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장군총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군총은 만주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이다. 한국에서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의 묘로 비정하고 있으며, 일본 학자들은 광개토대왕의 능묘로 보기도 한다. 중국 학계에서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2004년 7월,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위원회에서 '고구려 전기의 도읍과 고분군'으로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적석총 - 태왕릉
  • 적석총 - 쿠닌칸하우타
  • 고구려의 왕릉 - 강서대묘
    강서대묘는 널방에 사신도 등 벽화가 그려진 원형 분구 형태의 고구려 고분으로, 화강암 널방과 모줄임천장 구조, 철선묘법의 사신도 벽화가 특징이며 7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고구려의 왕릉 - 태왕릉
  • 퉁화시의 건축물 -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는 414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고구려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하여 고구려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 퉁화시의 건축물 - 국내성
    국내성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로,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위치하며, 유리왕 때 수도로 정해져 광개토대왕 시기 영토 확장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주요 도시였고,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항복하면서 함락되었다.
장군총
개요
장군총 남쪽
장군총 남쪽
명칭장군총
로마자 표기Janggunchong
중국어 표기長寿王陵 (Chángshòu wáng líng)
한국어 표기장군총 (장군 무덤)
위치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
상세 정보
유형방단계단식 적석총
규모한 변 31.58-33m, 높이 12.5m
축조 시기5세기
추정 피장자장수왕
역사적 가치
세계 유산 등록2004년, 고구려 전기 수도와 고분군의 일부로 등재
특징고구려의 대표적인 적석총 양식

2. 구조

장군총은 고구려 전기에 만들어진 대형 방단 계단식 적석총이다. 바닥면은 한 변이 약 32m인 정방형이며, 높이는 12.5m이다. 정교하게 가공된 화강암으로 여러 층의 방형 단을 쌓았고, 분구 위쪽에서는 기와와 전이 출토되어 상부에 별도 시설이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매장 시설은 횡혈식 석실이며, 중국 묘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도굴로 인해 훼손되었다. 분묘 주변에는 강돌이 깔려 있고 북쪽에 배총이 있으나, 배총 역시 도굴과 파괴를 겪었다.[4][5][6][7][8][9]

2. 1. 외형

장군총은 지안 교외의 룽산이라는 고지대에 위치하며, 유적에서 압록강과 지안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4]

평면 사각형으로, 돌을 쌓아 만든 대형의 방단 계단식 적석총이다.[5][6] 바닥면은 한 변이 약 32m의 정방형이며, 높이는 12.5m이다. 고구려 전기의 5세기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에는 한 변이 약 66m인 태왕릉 등과 같은 적석총이 있다.[4][5]

화강암을 정교하게 가공하여 만든 방형 단을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린 형태이며, 첫 번째 단의 각 변에는 비교적 큰 판석 형태의 자연석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5] 분구 위쪽에서 기와와 전이 출토되었으며, 원래는 분묘의 상부에 그것들을 사용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5] 매장 시설은 다듬은 돌로 만든 횡혈식 석실로, 주축에 평행하게 관대가 2기 설치되어 있었다.[5] 석실은 장군총 이후 거석화·정형화의 경향을 보인다.[7] 횡혈식 석실의 도입은 중국 묘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5][8][9] 유물은 도굴되어 부장품은 훼손되었다.[4]

분묘 주변에는 강돌이 깔려 있으며, 그 북쪽에 배총이 있다.[4][5] 배총은 과거에 5기가 일렬로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기뿐이다.[4] 현재 상태로는 아랫변의 길이가 9.2m, 계단의 높이가 1.9m에 불과하지만, 이것 또한 도굴과 파괴를 겪었다.[4] 배총은 이른바 고인돌이 계단 상부에 놓인 형태를 나타낸다.[4]

2. 2. 내부 구조

장군총은 평면 사각형으로, 돌을 쌓아 만든 대형 방단 계단식 적석총이다.[5][6] 바닥면은 한 변이 약 32m인 정방형이며, 높이는 12.5m이다. 화강암을 정교하게 가공하여 만든 방형 단을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린 형태이며, 첫 번째 단의 각 변에는 비교적 큰 판석 형태의 자연석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5]

분구 위쪽에서 기와와 전이 출토되었으며, 원래는 분묘의 상부에 그것들을 사용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5] 매장 시설은 다듬은 돌로 만든 횡혈식 석실로, 주축에 평행하게 관대가 2기 설치되어 있었다.[5] 석실은 장군총 이후 거석화·정형화 경향을 보인다.[7] 횡혈식 석실 도입은 중국 묘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5][8][9]

2. 3. 부속 시설

분묘의 주변에는 강돌이 깔려 있으며, 그 북쪽에 배총이 있다.[4][5] 배총은 과거 5기가 일렬로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기뿐이다.[4] 현 상태로는 아랫변의 길이가 9.2m, 계단의 높이가 1.9m에 불과하지만, 이 역시 도굴과 파괴를 겪었다.[4] 배총은 이른바 고인돌이 계단 상부에 놓인 형태를 나타낸다.[4]

3. 피장자 논쟁

장군총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이 있다. 한국에서는 장군총을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재위: 413년 - 491년)의 묘로 보고 있으나[10], 일본 및 중국 학계에서는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일본 학계에서는 야스 토요노부의 연구 등을 바탕으로 장군총을 광개토대왕(재위: 391년 - 412년)의 능묘로 보기도 한다[10]。 반면 중국 학계에서는 태왕릉에서 "광개토왕" 명문이 있는 동령이 출토된 것을 근거로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10]

3. 1. 장수왕릉설 (한국)

한국에서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재위: 413년 - 491년)의 묘로 비정하고 있다. 일본의 나가시마 테루오미, 다무라 쇼이치, 아즈마 우시오 등의 연구자들은, 야스 토요노부에 의한 태왕릉, 장군총 양 묘에서 출토된 기와와 평양에서 출토된 처마 곡선 기와 등의 비교 연구 등을 바탕으로 장군총을 제19대 광개토대왕(재위: 391년 - 412년)의 능묘로 보고 있다[10]。한편, 모모자키 유스케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10]

3. 2. 광개토대왕릉설 (일본)

일본의 나가시마 테루오미, 다무라 쇼이치, 아즈마 우시오 등의 연구자들은 야스 토요노부가 태왕릉과 장군총 두 묘에서 출토된 기와, 평양에서 출토된 처마 곡선 기와 등을 비교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장군총을 제19대 광개토대왕(광개토왕, 재위: 391년 - 412년)의 능묘로 보고 있다.[10]

3. 3. 중국 학계의 견해

중국 학계에서는 태왕릉에서 마구와 장신구와 함께 "광개토왕" 명문이 있는 동령이 출토된 것으로부터, 태왕릉을 광개토대왕의 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의 묘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10]

4. 세계유산 등재

2004년 7월,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위원회 쑤저우 회의에서 랴오닝성 환런 현의 오녀산성(졸본성), 지린성 지안시의 환도산성, 국내성, 기타 고분과 함께 "* 고구려 전기의 도읍과 고분군"으로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1] 등록된 고분은 왕릉 14기(장군총 포함), 귀족 무덤 26기이다.[1]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평양시, 남포시 등에 위치한 고구려 후기 고분은 "고구려 고분군"으로 동시에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1]

5. 사진

참조

[1] 서적 The Archaeology of Korea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06-06
[2] 서적 Korea: A Historical and Cultur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8-06-06
[3] 서적 Art Under Control in North Korea https://books.google[...] Reaktion Books 2005
[4] 웹사이트 高句麗研究会「いにしえの地をたずねて7」 http://www.searchnav[...]
[5] 문서 吉井(2002)pp.171-172
[6] 문서 吉井(2002)p.171
[7] 문서 東(1995)p.194
[8] 문서 西谷(2003)p.147
[9] 문서 吉井(2002)p.172、吉井(2002)p.176
[10] 문서 朝鮮史研究入門(2011)p.50
[11] 서적 한국의 고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11-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