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타 모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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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타 모토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시절 도쿄 6대학 리그에서 활약했고, 1957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신인왕을 수상했다. 1958년과 1959년에는 리그 MVP를 2연패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1963년 선수 겸 코치를 거쳐 1964년 은퇴했다.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 코치, 다이요 웨일스 투수 코치를 역임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으로 두 차례(1981-1983, 1989-1992) 재임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야구계의 신사"로 불렸으며, 199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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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타 모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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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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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후지타 모토시 |
원어 이름 | 藤田 元司 |
로마자 표기 | Motoshi Fujita |
출생일 | 1931년 8월 7일 |
출생지 | 에히메현 니하마시 |
사망일 | 2006년 2월 9일 |
신장 | 173 |
체중 | 64 |
포지션 | 투수, 감독 |
타석 | 우 |
투구 | 우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NPB |
데뷔 연도 | 1957년 |
데뷔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최종 연도 | 1964년 |
최종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선수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7년–1964년) 닛폰 석유 |
통산 승패 | 119승 88패 |
통산 자책점 | 2.20 |
통산 탈삼진 | 924 |
감독 및 코치 경력 | |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3년–1974년, 1981년–1983년, 1989년–1992년) 다이요 웨일스 (1975년–1976년) |
수상 내역 | |
신인왕 | 1957년 센트럴 리그 신인왕 |
MVP | 2회 센트럴 리그 MVP(1958년–1959년) |
일본 시리즈 우승 | 2회 (1961년, 1963년, 선수), (1981년, 1989년, 감독) |
쇼리키 마쓰타로상 | 2회 (1981년, 1989년) |
명예의 전당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1996년) |
기타 | |
첫 출장 | 1957년 3월 31일 |
마지막 경기 | 1964년 9월 12일 |
2. 선수 시절
에히메현 니하마 시 출신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 시절 정통적인 오버스로로부터 계속 내보내는 강속구를 무기로 도쿄 지역 6개 대학 야구팀으로 구성된 도쿄 6대학 리그의 ‘스타 선수’로서 메이지 진구 야구장을 흥분시켰다. 6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통산 63경기에 등판해 31승 19패, 227탈삼진을 기록했지만 거듭되는 역투로 보답을 받지 못한 채 ‘비운의 에이스’라고도 불렸다.
대학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인 닛폰 석유를 거쳐 1957년에는 대학 선배인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권유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면서 데뷔 1년차에 17승 13패, 2.4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공로로 센트럴 리그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듬해 1958년에는 29승(22선발승으로 최다 선발승), 다음 해인 1959년에는 27승(22선발승)을 기록하면서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끄는 등 2년 연속 시즌 리그 MVP를 석권했다. 1959년 6월 25일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는 요미우리의 선발 투수로서 등판해 완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여 ‘비운의 에이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간판 우완 투수였던 이나오 가즈히사와 함께 6경기에 등판, 1.0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타선의 지원없이 1승 2패로 끝났다. 이 경기에서는 3승 1패로 맞이한 5차전에서 점수가 3대 2의 1점을 리드하고 있는 9회말 2사 3루, 아웃 카운트가 1개만 남은 상황에서 요미우리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남겨놓고 있었지만 이 경기에서 부진을 겪고있던 세키구치 세이지와 상대하여 결국 세키구치는 기사회생의 중전 적시타를 때려냈다. 결국 이 경기에서는 이나오의 끝내기 홈런으로 니시테쓰가 승리하면서 니시테쓰의 극적인 역전 우승으로 연결되었다.
이듬해 1959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난카이 호크스의 에이스 투수인 스기우라 다다시가 4연투 4연승의 그늘에서 3경기 연속(2차전 ~ 4차전) 선발 등판해 22이닝을 던졌지만[31] 역시 분투에도 불구하고 2연패를 당했다. 1958년 4차전부터 1961년 5차전에 걸쳐 5연패라는 일본 시리즈의 불명예스러운 타이 기록도 갖고있으며(그 밖에 무라야마 미노루, 기타벳푸 마나부) 수척해진 몸과 자기편의 극심한 빈타에 참는다는 이유로 ‘간디’라고도 불렸다.
정규 시즌 기간 동안 등판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갑작스런 어깨 부상에 의해 1960년 이후 성적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등 뚜렷한 성적을 낼 수 없었다. 1961년과 1963년에는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끈 멤버로 활약했지만 1961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과 5차전에 선발로 등판하면서 조기에 강판당했고(3차전은 3회 도중 , 5차전에서는 1회), 196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이후 조노우치 구니오가 중간 계투로 등판하는 등 투수진의 맹활약으로 승리투수가 되었지만 4실점을 기록, 4차전에서는 선발로 등판하여 4회 도중에 강판당하는 등 에이스 투수로서의 만족스러운 결과를 낼 수는 없었다.
1963년에 코치를 겸임했고, 1964년 시즌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고 프로팀의 입단 시기가 늦었던 일도 있어 현역 생활은 8년에 불과했다.
2. 1. 아마추어 야구
에히메현립 니이하마 중학교(현재의 에히메 현립 니이하마니시 고등학교) 재학 중 종전을 맞이하여, 학제 개혁에 따라 에히메 현립 사이조 고등학교로 전학했다.[1] 같은 학교에서 배터리를 이룬 사람은 나중에 NHK 고교 야구 중계 해설로 유명해진 이케니시 마스오이케니시 마스오/池西増夫일본어였고, 후지타의 동급생에는 복싱 플라이급에서 미사코 복싱짐(三迫ボクシングジム) 초대 회장(후에 명예회장)인 미사코 히토시미사코 히토시/三迫仁志일본어, 1년 선배로 프로에 입문 후 맞붙게 되는 와타나베 쇼조와타나베 쇼조/渡辺省三일본어가 있었다.[1] 이 시절에는 싸움도 강해서, 반장급으로 게타(下駄, 나무신)를 신고 당당하게 거닐거나, 싸움 상대를 며칠씩이나 기다리는 등, 프로 입문 후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반카라(バンカラ, 건달같은) 스타일이었다.[1] 구제 중학교에서 신제 고등학교로 전환되는 시기에 여러 가지 혼란이 있었고, 후지타의 경우 유급, 전학(니이하마 동고 - 사이조 북고)이라는 사정이 있어서 평소보다 고등학교 졸업이 2년 늦었다.[1]1950년 가을 시코쿠 대회에서는 결승에 진출했지만, 오쿠보 히데오오쿠보 히데오/大久保英男일본어·히노 미스미히노 미스미/日野美澄일본어를 보유한 도쿠시마 현립 나루토 고등학교(徳島県立鳴門高等学校)에 연장 13회 끝내기 패배를 당했고, 나루토는 그대로 제23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 전국 제패를 달성한다.[1] 1951년 여름 시코쿠 대회에서도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결승에서 가가와 현립 다카마쓰 상업고등학교(香川県立高松商業高等学校)에 패배하여 고시엔 출전은 이루지 못했다.[1] 고등학교 졸업 후 게이오기주쿠 대학(慶應義塾大学)에 진학하여, 정통적인 오버스로(オーバースロー)에서 나오는 빠른 공을 무기로 아키야마 노보루(秋山登)(메이지 대학), 기무라 다모쓰(木村保)(와세다 대학)와 겨루며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의 스타 선수로 인기를 누렸지만, 리그 우승은 1952년 춘계 리그전 한 번뿐이었고, 여러 번의 힘든 투구가 헛수고가 되는 모습에서 "비운의 에이스"라고 불렸다.[1] 후지타는 리그전 통산 63경기에 출전하여 31승 19패, 227탈삼진을 기록했다.[1] 참고로 대학 동기에는 사사키 신야(佐々木信也), 1년 후배에는 앞서 언급한 히노를 비롯하여 나카타 마사히로(中田昌宏)·슈주 스에히로(衆樹資宏)가 프로에 입문했다.[1]
게이오기주쿠 대학(慶應義塾大学) 졸업 후 바로 프로에 입문하지 않고, 사회인 야구의 일본석유(일본석유)에 입사하여 1956년 제27회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한다.[2] 신인이었지만 1회전(대 가와시마 방적전)에서 완봉승을 거두고, 구원 투수로서 승리를 거듭하여, 결승전(대 구마가야 건설전)에서도 2회부터 호투하여 3-2로 승리하며, 가나가와현 팀으로서는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2] 후지타 자신도 이 대회의 하시도상(橋戸賞)을 수상하는 등 활약을 보여준 대회가 되었다.[2] 당시 팀 동료에는 나카노 겐이치(中野健一), 대학 시절 선배인 하나이 유하나이 유/花井悠일본어가 있었고, 같은 해 제2회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 나카노, 하나이와 함께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다.[2]
2. 2. 프로 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
게이오기주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팀인 닛폰 석유를 거쳐 1957년 대학 선배인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권유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데뷔 1년차에 17승 13패, 2.4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듬해 1958년에는 29승(22선발승), 1959년에는 27승(22선발승)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2년 연속 시즌 MVP를 석권했다. 1959년 6월 25일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는 요미우리의 선발 투수로서 등판해 완투 승리를 거두었다.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비운의 에이스’라고 불렸다.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이나오 가즈히사와 함께 6경기에 등판, 1.0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3] 타선의 지원없이 1승 2패로 끝났다. 특히 5차전에서는 1점을 리드하고 있는 9회말 2사 3루 상황에서 세키구치 세이지에게 중전 적시타를 허용하며 결국 이나오의 끝내기 홈런으로 니시테쓰가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1959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난카이 호크스의 스기우라 다다시가 4연투 4연승을 기록하는 동안 3경기 연속(2차전 ~ 4차전) 선발 등판해 22이닝을 던졌지만 2연패를 당했다.[31] 1958년 4차전부터 1961년 5차전에 걸쳐 5연패라는 일본 시리즈 불명예 기록도 갖고 있으며,[5] 수척해진 몸과 빈약한 타선 때문에 ‘간디’라고도 불렸다.
잦은 등판으로 인한 어깨 부상으로 1960년 이후 성적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1961년과 1963년 일본 시리즈 우승 멤버로 활약했지만, 1961년에는 3차전과 5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조기에 강판되었고, 1963년에는 2차전 선발 등판 후 조노우치 구니오가 중간 계투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지만 4실점을 기록, 4차전에서는 선발 등판하여 4회 도중에 강판당했다.
1963년에 코치를 겸임했고, 1964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프로 입단 시기가 늦어 현역 생활은 8년에 불과했다.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의 지휘 하에 투수 코치로 부임하면서 호리우치 쓰네오와 다카하시 가즈미를 육성해 요미우리의 V9 시대를 이끌었지만 1973년 시즌 도중 투수진의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2군 코치로 격하되기도 했다. 또한 요미우리 코치 시절에 부업의 인사 분쟁 해결에 폭력단원을 고용하고 있었던 것과 1969년 총선거와 관련해서 폭력단과 연계된 사실이 드러나 궁지에 몰리는 등 구단으로부터 1개월 간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
요미우리에서 퇴단한 이후인 1975년에는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으로 취임한 아키야마 노보루의 요청에 의해 다이요의 투수 코치로 발탁되었지만 팀은 성적 부진으로 침체를 겪는 등 2년 만에 코치직에서 사임했으며 1968년부터 1972년까지[32] 다이요 감독을 역임했던 벳토 가오루가 다이요 감독으로 재부임하면서 아키야마 노보루는 1977년 2군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 해를 끝으로 다이요를 떠났는데 프로에서의 마지막 해인 1967년을 제외하면 거의 2군 생활을 하지 않아 후보 선수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데다 스타 선수를 이끌만한 지도력과 관록이 부족했던[33] 것이 컸다. 이후 NHK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발탁하는 한편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던 NHK 소년 야구 교실의 강사를 맡았다.
1981년, 감독직에서 해임된 나가시마 시게오의 뒤를 이어 요미우리의 차기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나가시마를 창가에 쫓아낸 남자'''’(長嶋を窓際に追いやった男일본어) 라는 세간의 비판을 받았지만 후지타 감독, 오 사다하루 조감독, 마키노 시게루 수석 코치의 3자에 의한 ‘트로이카 체제’를 시행하여 취임 1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퍼시픽 리그 우승팀인 닛폰햄 파이터스를 누르고 1973년 이후 8년 만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석권했다.
1983년에는 2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접전 끝에 3승 4패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당시 조감독을 맡고 있던 오 사다하루에게 감독 자리를 양보하는 형태로 감독직에서 물러나 다시 NHK 야구 해설위원으로 복귀함과 동시에 호치 신문의 객원 해설위원으로 발탁되는 등 평론 활동을 재개했다.
1988년 시즌 종료 후, 오 사다하루가 감독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다시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재부임하면서 이듬해인 1989년에는 취임 1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함과 동시에 일본 시리즈에서 긴테쓰 버펄로스를 누르고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을 이끌었다. 다음 해인 1990년에는 리그 우승을 이끌면서 팀의 2연패를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세이부한테 또 다시 패했고 2년 후인 1992년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요미우리 코치 시절에는 와타나베 히데타케를 재생시켰고 제1차 감독 시절에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다카시, 사다오카 쇼지, 제2차 감독 시절에는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 구와타 마스미 등 팀내 투수진을 활성화했다. 야수와 관련해서는 가와이 마사히로, 오가타 고이치 등을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고마다 노리히로, 오카자키 가오루 등 간판 야수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3. 1.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은퇴 후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의 지휘 하에 투수 코치로 부임하면서 호리우치 쓰네오와 다카하시 가즈미를 육성해 요미우리의 V9 시대를 이끌었다.[6] 1965년에는 미야타 마사노리를 구원 투수로 기용하여 20승을 거두는 활약을 이끌었다.[6] 스가와라 카츠야, 구라타 마코토, 세키모토 요시지를 육성했을 뿐만 아니라 부진했던 와타나베 히데타케, 나카무라 미노루를 재생시켰다.[6]하지만 1973년 시즌 도중 투수진의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2군 코치로 격하되기도 했다. 1970년에는 부업 관련 인사 트러블을 해결하기 위해 조직폭력배를 고용한 등의 문제로 구단으로부터 1개월간의 징계를 받았다.[6] 징계 기간 중에는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프라모델 만들기에 몰두했다고 한다.
3. 2.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코치
은퇴 후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의 지휘 하에 투수 코치로 부임하면서 호리우치 쓰네오와 다카하시 가즈미를 육성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 시대를 이끌었지만, 1973년 시즌 도중 투수진의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2군 코치로 격하되기도 했다.[32] 요미우리 코치 시절에 부업의 인사 분쟁 해결에 폭력단원을 고용하고 있었던 것과 1969년 총선거와 관련해서 폭력단과 연계된 사실이 드러나 구단으로부터 1개월 간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요미우리에서 퇴단한 후 1975년에는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으로 취임한 아키야마 노보루의 요청에 의해 다이요의 투수 코치로 발탁되었다.[7] 오쿠에 히데유키와 마사시바 토미히로를 육성하는 등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약체화된 투수진을 재건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2년 만에 코치직에서 사임했다. 벳토 가오루가 다이요 감독으로 재부임하면서 아키야마 노보루는 1977년 2군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 해를 끝으로 다이요를 떠났는데 프로에서의 마지막 해인 1967년을 제외하면 거의 2군 생활을 하지 않아 후보 선수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데다 스타 선수를 이끌만한 지도력과 관록이 부족했던[33] 것이 컸다. 이후 NHK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발탁하는 한편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던 NHK 소년 야구 교실의 강사를 맡았다.
3. 3.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1기)
1981년,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해임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차기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나가시마를 창가에 쫓아낸 남자'라는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8] 그러나 후지타 감독, 오 사다하루 조감독, 마키노 시게루 수석 코치의 3인으로 구성된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여,[9] 취임 첫 해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 닛폰햄 파이터스를 꺾고 1973년 이후 8년 만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10]하지만, 언론은 일본 시리즈 우승에도 불구하고 후지타 감독보다 나가시마 전 감독의 공적을 더 칭찬했다.[10] 구단주 쇼리키 켄마저 나가시마에게 감독 복귀를 요청하는 상황에 이르자, 후지타는 구단주에게 직접 항의하여 사태를 해결했다.[11]
1983년에는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일본 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에 3승 4패로 패배했다. 같은 해, 오 사다하루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NHK 야구 해설위원과 호치 신문 객원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
3. 4.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기)
1988년 시즌 종료 후, 오 사다하루가 감독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재부임했다.[13] 이듬해인 1989년에는 취임 1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함과 동시에 일본 시리즈에서 긴테쓰 버펄로스를 누르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13] 당시 니트로글리세린을 상비하며 지휘봉을 잡았고, 하라 다쓰노리, 나카바타 기요시, 오카자키 이쿠 등의 포지션을 변경하며 팀 분위기를 쇄신했다. 특히 사이토 마사키에게는 "네가 소심한 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한 거야"라며 격려하여 선발 투수로 성장시켰다.[13] 사이토는 이 해 11경기 연속 완투승이라는 프로야구 신기록을 세우는 등 20승을 거두며 구와타 마스미,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팀의 주축 투수로 자리매김했다.1990년에는 에토 아키라가 수비 코치로 합류했다.[9] 개막부터 독주하여 9월 8일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최종적으로 88승 42패로 2위 히로시마와 22경기 차로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사이토 마사키, 마키하라 히로미, 구와타 마스미 외에 미야모토 가즈토모, 고다 이사오, 기타 유오를 더한 6명의 선발 로테이션으로 팀 88승 중 80승을 거두었고, 완투 수는 총 70회에 달했다. 1년 동안 기용한 투수는 단 1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투수진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세이부에 4연패를 당했다.
1991년에는 팀이 4위로 추락했다. 시즌 중 후지타의 최대 후원자였던 무대 미쓰오가 사망했고, 와타나베 쓰네오가 요미우리 신문사 사장에 취임했다.[14] 와타나베는 후지타의 코치진 전원 잔류 요구에 불복하며 헤드 코치 곤도 아키히토, 타격 코치 마쓰바라 마사루를 해임했다. 1992년에는 이시게 히로후미를 마무리 투수로 발탁하고, 오쿠보 히로모토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하여 7월에는 선두에 올랐지만, 야쿠르트, 한신과의 경쟁 끝에 2위에 머물렀고, 후지타는 이 해를 끝으로 팀을 떠났다.
제2차 감독 시절에는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 구와타 마스미 등 팀내 투수진을 활성화했다. 야수와 관련해서는 가와이 마사히로, 오가타 고이치 등을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고마다 노리히로, 오카자키 가오루 등 간판 야수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4. 감독 퇴임 이후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NHK의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고 1996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4] 같은 해부터 사와무라 에이지상 선정 위원을 맡았고, 베쓰쇼 다케히코의 사망으로 위원장으로 추천되었다.[15]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요미우리 OB회 회장을 역임했다.[34] 2005년에는 시코쿠 규슈 아일랜드 리그 팀인 에히메 만다린 파이렛츠 어드바이저 스태프를 맡았다.[34]
“우리들 시대의 야구 선수는 지금보다 수준이 높았다”라고 과거를 미화하는 야구계 OB가 많은 가운데도 “지금과는 전혀 수준이 다르다. 옛날에는 적당했다”라고 현재와 과거의 차이를 인식하며 말하기도 했다.[34]
2000년경에 컨디션 저하로 건강이 나빠지면서 NHK 해설위원을 맡는 일도 사양해 이후 요양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34] 2006년 2월 9일 오후 6시 40분, 도쿄도 세타가야구에 있는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74세.[34]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 측에서는 후지타의 수많은 공적을 칭하면서 역대 세 번째가 되는 구단장으로 치뤄졌다.[35] 戒名(계명)은 "元投院球心篤應居士(겐토우인 큐신토쿠오우코지)"이다.
현역 시절의 경쾌한 모습이나 특유의 스마트한 언행으로 ‘야구계의 신사’라는 별명이 붙여졌고,[35] 노무라 가쓰야는 그의 저서에서 감독으로서의 후지타에 대한 높은 평가를 주었다.[35] 하라 다쓰노리는 지금도 후지타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으면서 시간이 있으면 빈번히 후지타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있다.[35]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조사에서, "후지타 군, 오늘은 너무 힘들고 외롭다. 외롭지만 눈물 없이 작별을 고하기로 했다. 그것이 아무리 힘든 때에도 미소를 잊지 않았던 그대에게 가장 좋은 위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마워, 고마워, 정말 고마워. 후지타 군, 안녕"이라고 작별을 고했다.
2004년 프로야구 재편 문제 소용돌이 속에서, "프로야구 1리그 구상", "구단 감축안"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몇 안 되는 자이언츠 OB 중 한 명이다. 또한, "이대로라면 다른 팀에서 키운 선수들만 기대하게 되고, 스스로 명선수를 육성하여 세상에 내보낸 자이언츠의 훌륭한 전통에 상처가 생긴다.", "젊은 선수 육성의 걸림돌이 될 뿐이다."라며 FA 제도와 역지명 제도 도입에도 반대했다.
5. 평가 및 영향
현역 시절 후지타 모토시는 당당한 모습과 세련된 외모, 태도, 게이오기주쿠 대학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야구계의 신사"라고 불렸다.[24] 지도자로서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보여주고, 말로 알려주고, 해보게 하고, 칭찬해 주지 않으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를 신조로 삼았다. "누구든 꾸중 듣는 것보다 칭찬받는 것이 더 기쁘다. 선수도 마찬가지다"를 신조로 삼아 선수 육성에 힘썼다.[21]
실제로 후지타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급한 성격으로 "순간 온수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감독 시절에는 선수를 비난하는 코멘트를 거의 하지 않았고, 1990년 일본 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에 4연패로 패배했을 때도 "감독이 서툴러서 졌다"라고 말하며 선수들을 비난하지 않아 칭찬받았다. 하지만 제2차 감독 시절에는 매우 친한 사람에게 "일분일초라도 빨리, 이 팀의 근성을 다잡지 않으면, (나중에 자신도) 고생한다"라고 말하며 위기감을 드러내기도 했다.[19][20]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선수에게는 엄하게 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야마쿠라 카즈히로는 나카오 타카요시 영입에 "나카오에게는 이길 수 없다"라고 발언하여 후지타에게 질책받고 은퇴했다. 시카토리 요시타카는 팀 방침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이부 라이온스로 트레이드되었다. 1990년 시즌에는 투수진이 포상금이 적다고 불만을 호소하자, 후지타는 최우수 감독상 부상 300만 엔을 내던지기도 했다.[21] 에가와 히로시는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홈런을 맞았을 때 벤치에서 걸어오는 감독은, 악마의 얼굴로 얼굴이 새빨개져서, 정말 무서웠다"라고 회상했으며, 히로오카 타츠로도 저서에서 "후지타는 역대 감독 중에서 가장, 통금이 엄격했다"라고 적고 있다.
카와카미 테츠지는 "의지의 히로오카, 지식의 모리, 정의 후지타"라고 평했다. 노무라 가쓰야는 "투수 출신 감독은 '정신 야구'로,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후지타는 예외로 두며 높이 평가했다.
하라 다쓰노리는 후지타가 드래프트에서 협상권을 획득한 선수로, 현재도 후지타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 나카바타 키요시도 후지타의 모습을 보고 감독을 지망하게 되었다.[22] 오쿠보 히로모토는 후지타에게 "너는 몸이 자본이니까, 더 먹어야지!"라는 격려와 함께 스테이크를 대접받고 감동하여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라고 울면서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카와아이 마사히로는 후지타가 발탁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후지타의 사망 소식에 장례식에 참석하여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후지타 씨 덕분입니다"라고 눈물을 흘렸다. 나카오 타카요시는 "후지타 감독은 나쁜 부분은 지적하지 않고, 선수를 칭찬하는 지도자."라고 평가했다.[23]
히로오카·모리 마사아키와 마찬가지로 "수비 야구"를 내걸었지만, 하라 다쓰노리를 3루수에서 좌익수 또는 1루수로 포지션 변경했다. 또한, 투수에서는 제1차로 에가와 히로시·니시모토 세이·사다오카 마사지, 제2차로 사이토 마사키·마키하라 히로키·쿠와타 마스미에 의한 '''「선발 3본주」'''를 확립시켰다.
"우리 시대의 야구 선수는 지금보다 수준이 높았다"라고 과거를 미화하는 다른 OB들과는 달리, 후지타는 "지금과는 전혀 수준이 다르다. 옛날에는 대충이었다"라고 현재와 과거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24]
다른 구단 코치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감독으로 발탁해 준 츠무다이 미쓰오에 대한 은혜는 변하지 않았고, "츠무다이 씨가 없어져서, 거인이 이상해졌다"라고 회고했다.[25] 한편, 현역 은퇴 후에는 후지타 산업 회사를 설립하여 어망의 제조, 수리 및 광고 대리점 업무를 했지만, 1970년에는 임원에게 폭력단을 사용하여 퇴직을 강요하는 등의 트러블도 있었다.[26]
6. 상세 정보
6. 1. 출신 학교
게이오기주쿠 대학을 졸업했다. 에히메 현립 니하마 중학교(현재의 에히메현립 니하마히가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에히메 현립 사이조키타 고등학교(현재의 에히메현립 사이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6. 2. 선수 경력
닛폰 석유를 거쳐 1957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 1964년까지 선수로 활동하였다.6. 3. 지도자 경력
후지타 모토시는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코치를 역임했다. 1963년과 1964년에는 선수 겸임 코치로 활동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는 다이요 웨일스 투수 코치를 맡았다. 1981년부터 1983년, 그리고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을 역임했다. 감독 퇴임 후에는 NHK 야구 해설 위원, 호치 신문 객원 해설 위원 등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OB회 회장을 지냈다.6. 4. 수상 및 타이틀
후지타 모토시는 다승왕 1회(1959년), 최다 선발승 2회(1958년 22선발승, 1959년 22선발승), 최고 승률 2회(1958년, 1959년)를 기록했다.[28] 1957년에는 신인왕, 1958년과 1959년에는 MVP를 2회 연속 수상했으며, 1959년에는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28]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감투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센트럴 리그 투수 최초의 수상이었다. 1996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감독으로서는 쇼리키 마쓰타로 상을 2회(1981년, 1989년) 수상했고, 1989년에는 도쿄 돔 MVP 특별상과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29]6. 5. 개인 기록
6. 6. 등번호
후지타 모토시는 1957년에 등번호 21번을 사용했다.[36] 1958년부터 1966년까지는 18번을 사용했고,[36] 1967년부터 1973년, 1975년부터 1976년까지는 81번을 사용했다.[36] 1981년부터 1983년, 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73번을 사용했다.[36]참조
[1]
웹사이트
王、原を育てた「教育者」・藤田元司の美学
https://column.sp.ba[...]
2015-05-11
[2]
서적
都市対抗野球大会60年史
日本野球連盟 毎日新聞社
1990
[3]
뉴스
近鉄・加藤哲郎が明かした「巨人はロッテより弱い」発言の真相
https://bunshun.jp/a[...]
2020-11-25
[4]
서적
豪球列伝
文藝春秋社
[5]
웹사이트
日本シリーズにおける登板機会5連敗は、藤田の他に村山実・北別府学がいる。
[6]
웹사이트
いわゆる「黒い霧事件」を言うが、藤田本人は後年になって著書で当時を振り返り、全く身に覚えの無いことだったと述べている。
[7]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8]
웹사이트
「厳しさ」と「温かさ」原監督に通ず/藤田元司氏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9-05-29
[9]
웹사이트
起業家File.047 江藤省三さん 野球指導者「No Baseball, No life‼」
https://www.exa2011.[...]
[10]
웹사이트
実際、1980年のドラフト会議で引き当てた原はチーム二冠王(本塁打・打点)となって新人王に輝いたが、原と外国人選手以外は大半が藤田の監督就任前(第一次長嶋政権末期)の1979年から1980年に大きく成績を伸ばした選手だった。一方で、1994年の日本シリーズでは長嶋が監督して初めて日本一に輝くが、その時に原動力となったのは藤田が監督時代に確立した「先発三本柱」(斎藤雅樹・槙原寛己・桑田真澄)で、槙原はシリーズMVPを獲得した。
[11]
서적
ドンを越えた男―「巨人軍監督」藤田元司・しんぼうに辛抱のリーダーシップ
ダイヤモンド社
[12]
간행물
酒井勉インタビュ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89-07-03
[13]
서적
藤田
1990
[14]
뉴스
渡辺恒雄氏が92年激励会原稿で読み飛ばした箇所「私は犬ではない」【平成球界裏面史】
https://www.tokyo-sp[...]
東京スポーツ
2023-03-06
[15]
웹사이트
沢村賞選考委員は歴代受賞者(委員会制度が導入された1982年より)およびパ・リーグで先発として活躍した元投手(パ・リーグ球団所属投手も対象となった1989年より)が起用されることが慣例だが、セ・リーグ(の巨人)一筋で受賞歴のない藤田の起用は異例と言える。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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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ikkan-g[...]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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背番号は監督時代の「73」ではなく、現役時代の「18」を着用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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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0-02-01
[19]
뉴스
読売新聞
1993-03-21
[20]
웹사이트
それ以前の勝利は王貞治監督時代の1988年4月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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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平成最大の屈辱…藤田巨人「日本シリーズ4連敗」の内幕 – 東京スポーツ新聞社
https://www.tokyo-sp[...]
[22]
뉴스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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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革命捕手」中尾孝義が見たプロ野球 西武・森監督にいきなり「競馬が好きらしいが選手に悪い影響を与えるなよ」と釘を刺された
https://www.nikkan-g[...]
日刊ゲンダイ
[24]
웹사이트
体温のある指導者。藤田元司。 第13回 期待が人間を育てる
https://www.1101.com[...]
200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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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急逝・藤田元司 原巨人への「遺言」
2006-02-23
[26]
뉴스
藤田コーチの会社 暴力団使い退職強要
1970-02-13
[27]
뉴스
川相“監督代行”で一丸1勝 1点差制す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8]
웹사이트
ヤクルト・村上宗隆 世界の王、イチローも超える“連続MVP”への期待
https://www.daily.co[...]
2022-07-25
[29]
웹사이트
歴代授賞者
http://www.jpsa.jp/a[...]
公益財団法人日本プロスポーツ協会
[30]
간행물
CF撮影余話
中小企業経営管理センター事業部
1990-03-10
[31]
웹사이트
4경기를 치른 1959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스기우라의 32이닝에 뒤를 이은 기록이다.
[32]
뉴스
大洋・青田昇代行がじゃじゃ馬イズムでチーム改革?/週べ回顧1972年編
https://column.sp.ba[...]
슈칸 베이스볼 온라인
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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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장훈, 대양 이적 좌절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1974-10-25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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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웹사이트
하라는 198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4개 구단에서의 지명을 받고 있었는데 4개 구단이 경합한 끝에 교섭권을 차지한 것은 1980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의 차기 감독(제1차)으로 부임한 후지타 모토시였다.
[36]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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