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와나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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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와나 번은 헤이안 시대부터 상업 도시로 번성했으며, 센고쿠 시대에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를 받았다. 1601년 혼다 타다카츠가 초대 다이묘로 임명된 이후, 혼다 가문, 히사마츠 마쓰다이라 가문,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을 거쳐 히사마츠 마쓰다이라 가문이 다시 통치했다. 구와나 번은 도카이도 역참 도시로서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바지락, 쌀, 도자기, 무라마사 검 등이 특산물로 유명했다. 막부 말기에는 교토 쇼시다이를 역임하며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으나, 보신 전쟁에서 패배하여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되어 미에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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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베군은 1879년 미에현에 설치되어 행정 구역 통폐합을 거쳐 현재는 도인정 하나만을 관할하는 군이다.
구와나번 | |
---|---|
개요 | |
번 | 구와나 번 |
로마자 표기 | Kuwana-han |
국가 | 번 (일본) |
위치 | 미에현 |
통치 형태 | 다이묘 |
거성 | 구와나성 |
존속 기간 | 1601년 ~ 1871년 |
역사 | |
시작 | 1601년 |
종료 | 1871년 |
추가 정보 | |
참고 자료 | 오이시 가쿠, 에도 오백 번-고토치 번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2020), 주오코론신샤, ISBN 978-4128001354 |
2. 번의 역사
1601년 1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요 장군 중 한 명인 혼다 타다카츠가 10만석의 녹봉을 받고 구와나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 지역을 항구이자 에도와 교토를 잇는 도카이도의 역참인 구와나주쿠로서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1609년, 혼다 타다카츠는 아들 혼다 타다마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혼다 타다마사는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1617년 더 많은 녹봉을 받는 히메지번으로 옮겨갔다.
이후 구와나 번은 이에야스의 이복 형제인 히사마츠 사다카츠에게 주어졌고, 그의 후손들은 1710년 에치고국의 다카다 번으로 옮겨갈 때까지 통치했다. 1710년부터 1823년까지는 마쓰다이라 씨의 오쿠다이라 분가가 구와나 번을 다스렸다.
1823년, 무쓰국 시라카와 번에 있던 히사마쓰 가문의 분가가 다시 구와나로 돌아와 도쿠가와 막부 말기까지 통치했다.[1]
마쓰다이라 사다아키는 구와나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다이묘로, 마지막 교토 쇼시다이를 맡았으며, 아이즈번의 다이묘이자 자신의 형제인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지원했다. 마쓰다이라 사다아키는 보신 전쟁에 참전했고, 에조 공화국 멸망 후 메이지 정부에 항복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리는 구와나의 마지막 다이묘였는데, 보신 전쟁 당시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전투 없이 삿초 동맹 군대에 구와나성을 넘겨주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리는 이후 미국에서 교육받고 메이지 정부에서 일하며 이탈리아 주재 일본 대사를 지냈으며, 화족 자작 작위를 받았다.[1]
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구와나 번은 "구와나 현"이 되었고, 이후 미에현의 일부가 되었다.
2. 1. 전사(前史)
헤이안 시대 말기와 무로마치 시대에 현재의 구와나 지역은 十楽の津|주라쿠노쓰일본어로 알려졌으며, 상인 길드가 통제하는 일본 동해안의 주요 항구였다. 1515년 시인 소초는 이곳을 1,000채가 넘는 가옥, 사찰, 여관이 있는 주요 도시로 묘사했다. 센고쿠 시대에 이 지역은 오다 노부나가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노부나가는 이 지역을 가신 다키가와 가즈마스에게 할당했다.노부나가 사후, 이 지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카쓰를 이세국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1590년 오다와라 전투 이후,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카쓰를 강등시키고 이세국을 여러 영지로 분할하여 히토쓰야나기 나오모리를 구와나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1595년 이 지역은 우지이에 유키히로에게 22,000곡 영지로 재할당되었다. 유키히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친 도요토미 군대에 가담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했다.[1]
2. 2. 혼다 가(本多家) 시대

게이초 6년(1601년) 1월 1일, 카즈사 오타키번에서 이에야스 가문의 중신 혼다 다다카쓰가 10만 석으로 입봉하면서 구와나 번이 성립되었다.[1] 다다카쓰는 도쿠가와 사천왕의 한 명으로, 다케다 신겐과 오다 노부나가 등에게 칭찬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용맹한 무장이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무공을 세우는 등 군사적인 면모가 두드러지지만, 번을 다스리는 데에도 뛰어나 '게이초의 거리 조성'이라 불리는 대규모 거리 조성, 성곽 증개축, 도카이도 슈쿠바(宿場, 역참) 정비 등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1]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구와나 시가지의 기초가 되었고,[1] 실질적으로 구와나 번의 기반을 확립한 훌륭한 통치였다.
게이초 14년(1609년), 다다카쓰는 은퇴하고 그의 아들 혼다 다다마사가 제2대 번주가 되었다.[1] 다다마사는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 선봉으로 참전하여[1] 우스다 카네스케, 모리 카츠나가 등과 격전을 벌였다.[1]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정실이었던 센히메와 다다마사의 아들 혼다 다다토키가 혼인한 인연도 있었고, 겐와 3년(1617년) 7월 14일, 다다마사는 오사카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하리마 히메지번 15만 석으로 영지를 옮기게 되었다.[1]
2. 3.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久松松平家) 시대 (제1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복동생인 마쓰다이라 사다카쓰가 야마시로 후시미 번 5만 석에서 6만 석을 더 받아 11만 석으로 구와나 번에 들어왔다.[1] 겐나 6년(1620년)에는 이세 나가시마 영지 7000석을 받아 11만 7000석이 되었다. 사다카쓰는 간에이 원년(1624년) 3월 14일에 사망했고, 차남인 마쓰다이라 사다유키가 제2대 번주가 되었다. 이때 7000석을 동생인 마쓰다이라 사다후사에게 주었기 때문에 다시 11만 석이 되었다. 사다유키는 상수도 설치, 상수도(정원 용수) 공사, 성 아래 습지 개척에 의한 미사키 신전 개발 등에 힘썼지만, 간에이 12년(1635년) 7월 28일에 15만 석으로 늘어난 뒤 이요 마쓰야마 번으로 옮겨졌다.이 때문에 미노 오가키 번 6만 석에서 사다유키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사다쓰나가 11만 3000석으로 늘어나 들어왔다. 사다쓰나는 신전 개발과 수리 시설 정비, 가신단 편성에 진력하여 명군으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실제 구와나 번주는 사다쓰나라고도 불렸다. 실제로 진국공, 진국대명신으로 제사 지내지고 있다. 그러나 구와나는 홍수가 잦은 곳으로, 게이안 3년(1650년)의 대홍수에서는 6만 4000석에 달하는 피해를 입는 큰 참사가 발생했다.
게이안 4년(1651년) 12월에 사다쓰나가 사망했고, 제4대 번주로는 차남인 마쓰다이라 사다요시가 쇼오 원년(1652년) 2월에 취임했지만, 병약했기 때문에 메이레키 3년(1657년) 7월에 사망했다. 이 때문에 이요 마쓰야마 번에서 양자로 마쓰다이라 사다시게가 제5대 번주로 들어왔다. 사다시게는 53년에 걸쳐 구와나를 지배하는 장기 집권이었지만, 이 시대에는 천재지변이 잇따랐다. 덴와 원년(1681년), 덴와 3년(1683년), 조쿄 3년(1686년), 겐로쿠 3년(1690년), 겐로쿠 8년(1695년), 겐로쿠 14년(1701년), 호에이 4년(1707년)과 잇따라 수해가 발생했으며, 화재 또한 간분 5년(1665년), 겐로쿠 14년(1701년), 겐로쿠 15년(1702년), 호에이 4년(1707년)에 발생했다.
이 때문에 가신의 감봉과 구조 조정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지만, 사다시게는 8석 3인 부양의 소자였던 노무라 조에몬을 군대에 발탁했고, 노무라는 검약령과 신전 개발 등 번정 재건에 능숙함을 보였다. 이것은 대성공이었지만, 푸다이 가신단의 질투를 사서, 호에이 7년(1710년) 5월 29일에 노무라는 사형에 처해졌다(노무라 소동). 이 소동이 막부에도 알려지게 되자, 윤 8월 15일에 사다시게는 에치고 다카다 번으로 징벌적인 이봉을 명령받았다.
2. 4.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奥平松平家) 시대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와 이에야스의 장녀 카메히메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 마쓰다이라 타다아키의 계통이다.[1] 마쓰다이라 타다마사는 빈고후쿠야마 번에서 10만 석으로 들어와 번주가 되었다. 타다마사는 학문 진흥과 사찰 개축 등 문화 발전에 힘썼다.[1]1746년 타다마사가 사망하고, 넷째 아들 마쓰다이라 타다토키가 제2대 번주를 계승했다.[1] 이 시대에 호레키 치수가 행해져 사쓰마 번과 갈등을 겪었고, 히라타 유키에를 포함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막부와 구와나 번에 대한 원한이 남았다.[1]
1771년 타다토키가 은거하고, 차남 마쓰다이라 타다히로가 제3대 번주가 되었다.[1] 이 시대에는 1782년 4차례의 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고, 연공 감면을 요구하는 백성 봉기(일규)도 일어나 번 재정이 악화되었다.[1]
1786년 타다히로가 사망하고, 기슈 도쿠가와 가 출신의 사위 마쓰다이라 타다야스가 제4대 번주가 되어 개혁을 실시했지만, 병약함으로 인해 1793년 은거했다.[1] 제5대 번주에는 타다야스의 친동생 마쓰다이라 타다카즈가 계승하여 학문 진흥에 힘쓰고 번교 신슈칸을 창설했다.[1]
1802년 타다카즈가 사망하고, 에치고 요이타 번에서 온 사위 마쓰다이라 타다스케가 제6대 번주를 계승했다.[1] 1821년 타다스케가 사망하고, 장남 마쓰다이라 다다타카가 제7대 번주를 계승했다.[1]
1823년 3월 24일, 마쓰다이라 다다타카가 무사시오시 번으로 이봉되면서 농민 봉기(분세이 구와나 농민 일규)가 발생했다.[1] 이는 번이 농민에게서 강제로 돈을 빌려 번 재정을 지원했지만, 갑작스러운 이봉 명령으로 빚을 갚지 못하고 오시 번으로 가려 했기 때문이다.[1] 이사 과정에서 농민 봉기로 20명의 촌장이 습격당했고, 주변 번의 원군을 얻어 진압한 후 주모자는 처형되었다.[1] 이사 후에도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은 구와나 시절의 빚과 이사 비용 등으로 100000JPY 이상의 빚을 지게 되었다.[1]
2. 5.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久松松平家) 시대 (제2기)
1823년, 히사마쓰 가문의 분가가 무쓰국 시라카와 번에서 구와나로 돌아왔다. 히사마쓰 가문은 도쿠가와 막부 말기까지 구와나를 통치했다.[1]구와나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다이묘인 마쓰다이라 사다아키는 마지막 교토 쇼시다이를 역임했으며, 그의 형제인 아이즈번의 다이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지원했다. 그는 보신 전쟁에 참전하여 에조 공화국 몰락 이후 메이지 정부에 항복했다. 구와나의 마지막 다이묘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리는 보신 전쟁 당시 어린아이였다. 그는 전투 없이 삿초 동맹 군대에 구와나성을 항복시켰다. 이후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메이지 정부에 참여하여 이탈리아 주재 일본 대사를 역임했다. 그는 나중에 화족 작위인 자작으로 봉해졌다.[1]
3. 역대 번주
구와나번의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다.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석고 |
---|---|---|---|---|---|
1 | 本多忠勝|혼다 다다카쓰일본어 | 1601년 ~ 1609년 | 中務大輔|나카쓰카사노다이스케일본어 | 종5위하 | 10만 석 |
2 | 本多忠政|혼다 다다마사일본어 | 1609년 ~ 1616년 | 美濃守|미노노카미일본어; 侍従|지주일본어 | 종4위하 | 10만 석 |
1 | 久松定勝|히사마쓰 사다카쓰일본어 | 1616년 ~ 1624년 | 左近衛権少将|사콘노에곤쇼쇼일본어 | 종4위하 | 11만 석 |
2 | 久松定行|히사마쓰 사다유키일본어 | 1624년 ~ 1635년 | 隠岐守|오키노카미일본어; 侍従|지주일본어 | 종5위하 | 11만 석 |
3 | 松平定綱|마쓰다이라 사다쓰나일본어 | 1635년 ~ 1651년 | 越中守|엣추노카미일본어 | 종4위하 | 11만 석 |
4 | 松平定良|마쓰다이라 사다요시일본어 | 1652년 ~ 1657년 | 摂津守|셋쓰노카미일본어 | 종5위하 | 11만 석 |
5 | 松平定重|마쓰다이라 사다시게일본어 | 1657년 ~ 1710년 | 越中守|엣추노카미일본어 | 종5위하 | 11만 석 |
1 | 松平忠雅|마쓰다이라 다다마사일본어 | 1710년 ~ 1746년 | 左近衛権少将|사콘노에곤쇼쇼일본어 | 종4위하 | 10만 석 |
2 | 松平忠刻|마쓰다이라 다다토키일본어 | 1746년 ~ 1771년 | 下総守|시모사노카미일본어 | 종4위하 | 10만 석 |
3 | 松平忠啓|마쓰다이라 다다히라일본어 | 1771년 ~ 1786년 | 下総守|시모사노카미일본어 | 종4위하 | 10만 석 |
4 | 松平忠功|마쓰다이라 다다카쓰일본어 | 1787년 ~ 1793년 | 下総守|시모사노카미일본어 | 종4위하 | 10만 석 |
5 | 松平忠和|마쓰다이라 다다토모일본어 | 1793년 ~ 1802년 | 下総守|시모사노카미일본어 | 종4위하 | 10만 석 |
6 | 松平忠翼|마쓰다이라 다다스케일본어 | 1802년 ~ 1821년 | 下総守|시모사노카미일본어; 侍従|지주일본어 | 종4위하 | 10만 석 |
7 | 松平忠堯|마쓰다이라 다다타카일본어 | 1821년 ~ 1823년 | 修理大輔|슈리다이유일본어; 侍従|지주일본어 | 종4위하 | 10만 석 |
-- 히사마쓰 가문 (신판 다이묘), 1823년 ~ 1871년 | |||||
1 | 松平定永|마쓰다이라 사다나가일본어 | 1823년 ~ 1838년 | 式部大輔|시키다이유일본어 | 종4위하 | 11만 3천 석 |
2 | 松平定和|마쓰다이라 사다카즈일본어 | 1838년 ~ 1841년 | 左近衛権少将|사콘노에곤쇼쇼일본어 | 종4위하 | 11만 3천 석 |
3 | 松平定猷|마쓰다이라 사다미치일본어 | 1842년 ~ 1858년 | 越中守|엣추노카미일본어; 侍従|지주일본어 | 종4위하 | 11만 3천 석 |
4 | 松平定敬|마쓰다이라 사다아키일본어 | 1859년 ~ 1868년 | 左近衛権中将|사콘노에곤츄쇼일본어; 侍従|지주일본어 | 종4위하 | 11만 3천 석 |
5 | 松平定教|마쓰다이라 사다노리일본어 | 1868년 ~ 1871년 | - | 정4위하 | 11만 3천 석 → 6만 석 |
1823년, 무쓰 시라카와번에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아들 마쓰다이라 사다나가가 11만 석으로 입봉했다. 이는 사다노부가 선조의 땅인 구와나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도쿠가와 이에나리도 간세이 개혁의 공로자인 사다노부에게 보은하고자 한 결과였다.[5] 하지만, 당시 에도를 외국 선박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보소반도에서 해방 경비를 맡고 있던 시라카와번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사다나가는 시모사 사쿠라번으로의 이봉을 희망했으나, 결국 구와나로 전봉되었다는 반대 설도 존재한다.[6]
3. 1. 혼다 가(本多家)
本多|ほんた일본어 가문은 1601년부터 1616년까지 구와나번을 다스린 후다이 다이묘 가문이다. 혼다 다다카쓰가 초대 번주였으며, 그의 아들 혼다 다다마사가 그 뒤를 이었다.#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석고 |
---|---|---|---|---|---|
혼다 가문, 1601-1616 (후다이 다이묘) | |||||
1 | 本多忠勝|혼다 다다카쓰일본어 | 1601년 ~ 1609년 | 中務大輔|나카쓰카사노다이스케일본어 | 종5위하 | 100000koku |
2 | 本多忠政|혼다 다다마사일본어 | 1609년 ~ 1616년 | 美濃守|미노노카미일본어; 侍従|지주일본어 | 종4위하 | 100000koku |
3. 2.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久松松平家) (제1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부 동생인 마쓰다이라 사다카쓰를 시조로 하는 신판 다이묘 가문이다. 1616년 사다카쓰가 구와나번에 봉해진 후, 아들 사다유키, 사다쓰나, 사다요시, 사다시게로 이어졌다. 사다유키가 이요 마쓰야마로 이봉되면서, 동생인 미노 오가키의 사다쓰나가 입봉하였다.[4]# | 이름 | 재임 기간 | 조정 관직 | 석고 |
---|---|---|---|---|
1 | 히사마쓰 사다카쓰 | 1616년 ~ 1624년 | 종4위하 사콘노쇼쇼 | 110000koku |
2 | 히사마쓰 사다유키 | 1624년 ~ 1635년 | 종5위하 오키노카미, 지주 | 110000koku |
3 | 마쓰다이라 사다쓰나 | 1635년 ~ 1651년 | 종4위하 엣추노카미 | 110000koku |
4 | 마쓰다이라 사다요시 | 1652년 ~ 1657년 | 종5위하 셋쓰노카미 | 110000koku |
5 | 마쓰다이라 사다시게 | 1657년 ~ 1710년 | 종5위하 엣추노카미 | 110000koku |
3. 3.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奥平松平家)
奥平松平家일본어는 신판 다이묘 가문으로, 석고는 10만 석이었다.#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석고 |
---|---|---|---|---|---|
1 | 마쓰다이라 다다마사| 松平忠雅일본어 | 1710년 ~ 1746년 | 종사위하 | 사콘노쇼쇼(左近衛権少将) | 100,000 석 |
2 | 마쓰다이라 다다토키| 松平忠刻일본어 | 1746년 ~ 1771년 | 종4위하 | 시모사노카미(下総守) | 100,000 석 |
3 | 마쓰다이라 다다히라| 마쓰다이라 다다히라일본어| 松平忠啓}} | 1771년 ~ 1786년 | 종4위하 | 시모사노카미 | 100,000 석 |
4 | 마쓰다이라 다다카쓰| 松平忠功일본어 | 1787년 ~ 1793년 | 종4위하 | 시모사노카미 | 100,000 석 |
5 | 마쓰다이라 다다토모| 松平忠和일본어 | 1793년 ~ 1802년 | 종4위하 | 시모사노카미 | 100,000 석 |
6 | 마쓰다이라 다다스케| 松平忠翼일본어 | 1802년 ~ 1821년 | 종4위하 | 시모사노카미, 지주(侍従) | 100,000 석 |
7 | 마쓰다이라 다다타카| 松平忠堯일본어 | 1821년 ~ 1823년 | 종4위하 | 슈리다이유(修理大輔), 지주 | 100,000 석 |
3. 4.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久松松平家) (제2기)
久松松平家일본어 (제2기)는 신판 다이묘 가문으로, 사다나가를 초대 번주로 한다. 초기에는 11만 3천 석이었으나, 마지막 번주인 사다노리 대에는 6만 석으로 줄었다.#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
1 | 마쓰다이라 사다나가 | 1823년 - 1838년 | 시키다이유(式部大輔) | 종4위하 (従四位下) | 113,000 koku |
2 | 마쓰다이라 사다카즈 | 1838년 - 1841년 | 사콘노쇼쇼(左近衛権少将) | 종4위하 (従四位下) | 113,000 koku |
3 | 마쓰다이라 사다미치 | 1842년 - 1858년 | 엣추노카미(越中守); 지주(侍従) | 종4위하 (従四位下) | 113,000 koku |
4 |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 1859년 - 1868년 | 사콘노츄쇼(左近衛権中将); 지주(侍従) | 종4위하 (従四位下) | 113,000 koku |
5 | 마쓰다이라 사다노리 | 1868년 - 1871년 | - | 정4위하 (正四位下) | 113,000 koku → 60,000 koku |
마쓰다이라 사다나가는 번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에도의 상옥 소실, 막부 보조 공사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의 영향을 받은 이쿠타 만의 난이 발생하여 에치고의 가시와자키 진야가 습격받기도 했다.[4]
마쓰다이라 사다카즈와 마쓰다이라 사다미치 시대에도 재정 재건 노력이 이어졌지만, 수해, 화재, 안세이 대지진 등의 재해와 막말의 격동기 속에서 번 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4]
구와나 번의 실제 실고는 본령지 8만 3천 석, 에치고 가시와자키 5만 9천 석으로 총 14만 석이었다.[4] 덴포의 개혁으로 미즈노 타다쿠니와 토리이 요조에게 배척된 야베 사다카네는 구와나 번에 맡겨져 단식하다 분사했다.[4]
4. 사회
구와나 번의 번사들은 폐번치현 이후 2년 만에 녹봉 지급이 폐지되어 수입이 끊기자 하급 관리, 교원, 군인 등으로 구직했다. 그러나 구와나는 조정의 적이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차별을 받아 고통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서남 전쟁에서는 원한을 풀기 위해 400명이나 출정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부국강병의 군수 산업 활성화에 힘입어 중공업이 크게 발전했다.
4. 1. 산업
혼다 다다카쓰는 게이초 시대에 치밀한 마을 설계를 실시하면서 락이 제도를 시행, 상공업자를 불러 모아 성 아래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주조 장인, 기와 장인, 도공 등에게는 주거지가 제공되고 세금은 면제되었으며, 성씨와 칼 착용이 허용되는 등 보호 특권이 주어졌다.[1] 상공업자들은 마을 설계 시 동업자들을 모아 유정, 감물집, 대장장이 마을, 냄비집, 어시장, 선마을, 목욕마을, 전마을을 만들었고, 그 마을 이름이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1]도카이도의 요충지라는 점과 배편이 편리하다는 점 때문에 구와나는 상업이 번성하였다. 구와나 쌀은 품질이 우수하여 전국 유수의 쌀 집산지였으며, 에도 시대에는 쌀 거래소가 열려 그 시세가 에도와 오사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구와나 쌀은 인근 여러 나라의 양조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높았다. 에도 시대 중기에 에도가 대소비 도시가 되자, 구와나 쌀과 막부령의 연공미(미노 등)는 구와나로 운반된 다음 에도와 오사카로 운반되었다.[2]
마쓰다이라 사다쓰나가 번주가 되면서 지바 산업을 장려하고 스스로 여러 번 순시에 방문하기도 하여, 과수, 양조주, 명차 등의 특산품이 새롭게 생겨났다. 이들 또한 구와나가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며, 목재 등은 기소, 히다, 이세 남부, 기이에서 모여 집산지가 되었다.[2]
구와나의 명물은 해산물인 바지락이다. 도미다의 구운 바지락 등 구와나 번 영내의 바지락은 껍질이 크고 살이 두꺼워 맛이 좋았다. 기소강과 이비강의 하구가 담수와 해수가 섞이는 곳으로 영양분이 풍부하며, 깊은 갯벌이 있어 바지락 성장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구와나 바지락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역대 쇼군에게도 헌상되었다. 당시에는 구운 바지락이 주류였으며, 가도변의 찻집에서는 반드시 팔았고, 여행자는 반드시 구운 바지락을 먹었다고 할 정도로, 껍질의 형태와 색깔도 훌륭하여 조개맞추기나 고약 용기로서도 귀하게 여겨졌다.[3] 시구레 바지락(조린 바지락)은 맛있는 보존식으로 유명해져 판로도 넓었다.[4]
도자기에서는 반코야키가 주류였는데,[4], 이것은 제품에 반코 혹은 반코 불변의 낙인을 찍었기 때문이다. 막부의 어용도 맡았을 정도로 에도 반코가 되었고, 그 후에도 각지에 기술이 전해져 각 지명을 관명으로 하는 반코야키가 탄생했다.[5]
도검에서는 도쿠가와 가문에 저주를 내렸다고 여겨지는 무라마사가 이세도 도공의 원조이다.[5] 무라마사는 칼날이 뛰어나 비교할 데가 없다고 칭찬받았지만, 이 저주 때문에 도쿠가와 시대에는 냉대받았다. 다만 막말에는 지사로부터 그 전설 때문에 애용되었다.[6][7]
그 외에 현재 전해지는 명산품으로 야스나가 떡, 타가네 센베이, 지역 맥주 우에우마, 청주 우에우마 니카레카와, 쿠와나 등이 있다.[8]
4. 2. 문화·교육
에도 시대 중기까지 구와나에서는 문화적으로 큰 발전이 없었다.[1] 그러나 마쓰오 바쇼가 구와나를 세 번 방문하여 여러 번 시를 읊으면서 문화 발전의 시초가 되었다.[2] 교쿠테이 바킨도 구와나를 방문했지만, 이 때 구와나의 하이카이를 혹평했다.[3] 그 외에도 우타가와 히로시게, 세이카와 하치로, 카와이 츠구노스케 등 저명인사들이 자주 구와나를 방문했다. 사카모토 료마(시치리의 나룻터에서 방뇨하다가 경비 구와나 번사에게 호통을 들었다고 한다), 에도 유학 중이던 요시다 쇼인, 지볼트 등도 구와나를 방문했다.마쓰다이라 사다나가가 구와나 번주로 취임하자, 무쓰 시라카와 번주였던 사다노부에 의해 창설되었던 번교인 릿쿄칸이 그대로 시라카와에서 구와나로 옮겨졌다.[4] 교육 내용은 국학, 한학, 시가, 군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4. 3. 인구 증감
에도 시대 초기부터 겐로쿠 시대에 걸쳐 구와나의 인구와 가구 수는 증가하여, 정점에는 1만 3000명을 돌파했다.[1] 그러나 겐로쿠 시대 이후에는 성장이 둔화되었다. 이는 긴축 재정 하에서의 증세, 재해, 기근의 다발로 인해 자녀 양육이 어려워졌고, 일본 전국에서 간비키(중절) 및 낙태가 행해졌으며, 농촌에서 도시로 떠나는 이농자가 많았기 때문이다.[2]5. 막말의 영지
伊勢国일본어 구와나 군(桑名郡), 인베 군(員弁郡), 아사케 군(朝明郡), 미에 군(三重郡)과 越後国일본어 고시 군(古志郡), 우오누마 군(魚沼郡), 가리와 군(刈羽郡), 미시마 군(三島郡), 간바라 군(蒲原郡)에 걸쳐 영지를 보유했다.[2][3] 또한 에도 막부로부터 예탁받은 천령(天領)도 관리했다.
구체적인 영지 목록은 다음과 같다.
국명 | 군명 | 마을 수 |
---|---|---|
伊勢国일본어 | 구와나 군 | 64개 마을 |
인베 군 | 83개 마을 | |
아사케 군 | 30개 마을 | |
미에 군 | 9개 마을 | |
越後国일본어 | 고시 군 | 4개 마을 |
우오누마 군 | 22개 마을 | |
가리와 군 | 82개 마을 | |
미시마 군 | 30개 마을 | |
간바라 군 | 7개 마을 |
6. 에도 저택
구와나번은 에도에 여러 저택을 보유했으며, 일부는 다른 가문에 대여하기도 했다.[1]
- 상(上)야시키: 기타핫초보리에 9301m2 (내 하안 685m2) 규모였다.[1] 간에이 13년(1636년) 마쓰다이라 사다쓰나가 저택을 하사받은 것이 시초이며, 에도 시대 내내 상야시키로 사용되었다.[1] 겐로쿠 7년(1694년) 1월 23일, 저택 앞 해자에 걸린 다리를 엣추 다리라고 불렀으나, 보신 전쟁에서 마쓰다이라 사다노리가 패배한 후 큐안 다리로 이름이 바뀌었다.[1] 현재 해자는 도로가 되었고 큐안 다리는 그대로 남아있다.[1]
- 중(中)야시키: 모토야노쿠라에 1760m2 규모였으며, 마쓰다이라 단바노카미에게 대여했다.[1] 간세이 5년(1793년) 12월 28일 스가모에 있던 중야시키를 대신하여 하사받았다.[1] 분카 5년(1808년) 4월 13일 모토야노쿠라 야시키와 이치가야의 2700m2 부지와 교환했다가, 고카 3년(1846년) 윤 5월 18일 이치가야 야시키와 다시 교환하여 모토야노쿠라의 1760m2을 다시 확보했다.[1]
- 중(中)야시키: 후카가와 도미오카 하치만구 앞에 610m2 규모였다.[1] 언제부터 하사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1] 에도 만에 면해 있어 배가 드나드는 창고 야시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
- 하(下)야시키: 무코쓰키지에 15676.0004m2 (내 346m2는 이나바 나가토노카미에게 대여) 규모였다.[1] 시타야 다케몬에 있던 저택과 교환하는 형태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막부의 로주 수석 재임 중인 간세이 4년 윤 2월 12일에 하사받은 것으로, 사다노부의 공적에 따라 주어진 저택이다.[1] 이곳은 잇키 가문 저택지 일부였으며, 사다노부는 정원을 만들고 욕은원이라 이름 지었다.[1]
- 하(下)야시키: 시로가네무라에 503m2 규모였으며, 다테 와카사노카미에게 대여했다.[1] 덴포 14년(1843년) 8월 7일 가키가라초의 하야시키 3937m2과 교환하여 하사받았지만, 면적 차이가 크고 중심부에서 떨어진 장소와 교환했다는 특징이 있다.[1]
이 외에도 구와나번 고유 소유 저택으로 고이시카와 오쓰카에 11765m2, 가미오사키무라·시모오사키무라 입회지에 4796m2 등이 있었다.[1]
참조
[1]
서적
江戸五百藩-ご当地藩のすべてがわかる
Chuokoron-Shinsha
2020
[2]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3]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4]
웹사이트
Genealogy (jp)
https://reichsarchiv[...]
[5]
서적
公徳弁
[6]
문서
向藤左衛門上書 三
[7]
서적
白河市史
1971
[8]
서적
近世房総地域史研究
東京大学出版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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