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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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농은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의 인물로, 모용수와 함께 전진에 망명했다가 후연 건국에 기여했다. 그는 유주와 평주를 안정시키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공헌했으며, 요서왕에 봉해졌다. 모용보가 즉위한 후, 후계 문제와 관련해 성애황후를 사사하는 데 관여했으나, 모용린의 반란과 모용보의 무능으로 인해 결국 암살당했다. 사후 환열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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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린은 전연 왕 모용수의 서자이자 후연의 장군로, 후연 건국에 공을 세웠으나 여러 반란을 일으켜 모용씨를 곤경에 빠뜨리고 남연에서 반란을 꾀하다 처형되어 후연의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 후연의 황자 - 모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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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모스는 4세 때 시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보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교사로,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계승하고 삼위일체론을 옹호하며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에서 활동했으나, 사후 일부 저작이 정죄되기도 했지만 동방 정교회에서 맹인 성인으로 칭송받으며 재조명되고 있다.
모용농 | |
---|---|
기본 정보 | |
이름 | 모용농 |
한자 | 慕容農 |
로마자 표기 | Mùróng Nóng |
생몰년도 | ? ~ 398년 |
작위 | 요동공 |
시호 | 헌장 |
가계 | |
아버지 | 모용황 |
어머니 | 단씨 |
형제 | 모용준 모용각 모용루이 모용환 모용표 모용수 모용덕 |
자녀 | 모용초 |
생애 | |
주요 활동 | 384년: 모용수를 따라 후연 건국에 참여 386년: 요동공에 봉해짐 392년: 거병하여 모용수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 396년: 모용보를 옹립하려 했으나 실패 398년: 모반 혐의로 처형 |
2. 생애
369년 모용수(慕容垂)가 모용평(慕容評)의 견제를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전연(前燕)에서 전진(前秦)으로 망명할 때 모용농도 함께 망명하였다. 377년 왕맹(王猛) 사후 전진의 국력이 쇠퇴하자 모용수는 모용농의 전연 재건 권유를 받았으나, 당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383년 전진이 비수 대전에서 패배하자, 모용농은 다시 한번 모용수에게 전연 재건을 설득했고, 모용수는 이를 받아들여 후연(後燕)을 건국하였다.
모용농은 후연 건국 이후 전진 잔당을 소탕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유주(幽州)와 평주(平州)를 평정하고 고구려(高句麗)로부터 일부 영토를 회복하는 등 후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 1. 전연 멸망과 망명 (369년 ~ 383년)
모용수가 모용평의 견제를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전연에서 전진으로 망명할 때 함께 망명하였다.[1] 377년, 왕맹이 사망한 이후 전진의 국력이 쇠퇴하자 모용수에게 전연의 재건을 권했으나, 모용수는 당장에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1]383년 전진이 비수 대전에서 패배하자, 모용농은 재차 모용수에게 전연을 재건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모용수는 이를 받아들여 전진으로부터 독립해 후연을 건립하였다.[1] 384년 봄, 모용농은 모용해(慕容楷)와 함께 황하 북부에 주둔했으며, 전진의 석월을 격파하였다.[1]
2. 2. 후연 건국과 활약 (384년 ~ 396년)
모용수(慕容垂)가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자, 모용농(慕容農)은 전진(前秦)의 잔당 및 반독립적인 장군들과의 싸움에 힘썼다. 386년 초, 유주와 평주를 평정하고 여암을 멸망시켰으며, 고구려로부터 여러 군을 되찾았다. 그 공으로 유주와 평주의 총독이 되어 전연의 수도인 용성을 맡게 되었고, 수 년간 백성들에게 인망을 얻었다. 386년에 요서왕(遼西王)에 봉해졌다.[1] 389년, 유주와 평주가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모용농은 중산으로 돌아가 청주, 서주, 형주를 동진(東晉)으로부터, 옹주를 후진(後秦)으로부터 빼앗으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모용수는 모용농을 중산으로 불러들이고, 동생 모용륭에게 용성을 맡겼다. 이후 모용농은 모용수의 여러 원정에 참전했다.- 392년, 적위(翟魏)를 멸망시키고, 서연(西燕)에 큰 피해를 입혀 후연의 영토를 넓혔다.
- 394년, 동진의 벽려혼(辟閭渾)이 지키던 광고를 공격하여 우세했으나, 이듬해 모용수에게 중산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용농과 모용륭은 능력이 뛰어나고 인망이 높아, 단황후는 모용보(慕容寶) 대신 두 사람 중 한 명을 태자로 세울 것을 건의했으나, 모용수는 이를 거절했다.[1]
395년, 모용보는 모용농, 모용린과 함께 8만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의 탁발규를 공격했다. 그러나 하서(河西)에서 대치 후 퇴각하던 중 참합피에서 탁발규에게 대패하여 모용농 등은 패주했다. 396년 초, 모용수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모용농, 모용륭과 함께 북위를 공격했으나, 참합피를 지나면서 병사들의 탄식을 듣고 분노와 수치심으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 이후 모용보가 황제 자리를 이었다.
2. 3. 모용보 시대와 죽음 (396년 ~ 398년)
396년 모용수가 사망하고 모용보가 즉위하자, 모용농은 병주(幷州)(지금의 산시성 중부 및 북부)의 수비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군량 확보를 위해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무리하게 식량을 징발하고, 호족들을 감시하게 하여 민심을 잃었다.[2] 백성들은 북위의 탁발규(북위 도무제)에게 사자를 보내 병주를 점령해 줄 것을 요청했다.396년 가을, 탁발규가 병주의 수도 진양(晉陽)(지금의 타이위안)을 공격해 오자 모용농은 패배했다. 모용농은 가족을 잃고 부상을 입은 채 중산(中山)(지금의 허베이성 바오딩)으로 도주해야 했다.[2] 탁발규는 계속 진격하여 중산을 공격했다. 모용보는 모용농에게 중산 방어를 위한 소규모 부대를 지휘하게 했지만, 군사 지휘를 맡은 모용린은 소극적인 방어 전략을 고수하여 모용농과 모용륭의 불만을 샀다.
397년 봄, 모용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도주하자, 모용보는 모용린이 모용회와 합류할 것을 우려하여 중산을 버리고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모용농과 모용륭의 부하들은 중산에 남아 방어할 것을 권했지만, 두 사람은 모용보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이를 거절하고 모용보와 모용회의 군대에 합류했다.[2]
그러나 모용회는 자신이 아닌 동생 모용책이 황태자가 된 것에 앙심을 품고 쿠데타를 계획했다. 이를 눈치챈 모용보가 모용회의 군사 일부를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맡기려 하자, 모용회는 분노하여 암살자들을 보내 모용륭을 살해했다. 모용농은 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뇌가 보일 정도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2][3]
모용보는 용성(龍城)(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시)에 정착한 후 모용농을 재상으로 임명했다. 모용농의 건의에 따라 모용보는 처음에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는 생각을 포기했다. 그러나 398년 초, 모용보는 모용성과 모용농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쪽으로 진격하려 했다. 모용보가 용성을 떠나자 장군 단속골(段速骨)이 반란을 일으켰고, 군대는 모용보를 버리고 용성으로 돌아갔다. 단속골은 난한의 도움을 받아 모용륭의 아들 모용숭(慕容崇)을 옹립하여 용성을 장악했다.
단속골은 처음에는 열세였으나, 모용농이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여 항복하자 상황이 역전되어 용성은 단속골의 손에 떨어졌다. 단속골은 모용농을 유폐했지만, 그의 책사 아교라(阿交羅)는 모용숭보다 모용농을 허수아비로 삼는 것이 낫다고 조언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숭의 측근 종양(鬷讓)과 출력건(出力犍)은 아교라와 모용농을 암살했다.[4] 모용농은 사후 시호 환열(桓烈)을 받았다.[4]
3. 정치적, 군사적 업적
369년 모용수가 모용평의 견제를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모용농은 모용수와 함께 전연에서 전진으로 망명했다.[1] 왕맹 사후 377년 전진의 국력이 쇠퇴하자 모용수에게 전연의 재건을 권했으나 거절당했다. 383년 전진이 비수 대전에서 패배하자 다시 모용수에게 전연 재건을 조언했고, 모용수는 이를 받아들여 384년 전진으로부터 독립해 후연을 건국하였다.[1]
모용농은 후연 건국 후 전진의 잔당을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386년에는 유주와 평주를 평정하고 여암을 토벌하였다. 또한 고구려로부터 일부 영토를 회복하는 데 공헌하여 유주와 평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용성에 주둔했으며, 요서왕에 봉해졌다.[1] 389년 모용륭에게 용성의 수비를 인계하고 중산으로 이동하였다.[1]
392년 적위를 멸망시키고 서연을 침공하여 후연의 영토 확장에 기여했으며, 394년에는 청주의 벽려혼 공격에 앞장섰다. 이후 모용수의 명으로 중산으로 복귀했다.[1]
396년 모용보와 함께 국경에서 북위의 침공에 맞섰으나, 함께 파견된 모용린의 자만으로 인해 참합파에서 대패했다.[1] 군사를 재정비한 뒤 모용륭과 함께 북위를 공격해 승리했지만, 모용수는 병으로 사망했다.[1]
모용보 즉위 후, 모용농은 병주의 수비를 담당했으나 민심을 잃었고, 396년 탁발규의 공격에 패배하여 중산으로 후퇴했다.[1] 397년 모용린의 반란 실패 후, 모용보는 중산을 버리고 피신하기로 결정했고, 모용농과 모용륭은 중산 사수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3. 1. 유주와 평주 안정화
386년경, 모용농은 유주(幽州, 현대 베이징, 톈진, 북부 허베이 성)와 평주(平州, 현대 랴오닝 성)에 남아있던 전진 세력을 소탕하고, 여암을 토벌하였으며, 고구려가 점령했던 일부 군현을 회복하였다. 모용수는 그를 유주와 평주의 총독(總督)으로 임명하고, 옛 전연의 수도인 용성(龍城, 현대 랴오닝 성 진저우)을 관할하게 했으며, 그는 그 자리에서 몇 년 동안 머물렀는데, 이 지역 백성들에게 매우 호평을 받았다. 386년, 모용수는 그를 요서왕으로 봉했다.[1]389년, 유주와 평주 지역에 더 이상 처리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모용농은 모용수에게 수도 중산(中山, 현대 허베이 성 바오딩)으로 소환해달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의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1]
: "저는 처음 이곳에 병력을 투입하여 반란군을 진압했고, 이 지역들을 안전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제 군사들은 수년간 휴식을 취했고, 아직도 청주(靑州, 현대 중부 및 동부 산둥 성), 서주(徐州, 현대 북부 장쑤 성 및 안후이 성), 형주(荊州, 현대 후베이 성), 옹주(雍州, 현대 중부 및 북부 산시 성)에 많은 도적들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곧 누군가가 저를 이곳에서 대신하여 제가 돌아가 제 모든 힘을 제국을 위해 쏟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아있는 동안 힘을 낭비하지 않고 죽어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청주는 동진의 지배 하에 있었고, 옹주는 후진(後秦)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모용농은 동진과 후진을 정복하거나 적어도 격파하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모용수는 보고를 받자 모용농을 수도로 소환하고, 그의 형제인 모용륭에게 용성의 지위를 넘겨주었다.[1]
3. 2. 후연의 영토 확장 기여
384년 봄, 모용수가 후연 건국을 선포하자, 모용농은 전진 잔당과 전진 멸망 이후 반독립을 유지하던 다른 장수들을 상대로 한 작전에 크게 기여했다.[1] 386년경, 모용농은 유주(幽州, 현대 베이징, 톈진, 북부 허베이성)와 평주(平州, 현대 랴오닝성)에 남아있던 모든 전진 세력을 소탕했는데, 여기에는 반란자 여암도 포함되었으며, 고구려가 점령했던 일부 군현을 회복했다.[1] 모용수는 그를 유주와 평주의 실질적인 총독으로 임명하고, 옛 전연의 수도인 용성(龍城, 현대 랴오닝성 진저우)을 관할하게 했으며, 그는 그 자리에서 몇 년 동안 머물렀는데, 이 지역 백성들에게 매우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1] 386년, 모용수는 그를 요서왕으로 봉했다.[1]389년, 유주와 평주 지역에 더 이상 처리할 문제가 없다고 믿은 모용농은 모용수에게 수도 중산(中山, 현대 허베이성 바오딩)으로 소환해달라는 보고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
: "저는 처음 이곳에 병력을 투입하여 반란군을 진압했고, 이 지역들을 안전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제 군사들은 수년간 휴식을 취했고, 아직도 청주(青州, 현대 중부 및 동부 산둥성), 서주(徐州, 현대 북부 장쑤성 및 안후이성), 형주(荊州, 현대 후베이성), 옹주(雍州, 현대 중부 및 북부 산시성)에 많은 도적들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곧 누군가가 저를 이곳에서 대신하여 제가 돌아가 제 모든 힘을 제국을 위해 쏟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아있는 동안 힘을 낭비하지 않고 죽어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청주, 서주, 형주는 동진의 지배 하에 있었고, 옹주는 후진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모용농은 동진과 후진을 정복하거나 적어도 격파하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1]
모용수는 보고를 받자 모용농을 수도로 소환하고, 그의 형제인 모용륭 고양왕에게 용성의 지위를 넘겨주었다.[1] 그 후 몇 년 동안, 모용농은 아버지의 여러 차례의 원정에 참여했고, 특히 392년 적위와 그 황제 적조를 멸망시킨 작전에서 효과적인 활약을 했다.[1] 그는 또한 394년 서연을 멸망시키고 후연이 현대 산시성을 차지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1] 같은 해, 모용농은 이전 후연의 신하였던 벽려혼이 다스리고 있던 동진의 광고를 공격하여 벽려혼에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395년경, 알 수 없는 이유로 모용수는 그에게 중산으로 돌아가 작전을 포기하라고 명령했다.[1]
3. 3. 북위와의 전쟁
396년, 북위의 도무제가 병주(幷州)(지금의 산시성 중부 및 북부)를 공격해 오자, 모용농은 이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당시 모용농은 병주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군량 확보를 위해 기근에 시달리는 농민들에게 징발을 강행하고, 호족들을 감시하게 하여 백성들의 반발을 샀다.[1]북위군에 패배한 모용농은 가족을 잃고 부상을 입은 채 중산(中山)(지금의 허베이성 바오딩시)으로 도망쳤다. 탁발규는 계속 진격하여 중산을 공격했고, 모용보는 모용농에게 방어를 위한 소규모 부대를 지휘하게 했지만, 군사 대부분은 모용린이 통솔했다. 모용린은 북위와의 전투를 회피했고, 이에 모용농과 모용륭은 불만을 표출했다.[1]
397년 봄, 모용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도주하자, 모용보는 모용린이 모용회와 합류할 것을 우려하여 중산을 버리고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모용농과 모용륭은 중산을 사수할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모용보를 따라 모용회의 군대와 합류하게 되었다.[1]
4. 평가
모용농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비수 대전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모용수에게 전연의 재건을 주장하여 후연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전진의 잔당을 소탕하고 적위와 서연을 공격하여 후연의 영토를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또한 고구려로부터 일부 영토를 되찾는 등 군사적인 공을 세워 유주와 평주의 총독으로 임명되기도 했다.[1]
모용수가 죽은 뒤 모용보를 보좌하면서 국정 운영에 참여했고, 북위의 침입에 맞서 싸우는 등 후연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1] 모용성과 함께 여러 유용한 조언을 했으나, 모용보가 이를 무시하고 잘못된 정치를 하여 후연의 쇠퇴를 막지는 못했다.[1]
하지만, 백성들에게 식량을 지나치게 많이 징수하고, 한족이 아닌 부족들을 감시하기 위해 군 장교들을 파견하는 등 실정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다.[1] 이 때문에 백성들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탁발규에게 병주를 점령해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1] 결국 396년 탁발규의 공격에 패하여 처자를 잃고 중산으로 도망쳐야 했다.[1]
397년 모용린의 반란 실패 후, 모용보가 중산을 버리고 피난 가려고 할 때 모용농과 모용륭은 중산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이후 모용회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398년 단속골의 반란에 항복했다가 모용숭의 측근에게 살해당했다.[1]
4. 1. 긍정적 평가
모용농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식견을 바탕으로 후연 건국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비수 대전 이후 혼란한 정세 속에서 모용수에게 전연의 재건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후연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전진의 잔당을 소탕하고 적위와 서연을 정벌하여 후연의 영토 확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 고구려로부터 일부 영토를 회복하는 등 군사적 공헌으로 유주와 평주의 총독으로 임명되기도 했다.[1]모용수 사후 모용보를 보좌하며 국정 운영에 참여했고, 북위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등 후연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1] 모용성과 함께 유용한 조언을 제시했으나, 모용보가 이를 무시하고 실정을 거듭하여 후연의 쇠퇴를 막지는 못했다.[1]
4. 2. 부정적 평가
모용농은 백성들에게 식량을 과도하게 징발하고, 한족이 아닌 부족들을 감시하기 위해 군 장교들을 파견하는 등 실정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다.[1] 이로 인해 백성들은 북위에 사자를 보내 탁발규에게 병주를 점령해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1] 결국 396년 탁발규의 공격에 패배하여 처자를 잃고 중산으로 도주해야 했다.[1]397년 모용린의 쿠데타 실패 후, 모용보가 중산을 버리고 피신하려 할 때 모용농과 모용륭은 중산을 사수할 것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이후 모용회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398년 단속골의 반란에 항복했다가 모용숭의 측근에게 살해당했다.[1]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모용수 |
황후 | 성애황후(成哀皇后) 단씨(段氏) |
참조
[1]
서적
晋書 慕容垂載記 巻123
[2]
서적
晋書 慕容宝載記 巻124
[3]
서적
資治通鑑 晋紀 巻109
[4]
서적
資治通鑑 晋紀 巻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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