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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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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준은 오호 십육국 시대 전조(前趙)의 인물로, 유총(劉聰) 치세에 중호군을 역임했다. 그의 딸들이 유총의 후궁이 되었고, 유총의 아들 유찬과 사돈 관계를 맺었다. 그는 유찬을 옹립하기 위해 유애를 암살하는 데 관여했으며, 유찬 사후 정권을 장악하고 유씨 일족을 학살하는 등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결국 측근의 배신으로 사망하고 그의 일족 또한 멸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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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준
기본 정보
이름진준
작위한(漢)의 황제
재위 기간318년
이전유찬
이후유요
진(靳)
이름준(準)
연호없음
시호없음
묘호없음
가문진(靳)
왕조한-조
출생일알 수 없음
사망일319년 1월
아버지알 수 없음
어머니알 수 없음
배우자

2. 생애

근준은 중호군(中護軍) 관직을 맡고 있었다. 315년 유총이 그의 딸 근월광(靳月光)과 근월화(靳月華)를 각각 상황후(上皇后)와 우황후(右皇后)로 삼으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유총이 주색에 빠져 지내면서 근준의 관직은 대사공(大司空), 영사례교위(領司隷校尉)에 이르렀고, 다른 어린 딸은 유찬의 태자비가 되었다.[6][7]

318년, 유총이 죽고 유찬이 즉위하자, 근준은 은밀히 유찬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유찬에게 종실 대신들을 모함하여 제거하도록 부추겼고, 황후 근씨와 황태후 근월화의 도움으로 유찬의 승인을 얻었다. 이로 인해 많은 종실 대신들이 살해되었고, 근준은 유찬마저 공격하여 죽이고 평양에 있던 유씨 황족들을 몰살했다. 이후 근준은 스스로 대장군(大將軍), 한천왕(漢天王)이라 칭하며 동진에 신하를 자처했다.[1]

그러나 그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조의 대장(大將) 유요석륵이 연합하여 근준을 공격해 왔다. 318년 겨울, 유총의 사촌인 유요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평양으로 진격했다. 근준은 유요와 석륵의 군대 사이에 끼이게 되었다. 근준은 석륵에게 평화를 구하며 황제의 의복과 수레를 보냈으나, 석륵은 그것들을 진준의 사신과 함께 유요에게 보냈다. 결국 근준은 자신의 친족인 진명, 교태, 왕등, 진강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고, 근씨 일족은 유요에게 모두 몰살당했다.[1]

2. 1. 전조의 외척

315년, 유총이 근준의 딸 근월광(靳月光)과 근월화(靳月華)를 각각 상황후(上皇后)와 우황후(右皇后)로 삼으면서, 근준은 전조의 외척이 되었다. 이후 유총이 주색에 빠져 지내면서 근준의 관직은 대사공(大司空), 영사례교위(領司隷校尉)에 이르렀다. 근준의 다른 어린 딸은 유찬의 태자비가 되었다.[6][7]

근준은 전조 왕조에 봉사했고, 유총 시대에는 중호군 지위에 있었다. 315년 유총은 근준의 딸들인 근월광과 근월화를 후궁으로 맞이하여 좌귀빈·우귀빈(황제의 측실 칭호)으로 삼았다. 그 몇 달 후, 근월광은 황후가 되었고, 나중에는 상황후로 봉해졌다. 또한 근월화는 우황후가 되었고, 막내딸 근부인 또한 유총의 세자였던 유찬의 아내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근준은 유씨의 외척이 되어 권세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같은 해, 어사대부 진원달은 상소를 올려 근월광이 음행을 저질렀다고 탄핵했다. 유총은 근월광을 특히 총애했지만, 아버지 대부터의 공신인 진원달의 발언을 무시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황후에서 폐했다. 근월광은 이 일로 크게 부끄러워하며 곧 자살했고, 근준은 진원달을 깊이 원망하게 되었다.

당시 환관인 중상시 왕침, 중궁 복야 곽의, 중황문 능수 등은 모두 유총에게 총애를 받았고, 315년경부터 유총이 정무를 게을리하자 그들이 조정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왕침 등의 수레·의복·저택의 호화로움은 제후들을 넘어섰고, 양민을 박해하여 재화를 착복했지만, 근준은 그들에게 아첨했다고 한다.

근준의 사촌 여동생은 황태제 유애의 측실로 시중을 들었지만, 시종과 밀통하여 유애의 분노를 사 처형되었다. 이후 유애는 이 일로 근준을 자주 조롱했고, 근준은 깊이 부끄러워함과 동시에 분노했다. 그 때문에 그는 유애를 황태제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려 생각하고, 유총의 적자였던 유찬에게 모함을 하여 유애를 제거하려 하였다.

316년 7월, 하동에서 메뚜기 재해가 대발생했다. 근준은 부하들을 이끌고 이 재해에 대처하여 메뚜기를 잡아 흙 속에 묻었지만, 메뚜기는 다시 흙 속에서 뛰쳐나와 콩을 갉아먹었다.

317년 3월, 유찬은 왕평에게 명하여 유애에게 거짓 발언을 하게 했다. 유애는 이를 믿고, 궁신에게 명하여 궁전에 무기를 모으게 했다. 유찬은 사자를 근준·왕침에게 파견하여 이 상황을 알렸고, 근준이 이를 유총에게 보고하자, 유총은 크게 놀랐다. 근준은 유찬의 명에 따라 저족·강족 추장 10여 명을 잡아 형벌을 가하고, 유애와 함께 반역을 꾀했다고 거짓 자백하게 했다. 또한 이때, 근준은 평소에 미워했던 대신 및 관속 수십 명을 주살했다.

4월, 유애는 폐위되어 북부왕으로 강등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찬의 명에 따라, 근준은 자객을 풀어 유애를 살해했다.

영내에서 다시 메뚜기 재해가 대발생하여, 특히 평양과 기주, 옹주가 가장 심했고, 근준이 이에 대처했다. 그 와중에, 두 아들이 갑자기 사망했다.

318년, 유총이 왕침의 양녀를 좌황후로 삼자, 상서령 왕감, 중서감 최의지 등이 이를 굳게 간했다. 유총은 크게 노하여, 유찬에게 명하여 그들을 잡아 시중에 보냈다. 형의 집행에 즈음하여 최의지는 왕침에게 "근준의 용모를 보니 반드시 나라의 환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 2. 근준의 난

315년, 유총이 근준의 딸인 근월광(靳月光)을 상황후(上皇后)로, 근월화(靳月華)를 우황후(右皇后)로 삼으면서 근준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유총이 주색에 빠져 지내면서 근준의 관직은 대사공(大司空), 영사례교위(領司隷校尉)까지 올라갔고, 다른 어린 딸은 유찬의 태자비가 되었다.[1]

318년 유총이 죽고 유찬이 즉위하자, 근준은 유찬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유찬에게 종실 대신들을 모함하여 제거하도록 부추겼고, 황후 근씨와 황태후 근월화의 도움을 받아 유찬의 승인을 얻어냈다. 이로 인해 많은 종실 대신들이 살해되었고, 근준은 유찬마저 공격하여 죽이고 평양에 있던 유씨 황족들을 몰살시켰다. 이후 근준은 스스로 대장군(大將軍), 한천왕(漢天王)이라 칭하며 동진에 신하를 자처했다.[1]

그러나 근준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조의 대장(大將) 유요석륵이 연합하여 근준을 공격해 왔고, 결국 근준은 자신의 친족인 진명, 교태, 왕등, 진강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근준의 난은 막을 내렸고, 근씨 일족은 유요에게 모두 몰살당했다.[1]

2. 2. 1. 유찬 살해

318년, 유총이 죽고 유찬이 즉위하자, 근준은 유찬을 폐출할 것을 은밀히 모의하였다. 그는 먼저 유찬에게 종실 대신인 태재(太宰) 유경(劉景), 대사마(大司馬) 유기(劉驥),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오왕(吳王) 유영(劉逞), 태사(太師) 유의(劉顗), 대사도(大司徒) 제왕(齊王) 유매(劉勱)를 모반으로 무고하여 주살할 것을 건의하였다. 처음에 유찬은 동의하지 않았으나, 황후 근씨와 황태후 근월화의 권유로 근준에게 이들을 죽이고 정벌하는 대권을 넘겼다.[1]

8월, 근준은 종실 대신들을 도륙하였고, 이후 유찬을 공격해 죽인 뒤 평양(平陽)에 있던 유씨 황족을 모두 죽였다. 근준은 자립하여 대장군(大將軍), 한천왕(漢天王)이 되었고, 동진에 칭신하였다.[1]

2. 2. 2. 한천왕 즉위

유총이 죽고 유찬이 즉위한 후, 근준은 유찬을 폐출할 것을 은밀히 모의하였다. 근준은 먼저 유찬에게 종실 대신들을 모반으로 무고하여 주살할 것을 건의하였다. 처음에 유찬은 동의하지 않았으나 황후 근씨와 황태후 근월화의 권유로 근준에게 죽이고 정벌하는 대권을 넘겼다.[2]

318년 8월, 근준은 종실 대신들을 도륙하고 유찬을 공격해 죽인 뒤, 평양(平陽)에 있던 유씨 황족을 모두 죽였다. 근준은 자립하여 대장군(大將軍), 천왕(天王)이 되었고,[2][3] 동진에 칭신하였다.

9월, 전조의 대장(大將) 유요석륵이 연합하여 병사를 일으켜 근준을 공격했다. 10월, 유요가 장안에서 황제를 칭했다.

12월, 근준은 당제(堂弟) 근명(靳明), 좌우거기장군 교태(喬泰), 왕등(王騰), 위장군(衛將軍) 근강(靳康)에게 살해되었고, 평양은 함락되었다. 근씨 일족은 모두 유요에게 도륙되었다. 이 진준의 난을 계기로 한은 유요의 전조·석륵의 후조로 분열되었다.

2. 2. 3. 최후

靳準|진준중국어유총이 죽고 유찬이 즉위하자 유찬을 폐출할 것을 은밀히 모의하였다.[2] 먼저 유찬에게 종실 대신들을 모반으로 무고하여 주살할 것을 건의하였다. 처음에 유찬은 동의하지 않았으나 황후 근씨와 황태후 靳月華|근월화중국어의 권유로 근준에게 죽이고 정벌하는 대권을 넘겼다.[3]

318년 8월, 근준은 종실 대신들을 도륙하고, 유찬을 공격해 죽인 뒤 평양(平陽)에 있던 유씨 황족을 모두 죽였다. 근준은 자립하여 대장군(大將軍), 한천왕(漢天王)이 되었고,[4] 동진에 칭신하였다.

9월, 전조의 대장(大將) 유요석륵이 연합하여 병사를 일으켜 근준을 공격했다.

10월, 유요가 장안에서 황제를 칭했다.

12월, 근준이 당제(堂弟) 靳明|진명중국어, 좌우거기장군 喬泰|교태중국어와 王騰|왕등중국어, 위장군(衛將軍) 靳康|진강중국어에게 살해되었고, 평양은 함락되었다. 근씨 일족은 모두 유요에게 도륙되었다.[2]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본인근준? ~ 318년
근월광? ~ 315년, 유총의 상황후(上皇后)
근월화? ~ 319년?, 유총의 우황후(右皇后)
근씨이름 미상, 유찬의 황후
사촌동생근명? ~ 319년, 거기장군
사촌동생근강? ~ 319년, 위장군
조카딸근씨이름 미상, 근강의 딸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0319-01-08
[2] 서적 Zizhi Tongjian
[3] 서적 Book of Jin
[4] 서적 Spring and Autumn Annals of the Sixteen Kingdoms
[5] 서적 晋書
[6] 서적 진서
[7] 서적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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