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하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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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라하시가는 1612년 아베노 세이메이의 후손인 구라하시 야스요시가 분가하여 시작된 가문이다. 대대로 음양도를 가업으로 삼았으며, 에도 시대에는 150석의 영지를 소유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에 편입되어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1920년 작위를 반납했다. 현재는 데릴사위 제도를 통해 가문이 이어지고 있으며, 현 당주는 구라하시 스미노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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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라하시가 | |
|---|---|
| 가문 정보 | |
| 가문명 | 구라하시가 |
| 가몬 명칭 | (호랑나비) |
| 본성 | 아베씨 쓰치미카도가 서류 |
| 가조 | 구라하시 야스요시 |
| 종별 | 공가(반가) 화족(자작) |
| 출신지 | 야마시로국 |
| 근거지 | 야마시로국 도쿄부 |
2. 역사
게이초 17년(1612년), 아베노 세이메이의 후손인 음양두(종삼위, 비참의) 쓰치미카도 히사나가의 차남 야스요시가 분가하여 '구라하시'(倉橋)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구라하시 가문이 시작되었다.[1] 구라하시라는 가문 명칭은 먼 조상인 아베노 우치노마로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초대 민부쿄 야스요시 이후, 대대로 음양도를 가업으로 삼았으며, 에도 시대의 고쿠다카는 150석이었다.[1] 메이지 유신 이후 10대 당주 야스아키 시대에 화족에 편입되었고, 1884년 7월 8일 야스테루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2]
1920년 12월, 야스마사의 후계가 미성년 딸 미사코[1]뿐이었기 때문에 작위를 반납했다.[2] 야스마사의 사촌형인 야스타카는 작위를 잇지 않았지만, 그 후손들이 데릴사위 상속을 통해 구라하시 가문을 유지하고 있다.
가문의 문장은 쓰치미카도가를 본떠 "아게보쵸 (호랑나비)"이며, 보리사는 "진여당"이다. 에도 시대 때의 거처는 "사카이초미카도가이"였다.[1]
아베노 세이메이의 남계 혈맥은 우다 겐지 아야노코지가[3]의 아들로 구라하시 가문의 양자가 된 아리요시 (1738년 ~ 1784년) 대에 단절되었다. 구라하시 가문의 현재 당주 구라하시 스미노부는 센고쿠 시대 아베씨 적류 당주 쓰치미카도 아리나가부터 세어 4차례 여계를 거친 14대손[4]에 해당한다.
2. 1. 가문의 기원
게이초 17년(1612년), 아베노 세이메이의 후손인 음양두 (종삼위, 비참의) 쓰치미카도 히사나가의 차남 야스요시가 분가하여 '구라하시'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구라하시 가문이 시작되었다.[1]구라하시라는 가문의 명칭은 먼 조상인 아베노 우치노마로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2. 2. 에도 시대
게이초 17년 (1612년), 아베노 세이메이의 후손인 음양두 (종3위 비참의) 쓰치미카도 히사나가의 차남 야스요시가 분가하여 '''구라하시'''(倉橋)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구라하시 가문이 시작되었다.[1] 구라하시는 먼 선조 아베노 우치노마로의 이름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다.초대 민부쿄 야스요시 이후, 대대로 음양도를 가업으로 삼았다.[1] 에도 시대의 고쿠다카는 150석이었다.[1] 10대 당주 민부쿄 야스아키 때 메이지로 바뀌며 화족에 올랐고, 야스테루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20년 12월, 야스마사의 후계가 미성년 딸 미사코[2]뿐이었기 때문에 작위를 반납했다. 야스마사의 사촌형인 야스타카는 작위를 잇지 않았지만, 그 후손들이 데릴사위 상속을 거쳐 구라하시 가문으로 현존하고 있다.
가문의 문장은 쓰치미카도가를 본떠 "아게보쵸 (호랑나비)"이며, 보리사는 "진여당"이다. 에도 시대 때의 거처는 "사카이초미카도가이"였다.[1]
아베노 세이메이의 남계 혈맥은 우다 겐지 아야노코지가[3]의 아들로 구라하시 가문의 양자가 된 아리요시 (1738년 ~ 1784년) 대에 단절되었다. 구라하시 가문의 현재 당주 구라하시 스미노부는 센고쿠 시대 아베씨 적류 당주 쓰치미카도 아리나가부터 세어 4차례 여계를 거친 14대손[4]에 해당한다.
2. 3.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10대 당주 야스아키 시대에 화족에 편입되었고, 1884년 7월 8일 야스테루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2]1920년 12월, 야스마사의 후계가 미성년 딸 미사코[1]뿐이었기 때문에 작위를 반납했다.[2] 야스마사의 사촌형인 야스타카는 작위를 잇지 않았지만, 그 후손들이 데릴사위 상속을 통해 구라하시 가문을 유지하고 있다.

3. 역대 당주
구라하시 가문의 역대 당주는 다음과 같다.
| 대수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1 | 다이키치 | 1599년 - 1670년 | 종2위 |
| 2 | 야스후사(야스즈미) | 1639년 - 1673년 | 종4위하 |
| 3 | 야스사다 | 1668년 - 1748년 | 종2위 |
| 4 | 야스아키 | 1687년 - 1753년 | 종2위 |
| 5 | 야스타카 | 1715년 - 1749년 | 종3위 |
| 6 | 에이큐 | 1736년 - 1751년 | 종5위하, 양자, 오하라 에이아쓰의 아들 |
| 7 | 아리요시 | 1738년 - 1784년 | 종3위, 양자, 아야노코지 도시무네의 아들 |
| 8 | 구라하시 야스에이[5] | 1758년 - 1806년 | 정2위 |
| 9 | 야스유키 | 1779년 - 1858년 | 정2위 |
| 10 | 야스토시 | 1815년 - 1881년 | 정3위 |
| 11 | 야스아키 | 1835년 - 1910년 | 종3위, 자작 |
| 12 | 야스키요 | 1853년 - 1898년 | |
| 13 | 야스마사 | 1876년 - 1919년 | 자작 |
| 14 | (구라하시 미사코) | 1903년 - ? |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령에 따라 구라하시 가문은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야스마사 사후 작위는 반납되었다. 그의 종형인 야스타카의 후손들이 가문을 이어오고 있다.
| 대수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 | 야스타카 | 1874년 - 1947년 | 분가 |
| - | 구라하시 마사요시 | - 1950년 | |
| - | 노부타다 | 1906년 - 1984년 | |
| - | 구라하시 스미노부 | 1936년 - | |
| - | (구라하시 테루유키) | 1972년 - |
3. 1. 주요 당주
게이초 17년 (1612년), 아베노 세이메이의 후예인 음양두 (종3위 비참의) 쓰치미카도 히사나가의 차남 야스요시가 분가하여 '''구라하시'''(倉橋)를 칭한 것이 구라하시가의 시작이었다.[1]초대 민부쿄 야스요시 이후, 대대로 음양도를 가업으로 하였다. 에도 시대의 고쿠다카는 150석이었지만, 10대 당주 민부쿄 야스아키 때 메이지 시대로 바뀌며 화족에 올랐고, 야스테루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20년 12월, 야스마사의 후계가 미성년 딸 미사코만 남았기 때문에 작위를 반납했다.[2] 야스마사의 사촌형인 야스타카는 작위를 잇지 않았지만, 그 후손들이 데릴사위 상속을 거치긴 했지만 구라하시가로써 현존하고 있다.
아베노 세이메이의 남계 혈맥은 우다 겐지 아야노코지가[3]의 아들로 구라하시가의 양자가 된 아리요시 (1738년 ~ 1784년) 대에 단절되었다. 구라하시가의 현재 당주 구라하시 스미노부는 센고쿠 시대의 아베씨 적류 당주 쓰치미카도 아리나가부터 세어 4차례 여계를 거친 14대손[4]에 해당한다.
3. 2. 현재 당주
야스마사의 사촌형인 야스타카는 작위를 잇지 않았지만, 그 후손들이 데릴사위 상속을 거치긴 했지만 구라하시 가문으로써 현존하고 있다.아베노 세이메이의 남계 혈맥은 우다 겐지 아야노코지가의 아들로 구라하시 가문의 양자가 된 아리요시 (寛保|간포일본어 3년 (1738년) ~ 天明|덴메이일본어 4년 (1784년)) 대에 단절되었다. 현재 구라하시 가문의 당주 구라하시 스미노부는 센고쿠 시대 아베씨 적류 당주 쓰치미카도 아리나가부터 세어 4차례 여계를 거친 14대손에 해당한다.
4. 가계도
{| class="wikitable"
|+ 구라하시 가문 가계도
|-
! 범례
|-
|
- 실선은 친자, 점선(세로)은 양자
|-
|
|}
5. 문화적 특징
구라하시 가문은 먼 선조 아베노 우치노마로의 이름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대 민부쿄 야스요시 이후, 대대로 음양도를 가업으로 삼았다. 에도 시대의 고쿠다카는 150석이었으나, 메이지 시대로 바뀌며 10대 당주 민부쿄 야스아키 때 화족에 올랐고, 야스테루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20년 12월, 야스마사의 후계가 미성년 딸 미사코만 남아 작위를 반납했다. 야스마사의 사촌형인 야스타카는 작위를 잇지 않았지만, 그 후손들이 데릴사위 상속을 거쳐 구라하시 가문으로 현존하고 있다.
아베노 세이메이의 남계 혈맥은 우다 겐지 아야노코지가의 아들로 구라하시 가문의 양자가 된 아리요시(1738년 ~ 1784년) 대에 단절되었다. 현재 구라하시 가문의 당주 구라하시 스미노부는 센고쿠 시대 아베씨 적류 당주 쓰치미카도 아리나가부터 세어 4차례 여계를 거친 14대손에 해당한다.
5. 1. 가문의 문장
쓰치미카도가를 본뜬 "아게보쵸 (호랑나비)"를 사용했다.5. 2. 보리사
구라하시 가문의 보리사는 "진여당"이다.5. 3. 거처
에도 시대 구라하시 가문의 거처는 "사카이초미카도가이"였다.6. 한국과의 관계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주어진 요약에 기반하여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원문 소스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참조
[1]
문서
小谷勝之助와 결혼
[2]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上巻
[3]
문서
남계는 후지와라 북가 산조가
[4]
문서
현재의 쿠라하시 가문의 아베 씨 혈맥
[5]
문서
후에 츠치미카도 야스노부의 양자가 되어 츠치미카도 가문을 잇다
[6]
문서
야스요시의 친손, 양자 상속
[7]
문서
타카쿠라 요시아츠의 자
[8]
문서
아야노코지 토시무네의 자
[9]
문서
쿠라하시 야스아키의 친동생, 양자가 되어 습작
[10]
문서
마츠다이라 츠네사부로의 자. 야스타카의 둘째 딸 토요코의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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