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북진 정책
1. 개요
고려의 북진 정책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인식 하에,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정책이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성을 서경으로 삼고, 성종 대에는 청천강 이북의 압록강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 강대국의 등장으로 북진 정책의 완전한 실현은 어려웠지만, 고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벌을 시도하여 윤관의 여진 정벌, 공민왕 대의 요동 정벌 등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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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요나라 관계 -
동북 9성
동북 9성은 고려 예종 때 윤관이 여진족을 정벌한 후 쌓은 9개의 성으로, 여진족의 반격과 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해 반환되었으며, 이후 여진족은 금나라를 건국하여 고려와 긴장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
고려-금나라 관계 -
조위총의 난
조위총의 난은 1174년부터 1176년까지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발하여 서경을 중심으로 일으킨 반란으로, 서경 세력과 동북 양계의 여러 성을 규합하여 무신정권 타도를 내세웠으나 진압되었고, 고려의 군사력 약화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며 무신정권의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
고려-금나라 관계 -
고려와 금의 대외관계
고려와 금의 대외 관계는 12세기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금나라의 사대 요구를 고려가 수용하면서 군신 관계를 맺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
고려가 참전한 전쟁 -
원나라의 일본 원정
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13세기 후반 쿠빌라이 칸이 일본을 정복하려 두 차례 시도한 원정으로, 몽골, 고려, 중국 군대가 참여했으나 두 번 모두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고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
고려가 참전한 전쟁 -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의 항쟁은 최씨 무신정권의 군사조직인 삼별초가 원종의 친몽 정책과 해산 명령에 반발하여 1270년 강화도에서 시작, 배중손을 중심으로 왕족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며 진도와 제주도에서 3년간 고려-원 연합군에 맞서 싸웠으나 1273년 진압되어 고려의 몽골 지배 강화와 원의 제주도 직접 통치를 가져왔으며,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되지만 무신정권의 잔재라는 비판도 있다.
2. 고려의 건국과 정체성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서긍의 《[[고려도경]》과 《송사》, 《원사》의 고려전에도 고려를 고구려의 후신처럼 기록하였는데, 이는 고려 사람들이 스스로 고구려의 후신임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서희는 요나라(거란)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후신이니 만일 영토를 따지자면 귀국의 동경(東京 : 요양)·심(瀋 : 봉천)은 본래 우리나라 옛 땅에 속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태조는 북진 정책을 표방하여 고구려의 옛 도읍 평양성을 서경으로 삼고 중시하여, 임금이 자주 행차하였다.
2.1. 고구려 계승 의식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서긍의 《[[고려도경]》과 《송사》, 《원사》의 고려전에도 고려를 고구려의 후신(後身)처럼 기록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명칭뿐만 아니라 고려인들이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서희는 요나라(거란)의 소손녕에게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후신이니, 만일 영토를 따지자면 귀국의 동경(東京 : 요양)·심(瀋 : 봉천)은 본래 우리나라 옛 땅에 속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이를 뒷받침하였다.
2.2. 서희의 외교 담판
서희는 요나라(거란)의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에서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후신이니 만일 지계(地界)를 따지자면 귀국(貴國)의 동경(東京 : 요양)·심(瀋 : 봉천)은 본래 우리나라 옛 땅에 속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고려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지고 영토 문제를 논했음을 보여준다.
3. 북진 정책의 전개
고려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태조는 평양성을 서경으로 삼아 중요시했으며, 서희는 요나라(거란)와의 외교 담판에서 고구려 영토 회복 의지를 드러냈다. 성종 대에는 청천강 이북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압록강 이남의 여진족을 몰아내는 등 북진 정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만주 지역에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족), 원나라(몽골) 등 강대국들이 등장하면서 북진 정책은 한계에 직면했다. 최탄의 난과 같이 내부적인 요인으로 영토가 축소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고려는 북진의 기회를 엿보며 북벌을 시도하였다. 예종 때 윤관의 여진 정벌, 공민왕 초 원나라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압록강 서쪽 팔참(八站)을 정벌하고 동녕부와 요양(遼陽)을 공격한 것, 우왕 때의 요동 정벌 시도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북벌 시도들은 고려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잃지 않고 북진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음을 보여준다.
3.1. 초기 북진 정책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서긍의 《고려도경》과 《송사》, 《원사》의 고려전에도 고려를 고구려의 후신(後身)처럼 기록한 것은 국호뿐만 아니라, 실제로 고려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고구려의 후신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서희가 요나라(거란)의 소손녕에게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후신이니 만일 지계(地界)를 따지자면 귀국(貴國)의 동경(東京 : 요양)·심(瀋 : 봉천)은 본래 우리나라 옛 땅에 속한 것이다.”라고 말한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이처럼 고려는 태조 때부터 북진 정책을 표방하여 고구려의 옛 도읍 평양성을 서경으로 삼고, 왕이 자주 행차하였다. 이후 역대 왕들도 북진 정책을 계승하여 성종 때는 청천강을 넘어 평안북도 박천, 영변, 운산, 태천 등 압록강 연안 일대까지 영토를 넓혔고, 991년(성종 10년)에는 압록강 이남의 여진족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냈다는 기록이 있다.
3.2. 영토 확장 노력
태조 때부터 고려는 북진 정책을 표방하여 고구려의 옛 도읍 평양성을 중시하여 서경으로 삼고, 임금이 자주 행차하였다. 서희는 요나라(거란) 소손녕에게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후신이니 만일 지계(地界)를 따지자면 귀국(貴國)의 동경(東京 : 요양)·심(瀋 : 봉천)은 본래 우리나라 옛 땅에 속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역대 고려는 북진 정책을 계승하여 성종 때는 청천강을 넘어 평안북도 박천(博川)·영변(寧邊)·운산(雲山)·태천(泰川) 등지 압록강 연안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991년(성종 10년)에는 압록강 이남의 여진족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냈다는 기록을 남겼다.
3.3. 외세와의 갈등
요나라(거란)·금나라(金, 여진)·원나라(元, 몽골) 등 강국이 만몽 지방에 등장하면서 고려의 북진 정책은 더 이상 실현되기 어려웠다. 최탄의 난으로 영토가 축소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북진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벌을 단행하였다. 예종 때 윤관의 여진 정벌, 공민왕 초기 압록강 서쪽 팔참(八站) 정벌, 1370년부터 1371년(공민왕 19~20)까지 동녕부와 요양(遼陽) 정벌, 우왕 때 요동 정벌(遼東征伐) 출병 등이 모두 북진 정책의 일환이었다.
3.4. 지속적인 북벌 시도
서희가 요나라(거란)의 소손녕에게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후신이니 만일 지계(地界)를 따지자면 귀국(貴國)의 동경(東京 : 요양)·심(瀋 : 봉천)은 본래 우리나라 옛 땅에 속한 것이다.”라고 하여 달랜 사실 등은 이를 증명한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북진 정책을 표방하여 고구려의 옛 도읍 평양성을 중시하여 서경으로 삼고, 임금이 자주 행차하였다. 이후 역대 고려는 북진 정책을 계승하여 성종 때는 청천강을 넘어 평안북도 박천, 영변, 운산, 태천 등 압록강 연안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991년(성종 10년)에는 압록강 이남의 여진족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냈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려의 북진 정책은 만몽 지방에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족), 원나라(몽골) 등의 강국이 등장하면서 그 이상을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최탄의 난으로 영토가 축소됐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북진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벌을 행하였다. 요나라가 쇠하고 금나라가 일어나기 전인 예종 때 윤관의 여진 정벌, 공민왕 초기에는 원나라 세력이 쇠하자 압록강 서쪽의 팔참(八站)을 정벌하였고, 1370년부터 1371년(공민왕 19~20)까지는 동녕부와 요양(遼陽)을 정벌하였으며, 우왕 때의 요동 정벌(遼東征伐) 출병도 모두 북진 정책의 계승에서 나온 것이었다.
4.1. 강동 6주
4.2. 동북 9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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