 따왔다. 초기에는 프랜차이즈 제도가 확립되지 않아 여러 구단이 번갈아 사용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도쿄 교진군, 고라쿠엔 이글스(야마토군으로 개칭), 도쿄 세네터스 등이 이 구장을 사용했다.
1938년 고바야시 이치조는 자신이 이끄는 도호를 통해 주식회사 고라쿠엔 스타디움의 주식을 절반 이상 취득하여, 고라쿠엔 구장에서는 야구 경기 외에도 서커스 등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구장이 일본군에 징발되어 고사포가 설치되고, 감자와 옥수수를 재배하는 등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2] 종전 후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 접수될 뻔했으나, 일본야구연맹의 스즈키 류지와 스즈키 소타로 등의 노력으로 접수가 해제되었다.[3]
1949년까지 1리그 시대에 열린 4988경기 중 41%에 해당하는 2033경기가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렸고, 1950년에는 나이터 설비가 설치되었다.
1950년 일본 프로야구가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로 분열되면서, 1950년에는 센트럴 리그 553경기 중 171경기(31%), 퍼시픽 리그 420경기 중 117경기(28%)가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렸다.[4]
1952년 프랜차이즈 제도가 공식적으로 도입되면서 고라쿠엔 구장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국철 스왈로스(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도큐 플라이어스(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마이니치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 다이에이 스타즈(지바 롯데 마린스의 전신 구단 중 하나) 등 5개 구단의 홈구장이 되었다.
이후, 도큐(1953년 고마자와 야구장 이전), 마이니치와 다이에이의 합병으로 탄생한 다이마이(1962년 도쿄 구장 이전), 국철(1964년 메이지 진구 야구장 이전)이 이전하였으나, 도에이[5]는 1965년에 다시 고라쿠엔을 본거지로 삼았다.[6] 개최 경기 수는 줄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 경기의 흥행으로 일본 야구의 메카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1958년에는 양측 외야 펜스를 78m에서 90m로 확장하는 등 시설 정비에 힘썼다. 하지만, 실제 거리는 더 좁아 타자에게 유리한 구장이었다. 그 때문에, 양측 외야펜스와 중앙 외야펜스의 거리 표시가 삭제된 경위도 있다. 또한 외야 쪽으로 내리막 경사를 이루고 있지만,[7] 그라운드 배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대부분의 야외 구장에는 경사가 있다.
일본 최다 홈런 기록을 자랑하는 왕정치는 이 구장에서 많은 기념비적인 홈런을 쳤다.
'''왕정치가 이 구장에서 달성한 기념비적인 홈런'''
연도 | 내용 |
---|---|
1959년 | 공식 경기 첫 홈런(국철전),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ON 쌍포 첫 홈런(한신전·천람 경기) |
1974년 | 마지막 ON 쌍포(106번째 주니치전·나가시마 은퇴 경기) |
1976년 | 베이브 루스가 보유한 MLB 2위 기록과 같은 714호와 그것을 넘는 715호(두 개 모두 한신전) |
1977년 | 행크 애런이 보유한 MLB 기록(당시)과 같은 755호(다이요전)와 그것을 넘는 756호(야쿠르트전) |
1978년 | 세계 최초 800호(다이요전) |
1980년 | 세계 최초 850호(히로시마전), 현역 마지막이자 통산 홈런 868호 홈런(야쿠르트전) |
시설 정비도 진행되어, 1966년에는 내야에 천연잔디를 깔고, 1970년에는 스코어보드를 전광판으로 바꿨다. 1976년에는 인조잔디를 깔았다(마지막 두 가지는 일본 야구장으로서는 최초). 오로라 비전이 완성된 1981년 일본 시리즈는 자이언츠와 닛폰햄의 대결이 되어, 사상 최초로 일본 시리즈가 같은 구장에서 개최되었다.[8]
1980년, 왕정치와 나가시마 시게오가 각각 현역 은퇴와 감독 사퇴를 함으로써 ON 시대가 막을 내렸다. 두 사람의 공적을 기념하여, 1981년부터 1987년 폐쇄까지 1번 게이트는 "왕 게이트", 3번 게이트는 "나가시마 게이트"라고 불렸다. 폐장 시에 1루 베이스는 왕정치에게, 3루 베이스는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증정되었다. 게이트 명칭은 폐장과 함께 일단 사라졌지만, 후계 구장인 도쿄 돔 개장 10주년 기념으로 1998년부터 1, 3번 게이트에 각각 부활했다.
1980년대에 들어 고라쿠엔 구장은 시설 노후화가 심각해졌다. 이에 1987년 시즌을 끝으로 폐장하게 되었다.[8] 구장 바로 옆에 있던 경륜장 부지에 도쿄 돔이 건설되어 고라쿠엔 구장의 역할을 이어받게 되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거인군)는 1938년부터, 닛폰햄 파이터스는 1964년부터 1987년까지 고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다가 도쿄돔으로 이전했다.
고라쿠엔 구장 폐장을 기념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폐장 시 1루 베이스는 오 사다하루에게, 3루 베이스는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증정되었다.
2. 1. 건립 배경 및 초기 (1936년 ~ 1949년)
1930년대 일본에서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도쿄 내에 프로야구 경기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의 필요성이 커졌다. 당시 도쿄 6대학 야구 연맹과의 관계 때문에 메이지 진구 야구장을 사용할 수 없었고, 스기나미구의 카미이구사 구장은 교통이 불편했으며, 후카가와구의 스즈키 구장은 침수 문제가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1936년(쇼와 11년) 12월, 요미우리 신문사의 쇼리키 마츠타로와 한큐 전철의 고바야시 이치조 등의 출자를 받아 '''주식회사 고라쿠엔 스타디움'''이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도쿄도고이시카와(현재의 분쿄구)에 있던 일본 제국 육군도쿄 포병 공장 부지를 매입하여 야구장 건설을 시작했다.
1937년(쇼와 12년) 9월, 고라쿠엔 구장이 개장했다. 구장 이름은 인근의 고이시카와 고라쿠엔에서 따왔다. 초기에는 프랜차이즈 제도가 확립되지 않아 여러 구단이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도쿄 교진군, 고라쿠엔 이글스(야마토군으로 개칭), 도쿄 세네터스 등이 이 구장을 사용했다.
1938년(쇼와 13년) 6월, 고바야시 이치조는 자신이 이끄는 도호를 통해 주식회사 고라쿠엔 스타디움의 주식 절반 이상을 취득하여 산하에 편입시켰다. 이후 고라쿠엔 구장에서는 야구 경기 외에도 서커스 등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구장이 일본군에 징발되어 고사포가 설치되고, 감자와 옥수수를 재배하는 등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2] 종전 후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 접수될 뻔했으나, 일본야구연맹의 스즈키 류지와 스즈키 소타로 등의 노력으로 접수가 해제되었다.[3]
1949년(쇼와 24년)까지 1리그 시대에 열린 4988경기 중 41%에 해당하는 2033경기가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렸다. 1950년(쇼와 25년)에는 나이터 설비가 설치되었다.
2. 2. 2리그 분열과 프랜차이즈 제도 도입 (1950년 ~ 1987년)
1950년, 일본 프로야구가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로 분열되면서 경기 수가 급증했다. 당시 도쿄를 포함한 수도권 근교에는 프로야구 경기를 상시 개최할 수 있는 구장이 고라쿠엔 구장밖에 없었기 때문에, 1950년에는 센트럴 리그 553경기 중 171경기(31%), 퍼시픽 리그 420경기 중 117경기(28%)가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렸다.[4]1952년, 프로야구에 프랜차이즈 제도가 공식적으로 도입되면서 고라쿠엔 구장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국철 스왈로스(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도큐 플라이어스(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마이니치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 다이에이 스타즈(지바 롯데 마린스의 전신 구단 중 하나) 등 5개 구단의 홈구장이 되었다.
이후, 도큐가 1953년에 고마자와 야구장으로, 마이니치와 다이에이의 합병으로 탄생한 다이마이가 1962년에 도쿄 구장으로, 국철이 1964년에 메이지 진구 야구장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도에이[5]는 고마자와 구장이 1964년 도쿄 올림픽 관계로 1961년에 폐쇄되었기 때문에, 진구와 고라쿠엔을 병용한 후, 1965년에 다시 고라쿠엔을 본거지로 삼았다.[6] 이 때문에 개최 경기 수는 줄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 경기의 흥행으로 일본 야구의 메카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 기간 동안, 1958년에는 양측 외야 펜스를 78m에서 90m로 확장하는 등 시설 정비에 힘썼다. 하지만, 실제 거리는 더 좁아 타자에게 유리한 구장이었다. 그 때문에, 양측 외야펜스와 중앙 외야펜스의 거리 표시가 삭제된 경위도 있다. 또한 외야 쪽으로 내리막 경사를 이루고 있지만,[7] 그라운드 배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대부분의 야외 구장에는 경사가 있다.
일본 최다 홈런 기록을 자랑하는 왕정치는 이 구장에서 많은 기념비적인 홈런을 쳤다. 특히 행크 애런이 보유한 MLB 기록을 넘어선 756호(1977년)와 세계 최초 800호 달성(1978년) 때는 달성 직후나 경기 종료 후에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왕정치가 이 구장에서 달성한 기념비적인 홈런'''
연도 | 내용 |
---|---|
1959년 | 공식 경기 첫 홈런(국철전),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ON 쌍포 첫 홈런(한신전·천람 경기) |
1974년 | 마지막 ON 쌍포(106번째 주니치전·나가시마 은퇴 경기) |
1976년 | 베이브 루스가 보유한 MLB 2위 기록과 같은 714호와 그것을 넘는 715호(두 개 모두 한신전) |
1977년 | 행크 애런이 보유한 MLB 기록(당시)과 같은 755호(다이요전)와 그것을 넘는 756호(야쿠르트전) |
1978년 | 세계 최초 800호(다이요전) |
1980년 | 세계 최초 850호(히로시마전), 현역 마지막이자 통산 홈런 868호 홈런(야쿠르트전) |
시설 정비도 진행되어, 1966년에는 내야에 천연잔디를 깔고, 1970년에는 스코어보드를 전광판으로 바꿨다. 1976년에는 인조잔디를 깔았다(마지막 두 가지는 일본 야구장으로서는 최초). 하지만, 자이언츠 경기의 막대한 동원력과는 대조적으로, 도에이→닛타쿠 홈→닛폰햄의 관중 동원력은 부진했다. 오로라 비전이 완성된 1981년 일본 시리즈는 자이언츠와 닛폰햄의 대결이 되어, 사상 최초로 일본 시리즈가 같은 구장에서 개최되었다.[8]
1980년, 자이언츠와 일본 프로야구를 지탱했던 ON, 즉 왕정치와 나가시마 시게오가 각각 현역 은퇴와 감독 사퇴를 함으로써 ON 시대가 막을 내렸다. 두 사람의 공적을 기념하여, 1981년부터 1987년 폐쇄까지 1번 게이트는 "왕 게이트", 3번 게이트는 "나가시마 게이트"라고 불렸다. 또한 폐장 시에 1루 베이스는 왕정치에게, 3루 베이스는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증정되었다. 게이트 명칭은 폐장과 함께 일단 사라졌지만, 후계 구장인 도쿄 돔 개장 10주년 기념으로 1998년부터 1, 3번 게이트에 각각 부활했다.
2. 3. 폐장과 도쿄돔 이전 (1987년)
1980년대에 들어 고라쿠엔 구장은 시설 노후화가 심각해졌다. 이에 1987년 시즌을 끝으로 폐장하게 되었다.[8] 구장 바로 옆에 있던 경륜장 부지에 도쿄 돔이 건설되어 고라쿠엔 구장의 역할을 이어받게 되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거인군)는 1938년부터 1988년까지, 닛폰햄 파이터스는 1964년부터 1987년까지 고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다가 도쿄돔으로 이전했다.고라쿠엔 구장 폐장을 기념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1981년부터 1987년 폐쇄까지 1번 게이트는 "왕 게이트", 3번 게이트는 "나가시마 게이트"라고 불렸다.[8] 폐장 시 1루 베이스는 오 사다하루에게, 3루 베이스는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증정되었다.
3. 주요 시설
시설의 노후화로 1987년 시즌을 끝으로 폐쇄되었다. 이후 인접한 경륜장 터에 도쿄돔이 건설되어, 구장으로서의 역할을 도쿄돔에 이어받게 되었다.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고라쿠엔 구장에서 개최된 경기 수는 7172경기, 홈런은 10416개로 구장별 랭킹 1위이다.
3. 1. 구장 설비
1937년 고라쿠엔 구장 개장 당시 크기는 양쪽 펜스 85m, 중앙 펜스 114m였다.[4] 1958년 그라운드 확장 공사로 양쪽 펜스는 90m, 중앙 펜스는 120m로 변경되었다.[4]1976년에는 일본 최초로 전면 인조잔디가 도입되었다.[4]
3. 2. 전광판
1949년(쇼와 24년)부터 1969년(쇼와 44년)까지 21년간 두 번째 스코어보드가 사용되었다. 스탠드 토목 공사로 스코어보드 위치가 높아졌다. 점수는 최대 12회까지, 최대 2경기 분의 점수를 표시할 수 있었고, 선수 표기는 스코어보드를 사이에 두고 세로 스크롤 방식이었다. 스코어보드 양쪽 끝에는 라이온 치약과 라이온 유지의 상품 광고가 있었지만, 말기에는 파이오니아 광고로 변경되었다. 스코어보드 가운데 아래는 다이쇼 제약 광고였으나, 후기에는 리포비탄 D 광고가 표시되었다.[13]1970년(쇼와 45년)부터 1987년(쇼와 62년)까지 18년간 세 번째 스코어보드가 사용되었다. 이 스코어보드는 두 번째 스코어보드를 바탕으로 전광 게시식으로 변경되었다. 점수는 한 경기만 최대 10회까지 표시 가능했고, 총점, 안타, 실책 표시가 가능해졌다. 스코어보드 양쪽 끝 광고는 파이오니아가 경기장 폐쇄까지 담당했고, 가운데 아래는 다이쇼 제약에서 파이오니아 광고로 변경되었다. 1981년(쇼와 56년)부터 오로라 비전이 채용되었다.[13]
3. 3. 중계석
백넷 뒤편에는 1957년경에 설치된 방송석(곤돌라석)이 있었으며, 도쿄에 있는 각 방송국이 소유하고 있었다. 좌석 아래에는 소유하고 있는 방송국의 로고 마크가 적혀 있었다.1966년경까지 좌석 배치는 1루 측부터 RKB 마이니치 방송, 마이니치 방송, 아사히 방송, 주부닛폰 방송, 귀빈석, TBS, NHK, 닛폰TV, 닛폰 방송, 분카 방송, 일본단파방송(현 라디오NIKKEI), 홋카이도 방송, 라디오칸토(현 RF라디오닛폰) 순이었다.
1967년경부터 경기장 폐장 때까지는 RKB 마이니치 방송부터 주부닛폰 방송까지의 4석이 공석이 되었다. 공석이 된 곤돌라석은 이후 일본단파방송→라디오탄파, 도쿄12채널→TV 도쿄, TV 사이타마, TVK TV, 지바 TV, 주쿄 TV(부음성에서 주니치 응원 중계), 요미우리 TV(부음성에서 한신 응원 중계) 등이 사용했다. 1루 측부터는 TBS, NHK, 닛폰TV, 닛폰 방송, 분카 방송, 라디오칸토→라디오일본, NET TV→TV 아사히, 후지 TV 순으로 좌석이 배치되었다.
4. 경기 및 이벤트
사회인 야구 도시대항야구대회 개최지로 1938년부터 1987년까지 사용되었다.
야구 외에도 콘서트에도 많이 이용되었으며, 일본 최초의 스타디움 라이브가 된 1968년 8월 12일 더 타이거즈 공연을 시작으로 사이죠 히데키, 야자와 에이키치, 앨리스, 캔디즈[10], 핑크 레이디[11], 타노킨 트리오 등 일본 국내 아티스트 외에도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프리,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사이먼 앤 가펑클, 마이클 잭슨, 마돈나, 스티비 원더, 듀란 듀란, 라이오넬 리치,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 등의 서구 슈퍼스타들이 대규모 콘서트를 개최했다. 콘서트 이외에도 일본TV의 「미국 횡단 울트라 퀴즈」나 중고차 전시장 등 다양한 이벤트에도 사용되었다.
1938년에는 그라운드 내에 점프대가 설치되어 후쿠시마현에서 눈을 운반하여 스키 점프 경기도 개최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재경 8개 신문사 주최로 「미영 격멸 국민 대회」가 개최되었고, 전쟁 말기에는 료고쿠 국기관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대상경 본 장소가 개최되기도 했다. 전후 혼란기에는 당시의 장기 대성회(현재의 일본 장기 연맹)가 사무실을 두었던 적도 있다.
1976년, 인조잔디 완성을 기념한 결혼식이 구장 내에서 거행되었다. 3월 14일, 일본햄 대 중일전 경기 전에 거행되었으며, 식에는 일본햄 감독 오사와 케이지가 증인을 섰다[12].
1981년 2월 24일에는 로마 교황요한 바오로 2세가 미사를 집전했고, 비 속에서 3만 6천 명이 모였다.
야구장으로서 흥행을 하는 한편 볼링장, 장외 마권 매장, 유원지, 실내 운동장 등의 시설도 건설되었다. 1949년 11월에는 구장에 인접한 코라쿠엔 경륜장에서 도쿄도 주최로 경륜이 개최되었다. 경륜은 전후 복구기의 도쿄 재정을 지탱했지만, 미노베 료키치도쿄 도지사의 공영 경기 폐지 방침에 따라 1972년 3월에 휴지되었다. 흔적은 여름에는 풀, 그 이외의 시즌에는 골프 연습장으로 활용되었고, 그 후 그 자리에 도쿄 돔이 건설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ヤフオクドームで本塁打激増、球場がまた狭くなる?
https://www.nikkei.c[...]
2015-05-26
[2]
일반
[3]
일반
[4]
일반
[5]
일반
[6]
일반
[7]
서적
プロ野球を10倍楽しく見る方法
KKベストセラーズ
1982
[8]
웹사이트
【巨人軍80周年あの時】巨人戦3000試合担当“伝説のウグイス嬢”山中美和子さんが語る
http://www.hochi.co.[...]
スポーツ報知
2014-11-27
[9]
웹사이트
特別コラム 「四番打者の本質」
http://column.sp.bas[...]
[10]
일반
[11]
일반
[12]
서적
よみがえる1970年代のプロ野球 [Part.3] 1976年編 長嶋ジャイアンツ初V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2
[13]
뉴스
川口和久コラム「2020年をプロ野球新時代の“プレ元年”にしよう!」
https://column.sp.ba[...]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0-12-14
[14]
일반
[15]
일반
[16]
일반
[17]
일반
[18]
서적
聴け! 伝説の日本ロック1969-79
宝島社
2004-02-2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