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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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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자릉은 기자조선과 관련된 유적으로, 평양에 위치해 있었으나 1959년 북한 정부에 의해 파괴되었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자동래설에 따라 고려와 조선 시대에 기자 신앙이 성행하며 기자릉이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민족주의가 대두되며 단군 숭배가 강화되고 기자 신앙은 쇠퇴했으며, 북한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기자릉을 사대주의 산물로 규정하고 파괴, 개선청년공원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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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릉
개요
기자릉의 모습
위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기림리
종류
상세 정보
한글 표기기자릉
한자 표기箕子陵
로마자 표기Gijareung
민족기자

2. 역사

기자릉은 기자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그 역사는 고대 기자조선 설화와 관련이 깊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되며, 기자는 이후 동쪽으로 이동하여 예의, 농사, 양잠, 직조 기술 등을 전파하고 범금팔조를 시행하여 백성을 교화하며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유교를 중시했던 고려조선 시대에는 기자가 한반도를 교화한 위인으로 추앙받으며 기자 신앙이 성행했다. 이 시기 기자조선수도로 여겨졌던 평양에는 기자와 관련된 여러 유적이 조성되었으며, 기자릉도 그중 하나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민족주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부각되었고, 중국에서 유래한 기자에 대한 숭배는 점차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릉은 당시 평양의 주요 명승지 중 하나로 남아 있었다.

1959년, 북한김일성은 기자릉을 봉건 지배 계급의 사대주의 산물이며 조선 민족에 대한 모욕으로 규정하고 철거를 지시했다.[3][4] 기자릉이 있던 자리는 이후 개선청년공원으로 바뀌었다.

2. 1. 고대 및 고려 시대

주 왕조의 창시자인 무왕이 은 왕조를 멸망시킨 후 기자(箕子)를 초빙하여 정치에 대해 물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박학다식함에 감탄한 무왕은 기자를 신하로 삼지 않고 조선에 봉했다고 한다. 이후 기자는 은 왕조의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예의, 농사, 양잠, 직조 기술 등을 전파하고 범금팔조를 시행하여 백성을 교화하며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설화가 있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고려 시대에 이르러, 양반 계층은 기자를 한반도를 교화한 위인으로 높이 평가하며 숭배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자조선의 수도로 알려진 평양에는 기자와 관련된 여러 유적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기자릉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유적 중 하나로 여겨진다.

2. 2. 조선 시대

유교를 숭상했던 고려에 이어 조선 시대에도 기자는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다. 당시 양반들은 기자가 조선에 문명을 전하고 백성을 교화한 위인으로 추앙했으며, 이는 기자 신앙으로 이어졌다. 기자조선수도였던 평양에는 기자와 관련된 여러 유적이 만들어졌는데, 기자릉도 그중 하나였다.

조선 시대 동안 기자 신앙은 성행했으며, 기자릉은 평양의 중요한 성소이자 명승지로 여겨졌다. 많은 유학자와 지식인들이 이곳을 찾아 기자를 기리고 배움을 논했다.

2. 3. 일제강점기

고려조선 시대에 성행했던 기자 신앙은 일제강점기 전후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단군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면서 조선 건국 시조로서의 기자의 지위는 점차 단군으로 대체되었고, 고대 중국에서 건국의 기원을 찾는 기자 신앙은 자연스럽게 쇠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릉은 당시 평양부의 주요 명승지 중 하나로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었다.

2. 4. 북한 정권 수립 이후

1959년, 북한 정부는 기자릉을 "봉건적 지배 계급의 사대주의 산물이며, 조선 민족에 대한 모욕"[3]이라고 단정한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파괴했으며[4], 그 터는 개선청년공원이 되었다.

3. 논란

기자릉은 과거 평양에 존재했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역사적 배경과 존재 자체를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있다.

기자릉의 존재 근거가 되는 기자와 그가 세웠다는 기자조선의 실존 여부는 오늘날 학계에서 주요 논쟁 대상이다.[3][4] 고려조선 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는 분위기 속에서 기자를 조선 문명의 시조처럼 여기며 평양에 기자와 관련된 여러 유적을 만들었고, 기자릉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조성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민족주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부각되었고, 중국에 기원을 둔 기자 신앙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또한, 1959년 북한김일성은 기자릉을 "봉건적 지배 계급의 사대주의 산물이며, 조선 민족에 대한 모욕"[3]이라고 규정하며 파괴할 것을 지시했다.[4] 이 지시에 따라 기자릉은 철거되었고, 그 터는 현재 개선청년공원으로 바뀌었다. 역사적 의미를 지닌 유적을 특정 정치적 이념에 따라 파괴한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제기된다.

3. 1. 기자조선 및 기자의 실존 여부

주 왕조의 무왕이 은 왕조를 멸망시킨 뒤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기자는 은 왕조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예의, 농사, 양잠, 직조 기술 등을 전파하고 범금팔조를 시행하며 백성을 교화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에 기반하여, 유교를 중시했던 고려조선 시대에는 기자를 조선 문명의 시조로 여기며 위인으로 추앙했고, 기자조선의 수도로 알려진 평양에는 기자와 관련된 여러 유적이 만들어졌는데, 기자릉도 그중 하나였다.

고려조선 시대에는 이처럼 기자 신앙이 성행했지만,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민족주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새롭게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건국의 시조로서 기자의 지위는 점차 단군으로 대체되었고, 건국의 기원을 고대 중국에서 찾는 기자 신앙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당시 기자릉은 평양부의 명소로 여겨져 많은 관광객이 찾았다.

1959년, 북한김일성은 기자릉을 "봉건적 지배 계급의 사대주의 산물이며 조선 민족에 대한 모욕"[3]으로 규정하고 파괴할 것을 지시했다.[4] 이에 따라 기자릉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개선청년공원이 들어섰다.

오늘날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기자가 실제로 동쪽으로 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과 기자조선의 실존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따라서 평양에 있던 기자릉의 진위 여부 역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3. 2. 북한의 기자릉 파괴 배경

고려조선 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는 분위기 속에서 기자를 조선 땅을 교화한 위인으로 여기는 기자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에 따라 기자조선수도로 알려진 평양에는 기자와 관련된 여러 유적이 세워졌고, 기자릉 역시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주의 의식이 고취되자,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여기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조선 건국 시조로서 기자의 역할은 점차 단군으로 대체되었으며, 중국에 뿌리를 둔 기자 신앙은 자연스럽게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릉은 당시 평양부의 이름난 명승지로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찾는 장소였다.

1959년, 북한김일성은 기자릉을 "봉건적 지배 계급의 사대주의 산물이며, 조선 민족에 대한 모욕"[3]으로 규정하고 파괴를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북한 당국은 기자릉을 철거했으며[4], 그 터에는 오늘날 개선청년공원이 들어섰다. 이러한 조치는 주체사상을 확립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려는 정치적 목적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특정 이념에 따라 역사 유적을 파괴한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따른다.

참조

[1] 웹사이트 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3)기자(箕子)묘를 찾아서 - 한韓문화타임즈 http://www.hmhtimes.[...]
[2] 웹사이트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기자, 조선에 망명'이 고려 때 '기자가 평양 왔다'로 둔갑하다 | 서울신문" https://www.seoul.co[...]
[3] 뉴스 宗岩:朝鮮的箕子陵与檀君陵 http://www.fs7000.co[...] 2015-06-05
[4] 뉴스 走出中国第一人——箕子 http://www.sdfao.gov[...] 201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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