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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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은 1835년 교토에서 태어난 일본 제국의 황족으로, 메이지 유신 시기에 총재, 동정대총독 등을 역임하며 유신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그는 육군 대장, 원로원 의장, 참모총장 등을 지내며 정치, 군사적으로 활약했고, 자유 민권 운동에 관심을 보이며 일본 적십자사 설립을 지원했다. 1882년에는 유럽과 러시아를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1895년 청일 전쟁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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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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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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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有栖川宮熾仁親王) |
출생 | 1835년 3월 17일 |
출생지 | 교토, 일본 |
사망 | 1895년 1월 15일 |
사망지 | 고베, 일본 |
별칭 | 환궁 (歓宮) |
가문 |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 (有栖川宮家) |
아버지 |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有栖川宮幟仁親王) |
어머니 | 사에키 유코 (佐伯祐子) |
계보 | 레이겐 천황의 남자 계통 5대손, 닌코 천황의 양자 |
묻힌 곳 | 도요시마오카 묘지 (豊島岡墓地) |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67년–1895년 |
계급 | 육군 대장 |
참전 | 보신 전쟁 청일 전쟁 |
주요 보직 | |
국사 어용괘 (国事御用掛) | 1864년 |
정부 총재 | 1867년 |
병부경 (兵部卿) | 1870년 - 1871년 |
후쿠오카 현령 (福岡県令) | 1871년 - 1872년 |
원로원 의장 (元老院議長) | 1876년 - 1880년 |
좌대신 (左大臣) | 1880년 - 1885년 |
참모총장 (参謀総長) | 1885년 - 1895년 |
일본 적십자사 초대 총재 | 1887년 |
육군 참모총장 |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5월 14일 1889년 3월 9일 - 1895년 1월 15일 |
이전 참모총장 |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자와 다케오 |
이후 참모총장 | 오자와 다케오 고마쓰 아키히토 친왕 |
훈장 | |
훈장 | 대훈위 국화장 경식 (大勲位菊花章頸飾) 대훈위 국화대수장 (大勲位菊花大綬章) 금치훈장 (功二級金鵄勲章)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도쿠가와 사다코 (徳川貞子) (1870년 - 1872년) 미조구치 도미코 (溝口董子) (1873년 - 1895년) |
2. 생애
1835년 교토에서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카히토 친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닌코 천황의 유자(猶子)로 입적되어 고메이 천황의 양자가 되었으며, 이후 고메이 천황과 메이지 천황의 가까운 조언자 역할을 했다.
1861년 닌코 천황의 딸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와 약혼했으나, 공무합체를 추진하던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 결정으로 파혼하고 가즈노미야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결혼하게 되었다. 다루히토 친왕은 이후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딸 사다코(貞子, 1850–1872), 시바타 번주 미조구치 나오히로의 딸 타다코(董子, 1855–1923)와 차례로 결혼했으나 두 결혼 모두 자녀는 없었다.
1867년 메이지 천황에 의해 신정부의 총재로 임명되었고, 1868년부터 1869년까지 이어진 보신 전쟁에서는 동정대총독(東征大総督)으로서 신정부군을 지휘하여 도바·후시미 전투 등에 참전하고 도카이도를 따라 진군하여 에도성의 무혈 개성을 이끌었다. 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반란군에 맞서 정부군을 지휘했으며, 이 공로로 1878년 육군 대장이 되었다.
1871년 후쿠오카 지사, 1876년부터 1880년까지 겐로인 의장을 역임했으며, 1880년부터 1885년 내각제 도입 전까지 좌대신을 지냈다. 1882년에는 메이지 천황의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알렉산드르 3세 차르를 만났다.
1889년부터 1895년까지 일본 제국 육군 참모총장과 최고 군사 회의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공식 최고사령관으로서 히로시마의 대본영에서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전쟁 중 장티푸스(또는 말라리아)에 걸려 고베 근처 마이코의 별장으로 옮겨져 요양했으나, 1895년 1월 15일 사망했다. 사망 직전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최초로 최고 등급의 국화장 금색 칼라(頸飾)를 수여받았으며[3], 1895년 1월 29일 도쿄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그의 사후 이복동생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이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을 계승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덴포 6년(1835년) 음력 2월 19일,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은 교토의 아리스가와노미야 저택에서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모는 교토 와카미야 하치만구 궁사 사사 스케요(佐々祐條)의 딸인 사에키 유코(佐伯祐子, 통칭 카나)이다. 당시 아버지 노리히토 친왕은 정실 니조 히로코와 혼인하기 전이었기에, 다루히토 친왕은 훗날 가에이 원년 9월(1848년 10월)에 히로코와 양자 관계를 맺었다. 오시치야 의식에서 "칸노미야(歓宮)"라는 아명을 받았다. 당시 풍습에 따라 그의 태는 출세 이나리 신사 경내에 묻혔고, 그 자리에는 소나무가 심어졌다.가에이 원년 음력 10월 18일(1848년 11월 13일), 이미 붕어한 닌코 천황의 유자(猶子, 양자와 유사한 관계)로 입적되었다. 이로 인해 다루히토는 당시 황태자였던 오사히토 친왕(훗날의 고메이 천황)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갖추었다. 이후 그는 고메이 천황과 그의 양자인 메이지 천황 모두에게 가까운 조언자 역할을 했다.
가에이 2년 음력 2월 14일(1849년 3월 8일),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다루히토(熾仁)"라는 휘를 하사받았고, 이틀 뒤인 음력 2월 16일(3월 10일)에 친왕 선하를 받았다. 같은 해 음력 3월 15일(4월 7일), 고노에 타다히로를 가관(加冠, 성인식에서 관을 씌워주는 역할)으로 하여 원복 의식을 치르고 다자이 소치에 임명되었다. 다음 날에는 삼품에 서임되었다. 이때부터 게이오 3년(1867년) 신정부의 총재직에 임명될 때까지 "소쓰노미야(帥宮)"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막말 관련 기록에 등장하는 "소쓰노미야 님", "소쓰노미야 어가" 등은 모두 다루히토 친왕을 지칭한다.
1861년 8월 8일, 닌코 천황의 여덟 번째 딸인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와 약혼했다. 그러나 이 약혼은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파기되었다. 막부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가즈노미야 공주를 결혼시켜 막부와 황실 간의 화해를 도모하려 했기 때문이다.
다루히토 친왕의 첫 번째 부인은 사다코(貞子, 1850–1872)로, 미토 번의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열한 번째 딸이었다. 사다코 사후 맞이한 두 번째 부인은 타다코(董子, 1855–1923)로, 시바타 번의 전 다이묘였던 미조구치 나오히로 백작의 딸이었다. 두 번의 결혼에서 자녀는 없었다.
2. 2. 막말 시대의 활동
가에이 4년(1851년), 17세의 다루히토 친왕은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인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과 약혼했다. 그러나 안세이 7년(1860년),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와 관백 구조 히사타다 등이 추진한 공무합체 정책에 따라 가즈노미야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혼인하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22일(10월 6일), 구조 히사타다가 직접 아리스가와노미야 저택을 방문하여 아버지 노리히토 친왕과 면담했다. 다음 날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은 무가 전주 앞으로 약혼 유예를 신청했고, 이는 사실상 약혼 파기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건은 훗날 소설이나 강담 등을 통해 각색되어 비련의 이야기로 널리 퍼졌다.안세이 5년 3월 12일(1858년 4월 25일), 노중 호리타 마사요시가 대외 조약에 대한 칙허를 얻기 위해 교토로 오자, 이에 반대하는 공경과 전상인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는 정신 팔십팔경 열참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 날인 13일(4월 26일), 다루히토 친왕은 단독으로 외교 거절과 조약 비준 불가를 주장하는 건백서를 조정에 제출했다. 이러한 활동과 더불어, 고모 할머니인 사치코 여왕(오리히토 친왕의 딸)이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정실이었던 인연 등으로 인해, 다루히토 친왕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공가 사회에서 산조 사네토미와 함께 조슈계 양이파의 핵심 인물로 여겨졌다.
겐지 원년(1864년) 5월 9일, 금문의 변 발생 두 달 전에 다루히토 친왕은 아버지 노리히토 친왕과 함께 국사 어용가(国事御用掛)에 임명되어 조정에 참여했다. 그는 친조슈 입장에서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나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등이 주도하는 잇칸쿠와 정권과 대립했다. 그러나 당시 양이 사상을 경계했던 고메이 천황은 다루히토 친왕의 친조슈적 언행에 불쾌감을 느끼고 관백 니조 나리유키 등에게 우려를 표하는 서한을 보냈다. 조슈 모리 가문과의 인척 관계와 확고한 존왕양이론자로서의 면모 때문에 다루히토 친왕은 잇칸쿠와 정권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금문의 변 발발 전날 밤, 다루히토 친왕은 조슈 번사의 궐기문을 가지고 아버지 노리히토 친왕과 함께 급히 입궐했다. 잇칸쿠와 정권 수뇌부가 부재한 틈을 타 나카야마 다다요시, 오기마치 산조 사네치카 등과 함께 고메이 천황에게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추방을 강요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위기를 감지한 고메이 천황이 니조 관백, 아사히코 친왕,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등을 불러들이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요시노부의 강력한 반론과 니조 관백의 거부 등 잇칸쿠와파의 저항 속에 조슈군과 어소 수비군 간의 전투가 시작되었고, 결국 조슈 번 토벌 칙명이 내려지면서 다루히토 친왕 등의 쿠데타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아리스가와노미야 부자는 즉시 잇칸쿠와 정권의 규탄을 받았다. 가신 일부는 조슈 번사와의 내통 혐의로 교토 마치 부교소에 체포되었고, 다루히토 친왕 자신도 니조 관백과 고메이 천황의 노여움을 사 아버지와 함께 국사 어용가에서 해임되고 근신 및 칩거 명령을 받았다. 아사히코 친왕 등이 사면을 탄원했으나, 고메이 천황은 용서하지 않은 채 붕어했다.
근신 기간 동안 조슈 정벌, 삿초 동맹 성립,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사망 및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 계승, 고메이 천황 붕어 등 정세는 급변했다.
게이오 3년(1867년) 1월,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자 노리히토 친왕과 다루히토 친왕 부자는 사면되어 근신에서 풀려났다. 아버지 노리히토 친왕은 정쟁을 피해 정치 활동에서 물러났지만, 메이지 천황의 신임과 조슈 등 여러 세력의 두터운 신망을 받던 다루히토 친왕은 왕정복고 쿠데타 계획을 사이고 다카모리나 시나가와 야지로로부터 사전에 전달받았다. 쿠데타 성공 후 수립된 신정부에서 총재(総裁)·기의정(議定)·참여(参与)의 삼직(三職)이 신설되자, 다루히토 친왕은 최고 직위인 총재에 취임했다.
이듬해 게이오 4년(1868년), 사쓰마와 조슈의 거듭된 도발에 구 막부군이 도바·후시미 전투를 일으키면서 보신 전쟁이 발발했다. 다루히토 친왕은 스스로 동정대총독(東征大総督) 직을 자원하여 칙허를 받았다.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보좌를 받으며 신정부군을 이끌고 도카이도를 따라 진군했는데, 초기 단계에서부터 항복을 조건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구명할 방침을 세웠다. 3월 6일, 슨푸 성에서 도카이도 선봉 총독 하시모토 사네야나와 대총독부 하참모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소집하여, 공식적으로는 에도성 공격 날짜를 3월 15일로 정하면서도, 비밀리에 요시노부의 사죄 방식, 에도성 인도, 무기 처분, 막부 신하 처벌 등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을 전달했다[7]。또한 7일과 12일에는 에도 공격 중지와 요시노부 사면을 탄원하러 온 린노지노미야 쿠니아키라 입도친왕과 회견하여 요시노부의 항복 의사를 확인했다.
다행히 다루히토 친왕이 이끈 신정부군은 도카이도 진군 과정에서 구 막부 세력의 무력 저항 없이 에도에 도착했고, 4월 11일(양력 5월 3일) 에도성은 무혈 개성되었다. 같은 날 요시노부는 사형을 면하고 근신을 위해 미토로 떠났다. 에도 도착 직후 태정관 제도가 시행되면서 삼직 제도는 폐지되었고, 다루히토 친왕의 총재직도 해제되었다.
2. 3. 메이지 유신과 정부 활동
1867년(게이오 3년) 1월,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자 아버지 노부히토 친왕과 함께 근신에서 풀려났다. 아버지 노부히토 친왕은 정쟁을 피해 정치 활동에서 멀어졌으나, 메이지 천황과 조슈 등으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던 다루히토 친왕은 사이고 다카모리나 시나가와 야지로로부터 왕정복고 쿠데타 계획을 미리 전해 들었다. 쿠데타 성공 후 수립된 신정부에서 총재·기의정·참여의 삼직 중 최고 직위인 총재(수상 격)에 취임했다.[7]1868년(게이오 4년), 사쓰마·조슈의 도발에 구 막부군이 도바·후시미 전투를 일으키며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다루히토 친왕은 동정대총독(東征大総督) 직을 자원하여 칙허를 받았다.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보좌를 받으며 신정부군을 이끌고 도카이도를 따라 진군했으며, 이 과정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기로 방침을 정했다. 3월 6일, 슨푸 성에서 하시모토 사네야나,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회의하여 에도성 공격 날짜를 3월 15일로 정하는 한편, 요시노부의 사죄 방식, 에도성 양도, 무기 처리, 막부 신하 처벌 등에 대한 구체적인 항복 조건을 비밀리에 제시했다.[7] 7일과 12일에는 요시노부의 사면을 탄원하러 온 린노지노미야 쿠니아키라 입도친왕과 만나 요시노부의 항복 의사를 확인했다.
신정부군은 도카이도 경로에서 무력 저항 없이 에도에 도착했고, 4월 11일(1868년 5월 3일) 에도성은 무혈 개성되었다. 요시노부는 사형을 면하고 미토에서 근신하게 되었다. 에도 도착 직후 태정관 제도가 시행되면서 삼직이 폐지되어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1870년(메이지 3년) 병부경(兵部卿)에 임명되었고, 1871년(메이지 4년)부터는 후쿠오카번 지사(후에 후쿠오카현 지사·현령)를 맡아 참모 카와다 카게요와 함께 태정관 지폐 위조 사건으로 혼란했던 후쿠오카를 안정시켰다. 1876년(메이지 9년)에는 원로원(元老院) 의장에 취임했다.
1877년(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가고시마현 역도 정벌 총독(鹿児島県逆徒征討総督)에 임명되어, 과거 함께 신정부군을 지휘했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적장으로 맞서는 상황에 놓였다.

세이난 전쟁 중 사노 쓰네타미와 오기우 다네(大給恒)로부터 '박애사(博愛社)', 후의 일본 적십자사) 설립 제안을 받고, 관군뿐 아니라 반란군인 사쓰마군까지 구호하려는 정신을 높이 사 이를 인가했다. 당시 구마모토의 숙소였던 구마모토 요가쿠코 교사관 제임스 저택은 일본 적십자사 발상 기념지가 되었다. 세이난 전쟁에서의 공로로 같은 해 10월 10일, 사이고 다카모리에 이어 사상 두 번째로 육군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11월 2일에는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또한 자유 민권 운동에도 관심을 보여 코노 토시카마의 안내로 응명사 연설회를 방청하기도 했다.
1880년부터 1885년 내각 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좌대신을 역임했다. 황족 중 최고 실력자로서 메이지 천황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1882년(메이지 15년)에는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에서 열린 알렉산드르 3세의 대관식에 천황의 대리 자격으로 참석했으며, 귀국길에 유럽 각국과 미국을 방문했다.
1889년부터 1895년까지 일본 제국 육군 참모총장과 최고 군사 회의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1894년 청일 전쟁 발발 시에는 일본군의 공식적인 최고사령관으로서 히로시마에 지휘 본부를 두었다. 그러나 전쟁 중 장티푸스(혹은 말라리아)에 걸려 고베 근처 마이코의 별장으로 옮겨졌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1895년 1월 15일 사망했다. 사망에 즈음하여 메이지 천황은 그에게 최초로 최고 등급의 국화장 금색 칼라(頸飾)를 수여했다.[3] 장례는 1895년 1월 29일 도쿄에서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이복동생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이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제10대 당주가 되었다.
2. 4. 청일 전쟁과 사망
1889년부터 1895년까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은 일본 제국 육군 참모총장과 최고 군사 회의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다.1894년(메이지 27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군의 공식적인 최고사령관이자 참모총장으로서 히로시마 대본영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히로시마에서 장티푸스(처음에는 말라리아로 진단됨)에 걸려, 요양을 위해 효고현 아카시군 다루미촌 마이코(현재의 고베 근처)에 있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마이코 별저(마이코 빌라)로 옮겨졌다.
증세가 잠시 호전되기도 했으나, 1895년(메이지 28년) 다시 악화되었다. 이케다 켄사이와 에르빈 폰 벨츠 등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1월 14일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을 들은 메이지 천황은 같은 날 다루히토 친왕에게 대훈위 국화장 경식 수여를 결정했다. 결국 다음 날인 1월 15일, 다루히토 친왕은 마이코 별저에서 향년 61세로 사망했다. 사망에 즈음하여 메이지 천황은 그에게 최고 등급인 대훈위 국화장 경식을 수여했는데, 이는 최초의 수여 사례였다.[3] 다음 날인 16일에는 금계훈장 공2급이 추서되었다. 공식적인 사망 발표일은 유해가 도쿄에 도착한 날인 1월 24일로 발표되었으며, 장례는 1895년 1월 29일 도쿄에서 국장으로 치러졌고 도요시마가오카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의 사망 후, 이복 동생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이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열 번째 당주가 되었다.
3. 군 경력
1867년, 메이지 천황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을 총재로 임명하고, 1868년부터 1869년까지 이어진 보신 전쟁에서 마지막 도쿠가와 막부 지지 세력과 싸우기 위해 파견된 제국 육군을 지휘하게 했다. 그는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도카이도를 따라 이동하여 1867년 5월 3일에 그의 약혼녀였던 가즈노미야 공주로부터 에도성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아리스가와노미야 친왕은 1877년의 세이난 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대에 대항하여 중앙 정부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1878년에 명예로운 육군 대장 직위를 받았다.
1889년부터 1895년까지 친왕은 일본 제국 육군 참모총장과 최고 군사 회의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1894년, 아리스가와노미야 친왕은 청일 전쟁에서 일본군의 공식적인 최고사령관이었으며, 히로시마 주둔지에 지휘 본부를 설치했다. 그는 장티푸스 (또는 말라리아)에 걸려 회복하기 위해 고베 근처의 마이코에 있는 아리스가와 궁으로 돌아갔지만, 1895년 1월 15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즈음하여 메이지 천황은 그에게 최초로 최고 국화장의 금색 칼라를 수여했다.[3] 그는 1895년 1월 29일 도쿄에서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의 이복 동생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이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열 번째 수장이 되었다.
4. 정치 및 사회 활동
1867년, 메이지 천황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을 총재 (수상에 해당하는 직위)로 임명했다. 그는 1868년부터 1869년까지 이어진 보신 전쟁에서 마지막 도쿠가와 막부 지지 세력과 싸우기 위해 파견된 제국 육군을 지휘했다. 그는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도카이도를 따라 이동하여 1867년 5월 3일에 그의 약혼녀였던 가즈노미야 공주로부터 에도성의 항복을 받았다.
1871년에는 후쿠오카 지사로 임명되었다. 1876년부터 1880년까지 그는 겐로인의 의장을 역임했다.
이후 아리스가와노미야 친왕은 1877년의 세이난 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대에 대항하여 중앙 정부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1878년에 명예로운 육군 대장 직위를 받았다.
1880년부터 1885년 내각 제도가 채택될 때까지, 아리스가와노미야 친왕은 좌대신을 지냈다. 1882년에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알렉산드르 3세 차르를 메이지 천황의 특사 자격으로 만났다.
1889년부터 1895년까지 친왕은 일본 제국 육군 참모총장과 최고 군사 회의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1894년, 아리스가와노미야 친왕은 청일 전쟁에서 일본군의 공식적인 최고사령관이었으며, 히로시마 주둔지에 지휘 본부를 설치했다. 그는 장티푸스 (또는 말라리아)에 걸려 회복하기 위해 고베 근처의 마이코에 있는 아리스가와 궁으로 돌아갔지만, 1895년 1월 15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즈음하여 메이지 천황은 그에게 최초로 최고 국화장의 금색 칼라를 수여했다.[3] 그는 1895년 1월 29일 도쿄에서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의 이복 동생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이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열 번째 수장이 되었다.
5. 기타
1867년, 메이지 천황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을 총재(수상에 해당하는 직위)로 임명했다. 그는 1868년부터 1869년까지 이어진 보신 전쟁에서 도쿠가와 막부 측 잔존 세력과 싸우는 제국군을 지휘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도카이도를 따라 진군하여 1867년 5월 3일 그의 약혼녀였던 가즈노미야 공주로부터 에도성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아리스가와노미야 친왕은 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군에 맞서는 중앙 정부군을 이끌었다. 1878년에는 명예로운 육군 대장 계급을 받았다.
1871년에는 후쿠오카 지사로 임명되었다. 1876년부터 1880년까지는 겐로인 의장을 지냈고, 1880년부터 내각 제도가 채택된 1885년까지는 좌대신을 역임했다. 1882년에는 메이지 천황의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알렉산드르 3세 차르를 만났다.
1889년부터 1895년까지 친왕은 일본 제국 육군 참모총장과 최고 군사 회의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공식적인 최고사령관으로 히로시마 주둔지에 지휘 본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전쟁 중 장티푸스(혹은 말라리아)에 걸려 요양을 위해 고베 인근 마이코에 있는 아리스가와 궁으로 돌아갔으나, 1895년 1월 15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즈음하여 메이지 천황은 그에게 최초로 최고 국화대훈장의 금색 칼라를 수여했다.[3] 1895년 1월 29일 도쿄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그의 사후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은 이복동생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이 10대 당주로서 계승했다.
아리스가와노미야 기념 공원은 도쿄도 미나토구 미나미아자부에 위치하며, 아리스가와 궁전 부지를 차지하고 있다. 광대한 정원은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은 이 궁전에서 여생을 보내려 했지만, 완공 전에 사망하여 실제로 거주하지는 못했다. 공원 내 다루히토 친왕의 기마상은 오야마 이와오, 사이고 쓰구미치,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기부로 제작되어 1903년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 정문 앞에 세워졌다가 1962년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6. 가계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은 1835년 교토에서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카히토 친왕과 사에키 유조의 딸 유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닌코 천황에게 황위 계승자로 입적되어, 오사히토 친왕(훗날의 고메이 천황)의 양자가 되었다. 다루히토 친왕은 양아버지인 고메이 천황과 그의 아들 메이지 천황 모두에게 신뢰받는 조언자였다.
1861년 8월 8일, 다루히토 친왕은 닌코 천황의 여덟 번째 딸인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와 약혼했다. 그러나 이 약혼은 당시 정치적 실권을 쥐고 있던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파기되었다. 막부는 황실과의 관계 개선을 명분으로 카즈노미야 공주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정략 결혼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다루히토 친왕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 사다코(1850–1872)는 미토 번의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딸이었고, 두 번째 부인 타다코(1855–1923)는 시바타 번의 전 다이묘 미조구치 나오히로 백작의 딸이었다. 그러나 두 부인에게서 자녀를 얻지 못했다.
자녀가 없어 관례대로라면 다른 궁가를 창설하거나 신적강하해야 했으나, 1878년 메이지 천황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 이복동생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케히토 친왕을 후계자로 삼았다. 다루히토 친왕 사후 타케히토 친왕이 아리스가와노미야를 상속했으나, 타케히토 친왕의 유일한 아들인 타네히토 왕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후사가 끊겨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은 단절되었다. 이후 다이쇼 천황의 셋째 아들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이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옛 칭호인 다카마츠노미야를 이어받아 제사를 계승하여 헤이세이 시대까지 존속했다.
참조
[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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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서
See Not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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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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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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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宮廷錄事」「彙報 - 大日本帝国憲法発布記念章送付
官報
188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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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
官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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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蔵野の露と消ゆとも('97年星組・バウ)
https://www.tca-pict[...]
宝塚クリエイティブアーツ
2021-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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