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이 도모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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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시이 도모자네는 사쓰마 번 출신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과 친분이 있었으며, 번정 개혁과 도막 운동에 참여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정부 관료로 활동하며 궁내대승, 일본 철도 사장 등을 역임했고, 백작 작위를 받았다. 말년에는 추밀고문관을 지냈으며, 1888년 12월 12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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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이 도모자네 | |
---|---|
기본 정보 | |
이름 | 요시이 도모자네 |
다른 이름 | 요시이 니자에몬 요시이 주카이 요시이 고스케 |
계급/칭호 | 정2위 훈1등 백작 |
출생 | 1828년 4월 10일 |
출생지 | 일본 가고시마 가고시마 성하 가지야정 |
사망 | 1891년 4월 22일 |
사인 | 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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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소속 | 사쓰마번 |
주요 직책 | 유수거역 대목부 원로원 의관 |
가문 | |
본성 | 후지와라씨 |
가문 | 요시이씨 |
부친 | 요시이 도모마사 |
자녀 | 요시이 야스오 |
기타 정보 | |
창작물에서의 모습 | 료마가 간다 |
봉록 | 상전록 500석 |
2. 생애
사쓰마 번 번사였던 요시이 도모자네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과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였다.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번정 개혁에 참여하여 안세이 3년(1856년) 오사카 사쓰마 번 저택의 루스이 역 등을 맡으며 젊은 개혁파의 일원으로서 활약했다. 나리아키라 사후, 오쿠보 도시미치 등과 탈번을 꾀했으나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의 위로를 받아 분큐 원년(1861년) 오메쓰케 역에 취임했다. 이후 세이추 조의 중심인물로서 번정을 이끌고 존왕론 도막 운동을 추진했다.
겐지 원년(1864년) 금문의 변에서 조슈 번을 격퇴하고, 제1차 조슈 정벌에서 조슈의 전후 처리에 힘썼다. 게이오 3년(1867년) 삿토 밀약을 맺고, 보신 전쟁의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공을 세워 메이지 2년(1869년) 상전록 1,000석을 받았다.
유신 후 참여 등을 거쳐 궁내성과 공부성에서 일했다. 메이지 6년 정변에서 오쿠보를 돕고 사이고 다카모리와 결별했다. 일본 철도 회사 사장으로 재직하며 도쿄-마에바시 간 철도 개통을 추진했고, 우에노역-다카사키역 간 (도호쿠 본선 및 다카사키선) 개통에 기여했다. 이후 궁내대보, 궁내차관, 추밀 고문관 등을 역임하고 대일본 제국 헌법 심의에 참여했다. 메이지 24년(1891년), 63세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번정 개혁 참여
사쓰마 번의 번사 요시이 도모자네는 가고시마 성 아래 가고시마시 가치야마치에서 태어났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세이쇼 아쓰시 등과는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였다.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번정 개혁 아래 안세이 3년(1856년)에 오사카 사쓰마 번 저택의 루스이 역 등을 맡아 여러 번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젊은 개혁파의 일원으로서 활약했다.
나리아키라가 죽은 후, 오쿠보 도시미치나 세이쇼 아쓰시 등 동지 40명과 함께 탈번을 꾀했지만,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의 위로를 받아 분큐 원년(1861년)에 오메쓰케 역에 취임했다. 이듬해(1862년) 시마즈 히사미쓰(다다요시의 아버지)가 행한 군대 상경 및 칙사 오하라 시게토쿠와의 에도 하향에 수행했고, 후에 가타메쓰케나 고요가타 서기 등을 맡아 사이고, 오쿠보 등과 함께 세이추 조의 중심인물로서 번정을 이끌고 존왕론 도막 운동을 추진했다.[1]
2. 2. 도막 운동과 메이지 유신
사쓰마 번의 요시이 도모자네는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번정 개혁 아래서 젊은 개혁파의 일원으로 활약했다.[1] 나리아키라가 사망한 후, 오쿠보 도시미치 등 동지들과 탈번을 꾀했으나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에게 위로받고 분큐 원년(1861년)에 오메쓰케역에 취임했다.[1] 이듬해 시마즈 히사미쓰(다다요시의 아버지)가 주도한 군대 상경 및 칙사 오하라 시게토쿠와의 에도 하향에 수행했고, 이후 세이추 조의 중심인물로서 번정을 이끌며 존왕론 도막 운동을 추진했다.[1]겐지 원년(1864년)에는 죄를 받고 처분된 사이고 다카모리의 복귀를 간청하여 소환사로서 도지마에 갔다.[1] 같은 해 금문의 변에서는 조슈 번을 격퇴했고, 제1차 조슈 정벌에서 사이고가 정장 총독 도쿠가와 요시카쓰에게 조슈 처분을 위임받았을 때, 세이쇼 아쓰시와 함께 사이고를 따라 조슈에 들어가 전후 처리에 힘썼다.[1] 이에 앞서 조슈 번에 대한 조정의 결의를 굳히기 위해 도사 번사 이누이 마사히로, 구루메 번사 오쓰카 케이스케 등과 합의하여 의견서를 조정에 건의했다.[1]

게이오 3년(1867년), 고마쓰 기요카도, 사이고 등과 함께 도사 번의 이타가키 다이스케·나카오카 신타로 등과 삿토 밀약을 맺었다.[1] 이듬해인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의 시작인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직접 병사를 이끌고 에도 막부 군을 격퇴하는 등 큰 공적을 세웠고, 메이지 2년(1869년)에 상전록 1,000석을 받았다.[1]
2. 3. 메이지 정부 관료
메이지 유신 이후 참여와 탄정대 대(大)참사, 탄정소필(소丞)을 거치며 출세 가도를 달렸으나, 1870년 3월 "부실한 사정"으로 근신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근신이 풀린 뒤 민부소보 겸 대장소보, 민부대승(大丞) 등을 역임했다.1871년 오쿠보 도시미치의 추천으로 궁내대승, 궁내소보에 취임했다. 궁중 개혁에 힘쓰고 메이지 천황을 보좌하는 한편, 1873년 메이지 6년 정변에서 오쿠보를 도와 사이고 다카모리와 결별했다.
1875년 겐로인 의관, 1877년 시보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을 계기로 모토다 나가자네, 사사키 다카유키, 히지카타 히사모토 등과 함께 천황 친정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79년 3월 정부에 의해 공부소보를 겸임하며 공부성으로 옮겼다. 같은 해 10월 시보 폐지 후 공부성에 남았고, 1880년 6월 공부대보로 승진했으나, 1881년 일본 철도 회사로 전출이 결정되었다. 이듬해인 1882년 1월 공부대보를 사임하고 2월 일본 철도 사장이 되면서 잠시 관계를 떠났다.
일본 철도 사장으로서 도쿄-마에바시 간 철도 개통을 추진하며, 공사 위탁과 자금 부담을 절충하는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했다(당시 철도 기술은 정부가 독점). 착공 전 시발역 선정 문제로 철도국장 이노우에 마사루와 대립했는데, 우에노를 주장한 요시이와 달리 이노우에는 시나가와를 주장했다. 1882년 9월 우에노를 시발점으로 공사가 시작된 후에도 이노우에가 시나가와- 아카바네 간 철도 공사를 병행하며 우에노 측 선로와의 접속을 제안하자, 요시이는 자금 부족을 이유로 중지를 시도하는 등 갈등이 계속되었다. 1883년 7월, 공부경이 된 사사키를 끌어들인 이노우에에게 굴복하여 시나가와-아카바네 간 착공을 결정하며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1884년 1월 착공, 6월 25일 우에노역-다카사키역 간(현재의 도호쿠 본선 및 다카사키선)이 먼저 개통되었다. 이듬해인 1885년 3월 1일 시나가와역-아카바네역(현재의 야마노테선 및 아카바네선)도 개통되었으나, 요시이는 우에노-다카사키 간 개통 직후인 1884년 7월 사직하고, 메이지 천황의 명으로 궁내대보로 복귀했다(궁내경은 이토 히로부미). 같은 달, 유신 공로로 백작 작위를 받았다.
1886년 궁내차관에 임명되었고, 1888년 추밀 고문관을 겸임하며 대일본 제국 헌법 심의에 참여했다.
2. 4. 일본 철도 사장
메이지 14년(1881년) 일본 철도 회사로 전출이 결정되었고, 이듬해 메이지 15년(1882년) 1월 공부대보를 사임하고 2월에 일본 철도 사장이 되었다.일본 철도는 도쿄-마에바시 간 개통을 목표로, 공사를 정부에 위탁하고 자금은 회사가 부담하는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당시 회사에는 철도 기술이 거의 없어 정부가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착공 전 도쿄 방면 시발역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두고 정부 측 건설 담당자 철도국장 이노우에 마사루와 격론이 벌어졌다. 우에노를 기점으로 해야 한다는 요시이와 달리 이노우에는 시나가와를 주장했다. 메이지 15년(1882년) 9월 우에노를 시점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이노우에는 시나가와-아카바네 간 철도 공사를 병행하며 우에노 측 선로와의 접속을 제안했다. 요시이는 자금 부족을 이유로 시나가와-아카바네 간 공사 중지를 시도하는 등, 이노우에와 원만하지 않은 관계를 보였다.
메이지 16년(1883년) 7월, 공부경이 된 사사키를 아군으로 삼은 이노우에에게 굴복하여 시나가와-아카바네 간 착공을 결정하면서 대립은 종식되었다. 메이지 17년(1884년) 1월 착공, 6월 25일 우에노역-다카사키역 간(현재의 도호쿠 본선 및 다카사키선)이 먼저 개업했다. 이듬해 메이지 18년(1885년) 3월 1일 시나가와역-아카바네역(현재의 야마노테선 및 아카바네선)도 개업했지만, 요시이는 메이지 17년 7월 우에노 개업을 계기로 사직하고 메이지 천황의 임명으로 궁내대보로 복귀했다(궁내경은 이토 히로부미).
2. 5. 궁내성 복귀와 사망
메이지 4년(1871년) 오쿠보 도시미치의 추천으로 궁내대승, 궁내소보에 취임했다. 메이지 천황의 보필에 힘쓰며 궁중 개혁에 진력하는 한편, 메이지 6년(1873년) 메이지 6년 정변에서 오쿠보를 도와 사이고 다카모리와 결별했다.[4]메이지 8년(1875년) 겐로인 의관, 메이지 10년(1877년) 시보에 임명되었고, 이듬해(1878년) 오쿠보 암살을 계기로 모토다 나가자네, 사사키 다카유키, 히지카타 히사모토 등과 함께 천황 친정을 정부에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이지 12년(1879년) 3월 정부에 의해 공부소보를 겸임하게 되어 공부성으로 이동했다. 같은 해 10월 시보 폐지 후에는 공부성에 남았고, 메이지 13년(1880년) 6월 공부대보로 승진했다. 그러나 메이지 14년(1881년) 일본 철도 회사로 전출이 결정되면서, 이듬해 메이지 15년(1882년) 1월 공부대보를 사임하고 2월에 일본 철도 사장이 되어 잠시 관계를 떠났다.[4]
일본 철도는 도쿄-마에바시 간 개통을 목표로, 공사를 정부에 위탁하고 자금은 회사가 부담하는 절충안으로 공사를 진행했다(당시 회사에는 철도 기술이 거의 없어 정부가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 착공 전 도쿄 방면 시발역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두고 정부 측 건설 담당자 철도국장 이노우에 마사루와 격론이 벌어졌다. 요시이는 우에노를, 이노우에는 시나가와를 주장했다. 메이지 15년(1882년) 9월 우에노를 시점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이노우에는 시나가와-아카바네 간 철도 공사를 병행하며 우에노 측 선로와의 접속을 제안했다. 요시이는 자금 부족을 이유로 시나가와-아카바네 간 중지를 꾀하는 등 이노우에와 원만하지 않은 관계를 이어갔다. 메이지 16년(1883년) 7월, 공부경이 된 사사키를 아군으로 삼은 이노우에에게 굴복하는 형태로 시나가와-아카바네 간 착공을 결정하며 대립은 종식되었다. 메이지 17년(1884년) 1월 착공, 6월 25일 우에노역-다카사키역 간(현재의 도호쿠 본선 및 다카사키선)이 먼저 개업했다. 이듬해 메이지 18년(1885년) 3월 1일 시나가와역-아카바네역(현재의 야마노테선 및 아카바네선)도 개업했지만, 요시이는 이를 기다리지 않고 메이지 17년 7월 우에노 개업을 계기로 사직, 메이지 천황의 임명으로 궁내대보로서 궁중에 복귀했다(궁내경은 이토 히로부미). 같은 달 유신 공로로 백작에 서임되었다.[4]
메이지 19년(1886년) 궁내차관에 임명되었고, 메이지 21년(1888년) 추밀 고문관을 겸임하며 대일본 제국 헌법 심의에 참여했다.[4]
메이지 24년(1891년) 63세로 사망했다. 묘는 도쿄도 미나토구 아오야마 묘지에 있다. 요인과 주고받은 서간은 『요시이 도모자네 문서』로서 국립국회도서관 헌정 자료실에, 『미츠미네 요시이 도모자네 일기』는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되어 있다.[4]
3. 주요 관직
연도 | 직책 |
---|---|
1868년 | 징사 참여직·군무관 군방사무국 판사, 군무관 판사, 탄정대충, 탄정소필 |
1870년 | 민부소보 겸 대장소보, 민부대승 |
1871년 | 궁내대승, 궁내소보 |
1875년 | 원로원 의관 |
1877년 | 1등 시보 |
1878년 | 원로원 의관 겸임 |
1879년 | 공부소보 겸임 |
1880년 | 공부대보 겸임 |
1882년 | 일본철도 사장 |
1884년 | 궁내대보 |
1885년 | 원로원 의관 겸임 |
1886년 | 궁내차관 |
1888년 | 추밀고문관 |
1891년 | 궁내성 어용계 |
4. 서훈
수여 날짜 | 훈장 및 서훈 |
---|---|
1881년 7월 16일 | 훈2등 욱일중광장[6] |
1884년 7월 17일 | 백작[6][8] |
1889년 2월 21일 | 은제 황수포장[9] |
1889년 11월 25일 |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6][10] |
1889년 12월 27일 | 훈1등 서보장[6][11] |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장남 | 코조 | 백작, 해군 소좌, 귀족원 의원 |
삼남 | 다카시마 도모타케 | 자작, 육군 중장, 다카시마 도모노스케의 양자이자 사위 |
딸 | 사와코 | 오야마 이와오 (공작)의 부인 |
손자 | 이사무 | 코조의 아들. 백작, 시인, 각본가 |
증손자 | 시게루 | 이사무의 아들. 백작, 고라쿠엔 스타디움 지배인, 일본 야구 연맹 평의원 |
부인 요시이 도쿠코는 야나기하라 요시미쓰의 딸로, 1933년 소위 "불량 화족 사건"으로 적발되었다. 이사무는 전후까지 생존했지만, 이 사건으로 작위를 사퇴하고 은거했으며, 시게루가 작위를 이었다.
6. 인간 관계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과는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였다.[12]
; 사이고 다카모리
1869년(메이지 2년) 8월, 메이지 천황은 메이지 정부 수립에 공헌한 사이고에게 위계를 수여하려 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서류에 이름을 기재하기 위해 사이고의 이름을 알아야 했다. 당시 사이고는 하코다테 전쟁을 마치고 배를 타고 하코다테에서 가고시마로 돌아가는 중이라 부재 중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고참 동지인 요시이에게 사이고의 이름을 물었지만, 요시이는 평소 사이고를 통칭인 "기치노스케"로 불렀기 때문에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실수로 사이고의 아버지인 기치베의 휘인 "'''다카모리'''"로 보고했다. 사이고는 원복 때는 "'''다카나가'''", 후에 "다케오"로 이름을 고쳤지만, 이 사건 이후부터는 '''다카모리'''를 사용했다.[12]
세이난 전쟁 이후 사이고의 명예가 회복되지 않았을 당시, 이지치 마사하루, 이와시타 헤이, 소에지마 다네오미와 함께 기일에 극비리에 제례를 지내고, 유족을 메이지 천황에게 배알시키는 데에 힘썼다. 우에노의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설립 발기인도 요시이였다.
; 기타
데라다야 참변으로 부상당한 사카모토 료마가 교토의 사쓰마 번 저택으로 이동할 때, 그 호위를 맡았다. 이후, 사카모토의 사쓰마에서의 신혼여행에서 자택을 숙소로 제공하고, 감사의 뜻으로 "라이쿠니미츠" 단도를 받았다. 또한 료마 암살 직후 오미야로 급히 달려갔다(오미야 사건).
외유 중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유학생 시미즈 마코토에게 성냥 제조를 권했다.[13] 시미즈는 후에 일본 성냥 제조업의 시조가 되었고, 시미즈가 귀국 후 처음으로 성냥 제조를 시작한 곳은 도쿄 미타 시코쿠초(현재의 도쿄도미나토구시바)에 있던 요시이의 별저 안이었다.[13]
절친의 노후에 대한 돌봄을 유언에서 언급하며, 사쓰마 번사들 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엿볼 수 있다.
7. 등장 작품
참조
[1]
간행물
朝日新聞社
[2]
간행물
国史大辞典
朝日新聞社
[3]
서적
華族総覧
講談社現代新書
[4]
간행물
国史大辞典
朝日新聞社
[5]
간행물
国史大辞典
朝日新聞社
[6]
기타
吉井友実
https://www.jacar.ar[...]
[7]
간행물
官報
1886-10-21
[8]
간행물
官報
1884-07-18
[9]
간행물
官報
1889-02-25
[10]
간행물
官報
1889-11-30
[11]
간행물
官報
1889-12-28
[12]
기타
트리비아의 샘・사이고 씨의 이름은 「隆盛」이 아니라 「隆永」보다
[13]
웹사이트
매치의 창업
https://www.mat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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