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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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제2공화국은 1926년 쿠데타로 수립된 군사 정부가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살라자르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총리직에 올라 1933년 새 헌법을 제정하며 이스따두 노부(신국가)를 선포, 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이 체제는 국가주의와 가톨릭 가치를 강조하며, 국민 연합을 통해 여론을 통제하고, 포르투갈 군단과 청년단을 통해 군국주의적 특징을 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립을 지켰으나,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국제적 고립을 겪었고, 식민지 전쟁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붕괴되었으며, 이후 민주화 과정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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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제2공화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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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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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신, 조국, 가족 (Deus, Pátria e Familia) |
국가 (國歌) | 아 포르투게자 (A Portuguesa) |
수도 | 리스본 |
공용어 | 포르투갈어 |
종교 | 로마 가톨릭 (사실상) |
정치 | |
정치 체제 | 단일 대통령 공화국 하의 일당제 권위주의적 조합주의 독재 |
대통령 | 오스카르 카르모나 (Óscar Carmona) (1926년–1951년) 프란시스코 크라베이루 로페스 (Francisco Craveiro Lopes) (1951년–1958년) 아메리쿠 토마스 (Américo Tomás) (1958년–1974년) |
총리 |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António de Oliveira Salazar) (1932년–1968년) 마르셀루 카에타누 (Marcelo Caetano) (1968년–1974년) |
입법부 | 국민의회 |
자문 기관 | 코포라티브 회의소 |
역사 | |
주요 사건 | 1933년 헌법 국민투표 (1933년 3월 19일) 1933년 헌법 제정 (1933년 4월 11일) 유엔 가입 (1955년 12월 14일) 카네이션 혁명 (1974년 4월 25일) |
이전 | 디타두라 나시오날 (Ditadura Nacional) |
이후 | 국가 구원 군사 평의회 (National Salvation Junta) 앙골라 인민 공화국 (Angola People's Republic) 모잠비크 인민 공화국 (Mozambique People's Republic) 마카오 (Macau) 인도 (India) 상투메 프린시페 (Sao Tome and Principe) 기니비사우 (Guinea-Bissau) 카보베르데 (Cape Verde) |
면적 | |
전체 | 92,212 km² |
식민지 | 2,168,071 km² |
인구 | |
1970년 | 25,796,000명 |
경제 | |
통화 | 포르투갈 에스쿠도 (Portuguese Escudo) |
명목 GDP (1970년) | 158억 8800만 달러 |
1인당 명목 GDP (1970년) | 616 달러 |
기타 | |
국가 모토 | 신, 조국, 가족 (Deus, Pátria e Familia) |
2. 배경
1926년 군사 쿠데타로 베르나르디누 마샤두 대통령이 실각하고 군사정부가 등장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닥치자 오스카르 카르모나 대통령은 안토니우 살라자르를 장관으로 임명했고, 살라자르는 경제 위기를 해결했다.[10] 1932년 카르모나는 살라자르를 총리로 임명했다. 총리가 된 살라자르는 내각책임제의 특징을 악용하여 권력을 키워 독재자가 되었고, 1933년 새 헌법을 제정하고 이스타두 노부(신국가)의 성립을 선언하여 자신의 독재 체제를 확립했다.[10]
1910년 군주제가 무너지고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16년 동안 8명의 대통령이 나올 정도로 국내가 혼란스러웠고, 군부의 쿠데타가 국민의 지지를 얻는 상태였다. 1951년 카르모나 대통령이 사망하자 살라자르는 선거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대통령을 겸임하고, 프란시스쿠 크라베이루 로페스를 대통령으로 옹립했다.
2. 1. 포르투갈 제1공화국 (1910-1926)
10월 5일 혁명으로 포르투갈 군주국이 무너지고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제1공화국은 16년 동안 8명의 대통령이 나올 정도로 국내가 혼란스러웠고, 잦은 정권 교체와 쿠데타 시도로 인해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군부의 쿠데타가 국민의 지지를 얻는 배경이 되었다.[10]2. 2. 1926년 군사 쿠데타와 살라자르의 등장
1926년 5월 28일 쿠데타로 포르투갈 제1공화국의 베르나르디누 마샤두 대통령이 실각하고 군사 정부가 등장했다.[10]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포르투갈 경제가 어려워지자, 오스카르 카르모나 대통령은 안토니우 살라자르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살라자르는 뛰어난 경제 정책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했고, 1932년 카르모나는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10]1910년 군주제가 무너지고 제1공화국이 수립된 후, 포르투갈은 16년 동안 8명의 대통령이 나올 정도로 국내 정세가 혼란스러웠고, 군부의 쿠데타가 국민의 지지를 얻는 상황이었다.
제1공화국의 종언을 주도한 마누엘 고메스 다 코스타 장군은 불과 1개월 만에 권력을 상실했고, 1926년 7월에 안토니오 오스카르 카르모나 장군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11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이듬해 3월 국민투표로 신임을 얻었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다 코스타 장군에 의해 재무 장관으로 초빙되었지만 며칠 만에 사임하고 은둔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카르모나는 살라자르를 다시 재무 장관으로 초빙했고, 살라자르는 그 수완으로 경제를 재건했다.
3. 체제의 특징
에스타두 노부 체제는 국민들에게 국가주의와 가톨릭 신앙을 강조했다. 모든 교육은 포르투갈 조국과 대항해 시대 이후 5세기 동안 유지된 해외 영토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경제적으로는 협동조합주의를 받아들였으며, 정치적으로는 국가연합당(União Nacionalpt)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다. 외곽 단체로는 이탈리아의 검은 셔츠단을 모방한 준군사 조직인 포르투갈 여단(Legião Nacionalpt)과 독일 히틀러 유겐트를 모방한 청년단체인 포르투갈 청년단(Mocidade Portuguesapt)이 있었다.
이스타두 노부 체제의 또 다른 기둥은 비밀경찰 PIDE였다. 이 시대 동안 많은 정치범들이 카보베르데 군도에 있는 타하팔(tarrafal) 감옥으로 보내졌다.[10]
제2차 세계 대전 때 영국 등 연합국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켰는데, 이는 1386년 체결된 윈저 조약(영국-포르투갈 동맹)에 따른 것이다.
3. 1. 이념
이스타두 노부 체제는 국민들에게 국가주의와 가톨릭의 가치를 강조했다. 모든 교육 체계는 포르투갈 조국과 대항해 시대 이래 5세기 동안 포르투갈이 보유한 해외 영토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10]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에 반대했다.[10] 그는 가톨릭, 보수주의, 민족주의를 옹호했다.[10] 살라자르는 식민지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브라질 역사가 길베르투 프레이레의 루소트로피칼리즘 개념을 채택하여, 포르투갈이 15세기부터 다문화, 다인종, 다대륙주의 국가였으므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해외 영토를 잃는 것은 국가를 분열시키고 포르투갈의 독립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10]
자이메 노게이라 핀투[12] 및 루이 라모스[13]와 같은 일부 포르투갈 학자들에 따르면, 살라자르의 초기 개혁과 정책은 포르투갈 제1공화국(1910–1926)의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재정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이후 평온한 사회 질서와 경제 성장을 가져왔다.[10]
정치면에서는 우파 국가연합당(União Nacionalpt)이 유일 정당이었다.[10] 외곽 단체로는 이탈리아의 검은 셔츠단을 모방한 준군사 조직인 포르투갈 여단(Legião Nacionalpt), 독일 히틀러 유겐트의 조직 형태를 모방한 청년단체인 포르투갈 청년단(Mocidade Portuguesapt)이 있었다.[10]
3. 2. 정치
이스타두 노부 체제는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1인 독재 체제로, 정치적으로는 우파 성향의 국가연합당(União Nacionalpt)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다.[10][11] 살라자르는 1938년 독일-이탈리아-일본 방공 협정(반코민테른 협정)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포르투갈 공산당은 탄압했다.이탈리아의 검은 셔츠단을 모방한 준군사 조직인 포르투갈 여단(Legião Nacionalpt),[12][13]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를 모방한 청년단체인 포르투갈 청년단(Mocidade Portuguesapt) 등의 외곽 단체를 운영했다.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비밀경찰(Polícia Internacional e de Defesa do Estadopt, "국가 방위 국제 경찰")을 운영했다. 이스타두 노부 시대 동안 많은 정치범들이 카보베르데 군도에 있는 타하팔(tarrafal) 감옥으로 보내졌다.
3. 3. 경제

1926년 포르투갈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막대한 공공 부채였다.[40]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살라자르는 재무부 장관 임명을 여러 차례 거절했으나, 1928년 시넬 드 코르데스 장관 재임 기간 동안 공공 적자가 계속 증가하고 재정 붕괴 위협에 놓이자, 결국 81대 재무부 장관이 되는 데 동의했다. 그는 직책을 수락하기 전에 모든 정부 부서의 지출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고, 취임한 날부터 사실상 재정 황제가 되었다.
1년 이내에 살라자르는 예산을 균형 있게 만들고 포르투갈의 통화를 안정시켰다.[40] 국가 회계를 정리하고 긴축을 시행하며 낭비를 줄여 많은 예산 흑자를 만들어냈다.[40]
살라자르 치하의 이스타두 노부(신국가)는 혼합 경제를 채택했다.[41]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가 지배적이었지만, 광범위한 국가 규제가 이루어졌다. 주요 산업가들은 최소한의 공공 소유와 경제 경쟁 제한을 보장받는 대가로 광범위한 통제를 받아들였다.[41] 살라자르의 경제는 고용주와 노동자를 길드와 신디케이트로 조직하여 산업별로 나누었다. 국가는 민간 투자 결정과 임금 수준에 대해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했다. 산업 계획 이전, 건설, 기존 기업의 생산 능력 확장을 위한 투자 등은 정부의 승인을 필요로 했다.[41] 하워드 J. 위아르다에 따르면 "현실에서 노동과 자본, 그리고 실제로 전체 기업 제도적 네트워크는 중앙 국가 기구에 종속되었다".[41] 무역과 관련하여 신국가는 광범위한 보호무역주의를 보였다.[42]
1950년부터 살라자르가 사망한 1970년까지 포르투갈의 1인당 GDP는 연평균 5.7% 증가했다.[6] 1960년대 초, 경제 및 기술 전문성을 갖춘 새로운 기술 관료의 등장은 포르투갈을 국제 투자를 유치하는 매력적인 국가로 만들었다. 산업 발전과 경제 성장은 196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살라자르 재임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유럽 자유 무역 연합 (EFTA), 경제 협력 개발 기구 (OECD),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GATT), 국제 통화 기금 (IMF) 및 세계 은행에 가입했다.[6] 이는 살라자르의 보다 대외 지향적인 경제 정책의 시작을 알렸다. 포르투갈의 대외 무역은 수출 52%, 수입 40% 증가했다. 1960년부터 1973년까지의 경제 성장과 자본 형성 수준은 전례 없는 성장률을 보였다.[6]
thumb), 리스본, 포르투갈, 1964년 4월]]
1960년, 살라자르의 대외 지향적인 경제 정책이 시작되면서,[43] 포르투갈의 1인당 GDP는 유럽 공동체(EC-12) 평균의 38%에 불과했다. 1968년에는 48%로 상승했고, 1973년에는 56.4%에 도달했다.[44] 장기적인 분석에 따르면, 포르투갈 경제는 1950년까지 약간 회복되었고, 이후 1974년 4월의 카네이션 혁명까지 서유럽 경제와 강력한 경제 수렴의 길을 걷게 되었다.[45] 1960년부터 1973년까지의 포르투갈 경제 성장은 서유럽과의 통합을 위한 기회를 만들었다. 이주, 무역, 관광 및 외국인 투자를 통해 개인과 기업은 생산 및 소비 패턴을 변경하여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다.[46]

해외 영토와 관련하여, 군사적 조치 외에도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변화의 바람"에 대한 포르투갈의 공식적인 대응은 행정적 및 경제적으로 본토와 더 밀접하게 통합하는 것이었다. 이는 인구 및 자본 이동, 무역 자유화 및 통화 통합을 통해 이루어졌다. 1961년에 설립된 통합 프로그램은 1964년 1월까지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 수입 관세 철폐를 규정했다. 이러한 이중 관세 시스템의 효과는 포르투갈의 수출이 식민지 시장에 우선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 앙골라 해외 속주와 모잠비크의 해외 속주 경제가 호황을 누렸다.
포르투갈 경제의 자유화는 살라자르의 후임자인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1968–1974) 하에서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그의 행정부는 대부분의 부문에서 기업에 대한 산업 면허 요건을 폐지하고 1972년 유럽 공동체와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1973년 초에 발효된 이 협정에 따라 포르투갈은 대부분의 공동체 상품에 대한 제한을 1980년까지, 특정 민감한 제품에 대해서는 1985년까지 폐지해야 했다. 1960년부터 EFTA 회원 자격과 외국인 투자자의 증가로 인해 1960년에서 1973년 사이에 포르투갈의 산업 현대화와 수출 다변화에 기여했다. 카에타누는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사회적 개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며, 예를 들어 사회 보장금을 납부할 기회가 없었던 농촌 노동자에게 매월 연금을 지급했다. 시네스에 주요 석유 처리 센터 건설과 같은 국가 차원에서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졌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전에는 가장 크고, 기술적으로 가장 발전된 기업이 실적을 기반으로 한 경영 경력에 가장 큰 기회를 제공했다.
1970년대 초까지 포르투갈의 빠른 경제 성장과 증가하는 소비 및 새로운 자동차 구매로 인해 교통 개선이 우선시되었다. 브리사 – 포르투갈 고속도로는 1972년에 설립되었으며, 정부는 이 회사에 현대적인 고속도로 네트워크를 설계, 건설, 관리 및 유지 관리할 수 있는 30년의 양허를 부여했다.
카네이션 혁명 전야의 포르투갈과 해외 영토의 경제는 유럽 평균보다 훨씬 높게 성장하고 있었다. 평균 가구 구매력은 새로운 소비 패턴 및 추세와 함께 상승하고 있었고, 이는 새로운 자본 설비에 대한 투자와 소비 지출을 촉진했다.
신국가(Estado Novo) 정권의 경제 정책은 대규모의 성공적인 기업 연합의 형성을 장려했다. 경제적으로 신국가 정권은 포르투갈 경제의 많은 부분을 안토니우 샴팔리마우드, 조제 마누엘 드 멜루, 아메리코 아모림 및 도스 산토스 가문 (제호니무 마르틴스)의 가문이 설립한 기업을 포함한 강력한 기업의 손에 놓이게 한 기업주의 정책을 유지했다. 이러한 포르투갈 기업들은 일본의 ''케이레츠''와 ''자이바츠'' 또는 한국의 ''재벌''과 유사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Companhia União Fabril (CUF)는 주요 사업을 가지고 포르투갈 본토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포르투갈 제국 전역에 지점, 공장 및 여러 개발 사업 프로젝트를 보유한 가장 크고 가장 다양한 포르투갈 기업 중 하나였다. 섬유, 세라믹, 도자기, 유리 및 크리스탈, 엔지니어링 목재, 오토바이 제조, 통조림 생선, 어업, 식품 및 음료, 관광 및 농업과 농업은 1970년대 초까지 국가 경제의 파노라마를 완성했으며 수출 지향적인 외국인 직접 투자 자금 지원 사업을 포함했다. 또한 농촌 인구는 농업주의에 헌신했으며, 이는 총 인구의 대다수에게 매우 중요했다.
그 외에도 해외 영토는 1920년대부터 인상적인 경제 성장 및 개발률을 보였다.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1961–1974) 기간에도 앙골라[48]와 모잠비크[49]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률을 보였고, 현지 경제의 여러 부문이 호황을 누렸다. 이들은 국제적으로 주목할 만한 생산 중심지였다. 관광 역시 포르투갈 아프리카에서 빠르게 발전하는 활동이었다. 전쟁은 앙골라에서 승리했지만 모잠비크에서는 만족스럽게 억제되지 않았고 포르투갈령 기니에서는 교착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포르투갈 정부는 장기적으로 전쟁 노력을 위한 지속적인 자금 조달원을 허용하기 위해 지속 가능성 정책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노동 조합은 허용되지 않았고 최저 임금 정책은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경제 확장의 맥락에서 아프리카 식민지 전쟁의 발발은 상당한 사회적 변화를 일으켰고, 그 중 하나는 점점 더 많은 여성의 노동 시장으로의 빠른 편입이었다. 마르셀루 카에타누는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일부 사회적 개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며, 예를 들어 사회 보장금을 납부할 기회가 없었던 농촌 노동자에게 매월 연금을 지급했다. 카에타누의 연금 개혁의 목표는 형평성 향상, 재정적 불균형 감소, 전체 경제의 효율성 달성이었다. 1969년, 살라자르가 마르셀루 카에타누로 교체되면서, 신국가(Estado Novo)가 통제하는 국가는 민주주의의 아주 약간의 맛을 보았고, 카에타누는 1920년대 이후 최초의 민주적 노동 조합 운동의 형성을 허용했다.
살라자르의 통치 하에 교통망 등 새로운 인프라가 정비되었다.
교육 정책은 초등 교육의 대폭 확대와 고등 교육의 삭감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살라자르는 교육이 사람들의 잠재적인 보수 정신과 종교적 가치관을 파괴한다고 생각하여 극소수의 정권 관계자에게만 고등 교육을 장려했다. 농촌에서도 초등 교육이 시행된 결과, 문맹률은 유럽 최고 수준이 되었다.
에스타두 노부(Estado Novo, 신 국가)는 국가의 온정주의 하에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육성을 막고, 자본주의에서의 과점 상태를 옹호하는 이탈리아 파시즘형 통제 경제를 채택했다.
3. 4. 사회
이스타두 노부 체제는 국민들에게 국가주의와 가톨릭 가치를 강조했다. 모든 교육 체계는 포르투갈 조국과 대항해 시대 이래 5세기 동안 포르투갈이 보유하고 있는 해외 영토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10][11][12][13]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포르투갈 인구의 48.1%가 문맹이었으며, 1950년대 초까지도 북미나 서유럽 기준으로 포르투갈의 문맹률은 27.5%로 높았다.[55] 1960년대 들어서야 6년간의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앙골라와 모잠비크 식민지에도 대학이 설치되었다.
1933년 헌법으로 설립된 에스타두 노부는 3년의 의무 교육을 제정했다. 의무 교육은 군주제 시대(1844년)에 처음 도입되었으며 기간은 3년이었고, 제1공화국 시대에는 5년으로 늘어났지만 실제로는 시행되지 않았다.[55] 헌법은 공교육의 목표를 "육체적 활력과 지적 능력 향상 외에도 인격 형성, 직업적 가치, 모든 시민적, 도덕적 미덕"(1933년 헌법, 제43조)으로 정의했다.[56]

1936년, 리스본 대학교 총장이었던 안토니오 카르네이루 파체코가[57] 공공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58] 같은 해, 그의 부처는 부처의 이름을 국민 교육부로 변경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국민 교육 위원회(''Junta Nacional da Educação'')를 설립했다.
파체코의 재임 기간 동안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는 포르투갈 청년단 창설, 백주년 계획(''Plano dos Centenários''), 그리고 각 학년별 단일 국정 교과서 채택 등이 있었다.[59]
포르투갈 청년단은 1936년에 "청소년의 신체적 능력의 완전한 발달을 자극하고, [그들의] 인격을 형성하며 조국에 대한 헌신을 키우고, [그들을] 조국의 방어를 위해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국가적이고 예비 군사 조직"으로 정의되었다(법률 1941, 기본 조항 XI).[59]
백주년 계획은 당시의 교육 및 위생 기준을 준수하는, 지역별로 통일된 학교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계획은 1939년에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944년에 첫 번째 단계가 시작되었다. 1961년에는 "새로운 건설 계획"으로 대체되었다.[61] 1930년부터 1940년까지 초등학교 수는 27,000개에서 40,000개로 증가했다.
1952년, 10세에서 11세 사이의 아동 중 81.4%가 문맹이 아니었지만, 의무 교육 3년을 마친 아동은 6.3%에 불과했다.[55] 같은 해, 청소년 및 성인 문맹률을 감소시키고 모든 학령기 아동을 학교에 보내기 위한 광범위하고 다각적인 대중 교육 계획이 시작되었다.[55] 이 계획에는 불응하는 부모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이 포함되었고, 이는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1956년에는 남학생의 의무 교육 기간이 3년에서 4년으로 늘어났으며, 1960년에는 여학생도 포함되었다.[55] 1950년대 후반까지 포르투갈은 오랫동안 겪어왔던 교육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여 학령기 아동의 문맹률은 사실상 사라졌다.[62]

1964년, 의무 교육 기간이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났다.[61] 1965년, 외딴 시골 지역과 과밀한 교외 학교를 지원하기 위해 교육 텔레비전 프로그램(''Telescola'')이 포르투의 포르투갈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Rádio e Televisão de Portugal)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어 제작되었다.[67]
교육 정책은 초등 교육의 대폭 확대와 고등 교육의 삭감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살라자르는 교육이 사람들의 잠재적인 보수 정신과 종교적 가치관(가톨릭 교회에 대한 신앙)을 파괴한다고 생각하여 극소수의 정권 관계자에게만 고등 교육을 장려했다. 농촌에서도 초등 교육이 시행된 결과, 문맹률은 유럽 최고 수준이 되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포르투갈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1386년 체결된 윈저 조약(영국-포르투갈 동맹)에 따른 것이었지만, 초기에는 추축국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43년부터 연합국을 지지하여 아조레스 제도에 공군 기지를 임대했다.[10] 이는 연합국의 압력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포르투갈은 중립국으로서 양측과 교역했으며, 1944년에는 연합국의 압력으로 독일로의 텅스텐과 고무 수송을 중단했다.[10] 리스본은 국제 적십자 활동의 기지이자, 영국과 미국 간 주요 항공 수송 거점이었다.
1942년, 오스트레일리아군이 포르투갈령 티모르를 일시 점령했으나, 곧 일본군에 의해 축출되었다. 살라자르는 1945년 일본 항복 후 동티모르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 한편, 1945년 아돌프 히틀러 사망에 대해 이틀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하기도 했다.
전후 탈식민지화 흐름 속에서도 포르투갈은 식민지 유지를 고집하여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았다.[29] 이러한 정책은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29]
포르투갈은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창립 회원국이 되었으나,[31] 식민지 문제로 서방 국가들과 갈등을 겪었다.
195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 후보 움베르투 델가두 장군이 살라자르 정권에 도전했다. 델가두는 당선되면 살라자르를 해임하겠다고 공약하여 큰 지지를 얻었으나,[33] 국제 및 국가 방위 경찰(PIDE)의 부정선거 개입 의혹 속에 아메리쿠 토마스 후보가 당선되었다.[33]
선거 이후 델가두는 군에서 추방되어 망명 생활을 했으며,[34] 1965년 스페인에서 PIDE에 의해 암살되었다.[38]
4. 1.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중립

포르투갈은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켰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민족주의자들을 조용히 지원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포르투갈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10] 이는 1386년 체결되어 550년 이상 이어진 윈저 조약(영국-포르투갈 동맹)에 따른 것이었다. 정권은 처음에는 친추축국 성향을 보였으나, 1943년부터 연합국을 지지하여 아조레스 제도에 공군 기지를 임대했다.[10] 포르투갈은 연합국의 요청에 응하지 않으면 침공하겠다는 위협을 받은 결과로 마지못해 아조레스 제도를 임대했다. 공식적인 중립국으로서 포르투갈은 양측과 무역을 했고, 연합국의 강력한 압력 이후 1944년에는 독일로의 텅스텐과 고무의 중요한 수송을 중단했다.[10] 리스본은 연합국 전쟁 포로를 돕는 국제 적십자 활동의 기지였으며, 영국과 미국 간의 주요 항공 수송 지점이었다.
1942년, 호주군은 잠시 포르투갈령 티모르를 점령했으나, 곧 침공한 일본군에게 압도당했다. 살라자르는 일본의 항복이 있었던 1945년 이후 동티모르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 포르투갈은 아돌프 히틀러 사망에 대해 이틀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4. 2. 전후 국제적 고립과 식민지 문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지화 흐름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지만, 포르투갈은 식민지 유지를 고집하여 국제 사회의 비판과 반대에 직면했다.[29] 이러한 정책은 국가의 장기적인 경제 발전을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했다.[29]포르투갈은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창립 회원국이 되었지만,[31] 식민지 문제로 인해 서방 국가들과 갈등을 겪었다.
195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 후보 움베르투 델가두 장군이 살라자르 정권에 도전했다. 델가두는 당선되면 살라자르를 해임하겠다고 공약하여 큰 지지를 얻었으나,[33] 국제 및 국가 방위 경찰(PIDE)의 부정선거 개입 의혹 속에 아메리쿠 토마스 후보가 52.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33] 중립적인 관찰자들은 살라자르가 정직한 선거를 허용했다면 델가두가 승리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33]
선거 이후 델가두는 군에서 추방되어 브라질과 알제리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34] 1965년 2월 13일, 델가두와 그의 비서는 스페인에서 PIDE의 매복 공격으로 살해되었다.[38]
5. 체제의 종말
1961년 인도가 포르투갈령 인도의 고아, 다만, 디우 영토를 무력으로 합병하고,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독립 운동이 격화되면서, 수 세기 동안 이어진 포르투갈 제국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은 베트남 전쟁처럼 장기화되었고, 포르투갈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1968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질병으로 물러나고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총리직을 계승했지만, 식민지 전쟁은 계속되었고, 이는 포르투갈 사회에서 불만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징집을 피해 해외로 도피했고, 1945년에서 1974년 사이에는 혁명적 민족주의에 의해 인도되는 급진 우파 활동가들도 있었다.[77]
1974년 4월 25일, 군사력 운동(MFA) 소속 좌익 장교들이 일으킨 카네이션 혁명으로 에스타두 노부 체제는 막을 내렸다. 이 혁명은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을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가져왔지만,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가 이어졌다.
5. 1. 식민지 전쟁과 경제 침체
1960년대부터 포르투갈령 인도 (고아, 다만, 디우)가 1961년 인도에 무력 합병(고아 합병)되고,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들에서 독립 전쟁이 발발하면서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95][96][97]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은 베트남 전쟁처럼 장기화되면서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인명 피해를 낳았고, 포르투갈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78]
식민지 전쟁으로 인한 경제 침체와 사회 불만은 커져갔고,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징병과 낮은 임금을 피해 프랑스, 룩셈부르크 등지로 이주하면서, 포르투갈은 서유럽 최빈국으로 전락했다.[95][96][97]
5. 2. 카네이션 혁명 (1974)
1974년 4월 25일, 군사력 운동(MFA)의 좌익 장교들이 카네이션 혁명을 일으켜 에스타두 노부 체제를 무너뜨렸다.[79][80] 이 혁명은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을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는 마데이라 제도로 피신했다가 브라질로 망명했다.[81] 이후 MFA이 이끄는 국가 구원 헌장이 권력을 잡았다.[79][80]
카네이션 혁명은 1973년의 법령(''데크. 레이 nº 353/73'')에 대한 전문 계급[79] 군인들의 불만에서 시작되었다.[80] 마르셀루 카에타누 정부는 군사 비용 절감과 아프리카 반군에 대응할 관리 수 증가를 위해 짧은 훈련 후 해외 영토에 복무한 민병대 장교를 육군 사관학교 졸업생과 같은 계급으로 임명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79][80] 이에 젊은 육군 사관학교 졸업생들이 반발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79][80]
6. 에스타두 노부 이후
''에스타두 노부''(Estado Novo) 이후, 포르투갈은 혼란스러운 임시 정부 시기를 겪었다. 이 시기는 제1공화국을 연상시키는 거의 붕괴된 국가 상태였는데, ''에스타두 노부''가 매우 주의 깊게 피하려 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임시 정부들은 잠시 동안 신문을 검열하고 야당 인사들을 구금했다. 역사가 케네스 맥스웰은 여러 가지 이유로, 포르투갈이 권위주의 통치에서 민주적인 정부로 전환하는 과정이 남아메리카 국가 중 니카라과와 가장 유사하다고 본다.[82] 프랑코주의 국가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스페인은 카네이션 혁명으로 인한 공산주의의 위협을 감지하고 포르투갈 침공을 고려하기도 했다.[83]
1974년부터 1976년까지는 포르투갈 정치에서 사회 불안, 파벌주의, 불확실성의 시기였다. 극좌파와 극우파 모두 우위를 점하지 못했지만, 친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세력은 선거 전에 수개월 동안 국가를 통제했다. 알바루 쿠냐우의 포르투갈 공산당 (PCP)은 스탈린주의적 시각을 유지했으며 서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유로-공산주의" 개혁에 공감하지 않았다.[84]
1975년에 새로 독립한 공산주의 국가 (특히 앙골라 인민 공화국 및 모잠비크 인민 공화국)를 창출할 식민지에서의 철수와 독립 조건 수용은, 포르투갈 시민들의 포르투갈 아프리카 영토 (대부분 포르투갈 앙골라 해외 영토 및 모잠비크 해외 영토)로부터의 대규모 탈출을 촉발하여[85][86] 백만 명 이상의 가난한 포르투갈 난민 — ''귀환자''를 만들어냈다. 1975년까지 모든 포르투갈 아프리카 영토가 독립했으며, 포르투갈은 50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 선거를 치렀다. 그러나 국가는 1976년 포르투갈 입법 선거까지 군-민간 임시 행정부에 의해 계속 통치되었다.
포르투갈인과 그들의 옛 식민지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지만, 많은 사람들은 카네이션 혁명의 단기적 효과가 시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가 달성되었을 때 그 고생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느꼈다. 포르투갈은 매년 4월 25일에 자유의 날을 기념하며, 이 날은 포르투갈의 공휴일이다.
카네이션 혁명 이후, 극좌 정치, 노동 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PREC (1975)와 1976년에 채택된 새롭게 쓰여진 포르투갈 헌법에 대한 영향력에서 많은 포르투갈 수출업체들이 살아남지 못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포르투갈은 유럽 연합 구조 및 응집 기금의 순 수혜자였으며, 197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 사이에 세 번의 국제 통화 기금 주도 구제 금융을 피하지 못했다.[87] 2011년, 포르투갈 금융 위기 동안 국가가 국제 금융 지원을 요청해야 했을 때,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의 최고 전략가였던 포르투갈 군 장교인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는 국가가 그 이후 어떻게 될지 알았더라면 혁명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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