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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합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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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민연합(União Nacional)은 1930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에 의해 창당된 포르투갈의 정치 조직으로, 1926년 쿠데타 이후 수립된 신국가 체제를 지원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법적으로 유일하게 허용된 정당으로서, 다른 정당을 금지하고 탄압했다. 1933년 신국가 체제 하에서 여당이 되었으며, 1932년부터 1973년까지 10번의 입법 선거에서 승리하여 국회를 장악했다. 1968년 살라자르가 물러난 후 국민행동으로 개칭되었으며,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정권이 붕괴되면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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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합 (포르투갈) - [정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8년 버전의 국민연합 로고
1960년대까지 사용된 로고
원어 이름União Nacional (포르투갈어)
다른 이름Acção Nacional Popular (포르투갈어, 1970–74)
신문Diário da Manhã
창립일1930년 7월 30일
해산일1974년 4월 25일
본부 위치리스본, 포르투갈
당원 수20,000명 (1933년 추정)
국기
지도부
지도자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마르셀루 카에타누
이념 및 정치적 위치
이념통합 국가주의
조합주의 국가주의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국가 가톨릭주의
루소트로피칼리스무
루시타니아 통합주의
다대륙주의
정치적 위치우익에서 극우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기타 정보
색상파란색, 흰색 (1970-74년 녹색)
관련 정보
포르투갈 역사제1공화국 (1910–1926)
군사 독재 (1926–1932)
에스타두 노부 (1932–1974)
카네이션 혁명 (1974)
제3공화국 (1974–현재)

2. 역사

포르투갈의 국가 독재 시대였던 1930년 창당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정당이 아닌 "모든 포르투갈인의 단결 조직"으로 규정되었으며, 살라자르 정권을 지지하는 다양한 세력을 아우르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33년 이스타두 노부(신국가) 체제가 수립되면서 법적으로 허용된 유일한 정치 조직이 되었으나, 다른 모든 정당은 금지되고 박해받았다.

국민연합은 정권 자체를 지원하는 종속적인 우산 조직으로 기능했으며, 정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보다는 단순히 지지하는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국가 생디칼리스트와 같은 세력도 포함했으나, 1934년 살라자르는 이들을 숙청하며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화했다. 당의 지도부는 주로 정부 관료나 명망가들로 채워졌으며, 젊은 세대의 참여는 저조했다.

역사학자들은 국민연합이 독재 정권 하의 약한 단일 정당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당 내부 활동은 미미했으며, 선거나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 외에는 큰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22] 정권의 선전, 청년, 노동 관련 국가 기관들도 국민연합과는 별개로 운영되었다. 공식 기관지로는 1931년 창간된 Diário da Manhãpor가 있었으며, 이를 통해 신국가 체제의 안정성을 강조하고 국민적 단결을 촉구했다.[4] 살라자르 자신도 1938년 국민연합의 활동이 미약함을 인정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권 이미지 개선을 위한 제한적인 자유화 조치가 발표되기도 했으나,[23] 국민연합은 1934년부터 1973년까지 포르투갈 공화국 의회 선거에서 모든 의석을 독점하며 실질적인 정치 경쟁은 부재했다.

1970년, 살라자르의 뒤를 이은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는 당명을 '''국민행동'''(Ação Nacional Popular|악상 나시오날 포풀라르por)으로 변경하고[24] 일부 개혁과 완화 조치를 시도했다.[25][26][27][28]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살라자르주의 강경파의 반발과 식민지 전쟁 등의 문제로 한계에 부딪혔고,[29] "민주화 없는 자유화"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30] 국민연합(국민행동)은 정권 유지 외에 뚜렷한 이념이나 정치적 동력을 갖추지 못했고, 결국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이스타두 노부 체제가 붕괴하면서 함께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국민연합의 후신을 자처하는 어떤 정당도 현대 포르투갈 의회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2. 1. 창당과 초기 활동 (1930-1945)

1926년 5월 28일 쿠데타 이후, 포르투갈의 국가독재 시대였던 1930년 7월 30일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에 의해 창당되었다. 1933년 국가독재 시대가 끝나고 신국가 체제가 수립되면서 국민연합은 유일 합법 정치 조직이자 여당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국민연합은 정당이 아니라 "모든 포르투갈인의 단결 조직"으로 규정되었다. 살라자르는 창당 연설에서 국민연합의 역할을 모호하게 설명하며, 공화주의자, 군주주의자, 가톨릭교도 등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모든 세력을 포괄하고자 했다. 초기 원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신념에 관계없이 살라자르의 1930년 연설 원칙을 따르는 모든 시민을 허용한다고 명시했다. 국민연합은 이스타두 노부 체제 하에서 법적으로 허용된 유일한 조직이었으며, 다른 모든 정당은 금지되고 박해받았다.

정권 초기에는 다양한 세력을 아우르려 했으나, 1934년 살라자르는 파시즘 성향의 국가 생디칼리스트 세력을 숙청했다. 지도자 프란시스쿠 롤랑 프레투를 체포하고 추방했으며, 이 과정에서 국가 생디칼리스트는 여러 파벌로 나뉘어 일부는 망명하고 다수는 국민연합에 흡수되었다. 살라자르는 국가 생디칼리스트 운동이 "특정 외국의 모델", 즉 독일 나치즘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젊음의 찬양, 직접적인 행동을 통한 힘의 숭배, 사회 생활에서 국가 정치 권력의 우월성 원칙, 단일 지도자 뒤에서 대중을 조직하려는 성향" 등을 파시즘의 특징으로 지적하며, 이를 이스타두 노부가톨릭 코르포라티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숙청을 통해 국민연합과 이스타두 노부 체제의 권위주의적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국민연합의 초대 지도자는 내무부 장관 로페스 마테우스 대령이었고, 살라자르가 당 총재를 맡았다. 중앙위원회 구성은 정당이 정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보다는 단순히 지원하는 역할에 머물렀음을 보여준다. 살라자르가 총재, 쿠냐 레알 ULR 전 멤버 알비노 도스 레이스가 부총재로 지명되었고, 중앙위원회에는 비사이야 바레토, 판사이자 통합주의 군주주의자 조앙 아마랄, 경제적 이익 연합과 연계되었던 누노 메시아 등이 포함되었다. 당직은 종종 정부 업무에서 물러난 인사들의 명예직처럼 여겨졌으며, 특히 초기에는 젊은 세대의 참여가 부족하여 첫 의회 대표의 68%가 40세 이상이었다.

역사학자 안토니오 코스타 핀토는 국민연합이 약한 단일 정당을 가진 독재 정권의 약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1933년까지 당내 활동은 거의 없었고, 1934년 새로운 제도가 수립된 이후에는 1944년까지 무기력한 상태에 머물렀다. 이는 정권 자체가 국민연합을 선거와 정당성 확보 수단 외에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로렌스 S. 그레이엄과 해리 M. 마클러 역시 이 정당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며, 선거 기간 외에는 활동이 미미했고 대중 기반이 약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국민연합의 약하고 비조직적인 특성이 포르투갈 내 "진정한 파시스트 운동의 부재"를 보여주며, 파시스트 운동 특유의 청년 단체나 민병대 조직 능력이 부족했다고 분석했다.[22] 이스타두 노부의 선전, 청년, 노동 관련 국가 기관들도 국민연합과는 별개로 운영되었다.

1931년 4월 4일, 국민연합의 공식 기관지 ''Diário da Manhã''가 창간되었다. 이 신문을 통해 국민연합은 포르투갈 제1공화국의 "외국 제도"가 포르투갈 현실과 맞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이스타두 노부 체제의 안정성을 강조하고 국민적 단결을 촉구했다.[4]

1938년 살라자르 자신도 국민연합의 활동이 "계속 감소하여 거의 소멸될 지경"이라고 인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10월, 살라자르는 서방 세계에서의 정권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시민권 회복을 포함한 일부 자유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에는 의회 선거, 일반 정치 사면, 언론의 자유 회복, 법적 탄압 축소 및 "인신 보호 영장" 권리 도입 약속 등이 포함되었다.[23] 이는 국민연합 자체의 활성화보다는 전후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가까웠다.

2. 2. 이스타두 노부 체제와 국민연합 (1933-1968)

1933년 이스타두 노부(신국가) 체제가 수립되면서 국민연합은 법적으로 허용된 유일한 정당이 되었다. 다른 모든 정당은 금지되고 박해받았는데, 초기 독재 정권 지지 세력이었던 프란시스쿠 롤랑 프레투가 이끌던 국가 생디칼리스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민연합은 공식적으로 정당이 아니라 "모든 포르투갈인의 단결 조직"으로 규정되었으며, 살라자르 정권을 지지하는 종속적인 우산 조직으로 기능했다.

1934년 살라자르는 프란시스쿠 롤랑 프레투를 체포하고 추방하며 국가 생디칼리스트 지도부를 숙청했다. 국가 생디칼리스트는 여러 파벌로 나뉘었으며, 일부는 망명했지만 대다수는 국민연합에 흡수되었다. 살라자르는 국가 생디칼리스트가 특정 외국의 모델(나치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비판하며, 그들의 노선이 신국가의 가톨릭 코르포라티즘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국민연합의 초대 지도자는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로페스 마테우스 대령이었으며, 중앙위원회 구성 역시 정당이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라기보다는 정권을 지원하기 위한 조직임을 보여주었다. 살라자르가 당 총재를 맡았고, 알비노 도스 레이스가 부총재로 임명되었다. 초기 중앙위원회에는 비사이야 바레토, 군주주의자 조앙 아마랄, 경제 이익 연합과 연관된 누노 메시아 등이 포함되었다. 당직은 일종의 명예직이나 정부 업무에서 물러난 이들의 자리로 여겨졌다. 특히 1930년대에는 젊은 세대의 참여가 부족하여 첫 의회 대표의 68%가 40세 이상이었다.

역사학자 안토니오 코스타 핀토는 국민연합을 약한 단일 정당을 가진 독재 정권의 약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했다. 1933년까지 당내 활동은 거의 없었으며, 1934년부터 1944년까지는 정권의 선거 및 정당성 부여 수단 외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며 무력한 상태에 머물렀다. 로렌스 S. 그레이엄과 해리 M. 마클러 역시 국민연합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며, 국가 운영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선거 기간에만 일시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이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국민연합이 청년 단체나 민병대를 조직하지 못한 점을 들어 포르투갈에 진정한 파시즘 운동이 부재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22] 신국가 체제 하에서 선전, 청년, 노동 관련 국가 기관들이 설립되었지만, 이들은 국민연합과는 별개로 운영되었다.

국민연합의 공식 기관지는 1931년 4월 4일 창간된 Diário da Manhãpt였다. 이 신문은 포르투갈 제1공화국의 정치 체제가 포르투갈 현실과 맞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신국가의 안정성을 강조하고 국민적 단결을 촉구했다.[4] 1938년 살라자르 스스로도 국민연합의 활동이 "계속 감소하여 거의 소멸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 10월, 살라자르는 서방 세계에 정권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자유화 조치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의회 선거 실시, 정치범 사면, 언론 자유 회복, 법적 탄압 완화, 인신 보호 영장 도입 약속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실질적인 민주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살라자르 정권에 반대하는 다양한 세력들이 민주적 통일 운동(MUD)을 결성하여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MUD는 초기에 중도 야당이 주도했지만, 점차 포르투갈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MUD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합법적으로 활동했지만, 당시 정치 시스템은 야당이 실제로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게 조작되어 있었다.[23]

국민연합은 1934년부터 살라자르의 통치가 끝나는 1968년을 넘어 1973년까지 포르투갈 공화국 의회 선거에서 모든 의석을 독점했다. 1945년 이후 야당 후보 출마가 명목상 허용되었으나, 실제로는 선거 과정에서 사퇴하는 경우가 많아 실질적인 경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 3. 국민행동으로의 개칭과 몰락 (1968-1974)

1968년 살라자르가 건강 문제로 물러나고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총리직을 계승하면서 국민연합은 변화를 맞이했다. 1970년, 카에타누는 당명을 '''국민행동'''(Ação Nacional Popular|악상 나시오날 포풀라르pt, ANP)으로 변경했다.[24]

1970년부터 사용된 국민행동 로고


카에타누는 살라자르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화된 통치를 시도했다. 경찰은 법을 더 존중하게 되었고 온건한 반대파에 대한 용서가 이루어졌으며, 국민행동은 "일정 수준의 다원주의"를 지향한다고 선언했다.[25] 검열이 완화되고 정치 토론이 허용되었으며, 파업과 시위도 이전보다 용인되었다. 또한, 비국가 노동 운동인 포르투갈 노동자 총연맹의 결성도 허용되었다. 카에타누는 살라자르의 코르포라티즘을 개혁하여, 1969년에는 국가 생디카가 정부 승인 없이 자체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를 부여했다. 이는 노동조합이 점차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27] 임금 분쟁 해결 방식도 개혁되어 노동자 측의 독립적인 교섭 권한이 강화되었고, 다양한 사회 프로그램도 도입되었다.[28] 살라자르와 비교했을 때 카에타누 체제는 "훨씬 더 개방적이고, 다원적이며, 사회적으로 더 정의로운 시스템"으로 평가되기도 한다.[26]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국민행동은 여전히 이스타두 노부 체제의 유일 합법 정당이었으며, 정치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1969년 입법 선거에서는 공식적인 야당 경쟁이 있었지만, 선거 과정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국민행동은 모든 선거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24]

카에타누의 개혁은 살라자르주의 강경파의 반발과 지속되는 아프리카 식민지 전쟁의 부담 속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그는 민주화 과정을 추진하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결국 "민주화 없는 자유화"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는다.[29] 이러한 정치적 교착 상태와 사회적 불안정은 정권의 무능력을 드러냈고,[30] 1974년 4월 25일 발발한 카네이션 혁명으로 이어졌다. 혁명으로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가 실각하고 제2공화국 체제가 무너지면서 국민행동 역시 해산되었다. 국민행동은 혁명 이후 완전히 소멸했으며, 후신을 자처하는 어떤 정당도 현대 포르투갈 공화국 의회에서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3. 이념

국민연합은 공식적으로 정당이라기보다는 살라자르의 이스타두 노부 체제를 지지하기 위해 창설된 "모든 포르투갈인의 단결 조직"이었다. 그 주된 역할은 정권을 적극적으로 이끌기보다는 지지하고 뒷받침하는 데 있었으며, 이 때문에 정권 유지 외에 뚜렷한 자체 이념이나 철학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22] 국가 생디칼리스트 지도자였던 프란시스쿠 롤랑 프레투는 국민연합을 "우리 시대의 국가적이고 혁명적인 필수 사항에 대한 영혼이나 신념이 없는 모든 정당의 온건파, 부르주아의 집단"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연합과 이스타두 노부 체제의 운영 방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이념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 권위주의 및 반(反)민주주의: 국민연합은 이스타두 노부 하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허용된 정치 조직이었으며, 다른 모든 정당(초기 지지 세력이었던 국가 생디칼리스트 포함)은 금지되고 탄압받았다. 이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명백히 거부하는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을 보여준다. 선거는 형식적으로 치러졌으나, 야당의 활동은 극히 제한되었고 국민연합(후일 국민 행동)이 모든 의석을 차지했다.[24]
  • 반공주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등장한 민주적 통일 운동(MUD)과 같은 반대 세력은 포르투갈 공산당의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경계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23] 이는 체제 유지를 위해 공산주의를 비롯한 좌파 세력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반공주의적 입장을 반영한다.
  • 민족주의: 당명("국민연합")과 "모든 포르투갈인의 단결"을 표방한 점, 그리고 선전 활동에서 제1공화국의 "외국 제도"와 혼란상을 비판하며 이스타두 노부의 안정성과 포르투갈적 가치를 내세운 것은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낸다.[4]
  • 가톨릭 조합주의(코르포라티즘): 살라자르는 국가 생디칼리스트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파시즘적 경향(청년 숭배, 폭력 숭배, 국가 권력 우위, 단일 지도자 중심의 대중 조직화 등)과 이스타두 노부의 '가톨릭 코르포라티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강조했다. 이는 국민연합이 외국의 파시즘 모델을 직접 모방하기보다는 가톨릭 교리와 조합주의에 기반한 포르투갈 고유의 권위주의 체제를 지지했음을 시사한다.


1970년,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집권한 후 당명은 '''국민 행동'''(Ação Nacional Popularpt)으로 변경되었고, 정권은 약간의 자유화 조치를 시도했다.[24][25] 카에타누는 살라자르 시대의 조합주의(생디칼리즘)를 개혁하여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일부 확대하고 사회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27][28] 변화를 모색했으나, 살라자르주의 강경파의 반발과 정치적 교착 상태로 인해 완전한 민주화에는 이르지 못하고 "민주화 없는 자유화"라는 한계를 보였다.[29][30]

결론적으로 국민연합(및 국민 행동)은 이스타두 노부 체제를 유지하고 지지하는 것 외에 독자적이고 강력한 이념적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으며, 이는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별다른 저항 없이 급속히 소멸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4. 조직

국민연합은 살라자르 정권 하에서 공식적으로 정당이 아닌 "모든 포르투갈인의 단결 조직"으로 창설되었다.[2] 이는 정권 자체를 지원하기 위한 종속적인 우산 조직으로 기능했으며,[3] 신국가 체제 하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활동이 허용된 정치 조직이었다. 다른 모든 정당, 심지어 초기 지지자였던 프란시스쿠 롤랑 프레투가 이끄는 국가 생디칼리스트조차 금지되고 박해받았다.

초기에는 공화주의자, 군주주의자, 가톨릭 신자 등 국가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다양한 세력을 포괄하려 했으며, "정치적 또는 종교적 신념에 관계없이" 살라자르의 원칙을 따르는 모든 시민을 받아들인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실제 조직 운영은 정권 유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국민연합 초기 지도부
직책인물비고
초대 지도자로페스 마테우스 대령당시 내무부 장관
대통령살라자르
부통령알비노 도스 레이스쿠냐 레알 ULR 전 멤버
중앙위원회 위원비사이야 바레토
중앙위원회 위원조앙 아마랄판사이아 통합주의 군주주의자
중앙위원회 위원누노 메시아1920년대 경제적 이익 연합 연계



중앙위원회의 구성은 국민연합이 정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보다는 지원하는 역할에 머물렀음을 보여준다. 당내 주요 직책은 종종 정부 업무에서 물러난 인사들의 "은퇴" 자리나 명망 있는 휴식처로 여겨졌다. 특히 1930년대에는 젊은 세대의 참여가 부족하여, 첫 번째 의회 대표의 68%가 40세 이상이었다.

역사학자 안토니오 코스타 핀토는 국민연합을 약한 단일 정당 체제를 가진 독재 정권의 한계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했다. 1933년까지 당 내부 활동은 거의 없었으며, 1934년 이후 새로운 제도가 수립된 뒤에는 1944년까지 사실상 무력한 상태에 머물렀다. 정권 자체도 선거나 정당성 확보 수단 외에는 국민연합에 큰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로렌스 S. 그레이엄과 해리 M. 마클러는 이 조직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평가했고, 국가 생활에서 거의 보이지 않고 선거 기간에만 일시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들은 국민연합이 파시스트 운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년 단체나 민병대를 조직할 능력이 부족했던 점을 포르투갈 내 '진정한 파시스트 운동의 부재'를 보여주는 증거로 들었다.[22]

신국가 정권은 선전, 청년, 노동을 위한 별도의 국가 기관을 운영했지만, 이들은 국민연합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국민연합의 공식 신문은 1931년 4월 4일 창간된 Diário da Manhã|지아리우 다 마냥pt이었다. 이 신문을 통해 국민연합은 포르투갈 제1공화국의 "외국 제도"가 포르투갈 현실과 맞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신국가 체제의 안정성을 강조하고 국민적 단결을 촉구했다.[4]

1970년,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총리가 된 후 당명을 '''국민 행동'''(Ação Nacional Popular|아상 나시오날 포풀라르pt)으로 변경했다.[24] 카에타누 치하에서는 어느 정도의 다원주의를 용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25] 카에타누는 비국가 노동 운동인 포르투갈 노동자 총연맹의 결성을 허용했다.[27] 그러나 당 자체의 근본적인 성격 변화는 미미했으며, 여전히 정권 유지라는 기본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프란시스쿠 롤랑 프레투는 1945년 국민연합을 "우리 시대의 국가적이고 혁명적인 요구에 대한 영혼이나 신념이 없는, 모든 정파의 온건파와 부르주아지의 집합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뚜렷한 이념적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에, 1974년 포르투갈 혁명 이후 국민연합(국민 행동)은 급속히 소멸했다.

5. 역대 선거 결과

이스타두 노부 체제(1933년~1974년) 하에서 국민연합은 유일 합법 정당으로서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당시 선거는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마르셀루 카에타누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제 아래 형식적으로 치러졌으며, 야당 활동 제한과 불공정한 선거 환경으로 인해 실질적인 경쟁은 부재했다.

국민연합은 총선에서 의석을 독점했고, 대통령 선거에서도 지지 후보를 당선시켰다. 이는 당시 포르투갈의 비민주적 정치 상황과 국민연합의 일당 독재 체제를 반영한다. 자세한 선거 결과는 하위 문서를 참고하라.

5. 1. 대통령 선거

국민연합 집권 시기 동안 치러진 대통령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초기에는 국민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했으나, 1965년부터는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국민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

선거정당 후보득표수%결과
1928년오스카르 카르모나761,730100%당선
1935년653,754100%당선
1942년829,042100%당선
1949년761,730100%당선
1951년프란시스쿠 크라베이루 로페스761,730100%당선
1958년아메리쿠 토마스765,08176.42%당선



'''국회에서 선출된 대통령'''

선거정당 후보득표수%결과
1965년아메리쿠 토마스55697.7%당선
1972년61692.1%당선


5. 2. 총선

이스타두 노부 시대(1933년~1974년) 동안 국민연합은 포르투갈 의회 선거에서 의석을 독점했다. 1934년부터 1973년까지 치러진 모든 총선에서 국민연합은 공식적으로 100% 또는 거의 모든 표를 획득하며 의회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 시기 야당 활동은 명목상 허용되었으나, 실제로는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와 이후 마르셀루 카에타누 정권의 엄격한 통제 아래 있었다. 선거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가까웠으며, 야당 후보들은 불공정한 선거 환경과 탄압으로 인해 선거 전에 사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국민연합은 실질적인 경쟁 없이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래는 이스타두 노부 시기 국민연합(1970년 이후 국민인민행동)의 총선 결과이다.

선거총리득표수득표율 (%)의석 수 (총 의석 수)비고
1934년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476,706100%100 / 100유일 합법 정당
1938년694,290100%100 / 100유일 합법 정당
1942년758,215100%100 / 100유일 합법 정당
1945년489,133100%120 / 120의석 수 20석 증가, 야당 후보 출마했으나 불공정 선거로 철회
1949년927,264100%120 / 120
1953년845,281100%120 / 120
1957년911,618100%120 / 120
1961년973,997100%130 / 130의석 수 10석 증가
1965년998,542100%130 / 130
1969년마르셀루 카에타누981,26387.99%130 / 130일부 야당 후보 출마했으나 국민연합(국민인민행동) 의석 독점 유지
1973년1,393,294100%150 / 150마지막 선거, 의석 수 20석 증가



1969년 선거에서는 민주 야당 연합이 일부 참여했으나, 여전히 선거 과정의 제약으로 인해 국민연합(당시 국민인민행동으로 개칭)이 모든 의석을 차지했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이스타두 노부 체제의 비민주적 성격과 국민연합의 일당 독재 체제를 명확히 보여준다.

6. 평가

국민연합은 신국가 체제를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으나, 정권 유지 외에 뚜렷한 자체 이념이나 정치적 동력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식적으로는 정당이 아닌 "모든 포르투갈인의 단결 조직"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정권에 종속된 유일 합법 단체로서 다른 정치 세력은 배제되었다.

역사학자 안토니오 코스타 핀토는 국민연합이 강력한 단일 정당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독재 정권의 약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정권 스스로도 선거나 정당성 확보 수단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1934년부터 1944년까지는 거의 활동이 없는 무력한 상태에 머물렀다고 평가된다.

로렌스 S. 그레이엄과 해리 M. 마클러는 국민연합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며, 대중적 기반이 취약하고 평상시에는 활동이 미미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국민연합이 청년 단체나 민병대 같은 파시즘 정당의 특징적 조직을 갖추지 못한 점을 들어, 포르투갈 신국가 체제가 일반적인 파시즘과는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삼기도 했다.[22]

국가 생디칼리스트 지도자였던 프란시스쿠 롤랑 프레투는 1945년 국민연합을 "우리 시대의 국가적이고 혁명적인 필수 사항에 대한 영혼이나 신념이 없는 모든 정당의 온건파, 부르주아의 집단"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이념적 공백을 지적했다.

1968년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집권한 후, 당명을 '국민 행동'으로 바꾸고 일부 자유화 조치를 시도했다. 경찰의 권력 남용을 줄이고, 온건한 반대파를 용인하며, 제한적인 다원주의를 표방하기도 했다.[25] 검열 완화, 정치 토론 허용, 노동 운동 일부 인정 등 변화가 있었으나[27][28], 이는 근본적인 민주화로 나아가지 못했다. 카에타누는 살라자르주의 강경파의 저항에 부딪혀 개혁을 완수하지 못했고,[29] 결국 그의 통치는 "민주화 없는 자유화"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30] 식민지 전쟁 지속과 내부 분열 심화 속에서 정치적 해결 능력을 상실한 국민연합(국민 행동)은[30] 1974년 포르투갈 혁명으로 신국가 체제가 무너지자 급속히 와해되었다. 이후 포르투갈 정치 지형에서 국민연합의 명맥을 잇는 주요 정당은 등장하지 않았다.

참조

[1] 서적 "National Union" Bertrand Editora 1996
[2] 웹사이트 Decree N° 48597 http://dre.pt/pdfgra[...]
[3] 간행물 "Os atestados de bom comportamento moral e civil até ao 25 de Abril de 1974. Exposição 'Documento do Mês' do Arquivo Municipal de Silves'" http://www.terraruiv[...] Terra Ruiva 2018-04
[4] 학술지 The Memory of the Portuguese First Republic throughout the Twentieth Century
[5] 서적 A history of fascism, 1914-1945 Routledge
[6] 서적 Maurras – Le chaos et l'ordre Flammarion
[7] 학술지 The Political and Ideological Origins of the Estado Novo in Portugal https://www.jstor.or[...]
[8] 서적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Political Science https://books.google[...] SAGE Publications 2011-09-07
[9] 서적 Political Ideologies: An Introduction Routledge
[10] 서적 Catholic Roots and Democratic Flowers: Political Systems in Spain and Portugal Greenwood Publishing Group
[11] 서적 Spanish Catholicism: An Historical Overview https://books.google[...] Univ of Wisconsin Press
[12] 문서 Portugal’s Colonial Complex: From Colonial Lusotropicalism to Postcolonial Lusophony http://miguelvaledea[...]
[13] 웹사이트 O luso-tropicalismo e o colonialismo português tardio https://www.buala.or[...] 2013-03-05
[14] 서적 The Nature of Fascism Routledge
[15] 학술지 "Portugal's First Domino: ‘Pluricontinentalism’ and Colonial War in Guiné-Bissau, 1963–1974."
[16] 서적 An Intelligent Person's Guide to Fascism https://books.google[...] Gerald Duckworth & Co Ltd 2000
[17] 학술지 Elites, Single Parties and Political Decision-Making in Fascist-Era Dictatorships
[18] 학술지 The Salazar “New State” and European Fascism: Problems and Perspectives of Interpretation https://core.ac.uk/d[...] European University Institute
[19] 서적 Fascism without Borders: Transnational Connections and Cooperation between Movements and Regimes in Europe from 1918 to 1945 Berghahn Books
[20] 서적 The Anatomy of Fascism Alfred A. Knopf
[21] 서적 Salazar e os Fascismos: Ensaio Breve de História Comparada Edições Tinta-da-China
[22] 서적 Contemporary Portugal: The Revolution and Its Antecedents University of Texas Press
[23] 간행물 Revista História (History Magazine) – Number 8 (New Series)
[24] 웹사이트 Portugal, 1969 http://www.ipu.org/p[...] Inter-Parliamentary Union
[25] 서적 Contemporary Portugal: The Revolution and Its Antecedents University of Texas Press
[26] 서적 Contemporary Portugal: The Revolution and Its Antecedents University of Texas Press
[27] 서적 Contemporary Portugal: The Revolution and Its Antecedents University of Texas Press
[28] 서적 Contemporary Portugal: The Revolution and Its Antecedents University of Texas Press
[29] 서적 Contemporary Portugal: The Revolution and Its Antecedents University of Texas Press
[30] 서적 Contemporary Portugal: The Revolution and Its Antecedents University of Texas Press
[31] 서적 Stepan Bandera: The Life and Afterlife of a Ukrainian Nationalist Columbia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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