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마사키
1. 개요
고바야시 마사키는 1916년 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쇼치쿠 조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한 일본의 영화 감독이다. 1952년 《아들의 청춘》으로 감독 데뷔 후,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담은 작품들을 연출했다. 특히,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제작된 3부작 영화 《인간의 조건》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할복》, 《괴담》 등의 작품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1985년 마지막 작품 《식탁 없는 집》을 연출했으며, 1996년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 이름 | 고바야시 마사키 |
|---|---|
| 원어명 | 小林 正樹일본어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출생일 | 1916년 2월 14일 |
|---|---|
| 출생지 | 일본 오타루시 |
| 사망일 | 1996년 10월 4일 |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
| 직업 | 영화 감독, 프로듀서, 작가 |
| 주요 작품 | 『인간의 조건』 (1959년 - 1961년) 『할복』 (1962년) 『괴담』 (1965년) 『상위 토벌: 하사된 아내 시말』 (196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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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 영화제 | 심사위원 특별상 심사위원 특별상 |
|---|---|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 산 조르조상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 1967년 『상위 토벌: 하사된 아내 시말』 파시네티 상 |
| 베를린 국제 영화제 |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 |
| 일본 아카데미상 | 회장 특별상 |
| 기타 수상 | 자수포장 1984년 |
| 로마자 표기 | Kobayashi Masa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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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평화주의자 -
오노 요코
오노 요코는 일본계 미국인 전위 예술가, 음악가, 영화 제작자, 작가로서 플럭서스 운동 참여, 개념 미술과 퍼포먼스 아트 선구자, "컷 피스"와 『그레이프프루트』 등의 대표작, 실험 영화 제작, 존 레논과의 협업, 평화 운동가 활동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인정받았다. -
일본의 평화주의자 -
미야자키 하야오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스튜디오 지브리의 창립 멤버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미래소년 코난》 연출 데뷔 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걸작들을 통해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거장이 되었으며, 환경 보호, 평화주의 등의 주제를 담은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
오타루시 출신 -
교고쿠 나쓰히코
교고쿠 나쓰히코는 1963년 홋카이도 출생의 일본 소설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로, 『우부메의 여름』으로 데뷔하여 '백귀야행' 시리즈, '항설백물어' 시리즈 등 독특한 추리 스타일과 직접 디자인한 책으로 유명하며,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고 소설 외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
오타루시 출신 -
아오치 세이지
아오치 세이지는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 노멀힐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일본 선수 최초로 동계 올림픽 스키 점프 시상대 독점에 기여한 일본의 스키 점프 선수이다. -
포로 -
이마무라 히토시
이마무라 히토시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육군대장으로, 태평양 전쟁 중 네덜란드령 동인도 침공 작전을 지휘하여 자바섬을 점령하는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전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후 전사자 유족을 위한 활동을 펼치는 등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
포로 -
야하라 히로미치
야하라 히로미치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 참모로서 지구전을 지휘하여 미군의 진격을 늦추는 데 기여했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2. 생애
고바야시 마사키는 1916년 2월 14일 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태어났으며, 사촌으로 배우 다나카 키누요가 있었다. 1941년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쇼치쿠에 조감독 견습으로 입사하여 영화 경력을 시작했으나, 1942년 1월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만주에서 복무했다. 1944년 미야코지마로 이동, 비행장 건설 작업에 종사했다.
1945년 미야코지마에서 종전을 맞이했지만, 미군에 의해 오키나와 본섬 가데나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46년 복원하여 쇼치쿠로 돌아와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을 보좌했다.
1952년 중편 '아들의 청춘'(息子の青春일본어)으로 감독 데뷔를 하였고, 1953년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각본을 맡은 '마음'으로 정식 감독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안베 고부의 각본으로 무죄로 투옥된 BC급 전범을 그린 '벽 두꺼운 방'을 감독했지만, 미국에 대한 배려로 1956년까지 공개가 연기되었다. 그 후, 프로야구의 내막을 폭로한 '당신 사겠습니까'나, 기지 마을의 타락을 묘사한 1957년 '검은 강' 등이 평가받았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에 걸쳐 '인간의 조건' 6부작을 공개했다. 고미가와 준페이 원작의 대장편 반전 소설 '인간의 조건'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총 9시간 31분 분량으로, 전시 중 일본군의 폭정과 이에 저항한 지식인 병사의 역경, 패전, 탈출, 죽음을 그려냈다. 매일 예술상, 매일 영화 콩쿠르 감독상,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산 조르조 상을 수상했다.
1962년 타키구치 야스히코의 소설 '이문낭인기'를 원작으로 한 첫 시대극 '할복'으로 칸느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코이즈미 야쿠모의 '괴담'을 옴니버스 방식으로 영화화한 첫 컬러 작품 '괴담'(1964)은 3시간 분량의 대작으로, 칸느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다시 한번 수상하고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대규모 세트와 장기간 촬영으로 제작비가 늘어나면서, 제작사 "문예 프로덕션 당근 클럽"은 도산했다.
1965년 쇼치쿠를 퇴사하고 도쿄 영화와 계약, 1967년 미후네 프로 제1작 '상의 討ち 拝領妻始末'을 감독하여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 키네마 준보 베스트 원을 수상했다. 1968년 '일본의 청춘' 이후 프리랜서가 되었고, 1969년 구로사와 아키라, 키노시타 케이스케, 이치카와 곤과 함께 "사기의 모임"을 결성했다. 같은 해 제19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초청되었으며, 1971년 칸느 국제 영화제에서 25주년 기념 공로상을 받았다.
1982년 5년에 걸쳐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을 다룬 장편 기록 영화 '도쿄 재판'을 완성했다. 타치바나 타카시 등에게 긍정적 평가를 받았으나, 난징 사건 관련 영상에 대한 논란으로 평가가 엇갈렸다. 1985년 엔지 분코 원작의 연합 적군 사건을 소재로 한 '식탁 없는 집'을 감독했으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감독 작품이다.
고바야시는 암 투병 중이던 사촌 다나카 키누요의 말년을 돌보았다. 1985년 고바야시가 병으로 쓰러지자, 매일 영화 콩쿠르에 타나카 키네요 상이 창설되어 일본 영화계에 기여한 여배우에게 수여되기 시작했다. 1996년 10월 4일, 심근 경색으로 도쿄도 세타가야구 자택에서 80세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
고바야시 마사키는 1916년 2월 14일 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태어났다. 회사원의 아들이었으며, 배우 다나카 키누요는 그의 사촌이었다. 1933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여 동아시아 미술과 철학을 공부했다.
1941년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쇼치쿠에 조감독으로 입사하여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1942년 1월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만주로 파병되었다. 고바야시는 자신을 평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로 여겼으며, 병장 이상의 계급 승진을 거부하며 저항했다.
1944년 류큐 열도의 미야코섬으로 옮겨졌다가, 종전 직전 미군의 포로가 되어 오키나와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46년 석방 후 쇼치쿠에 복귀하여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2.2. 쇼치쿠 입사와 군 복무
고바야시 마사키는 1916년 2월 14일 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태어났으며, 사촌으로 배우 다나카 키누요가 있다. 1941년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쇼치쿠에 조감독 견습으로 입사하여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1942년 1월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만주에서 복무했다.
고바야시는 자신을 평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로 여겨 병장 이상의 계급 승진을 거부하며 군 복무에 저항했다. 1944년 류큐 열도의 미야코섬으로 옮겨졌다가 종전 직전 미군의 포로가 되어 오키나와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46년 1월 석방된 후 쇼치쿠에 복귀하여 키노시타 케이스케의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1952년 《아들의 청춘》(息子の青春일본어)으로 감독 데뷔했다.
2.3. 종전과 포로수용소 생활
고바야시 마사키는 1941년 쇼치쿠에 조감독 견습으로 입사했지만, 1942년 1월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만주로 파병되었다. 그는 자신을 평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로 여겼으며, 병장 이상의 계급 승진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1944년 류큐 열도의 미야코지마로 전출되었고, 1945년 종전 직전 미군의 포로가 되어 오키나와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군 복무 중 틈틈이 시나리오 '방인'을 집필하기도 했다. 1946년 석방된 후 쇼치쿠로 복귀하여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2.4. 쇼치쿠 복귀와 감독 데뷔
고바야시 마사키는 1946년 쇼치쿠에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조감독으로 복귀했으며, 1952년 《아들의 청춘》(息子の青春일본어)으로 감독 데뷔했다. 1953년에는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각본을 쓴 《진심》으로 정식 감독으로 승진했다.
2.5. 초기 대표작
고바야시 마사키의 감독 데뷔작은 1952년 작품인 「무스코노 세이슌」(「아들의 청춘」)이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고바야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평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에게 미친 영향을 다룬 3부작인 인간 조건을 연출했다. 이 영화의 총 상영 시간은 거의 10시간에 달하며, 극장 개봉을 위해 제작된 극영화 중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이다.
1962년에는 하라키리를 감독했으며, 이 작품으로 1963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1964년에는 고바야시의 첫 번째 컬러 영화인 괴담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라프카디오 헌의 책에서 발췌한 네 편의 귀신 이야기 모음집이다. 「괴담」은 1965년 칸 영화제에서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상의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1968년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기노시타 게이스케, 이치카와 곤과 함께 젊은 세대를 위한 영화 제작을 목표로 감독 그룹인 「시키노카이」(「사기꾼 클럽」)를 설립했다.
1969년에는 제19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또한 구로사와 아키라가 하차한 후 토라! 토라! 토라!의 일본 장면 연출 후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후카사쿠 긴지와 마스다 도시오가 선택되었다.
그의 야심찬 프로젝트 중 하나는 이노우에 야스시의 불교 중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둔황」을 영화화하는 것이었지만,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3. 작품 세계
고바야시 마사키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평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에게 미친 영향을 다룬 3부작 인간 조건(1959-1961)을 연출했다. 할복(1962)과 라프카디오 헌의 책에서 발췌한 네 편의 귀신 이야기 모음집인 괴담(1964)으로 칸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1968년 구로사와 아키라, 기노시타 게이스케, 이치카와 곤과 함께 '시키노카이'라는 감독 그룹을 설립, 젊은 세대를 위한 영화 제작을 목표로 했다. 1969년 제19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이었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둔황」 영화화는 실현되지 못했다. 1985년 엔지 분코 원작의 연합 적군 사건을 소재로 한 '식탁 없는 집'을 감독했다.
3.1. 《인간의 조건》(1959-1961)
고바야시 마사키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평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에게 미친 영향을 다룬 3부작 인간 조건을 연출했다. 이 영화의 총 상영 시간은 거의 10시간에 달하며, 극장 개봉을 위해 제작된 극영화 중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이다.
3.2. 《할복》(1962)
1962년 고바야시 마사키는 할복을 감독했으며, 이 작품으로 1963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3.3. 《괴담》(1965)
1964년, 고바야시는 첫 번째 컬러 영화인 괴담(*Kwaidan*)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의 책에서 발췌한 네 편의 귀신 이야기 모음집이다. 괴담은 1965년 칸 영화제에서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상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3.4. 후기 작품 활동
1962년 하라키리를 감독했으며, 이 작품으로 1963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1964년 고바야시 마사키는 첫 번째 컬러 영화인 괴담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라프카디오 헌의 책에서 발췌한 네 편의 귀신 이야기 모음집이다. 괴담은 1965년 칸 영화제에서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상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1968년 구로사와 아키라, 기노시타 게이스케, 이치카와 곤과 함께 젊은 세대를 위한 영화 제작을 목표로 감독 그룹인 '시키노카이'(사기꾼 클럽)를 설립했다.
1969년 제19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하차한 후 도라 도라 도라의 일본 장면 연출 후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후카사쿠 긴지와 마스다 도시오가 선택되었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불교 중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둔황」을 영화화하는 것이 그의 야심찬 프로젝트 중 하나였지만,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3.5. 마지막 작품과 죽음
1985년 엔지 분코 원작의 연합 적군 사건을 소재로 한 '식탁 없는 집'을 감독했다. 이것이 고바야시 마사키의 마지막 영화 감독 작품이다.
고바야시는 암을 앓고 있던 외사촌 여배우 타나카 키네요의 말년을 돌보았다. 타나카는 빚이 있었고, 저택이 저당 잡혀 있었다. 고바야시는 타나카의 법적인 상속권도 없고 임대차 증서도 없었지만, 그녀를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며 자신의 빚으로 저당권을 해제하고 입원비도 부담했다. 1977년 타나카 키네요가 사망하고, 1985년 고바야시 자신이 병으로 쓰러졌을 때, 그의 활동으로 매일 영화 콩쿠르에 타나카 키네요 상이 창설되어, 일본 영화계에 기여한 여배우에게 수여하게 되었다.
말년에 고바야시는 대학 시절 은사인 아이즈 하치이치의 전기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1996년 10월 4일, 심근 경색으로 도쿄도 세타가야구의 자택에서 80세로 사망했다. 유골은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의 엔가쿠지와 타나카 키네요의 출생지이자 묘소가 있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의 시영 시모노세키 중앙 묘원에 분골되었다.
2016년 2월 14일, 고바야시 마사키의 탄생 100주년이자 사망 20주년을 기념하여 쇼치쿠 웹사이트에 "영화 감독 고바야시 마사키 탄생 100주년 기념 프로젝트" 특설 사이트가 설치되었고, 전국에서 기념 상영과 기획전이 개최되었다.
4. 작품 목록
고바야시 마사키의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두꺼운 벽의 방 (1956)
* 검은 강 (1957)
* 인간의 조건 (1959~61, 삼부작)
* 뒤얽힌 관계 (1962)
* 할복 (1962)
* 괴담 (1965)
* 사무라이 반란 (1967)
* 일본의 청춘 (1968)
* 내 목숨을 걸고 (1971)
* 화석 (1972)
* 도쿄 재판 (1983, 다큐멘터리)
* 식탁이 없는 집 (1985)
4.1. 감독 작품
* 아들의 청춘(1952년)
* 마고코로(1953년)
* 이 넓은 하늘 어딘가에(1954년)
* 세 개의 사랑(1954년)
* 아름다운 세월(1955년)
* 두꺼운 벽의 방 (1956)
* 당신을 삽니다(1956년)
* 샘(1956년)
* 검은 강(1957년)
* 인간의 조건 제1부・제2부(1959년)
* 인간의 조건 제3부・제4부(1959년)
* 인간의 조건 완결편(1961년)
* 뒤얽힌 관계(1962년)
* 할복 (1962)
* 괴담(1965년)
* 사무라이 반란 (1967)
* 일본의 청춘(1968년)
* 내 목숨을 걸고 (1971)
* 화석(1975년)
* 타오르는 가을(1978년)
* 도쿄 재판(1983년)
* 식탁이 없는 집(1985년)
4.2. 기타 참여 작품
* 두꺼운 벽의 방 (1956)
* 검은 강 (1957)
* 인간의 조건 (1959~1961, 삼부작)
* 뒤얽힌 관계 (1962)
* 할복 (1962)
* 괴담 (1965)
* 사무라이 반란 (1967)
* 일본의 청춘 (1968)
* 내 목숨을 걸고 (1971)
* 화석 (1972)
* 도쿄 재판 (1983, 다큐멘터리)
* 식탁이 없는 집 (1985)
* 파레타이코 (1949년 12월 7일 공개,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 쇼치쿠) - 각본
* 도스카덴 (1970년 10월 31일 공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도호) - 기획
* 도라히라타 (2000년 5월 13일 공개, 이치카와 곤 감독, 도호) - 각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