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항 (14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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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항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1426년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34년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여 한글을 풀이하고 용비어천가 찬집에 참여했으며, 세조 즉위 후 정난공신으로 책록되어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하고, 역사, 언어 분야에 능통하여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 작성을 담당했으며, 영의정에 올라 영성부원군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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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 (14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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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426년(세종 8년)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34년(세종 16년) 식년시(式年試)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壯元) 급제(及第)하여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443년에는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로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創製)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을 한글로 옮겨 풀었으며, 〈용비어천가〉에 주를 달아 풀이하였다.
1444년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로서 오례(五禮)를 찬진, 1445년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창제에 참여하고, 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용비어천가보수(龍飛御天歌補修) 등을 찬진(撰進) 하였으며, 1448년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올랐다. 1450년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使臣)을 맞이하여 접대를 하였으며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여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1년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로 수사관(修史官)을 겸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개찬(改撰) 하고,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올라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하여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이어 문종실록(文宗實錄)에 참여하였다.
1453년(단종 1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 절재 김종서를 제거한 수양대군을 맞이하여, 단종에게 보고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후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이듬해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어 《공신연곡(功臣宴曲)》 4장을 지어 바쳤다. 연이어 대사헌, 우부빈객(右副賓客),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歷任)하였다.
1455년(세조 1년)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승진하였으며, 이후 1458년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하며 1459년(세조 5년) 《육전》(六典)의 편찬을 비롯하여 《관음현상기》, 《십이준도》 등을 찬하였고, 중추원사(中樞院事)로 《명황계감》의 가사(歌詞)를 한글로 번역하는 한편, 《동국통감》을 찬수하였으며, 신숙주 등과 같이 《어제유장설》 3편을 주해하였다. 이후 중추원사, 세자빈객(世子賓客),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대사성을 겸 하고, 1460년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하다가 1461년 양성지(梁誠之)의 잠서(蠶書)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1463년 우참찬(右參贊)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수를 시작하는 한편 어제유장설(御製諭將說)을 주해(註解) 하였다.
1464년(세조 10년)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구결(口訣)을 달았으며, 1466년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으로 어제구현재시(御裁求賢才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가자(加資)를 받았으며, 《병장설주(兵將說注)》를 산정(刪定)하였다. 1467년에 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러 영성군(寧城君)에 봉(封) 해졌다. 《소학》(小學), 《주역구결》(周易口訣), 《예기구결》(禮記口訣) 등을 정하고 세조의 행장을 초집하였다. 1467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1470년 영성 부원군(寧城府院君)에 진봉(進封) 되었다.
한편 1461년(세조 7년)에는 왕명으로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여 조선 초기의 법률과 제도를 집대성하였다.
1469년(예종 1년) 경국대전(經國大典) 상정소 도제조(詳定所都提調)로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였으며, 이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수하였다.
1471년에서 이듬해 1472년까지 1년간 조선국 상급 국상 지위를 지낸 그는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를 받아 좌의정이 되기도 하였고 《세조실록》, 《예종실록》을 찬수하였으며, 조선초기의 대학자로서 문물제도 정비에 큰 역할을 하였고, 역사·언어 분야에 정통 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여, 당시 명나라(중국)에 사신(使臣) 편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담당하여 썻다.
2. 1. 초기 생애와 학문 활동
최항은 1426년(세종 8년)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34년(세종 16년)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1443년에는 집현전 학사로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을 한글로 옮겨 풀었으며, 〈용비어천가〉에 주를 달아 풀이하였다. 1444년 집현전 교리로서 오례를 찬진하고, 1445년 집현전 응교로 용비어천가 창제에 참여하였다. 이어 동국정운,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보수 등을 찬진하였으며, 1448년 집현전 직제학에 올랐다.1450년 선위사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접대하였으며, 우사간대부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1년 좌사간대부로 수사관을 겸하여 고려사를 개찬하고, 집현전 부제학에 올라 통감훈의를 편찬하여 그 공으로 가자되었다. 이어 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2. 2. 훈민정음 창제와 언해 사업
최항은 1426년(세종 8년)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1434년 식년시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1443년에는 집현전 학사로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을 한글로 옮겨 풀었으며, 〈용비어천가〉에 주를 달아 풀이하였다. 1444년 집현전 교리로서 오례(五禮)를 찬진, 1445년 집현전 응교로 용비어천가 창제에 참여하고, 이어 동국정운,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보수 등을 찬진(撰進) 하였다. 1459년에는 《육전》의 편찬을 비롯하여 《관음현상기》, 《십이준도》 등을 찬하였고, 중추원사로 《명황계감》의 가사(歌詞)를 한글로 번역하는 한편, 《동국통감》을 찬수하였으며, 신숙주 등과 같이 《어제유장설》 3편을 주해하였다. 1461년 양성지의 잠서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1463년에는 동국통감 찬수를 시작하는 한편 어제유장설을 주해(註解) 하였다. 1464년 사서오경에 구결을 달았으며, 1466년에는 《병장설주》를 산정(刪定)하였다. 《소학》, 《주역구결》, 《예기구결》 등을 정하고 세조의 행장을 초집하였다.집현전 학사들 중에는 친명을 주장하며 한글을 반대하는 최만리 등 연장 학사들과, 한글 창제를 주장하며 비밀리에 연구하는 권채, 최항, 안의 등의 소장 학사들로 구분된다.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사 최항 등에게 비밀리에 특지를 내려 한글을 연구 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는 한글을 만든다는 것은 성패에 있어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은밀히 왕족출신인 수양대군과, 세종대왕의 둘째 공주 정의공주를 후원자로 삼아 보냈다.
최항의 부친 최사유는 외직으로 두 고을 의성현령과 용담현령을 지냈으며, 용담현령 당시 옹동면에서 출생, 거주한 것으로 문헌에서 확인된다.
2. 3. 세조 즉위와 정치 활동
최항은 1453년(단종 1년) 절재 김종서를 제거한 수양대군을 맞이하여 단종에게 보고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후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이듬해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어 《공신연곡(功臣宴曲)》 4장을 지어 바쳤다. 연이어 대사헌, 우부빈객(右副賓客),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歷任)하였다.1455년(세조 1년)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승진하였으며, 이후 1458년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하며 1459년(세조 5년) 《육전》(六典)의 편찬을 비롯하여 《관음현상기》, 《십이준도》 등을 찬하였다. 중추원사(中樞院事)로 《명황계감》의 가사(歌詞)를 한글로 번역하는 한편, 《동국통감》을 찬수하였으며, 신숙주 등과 같이 《어제유장설》 3편을 주해하였다.
이후 중추원사, 세자빈객(世子賓客),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대사성을 겸 하고, 1460년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하다가 1461년 양성지(梁誠之)의 잠서(蠶書)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1463년 우참찬(右參贊)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수를 시작하는 한편 어제유장설(御製諭將說)을 주해(註解) 하였다.
1464년(세조 10년)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구결(口訣)을 달았으며, 1466년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으로 어제구현재시(御裁求賢才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가자(加資)를 받았으며, 《병장설주(兵將說注)》를 산정(刪定)하였다. 1467년에 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러 영성군(寧城君)에 봉(封) 해졌다. 《소학》(小學), 《주역구결》(周易口訣), 《예기구결》(禮記口訣) 등을 정하고 세조의 행장을 초집하였다. 1467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1470년 영성 부원군(寧城府院君)에 진봉(進封) 되었다.
1461년(세조 7년)에는 왕명으로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여 조선 초기의 법률과 제도를 집대성하였다.
1469년(예종 1년) 경국대전(經國大典) 상정소 도제조(詳定所都提調)로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였으며, 이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수하였다.
1471년에서 이듬해 1472년까지 1년간 조선국 상급 국상 지위를 지낸 그는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를 받아 좌의정이 되기도 하였고 《세조실록》, 《예종실록》을 찬수하였다.
2. 4. 법전 편찬과 학문적 업적
최항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법전 편찬과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1426년(세종 8년)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1434년 식년시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1443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을 한글로 옮겨 풀었으며, 〈용비어천가〉에 주를 달아 풀이하였다.1451년 고려사 개찬(改撰)에 참여하고,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올라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하였다. 1459년 《육전》(六典)을 편찬하고, 중추원사(中樞院事)로 《동국통감》을 찬수하였으며, 신숙주 등과 같이 《어제유장설》 3편을 주해하였다. 1461년에는 왕명으로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여 조선 초기의 법률과 제도를 집대성하였다. 1469년(예종 1년) 경국대전 상정소 도제조(詳定所都提調)로서 《경국대전》을 찬수하였다.
그는 역사, 언어 분야에 정통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여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담당하였다.
2. 5. 만년과 죽음
최항은 1467년에 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러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소학》(小學), 《주역구결》(周易口訣), 《예기구결》(禮記口訣) 등을 정하고 세조의 행장을 초집하였다. 1470년 영성 부원군(寧城府院君)에 진봉(進封) 되었다.1469년(예종 1년) 경국대전(經國大典) 상정소 도제조(詳定所都提調)로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였으며, 이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수하였다.
1471년에서 이듬해 1472년까지 1년간 조선국 상급 국상 지위를 지낸 그는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를 받아 좌의정이 되기도 하였고 《세조실록》, 《예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조선 초기의 대학자로서 문물제도 정비에 큰 역할을 하였고, 역사·언어 분야에 정통 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여, 당시 명나라(중국)에 사신(使臣) 편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담당하여 썻다.
3. 사상과 업적
3. 1. 훈민정음 창제와 한글 보급
최항은 집현전 학사로서 권채, 안의 등 소장 학자들과 함께 한글 창제를 비밀리에 연구했다. 당시 집현전에는 최만리 등 친명을 주장하며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연장 학사들도 있었다. 한글 창제는 전라도 정읍 상두산 자락의 사찰에서 은거하며 비밀리에 진행되었는데, 세종은 최항 등에게 특지를 내려 한글 연구를 명했다.한글 창제는 당시 시대적 배경에서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에,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왕족인 수양대군과 정의공주를 후원자로 삼았다. 정의공주는 당시 정읍 부근 태인현 시댁에서 살고 있었고, 수양대군은 칠보면의 송현수 친구 집에서 학사들을 보호하며 은거했다.
최항의 부친 최사유는 용담현령을 지냈으며, 최항은 용담현령 재임 당시 옹동면에서 출생하여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3. 2. 법전 편찬과 제도 정비
3. 3.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
최항은 훈민정음 창제, 경국대전, 용비어천가, 고려사 개찬, 동국통감 찬수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참여했다. 훈민정음해례, 무정보감, 통감훈의, 병장설주, 십이준도, 관음현상기, 역대제왕후비명감, 오례의주, 동방어음, 고려사열전, 자치강목, 공신연곡, 초학자회언주, 대학연의주해, 명황계감가사언역 등을 찬술, 찬수, 찬진, 주해, 언역하였다. 1461년에는 양성지가 저술한 잠서언해를 언해하였고, 병서신주를 교정하고, 병서주해를 주해하였다. 정대업․보태평가사를 개작(改作)하고, 정대업․보태평 종묘제례악악무가사를 개찬(改撰)하였다. 정난일기, 의경묘옥책문 3장, 태허정집 등을 찬수, 찬진하였다.4. 평가와 비판
평소 겸손하고 과묵했으며 문장에 능하여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작성했다고 한다. 저서로 《태허정집》등이 있다.
4. 1. 긍정적 평가
평소 겸손하고 과묵했으며 문장에 능하여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작성했다고 한다. 저서로 《태허정집》등이 있다.4. 2. 비판적 평가
평소 겸손하고 과묵했으며 문장에 능하여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작성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태허정집》등이 있다.5. 가족 관계 및 관련 인물
최항의 조부는 증 의정부 우찬성 최윤문(崔潤文)이고, 조모는 증 정경부인 함종 어씨(咸從魚氏)로 삼사좌윤 어백유(魚伯遊)의 딸이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 최사유(崔士柔)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판종부시사 오혁충(吳奕忠)의 딸이다.
정경부인 달성 서씨(達城徐氏)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형조참의 최영린(崔永潾)이고, 차남은 증 좌찬성 최영호(崔永灝)이다. 최영린은 숙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 및 숙부인 고령 박씨(高靈朴氏)와 혼인하였다. 고령 박씨는 감사 박건순(朴健順)의 딸이며, 외조부는 검한성 유호(柳滸)이다. 최영린은 아들 부사직 최수영(崔秀英)을 두었고, 최수영은 사직공파(司直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최수영은 숙인 성주 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하였으며, 성주 이씨는 부사 이숙생(李叔生)의 딸이다. 최수영은 증 집의 최준철(崔濬哲)을 두었고, 최준철은 증 숙인 광산 김씨(光山金氏)와 혼인하였다. 광산 김씨는 목사 김거(金琚)의 딸이자 좌상국 김국광(金國光)의 후손이다. 최준철의 아들 증 좌승지 최계종(崔繼宗)은 최준문의 아들로 최준철에게 출계하였다. 최계종은 증 숙부인 나주 김씨(羅州金氏)와 혼인하였으며, 나주 김씨는 지돈녕 김경석(金景錫)의 딸이다. 최영호의 손자로는 이조판서 최수언(崔秀彦)과 영천부원군 증 영의정 최수진(崔秀珍)이 있다. 최수진의 아들은 영평부원군 영의정 청백리 충정공 최흥원(崔興源)이다.
최항의 처남은 서거광(徐居廣)과 서거정(徐居正)으로, 본관은 달성 서씨 경파이며 훗날 대구(大丘)로 이어진다.
6. 기타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은 거의 최항이 담당하였다. 40여 년간 정치 관직 생활 동안 탄핵을 한 번도 받지 않았으며, 외직을 한 적이 없다.
7. 관련 문화재
최항선생묘(崔恒先生墓)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 산11-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6년 8월 27일 경기도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1983년 MBC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배우 박광남이 최항 역을 연기했다.
- 199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배우 양형호가 최항 역을 연기했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배우 원석연이 최항 역을 연기했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유병준이 최항 역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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