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혜왕후
1. 개요
공혜왕후는 조선 성종의 왕비로, 1456년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씨의 딸로 태어났다. 1467년 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의 아들인 성종과 혼인하여 천안군부인에 봉해졌고, 성종이 즉위한 후 왕비가 되었다. 인수대비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자녀는 없었으나 후궁들을 너그럽게 대했다. 1474년 1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공경과 인자함을 기려 공혜라는 시호를 받았고, 능은 순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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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년 출생 -
호조 소운
호조 소운은 무로마치 막부의 중신으로 이세 종수이나 이세 신쿠로 등으로 불렸으며, 이마가와 가문의 가독 다툼에 개입하고 이즈, 사가미 등지를 정복하며 고호조씨의 기반을 마련한 센고쿠 시대 초기의 중요 인물이다. -
1456년 출생 -
앤 네빌
앤 네빌은 1456년에 태어나 1485년에 사망한 잉글랜드 왕족으로, 리처드 3세의 왕비였으며,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 등 다양한 작품에 등장한다. -
1474년 사망 -
제1대 달라이 라마
티베트 유목민 출신으로 불교에 귀의한 겐둔 둡빠는 간덴 사원 주지이자 타쉴훈포 사원 창건자로서 수행과 명상에 정진하여 티베트에서 존경받는 스님이 되었으며, 불교 경전 주석과 저술을 통해 티베트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
1474년 사망 -
최항 (1409년)
최항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경국대전 편찬을 주도하는 등 조선의 문물 제도 정비에 기여했으며,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
병사한 사람 -
현진건
현진건은 일제강점기의 사실주의 소설가로, 대표작으로는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을 받기도 했다. -
병사한 사람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2. 생애
1456년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씨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통해 예종의 두 번째 부인인 안순왕후와는 육촌 관계였다.
1467년 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의 아들인 잘산군과 혼인하였고, 1469년 잘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병으로 인해 친정에서 요양을 하거나, 창덕궁 구현전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으나, 1474년 19세의 나이로 훙서하였다.
2.1. 혼인과 왕비 책봉
1467년 1월 12일, 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의 아들인 한 살 연하의 잘산군과 혼인했다. 이 해에는 잘산군의 형 월산군과 누이 명숙공주도 혼인을 했는데, 한명회의 집에 예단이 보내진 것은 월산군의 혼례가 있은 지 5일만이었다. 훗날 공혜왕후의 지문에 따르면 잘산군의 배필로 한씨를 택한 것은 세조의 의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잘산군의 어머니인 수빈 한씨가 잘산군과 함께 피접을 나갔다가 허계지(許繼智)라는 사람의 집에서 그 수양딸이었던 한씨를 눈여겨보고 며느릿감으로 골랐다는 견해도 있다. 잘산군과 혼인 후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으로 불리다 1469년 잘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2.2. 왕비 시절
1467년 1월 12일, 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의 아들인 한 살 연하의 잘산군(乽山君)과 혼인하였다. 혼인 후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으로 불렸다. 훗날 공혜왕후의 지문에 따르면 잘산군의 배필로 한씨를 택한 것은 세조의 의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잘산군의 어머니인 수빈 한씨가 잘산군과 함께 피접을 나갔다가 허계지(許繼智)라는 사람의 집에서 그 수양딸이었던 한씨를 눈여겨보고 며느릿감으로 골랐다는 견해도 있다. 1469년 잘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수대비는 며느리들에게 무척 엄격한 시어머니였는데 한씨에게 중국의 현모양처들에 관한 이야기인 《열녀전》을 읽게 하는 등 유교 윤리에 따라 철저히 교육했다. 한씨가 자식을 두지 못하자 성종은 후궁을 들였는데 한씨는 싫어하는 내색 없이 그들에게 옷을 준비해서 내리고 그 뒤에도 패물 등을 선물했다.
1473년 음력 7월에 병으로 친정(한명회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성종은 하루 걸러 한명회의 집에 들러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이후 회복하여 궁궐로 돌아왔으나, 이 해 12월에 병이 다시 도졌다. 병이 낫지 않을 것을 예감한 왕후 본인의 요청으로 1474년 음력 3월에 창덕궁 구현전(求賢殿)으로 처소를 옮겼고, 성종과 삼대비(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가 날마다 구현전으로 가 그녀를 보살폈다.
2.3. 죽음과 사후
1474년 음력 4월 15일, 공혜왕후는 19세의 젊은 나이로 창덕궁 구현전(求賢殿)에서 훙서하였다. 성종과 삼대비(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는 공혜왕후가 병이 낫지 않을 것을 예감하고 1474년 음력 3월에 창덕궁 구현전(求賢殿)으로 처소를 옮겨 줄 것을 요청했고, 날마다 구현전에 가서 그녀를 보살폈다. 친정 부모인 한명회와 부인 민씨도 입궐해 병을 돌보았지만 차도가 없었고, 공혜왕후는 죽기에 앞서 부모가 며칠째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밥을 먹도록 명했다.
성종은 공경하고 유순하게 윗사람을 섬김을 공(恭)이라 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을 혜(惠)라 하여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시호를 올렸으며, 능호는 순혼(順魂, 나중에 순릉(順陵)이 되었다), 전호는 소경전(昭敬殿)으로 정하였다. 연산군 4년(1498년)에는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존호가 더해지기도 했다.
종묘 정전(正殿)에 왕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파주삼릉 내에 위치한 순릉이다.
3. 가족 관계
|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
| 조부 | 한기 | 1393년 | 1429년 | |
| 조모 | 여주 이씨 | ? | ? | 이척의 딸 |
| 아버지 | 한명회 | 1415년 | 1487년 | |
| 외조부 | 민대생 | 1372년 | 1467년 | |
| 외조모 | 양천 허씨 | ? | ? | 전리판서 허금의 딸 |
| 어머니 | 여흥 민씨 | ? | 1479년 | |
| 언니 | 청주 한씨 | 1438년 | ? | 신숙주의 장남 신주와 혼인 |
| 조카 | 신종호 | 1456년 | 1497년 | |
| 언니 | 청주 한씨 | 1442년 | ? | 윤사로와 정현옹주의 아들 윤반과 혼인 |
| 언니이자 시숙모 | 장순왕후 | 1445년 | 1461년 | 예종의 정비 |
| 형부이자 시숙부 | 예종 | 1450년 | 1469년 | |
| 오빠 | 한보 | 1447년 | 1522년 | |
| 올케언니 | 한산 이씨 | ? | ? | 이훈의 딸 |
| 시아버지 | 덕종 | 1438년 | 1457년 | 추존 왕 |
| 시어머니 | 소혜왕후 | 1437년 | 1504년 | |
| 남편 | 성종 | 1457년 | 1494년 | 자녀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