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금의 대외관계
1. 개요
고려와 금의 대외관계는 12세기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전개되었다. 여진족이 성장하여 금나라를 건국하고,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고려에 형제 관계 및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사대를 강요했다. 고려는 금나라의 강력한 힘에 굴복하여 보주 문제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도 실리 외교를 펼쳤으며, 결국 금나라의 요구를 수용하여 군신 관계를 맺었다.
| 분쟁 | 고려와 금의 대외관계 |
|---|---|
| 날짜 | 12세기 |
| 결과 | 별무반 조직 동북 9성 축조 금나라 건국 금나라의 고려 압력 고려의 사대 요구 수용 (군주와 신하 관계가 됨) 북진 정책의 좌절 |
| 장소 | 한반도와 중국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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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진족의 성장과 금나라 건국
11세기부터 생여진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강대하게 성장하였다. 11세기 말 하얼빈 부근의 완안부는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고, 아골타는 생여진절도사의 지위에 올라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요와 싸워 크게 이겼다. 1115년 아골타는 금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며 연호를 수국(收國)이라 하였다. 금은 송과 연합하여 요를 멸망시켰으나, 송의 군사력이 약한 것을 알고 남하하여 송의 수도인 변경(개봉)을 함락하고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종친과 관료들을 잡아갔다. 금은 건국한 지 10여 년 만에 요를 멸망시키고 중국 영토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동아시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급속한 발전이었다.
2.1. 여진족의 기원과 초기 역사
여진족은 5세기 이후부터 만주 동부 지방의 송화강 유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민족이다. 여진족은 숙여진(熟女眞)과 생여진(生女眞)으로 구분된다. 송화강을 경계로 서남쪽에 살면서 비교적 한화(漢化)되고 수렵과 농사를 지을 줄 아는 부족을 숙여진이라 하였다. 생여진은 송화강 동부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요(遼)가 송화강 부근에 관청을 설치하여 이들을 지배하였다. 생여진은 강변과 산중에서 수렵 생활을 하고, 들에 나가 농사도 짓는 반렵·반농 생활을 하였다.
2.2. 완안부의 성장과 아골타의 등장
여진족은 5세기 이후부터 만주 동부지방의 송화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이다. 여진족은 숙여진(熟女眞)과 생여진(生女眞)으로 구분된다. 송화강을 경계로 그 서남쪽에 살면서 비교적 한화(漢化)되고 수렵과 농사를 지을 줄 아는 부족을 숙여진이라 하였다. 생여진은 송화강 동부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요(遼)가 송화강 부근에 관청을 설치하여 이들을 지배하였다. 생여진은 강변과 산중에서 수렵생활을 하고, 들에 나가 농사도 짓는 반렵·반농생활을 하였다.
11세기부터 생여진의 완안부를 주축으로 해서 계속 강대하게 성장하였는데, 11세기 말에 하얼빈 부근의 완안부(完顔部)는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이즈음에 추장으로 추대된 아골타(阿骨打)는 마침내 생여진절도사의 지위에 올라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영주(길림부여현)에서 요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듬해 대금(大金)(1115~1234)을 건국하니 그가 바로 금의 태조였다. 그는 황제를 칭하고 수국(收國)이라 연호를 칭하였다.
2.3. 금나라 건국과 발전
여진족은 5세기 이후부터 만주 동부 지방의 송화강 유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민족이다. 11세기 말, 하얼빈 부근의 완안부(完顔部)는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고, 이즈음에 추장으로 추대된 아골타(阿骨打)는 생여진절도사의 지위에 올라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요와 싸워 크게 이겼다. 그 이듬해 1115년 금나라(1115~1234)를 건국하니 그가 바로 금 태조였다. 그는 황제를 칭하고 수국(收國)이라 연호를 칭하였다.
금은 중국의 송과 연합하여 요를 멸망시켰으나, 동맹국 송의 약한 군사력을 간파하고 남하하여 송의 수도인 변경(개봉)을 함락하고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종친과 관료들을 잡아갔다. 금은 건국한 지 불과 10여 년 만에 요를 멸망시키고 중국 영토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는 동아시아 역사상 그 예를 찾기 어려운 급속한 발전이다.
3. 12세기 동아시아 정세
1107년 고려는 윤관의 지휘 아래 여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9성을 설치하여 영토를 확장하려 했다. 그러나 여진의 지속적인 공격과 국내 여론에 밀려 결국 9성을 반환했다. 이후 여진은 이를 기반으로 성장하여 1115년 금(金) 제국을 건설했다. 금나라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을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하고 황제를 포로로 잡아가는 등 동아시아의 정세를 뒤흔들었다. 이 과정에서 송나라는 양쯔강 이남으로 쫓겨가 남송을 건국하게 되었다.
3.2. 북송의 멸망과 남송의 건국
금은 1127년 송나라의 수도를 공략하여 송 황제 흠종과 휘종 그리고 종실, 귀족 등 3천 명을 붙잡아 갔으며, 하북(河北), 산동(山東), 산서(山西) 지방을 차지하였다. 이에 송은 양쯔강 남쪽으로 쫓겨난 후 고종에 의해 남송이 건립되었다.
3.3. 금나라의 화북 통치와 송-금 관계
금나라는 화북 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대신, 1128년에 장방창(張邦昌)을 내세워 초(楚)나라를 세우고, 1130년에는 유예를 내세워 제(齊)나라를 세우는 간접 통치 방식을 택했다. 이는 금나라가 송나라와 금나라 사이의 완충 지대를 만들고, 송나라의 반격을 막기 위한 전진 기지로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금나라의 공격에 남송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결국 1141년, 남송은 금나라에 신하를 칭하고 매년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바치는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이후 20년간 평화가 지속되었으나, 금나라 해릉왕(海陵王)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중국 문화에 깊이 심취했던 해릉왕은 1161년, 수도를 연경(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기고 남송을 정벌하여 중국 전체를 통일하려 했다. 그러나 해릉왕의 남송 정벌은 한족의 거센 저항과 금나라 내부의 반란으로 실패하고, 해릉왕은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세종(世宗)이 즉위하면서 1165년, 금나라는 남송과 다시 화의를 맺었다. 이때의 화의 조건은 이전의 군신 관계에서 숙질(叔姪) 관계로 고치는 굴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4. 고려와 금나라의 관계
1107년 여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는 윤관에게 동북 9성 설치를 명하여 영토 확장을 꾀했으나, 여진의 지속적인 공격과 국내 여론에 밀려 9성을 반환하였다. 이후 여진은 이를 기반으로 성장하여 1115년 금(金) 제국을 건국하였다.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을 공격하여 양자강 이남으로 몰아내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관계에서 초(楚)와 제(齊)를 완충국으로 삼아 송나라의 반격을 막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송나라는 금나라에 칭신(稱臣)하며 매년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바치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기도 하였다.
세종 시기에는 송나라와의 관계가 군신 관계에서 숙질(叔姪) 관계로 바뀌는 등 변화가 있었다.
4.1. 금나라의 사대 요구와 고려의 대응
금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고려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다가,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사대를 강요하였다.
1117년 3월, 금 태조 아골타는 고려에 "형인 대여진 금나라 황제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월을 보낸다."라는 서한을 보내 형제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의 수도 변경을 압박하던 금나라는 고려에게 "형제 관계"에서 더 나아가 "군신 관계"를 맺고 사대(事大)할 것을 요구하였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금나라의 태도 변화에 고려는 분개하였으나, 거란을 멸망시키고 북송을 위협하는 금나라의 현실적인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고려의 실권자였던 이자겸의 주장이 수용되었으나, 이듬해 이자겸이 제거되자 왕권 강화와 함께 대외 관계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고려와 금나라는 보주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보주는 압록강 동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 고려 성종 때 거란이 강동 6주를 넘겨줄 때 고려의 영토가 되었으나, 거란의 2차 침입 때 다시 거란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거란과의 강화 이후에도 고려는 보주 반환을 주장하였으나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 고려 예종 12년에 금나라의 공격을 받은 거란군이 보주성을 비우고 도망가자, 고려는 즉각 군대를 투입하여 보주를 탈환하고 의주 방어사로 고쳐 북쪽 방어에 힘썼다.
요나라를 공격할 때 금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보주는 본래 고려 땅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너희들 스스로 그 성을 탈환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금나라가 거란을 함락시켜 국력이 강해지자 다시 보주 문제를 거론하였다. 금나라 황제는 금나라 사신에게 고려에 가서 "고려에 사절을 파견하여 왕래하는 의식은 모두 요나라에 대하던 옛 제도에 따르게 하고, 보주와 변방에 사는 사람들로서 저쪽 경내에 거주하는 자를 있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 만일 우리의 요구를 모두 다 받아들인다면 보주 지방을 고려에게 주도록 하라."라고 지시하였다. 보주가 이미 고려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금나라는 옛 거란의 소유였다는 이유를 들어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고 위협한 것이다.
이에 고려 정부는 후일을 기약하며 금나라에 굽힐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역이 요산(遼山)부터임을 밝히고, 요나라가 멸망할 무렵에 금 황제가 '보주는 본래 고려의 영토이니 고려에게 회수함이 옳다'고 하여 고려가 탈환했음을 상기시켰다. 고려는 금나라의 본래 목적이 보주를 빼앗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빌미로 고려를 굴복시키는 데 있음을 알고, 금나라에 조공을 바쳐 군신의 예를 취할 것을 맹세하여 실리를 취하고자 하였다.
금나라는 고려가 인구 소환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보주를 다시 빼앗을 수 있다고 위협하였다. 금나라는 고려에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1) (그대 나라가) 대국을 섬기는 뜻을 가상히 여겨 은전으로 영토를 주었는데 얼마 전에 공물을 바치면서 다만 사례하는 글월만을 올렸다. 이 글월을 읽고 감탄하는 마음은 비록 간절하였으나 아직도 호구를 돌려보내라고 한다는 것을 빙자 서봉(誓封)에 대해서는 따로 아뢰지 아니 하였다. 단지 매사에 업적을 나타내고 대대로 충성하여 믿을 수는 있지만, 나의 확실한 말이 없다면 얻었던 영토를 장차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2) 이번에 받은 귀국의 표문 내용을 보니 맹약한 의사가 비록 더욱 신중해지기는 하였으나 우리의 원근 지역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위협해서 강제로 데려간 호구에 대한 말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왕 성의껏 맹약을 할 바에는 응당 사절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는 것이 예의에 합당할 것인데 돌아가는 우리 사절 편으로 표문을 보냈으니 예절을 옳지 않다. 표문 내용에 대해서는 사리가 정당하기에 모든 것을 양해한다. 돌아가는 사신과 부사는 국왕께 자세한 것을 말씀드리고 다음에는 우리의 원근 지역에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위협해서 강제로 끌려간 호수를 모두 기록하여 표문과 함께 보내도록 하시오.
금나라는 호구 소환보다 군신 관계를 맹세하는 서봉(誓封)을 보내지 않았음을 비난하고, 호구 조사 기록 누락과 더불어 고려의 사신이 금나라에 직접 와서 서봉을 바치지 않고 금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게 한 점은 금나라에 대해 예의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금나라는 고려에 군신의 예를 다하여 직접 사신이 와서 표문과 공물을 바치며, 보주 부근에 살고 있던 여진 사람을 조사하여 금나라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보주를 빼앗거나, 보주성을 제외한 주위 영역을 모두 금나라의 영역으로 만들겠다고 위협하였다.
고려는 금나라를 섬기는 것은 수용하더라도 여진인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소환할 사람이 없다고 거부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고려 인종 5년부터 4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고려 인종 8년 12월, 고려는 금나라로부터 인구 문제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4.2. 보주 분쟁과 외교적 갈등
보주(保州)는 압록강 동쪽에 있는 중요한 곳으로, 고려와 금나라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난 지역이다. 고려 성종 때 거란이 강동 6주를 넘겨줄 때 고려의 영토가 되었으나, 거란의 2차 침입 때 다시 거란의 영역이 되었다. 거란과의 강화 이후에도 고려는 보주의 반환을 주장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1117년 금 태조 아골타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형인 대여진 금나라 황제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월을 보낸다"는 서한을 보냈다.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금나라는 고려에게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금나라의 태도 변화에 고려는 분개하였으나,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을 위협하는 현실적인 힘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까지 승복할 수는 없었다.
예종 12년에 금나라의 공격을 받은 거란군이 보주성을 비우고 도망가자, 고려는 즉각 군대를 투입시켜 보주를 점령하고 의주 방어사로 고쳐 남쪽 주민을 이주시켜 북쪽 방어에 힘썼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공격할 때 고려가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보주는 본래 고려 땅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금나라는 ‘너희들 스스로 그 성을 탈환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금나라가 거란을 함락시켜 국력이 강해지자 다시 보주 문제를 거론하였다. 금 황제는 금나라 사신에게 고려에 가서 행해야 할 자세를 언급하면서, 보주가 고려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옛 거란의 소유였다는 이유를 들어 금나라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고려는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역이 요산(遼山)부터임을 밝히고, 요나라가 멸망할 무렵에 금 황제가 ‘보주는 본래 고려의 영토이니 고려에게 회수함이 옳다’고 하여 고려가 탈환했음을 상기시켰다. 고려는 금나라의 본래 목적이 보주를 빼앗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데 있음을 알고, 금나라에 조공을 바쳐 군신의 예를 취할 것을 맹세하여 실리를 취하는 데 힘썼다.
금나라는 호구 소환보다 군신 관계를 맹세하는 서봉(誓封)을 보내지 않았음을 비난하고, 고려 사신이 금나라에 직접 와서 서봉을 바치지 않고 금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게 한 점은 금나라에 대해 예의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금나라는 고려에 군신의 예를 다하여 직접 사신이 와서 표문과 공물을 바치며, 보주 부근에 살던 여진 사람을 조사하여 금나라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보주를 빼앗거나, 보주성을 제외한 주위 영역을 모두 금나라의 영역으로 만들겠다고 위협하였다.
고려는 금나라를 섬기는 것은 받아들이더라도 여진인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소환할 사람이 없다고 거부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인종 5년부터 4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금나라는 고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고려는 인종 8년 12월에 금나라로부터 인구 문제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4.3. 군신 관계 수용과 실리 외교
금 제국은 1117년 3월, 금 태조 아골타가 고려 국왕에게 "형인 대여진 금나라 황제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월을 보낸다"는 서한을 보내며 압박을 시작했다.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의 수도 변경을 위협하던 금나라는 고려에게 "형제 관계"에서 더 나아가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사대할 것을 강요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금나라의 태도 변화에 고려는 분개했지만,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위협하는 현실적인 힘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해야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마음속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이자겸의 주장이 수용되었지만, 이듬해 이자겸이 제거되자 왕권 강화 움직임과 함께 대외 관계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고려와 금나라 사이에 보주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압록강 동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인 보주는 고려 성종 때 거란이 강동 6주를 넘겨줄 때 고려의 영토가 되었으나, 거란의 2차 침입 때 다시 거란의 영역이 되었다. 거란과의 강화 이후에도 고려는 보주 반환을 요구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고려 예종 12년에 금나라의 공격을 받은 거란군이 보주성을 비우고 도망가자, 고려는 즉각 군대를 투입하여 보주를 탈환하고 의주 방어사로 고쳐 남방 주민을 이주시켜 북쪽 방어에 힘썼다.
앞서 금나라가 요나라를 공격할 때 고려가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보주는 본래 고려 땅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금나라는 "너희들 스스로 그 성을 탈환하라"고 했다. 그러나 금나라가 거란을 함락시켜 국력이 강해지자 다시 보주 문제를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大抵高麗중국어에 대하여 사절을 파견하여 왕래하는 의식은 모두 요에게 대하던 옛 제도에 따라 하게하고, 아울러 보주와 변방에 사는 사람들로서 저쪽 경내에 거주하는 자를 있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 만일 우리의 요구를 모두 다 받아들인다면 보주 지방을 고려에게 주도록 하라.
이는 금나라 황제가 금나라 사신에게 고려에 가서 취해야 할 자세를 언급한 것이다. 이미 보주가 고려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금나라는 옛 거란의 소유였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고 위협했다. 이 말을 들은 고려는 분노했지만, 당시 송나라가 금나라에 밀리고 있는 국제 정세에서 현실적으로 금나라의 군사력을 제압할 수 없다는 우려 때문에 후일을 기약하며 금나라에 굽힐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사신을 보내 완곡한 표현으로 고구려의 영역이 요산(遼山)부터임을 밝히고, 요나라가 멸망할 무렵 금나라 황제가 "보주는 본래 고려의 영토이니 고려에게 회수함이 옳다"고 하여 고려가 탈환했음을 상기시켰다. 또한 고려는 금나라의 본래 목적이 보주를 빼앗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빌미로 고려를 굴복시키는 데 있음을 알고, 금나라에 조공을 바쳐 군신의 예를 취할 것을 맹세하여 실리를 취하는 데 집중했다.
이에 대해 금나라는 인구 소환의 불이행을 비난하며 이를 잘 이행하지 않으면 보주를 다시 빼앗을 수 있다고 위협했다. 금나라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그대 나라가) 대국을 섬기는 뜻을 가상히 여겨 은전(恩典)으로 영토를 주었는데 얼마 전에 공물을 바치면서 다만 사례하는 글월만을 올렸다. 이 글월을 읽고 감탄하는 마음은 비록 간절하였으나 아직도 호구(戶口)를 돌려보내라고 한다는 것을 빙자 서봉(誓封)에 대해서는 따로 아뢰지 아니 하였다. 단지 매사에 업적을 나타내고 대대로 충성하여 믿을 수는 있지만, 나의 확실한 말이 없다면 얻었던 영토를 장차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2) 이번에 받은 귀국의 표문 내용을 보니 맹약한 의사가 비록 더욱 신중해지기는 하였으나 우리의 원근 지역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위협해서 강제로 데려간 호구에 대한 말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왕 성의껏 맹약을 할 바에는 응당 사절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는 것이 예의에 합당할 것인데 돌아가는 우리 사절 편으로 표문을 보냈으니 예절이 옳지 않다. 표문 내용에 대해서는 사리가 정당하기에 모든 것을 양해한다. 돌아가는 사신과 부사는 국왕께 자세한 것을 말씀드리고 다음에는 우리의 원근 지역에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위협해서 강제로 끌려간 호수를 모두 기록하여 표문과 함께 보내도록 하시오.
위 두 글은 금나라가 호구 소환보다 군신 관계를 맹세하는 서봉(誓封)을 보내지 않았음을 비난하고, 호구 조사 기록 누락과 더불어 고려 사신이 금나라에 직접 와서 서봉을 바치지 않고 금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게 한 점은 금나라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지적한 것이다.
금나라가 고려에 요구하는 것은 군신의 예를 다하여 직접 사신이 와서 표문과 공물을 바치며, 보주 부근에 살고 있던 여진 사람을 조사하여 금나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보주를 빼앗거나, 보주성은 이미 고려에 약속했으니 보주성을 제외한 주위 영역은 모두 금나라의 영역으로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대해 고려는 금나라를 섬기는 것은 받아들이더라도 여진인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소환할 사람이 없다고 거부했다. 이러한 갈등은 고려 인종 5년부터 4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금나라는 고려의 요구를 수용했고, 고려는 인종 8년 12월에 금나라로부터 인구 문제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5. 결론
12세기는 송나라가 문약했고 요나라는 쇠퇴했으며 금나라가 강성했던 시기로, 정복 왕조가 큰 영향을 차지했던 시기였다. 13세기에 들어서 금나라는 몽고와 송의 연합으로 멸망했고, 이는 13~14세기 몽골제국과 원나라까지 이어졌다. 여진족은 요나라에 지배당했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면서 민족적 단결을 통해 부족이 성장하여 금나라를 세웠다. 이후 10여 년 만에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도 멸망시켜 남송 정권을 만들게 하여 큰 반전을 이끌었다. 금나라는 송과 고려의 연합을 막기 위해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여 고려에 사대를 요구하면서 실리적으로 잘 챙겨나갔다. 고려는 금나라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리적인 외교를 추진했다. 하지만 부모의 나라로 섬겼던 여진족에게 군신의 예를 갖춰야 한다는 것에 대한 고려인들의 굴욕과 분노는 무시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