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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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율초재는 금나라 시대에 태어나 몽골 제국에 등용된 인물이다. 칭기즈 칸에게 발탁되어 수행하며 점성술사로 활동했고, 오고타이 칸 즉위 후 중서령에 임명되어 몽골 제국의 행정 시스템 구축에 기여했다. 그는 중국식 행정 제도를 도입하고 유교 문화를 장려했으며, 문화·교육의 진흥을 주장했다. 긍정적 평가와 더불어 그의 업적에 대한 과장 및 실제 역할에 대한 제한적인 평가가 존재하며, 최근 연구에서는 그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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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나라의 정치인 - 원호문
원호문은 금나라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의 시인이자 문학가로, 금나라 멸망 후 은둔하며 금나라 역사 편찬에 힘썼고, 그의 작품은 금나라에 대한 충절과 민중의 고통을 반영하며 동아시아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야율초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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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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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야율초재 |
출생일 | 1190년 7월 24일 |
출생지 | 옌징, 금나라 |
사망일 | 1244년 6월 20일 (53세) |
사망 장소 | 카라코룸, 몽골 제국 |
성 | 야율(耶律) |
이름 | 초재(楚材) |
자 | 진경(晉卿) |
몽골어 이름 | 우르투 사칼투 |
또 다른 몽골어 이름 | 오투 사하리 |
시호 | 광녕왕(廣寧王), 문정(文正) |
아버지 | 야율 뤼(耶律履) |
어머니 | 양씨(楊氏) 부인 |
자녀 | 야율 타오(耶律鑄) |
2. 생애
야율초재는 금나라 베이징 근처에서 태어난 유학자이자,[2] 칭기즈 칸의 수석 고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불교 경전에 정통했고 도교 수행자이기도 했다. 야율초재의 아버지 야율로는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이 이끄는 금나라에서 벼슬을 지냈다. 1211년 칭기즈 칸 휘하의 몽골 연합군이 금나라를 상대로 정복 전쟁을 시작하자 여진족과 거란족 반란군이 몽골에 합세하여 금나라에 맞서 싸웠고, 야율초재는 28세였던 1218년에 칭기즈 칸의 행정부에 합류했다.
거란족과 몽골, 남송은 금나라라는 공동의 적을 가졌기에 연합했다. 칭기즈 칸이 야율초재를 처음 만났을 때 "요나라와 금나라는 대대로 원수였다. 내가 너를 위해 복수해 주겠다."라고 말하자, 야율초재는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금나라를 존경하며 섬겼습니다. 신하로서, 아들로서 어찌 임금과 아버지를 원수로 여기는 불충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몽골인은 이 솔직한 대답뿐만 아니라 야율초재의 외모(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을 가진 매우 키가 큰 남자였다)와 낭랑한 목소리에도 감명받았다고 전해진다. 칭기즈 칸은 그에게 "우르투 사칼"(긴 수염)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자신의 수행원으로 삼아 고문으로 삼았다. 야율초재는 글쓰기에 능숙하고 다른 정착 사회의 법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에 유용했다.[3]
야율초재는 정복한 사람들을 학살하기보다는 세금을 부과하도록 몽골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오고타이 칸이 그를 조롱하며 "또 백성을 위해 울려는 거요?"라고 묻자, 야율초재는 제국은 말 위에서 정복할 수 있지만 말 위에서 통치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동료 유학자들을 몽골 통치자들의 처벌과 학대로부터 구했으며,[4] 몽골 왕자들의 관료 및 가정교사로 관직을 얻도록 도왔다.[5]
화북이 몽골에 항복하는 동안 야율초재는 문무 분리, 다양한 세금 및 부과금 도입 등 여러 행정 개혁을 시행했다. 몽골군이 여진족 금나라의 남쪽 수도 개봉을 정복하려다 거센 저항에 직면하자 일부 몽골 지휘관들은 개봉을 완전히 파괴하고 모든 주민을 죽일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야율초재는 칭기즈 칸을 설득하여 사람들을 다 죽여 부를 축적하는 대신, 그들을 다스리고 세금을 징수하며 그들의 뛰어난 재능을 활용하도록 했다.[6]
야율초재는 키가 6피트 8인치였고 허리까지 오는 수염을 가졌다.[7] 그는 쿤밍 호 근처에 묻혔으며, 그의 기념 사당은 1966년 문화 대혁명의 일환으로 공산주의 홍위병이 원명원을 약탈하는 동안 파괴될 때까지 존속했다.[8] 야율초재는 거란어를 할 수 있고 거란 대자와 소자를 읽고 쓸 수 있었던 마지막 기록된 인물이었다.[9]
2. 1. 어린 시절
야율초재는 금의 수도 중도(지금의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옛 요(거란) 황족의 후예였으나, 대대로 중국 문화에 친숙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야율복(耶律履)은 금나라에서 상서우승(尚書右丞)이라는 고위 관직을 지낸 인물로, 야율초재는 그의 셋째 아들이었다. 야율초재는 세 살 때 아버지가 61세로 사망하여, 한족 출신인 어머니 양씨(楊氏)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학문을 강조하며 야율초재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사람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짐승과 같다며 학문을 권했다고 한다. 이복형 야율변재(耶律弁才)와 야율선재(耶律善才)는 야율초재와 20살 넘게 차이가 났으며, 그는 생모와 함께 형들에게서 양육받았다.2. 2. 몽골 제국에 등용
1214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중도(지금의 베이징)를 함락했을 때, 야율초재는 포로로 잡혔다.[2] 그러나 그는 명문가 출신으로 키가 크고 수염이 길었으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또한 중국의 천문학과 점성술에 능통하여 칭기즈 칸의 눈에 띄었다.[3] 칭기즈 칸은 그를 중국어 담당 서기관(비치크치)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측근으로 두었다.[2]1219년부터 시작된 몽골 제국의 중앙아시아 원정에 야율초재는 칭기즈 칸의 본대를 수행하며 점성술사로 활동했다.[22] 그는 서역에서 약 6년간 머무르며 각 지역의 지리, 산물, 경험 등을 기록하고 시를 지어 《서유록》을 남겼다.[22]
칭기즈 칸이 사망한 후, 후계자 문제를 논의하는 쿠릴타이가 열렸다. 야율초재는 칭기즈 칸의 유지를 받들어 오고타이를 옹립할 것을 주장하여, 오고타이 즉위에 큰 공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23] 그러나 몽골 귀족이 아니었던 야율초재가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발언권을 행사하는 것은 무리였다는 의견도 있으며, 이 일화는 중국 측 사료에만 등장하여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24]
2. 3. 몽골 제국의 재상
우구데이 칸 즉위 후, 야율초재는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어 몽골 제국의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2] 그는 중국식 행정 제도를 도입하여 호적을 정비하고 세금 제도를 개혁하여 안정적인 재정 수입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화북 지역을 유목지로 만들자는 주장에 반대하며 농경지를 보존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다.[3] 또한 유학자들을 보호하고 유교 문화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쳐 몽골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4][5]야율초재는 몽골군이 금나라의 수도 변경을 함락시켰을 때 항복하지 않은 백성을 모두 학살하자는 주장에 반대했다. 그는 문화·교육의 진흥과 유학의 채택을 주장했으며, 그의 노력으로 몽골 제국은 정주민으로부터 안정적인 세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6]
1234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뒤, 야율초재는 중국식으로 전 영토를 칸의 직할령으로 삼기 위해 몽골 귀족에게 정복지를 나눠주는 것에 반대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유학을 가업으로 하는 집안을 '유호(儒戸)'로 지정하여 세금을 감면하고 유교 학문과 제사를 장려하여 실무 관료층을 확보했다. 또한 공자의 자손을 보호하는 정책을 건의하여 시행했다.
하지만 우구데이 칸 말년에 서아시아식 인두세 제도를 주장하는 무슬림 재무 관료들이 대두하면서, 중국식 통치 시스템을 유지하려던 야율초재와 대립했다. 몽골인들은 더 많은 수입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서아시아 관료들을 중용했고, 야율초재는 점차 신임을 잃었다. 1241년 우구데이 칸이 사망한 후 야율초재는 거의 발언권을 잃었고, 3년 뒤 실의 속에 사망했다.
2. 4. 말년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자, 야율초재는 거의 발언권을 잃었고, 실의에 빠져 살다 3년 뒤에 숨을 거두었다.[53]야율초재는 청빈을 미덕으로 여겼으며, 유산으로는 거문고와 책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시 짓는 것을 좋아하여 《잠연거사집》을 남겼다.
장남 야율현은 양씨(梁氏) 소생으로 서른 전후로 요절하였고, 막내아들 야율주는 정씨(鄭氏, 소씨蘇氏라는 설도 있다) 소생으로 야율초재의 뒤를 이었다. 훗날 야율주는 적자 야율희량과 함께 쿠빌라이 칸을 섬겨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으로까지 승진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야율초재 역시 재평가되어 태사(太師), 상주국(上柱國)으로 추증되고 광녕왕(廣寧王)으로 추봉되었으며,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평가
야율초재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혼재되어 있으며, 그의 업적과 역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야율초재는 몽골 제국 초기에 중국 문인 관료 출신으로 몽골 제국에 들어가 중국 통치의 실무를 담당한 이력 덕분에 중국과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54] 그러나 칭기스 칸의 최측근 참모였다거나, 우구데이 칸 시대에 대칸을 보좌하며 몽골 제국의 확대를 이끈 명재상이었다는 기존의 평가는 여러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일 칸국 중심의 페르시아어 역사서에는 야율초재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동아시아의 한문 사료에만 등장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야율초재 스스로 "나는 서기일 뿐 군사나 국가의 중요한 의논에는 참여할 수 없다"라고 인정한 점, 중서령이라는 직책이 실제로는 제한적인 권한만을 가졌다는 점 등은 기존의 평가를 재고하게 한다.
3. 1. 긍정적 평가
야율초재는 몽골 제국 초기에 국가 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 문인 관료 출신으로 몽골 제국에 들어가 중국 통치의 실무를 담당한 이력 덕분에 중국과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54] 그는 몽골 제국의 통치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유교 문화를 보호하고 학문을 장려하여 몽골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야율초재는 학살을 중단시키고 약탈을 방지하는 등 인도적인 정책을 펼쳤다.[50] 피폐해진 중국을 몽골식 파괴로부터 지켜냈으며, 약탈 대신 세금 수취에 기반한 재정 제도를 정비하여 수탈을 막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업적은 원나라 성립의 기반이 되었고, 국가 성장에 크게 공헌하여 몽골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3. 2. 부정적 평가
야율초재는 중국과 일본에서 예로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이는 몽골 제국 초기, 아직 국가 체제가 정비되지 않은 유목민 연합 정권이었던 몽골 제국에 중국 문인 관료를 대표하여 출사, 중국 통치의 실무 담당자로 활동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그러나 야율초재가 칭기즈 칸의 가장 신뢰받는 브레인이었다거나, 오고타이 칸 시대에 대칸을 보좌하고 몽골 제국의 확대를 지탱한 명재상이었다는 시각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이러한 시각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반론은 칭기즈 칸의 중앙아시아 정복으로 시작되는 몽골 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포괄적인 역사서인 알라웃딘 아타 말리크 주바이니의 『세계 정복자의 역사』나 라시드 앗딘의 『집사』, 와사프의 저작 등 주로 일 칸국을 중심으로 한 이란 지역 역사가들이 쓴 페르시아어 역사서에는 야율초재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동아시아의 중국(한문) 사료에만 그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또한, 종래에는 야율초재가 칭기스 칸의 중앙아시아 원정에 수행하여 여러 가지 조언을 했기 때문에 칭기스 칸의 참모로서 활약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 자체가 야율초재를 높이 평가하는 『원사』 「야율초재전」에서도 야율초재가 칭기스 칸에게 천문·예언 외의 일을 했다는 것은 전하고 있지 않으며, 『원사』 이외의 중국 사료에서도 서기·통역 외의 업적이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야율초재 자신도 "나는 서기일 뿐 군국(軍國)의 의논에는 참여할 수 없다"라고 인정한 적도 있다.
야율초재를 몽골 제국의 재상으로 보는 것은 오고타이 정권기의 야율초재의 중국어 직함이 중서령(중서성의 장관)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서령은 당 이래 최고위 재상직으로, 몽골 제국에서도 훗날 쿠빌라이 시대에 황태자 친킴(진금)이 중서령에 취임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권의 한화(漢化)가 더 진척되기 시작한 쿠빌라이 칸의 시대와는 달리, 오고타이 칸의 시대에는 중서성은 궁정에 딸린 서기(비치크치)의 문서 행정 처리 기관 정도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고, 그 장관인 중서령이라고 한들 그 정도로까지 중요한 직책도 아니었다. 게다가 남송에서 몽골 제국으로 보내진 사절들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야율초재 등 한문 담당 서기가 작성한 칙령도 위구르어 담당 서기였던 케레이트부 출신의 진해(친하이)가 수결하지 않으면 발효되지 않았다는 점도 분명히 밝혀져 있다.
따라서 중서령 야율초재는 실제로는 몽골 제국의 북중국(옛 금의 영토) 방면의 문서 행정을 맡은 중국어 담당 서기의 리더였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당시 북중국에서는 금 왕조 멸망 이후 혼란을 타고 대두하여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들게 된 중국인 군벌(한인 세후)들이 재지 권력을 쥐고 있었고, 또한 몽골 귀족들이 그들의 상급 영주로서 군림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서 야율초재의 권한은 매우 한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일본의 몽골사 학자인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그의 저서 『야율초재와 그의 시대』(1996년)에서 야율초재에 관한 비문이나 야율초재 자신이 써서 남긴 문장들을 분석해, 야율초재가 재상으로서 중국인들로부터 상찬받았던 것은 야율초재 자신이 그러한 허영을 즐기는 소인배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야율초재의 인격마저도 부정하는 논평을 남겼다.
한편, 중국계 일본인 천순신의 소설 『야율초재』(1994년)의 후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용한 자료는 초재의 저작을 비롯하여 모두 한문 문헌이다. 몽골사는 한문뿐 아니라 페르시아 문헌도 참조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주베이니나 라시드 등의 페르시아 문헌에는 야율초재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개중에는 그는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문(詩文)을 읽어도, 예를 들어 아들인 수가 15세가 되었을 때에 준 시에 「송구하게도 그 지위가 인신(人臣)의 지극한 자리에 올라」라고 하고 있듯이, 그가 몽골 정권의 중추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생각건대 그의 노력은 유불(儒佛)에 뿌리를 둔 문명과 인명을 대파괴로부터 지켜냈다는 점에 집중되어 있고, 전쟁을 잘 한 것도 아니고 세수 성적을 낸 것도 아니다. 이슬람 사가의 입장에서 초재에는 딱히 드러낼 만한 업적이 없었던 것이다."[50]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폐한 중국을 몽골식의 파괴로부터 지켜낸 일이나 약탈적인 수법을 세금 수입의 수단으로 해서 몽골 국가에 세금 수취에 의한 재정 제도를 정비하고 수탈을 극력 막았던 것은 민족 경제뿐 아니라 원(元)이라는 왕조의 성립 기반이 되어 국가의 성장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점은 틀림 없으며, 몽골 제국의 역사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야율초재의 사적을 전하는 전기 사료 중 잘 알려진 것은 (1) 송자정이 지은 "중서령 야율공 신도비", (2) 소천각이 편찬한 『국조명신사략』에 수록된 "중서 야율문정왕" 조, (3) 『원사』 권146 야율초재전의 세 가지이다[25]。하지만 (2)와 (3)은 (1)을 바탕으로 후대에 편찬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1) "중서령 야율공 신도비"가 야율초재의 생애를 아는 데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다[26]。그러나 최근 몽골사 연구자인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엄밀한 사료 비판을 통해 "중서령 야율공 신도비"가 가진 사료로서의 문제점을 밝히고 있다[27]。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중서령 야율공 신도비"의 문제점으로 다음 두가지를 지적한다.
- 첫째, 저술자로 알려진 송자정은 "중서령 야율공 신도비"를 쓸 당시 상당히 고령이었고, 저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에, 이 글의 원래 기술자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점[28]。
- 둘째, "중서령 야율공 신도비"는 초재의 매장으로부터 7년 후인 1278년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째서 이런 어중간한 시기에 작성되었는가 하는 점[31]。
이러한 배경 하에 작성된 "중서령 야율공 신도비"는 지나치게 야율초재를 칭찬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업적을 표절하거나, 때로는 초재 자신이 기록한 글과 모순되면서까지 초재를 높이 평가한다. 다음은 현재 연구자에 의해 밝혀진 "중서령 야율공 신도비"의 문제점을 정리한 표이다.
"중서령 야율공 신도비"에 기록된 초재의 사적 | 연월 | 문제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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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의 아들로서의 특별 대우를 감히 거절하고, 과거를 수석으로 합격했다. | 1200년대 후반 | 실제로는 최종 시험인 전시에만 응시했으며, 특별 대우에는 변함이 없었다[38]。 |
중앙아시아 원정 중, 이슬람교도가 예측하지 못한 월식을 멋지게 맞혔다. | 1220년대 초반 | 실제로 월식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한 것은 초재였으며, 이 경험을 통해 시차의 존재를 알고 작성한 것이 경오원력이라고 초재 스스로 기록하고 있다[39]。 |
"동인도국의 철문관"에 이른 원정군이 "각단"과 만났기 때문에, 이를 이유로 원정을 중단하고 귀환하도록 초재가 진언했고, 칭기스 칸은 이를 따랐다. | 1221년 | 원정군이 이른 곳은 "서인도"이고 "철문관"은 중앙아시아의 지명이므로, 지리가 완전히 오류이다[40]。 |
칭기스 칸 사후, 연경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던 강도를 단속했다. | 1228년 | 실제로는 후신부의 타가차르가 툴루이의 명을 받아 행한 사적을 표절한 것이다[42]。 |
칭기스 칸의 후계자를 오고타이로 빨리 결정하도록 툴루이를 설득했다. | 1229년 | 유목 국가의 통념상, 황족 이외의 자가 황위 계승에 관여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43]。 |
오고타이의 형 차가타이에게 즉위식에서 가장 먼저 배례하도록 요구했고, 이로 인해 즉위식은 무사히 끝났다. | 1229년 | 『세계정복자사』는 전혀 다른 즉위식의 흐름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으며, 몽골 제국의 국체를 감안할 때 『세계정복자사』의 기술이 더 정확하다고 여겨진다[44]。 |
오고타이로부터 중서성의 인장을 받아 중서령(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 1231년 | 초재는 자서에서 "중서령"이라고 칭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사실 재상으로서의 입장에 있지도 않았다[45]。 |
금나라 수도 개봉이 포위되자, 공자의 후손인 공원조를 비롯한 문인들을 보호했다. | 1232년 | 개봉 포위 중에 공원조 등 문인들을 넘겨달라고 몽골 측에서 금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사실이나, 결국 공원조 등은 개봉 함락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47]。 |
개봉을 함락시킨 수부타이가 성민을 몰살할 것을 요구했지만, 초재가 오고타이를 설득하여 이를 중단시켰다. | 1233년 | 실제로는 오고타이의 의사를 맡았던 정경현의 사적을 표절한 것이다[49]。 |
3. 3. 현대적 재조명
야율초재는 중국과 일본에서 오랫동안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이는 몽골 제국 초기에 국가 체제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유목민 연합 정권에서, 중국 문인 관료를 대표하여 몽골 제국을 섬기며 중국 통치의 실무를 담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그러나 야율초재가 칭기즈 칸의 가장 신뢰받는 책사였다거나, 오고타이 시대에 대칸을 보좌하며 몽골 제국의 확대를 이끈 재상이었다는 প্রচলিত의 평가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된다. 칭기즈 칸의 중앙아시아 정복부터 시작되는 몽골 제국 역사를 기록한 알라웃딘 아타 말리크 주바이니의 『세계정복자의 역사』, 라시드 앗딘의 『집사』 등 일 칸국 중심의 이란 지역 역사가들이 쓴 페르시아어 역사서에는 야율초재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야율초재에 대한 기록은 동아시아의 중국 한문 사료에만 나타난다.
또한, 야율초재가 칭기즈 칸의 중앙아시아 원정에 동행하여 여러 조언을 했다는 점에서 칭기즈 칸의 참모로 활약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야율초재를 높이 평가하는 『원사』 「야율초재전」에서조차, 야율초재가 칭기즈 칸에게 천문과 예언 외의 다른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원사』 이외의 중국 사료에서도 야율초재가 서기나 통역 외에 다른 업적을 남겼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야율초재 자신도 "나는 서기일 뿐 군사나 국가의 중요한 의논에는 참여할 수 없다"라고 인정한 바 있다.
야율초재를 몽골 제국의 재상으로 보는 시각은, 오고타이 정권 시기 야율초재의 중국식 직함이 중서령(중서성의 장관)으로 기록된 데에서 비롯된다. 중서령은 당나라 이래 최고위 재상직이었고, 몽골 제국에서도 훗날 쿠빌라이 칸 시대에 황태자 친킴이 중서령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쿠빌라이 시대와 달리 오고타이 시대의 중서성은 궁정에 딸린 서기(비치크치)의 문서 행정 처리 기관 정도의 역할에 불과했고, 중서령이라는 직책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남송에서 몽골 제국으로 파견된 사절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야율초재 등 한문 담당 서기가 작성한 칙령도 위구르어 담당 서기였던 케레이트족 출신 친카이가 수결해야 비로소 효력이 발생했다.
따라서 중서령 야율초재는 실제로는 몽골 제국의 북중국(옛 금나라 영토) 방면의 문서 행정을 맡은 중국어 담당 서기의 리더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중국은 금나라 멸망 이후 혼란을 틈타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중국인 군벌 (한인세후)들이 재지 권력을 쥐고 있었고, 몽골 귀족들이 그들의 상급 영주로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율초재의 권한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일본의 몽골사 학자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저서 『야율초재와 그 시대』(1996년)에서 야율초재에 관한 비문과 야율초재 자신이 남긴 문장들을 분석하여, 야율초재가 재상으로서 중국인들에게 칭송받았던 것은 야율초재 자신이 그러한 허영을 즐기는 소인배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야율초재의 인격마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중국계 일본인 작가 천순신은 소설 『야율초재』(1994년)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작품에서 사용한 자료는 야율초재의 저작을 비롯하여 모두 한문 문헌이다. 몽골사는 한문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문헌도 참고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주베이니나 라시드 등 페르시아 문헌에는 야율초재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그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문을 읽어보면, 예를 들어 아들 주가 15세가 되었을 때 준 시에 '송구하게도 그 지위가 인신(人臣)의 지극한 자리에 올랐다'라고 한 것처럼, 그가 몽골 정권의 중추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생각건대 그의 노력은 유교와 불교에 뿌리를 둔 문명과 인명을 대파괴로부터 지켜냈다는 점에 집중되어 있고, 전쟁을 잘 한 것도 아니고 세수 성적을 낸 것도 아니다. 이슬람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야율초재에게는 특별히 드러낼 만한 업적이 없었던 것이다."[50]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율초재가 피폐해진 중국을 몽골식 파괴로부터 지켜낸 일이나, 약탈적인 방식을 세금 수입원으로 삼던 몽골 국가에 조세 제도를 정비하여 가혹한 수탈을 막았던 점은, 중국 백성들을 구제했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의 성립 기반이 되어 국가 성장에 크게 공헌한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야율초재는 몽골 제국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4. 야율초재가 등장한 작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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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氏とする説も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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