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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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개토대왕릉비는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석이다. 높이 약 6.39m의 응회암 재질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담고 있어 고구려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조선 후기까지 금나라 황제의 비석으로 알려졌으나, 1880년대 청나라의 봉금 해제 이후 발견되었으며, 일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가 비문 내용을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비문 해석을 둘러싸고 신묘년조 논란 등 다양한 논쟁이 존재하며, 현대에도 비문 조작설 등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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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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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광개토왕릉비 |
한자 | 廣開土王陵碑 or 好太王碑 |
로마자 표기 | Gwanggaeto wangneungbi or Hotae Wangbi |
별칭 | 호태왕비 |
위치 | 랴오닝성 및 지린성, 중국 |
좌표 | 41° 7′ 49.4″ N, 126° 11′ 2.6″ E |
상세 정보 | |
건립 시기 | 414년 |
포함 유적 | 오녀산성 국내성 환도산성 염모총 환문총 장천총 |
세계 유산 정보 | |
등재 유형 | 문화유산 |
등재 기준 | (i)(ii)(iii)(iv)(v) |
지정 번호 | 1135 |
등재 연도 | 2004년 |
면적 | 4,164.8599 헥타르 (ha) |
완충 지역 | 14,142.4404 헥타르 (ha) |
유네스코 한국어 명칭 |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 |
유네스코 영어 명칭 | 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
유네스코 프랑스어 명칭 | Capitales et tombes de l’ancien royaume Koguryo |
유네스코 사이트 | 고구려 고분군 안내 (유네스코) |
기타 정보 | |
관련 지명 | 타이왕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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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건립 배경 및 발견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는 높이 약 6.39m, 너비 약 1.5m의 각주(角柱) 형태이다. 네 면에는 총 1802자의 한문(漢文)이 새겨져 있는데, 이 중 약 200자는 풍화(風化) 등으로 판독이 불가능하다.[35] 원래는 야외에 방치되어 있었지만, 20세기에 지붕이 설치되었고, 21세기에는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비석 주변을 유리로 둘러쌌다.
1906년에 하쿠쵸 쿠요시(白鳥庫吉)와 일본 해군이 광개토대왕비를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비석이 너무 크고 글자가 손상될 우려가 있어 중단되었다.[38]
『일본서기(日本書紀)』 편찬자와 고려 왕조도 광개토대왕비의 존재를 몰랐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 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광개토대왕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당시 고구려의 최대 관심사였을 후연(後燕)과의 관계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광개토대왕비가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건립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패배나 굴욕적인 복속(服屬)은 기록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37]
요시다 타카시(吉田孝)는 광개토대왕비 건립 목적이 왕릉 수묘인(守墓人) 330호와 수묘인 매매 금지 등 금령과 벌칙을 기록하고, 수묘인 대부분이 한(韓) 등에서 징발되었기 때문에 왕의 무훈을 기록한 것이며, 왕의 무훈 칭송이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후연을 이긴 적이 있는데도 그 기사가 없는 것은 수묘인 유래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39]
이진희(李進熙)는 탁본을 가져온 사카우 케이신(酒匂景信)이 비문 자체의 탁본이 아니라 “바꿔치기한 탁본”을 소개했고, 참모본부가 이 “바꿔치기”를 은폐하기 위해 비문에 석회(石灰)를 도포했다는 주장을 하였다.[49]
2. 1. 건립 배경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응회암 재질의 비석을 세웠다.[33][34] 비문에 따르면 “갑인(甲寅)년 9월 29일 을유(乙酉)”(서기 414년 10월 28일)에 건립되었다고 한다.이 비석은 조선 후기까지 금나라 황제의 비(碑)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청의 봉금제도가 1880년대에 해제된 뒤에야 발견되었고, 1888년 일본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한 비문의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광개토대왕비에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질서 형성 이념이 나타나 있다. 영락 6년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문에 “백잔·신라는 본래 속민(屬民)으로, 유래(由來)하여 조공(朝貢)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다.[36] 즉, 백제·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조공국이었으나, 왜군(倭軍)이 침략하여 이들을 신민(臣民)으로 삼았기 때문에 원상회복을 한다는 것이 백제 정벌의 이유였다.[36]
“속민”이나 “조공”이라는 표현은 원래 중국 역대 왕조(中國歴代王朝)의 정치 이념을 보여주는 것이며, 중국 왕조는 주변의 여러 민족에게 왕화(王化)를 미쳐 이들을 조공하게 하고, 그 군주를 책봉(冊封)하여 그 영역 내의 사람들을 속민화하려는 이념을 가졌다.[36] 여기서는 중국 주변 국가 중 하나인 고구려가 자국을 중심으로 한 질서 형성을 보여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원래 중국 왕조의 책봉국이었던 고구려가 중국 왕조와 유사한 세계 질서를 그 이념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6]
광개토대왕비는 “왕(王)”과 “주(主)”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왕”은 고구려 왕에게만 사용하고, “주”는 백제 왕을 가리켰으며, 백제 왕은 “잔주(殘主)”(2회), 백제는 “백잔”(3회), “잔국(殘國)”(1회), “잔”(1회)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왜(大和王權)를 가리켜 “왜적(倭賊)”(1회), “왜구(倭寇)”(2회)라고 기록한 부분도 있다.[49]
광개토대왕비가 다시 역사의 중심 무대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일본인(日本人)의 손에 의한 것이다. 이 탁본을 일본으로 가져온 것은 사카우 케이신(酒匂景信)이며, 연구를 시작한 것은 일본 참모본부(參謀本部)였다.[49]
2. 2. 발견과 초기 연구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는 1880년대에 청나라의 봉금제도가 해제된 뒤에야 발견되었다. 1888년 일본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비문의 내용을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60]비석이 위치한 중국 지린성(Jilin) 집안(Ji'an)은 오랫동안 비석이 방치된 주요 원인이었다.[5] 668년 고구려 멸망과 926년 발해 멸망 이후, 이 지역은 한국과 중국 양국의 지정학적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6] 이후 이 지역은 여진, 만주족 등 여러 만주 지역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다.[7]
1644년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면서 압록강 북쪽 만주 지역 대부분을 출입 금지하는 "봉금정책"(fengjin 封禁)을 실시했다.[8] 이 정책은 19세기 후반 이 지역이 개척 정착에 개방되면서 종식되었다. 1876년 청 정부는 이 지역 통치를 위해 화인현(현재 환인 만주족 자치현)을 설립했다.[9]
집안 주변 지역으로 이주한 정착민들은 지역에서 발견한 벽돌과 기와로 주택을 지었다. 이 기와 중 일부에 새겨진 비문은 중국 학자들과 금석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몇몇 기와에는 "대왕의 능은 산처럼 굳건하고 봉우리처럼 견고하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광개토대왕릉을 의미한다.) 1876년경 화인현 현령(縣令)이었던 관월산(關月山)이 기와를 수집하던 중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했다.
이 발견은 한국, 중국, 일본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특히 일본은 향후 증가할 국제적 경쟁을 예상하여 첩보원을 변장시켜 지역 요새와 지형을 정찰하도록 파견했다. 처음에는 잡초 때문에 탁본이 어려웠다. 1882년 현령은 초목을 불태워 비석 표면을 손상시켰다.
비석 네 면에는 한자(총 약 1800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불규칙한 표면과 기타 요인들로 초기에는 탁본을 만들기 어려웠다. 따라서 초기 복사된 비문은 "탁본"이 아니라 "모사본"이었다.
1883년 일본군 장교 사코 가게아키(酒匂景信)는 한방 약초상으로 변장하여 비문의 "모사본"을 구했다.[10] 일본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는 학자들을 초청하여 텍스트를 해독하고, 1889년 '회여록'(會餘録) 5권에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887년까지 비문 전체에 대한 진정한 탁본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모사본"이 아닌 진정한 "탁본"이 나온 후 중국 학자들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최초의 논문은 왕지수(王志修)의 '고구려 영락태왕고비고'(高句麗永樂太王古碑攷, 1895년)였다. 한국은 1889년 '회여록' 출판 전까지 비석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 학자들이 비석의 고대 텍스트에 대한 최초의 상세한 분석을 수행했다.
1880년 중국 집안(集安)의 농민이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했고, 이듬해 관월산(關月山)이 탁본을 제작했다. 1961년 광개토대왕릉비는 동구고분군(洞溝古墓群)의 일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護単位)로 지정되었다.
3. 비문의 내용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는 응회암(凝灰岩) 재질로, 높이 약 6.39m, 너비 1.38~2.00m, 측면 1.35~1.46m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60] 비석의 네 면에는 총 1,775자(혹은 1,802자)[11][12][13]의 글자가 예서체로 새겨져 있으나, 이 중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13]
비문에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질서 형성 이념이 나타나 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 간주하고, 왜의 침략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정벌을 정당화했다.[36]
비문에는 "왕(王)"과 "주(主)"라는 표현이 구분되어 사용되는데, "왕"은 고구려 왕에게만 사용되고, "주"는 백제 왕을 가리킨다. 백제 왕은 "잔주(殘主)", 백제는 "백잔(百殘)", "잔국(殘國)" 등으로 폄하되어 기록되어 있다.[49] 신라 왕은 "매금(寐錦)"으로, 그 사신은 "조공"으로 표현되어 고구려 중심의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왜를 "왜적(倭賊)", "왜구(倭寇)"로 표현한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49]
일본 사서인 『일본서기』는 백제와의 관계를 백제 측이 적극적으로 교섭을 요구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주요 적이 왜였음을 보여준다.[37] 왜가 평양 근처까지 출병한 것은 백제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고, 고구려는 이 때문에 왜군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신라 역시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왜의 세력을 몰아냈지만,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자 다시 왜의 군사력에 의존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37]
광개토대왕릉비는 일본 참모본부에 의해 연구가 시작되었으며,[49] 1906년에는 일본으로 반출될 뻔했으나 무산되었다.[38] 비문은 왜에 대한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왜국과 고구려의 '17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연구자도 있다.[43]
3. 1. 고구려 건국 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생애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 출신으로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었다. 알에서 태어난 추모왕은 성스러운 분이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고, 왕은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들이 떠올라라."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떠올라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했다.[33][34] 왕위에 큰 관심이 없었던 추모왕은 하늘로 사신을 보냈고,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여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에 서서 승천하였다.유류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렸고, 대주류왕이 왕위를 이어받아 나라를 튼튼하게 하였다. 17세손인 광개토대왕은 18세(391년)에 왕위에 올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불렸다. 광개토대왕의 은혜는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러나 39세(412년)에 세상을 떠났고, 갑인년(414년) 9월 29일 을유(乙酉)일에 산릉(山陵)에 모셔졌다.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기록을 남겨 후세에 알리고자 하였다.[33][34]
3. 2.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
5년(395년) 을미년, 왕은 패려(稗麗)가 사람들을 붙잡아가 돌려보내지 않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의 상류에 이르러 3개 부락, 6~700개 영(營)을 격파하고, 노획한 소와 말, 양떼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왕은 행차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 북풍(北豊), 오비□(五備□)에 오면서 국경을 두루 살피며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61]6년(396년) 병신년, 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은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등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 도성(위례성)에 다다랐다. 백제는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전투에 나섰다. 왕이 매우 노하여 아리수(한강)를 건너 군사를 보내 성을 공격하였고, 백제군이 소굴로 도망쳐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아신왕)가 곤핍(困逼)해져 남녀 생구(포로) 1천 명과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쳐 항복하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은 은혜로이 용서하고 뒤에 순종한 정성은 기특하게 여겼다. 이때 58개 성, 7백개 촌을 얻었고, 백잔주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성으로 개선했다.[61]
8년(398년) 무술년, 한 부대의 군사를 보내 식신(숙신) 토곡을 순찰하도록 했다. 이때 막□라성(莫□羅城),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다. 이때부터 (식신은) 조공하고 내부의 일을 여쭈었다.[62]
9년(399년)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신하, 즉 신라 내물왕)을 왜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63]
10년(400년) 경자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男居城)부터 신라성(경주)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왜병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여 그 뒤를 지체없이 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64] 신라성, □성을 차지하고 왜구가 크게 무너지니 성(城)… ▨▨▨ 이하 71자는 대부분 글자 훼멸 때문에 알 수 없다. 대체로 고구려가 신라와 임나가라 지역에서 왜(倭)와 백제의 제(諸) 연합세력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구원한 전쟁 성과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64] 과거 신라의 매금(이사금)은 직접 와서 여쭈지 않았는데,[62][65]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여쭈고 조공하였다.
14년(404년) 갑진년,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帶方, 황해도) 연안을 침입하였다. (왜는)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을 동원하였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평양을 거쳐 □□에서 선봉이 서로 맞서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에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고,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64]
17년(407년) 정미년, 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시켰다. □□□□□□□□ 왕의 군대는 사방 포위작전을 펴서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갑옷(鎧鉀)이 1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루성, □주성(□住城), □성, □□□□□□성을 격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우리 군이 여성(餘城, 동부여의 도성)에 이르자, 동부여는 나라 전체가 두려워하며 항복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 전체에 두루 미치게 되자 돌아왔다. 또 이때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 온 자는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였다. 대체로 헤아려 보니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천400개였다.[66]
3. 3. 묘지기 관련 규정
광개토대왕릉비의 제3면 8행부터 4면 9행까지는 능비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묘지기 연호(烟戶)의 출신지와 인원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67]묘지기 연호는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으로 구분되는데, 국연은 왕릉을 직접 관리하는 사람, 간연은 국연을 보조하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묘지기들은 매구여, 동해고, 돈성, 우성, 비리성, 평양성 등 고구려 각지에서 징발되었으며, 일부는 한(韓)과 예(穢) 등 새로 복속된 지역 출신이었다.[67]
광개토대왕은 생전에 선조 왕들과 달리 구민(舊民)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정복한 한(韓)족과 예(穢)족을 묘지기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한족과 예족 220집이 새로 묘지기로 징발되었고, 기존의 구민 110집과 합쳐져 총 330집(국연 30집, 간연 300집)이 광개토대왕릉을 지키게 되었다.[67]
다음은 묘지기 연호의 출신 지역과 인원수를 정리한 표이다.
출신 지역 | 구분 | 가구 수 |
---|---|---|
매구여(賣勾余) | 국연(國烟) | 2 |
매구여(賣勾余) | 간연(看烟) | 3 |
동해고(東海賈) | 국연(國烟) | 3 |
동해고(東海賈) | 간연(看烟) | 5 |
돈성(敦城) | 간연(看烟) | 4 |
우성(于城) | 간연(看烟) | 1 |
비리성(碑利城) | 국연(國烟) | 2 |
평양성(平穰城) | 국연(國烟) | 1 |
평양성(平穰城) | 간연(看烟) | 10 |
△연(△連) | 간연(看烟) | 2 |
△성(△城) | 간연(看烟) | 2 |
안부련(安夫連) | 간연(看烟) | 22 |
개곡(改谷) | 간연(看烟) | 3 |
신성(新城) | 간연(看烟) | 3 |
남소성(南蘇城) | 국연(國烟) | 1 |
사수성(沙水城) | 국연(國烟) | 1 |
사수성(沙水城) | 간연(看烟) | 1 |
모루성(牟婁城) | 간연(看烟) | 2 |
두비압잠한(豆比鴨岑韓) | 간연(看烟) | 5 |
구모객두(勾牟客頭) | 간연(看烟) | 2 |
구저한(求底韓) | 간연(看烟) | 1 |
사조성(舍조城) | 국연(國烟) | 3 |
사조성(舍조城) | 간연(看烟) | 21 |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 간연(看烟) | 1 |
막고성(莫古城) | 국연(國烟) | 1 |
막고성(莫古城) | 간연(看烟) | 3 |
객현한(客賢韓) | 간연(看烟) | 1 |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 | 간연(看烟) | 10 |
파노성(巴奴城) | 간연(看烟) | 9 |
구모로성(臼模盧城) | 간연(看烟) | 4 |
각모로성(各模盧城) | 간연(看烟) | 2 |
모수성(牟水城) | 간연(看烟) | 3 |
간저리성(幹저利城) | 국연(國烟) | 2 |
간저리성(幹저利城) | 간연(看烟) | 3 |
미추성(彌鄒城) | 구연(舊烟) | 1 |
미추성(彌鄒城) | 간연(看烟) | 11 |
야리성(也利城) | 간연(看烟) | 3 |
두노성(豆奴城) | 국연(國烟) | 1 |
두노성(豆奴城) | 간연(看烟) | 2 |
오리성(奧利城) | 국연(國烟) | 2 |
오리성(奧利城) | 간연(看烟) | 8 |
모추성(模鄒城) | 국연(國烟) | 2 |
모추성(模鄒城) | 간연(看烟) | 5 |
백제 남쪽 | 국연(國烟) | 1 |
백제 남쪽 | 간연(看烟) | 5 |
대산한성(大山韓城) | 간연(看烟) | 6 |
농매성(農賣城) | 국연(國烟) | 1 |
농매성(農賣城) | 간연(看烟) | 7 |
윤노성(閏奴城) | 국연(國烟) | 1 |
윤노성(閏奴城) | 간연(看烟) | 22 |
고모루성(古牟婁城) | 국연(國烟) | 2 |
고모루성(古牟婁城) | 간연(看烟) | 8 |
전성(전城) | 국연(國烟) | 1 |
전성(전城) | 간연(看烟) | 8 |
미성(味城) | 간연(看烟) | 6 |
취자성(就咨城) | 간연(看烟) | 5 |
삼양성(삼穰城) | 간연(看烟) | 24 |
산나성(散那城) | 국연(國烟) | 1 |
나단성(那旦城) | 간연(看烟) | 1 |
구모성(勾牟城) | 간연(看烟) | 1 |
어리성(於利城) | 간연(看烟) | 8 |
비리성(比利城) | 간연(看烟) | 3 |
세성(細城) | 간연(看烟) | 3 |
비문에는 또한 광개토대왕이 묘지기 제도를 정비하고 묘지기를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는 묘지기들의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하고, 왕릉 관리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67]
4. 신묘년조 논란
광개토대왕릉비가 발견된 후,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비석 표면에 불을 피워 이끼를 제거하고 석회를 바르는 과정에서 비면이 손상되어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는 큰 논란거리이다.
비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은 고구려 건국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역사를, 둘째 부분은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셋째 부분은 능비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묘년조 논란은 영락 6년(396년) 기사 바로 앞에 실린 기록에서 시작되었다. 이 부분은 신묘년(391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보다는 영락 6년(396년)부터 14년(404년)까지의 남진 정책 명분과 성과를 집약한 기술로 추정된다.
4. 1. 논란의 쟁점

신묘년조 논란은 비문의 영락 6년(396년) 기사 바로 앞에 실린 다음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이 부분은 신묘년(391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영락 6년(396년)부터 14년(404년)까지 이루어진 남진 정책의 명분과 성과를 집약한 기술로 추정된다.
일본 학자들은 1888년 비문의 내용이 알려진 이후 이 기사를 4세기 후반 진구 황후(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부 지역 정벌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주장했고, 이는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정인보를 비롯한 박시형, 이기백 등은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오니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 백잔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로 해석하였다.
1970년대 초 재일 한국인 사학자 이진희는 비문의 글자가 석회 도포로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형구는 비석 자체를 검토한 결과, '倭'라는 글자는 '後'를 조작한 것이고, '來渡海破'라는 글자는 '不貢因破'를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비문을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백잔과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김병기는 서예학적 관점에서 '渡海破(도해파)' 부분이 정상 비문과 다르며, 획의 부분을 따졌을 때 원래 글자는 '入貢于(입공우)'라고 주장했고,[69] 중국의 경철화(耿鐵華)는 '來渡海破'의 海에서 부수인 삼수변(氵)이 종선 밖의 부분에 위치해 있어 海가 아니라 '每'라고 주장했다.[70]
2020년에는 기존 주장들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연구[71]가 나왔다. 이 논문에 따르면 위 문장은 '백잔(=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으로 계속 조공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넘어) ▨破로 건너오자 백잔(=백제)은 (왜와 연결[또는 이용]해서)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또는 삼으려고 했다].'[72]가 된다.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는 1884년 비석의 존재를 알게 된 후, 회원 사코 가게아키(佐古景明)로부터 탁본을 입수하여 391년 신묘년(辛卯年)에 대한 왕의 군사 원정을 묘사하는 구절에 주목했다.[28] 1880년대 일본군과 해군의 일부 장교들이 연구를 수행했으며,[5] 탁본은 1889년에 출판되었다. 스가 마사토모(須賀正友)를 비롯한 대부분의 일본 학자들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들은 ''와''가 당시 일본 서부 전체를 지배하는 중앙 집중적인 일본 정부를 가리킨다고 추정했다.
1910년대와 20년대에 토리 류조(鳥居龍藏) 등 일본 학자들은 지안(集安)을 방문하여 비석을 직접 관찰했다. 이들은 비문이 점토와 석회로 수리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탁본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28]
정인보는 1955년 일본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최초의 한국 학술 연구를 발표했다.[15] 그는 문장 ''渡海破''와 ''以爲臣民''의 주어가 각각 고구려와 백제라고 추측했다. 정인보의 해석에 따르면 전체 구절은 다음과 같다.
1959년 일본 학자 미즈타니 테이지로(水谷悌二郎)는 비석 수리 전에 만들어진 탁본을 입수하여, 사코의 탁본이 탁본 방식이 아닌 중국에서 ''쌍구천묵''(双鉤塡墨)으로 알려진 추적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내렸다.[16]
북한 학자 김(金)은 1963년 논문에서[17]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연구하여 와가 일본에 있는 삼한의 식민지를 가리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 식민지가 한국 이민자들에 의해 설립되었고 규슈, 킨키, 이즈모를 중심으로 했다고 주장했다. 김에 따르면 나중에 이 식민지들은 야마토 정권에 흡수되었다. 그는 또한 來渡海破百殘의 주어가 고구려이며, 百殘이 백제 왕국이 아니라 일본에 있는 백제의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다른 북한 학자들도 고구려의 일본 침략을 주장했다.[18]
많은 한국 학자들은 일본(倭중국어)이 백제와 신라를 정복했다(破중국어)는 해석을 거부한다. 구두점이 없고 맥락을 통해 문장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문장이 시작되거나 끝나는 시점을 알기 어렵다.[19] 게다가 백제와 신라는 구절에서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백제"(百중국어)의 첫 글자만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의 첫 글자로 추정되는 글자도 불완전하다(新 대신 斤). 또한 "잔"(殘중국어)은 고구려가 백제의 공식 명칭에서 "제"(濟중국어) 대신 경멸적으로 사용한 글자이다. 따라서 글자의 주요 누락과 구두점의 부족을 고려하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힌다.
그러나 구절에 대한 추가 분석은 일본이 아니라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 또는 와를 무찔렀다는 것이다.
이 해석과 비문에 나오는 광개토왕 칭호의 약칭을 고려하면, 구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일부는 신묘년 기록에 대한 전통적인 일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첫째, 비석이 만들어진 당시 와라는 용어는 일본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히 가야 연맹에서 온 남부 한국 사람들도 가리킬 수 있었다.[20][21]
중국에서는 역사학자 耿鐵華 등의 견해로, [海]의 옆 부분이 다른 글자와 균형이 맞지 않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毎]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신묘년 조에 관해서는, 이진희가 1970년대에 대일본제국 육군에 의한 개찬·날조설을 주장했다.[46] 이진희의 설은 5세기의 한국에 왜(일본)가 권익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날조하기 위해, 사카나오 가게노부가 탁본을 채취할 때 비면에 석회를 도포하여 왜·임나 관계의 문장의 개찬을 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 등을 친 주체가 고구려라고 하면, 한때 조공했던 백제·신라가 조공하지 않게 된 이유가 서술되지 않은 채로 다시 쳐서 복속시켰다는 의문이나, 왜구를 쳤다는 기록이 중국의 정사, 『삼국사기』, 일본의 『일본서기』 등의 기록(고구려가 동해를 건넌 적이 없다)과도 모순이 생긴다. 고구려가 불리하게 되는 상황을 강조한 뒤 광개토왕 6년 이후의 광개토왕의 화려한 활약을 기록하는 비문 전체의 구성으로부터, 해당 신묘년 조는 계속되는 영락 6년 조의 서두이며, 주어가 고구려가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광개토왕비의 내용 분석 결과 광개토왕의 친정은 「왕躬率」, 부하를 파견하는 경우는 「교견」이라고 기록되고, 싸우는 주체가 생략되는 예는 없다.[49] 물론, 전투 기사에 주어를 「고구려」로 하는 것 같은 애매한 기록은 없다.[49] 사카모토 요시타네는 신묘년 기사는 영락 6년의 광개토왕 친정의 정벌 이유로서 거론된 것이기 때문에, 「而倭以耒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為臣民」의 「渡■破」의 주어는 일본에서 종래 주장된 대로 「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49] 현재, 광개토왕비는 중국 영내에 있기 때문에, 중국의 연구자에 의해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신묘년 기사의 문제점인 「而倭以耒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為臣民」의 「渡■破」의 부분은 「도해파」로 석자하고 있다.[49]
그 밖에도 이 설에 대해서는 이노우에 미츠사다, 후루타 무네히코, 타나카 타쿠, 우에다 마사아키 등으로부터도 반론이 제기되었다. 1974년에 우에다가 베이징에서 입수한 석회 도포 이전의 탁본에는 개찬의 흔적은 없었다.[50] 1985년에는 후루타 등에 의한 현지 조사가 행해져 「비문에 의도적인 개찬은 인정할 수 없다」라고 결론지었다.[51]
그 후, 중국의 길림성 문물고고학 연구소는 현지에서 실제로 탁본 뜨기를 전문으로 하고 있던 탁공들과 그 자손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중국인 탁공들이 광개토왕비의 표면에 석회를 도포하여 탁본 뜨기를 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했다.[52] 그러나, 사카나오 가게노부에 의한 석회의 도포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52] 더욱이, 이진희가 사카나오 가게노부에 의한 날조 문서라고 단정한 문면(예를 들어 「倭以辛卯年来渡海破」 등)이 현존하는 광개토왕비의 표면에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52] 이러한 연구 결과는 문물고고학 연구소장 왕젠쥔에 의해 발표되었다.[52] 더욱이, 2005년 6월 23일에 사카나오 가게노부 본 이전에 작성된 묵본이 중국에서 발견되어, 그 내용은 사카나오 가게노부 본과 동일하다고 확인되었다. 더욱이 2006년 4월에는 중국사회과학원의 쉬젠신에 의해, 1881년에 작성된 현존 최고의 탁본과 사카나오 가게노부 본과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 발표되어,[54] 이것에 의해 이진희의 개찬·날조설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도호쿠 대학 명예교수의 세키 아키라는 「일개의 포병 중위에 그러한 학력이 있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고, 또 사카나오 중위는 특무 기관으로서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개찬·날조설을 부정하고 있다.[56]
참고로, 이 설이 제기되기 이전의 1963년, 북한 내부에서 비문의 개찬 논쟁이 일어나, 동국의 조사단이 현지에서 조사를 실시한 결과, 개찬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57]
5. 현대의 연구 동향
1972년 재일 한국인 학자 이진희는 광개토대왕릉비가 20세기에 일본군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어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려 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22][23] 그는 사코(Sakō)가 비문의 사본을 변경했고, 이후 일본 참모본부가 세 차례 팀을 파견하여 생석회를 이용해 비석을 위조했다고 주장했다. 1981년 한국의 이형구는 한자의 서체와 문법의 불규칙성을 근거로 신묘(辛卯) 기사가 변경되어 ‘後’가 ‘倭’로, ‘不貢因破’가 ‘來渡海破’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며, 신묘 기사의 주체가 고구려라고 보았다.[24] 耿铁华(Geng Tie-Hua)는 ‘毎’가 ‘海’로 변경되었다고 주장했다.[25]
1980년대부터 중국 학자들이 비석 연구에 참여했다. 왕건군(Wang Jianqun)은 현지 농민들을 인터뷰하여 고의적인 위조는 없었고, 생석회는 현지 사본 제작자들이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붙인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진희의 주장을 비판하며, ‘倭’(Wa)는 국가가 아닌 해적 집단을 의미하며, 일본이 한국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도 부인했다.[26][27] 중국사회과학원의 서건신(Xu Jianxin)은 1881년 이전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비석 탁본을 발견했고, 일본이 비석 글자를 훼손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결론지었다.[28]
오늘날 대부분의 중국 학자들은 새롭게 발견된 탁본을 근거로 이진희가 제기한 음모론을 부정한다.[28][29][30]
홍익대학교 (한국)의 김태식[31]은 공동 역사 교과서 집필 프로젝트에서 일본의 주장을 부인했다. 그러나 규슈대학교 (일본)의 하마다 고사쿠[32]는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발표했는데, 두 사람 모두 이진희의 이론을 채택하지 않았다.
6. 한국 사회에의 영향
1972년 재일 한국인 학자 이진희는 광개토대왕릉비가 20세기에 일본군에 의해 고의로 훼손되어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22][23] 그는 사코가 비문의 사본을 변경했고, 이후 일본 참모본부가 세 차례 팀을 파견하여 생석회를 이용해 비석을 위조했다고 주장했다.[22][23] 1981년 한국의 이형구는 한자의 서체와 문법의 불규칙성을 근거로 신묘 기사가 변경되었다고 주장했다.[24]
1980년대부터 중국 학자들이 비석 연구에 참여했다. 왕건군은 현지 농민들을 인터뷰하여 고의적인 위조는 없었고, 생석회는 현지 사본 제작자들이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붙인 것이라고 결론지었다.[26][27] 그는 이진희의 주장을 비판하며, ‘倭’(왜)는 국가가 아닌 해적 집단을 의미하며,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도 부인했다.[26][27] 중국사회과학원의 서건신은 1881년 이전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비석 탁본을 발견했고, 일본이 비석 글자를 훼손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결론지었다.[28] 오늘날 대부분의 중국 학자들은 새롭게 발견된 탁본을 근거로 이진희가 제기한 음모론을 부정한다.[28][29][30]
공동 역사 교과서 집필 프로젝트에서 홍익대학교(한국)의 김태식[31]은 일본의 주장을 부인했다. 그러나 규슈대학교(일본)의 하마다 고사쿠[32]는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발표했는데, 두 사람 모두 이진희의 이론을 채택하지 않았다.
광개토대왕비에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질서 형성 이념이 나타나 있다. 영락 6년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 이유는 서문에 “백잔·신라는 본래 속민으로, 유래하여 조공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다.[36] 즉, 백제·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조공국이었으나, 왜군이 침략하여 이들을 신민으로 삼았기 때문에 원상회복을 한다는 것이다.[36] “속민”이나 “조공”은 원래 중국 역대 왕조의 정치 이념을 보여주는 것이며, 여기서는 고구려가 자국 중심의 질서 형성을 보여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36]
광개토대왕비는 “왕”과 “주”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왕”은 고구려 왕에게만 사용하고, “주”는 백제 왕을 가리킨다. 백제 왕은 “잔주”(2회), 백제는 “백잔”(3회), “잔국”(1회), “잔”(1회)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군대는 “관군”, 신라 왕은 “매금”, 그 도래는 “조공”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구려의 소중화사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왜를 “왜적”(1회), “왜구”(2회)라고 기록했다.[49]
광개토대왕비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이진희의 발언이 계기가 되었다. 탁본을 가져온 사카우 케이신은 비문 자체의 탁본이 아니라 “바꿔치기한 탁본”을 소개했고, 그 후에 참모본부는 이 “바꿔치기”를 은폐하기 위해 비문에 석회를 도포했다는 것이다.[49]
6. 1. 역사 인식
1972년 재일 한국인 학자 이진희는 광개토대왕릉비가 20세기에 일본군에 의해 고의로 훼손되어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22][23] 그는 사코가 비문의 사본을 변경했고, 이후 일본 참모본부가 세 차례 팀을 파견하여 생석회를 이용해 비석을 위조했다고 주장했다.[22][23] 1981년 한국의 이형구는 한자의 서체와 문법의 불규칙성을 근거로 신묘 기사가 변경되었다고 주장했다.[24]1980년대부터 중국 학자들이 비석 연구에 참여했다. 왕건군은 현지 농민들을 인터뷰하여 고의적인 위조는 없었고, 생석회는 현지 사본 제작자들이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붙인 것이라고 결론지었다.[26][27] 그는 이진희의 주장을 비판하며, ‘倭’(왜)는 국가가 아닌 해적 집단을 의미하며, 일본이 한국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도 부인했다.[26][27] 중국사회과학원의 서건신은 1881년 이전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비석 탁본을 발견했고, 일본이 비석 글자를 훼손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결론지었다.[28] 오늘날 대부분의 중국 학자들은 새롭게 발견된 탁본을 근거로 이진희가 제기한 음모론을 부정한다.[28][29][30]
공동 역사 교과서 집필 프로젝트에서 홍익대학교(한국)의 김태식[31]은 일본의 주장을 부인했다. 그러나 규슈대학교(일본)의 하마다 고사쿠[32]는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발표했는데, 두 사람 모두 이진희의 이론을 채택하지 않았다.
광개토대왕비의 내용에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질서 형성 이념이 나타나 있다. 영락 6년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을 정당화하는 이유로 서문에 “백잔·신라는 본래 속민으로, 유래하여 조공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다.[36] 즉, 백제·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조공국이었으나, 왜군이 침략하여 이들을 신민으로 삼았기 때문에 원상회복을 한다는 것이 백제 정벌의 이유로 제시된 것이다.[36] “속민”이나 “조공”이라는 표현은 원래 중국 역대 왕조의 정치 이념을 보여주는 것이며, 여기서는 중국 주변 국가 중 하나인 고구려가 자국을 중심으로 한 질서 형성을 보여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36]
광개토대왕비는 “왕”과 “주”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왕”은 고구려 왕에게만 사용하고, “주”는 백제 왕을 가리킨다. 백제 왕은 “잔주”(2회), 백제는 “백잔”(3회), “잔국”(1회), “잔”(1회)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군대는 “관군”, 신라 왕은 “매금”, 그 도래는 “조공”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 고구려의 소중화사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왜를 가리켜 “왜적”(1회), “왜구”(2회)라고 기록한 부분도 있다.[49]
광개토대왕비 연구가 특히 활발해진 것은 이진희의 발언이 계기가 되었다. 탁본을 가져온 사카우 케이신은 사실 비문 자체의 탁본이 아니라 “바꿔치기한 탁본”을 소개했고, 그 후에 참모본부는 이 사카우 케이신의 “바꿔치기”를 은폐하기 위해 비문에 석회를 도포했다는 것이다.[49]
6. 2. 문화 콘텐츠
일본의 만화가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작품 《하늘의 혈맥》(天の血脈)은 광개토대왕릉비를 둘러싼 일본군 참모본부의 음모가 작중 주요 줄거리가 되고 있다.6. 3. 복제비 건립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 교문2동에 원본의 크기와 내용을 그대로 구현해놓은 구리 광개토대왕비가 있다.일본 오사카 경제법과대학(大阪経済法科大学) 하나오카 캠퍼스 부지 내에도 복제비가 세워져 있었다. 1999년 조선사회과학원의 호의로 복제비 건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복제비는 2020년에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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巻頭史論 研究史 古代の日本と朝鮮--「七支刀」「好太王碑」「倭の五王」研究の成果と課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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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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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人物往来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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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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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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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貢論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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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城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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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安羅人戍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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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년 기사 중 "歸王請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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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64성 1,400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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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광개토대왕릉비 설명과 원문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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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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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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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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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永樂 6년 고구려의 백제 침공 원인에 대한 검토 - 〈廣開土王碑〉 辛卯年 기사의 재해석을 중심으로
한국목간학회
2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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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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