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카 다다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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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오카 다다스케는 에도 시대의 막부 관료로, 에도 마치 봉행과 지샤부교를 역임하며 도시 정책 및 사법에 관여했다. 그는 뛰어난 법적 판단으로 여러 일화를 남겼으며, 특히 "훔쳐간 냄새 사건"과 "속박된 지장보살 사건"은 유명하다. 오오카는 서민들의 아군으로 여겨지며, 다양한 시대극과 소설, 만화 등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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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카 다다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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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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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오카 다다스케 |
다른 이름 | 구마, 이치주로, 주에몬 (통칭) |
계명 | 쇼운인덴젠엣슈시시쿄요진잔숭의대거사 (松雲院殿前越州刺史興誉仁山崇義大居士) |
묘소 | 창월산 조미사, 자운산 서륜사 |
생애 | |
출생 | 엔포 5년 (1677년) |
사망 | 호레키 원년 12월 19일 (1752년 2월 3일) |
개명 | 다다요시, 다다스케 |
관직 | |
관위 | 종5위하・노토노카미, 에치젠노카미, 증 종4위 |
막부 | 에도 막부 쇼인반 → 메쓰케 → 야마다 부교 → 후신 부교 → 에도 남정 마치부교 → 지샤 부교 겸 소샤반 |
주군 | 도쿠가와 쓰나요시 → 이에노부 → 이에쓰구 → 요시무네 → 이에시게 |
번 | 미카와국니시오히라 번주 |
가계 | |
씨족 | 후지와라 성 오오카씨 |
아버지 | 오오카 다다타카 |
어머니 | 호조 우지시게의 딸 |
양아버지 | 오오카 다다자네 |
형제 | 다다시나, 다다쓰네, 다다스케, 다다아쓰, 다다쓰네, 딸 (시마즈 히사타케의 부인) |
배우자 | 정실: 오오카 다다자네의 딸 |
자녀 | 이치주로, 다다요시, 신자부로, 딸 (나카야마 도키쓰네의 부인), 양녀: 마쓰다이라 지카나에의 딸 (나카가와 다다토시의 부인 → 시마즈 히사토모의 부인) |
2. 생애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추진한 교호 개혁을 마치 부교로서 지원하고, 에도 시내 행정에 종사했을 뿐만 아니라, 효조쇼에 참여하여 간토 지방 고용가케, 소자반, 지샤 부교를 역임했다. 에치젠노카미였던 것과 『오오카 정담』이나 시대극에서의 명부교로서의 이미지를 통해, 현대에는 '''오오카 에치젠노카미''' 또는 '''오오카 에치젠노카미 타다스케 공'''으로 알려져 있다. 통칭은 구마, 이후 이치주로, 츄에몬. 휘는 타다요시, 이후 타다스케.
오오카 다다스케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출생부터 마치부교 취임까지'''와 '''마치부교 시대의 활약'''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과 해당 항목을 참조.
'''지샤부교 시대부터 만년'''
겐분 원년(1736년) 8월 12일,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해 지샤부교에 임명되어 효조쇼 일좌도 계속 맡았다. 고지카타 오사다메가키의 추가 개정 및 어촉서 편찬에 관여하고, 공문서를 수집 정리했으며, 아오키 곤요에게 명하여 구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인 고문서를 수집하고 분류 정리했다.[13] 지샤부교 재임 중 2,000석을 가증받아 5,920석이 되었고, 아시다카분을 더해 1만 석의 다이묘격이 되었다.
원래 지샤부교(정원 약 4명)는 다이묘의 직무이며, 소자반(정원 20~30명)을 겸임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아시다카노 세이로 취임한 타다스케는 정식 신분이 하타모토였기 때문에 다이묘가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소자반을 겸임하지 않아, 소자반을 겸임하는 지샤부교 동료 다이묘들과 소자반들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에도 성내에서 소자반에게는 시코(伺候)하는 츠메쇼(시코석・츠메세키, 대기실)가 지정되어 있었지만, 지샤부교 단독의 츠메쇼는 없었다. 통상 지샤부교는 소자반과 겸임이므로 소자반 자리에 대기하면 되었지만, 타다스케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소자반들은 "여기는 (다이묘의 격식인) 소자반의 츠메쇼다."라며 하타모토인 타다스케의 출입을 금지했다.
이 때문에 수년간 타다스케는 지샤부교이면서도 에도 성내에서 고유한 츠메쇼를 갖지 못하는 고생을 했다. 수년 후 이 사태를 알아챈 쇼군 요시무네에 의해 "지샤부교의 전용 츠메쇼"가 제정되어 타다스케에게도 대기실이 주어졌다. 간엔 원년(1748년) 10월, 소자반을 겸임함과 동시에 아시다카분이 정식 가증으로 주어져 미카와국세이다이라(현 오카자키시) 1만 석을 영유하게 되어 정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마치부교에서 다이묘가 된 것은 에도 시대를 통틀어 타다스케뿐이다.
간엔 4년(1751년) 6월 20일, 에도 성 니시마루로 옮겨 오고쇼가 되어 있던 요시무네가 사망한다.[13] 타다스케는 요시무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장례 절차에 참여했다.[14][15] 『오오카 일기』 윤6월 8일 조에 따르면,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귀가했다.[17] 간엔 3년(1750년)경부터 호흡기계・소화기계 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18]
『도쿠가와 실기』와 『간세이 중수 제가보』에 따르면, 11월 2일에 지샤부교・소자반의 사임을 요청했다.[19] 지샤부교 사임은 수리되었지만, 소자반 사임은 인정되지 않았다.[18] 이후 자택에서 요양하다 12월 19일에 사망했으며, 향년 75세였다.[19]
법명은 쇼운인전 전에쓰슈 자사(刺史) 흥예인산 숭의대거사(興誉仁山崇義大居士)이다. 묘소는 대대로의 영지가 있는 가나가와현지가사키시 츠츠미의 창월산 정견사이다. 또한, 도쿄도다이토구 야나카의 지원산 즈이린지에도 있다.
오오카가 문서(미카와국 누카타 군 니시오히라 오오카가 문서)는 『오오카 일기』(오오카 에치젠노카미 타다스케 일기), 『교호 선요류집』, 쇼군가의 내서 등 타다스케 시기를 중심으로 타다스케 이전의 쇼군가 주 인장 등을 포함한 문서군으로, 1968년에 오오카 가문에서 국문학연구자료관에 기탁되었다. 『선요류집』은 타다스케가 마치 부교 시절에 편찬하게 한 판례집으로, 타다스케의 평정소 시대부터 사찰 봉행 시대, 사후에도 막말까지 편찬이 이어졌다.
2. 1. 출생부터 마치부교 취임까지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추진한 교호 개혁을 마치 부교로서 지원하고, 에도 시내 행정에 종사했을 뿐만 아니라, 효조쇼에 참여하여 간토 지방 고용가케, 소자반, 지샤 부교를 역임한 오오카 다다스케는 1700석의 기하타 오오카 타다타카의 넷째 아들로 에도에서 태어났다.[9] 조쿄 3년(1686년) 동족인 1920석의 기하타 오오카 타다자네(오오카 타다에몬)의 양자가 되어, 타다자네의 딸과 약혼했다. 조쿄 4년(1687년)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처음으로 어전했다. 겐로쿠 9년(1696년) 종형에 해당하는 오오카 타다히데의 사건에 연좌되어 폐문 처분을 받았다. 이듬해 사면되었고, 양부 병사로 인해 겐로쿠 13년(1700년) 가독과 유령을 잇고, 타다요 가문의 3대 당주가 되었다.쓰나요시 시대, 요리아이 기하타 무역에서 겐로쿠 15년(1702년) 서원반이 되었고, 이듬해 겐로쿠 대지진에 따른 복구 부역을 위한 임시 봉행 중 한 명을 맡았다. 호에이 원년(1704년) 투두, 호에이 4년(1707년) 사용반, 호에이 5년(1708년) 메츠케에 취임하여 막부 관료로서 성장했다.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 시대, 쇼토쿠 2년(1712년) 정월 원국 봉행 중 하나인 야마다 봉행(이세 봉행) 17대째에 취임했다. 같은 해 4월 임지로 향했고, 종5위하 노토노카미에 서임되었다.
재직 중에는 봉행 지배의 막령과 기슈 도쿠가와 가문 령 사이의 소송이 종종 발생했고, 야마다(현 이세시)와 마쓰사카(현 마쓰사카시)의 경계를 둘러싼 소송에서는 기슈번령의 마쓰사카에 유리했던 전례를 따르지 않고 공정하게 재판했다고 한다. 당시 기슈 번주이자 훗날 쇼군직에 취임하여 타다스케를 발탁하는 요시무네는 사실상 한쪽 당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타다스케의 공정한 재판을 인정했다고 한다.[9]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 시대 교호 원년(1716년) 부역 봉행이 되어 에도의 토목 공사나 저택 구획을 지휘했다. 같은 해 8월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쇼군에 취임하여, 해임된 아라이 하쿠세키나 마베 아키후사 등의 저택 대행도 담당했다. 교호 2년(1717년) 에도 마치 봉행(남정 봉행)이 되었다. 마쓰노 스케요시의 후임으로, 상대역인 북정 봉행은 나카야마 토키하루, 중정 봉행은 쓰보우치 사다아키였다. 쓰보우치 사다아키의 칭호가 타다스케와 같은 「노토노카미」였기 때문에, 이때 타다스케는 「에치젠노카미」로 개칭했다.
오오카 다다스케의 출생부터 마치부교 취임까지의 연표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
조쿄 3년 12월 10일 (1687년1월 23일) | 오오카 타다자네의 양자가 됨 |
겐로쿠 13년 7월 11일 (1700년8월 25일) | 가독 상속 |
호에이 원년 10월 9일 (1704년11월 6일) | 서원번두에서 가치시라로 이동. 재직 중 휘는 타다스케. 이치주로에서 츄에몬으로 개칭 |
호에이 4년 8월 12일 (1707년9월 7일) | 가치시라에서 츠카이반으로 이동 |
호에이 5년 7월 25일 (1708년9월 9일) | 츠카이반에서 메츠케로 이동 |
쇼토쿠 2년 1월 11일 (1712년2월 17일) | 메츠케에서 야마다 부교로 이동. 3월 15일, 종5위하 노토노카미에 서임 |
쇼토쿠 6년 (1716년) | |
교호 2년 2월 3일 (1717년3월 15일) | 후신 부교에서 에도 미나미마치 부교로 이동. 에치젠노카미를 칭함 |
2. 2. 마치부교 시대의 활약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추진한 교호 개혁을 마치 부교로서 지원하여 에도 시내 행정에 종사했을 뿐만 아니라, 효조쇼에 참여하여 사법에도 관여했다. 이 무렵 봉행소 체제의 기구 개혁이 이루어져 중마치 봉행이 폐지되고 양마치 봉행소의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1719년에는 혼조 봉행을 폐지하고 혼조·후카가와 지역을 편입했다.[10]시정에서는 마치다이 폐지나 마치나누시 감원 등 마치 정 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서민 구역의 방화 체제 재편을 위해 1718년 마치히케시 조합을 창설하고, 1720년에는 '이로하 47조(후에 48조)'로 재편성했다. 기와 지붕이나 토장 등 방화 건축 장려와 화재지 설정, 방화 감시 제도 확립 등도 실시했다. 1725년 9월에는 2,000석을 가증받아 3,920석이 되었다. 풍속 단속에서는 사창 금지, 동반 자살이나 도박 등의 단속을 강화했다.
1721년 12월, 요시무네가 설치한 메야스바코에 오가와 쇼센으로부터 시약원(施藥院) 설치를 탄원하는 투서가 있었다. 요시무네는 아리마 우지노리에게 시약원 설립을 명했고, 다다스케는 고이시카와 양생소 설치에 진력했다.[10]
하층민 대책으로는 요리키 가토 시게나오를 통해 소개된 아오키 곤요를 서물 봉행에 임명하여 고구마 재배를 지원했다. 쇼군 요시무네가 주도한 쌀값 대책에서는 쌀 회소 설치와 공정 가격 철저 지도 등을 실시했고, 물가 대책에서는 주식 동업자 공인 등 조합 정책을 지도했으며, 화폐 정책에서는 유통량 확대를 진언했다.
1721년, 오오카 에치젠은 서적에 간기를 의무화하여, 오늘날 서적 최종 페이지에 '간기'가 기재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1736년 5월 12일, 막부는 마치 봉행 오오카 다다스케와 간조 봉행 호소다 도키이를 최고 책임자로 한 화폐 개주를 실시했다.[11] 개주 직후 은이 부족해지자, 같은 해 6월 26일, 오오카는 양가게 상인 10명을 심문했지만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지 못해 덴마초 감옥에 투옥했다. 양가게 상인과 마치야누시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1736년 8월 12일 다다스케가 지샤 봉행으로 전임하고, 이나오 마사타케가 8월 19일 출옥을 허가할 때까지 53일이나 감옥에 유치되었다.[12]
2. 3. 지샤부교 시대부터 만년
겐분 원년(1736년) 8월 12일,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해 지샤부교에 임명되어 효조쇼 일좌도 계속 맡았다. 지샤부교 시대에는 고지카타 오사다메가키의 추가 개정 및 어촉서 편찬에 관여하고, 공문서를 수집 정리했으며, 아오키 곤요에게 명하여 구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인 고문서를 수집하고 분류 정리했다.[13] 지샤부교 재임 중 2,000석을 가증받아 5,920석이 되었고, 아시다카분을 더해 1만 석의 다이묘격이 되었다.원래 지샤부교(정원 약 4명)는 다이묘의 직무이며, 소자반(정원 20~30명)을 겸임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아시다카노 세이로 취임한 타다스케는 정식 신분이 하타모토였기 때문에 다이묘가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소자반을 겸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소자반을 겸임하는 지샤부교 동료 다이묘들과 소자반들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에도 성내에서 소자반에게는 시코(伺候)하는 츠메쇼(시코석・츠메세키, 대기실)가 지정되어 있었지만, 지샤부교 단독의 츠메쇼는 없었다. 통상 지샤부교는 소자반과 겸임이므로 소자반 자리에 대기하면 되었지만, 타다스케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소자반들은 "여기는 (다이묘의 격식인) 소자반의 츠메쇼다."라며 하타모토인 타다스케의 출입을 금지했다.
이 때문에 수년간 타다스케는 지샤부교이면서도 에도 성내에서 고유한 츠메쇼를 갖지 못하는 고생을 했다. 수년 후 이 사태를 알아챈 쇼군 요시무네에 의해 "지샤부교의 전용 츠메쇼"가 제정되어 타다스케에게도 대기실이 주어졌다. 간엔 원년(1748년) 10월, 소자반을 겸임함과 동시에 아시다카분이 정식 가증으로 주어져 미카와국세이다이라(현 오카자키시) 1만 석을 영유하게 되어 정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마치부교에서 다이묘가 된 것은 에도 시대를 통틀어 타다스케뿐이다.
간엔 4년(1751년) 6월 20일, 에도 성 니시마루로 옮겨 오고쇼가 되어 있던 요시무네가 사망한다.[13] 타다스케는 요시무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장례 절차에 참여했다.[14][15] 『오오카 일기』 윤6월 8일 조에 따르면, 타다스케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귀가했다.[17] 간엔 3년(1750년)경부터 호흡기계・소화기계 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18]
『도쿠가와 실기』와 『간세이 중수 제가보』에 따르면, 타다스케는 11월 2일에 지샤부교・소자반의 사임을 요청했다.[19] 지샤부교 사임은 수리되었지만, 소자반 사임은 인정되지 않았다.[18] 이후 자택에서 요양하다 12월 19일에 사망했으며, 향년 75세였다.[19]
법명은 쇼운인전 전에쓰슈 자사(刺史) 흥예인산 숭의대거사(興誉仁山崇義大居士)이다. 묘소는 대대로의 영지가 있는 가나가와현지가사키시 츠츠미의 창월산 정견사이다. 또한, 도쿄도다이토구 야나카의 지원산 즈이린지에도 있다.
오오카가 문서(미카와국 누카타 군 니시오히라 오오카가 문서)는 『오오카 일기』(오오카 에치젠노카미 타다스케 일기), 『교호 선요류집』, 쇼군가의 내서 등 타다스케 시기를 중심으로 타다스케 이전의 쇼군가 주 인장 등을 포함한 문서군으로, 쇼와 43년(1968년)에 오오카 가문에서 국문학연구자료관에 기탁되었다. 『선요류집』은 타다스케가 마치 부교 시절에 편찬하게 한 판례집으로, 타다스케의 평정소 시대부터 사찰 봉행 시대, 사후에도 막말까지 편찬이 이어졌다.
3. 오오카 재판(大岡政談)
에도 정 봉행 시대의 재판이 훌륭했고, 에도의 시정 행정 외에 지방 어용을 맡아 널리 지명도가 있었던 점 등으로 인해, 오오카 다다스케는 서민들 사이에서 명판관이자 인정 넘치는 서민의 아군으로 인식되었다. 서민 문화의 흥륭기였던 것도 겹쳐, 동시대부터 후년에 걸쳐 창작된 "오오카 정담"이 사본이나 강담으로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오오카 다다스케는 독창적이고 현명한 법적 결정에 관한 여러 이야기에서 전설적인 지위를 얻었으며, 라쿠고(일본의 이야기)에서 자주 사용되었다.[3]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는 "훔쳐간 냄새 사건"이다. 한 여관 주인이 가난한 학생이 자신의 요리 냄새를 훔쳤다고 비난한 사건을 심리했는데, 동료들은 터무니없는 사건이라며 기각할 것을 권했지만, 오오카는 심리를 결정했다. 판사는 학생에게 한 손에 있는 돈을 다른 손으로 옮기도록 명령하고, 음식 냄새의 가격은 돈 소리라는 판결을 내렸다.[3]
"속박된 지장보살 사건"에서는 지역 기모노 제작자로부터 훔쳐간 천의 도둑을 찾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오오카는 지장보살 조각상인 나리히라산 덴센지(도쿄에 있는 사찰)의 조각상을 묶어 관리 의무 태만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속박된 조각상이 법정에 도착하자 구경꾼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오오카는 각 구경꾼에게 소란을 피운 벌금으로 작은 천 조각을 부과하라고 명령했다. 구경꾼들이 벌금을 지불했을 때, 피해를 입은 기모노 제작자는 한 구경꾼의 천 조각이 훔쳐간 천과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 도둑이었던 구경꾼은 체포되었고, 오오카는 지장보살상이 의무를 다했다고 하여 석방을 명령했다. 1925년, 조각상은 도쿄 시내에서 외곽의 작은 사찰인 난조인으로 옮겨졌으며, 여전히 도둑의 희생자들이 희망을 담아 묶은 밧줄로 감싸여 있다. 그러나 조각상은 200년 이상 묶여 있어서 거의 매끄럽게 닳았다.
「도쿠가와 덴이치보」, 「무라이 초안」, 「에치고 덴키치」, 「아제쿠라 주시로」, 「고토 한시로」, 「소품점 히코베」, 「담배 가게 키하치」, 「묶인 지장」, 「5관 재판」, 「3방 1냥 손실」 등의 에피소드가 있다. 이들은 일본 서스펜스 소설의 원형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오오카 다다스케 사후부터 강석사에 의한 원형이 만들어지면, 막말부터 메이지에 걸쳐 발전하여, 가부키 등의 소재로 사용되었으며, 현대에도 TV 드라마화되고 있다.
사학적 검증에서는, 수많은 이야기 중 오오카 다다스케가 마치 부교 시대에 실제로 재판한 것은 교호 12년(1727년)의 「시라코야 오쿠마 사건」뿐이라고 지적한다.[20] 현대에 "오오카 재판"으로 전해지는 것의 대부분은, 간토 군다이나 오오카 다다스케의 동료인 북쪽 마을 봉행・나카야마 토키하루의 재정(「나오스케・곤베」[21])이나 오오카 다다스케 사후의 사건도 포함되어 있다.
오사타케 맹은, 구약 성서 열왕기에 있는 솔로몬 왕의 지혜(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며 한 아이를 빼앗는 두 어머니에 대한 조정) 등, 성서 등에 기록된 재판 이야기가 이슬람권을 경유해, 북송의 명판관 포증의 고사(「묶인 지장」과 같은 일화)가 된 후, 에피소드에 번안되어 포함되었다고 주장한다. 에이로쿠 3년(1560년)에, 분고에서 예수회 선교사가 크리스마스에 솔로몬 재판극을 행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기무라 쓰요시는 『비교 문학 신시계』「솔로몬 재판과 오오카 정담」(쇼와 50년(1975년))에서 티베트 전설이나 석존(석가) 전설이 일본 키리시탄의 영향으로 섞여 들어갔다고 한다.
중동계(인도계에서는 석가 전생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빼앗는 어머니 중 한 명은 인육 귀신으로 하고 있다.[22]
일반적으로 오오카는 서민의 아군, 정의의 무사로 이야기에 등장한다. 하지만, 가쿠슈인 대학 명예 교수인 오이시 신자부로는, 오오카에 관한 전기 사료로서 믿을 만한 것은 『오오카 다다스케 일기』가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이 일기는 사생활을 기록한 일기가 아니라, 공인으로서의 오오카 다다스케의 직무 일록이며, 행정 관료로서의 마치 부교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오오카 정담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마치 화재 진압 제도의 창설이나 고이시카와 양생소 설치 등의 사례에 "정치가는 마땅히 이래야 한다"라는 에도 서민의 염원이 가탁되어, "정담"에 결정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4. 에피소드
오오카 다다스케는 독창적이고 현명한 법적 결정으로 여러 이야기에서 전설적인 지위를 얻었으며, 라쿠고(일본의 이야기)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는 "훔쳐간 냄새 사건"이다. 한 여관 주인이 가난한 학생이 자신의 요리 냄새를 훔쳤다고 비난한 사건을 오오카가 심리했다. 동료들은 터무니없는 사건이라며 기각할 것을 권했지만, 오오카는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학생에게 한 손에 있는 돈을 다른 손으로 옮기도록 명령하고, 음식 냄새의 가격은 돈 소리라는 판결을 내렸다.[3]
"속박된 지장보살 사건"에서 오오카는 지역 기모노 제작자로부터 훔쳐간 천의 도둑을 찾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오오카는 나리히라산 덴센지의 지장보살 조각상을 묶어 관리 의무를 태만히 했다는 답변을 받도록 했다. 속박된 조각상이 법정에 도착하자 구경꾼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오오카는 각 구경꾼에게 소란을 피운 것에 대한 벌금으로 작은 천 조각을 부과하라고 명령했다. 구경꾼들이 벌금을 지불했을 때, 피해를 입은 기모노 제작자는 한 구경꾼의 천 조각이 훔쳐간 천과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 도둑이었던 구경꾼은 체포되었고, 오오카는 지장보살상이 의무를 다했다고 하여 석방을 명령했다. 1925년, 조각상은 도쿄 시내에서 외곽의 작은 사찰인 난조인으로 옮겨졌다. 조각상은 여전히 서 있으며, 도둑의 희생자들이 희망을 담아 묶은 밧줄로 감싸여 있다. 그러나 조각상은 200년 이상 묶여 있어서 거의 매끄럽게 닳았다.
에도 정 봉행 시대의 재판과 에도 시정 행정, 지방 어용 등으로 지명도가 높아, 서민들 사이에서 명판관, 인정 넘치는 서민의 아군으로 인식되었다. 동시대부터 후년에 걸쳐 창작 "오오카 정담"으로서 사본이나 강담으로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도쿠가와 덴이치보」, 「무라이 초안」, 「에치고 덴키치」, 「아제쿠라 주시로」, 「고토 한시로」, 「소품점 히코베」, 「담배 가게 키하치」, 「묶인 지장」, 「5관 재판」, 「3방 1냥 손실」 등의 에피소드가 있다. 이들은 일본 서스펜스 소설의 원초적 형태를 나타낸다.
사학적 검증에서는, 오오카가 마치 부교 시대에 실제로 재판한 것은 1727년의 「시라코야 오쿠마 사건」뿐이라는 지적이 있다.[20] 현대에 "오오카 재판"으로 전해지는 것의 대부분은, 간토 군다이나 오오카의 동료인 나카야마 토키하루의 재정(「나오스케・곤베」[21])이나 오오카 사후의 사건도 포함되어 있다.
오사타케 맹은 솔로몬 왕의 지혜, 북송 명판관 포증의 고사(「묶인 지장」과 같은 일화) 등이 에피소드에 번안되어 포함되었다고 주장한다. 기무라 쓰요시는 티베트 전설이나 석존(석가)의 전설이 일본의 키리시탄의 영향으로 섞여 들어갔다고 한다. 중동계(인도계에서는 석가 전생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빼앗는 어머니 중 한 명은 인육 귀신으로 하고 있다.[22]
일반적으로 오오카는 서민의 아군, 정의의 무사로 이야기에 등장한다. 하지만, 오이시 신자부로는 오오카에 관한 전기 사료로서 믿을 만한 것은 『오오카 다다스케 일기』가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이 일기는 행정 관료로서의 마치 부교를 묘사하고 있으며, 오오카 정담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마치 화재 진압 제도의 창설이나 고이시카와 양생소 설치 등의 사례에 "정치가는 마땅히 이래야 한다"라는 에도 서민의 염원이 가탁되어, "정담"에 결정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 다다스케는 치질을 앓고 있어, 치질 악화로 공무를 결석한 적이 있다 (『오오카 다다스케 일기』에서).
- 근무 중에는 항상 수염 뽑기를 사용하며 일했다. 초상화에도 족집게로 수염을 뽑는 모습이 그려진 것이 있다.
-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다다스케에게 "몇 명이나 죽였는가"라고 묻자, 다다스케는 "두 명을 죽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요시무네는 "두 명이란 100분의 1인가, 아니면 1000분의 1인가"라고 물었다. 다다스케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여 처형된 자는 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죽였다고 말씀드린 두 명 중 한 명은 저의 심의(취조)가 너무 엄격했기에, 짓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고 처형된 자이고, 다른 한 명은 사형에 이를 정도의 죄는 아니었는데,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옥사(옥중에서 병사)한 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다다스케는 억울한 누명으로 무고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을 후세까지 후회했다고 한다.[23]
- 『세사견문록』에는 "교호 시대까지는 옥사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라고 적혀 있다. 다다스케가 마치 부교였던 교호 시대에는 미결수를 한 명 옥사시킨 것만으로도 다다스케가 후회할 정도로 옥사자가 적었다고 한다. 『세사견문록』이 저술된 분카 연간은, 에도에서만 옥사자가 매년 천 명을 넘을 정도로 감옥 내 환경은 열악했다.[24]
5. 관련 작품
- 요시카와 에이지 『오오카 에치젠』
- 마츠모토 세이초 『난등 에도 그림자』
- 요시나가 후미 『오오쿠』 (하쿠센샤) ※ 남녀 역전 설정
- 코이케 카즈오 원작・코지마 고우세키 그림 『메마른 채로』
- 사이토 타카오 『구름 도둑 잠페이』
- 토쿠히로 마사야『못코리 한베에』 (슈에이샤)
- 내셔널 극장 오오카 에치젠 (1970년 - 1999년, 2006년, TBS, 출연: 가토 고)
- 명봉행! 오오카 에치젠 (2005년 - 2006년, TV 아사히, 출연: 기타오지 킨야)
- 오오카 에치젠 (2013년 - , NHK BS 프리미엄, 출연: 히가시야마 노리유키 → 다카하시 카츠노리)
- 폭풍을 부르는 장군 (1978년 - 2003년, 2004년, 2008년, TV 아사히, 출연: 요코우치 마사시 → 타무라 료 → 오와다 신야)
- 불꽃의 봉행 오오카 에치젠노카미 (1997년, TV 도쿄, 출연: 이치카와 에비조 → 이치카와 단주로)
- 8대 쇼군 요시무네 (1995년, NHK대하 드라마, 출연: 타키타 사카에)
- 오오쿠 (1968년, 칸사이 TV, 출연: 야스이 쇼지)
- 공주님 수사 수첩 (1972년, 니혼 TV, 출연: 니타니 히데아키)
- 하얀 사자 가면 (1973년, 니혼 TV, 출연: 기요카와 신고)
- 오오쿠 (1983년, 칸사이 TV, 출연: 혼고 코지로)
- 도쿠가와 풍운록 고산케의 야망 (1986년, TV 도쿄, 출연: 야마모토 마나부)
- 걸작 시대극 오오카 정담 (1987년, TV 아사히, 출연: 사이고 테루히코)
- 오오카 정담 (1989년, 후지 텔레비전, 출연: 단바 테츠로)
- 단게 사젠 (1991년 - 1994년, TV 아사히, 출연: 하시즈메 이사오)
- 통쾌한 다이묘 도쿠가와 무네하루 (1996년, TV 도쿄, 출연: 니시오카 토쿠마)
- 단게 사젠 (2004년, 니혼 TV, 출연: 니시다 토시유키)
- 도쿠가와 풍운록 8대 쇼군 요시무네 (2008년, TV 도쿄, 출연: 이시구로 켄)
- 오오쿠 (2023년, NHK드라마 10, 출연: MEGUMI) ※ 남녀 역전 설정
- 오오쿠〈남녀 역전〉 (2010년, 출연: 이타야 유카) ※ 남녀 역전 설정
- 초고속! 산킨코타이 리턴즈 (2016년, 출연: 후루타 아라타)
- 다카하시 루미코의 만화 란마 ½에서 언급됨.
- 카구야 님은 고백받고 싶어(Kaguya-sama: Love Is War)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각색 모두에서 묘사됨.
- 네덜란드 작가 베르투스 아프예스는 오오카를 주인공으로 한 5부작 미스터리 소설 시리즈를 썼다.
-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본학자 베네슬라바 흐르들리치코바는 "판사 오오카의 이야기"라는 책을 출판했다. 1988년 이 책은 체코슬로바키아 텔레비전의 브르노 스튜디오에서 62분 분량의 TV 동화로 각색되었으며, 제목은 판사 오오카의 판결이다. 오오카는 미로슬라프 도누틸이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https://books.google[...]
[2]
서적
The Case of the Inherited Rice Fields
Kodansha International
[3]
웹사이트
Defining Property
http://www.paulgraha[...]
2012
[4]
웹사이트
Judge Ooka in the East and West
http://www.criminale[...]
[5]
뉴스
A boy detective of Old Edo
2004-11-21
[6]
문서
系図纂要
[7]
문서
寛政重修諸家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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系図纂要
[9]
서적
大岡越前守忠相
[10]
웹사이트
小石川養生所初期の医療活動について
http://jsmh.umin.jp/[...]
2020-07-21
[11]
문서
徳川実紀
[12]
문서
"「両替年代記」「元文金銀引替一件」「銀切賃ニ付両替店員処罰」『東京市史稿』産業篇第十四"
[13]
서적
[1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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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大岡忠相、実録 江戸の悪党、江戸の名奉行
吉川弘文館、学研新書、新人物往来社
[21]
문서
殺人犯の直助とは別人の権兵衛だと言い張っていた男を、裁判の最後に「これ直助」と呼び、つい返事をしたところを捕えたというエピソード。
[22]
서적
世界童話大系.第10巻(印度篇)
https://dl.ndl.go.jp[...]
世界童話大系刊行会
[23]
서적
江戸時代の罪と罰
草思社
[24]
서적
江戸時代の罪と罰
草思社
[25]
웹사이트
「超高速!参勤交代 リターンズ」追加キャスト7名、古田新太が大岡越前に
https://natalie.mu/e[...]
映画ナタリー
201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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