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고려의 제23대 왕으로, 강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무신정권 시기에 즉위하여 실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쟁했다. 몽골과의 오랜 전쟁 끝에 1259년 몽골에 복속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팔만대장경 조각이 이루어졌고, 묘호는 고종, 시호는 안효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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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1213년부터 1259년까지 45년 10개월간 재위하여 역대 고려 국왕 중 가장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재위 기간 대부분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로 이어지는 4대 62년간의 최씨정권 시기였기 때문에 실권을 제대로 행사하지는 못했다.[1]
치세 동안 최광수의 난, 이연년 형제의 난 등 내부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외부적으로는 1216년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했으나,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 제국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1232년에는 최우 정권의 주도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에 대한 항전을 이어갔다.[2]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몽골과의 전쟁으로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받았다.
1258년유경, 김준 등이 최의를 제거하는 무오정변을 일으켜 최씨 정권이 붕괴되었고,[3] 이듬해인 1259년 고려는 결국 몽골과 강화를 맺고 태자(원종)를 인질로 보냈다. 고종은 강화가 성립된 직후인 1259년 7월 강화도에서 승하하였다.[2] 능은 홍릉(洪陵)으로 인천광역시강화군에 있다. 왕비는 희종의 딸인 안혜왕후이다.
2. 1. 탄생과 가계
1192년(명종 22년), 당시 국왕이었던 명종의 태자 왕숙(강종)과 태자비 유씨(원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외할아버지는 예종의 외손자인 신안후 왕성이며, 외할머니는 인종의 셋째 딸인 창락궁주이다. 고종의 할아버지인 명종과 외할머니인 창락궁주는 남매 사이이기도 하다.
1197년(명종 27년), 할아버지 명종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자 아버지 강종 역시 태자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로 유배되었다. 이로 인해 고종도 궁궐에서 나와야 했다. 이후 희종이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폐위되자, 최충헌에 의해 아버지 강종이 왕위에 올랐다.
1212년 아버지 강종이 즉위하자 개경으로 돌아와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듬해인 1213년 8월, 강종이 승하하자 연경궁(延慶宮) 강안전(康安殿)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최충헌을 필두로 한 무신정권 시기였기 때문에, 강종을 왕위에 앉혔던 최충헌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어 고종은 왕으로서의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려웠다.[1]
1216년에는 거란족이 고려를 침략하였으나 격퇴하였다. 1218년에는 희종의 딸인 승복궁주(承福宮主)를 왕비(안혜왕후)로 맞이하였다. 이처럼 고종의 치세 초기는 강력한 무신정권의 그늘 아래 왕권이 제약되고 외부의 침입에 대응해야 하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시작되었다.
1249년 최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최항이, 1257년 최항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최의가 차례로 정권을 승계했다. 그러나 최씨 정권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1258년유경, 김준 등이 최의를 살해하는 무오정변을 일으켜, 62년간 이어진 최씨 정권은 막을 내렸다.[3]
3. 몽골의 침략과 여몽 전쟁
고종의 재위 기간은 최씨정권의 집권기와 맞물려 몽골 제국의 대대적인 침략이 시작된 시기였다. 1218년강동성 전투 이후 고려와 접촉한 몽골은 1225년 사신 피살 사건을 빌미로 1231년부터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했다.
몽골의 위협이 커지자 1232년최우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항전을 선택했으나, 이는 약 30년간 이어질 여몽전쟁의 시작이었다. 수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으로 전국토는 황폐화되었고, 초조대장경, 황룡사와 9층 목탑 등 귀중한 문화유산이 소실되었으며[6] 막대한 인명 피해[16]가 발생했다.
이러한 국난 속에서도 고려는 1251년팔만대장경을 완성하며 항전 의지를 다졌으나, 계속되는 전쟁과 1258년최씨정권의 붕괴(무오정변)로 결국 1259년 몽골에 복속하고 태자(원종)를 인질로 보냈다. 고종은 고려 역대 국왕 중 가장 긴 45년 10개월 동안 재위했지만[2], 재위 기간 대부분은 몽골과의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3. 1. 강동성 전투
1218년(고종 6년) 12월, 몽골군에 쫓기던 거란 세력이 고려 국경을 넘어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 농성하였다. 몽골군은 거란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고려 영토로 진입하면서 처음으로 고려와 접촉하게 되었다.[7] 몽골은 고려에 군사와 군량 지원을 요청하고, 양국 간 외교 관계 수립을 요구했다.
1219년(고종 7년), 고려와 몽골, 동진(東眞)의 연합군은 강동성에서 거란군을 함께 격퇴하였다. 전투 후 몽골 사신 합진(哈眞)이 고려에 화친을 제안하자, 고종은 문무관료들에게 성대한 의식을 갖추도록 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몽골은 고려에 대해 불손한 태도를 보이고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면서 양국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3. 1. 1. 저고여 피살 사건
1225년(고종 13년), 몽고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8] 이후 몽고는 이 사건의 책임을 고려 정부에 돌리며 이를 구실 삼아 다시 침입하였다. 결국 고려는 몽고와 강화 조약을 맺게 되었고, 이 조약에 따라 몽고는 고려 각지에 행정 감독관인 다루가치 72명을 파견하고 일부 군대를 주둔시켰다.
3. 2. 제1차 여몽전쟁
1231년 (고종 18년) 8월, 몽골은 과거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던 길에 피살된 사건을 문제 삼아 고려 침공을 시작했다.[9][10]몽골 제국의 오고타이 칸은 살리타이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고려를 공격하게 했다.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咸新鎭)을 포위하고 철주(鐵州)와 의주(義州) 등 국경 지역을 유린했다. 이후 귀주성(龜州城)을 공격했으나, 박서와 김경손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큰 피해를 입고 고전했다.[9][10] 몽골군은 서경(西京, 현재의 평양) 공격에도 실패했다. 이때 홍복원과 같은 일부 고려인들은 몽골군에 항복하기도 했다.
귀주성 전투가 길어지자 살리타이는 일부 병력만 남겨 포위를 유지하고 주력 부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몽골군은 선주(宣州)와 곽주(郭州)를 함락시키고 례성강 일대를 비롯해 지나가는 곳곳에서 닥치는 대로 살육과 약탈을 저질렀다.[11]1231년 11월 29일, 마침내 몽골군은 수도인 개경 외곽에 도착하여 흥왕사를 공격하고 개경을 포위했다. 나아가 광주(廣州), 충주, 청주 등 남쪽 지역까지 내려가 약탈을 자행했다.[12]
수도가 포위되고 전국 각지에서 피해가 속출하자, 고려 조정은 1231년 11월 말 항복을 결정했다. 왕실 종친인 회안공 왕정(王侹)을 보내 강화를 요청하고, 몽골 사신과 군대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으며 살리타이에게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바쳤다. 1231년 12월 1일,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남송과 금나라를 함께 공격할 것을 약속했다. 몽골은 고려 전국에 72명의 감독관인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고려를 감시하고 통제하려 했다.[3]
3. 3. 제2차 여몽전쟁과 강화 천도
몽골군의 침략으로 수도인 개경마저 위협받자, 당시 실권자였던 최우는 도병마사에서 재추회의를 열어 반대 의견을 누르고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항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1232년(고종 19년) 6월, 최우는 고종에게 압력을 넣어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였다.[13] 7월 7일 왕은 강화도의 객관에 도착했는데,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당시 열흘 넘게 이어진 장마로 길이 흙탕물에 잠겨 이동 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웠으며, 고위 관리나 양가 부녀자들까지 짐을 이고 맨발로 걸어야 했고, 의지할 곳 없이 울부짖는 노인과 버려진 아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가 수도를 옮겨 항전 의지를 보이자 몽골과의 제2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다시 고려를 침략하여 개경을 함락시키고 남하하여 한양(현재의 서울)을 공격하였다. 고려는 외교 문서를 보내 철군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국왕과 지배층이 강화도에 머무는 동안, 육지에 남은 백성들은 몽골군의 침략에 그대로 노출되어 전국토가 전쟁터가 되었다. 신라진흥왕 때 건립된 황룡사와 선덕여왕 때 세워진 황룡사 9층 목탑이 이 시기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는 등[6] 문화재 피해도 극심했다.
1232년 12월, 살리타이는 처인성(處仁城, 현재 경기도용인시)을 공격했으나, 처인성 전투에서 고려의 승려 김윤후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14][15] 총사령관을 잃은 몽골군은 고려에서 철수하였고 이로써 제2차 전쟁은 종결되었다. 제2차 여몽전쟁 기간 중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었다.
이후 고려는 약 28년간 강화도에서 몽골에 항전하였으나, 결국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부처의 힘을 빌려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으로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3. 4. 강화 천도기
1232년 7월,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는 몽골에 대한 항전 의지를 분명히 하며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이는 고려-몽골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결정이었다. 강화도로 천도한 직후 고려에 파견되었던 몽골의 다루가치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3] 같은 해 8월, 몽골은 이를 빌미로 제2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이듬해인 1233년에는 서경의 홍복원 등이 반란을 일으켜 몽골에 투항하는 내부 분열도 겪었다. 1235년 시작된 제3차 침입 당시 몽골군은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고려를 다시 침공했다. 고려군은 개주(개천), 온수(온수), 죽주(죽산면), 대흥(예산군) 등지에서 몽골군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으나, 몽골군은 4년 동안 전국 각지를 휩쓸며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특히 이 과정에서 신라진흥왕 때 창건되고 선덕여왕 때 세워진 황룡사와 9층 목탑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 사라지는 비극을 겪었다.[6]
이러한 국난 속에서 최씨정권은 강화도 방어에 주력하는 한편, 부처의 힘을 빌려 위기를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의 재조(再彫)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대장경판은 1251년에 완성되었으며, 현재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몽골의 침입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247년 제4차 침입, 1253년 제5차 침입에 이어 1254년에는 자릴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제6차 침입을 감행했다. 이때 충주시의 다인철소(多仁鐵所) 주민들이 몽골군에 맞서 격렬하게 항전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다인철소는 익안현(翼安縣)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고려는 20만 명이 넘는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등 고려-몽골 전쟁 기간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16] 몽골의 침입은 1255년(7차)과 1257년(8차)에도 이어졌다.
계속되는 전쟁과 피해 속에서 고려 내부의 정치 상황도 급변했다. 1249년최우가 사망하고 아들 최항이 권력을 승계했으며, 1257년 최항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최의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1258년 3월, 유경, 김준 등이 최의를 살해하면서 62년간 이어지던 최씨정권은 막을 내렸다(무오정변). 같은 해 동북면에서는 조휘와 탁청 등이 몽골에 투항하여 철령 이북 지역이 몽골의 쌍성총관부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지역은 98년 뒤인 1356년 공민왕 때 다시 고려 영토로 수복되었다.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몽골과의 강화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결국 1259년 3월,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고 태자(훗날 원종)를 인질로 보냈다. 오랜 항전 끝에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같은 해 7월, 고종은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났다.[2] 그의 능은 홍릉으로 강화군에 위치해 있다.
1258년(고종 45년) 3월, 고종은 유경과 김준 등에게 지시하여 최의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의 정변(무오정변)이 성공하여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가 살해되었다.[17] 이 사건으로 명종 대부터 시작되어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까지 4대에 걸쳐 60여 년간 지속된 최씨정권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최씨 정권이 무너진 후 권력은 김준에게 넘어갔다.[17]
5. 최후
고종은 45년 10개월 동안 재위하여 고려 역대 국왕 중 가장 긴 재위 기간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재위 기간 내내 최씨정권의 무신들이 실권을 장악하였고[1], 몽골 제국의 침략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여 약 30년간 항전하는 등 국가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2]
1258년(고종 45년) 3월, 유경, 김준 등이 마지막 집권자였던 최의를 살해하면서 4대 62년간 이어져 온 최씨정권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무오정변).[3] 최씨 정권이 무너진 후 몽골과의 화의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고려는 압력에 굴복하여 화주(현재의 함경남도영흥군) 이북 지역을 몽골에 할양하였고, 이곳에는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다.[3]
1259년(고종 46년) 3월, 고려는 결국 몽골에 복속하기로 하고 태자 왕전(원종)을 인질로 몽골에 보냈다.[3] 몽골과의 관계가 정리되면서 강화도의 방어 시설이었던 내성(內城)을 허물기 시작하였다. 그해 6월 30일, 고종은 강화도에 있던 유경의 집에서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 당시 태자 왕전이 몽골에 가 있었기 때문에, 국정은 임시로 태손 왕심(충렬왕)이 맡았다.
사후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안효대왕'''(安孝大王)으로 정해졌다. 능은 인천광역시강화도에 위치한 홍릉(洪陵)이다.[2] 훗날 1310년(충선왕 2년)에 원나라로부터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추가로 받았다.
6. 평가
재위 기간 동안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로 이어지는 4대에 걸친 최씨정권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에는 대내적으로 최광수의 난과 이연년 형제의 난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반란들이 발생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몽골 제국의 대대적인 침략이 시작되어 300여 년간 수도였던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하는 등 큰 혼란을 겪었다. 수차례에 걸친 고려-몽골 전쟁으로 전국토가 황폐화되었다.
고종은 45년 10개월 동안 재위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역대 국왕 중 가장 긴 재위 기간이다.
[1]
뉴스
[Why]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고려판 강화도령 강종 조선의 철종과 닮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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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元史 列伝第九十五 外夷一 高麗
[4]
문서
고려사 강종 원년 7월 21일, 율리우스력 8월 19일
[5]
문서
고려사 강종 2년 8월 9일, 율리우스력 8월 26일
[6]
서적
고려사절요 권16, 고종3, 고종 25년(1238년) 윤4월
[7]
서적
고려사 권22, 세가 권제22, 고종 5년(1218년) 12월 1일 (기해)
[8]
서적
고려사 권22, 세가 권제22, 고종 12년(1225년) 1월 22일 (계미)
[9]
서적
고려사 권23, 세가 권제23, 고종 18년(1231년) 9월 3일 (병술)
[10]
서적
고려사 권23, 세가 권제23, 고종 18년(1231년) 9월 10일 (계사)
[11]
서적
고려사 권23, 세가 권제23, 고종 18년(1231년) 11월 29일 (신해)
[12]
서적
고려사 권23, 세가 권제23, 고종 18년(1231년) 12월 6일 (정사)
[13]
서적
고려사 권23, 세가 권제23, 고종 19년(1232년) 6월 16일 (을축)
[14]
서적
고려사 권23, 세가 권제23, 고종 19년(1232년) 12월
[15]
서적
고려사 권103, 열전 권제16, 제신(諸臣), 김윤후(金允侯)
[16]
서적
고려사절요 권17, 고종4, 고종 41년(1254년) 12월
[17]
서적
고려사 권24, 세가 권제24, 고종 45년(1258년) 3월 26일 (병자)
[18]
문서
한남백 왕기와 고려 예종의 장녀 승덕공주의 아들
[19]
문서
고려 인종의 3녀
[20]
문서
회안공 왕정과 고려 신종의 딸 경녕궁주의 아들
[21]
서적
고려사 권130, 열전 권제43, 반역 임유무(林惟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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