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교호 개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교호 개혁은 1716년부터 1736년까지 도쿠가와 막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추진한 일련의 개혁 정책이다. 요시무네는 막부의 재정 안정과 사회 안보 개선을 목표로, 검소함을 강조하고 상인 길드를 통제하는 등 경제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서양 서적 금지를 완화하여 서양 지식과 기술 수입을 장려했으며, 산킨코타이 제도를 완화하여 다이묘의 부담을 줄였다.

교호 개혁은 막부 권력 강화를 위해 측근 정치를 강화하고, 쇼군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행정 기구 개혁을 통해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신전 개발을 장려하는 등 재정 수입 증대를 꾀했다. 또한, 연공 강화, 정면법 도입, 치수 사업 등 농업 정책을 추진하고, 상품 작물 재배를 장려하는 등 국가 정책 및 공공 정책을 시행했다.

교호 개혁은 막부 재정 안정에 기여하고 이후 개혁의 모델이 되었지만, 과도한 증세로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오카 에치젠 - 오오카 다다스케
    오오카 다다스케는 에도 시대 막부 관료로서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교호 개혁을 보좌하고 에도 시내 행정을 담당하며 도시 정책, 사법, 방화 체제 강화, 하층민 대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오오카 에치젠노카미'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 도쿠가와 요시무네 - 가즈라노번
    가즈라노 번은 겐로쿠 10년(1697년)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3만 석을 분할받아 세워졌으나, 호에이 2년(1705년) 요시무네가 기슈 번주를 계승하며 폐번되어 막부 직할령이 되었고, 현재의 후쿠이현 에치젠정에 위치했으며 번주는 대관을 파견하여 통치했다.
  • 도쿠가와 요시무네 - 우에노 동조궁
    우에노 동조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리기 위해 1627년 건립된 신사로, 에도 시대 초기의 건축 양식을 보존하고 있으며 여러 재난 속에서도 소실되지 않아 강운의 신사로 알려져 있고, 화려한 사당과 가라몬, 투담 등이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우에노 공원 내에 위치한다.
  • 에도 시대의 경제 - 슈쿠바
    슈쿠바는 에도 시대 고카이도를 따라 설치된 역참 마을로, 관리들을 위한 시설과 여행객을 위한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민간 상업 활동과 연관되었으나, 철도 발달로 쇠퇴 후 현재는 유적지나 관광지로 보존되며 예술 작품의 소재로도 활용된다.
  • 에도 시대의 경제 - 덴포 개혁
    덴포 개혁은 1841년 미즈노 다다쿠니가 주도하여 기강 확립, 군비 개혁, 경제 정책 등을 추진했으나, 상인 통제 실패로 1843년 실패한 막부 개혁이다.
교호 개혁
개요
이름교호 개혁
로마자 표기Kyōhō no Kaikaku
유형개혁
시대에도 시대
주창자도쿠가와 요시무네
시기1716년 ~ 1736년
목표에도 막부 재정 재건, 사회 기강 확립
배경
주요 원인겐로쿠 시대의 사치 풍조 만연, 막부 재정 악화
선행 개혁쇼토쿠 정책 (일부)
내용
재정 정책검약령 실시
절미 정책 시행
새로운 세금 징수 (공납미 상납제)
상인으로부터의 헌금 (미상납)
신덴 개발 장려새로운 개발을 장려하여 농지 확대 및 세수 증대 도모
산업 진흥무역 장려 및 특산물 생산 장려
법령 정비공사방어정 제정
족경소 설치
학문 장려유학 장려, 실용적인 학문 중시
인재 등용실력 있는 인재를 출신에 관계없이 등용
주요 인물
관련 인물도쿠가와 요시무네 (쇼군)
오오오카 타다스케 (마치부교)
무로 큐소 (유학자)
결과 및 영향
긍정적 효과막부 재정 개선 (일시적)
사회 기강 확립
산업 진흥
부정적 효과백성들의 생활고 심화
가격 폭등
농민 봉기 발생
한계근본적인 봉건 제도의 모순 해결 미흡
후대 영향간세이 개혁, 덴포 개혁에 영향
평가
전반적 평가부분적인 성공과 함께 한계점을 드러낸 개혁
관련 항목
관련 문서간세이 개혁
덴포 개혁
도쿠가와 요시무네

2. 주요 개혁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도쿠가와 막부의 재정적 안정을 이루고, 정치적, 사회적 안보를 개선하기 위해 교호 개혁을 추진했다. 검소함을 강조하고, 상인 길드를 형성하여 통제와 과세를 강화했다.[11] 기독교 관련 서적을 제외한 서양 서적에 대한 금지를 해제하여 서양 지식과 기술의 수입을 장려했다.

국립 역사 박물관 소장, ''도쿠가와 세이세이로쿠'' 중 ''축제일에 에도 성에 대규모로 참석한 다이묘''''


산킨코타이(参勤交代) 규칙을 완화하여 다이묘의 부담을 줄여 막부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이는 다이묘에게 큰 부담이었던 두 개의 가정을 유지하고 인력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비용, 지위 과시, 부재 시 영지 방어 등의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조치였다.

2. 1. 막부 권력 강화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쇼토쿠의 치를 이끈 아라이 하쿠세키마나베 아키후사를 해임하고 기슈번 출신 인재를 막부 신하로 등용했다.[11](p6,7) 막부 직계 혈통이 단절된 뒤 고산케 출신으로 쇼군이 된 요시무네는 지도력을 확립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을 강화했다.[11](p6,7) 표면적으로는 로주에 의한 막부 정치에 비중을 두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오소바고요토리츠기를 신설하고 전 기슈번 무사를 임명하여 실질적인 측근 정치를 전개했다.[11](p6,7) 요시무네는 기슈번에서 쇼군 가문을 상속받을 때, 다수의 기슈번 무사를 막신으로 편입시켰는데, 그 수는 교호 10년에 205명에 달했다.[11](p6,7) 이는 기슈번 상사의 약 25%에 해당한다.[11](p6,7)

요시무네는 자신의 쇼군 권력 확립을 위해 쇼군의 근거지인 에도 인근을 통제하고 군사적으로 굳건히 했다.[11](p6,7) 이를 위해 생물 애호령에 의해 철폐되었던 군사 훈련으로서의 측면을 가진 매사냥을 부활시켰다.[11](p6,7) 매사냥에 관한 시책은 에도 주변 각지의 실정을 파악하는 효과도 있었다.[11](p6,7) 동시에 자신의 수족이 되어 사회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기슈번에서 은밀한 일을 맡았던 번사들을 막신으로 발탁하여 쇼군 직속의 오니와반을 창설했다.[11](p6,7) 그들은 제번・엔고쿠부교소・다이칸 등의 동향과 막신들의 평판, 세간의 풍문을 조사하여 이를 "풍문서"로 정리해 제출했다.[11](p6,7)

그 외,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한 고이시카와 양생소를 설치하고, 화재 대책으로 정화소 제도를 마련했다. 또한 방화 건축을 장려하고 화재 방지 구역 설정을 했다. 더 나아가 요시무네가 기슈번 시대에 채용했던 "투서함" 제도를 응용한 메야스바코를 설치했다.[11](p6,7) 메야스바코의 설치는 서민들의 정치 비판을 억제하고, 쇼군의 밑으로 직소를 집중시킴으로써 자신의 권력 강화를 도모한 것으로 현재 이해되고 있다.[11](p6,7)

2. 2. 행정 기구 개혁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막부 재정 수입이 정체되고, 무가와 서민 모두 생활이 불안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간조소(勘定所) 개혁을 실시했다.[11] 간조소의 직무를 공사방(사법)과 캇테방(재무)으로 분리하고, 가미가타(오사카)·간토 지역으로 나뉘어 있던 간조방의 담당 구역을 일원화하여 업무 효율성을 높였다.[11] 또한, 성 내에 소장되어 있던 9만 4200권에 달하는 재정 관계 공문서를 정리하고 목록화하여 과거 선례 검색 및 새로운 정보 추가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정책 결정의 효율성을 높였다.[11]

요시무네는 신전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간조소 내에 신전방을 설치했다. 막부의 자금난으로 인해 상인 청부의 신전 개발을 권장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기슈번 출신의 이자와 야소베 등 토목 기술자들의 기술과 상인들의 자본력을 활용했다. 이를 통해 막령의 이고쿠는 약 50만 석 증가하여 450만 석에 달했다.

인사 제도와 관련해서는, 1733년 6월, 기준 이고쿠보다 록고가 낮은 자가 직책에 취임했을 때, 취임 기간에 한하여 록고를 인상하는 아시고의 제를 마련하여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했다.[12][13] 또한, 은거하지 않아 가독을 이을 수 없는 총령(헤야즈미 총령)에게 출사 기회를 주는 총령반입 제도를 마련하고, "무예 음미" 시험을 통해 무예 장려와 인재 등용을 동시에 꾀했다.[12][13]

2. 3. 국가 정책 및 공공 정책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절약과 증세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의 재정 재건을 꾀하고, 안정적인 농업 정책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15] 연공을 강화하고 조세를 50%로 올렸으며, 검견법(検見法)을 폐지하고 풍흉에 상관없이 일정액을 징수하는 정면법(定免法)을 도입하여 세금 징수를 안정화했다.[15] 에치고국(越後)의 석호(紫雲寺潟)나 요도강 하구를 개간하고 치수 사업에 힘썼으며, 조향(助郷) 제도를 정비했다.[15]

쌀값 조절에는 실패했으나, 아오키 곤요에게 기근 대책으로 고구마 재배를 연구하게 하고, 조선인삼, 유채 등 상품 작물 재배를 장려했다.[15] 약초 재배도 지원했다. 인구 조사, 교육 장려, 효행과 선행에 대한 포상, 벚꽃과 복숭아 조림 등 사회 정책도 시행했다.[15]

마쓰다이라 노리무라를 주임으로 사찰 봉행, 정 봉행, 계정 봉행을 중심으로 편찬시킨 막부의 기본 법전인 공사방어정서(公事方御定書)를 제정하여 법치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는 판례를 법규화한 형사 재판 시 기준이 되는 형사 판례집이었다. 도지마 쌀 회장을 공인하고, 기독교와 무관한 한역 서적의 수입을 완화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상미의 제(上米の制)를 시행하여 다이묘들에게 1만 석 당 100석의 비율로 쌀을 헌상받는 대신 참근교대(参勤交代) 시의 에도 재부 기간을 1년에서 반년으로 완화했다.[15] 상대제령(相対済令)을 반포하여 금전 관련 소송을 줄이고자 했으며, 겐분 개주를 통해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요시무네 시대에는 신전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자와 야소베 등 기슈번 출신 토목 기술자들이 새로운 공법(기슈류)을 도입하여 토네가와나 기소 강 등의 대하천 하류 부근 일대의 충적 평야나 하구 삼각주 지대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15]

3. 연표


  • 1717년(교호 2년): 교호금(享保金)으로의 교환을 강제하였다. 신 금은 교환도 강제하였다.(교호 소판금)
  • 1719년(교호 4년): 상대제령(相対済令)을 반포하였으나, 11년 후에 사실상 폐지되었다.
  • 1720년(교호 5년): 에도의 화재를 계기로 소방 조직을 설치하고, 기독교와 무관한 양서의 수입을 해금하였다. 에도 정화소 이로하 48조를 설치하였다.(이듬해 후카가와에 16조)
  • 1721년(교호 6년): 유지금지령(流地禁止令)을 반포하였으나 2년 후 폐지되었고, 투고함(目安箱)을 설치하였다.
  • 1722년(교호 7년): 족고제(足高の制)를 도입하고, 고이시카와양생소(小石川養生所)를 설립하였으며, 아게마이노세(上米の制)를 시행하였으나 9년 후 폐지되었다. 정면법을 도입하고, 에도 시내의 여섯 개 상수도 중 혼조 상수, 아오야마 상수, 미타 상수, 센카와 상수 4개를 폐지하였다. 3분의 1 미납령과 에도 마치카타 공역은납령을 시행했다. 신전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고찰을 니혼바시에 게시했다.
  • 1725년 (교호 10년) - 구메 영대장령
  • 1728년(교호 13년): 조세의 세율을 40%에서 50%로 올리는 오공오민제(五公五民制)를 도입하였다. (막부 창설 이래의 「4공 6민제」를 포기)
  • 1730년(교호 15년): 다이묘를 대상으로 매미령(買米令)을 반포하였고, 다음 해에는 오사카 상인들에게로 확대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오사카의 도지마 쌀 시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막부 감독관(nengyoji)이 시장을 감시하고 세금을 징수하도록 임명되었다.[4] 쌀 거래와 관련된 거래는 주로 공공 증권 거래에 사용되는 증권 거래소로 발전했다.[5] 향상된 농업 생산의 발전은 교호 시대 중반에 쌀 가격 하락을 야기했다.[6]
  • 1730년 8월 3일 (교호 15년, 6월 20일): 무로마치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3,790채의 가옥이 불탔다. 니시진의 30,000대 이상의 직기가 파괴되었다. 막부는 쌀을 배급했다.[7]
  • 1732년(교호 17년): 교호 기근은 메뚜기 떼가 내해 주변의 농업 공동체의 농작물을 황폐화시킨 결과였다.[8]
  • 1735년(교호 20년) - 다방 캇테사쿠 시법(전답 캇테사쿠 금지령의 사실상의 재검토)
  • 1736년(겐분 원년): 겐분 개주(元文改鋳)를 시행하였다.(교호 개주 정책의 포기)
  • 1742년(간포 2년): 공사만어정서(公事方御定書)를 제정하였다.
  • 1744년(엔쿄 원년): 간다천문대를 설치하였다.

4. 영향

교호 개혁은 막부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에 성공하여 이후 진행된 간세이 개혁덴포 개혁에서 긴축재정정책의 모범이 되었다.[9] 하지만 증세 등 백성들의 부담을 증가시켰고 막부 창업 당시 혹은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시절을 이상으로 삼아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펼쳤다는 비판이 있다.[9] 실제로 교호 개혁 때 만들어진 유지금지령은 10년 만에 폐지되었다.[9] 또한 개혁이 진행되면서 재정 재건이나 물가 대책을 위해 임시방편적인 법령을 남발하여 막부와 쇼군의 권위에 흠집을 냈고 사회 모순을 남기고 말았다.[9]

특히 조세를 이에노부와 이에쓰구 시절의 40%에서 50%로 올린 것은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이는 언뜻 보기에는 10%p가 늘어난 것이지만 이에노부 시절에는 사실상 평균 27.6% 정도의 조세를 부담했기 때문에 세율이 2배가 된 셈이었다. 여기에 정면법이 적용되어 흉작이 들어도 세금이 감면되지 않아 부담이 더욱 늘었다. 그 결과 인구가 증가하지 않고 잇키가 빈번해졌다. 이 세율은 도쿠가와 이에시게가 쇼군으로 취임한 뒤에도 유지되었지만 현장에서는 실질적인 감세가 취해졌다.[9]

교호 개혁 때 취해진 겐분개주(元文改鋳)는 리플레이션 정책으로 일본 경제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성공한 몇 안 되는 개주 정책으로 평가받는다.[9]

또한 막부의 중신, 하타모토, 다이묘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뇌물 수수를 요시무네가 처음으로 단속했다. 천민층에 대해서도 거주나 복장 등에 제한을 두어 농공상과의 접촉을 금하는 등 엄격한 차별 정책을 폈다.[9]

이 개혁 운동 이후 에도 시대에 세 차례의 개혁이 더 이어졌다. 간세이 개혁(1787–1793), (1841–1843)의 덴포 개혁, 그리고 게이오 개혁(1864–1867)이다.[9]

4. 1. 긍정적 영향

교호 개혁은 막부 재정 안정에 기여했으며,[9] 간세이 개혁, 덴포 개혁 등 후대 개혁의 모델이 되었다.[9] 특히 겐분개주(元文改鋳)는 리플레이션 정책으로 일본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성공적인 화폐 개혁으로 평가받는다.[9]

4. 2. 부정적 영향

교호 개혁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조세율을 40%에서 50%로 올린 것은, 이에노부 시절 평균 조세 부담이 27.6%였던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2배 가까운 증세였다.[9] 여기에 정면법이 적용되어 흉작 시에도 세금이 감면되지 않아 농민들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9] 그 결과, 인구 증가가 정체되고 잇키가 빈번해졌다.[9] 도쿠가와 이에시게가 쇼군이 된 후에도 세율은 유지되었지만, 현장에서는 실질적인 감세가 이루어졌다.[9]

또한 교호 개혁은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과 임시방편적인 법령 남발로 막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사회 모순을 남겼다는 비판을 받는다.[9] 유지금지령은 10년 만에 폐지되기도 하였다.[9]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막부 중신, 하타모토, 다이묘 사이에 만연했던 뇌물 수수를 처음으로 단속했다.[9] 천민층에 대해서는 거주와 복장에 제한을 두고 농공상과의 접촉을 금지하는 등 엄격한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9]

참조

[1] 서적 Repertoires and Cycles of Collective Action https://books.google[...] Duke University Press 1995
[2] 서적 Columbia Chronologies of Asian History and Culture 2000
[3]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dispatch.opac[...] 2005
[4] 서적 Japanese Securities Markets: A Historical Survey 1953
[5] 서적
[6] 서적 The Economic History of Japan: 1600–1990 2004
[7] 서적 Kyoto: the Old Capital, 794–1869 1956
[8]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1988
[9] 서적 Repertoires and Cycles of Collective Action https://books.google[...] Duke University Press 1995
[10] 문서 7代将軍家継の死去に伴う改元だったため、吉宗の就任と一致する。
[11] 서적 江戸時代の古文書を読む―享保の改革 東京堂出版 2004-06-01
[12] 학술지 江戸幕府武芸奨励策の研究 : 画期としての徳川吉宗 2013-03-22
[13] 문서 後に、松平定信は寛政の改革において、これを学問(儒学)の分野に広げ、人材登用制度である「学問吟味」を創始する。
[14] 서적 通貨の日本史 - 無文銀銭、富本銭から電子マネーまで 中公新書 2016-08-25
[15] 웹사이트 <米将軍>吉宗と紀州流治水・利水工法 https://www.risktais[...] 2018-02-13
[16] 웹사이트 日本銀行金融研究所貨幣博物館:貨幣の散歩道 https://web.archive.[...] 1999-02-0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