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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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무 테러는 1885년부터 1908년까지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통치한 콩고 자유국에서 자행된 강제 노동과 잔혹 행위를 의미한다. 레오폴드 2세는 콩고의 고무와 상아를 착취하기 위해 붉은 고무 시스템을 시행했는데, 이는 강제 노동, 신체 절단, 살인, 기근, 질병으로 이어져 콩고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했다. 이러한 만행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결국 벨기에의 콩고 합병으로 이어졌다. 고무 테러는 집단 학살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레오폴드 2세의 유산에 대한 비판과 동상 훼손 등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식민 제국 건설을 추진했지만, 벨기에 내에서는 식민지화에 대한 인기가 낮아 어려움을 겪었다.[1] 그는 중앙 아프리카 탐험을 후원하며 헨리 모턴 스탠리와 같은 탐험가들을 지원했고, 콩고강 유역 탐사를 위해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설립했다. 1884~85년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콩고 자유국의 2350000km2에 대한 레오폴드 2세의 통치를 공식 인정했다.[2]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자유국에서는 고무 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붉은 고무 시스템"이라 불리는 가혹한 노동 정책이 시행되었다. 국가는 세금 형태로 노동을 요구했고,[14] 기업들은 콩고인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 현지 노동 조직은 capitas프랑스어라는 흑인 관리들이 담당했다.[16] 그러나 고무 수집 극대화는 노동자 복지를 고려하지 않은 임의적 요구로 이어졌고,[17] 양보 지역 사기업들은 국가 간섭 없이 이익을 늘리기 위해 모든 조치를 동원했다.[18]
2. 역사적 배경
레오폴드 2세는 콩고 자유국에서 거의 모든 권한을 직접 행사하며 개인 통치를 확립했다. 아프리카 추장들은 정부 명령 실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 그러나 콩고 자유국은 행정 인력 부족을 겪었고, 1900년 기준 콩고 내 백인은 3,000명에 불과했으며 그 중 절반만이 벨기에인이었다.[4]
레오폴드 2세와 투자자들은 콩고 자유국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했다.[1] 초기에는 상아 수출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1] 1890년대 천연 고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콩고 남성들은 강제 노동으로 고무를 채취해야 했고, 이는 상당한 이익으로 이어졌다.[1]
1891년, "영역 시스템"(régime domanial프랑스어)에 따라 토지가 분할되었고,[5] 고무와 상아를 포함한 콩고의 주요 자원은 식민지의 직접 소유가 되었다.[5] 이 과정에서 사기업들에게 양허지가 주어졌고, 레오폴드 2세는 개인 통치 아래 "왕관 영역"(Domaine de la Couronne프랑스어)이라 불리는 250000km2 면적의 영토를 소유했다.[6]
레오폴드 2세와 주요 양허업자들은 콩고 내륙에서 대부분의 경제적 착취를 주도했다.[6] 이 시스템은 매우 수익성이 높아, ABIR은 한 해 동안 초기 투자액의 100%가 넘는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7] 레오폴드 2세는 1896년부터 1905년까지 이 시스템을 통해 7천만 벨기에 프랑의 이익을 거두었다.[8] 콩고 자유국의 양허 시스템은 이후 프랑스령 콩고 등 다른 식민 정권에서도 모방되었다.[9]
2. 1. 콩고 자유국 성립
1865년 벨기에 왕위에 오른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의 위상 확장을 위해 식민 제국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벨기에 내에서 식민지화는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정치인들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
레오폴드 2세는 중앙 아프리카 탐험을 후원하며 헨리 모턴 스탠리와 같은 탐험가들을 지원했다. 그는 콩고강 유역 탐사를 위해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설립했고, 1884~85년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콩고 자유국의 2350000km2에 대한 레오폴드 2세의 통치를 공식 인정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 세력권 사이의 자유 무역 지역이자 완충 국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이유였다.[2]
레오폴드 2세는 콩고 자유국에서 거의 모든 권한을 직접 행사하며 개인 통치를 확립했다. 아프리카 추장들은 정부 명령 실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 그러나 콩고 자유국은 행정 인력 부족을 겪었고, 1900년 기준 콩고 내 백인은 3,000명에 불과했으며 그 중 절반만이 벨기에인이었다.[4]
2. 2. 경제 및 행정 상황
레오폴드 2세와 투자자들은 콩고 자유국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했다.[1] 초기에는 상아 수출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식민 행정부는 빚에 시달렸다.[1] 그러나 1890년대 천연 고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콩고 남성들은 강제 노동으로 고무를 채취해야 했고, 이는 상당한 이익으로 이어졌다.[1] 1895년부터 1900년 사이 고무 수출량은 580톤에서 3,740톤으로 크게 늘었다.[4]
1891년, "영역 시스템"(régime domanial프랑스어)에 따라 토지가 분할되었다.[5] 숲과 경작되지 않은 땅은 모두 "무인" 상태로 간주되어 국가 소유가 되었으며, 고무와 상아를 포함한 콩고의 주요 자원은 식민지의 직접 소유가 되었다.[5] 이 과정에서 사기업들에게 양허지가 주어졌다. 북부 지역은 Société Anversoise프랑스어가 160000km2를, 남부 지역은 ABIR이 비슷한 규모의 땅을 받았다.[6] Compagnie du Katanga프랑스어와 Compagnie des Grands Lacs프랑스어는 각각 남부와 동부에 더 작은 양허지를 할당받았다. 레오폴드 2세는 개인 통치 아래 "왕관 영역"(Domaine de la Couronne프랑스어)이라 불리는 250000km2 면적의 영토를 소유했다.[6]
레오폴드 2세와 주요 양허업자들은 콩고 내륙에서 대부분의 경제적 착취를 주도했다.[6] 이 시스템은 매우 수익성이 높아, ABIR은 한 해 동안 초기 투자액의 100%가 넘는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7] 레오폴드 2세는 1896년부터 1905년까지 이 시스템을 통해 7천만 벨기에 프랑의 이익을 거두었다.[8] 콩고 자유국의 양허 시스템은 이후 프랑스령 콩고 등 다른 식민 정권에서도 모방되었다.[9]
3. 잔혹 행위
노동자들은 천, 구슬, 소금, 칼 등으로 보상받았으나,[19] 노동 거부는 chicotte를 이용한 구타, 채찍질, 인질, 징벌 원정 등 가혹한 탄압으로 이어졌다.[20]
식민지 군대 Force Publique프랑스어는 고무 생산 집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인 장교, 부사관, 흑인 사병으로 구성되었으며,[21] 콩고 내 특정 민족, 사회 인구 통계를 대상으로 모집되었다.[22] 1900년까지 병력은 19,000명에 달했고,[23] 고무 회사들은 자체 민병대를 고용해 Force Publique프랑스어와 협력하기도 했다.[24]
이러한 강제 노동 시스템하에서 콩고인들은 가혹한 착취와 잔혹 행위에 시달렸다.
3. 1. 붉은 고무 시스템과 강제 노동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자유국은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안겨주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초기에는 상아 수출에 의존했다.[6] 그러나 1890년대 천연 고무 수요가 급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콩고인들은 유럽과 북미로 수출할 고무를 채취하는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고,[7] 고무 수출량은 1895년에서 1900년 사이에 580톤에서 3,740톤으로 크게 증가했다.[8]
1891년, 자유국은 토지를 분할하여 대부분의 자원을 식민지 소유로 만들었다. 사기업들에게는 양보 지역이 할당되었는데, 북부에는 Société Anversoise프랑스어가 160km2를, 남부에는 ABIR이 비슷한 크기의 영토를 받았다.[9] 레오폴드 2세는 개인 통치 하에 250km2의 "왕관 영역"(Domaine de la Couronne프랑스어)을 유지했다.[10][11] 이 시스템은 매우 수익성이 높아 ABIR은 한 해에 초기 투자금의 100%가 넘는 매출을 올렸고,[12] 레오폴드 2세는 1896년부터 1905년까지 7천만 벨기에 프랑의 이익을 얻었다.[13]
자유국의 주요 수입이 고무 수출에서 비롯되면서, "붉은 고무 시스템"으로 알려진 가혹한 노동 정책이 시행되었다. 국가는 세금 형태로 노동을 요구했고,강제 노동 형태로 세금을 요구하는 것은 당시 식민지 아프리카에서 흔한 일이었다. 기업들은 콩고인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15] 국가는 현지 노동을 조직하기 위해 capitas프랑스어라고 불리는 흑인 관리들을 고용했다.[16] 그러나 고무 수집을 최대화하려는 욕망은 노동자들의 복지를 고려하지 않은 임의적인 요구로 이어졌다.[17] 양보 지역의 사기업들은 국가의 간섭 없이 생산과 이익을 늘리기 위해 사실상 모든 조치를 사용할 수 있었다.[18]
노동자들은 천, 구슬, 소금, 칼 등 저렴한 물품으로 노동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19] 노동 거부는 가혹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반대자들은 chicotte로 구타당하거나 채찍질당했고, 인질이 잡히거나 징벌 원정이 보내져 마을이 파괴되기도 했다.[20]
식민지 군대인 Force Publique프랑스어는 고무 생산 집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군대는 백인 장교와 부사관, 흑인 사병으로 구성되었으며,[21] 콩고에서는 특정 민족 및 사회 인구 통계를 대상으로 모집했다.[22] 1900년까지 Force Publique프랑스어는 19,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23] 군대 외에도 고무 회사들은 자체 민병대를 고용하여 Force Publique프랑스어와 협력하기도 했다.[24]
붉은 고무 시스템은 1891년에 시작되어 1906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적도, 반둔두, 카사이 지역에 집중되었다.[26]
고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Force Publique프랑스어는 살인을 증명하기 위해 희생자의 손을 증거로 가져와야 했다. 가톨릭 사제는 300km 북쪽 지역을 다스린 정부 관리 레옹 피에브에 대해 언급하며, 모든 시체에서 손을 잘라야 했고, 고무를 거부하는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전했다.[27]
일부 생존자들은 학살에서 살아남았다고 증언하며, 죽은 척하고 손이 잘려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병사가 복무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더 많은 손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이는 광범위한 신체 훼손으로 이어졌다.[28]
3. 2. 신체 절단 및 잔혹 행위
고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콩고 자유국 군대(Force Publique|포르스 퓌블리크프랑스어)는 누군가를 사살했을 때 그 증거로 희생자의 손을 가져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에서 수입되어 비싼) 탄약을 사냥에 사용하거나 반란을 위해 비축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2] 한 가톨릭 사제는 북쪽의 풀 말레보 부근 강을 따라 지역을 다스린, 혐오스러운 정부 관리 레옹 피에브에 대해 말하는 남성, 트스왐베의 말을 인용했다.
>모든 흑인들은 이 사람을 적도의 악마로 여겼다... 들판에서 살해된 모든 시체로부터 손을 잘라야 했다. 그는 각 병사가 잘라낸 손의 수를 보고 싶어했고, 병사들은 그 손들을 바구니에 담아 가져와야 했다... 고무를 제공하기를 거부하는 마을은 완전히 쓸어버렸다. 젊은 시절에 나는 [피에브의] 병사 몰릴리가 보예카 마을을 지키면서 그물을 가져다가 체포된 원주민 10명을 그 안에 넣고 큰 돌을 그물에 묶어 강에 빠뜨리는 것을 보았다... 고무가 이러한 고통을 야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그 이름을 듣고 싶지 않다. 병사들은 젊은 남자들에게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를 죽이거나 강간하도록 했다.[3]
한 소위 장교는 항의한 마을을 처벌하기 위한 습격을 묘사했다. 지휘관은 "남자의 머리를 잘라 마을 울타리에 걸어두고, 여자와 아이들을 십자가 모양으로 울타리에 걸어두라고 명령했다".[2] 콩고인이 처음 살해되는 것을 본 후, 덴마크 선교사는 "병사는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고무를 가져오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죽입니다. 관리자는 우리가 손을 많이 가져오면 복무 기간을 단축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피터 포바스는 고무 할당량이 부분적으로 잘린 손으로 지불되었다고 주장한다.[3]
>잘린 손의 바구니는 유럽 주둔지 지휘관의 발 앞에 놓여 콩고 자유국의 상징이 되었다... 손을 수집하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Force Publique|포르스 퓌블리크프랑스어 병사들은 고무 대신 손을 기지로 가져왔고, 심지어 고무 대신 손을 수확하러 나갔다... 그것들은 일종의 통화가 되었다. 고무 할당량 부족분을 채우고, 강제 노동단에 필요한 사람들을 대체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Force Publique|포르스 퓌블리크프랑스어 병사들은 수집한 손의 수에 따라 보너스를 받았다.
이론적으로, 각 오른손은 살인을 증명했다. 실제로,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병사들은 때때로 손을 잘라내고 희생자가 죽도록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속임수"를 썼다. 여러 생존자들은 나중에 학살에서 살아남았다고 말했는데, 그들은 죽은 척하면서 손이 잘려도 움직이지 않았고, 병사들이 떠날 때까지 기다린 후 도움을 요청했다. 어떤 경우에는 병사가 다른 병사보다 더 많은 손을 가져와 복무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고, 이는 광범위한 신체 훼손과 절단으로 이어졌다.[4] 역사학자 데이비드 반 레이브루크는 신체가 훼손된 사람들의 사진이 살아있는 사람의 사지 절단이 널리 퍼진 관행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의 사지 절단이 가끔 발생했지만, 제시된 것처럼 체계적인 관행은 아니었다고 썼다.[4] 장 스텐거스와 다니엘 방그룬베르허 역시 고무 생산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살아있는 사람의 신체를 절단하는 체계적인 관행은 없었다고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신체 절단의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을 쏘고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여 손을 잘랐지만, 사실은 아직 살아있는 병사들에 의해 발생했다.[5]
레오폴드 2세는 경제적 이익을 해치기 때문에 신체 절단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손을 잘라라—그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나는 그들의 나머지는 모두 잘라내겠지만 손은 안 된다. 그것은 내가 콩고에서 필요한 유일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5]
3. 3. 감옥 및 인질
콩고 자유국에서 고무 채취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하기 위해 그들의 아내와 가족을 인질로 잡는 방법이 사용되었다.[6] 레오폴드 2세는 이를 공식 정책으로 선포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콩고 자유국 행정부는 각 기지에 지역 추장들을 강압하기 위해 인질을 잡는 방법에 대한 안내서를 배포했다.[6] 인질은 남성, 여성, 어린이, 노인, 심지어 추장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모든 주(state) 또는 회사 기지는 인질 수감을 위한 울타리를 유지했다.[6] ABIR 요원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마을의 추장을 감옥에 가두었으며, 1902년 7월 한 기지에서는 44명의 추장을 수감했다고 기록했다. 이 감옥들은 열악한 상태였고, 봉간다와 몸포노의 기지에서는 1899년에 하루에 3~10명의 죄수 사망률을 기록했다.[6] ABIR에 저항한 사람들은 강제 노동 수용소로 추방되었는데, 리레코, 상부 마린가 강, 상부 로포리 강에 적어도 세 곳의 강제 수용소가 있었다.[6]
3. 4. 전쟁과 반란
콩고 자유국은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토착 세력과의 전쟁과 반란으로 인해 많은 폭력 사태를 겪었다. 특히 예케 왕국, 잔데 연방, 티푸 팁 휘하의 동콩고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영토는 식민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콩고-아랍 전쟁에서 Force Publique|공공군프랑스어에 의해 매우 잔혹하게 패배했다.[6] 1895년에는 카사이에서 바테텔라족의 군사 반란이 일어나 4년간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 분쟁은 매우 잔혹했으며, 많은 사상자를 냈다.[7]
3. 5. 기근
고무 회사들의 강제 노동 강요는 기근과 질병의 영향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남자들이 마을에서 고무 수집을 위해 동원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감소했고, 이는 식량 부족으로 이어졌다.[6]
3. 6. 아동 식민지
레오폴드 2세는 콩고의 고아들을 납치하여 가톨릭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로 보냈다. 이 학교에서 아이들은 노동이나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 학교들은 국가가 자금을 지원하는 유일한 학교였지만, 많은 아이들이 질병으로 사망했다.[6]
3. 7. 콩고인 외 노동자
콩고 자유국은 콩고인뿐만 아니라 중국, 카리브해 등 다른 지역 출신 노동자들도 착취했다. 철도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높은 사망률을 보였다.[1]
3. 8. 식인 풍습
콩고 자유국 설립 당시, 이 지역 일부에서는 식인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9] 식민 행정부는 이를 억제하기 위한 조치를 거의 취하지 않았고, 때로는 자체 보조 부대와 동맹군 사이에서 묵인하기도 했다. 콩고-아랍 전쟁 (1892–1894) 중, 벨기에 지휘관 프랜시스 다니스의 바테텔라 동맹군이 패배한 전투원의 시신을 먹는 등 식인 풍습이 보고되었다.[10] 전쟁 종결 후 잔혹하게 진압된 반란에서, 한 젊은 벨기에 장교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소비하는 것을 "끔찍하지만 매우 유용하고 위생적"이라고 묘사했다.[11]
공식적으로 식인 풍습은 공공군에서 불법이었고 사형으로 처벌되었다.[12] 그러나, 정부의 과도한 고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마을에 대한 "징벌 원정"을 보낼 때, 콩고 자유국 관리들은 유죄로 간주된 사람들의 임의적인 살해와 토착 군인들이 벌인 "식인 잔치"에 대해 반복적으로 눈을 감았다.[13] 여러 경우에 유아와 노파를 포함한 포로들을 군인이나 지역 동맹군에게 넘겨주어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그들을 죽이고 먹도록 허용했다.[14][15][16]
4. 인구 감소
브리태니커 사전은 콩고 자유국에서 인구가 최소 8백만에서 최대 2~3천만 명 감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저 케이즈먼트는 약 3백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고, 피터 포배스는 약 5백만 명이 살해당했다고 보았다. 존 건서는 5~8백만 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애덤 호크쉴드는 1885년에서 1920년까지 약 1천만 명, 혹은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프레드릭 워섬은 콩고 인구가 850만에서 3천만까지 감소한 것으로 추정했다.[3][12][25]
콩고 자유국 시대의 인구 감소 추정치는 다양하며, 정확한 인구 변화는 알 수 없다. 여러 연구 결과와 현지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한다. (하위 섹션 "추정치"에서 상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언급한다.)
4. 1. 원인
콩고 자유국 시대의 급격한 인구 감소는 식민 통치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발생했다. 주요 원인으로는 살인, 기아, 피로, 노출, 질병, 출산율 감소 등이 지목된다.[25] 특히 수면병은 당시 사망의 주요 원인이었다.[25]애덤 호크쉴드는 콩고 자유국 인구의 급격한 감소가 "살인", "기아, 피로, 노출", "질병", "출산율 급락"의 조합의 결과라고 주장했다.[25] 그러나 상세한 기록이 부족하여 구체적인 통계를 얻을 수 없지만, 폭력과 살인은 사망의 주요 원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얀 반시나는 쿠바와 케테족에 대한 지역 연구에서 폭력으로 인한 사망이 인구의 5% 미만을 차지한다고 추정했다.[25]
아랍 상인, 유럽 식민지 개척자, 아프리카 짐꾼이 수입한 질병은 콩고 인구를 황폐화시켰고 폭력으로 사망한 사람 수를 "훨씬 초과"했다.[25] 천연두, 수면병, 아메바성 이질, 성병(특히 매독 및 임질), 돼지 인플루엔자가 특히 심각했다.[25] 변호사 라파엘 렘킨은 콩고에서 질병이 빠르게 확산된 것은 국가가 고용한 토착 군인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전국을 이동하며 여러 곳에서 여성과 성관계를 맺어 국소적인 발병을 더 넓은 지역으로 퍼뜨렸다.[25] 특히 수면병은 콩고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유행"했으며 사망률이 높았다.[25] 1901년 한 해에만 50만 명의 콩고인이 수면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5]
반시나는 콩고 인구의 5%가 돼지 인플루엔자로 사망했다고 추정했다.[25] 이질이 풍토병이 된 지역에서는 인구의 30~60%가 사망할 수 있었다.[25] 반시나는 또한 새로운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감소시키는 영양실조와 식량 부족의 영향도 지적했다.[25] 아프리카 농촌 인구의 혼란은 질병 확산을 더욱 도왔을 수 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 로저 앤스티는 "강력한 지역 구전 전통은 고무 정책이 수면병의 고통이나 천연두의 주기적인 피해보다 더 큰 사망 및 인구 감소의 원인이었다고 본다"고 적었다.[25]
또한 이 기간 동안 출산율이 감소하여 인구 성장률이 자연 사망률에 비해 감소했다는 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반시나는 식민지 이전 사회의 높은 출생률과 사망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당한 자연 인구 변동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25]
4. 2. 추정치
콩고 자유국 시대의 인구 감소에 대한 추정치는 다양하며, 최초의 인구 조사가 1924년에 실시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인구 변화는 알 수 없다.[13] 여러 연구 결과와 현지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한다.연구자 | 추정치 |
---|---|
브리태니커 사전 | 최소 8백만 ~ 최대 2-3천만 명 감소 |
로저 케이즈먼트 | 약 3백만 명 사망 |
피터 포배스 | 약 5백만 명 사망[3] |
존 건서 | 5백만 ~ 8백만 명 사망[12] |
애덤 호크쉴드 | 1885년 ~ 1920년 사이 약 1천만 명 (인구의 절반) 사망 |
프레드릭 워섬 | 850만 ~ 3천만 명 감소 |
에드먼드 D. 모렐 | 콩고 자유국 인구 2천만 명[17] |
이처럼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수백만 명에서 천만 명 이상으로 인구가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얀 반시나 등은 현지 자료를 바탕으로 자유국 시대 동안 인구의 약 절반이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17]
5. 조사 및 국제적 인식
결국 레오폴드 2세의 콩고 통치에 대한 국제적인 감시가 강화되면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대중 운동이 일어났고, 레오폴드 2세가 콩고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캠페인은 콩고에서 활동하는 영국 및 스웨덴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17]
최초의 국제적인 항의는 1890년 미국인 조지 워싱턴 윌리엄스가 자신이 목격한 학대에 대해 레오폴드 2세에게 공개 서한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18] 그는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콩고의 상황을 "인도에 대한 범죄"로 묘사하며,[19] 이후 국제법의 핵심 용어가 될 구절을 사용했다.[20] 콩고 자유국에서의 학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1895년 스토크스 사건과 신체 훼손에 대한 보고서가 유럽과 미국 대중에게 전해지면서 "콩고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며 급증했다.[21] 여론을 달래기 위해 레오폴드 2세는 외국 선교사들로 구성된 원주민 보호 위원회(Commission pour la Protection des Indigènes|원주민 보호 위원회프랑스어)를 설치했지만, 실질적인 개혁을 위한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22]
영국에서는 1900년 이후 활동가이자 팜플렛 작가인 E. D. 모렐이 캠페인을 주도했으며, 그의 저서 ''붉은 고무''(1906)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캠페인의 주요 인물로는 소설가 마크 트웨인, 조지프 콘래드, 아서 코난 도일과 에밀 반데르벨데와 같은 벨기에 사회주의자들이 포함되었다.[23] 1903년 5월 영국 하원에서의 토론은 콩고 자유국을 비난하는 결의안 통과로 이어졌다. 그 직후, 콩고 민주 공화국의 보마 마을의 영국 영사 로저 카스먼트는 학대의 실제 범위를 조사하기 위해 콩고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12월에 자신의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정된 버전은 1904년 2월에 자유국 당국에 전달되었다.[24]
레오폴드 2세는 콩고의 노동력을 보존하고 영국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질병 퇴치를 시도하여 자신이 콩고인의 복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 했고, 리버풀 열대 의학 학교의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지원을 받았다.[25] 자유국 관리들은 또한 착취적인 정책이 콩고의 심각한 인구 감소를 초래했다는 주장에 대해 손실을 천연두와 수면병으로 돌리면서 자신을 변호했다.[26] 콩고 개혁 협회와 같은 캠페인 단체들은 식민주의에 반대하지 않고, 벨기에가 공식적으로 식민지를 합병하도록 장려하여 자유국의 과도한 행위를 종식시키려 했다. 이는 대륙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미묘한 권력 균형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자유국 정권의 지지자들은 잔학 행위에 대한 주장에 반박하려 했지만, 1904년 정권이 임명한 조사 위원회는 잔학 행위의 이야기를 확인했고 벨기에 정부에 대한 압력이 증가했다.[27]
1908년, 이 캠페인의 직접적인 결과로 벨기에는 공식적으로 이 영토를 합병하여 벨기에령 콩고를 만들었다.[28] 강제 노동의 부분적인 억압으로 원주민의 상황은 극적으로 개선되었지만, 합병 후에도 오랫동안 자유국에서 일했던 많은 관리들이 그들의 직책을 유지했다.[29] 벨기에 행정부는 식민지 기업을 위한 노동을 직접적으로 강제하는 대신, 콩고인들이 지불금을 마련하기 위해 유럽 고용주와 함께 일하도록 의도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강압적인 세금을 사용했다. 자유국이 종식된 후 한동안 콩고인들은 또한 인프라 프로젝트를 위해 연간 일정 수의 봉사일을 제공해야 했다.[30]
6. 역사 기록과 "집단 학살" 용어
자유국 정권 하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잔혹 행위를 집단 학살과 연관 짓기도 한다. 그러나 1948년 국제 연합의 '집단 학살' 정의에 따르면, 콩고 자유국에서의 잔혹 행위는 집단 학살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23] 국제 연합의 정의에 따르면 집단 학살은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해진 행위"여야 한다.[23]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절멸이 자유국의 정책이 아니었다는 데 동의하며, 가혹한 경제적 착취의 결과로 이해한다.[23] 사회학자 로다 하워드-하스만은 콩고인들이 이 기준에 따라 체계적인 방식으로 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법적으로 소급 적용되는 의미에서조차 집단 학살이 아니었다"고 말했다.[23] 애덤 호흐쉴트와 정치학자 조르주 은종골라-탈라자는 자유국에서 의도적인 절멸 정책이나 특정 인구 집단을 제거하려는 의도의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집단 학살 주장을 거부했다.[23] 데이비드 반 레이브루크는 " '집단 학살'이나 '홀로코스트'라는 행위에 대해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다. 집단 학살은 특정 인구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절멸을 의미하며, 그것은 여기서 의도도 결과도 아니었다"고 말했다.[23] 역사학자 바바라 에머슨은 "레오폴드는 집단 학살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돈에 욕심이 많았고 상황이 통제 불능이 되었을 때 관심을 갖지 않기로 선택했다."고 말했다.[25]
"콩고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는 르완다 집단 학살 이후 동부 콩고에서 발생한 대량 살인과 강간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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