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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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처기는 전진교의 5대 장문이자 용문파의 개조로, 원나라 시대에 전진교를 융성시킨 인물이다. 1222년 칭기즈 칸의 초청으로 서역을 여행하여 칭기즈 칸을 만나 불로장생에 대한 질문에 "불멸의 비밀 의학은 없다"고 답했다. 칭기즈 칸은 그에게 신선이라는 칭호를 수여하고 전진교를 보호하는 특혜를 베풀었으며, 이들의 대화는 《현풍경회록》에 기록되었다. 그는 칭기즈 칸의 요청으로 1224년 베이징으로 돌아와 1227년 사망했으며, 그의 원정기는 제자 이지상의 《구장춘 서유기》에 기록되어 있다. 소설 《사조영웅전》 등 문학 작품에도 등장한다.
전진교의 개조 왕중양의 제자이자 북칠진(北七眞) 중 한 명이었던 구처기는 마옥, 담처단, 유처현에 이어 전진교 5대 장문을 지냈으며, 용문파(龍門派)의 개조이기도 하다. 구처기는 원나라 때 전진교를 크게 융성시킨 인물이다.
1222년 징기스칸의 초청으로 제자 이지상 등과 함께 서역으로 여행하여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징기스칸을 만났다. 징기스칸이 불로장생의 비결을 묻자, 구처기는 전진교의 가르침을 설명했다. 징기스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몽골 제국 점령지에서 전진교를 보호하는 특혜를 내렸다.[1]
2. 생애 및 활동
구처기는 1227년 7월 23일 베이징에서 생을 마감했다. 칭기즈 칸의 명에 따라 이전 황실 정원 부지 일부에 도교 사원인 백운사가 세워졌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5]
2. 1. 초기 생애
丘處機|구처기중국어는 등주 서하현 출신으로, 전진교의 개조 왕중양에게서 배웠다.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칠진인'''" 중에서도 으뜸으로 여겨졌다. 전진교의 역사에서 개조 왕중양의 실질적인 후계자로서 교파를 융성하게 이끈 것은 구처기의 공적이다.
2. 2. 칭기즈 칸과의 만남
1222년 칭기즈 칸의 초청으로 구처기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제자 이지상 등과 함께 서역으로 여행을 떠나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칭기즈 칸을 만났다.[5][6] 칭기즈 칸은 불로장수의 비결을 물었으나, 구처기는 전진교의 가르침을 설명하였다. 칭기즈 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구처기에게 몽골 제국 점령지 어디에서나 전진교를 보호하는 특혜를 베풀었다.[8][9][10]
구처기는 칭기즈 칸에게 "현자의 돌"과 불멸의 비밀 의학은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며, 도교 철학과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설명했다.[3] 두 사람은 12번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고,[7] 칭기즈 칸은 그에게 신선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4]
칭기즈 칸은 통역을 통해 구처기에게 "사람들이 텡그리 몽케쿤(Tenggeri Mongekun)이라고 부르는데, 스스로 그렇게 불리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칭하는 것인가"라고 물었고, 구처기는 "스스로 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뿐입니다"라고 답했다. 칭기즈 칸은 칭카이에게 "진인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라고 묻자, 칭카이는 "사람들은 스승을 존경하여 부사, 진인, 신선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고, 칭기즈 칸은 "이제부터는 신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
1218년 여름, 칭기즈 칸의 초청을 받은 구처기는 1221년 4월 켈렌 강 강변에 주둔하고 있던 테무게 옷치긴의 오르도에 도착하여 환대를 받았다. 옷치긴에게서 소와 말 100여 필과 수레 10대를 하사받고 서쪽으로 출발하여, 알타이 산맥, 톈산 산맥 기슭의 비슈발리크, 알마리크를 거쳐 1222년 5월 16일 칭기즈 칸의 오르도에 도착했다. 다음 날인 5월 17일,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힌두쿠시 산맥 북부로 추정되는 곳에서 칭기즈 칸을 배알했다.
구처기는 칭기즈 칸에게 "위생의 도는 있으나, 장생의 약은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전진교의 가르침을 설파했다.[16] 불로불사의 약은 미신이며, 양생의 도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17]
제자 이지상이 정리한 《장춘진인서유기》와 《현풍경회록》은 그 서역 여행 때의 기록으로, 구처기 일행이 거쳐 간 당시의 몽골 고원 및 중앙아시아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2. 3. 몽골 제국 내 활동 및 영향
1222년 징기스칸의 초청을 받아 고령에도 불구하고 제자인 이지상 등과 함께 서역으로 가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징기스칸을 만났다.[5][6] 징기스칸은 구처기를 신선이라 칭하며, 제국 내 모든 종교인들을 관할하게 했다.[4][8][9][10] 불로장생의 비결을 묻는 징기스칸에게 전진교의 가르침을 설명했고, 징기스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몽골 제국 점령지 어디서든 전진교를 보호하는 특혜를 베풀었다.
칭기즈 칸은 "현자의 돌"과 불멸의 비밀 의학에 관심을 갖고 구처기를 초청했다. 구처기는 도교 철학과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설명했고, 불멸의 비밀 의학은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3] 두 사람은 12번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7] 이들의 대화는 ''현풍경회록''에 기록되었다.
1219년 칭기스 칸의 초청을 받고, 1220년 2월 산둥을 출발하여 베이징으로 갔다. 칭기스 칸이 서쪽으로 간 것을 알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1221년 2월, 동부 몽골리아를 횡단하여 케룰렌 상류 부유르 호수 근처 칭기스 칸의 막내 동생 오치긴의 진영(오늘날의 헤를렌-아무르 유역)으로 갔다. 케룰렌을 따라 남서쪽으로 여행, 몽골 중북부 카라코룸 지역을 가로질러 알타이 산맥에 도착, 울리아스타이 근처를 지났다. 알타이를 넘어 비슈발리크를 방문, 톈산 산맥 북쪽을 따라 사이람 호수, 알말리크(이닝 시)와 일리의 계곡으로 이동했다.
발라사군과 슈강을 지나 탈라스와 타슈켄트 지역으로 이동 후, 시르다리야를 건너 사마르칸트에서 몇 달 동안 머물렀다. 테르미트의 철문, 아무다리야를 지나 발흐와 북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힌두쿠시 근처 칭기즈 칸의 진영에 도착했다.
1218년 여름 칙사 류중록을 통해 칭기스 칸의 초청을 받고, 제자들과 함께 서역으로 갔다. 1221년 4월 류수거로서 몽골 본토 켈렌 강변의 테무게 옷치긴 오르도에 이르러 환대받고, 옷치긴에게서 소와 말 100여 필과 수레 10대를 받아 서쪽으로 출발했다. 류중록과 동행하여 몽골 고원에서 알타이 산맥으로 향했고, 8월 중순 울리아스타이 서남쪽 아불한산에서 칭카이의 영접을 받았다. 9월 중순 톈산 산맥 기슭 비슈발리크에 도착, 9월 말부터 10월 초 알마리크에서 타라스 강에 이르렀고, 12월 3일 사마르칸트에 도착하여 야율아해 등의 환대를 받았다. 칭기스 칸은 아프가니스탄 방면에서 전쟁 중이었기에 류중록 등의 진언에 따라 구처기 일행은 봄까지 사마르칸트에 머물렀다. 1222년 4월 중순 칭기스 칸의 지시로 류중록의 수행을 받아 문인 5, 6명과 함께 사마르칸트에서 남하, 케슈(샤흐리섭스)에서 보르추가 이끄는 갑사 1천 명의 호위를 받으며, 5월 16일 칭기스 칸의 오르도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5월 17일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맥 북부로 추정되는 하랍보드(카라 호토)에서 칭기스 칸을 만났다. 칭기스 칸에게 "위생의 도는 있으나, 장생의 약은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전진교의 가르침을 설파했다.
칭기스 칸이 통역을 통해 "사람들이 텡그리 몽케쿤(Tenggeri Mongekun)이라고 부르는데, 스스로 그렇게 불리는 것인가, 사람들이 그렇게 칭하는 것인가"라고 묻자, 구처기는 "스스로 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뿐입니다"라고 답했다. 통역이 옛날 호칭을 묻자, 왕중양에게 배운 4명 중 3명이 세상을 떠나 자신 혼자 남았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답했다. 칭기스 칸이 칭카이에게 "진인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라고 묻자, 칭카이는 "사람들은 스승을 존경하여, 부사, 진인, 신선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고, 칭기스 칸은 "이제부터는 신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고 『장춘진인서유기』에 전해진다.
야율아해·야율초재 등의 공적을 칭찬했다.
제자 이지상이 정리한 《장춘진인서유기》와 《현풍경회록》은 그 서역 여행 때의 기록이고, 장춘진인 일행이 거쳐간 당시의 몽골고원 및 중앙아시아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예니세이 지역에는 몽골 제국 내 다른 지역의 관행처럼 한족 출신 직조공 공동체가 있었다. 사마르칸트와 외몽골 모두 한족 출신 장인이 있었다.[11] 몽골의 중앙아시아 정복 이후, 외국인들이 행정관으로 선택되었다. 무슬림 없이는 관리할 수 없었기에 사마르칸트의 정원과 밭을 한족 및 키탄족과 공동 관리하는 것이 요구 사항으로 제정되었다.[12][13]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후허하오터 방문 등 약간의 우회를 제외하고는 주로 자신의 바깥쪽 경로를 따랐다. 1224년 1월 말까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의 제자 리즈창이 쓴 ''구장춘 서유기''에서 만리장성과 카불, 아랄해와 황해 사이의 자연과 사람에 대한 가장 생생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몽골인과 사마르칸트와 그 주변 지역 사람들, 알말리크-쿨자 근처 일리 계곡에 있는 사마르칸트의 토지와 산물, 중국의 알타이, 톈산, 보그도 울라와 테르미트의 철문과 같은 다양한 거대한 산맥, 봉우리 및 협곡에 대한 설명이다. 예니세이 최상부 계곡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 땅에 대한 언급도 주목할 만하다.
2. 4. 귀환 및 사망
1222년, 징기스칸의 초청을 받은 구처기는 제자 이지상 등과 함께 서역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징기스칸을 만나 불로장생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전진교의 가르침을 설명했다. 징기스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몽골 제국 점령지 어디에서든 전진교를 보호하는 특혜를 베풀었다.[5]
제자 이지상이 정리한 《장춘진인서유기》와 《현풍경회록》은 당시 몽골고원 및 중앙아시아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장춘진인서유기》는 한때 서유기의 원작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1219년, 칭기즈 칸은 장춘(구처기)에게 자신을 방문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5][6] 장춘은 1220년 2월 산둥을 떠나 베이징으로 갔고, 칭기즈 칸이 서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1221년 2월, 장춘은 동부 몽골리아를 횡단하여 케룰렌 상류 부유르 호수 근처 칭기즈 칸의 막내 동생 오치긴의 진영(오늘날의 헤를렌-아무르 유역)으로 갔다. 이후 케룰렌을 따라 남서쪽으로 이동, 몽골 중북부 카라코룸 지역을 지나 알타이 산맥에 도착, 현재의 울리아스타이 근처를 지난 것으로 보인다. 알타이를 넘어 비슈발리크를 방문하고, 톈산 산맥 북쪽을 따라 사이람 호수, 알말리크(이닝 시)와 일리의 계곡으로 이동했다.
발라사군과 슈강을 지나 탈라스와 타슈켄트를 거쳐 시르다리야를 건너 사마르칸트에서 몇 달간 머물렀다. 테르미트의 철문, 아무다리야를 지나 발흐와 북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힌두쿠시 근처 칭기즈 칸의 진영에 도착했다.
칭기즈 칸은 "현자의 돌"과 불멸의 비밀 의학에 대한 관심으로 장춘을 초청했다. 장춘은 도교 철학과 장수 방법을 설명하고, 불멸의 비밀 의학은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3] 두 사람은 12번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7] 칭기즈 칸은 장춘에게 신선이라는 칭호를 주고,[4] 제국 내 모든 종교인을 관할하게 했다.[8][9][10] 이 대화는 《현풍경회록》에 기록되었다.
예니세이 지역에는 몽골 제국 내 다른 지역처럼 한족 직조공 공동체가 있었고, 사마르칸트와 외몽골에는 장춘이 관찰한 한족 장인이 있었다.[11] 몽골의 중앙아시아 정복 후, 외국인이 행정관으로 선택되었다. 무슬림 없이는 관리할 수 없어 사마르칸트의 정원과 밭을 한족 및 키탄족과 공동 관리하는 것이 요구 사항으로 제정되었다.[12][13]
귀국길에 장춘은 후허하오터를 방문하는 등 약간 우회하여, 1224년 1월 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제자 리즈창이 쓴 《구장춘 서유기》에는 만리장성과 카불, 아랄해와 황해 사이의 자연과 사람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담겨 있다.
특히 몽골인과 사마르칸트 주변 사람들, 알말리크-쿨자 근처 일리 계곡의 토지와 산물, 중국의 알타이, 톈산, 보그도 울라와 테르미트의 철문 등 거대한 산맥, 봉우리, 협곡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예니세이 최상부 계곡으로 보이는 땅에 대한 언급도 주목할 만하다.
1218년 여름, 칙사 류중록을 통해 서아시아 원정 중인 칭기스 칸의 초청을 받고 고령에도 제자들을 이끌고 서역으로 갔다. 1221년 4월, 류수거로서 몽골 본토 켈렌 강변에 주둔하던 테무게 옷치긴의 오르도에 도착, 환대받고 소와 말 100여 필, 수레 10대를 받아 칭기스 칸의 행궁이 있는 서쪽으로 출발했다. 칙사 류중록과 동행하여 몽골 고원에서 알타이 산맥으로 향했고, 8월 중순 울리아스타이 서남쪽 아불한산에서 칭카이의 영접을 받았다. 9월 중순 톈산 산맥 기슭 비슈발리크에 도착, 9월 말부터 10월 초 알마리크에서 타라스 강에 이르렀고, 12월 3일 사마르칸트에 도착하여 태사 야율아해 등의 환대를 받았다. 당시 칭기스 칸은 아프가니스탄 방면에서 전투 중이었기에 류중록 등의 진언에 따라 구처기 일행은 봄까지 사마르칸트에 머물렀다. 1222년 4월 중순 칭기스 칸의 면견 지시가 내려와 류중록의 수행을 받아 문인 5, 6명과 함께 사마르칸트에서 남하, 케슈(샤흐리섭스)에서 보르추가 이끄는 갑사 1천 명의 호위를 받으며 5월 16일 칭기스 칸의 오르도에 도착했다. 다음 날인 5월 17일,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맥 북부로 추정되는 하랍보드(카라 호토)에서 칭기스 칸을 알현했다. 불로장생 비결을 묻는 칭기스에게 "위생의 도는 있으나 장생의 약은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전진교 가르침을 설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칭기스 칸이 통역을 통해 "사람들이 텡그리 몽케쿤(Tenggeri Mongekun)이라고 부르는데, 스스로 그렇게 불리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칭하는 것인가"라고 묻자, "스스로 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뿐입니다"라고 답했다. 통역이 다시 옛날 호칭을 묻자, 왕중양에게 배운 4명 중 3명이 세상을 떠나 자신 혼자 남았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른다고 답했다. 칭기스 칸이 칭카이에게 "진인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묻자, 칭카이는 "사람들은 스승을 존경하여 부사, 진인, 신선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고, 칭기스 칸은 "이제부터는 신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고 『장춘진인서유기』에 전해진다.
태사 야율아해·야율초재 등의 공적을 칭찬하기도 했다. 칭기스 칸은 구처기의 노고에 보답하여 몽골 제국 점령지에서 전진교를 보호하는 특허를 내렸다.
귀국 후 장춘은 1227년 7월 23일 사망할 때까지 베이징에서 살았다. 칭기즈 칸의 명령에 따라 이전 황실 정원 부지 일부가 그에게 주어져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도교 백운사가 세워졌다.[5]
3. 저술 및 기록
제자 이지상이 정리한 《장춘진인서유기》와 《현풍경회록》은 구처기의 서역 여행 기록으로, 당시 몽골고원 및 중앙아시아에 대한 귀중한 자료다. 《장춘진인서유기》는 오승은의 《서유기》 원작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1]
구처기는 서역에서 귀국 후 연경(베이징)의 장춘궁(천진관)에서 대중의 신앙을 얻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1]
장춘진인서유기중국어[2]
현풍경회록중국어[2]
4. 평가 및 영향
구처기는 전진교 개조 왕중양의 제자이자 북칠진(北七眞) 중 한 명으로, 왕중양, 마옥, 담처단, 유처현에 이어 전진교 5대 장문이었다. 전진교 용문파(龍門派)의 개조이기도 하다. 원나라 때 전진교를 융성시킨 것은 구처기의 공적이 크다.[16]
1222년, 징기스칸은 서아시아 원정 중 구처기를 초청했다. 구처기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제자 이지상 등과 함께 서역으로 떠나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징기스칸을 만났다. 징기스칸이 불로장생의 비결을 묻자, 구처기는 전진교의 가르침을 설명하며 "위생의 도는 있으나, 장생의 약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16] 이는 불로불사의 약은 미신이며, 양생의 도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17] 징기스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구처기에게 몽골 제국 점령지 어디에서든 전진교를 보호하는 특혜를 베풀었다.[16]
구처기의 제자 이지상이 정리한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 및 《현풍경회록》(玄風慶會錄)은 구처기의 서역 여행 기록이다. 이 책들은 당시 몽골고원 및 중앙아시아에 대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다만, 장춘진인서유기는 한때 오승은의 서유기 원작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16]
구처기는 서역에서 귀국 후 연경(베이징)의 장춘궁(천진관)에서 살면서 대중의 신앙을 얻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16] 등주 서하현 출신인 구처기는 왕중양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칠진인' 중에서도 으뜸으로 여겨졌다. 전진교 역사에서 구처기는 왕중양의 실질적인 후계자로서 교파를 융성하게 이끌었다.[16]
1218년 여름, 구처기는 칙사 류중록을 통해 서아시아 원정 중인 칭기스 칸의 초청을 받았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함께 서역으로 향했다. 1221년 4월, 몽골 본토 켈렌 강변에 주둔하던 테무게 옷치긴의 오르도에 도착하여 환대를 받고, 옷치긴에게서 소와 말 100여 필, 수레 10대를 받아 칭기스 칸의 행궁으로 출발했다. 류중록과 동행하여 몽골 고원에서 알타이 산맥으로 향했고, 8월 중순 울리아스타이 서남쪽 아불한산에서 칭카이의 영접을 받았다. 9월 중순에는 톈산 산맥 기슭의 비슈발리크에 도착했고, 9월 말부터 10월 초에는 알마리크에서 타라스 강에 이르렀다. 12월 3일에는 사마르칸트에 도착하여 태사 야율아해 등의 환대를 받았다. 칭기스 칸이 아프가니스탄 방면에서 전투 중이었기 때문에, 구처기 일행은 류중록 등의 제안에 따라 봄까지 사마르칸트에 머물렀다. 1222년 4월 중순, 칭기스 칸의 지시로 류중록의 수행을 받으며 문인 5, 6명과 함께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이동, 케슈(샤흐리섭스)에서 보르추가 이끄는 갑사 1천 명의 호위를 받으며 5월 16일 칭기스 칸의 오르도에 도착했다. 다음 날인 5월 17일,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힌두쿠시 산맥 북부로 추정되는 하랍보드(카라 호토)에서 칭기스 칸을 만났다.[16]
칭기스 칸은 통역을 통해 구처기에게 "사람들이 텡그리 몽케쿤(Tenggeri Mongekun)이라고 부르는데, 스스로 그렇게 불리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칭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구처기는 "스스로 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뿐입니다"라고 답했다. 통역이 다시, 옛날에는 어떻게 불렸었는지 묻자, 왕중양에게 배운 4명 중 3명이 세상을 떠나 자신 혼자 남았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답했다. 칭기스 칸이 칭카이에게 "진인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라고 묻자, 칭카이는 "사람들은 스승을 존경하여, 부사, 진인, 신선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고, 칭기스 칸은 "이제부터는 신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고 『장춘진인서유기』는 전한다.[16]
또한 구처기는 태사 야율아해·야율초재 등의 공적을 칭찬했다.[16]
5. 문학 작품에서의 묘사
김용의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에서 구처기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며 양강의 사부로 묘사된다.[1] 김용의 작품에서 그는 실제 인물과는 매우 다르게 묘사되는데, 종교가 설파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싸움과 경쟁을 즐기는 '고집불통 도사'로 묘사된다.[1] 그의 행동은 첫 번째 이야기의 두 주요 남성 등장인물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1]
구처기는 궈위롱의 2018년 영화 장삼풍에 관한 영화 『장삼풍: 무적 영웅』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1]
에스토니아 작가 아르보 발톤은 구처기가 칭기즈 칸을 만나기 위한 여정과 그들의 만남을 그린 소설 『무한의 반대편으로 가는 여정』(Tee lõpmatuse teise otsa, 1978)을 썼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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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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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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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Seven 'All True' Greats 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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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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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Mediæval Researches from Eastern Asiatic Sources
https://depts.washin[...]
Barnes & No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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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Sino-Khitan Administration in Mongol Bukhara
Harrassowitz Verlag
1979
[15]
문서
中国では、その姓を「丘」ではなく「邱」姓として使用している史書文献が多い。それは、清朝が儒教の祖・孔子に対して帝号を追贈した際に、避諱のための文字として、孔子の諱の「丘」を使用禁止として「邱」に換置したことが要因である。本来の姓は「丘」である。
[16]
문서
この場面は井上靖の小説『蒼き狼 (小説)|蒼き狼』にも出ている。
[17]
문서
この名言は貝原益軒の『養生訓』でも引用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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